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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인상 당선자 스크랩 [월간 수필과비평 2015년 10월호, 제168회 신인상 수상작] 미래수필의 미적 요건에 대한 탐색 - 백남오
신아출판 추천 0 조회 146 15.10.06 20:17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수세기동안 문학사를 지배해온 시, 소설, 희곡이 수필의 문장과 형식을 혼용하는 현실로 접어들었다. 나아가 수필문학은 새로운 세기를 이끌어갈 대표적인 장르로 부각하고 있다. 채굴되지 않은 원석 같은 것임이 분명하다. 수필은 미래문학의 정수리다. 이 모든 것이 사실이라 할지라도 그것을 행동으로 옮기는 일은 분명 수필가의 몫이다. 진정 한국현대 수필문학에 대한 종합적인 진단과 미학적 반성이 필요한 시점이다. 이 땅의 수필가들은 수필시대를 준비해야 한다."

 

 

 

 

 

 

 

 

 미래수필의 미적 요건에 대한 탐색       백남오


1. 들어가는 말
   많은 학자들이 인문학의 종말을 예언하고 염려한다. 앨빈커넌이 선언한 ‘문학의 죽음’이 곳곳에서 감지되고 있음도 사실이다. 미래사회의 시인은 소그룹으로 전락하거나 취미 단체에 머물 것이라는 견해는 매우 설득력이 있다. 이런 시점에서  체험을 바탕으로 하는 수필이야말로 새로운 시대 문학의 대안으로 떠오르고 있다.
   수필은 디지털 문화 환경에 가장 적합한 매체다. 수필은 절제된 언어와 서사적 재미, 극적인 스릴까지 모든 장르의 장점을 포괄하는 문학이다. 다양하면서도 개인 중심적인 사이버리즘 공간에서는 추상적인 관념이나 고도의 비유로 노래하거나, 허구적 삶의 이야기는 그 입지가 좁아질 것으로 본다. 수필시대의 서막을 알리는 징후들이다.
   문제는 이러한 디지털 환경일수록 독자의 마음에 울림을 주는 수필이 중요하다. 찰스 램의 <엘리아 수필> 몽테뉴의 <수상록> 파스칼의 <팡세>를 들먹일 필요도 없다. 우리나라 정철의 <관동별곡> 정비석의 <산정무한> 노천명의 <대동강변>은 감동적인 명수필로 회자된다. 이를 뛰어넘는 새로운 시대의 작품이 요구되는 시점이다. 예술은 늘 새로움을 창조해 가는 과정이 아닌가. 향기 있는 유머, 빛나는 위트, 냉정한 논리, 인간에 대한 뜨거운 사랑과 통찰, 찌르고 울리는 맛이 있는 영적인 수필은 어느 시대의 독자들에게도 필요한 덕목일 것이다.
   본고에서는 이러한 수필시대의 도래를 맞이하여 미래수필이 갖추어야할 미적 요건에 대해서 탐색해 보고자 한다. 이것은 또한 매우 의미 있는 일이라 생각한다.


2. 수필의 개념과 장르적 성격
   일찍이 아리스토텔레스는 “시는 자연의 모방이다.”이라 했고, 몽테뉴는 ≪수상록≫에서 “모두들 여기 내 생긴 그대로, 자연스럽고 평범하고, 꾸밈없는 별것 아닌 나를 보여주는 것”, 말하자면 ‘천품 그대로의 내 형태’라는 수필에 대한 정의를 내린 바가 있다. 알베레스는 “지성을 기반으로 한 정서적, 신비적 이미지를 형상화한 문학”이라 했으며, 비평가 루카치는 수필의 양식을 “좀처럼 붙잡기 힘든 인간 영혼의 가장 은밀한 곳에 자리 잡은 마음의 미세한 풍경을 그린다.”라고 했다.
   우리나라의 경우도 수필에 대한 많은 학자들의 정의가 있다. 오양호는 최근 ≪수필과비평≫(2015년 6월호)의 <수필, 에세이, 미셀러니>란 평론에서 난마처럼 얽혀있는 이들의 관계를 다음과 같이 학문적 고찰을 통하여 명료하게 밝힌 바가 있다. 즉,
   “미셀러니는 잡록, 잡문의 한계를 결코 벗어날 수 없는 개념이고, 수필은 장구한 세월 동안 전래해온 가장 한국적인 글쓰기에 서구의 에세이 양식이 굴절, 변용, 수용된 글이다. 결국 오늘날 우리가 말하는 ‘범칭 수필’은 ‘수필에 에세이를 더한’ 개념이다.”
   조동일은 3분법 체계였던 서정, 서사, 극이라는 전통적인 문학 장르로는 우리 문학의 여러 하위 장르를 포괄할 수 없다는 인식에서 ‘교술敎述’이라는 제4의 장르를 추가하며 가사, 경기체가, 전기, 가전체, 수필을 여기에 편입시키게 된다. 조동일은 <자아와 세계의 소설적 대결에 관한 시론>(1974)에서 문학작품은 ‘자아’와 ‘세계’의 대립적 구조로 보았다. 이때 자아는 ‘나’라는 주체이며, 세계는 ‘자아에 대립’되어 있는 상대방의 포괄적 개념으로 설명하며 다음과 같이 장르의 성격을 규명한다.

 

  1) 서정(시): 세계의 자아화(작품 외적세계 개입 없음)
  2) 서사(소설): 자아와 세계의 대결(작품 외적자아 개입)
  3) 극(희곡): 자아와 세계의 대결(작품 외적자아 개입 없음)
  4) 교술(수필): 자아의 세계화(작품 외적세계 개입)

 

   ‘세계의 자아화’가 시이고, ‘자아와 세계의 대결’이 소설과 극이라면, 수필은 ‘자아의 세계화’로 설명될 수가 있다는 말이다. 세계를 자아화 시킨다는 시는 세상의 논리를 완전히 자기 주관으로 판단하고 해석한다는 것이며, 자아와 세계의 대립이라는 소설과 극은 세계와 화합하지 못하고 끝없이 부딪치고 갈등한다는 의미다. 자아를 세계화 시킨다는 수필은 자신을 접고 세계의 질서에 편입시킨다는 뜻이다. 이 논리로 본다면 시인, 소설가, 수필가는 서로 겹쳐질 수가 없다는 사실이다. 그 뿌리와 성정이 전혀 별개로 출발되기 때문이다. 여기서 작품 외적자아는 작품을 즐기는 ‘독자’이고 작품 외적세계는 우리가 실제로 부딪치는 ‘실제적 현실’로 보면 된다.
   이렇게 수필은 대표적인 ‘교술’ 장르로 자리매김하게 되었다. 이때 ‘교’란 정보를 알리거나 주장한다는 것이고, ‘술’은 사실이나 경험을 서술한다는 의미이며, 가르치고 서술한다는 뜻을 가진 ‘교술’은 실재 존재하는 사실에 충실하고 될 수 있으면 그 사실을 다른 층위로 전환하지 않고 서술하는 방식이다. 실제로 존재하는 세계를 있는 그대로 기록하여 전달하는 것을 기본원리로 삼는다. 작품 외적인 것이 작품에 그대로 들어와 있는 현상을 교술의 속성이라 할 수 있다. 현실, 즉 실제적 세계를 작가의 상상력에 의해 굴절시키지 않고, 있는 그대로 작품화 시키는 글쓰기다. 따라서 일상의 세계가 지닌 고유한 의미를 보존하는 범위 안에서 작품으로 재편성되는 것이 교술의 본질인 것이다.
   조동일의 논리에 따를 경우 교술은 비문학이 된다. 이것이 수필의 태생적 한계이지만 수필은 엄연한 문학이다. 따라서 여기에는 새로운 해석이 필요하다. 그러니까 “체험과 기록성에 바탕을 둔 문학이다.”라는 의미부여가 가능하다. 교술문학인 수필은 그 기록된 경험적 사실을 해석하는 행위라고 보면 된다. 그것을 가능하게 하려면 문학적 형상화를 시도해야 하고 철학적 사색을 넘어 영적인 단계까지 승화시켜야 한다. 물론 이때 교술적 속성은 문학적 형상화를 약화시키는 요소로 작용하게 된다. 이것이 수필창작의 어려움이요 역설적으로 그 묘미이기도 하다. 이러한 형상화 과정에서 시의 함축성이나 소설의 서사와 묘사를 빌려올 수 있는 열린 자세가 필요한 것이다.


3. 미래수필에서 요구되는 미적 요소
   작가의 꿈은 좋은 작품 한 편 남기는 일이다. 그 한 편의 작품이 독자에게 깊은 감명을 주고 인류에 회자되는 생명력을 가진 작품이기를 소망한다. 문장에 생명력이 있다는 것은 그것이 언제 읽어도 가치 있는 글로 다가섬을 의미한다. 가령 어떤 글이, 과거에 씌어 진 것이지만, 단순히 과거를 기억하는 데 그치지 않고, 바로 오늘을 살기 위해 절실히 요구되는 글이 있다. 말하자면 영원한 현재성을 간직하고 있다는 말이다. 이런 글이야말로 좋은 글이고 젊은 글이라 할 수 있다.
   최동호는 ≪수필과비평≫(2015년 3월호)과의 대담에서 정신주의를 설명하는 과정에서 생명력 있는 작품의 요건을 언급한 적이 있다. 즉 “고전적 명시들은 모두 구조적인 견고성을 가지고 있다. 그것은 ‘주체-대상-매개물’이라는 삼각형으로 요약된다. 이 구조가 견고하기 때문에 지속적이고 반복적 생명력을 갖는다.”라고 설명했다. 오양호 역시 노천명의 <대동강변>이란 수필을 분석하는 과정에서 ‘수필이 시처럼 읽히는 구조를 가지고 있다.’는 지적을 함으로써 최동호의 견해를 뒷받침해 주고 있다.
   방민호는 “글을 잘 쓰는 사람은 한 편을 써도 찌르고 울리는 맛이 있으나, 그렇지 못한 사람은 아무리 많이 써도 무딘 칼이요, 못 맞힌 과녁이다.”라고 ≪모던수필≫(향연, 2003)에서 피력한 바 있다. 같은 책에서 좋은 산문의 요건으로 “산문은 모름지기 겨울에 살에 와 닿는 눈송이처럼 구체적이고 감각적이고 새롭고 독하고 아름다워야 한다. 이러한 글은 많지 않다. 그러한 글이야말로 영원한 현재성을 가진다.”라고 주장했다.
   흔히들 좋은 글이라면 정확성, 명료성, 타당성, 일관성, 진실성, 독창성을 말한다. 어휘, 부호, 상징, 띄어쓰기, 문장, 단락, 일화 등을 조화시켜 자연스러운 서술이 되도록 해야 한다. 문맥이 어렵거나 까다로우면 읽기가 힘들다. 훈계조에 속하는 글은 바람직하지 못하다. 전문적인 지식용어, 외래어, 사자성어, 인용문을 지나치게 빌려오는 것도 좋지 않다. 겉모양만 아름다운 미문도 피해야 한다. 유식하고 잘난 체하거나, 자만심이 느껴지면 더욱 좋은 글이라고 할 수 없다. 탁월한 문학적 장치를 갖추었다 할지라도 이야기의 구조와 문장력이 뒷받침되지 못하면 기억되기 어렵다.
   이러한 기존의 개념들을 고려하여 볼 때 미래수필에서 요구되는 미적요건의 핵심은 무엇일까. 몇 가지 요소를 제시해 보고자 한다.


1) 시대의 핵심을 관통하는 주제의식
   어떤 글이든 독자에게 흥미와 관심을 불러일으킬 수 있는 주제를 선택해야 한다. 독자의 관심을 끌지 못하는 주제는 이미 죽은 주제이다. 무명작가의 사소한 일상이나 개인적 신상에 관한 소재는 독자들의 관심을 끌지 못할 것이다. 사실 이것은 매우 중요한 문제다. 왜냐하면 “사소한 일상을 통한 깨달음”이란 보편적 수필의 개념에 정면으로 배치되는 개념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구체적인 방안은 무엇일까. 적어도 책상머리에서 머리로 짜내는 관념적인 수필은 적절하지 못하다. 미래수필은 전문적인 삶의 현장을 담은 수필시대가 열릴 것이라 본다. 이미 그런 시대에 접어들었다. 가령, 고래를 잡는 일, 나무를 키우는 일, 꽃을 탐색하는 일, 세계를 일주하는 일, 전국을 도보로 걷는 일, 한국의 미를 찾아나서는 일 등이 새로운 시대의 핵심적인 주제의식이다. 이런 전문적인 일을 할 수가 없다면 여행이라도 떠나서 자신만의 고유한 세계를 만들어내야 한다. 그것을 소재로 한 수필을 독자는 갈구한다. 또한 그러한 주제가 작품집 전체를 관통해야만 한다. 그래야만 독자를 확보할 수 있을 것이라 믿는다.
   이것은 전 장르에 해당되는 담론이기도 하다. 박경리의 대하소설 ≪토지≫, 조정래의 ≪태백산맥≫, 이병주의 ≪지리산≫, 김주영의 ≪객주≫, 최명희의 ≪혼불≫을 생각해 보면 그 답은 명확해진다. 이들은 이 소설의 완성을 위해 생애를 바쳤고 그 결과 이 작품들은 우리 문학의 커다란 산맥을 이루어 문학사에 영원히 남게 될 것이다. 수필도 이 같은 작품이 요구되는 시대로 접어들었다고 본다. 다음 수필을 한번 보자.

 

   휴전이 되던 해 음력 정월 초순께, 해가 설핏한 강 나루터에 아버지와 나는 서 있었다. 작은증조부께 세배를 드리러 가는 길이었다. 강만 건너면 바로 작은댁인데, 배가 강 건너 편에 있었다. 아버지가 입에 두 손을 나팔처럼 모아 대고 강 건너에다 소리를 지르셨다.
   “사공-, 강 건너 주시오.”
   건너편 강 언덕 위에 뱃사공의 오두막집이 납작하게 엎드려 있었다.

-목성균의 수필 <세한도> 부분

 

   물론 나룻배는 건너오지 않았고 아버지는 두 번 다시 그 소리를 지르지도 않으셨다. 힘겨운 시대를 견뎌온 아버지의 완고함과 어느 정도 사람이 모여야 배를 움직인다는 사공의 자존심과의 이념적 대치라고도 볼 수 있다.
   목성균 수필가는 57세가 되던 해인 1995년 ≪수필문학≫으로 등단하여 10년 만인 2004년, 수필집 ≪명태에 관한 추억≫을 남겨놓고 세상을 떠났다. 짧은 활동 기간이었지만 그는 한국수필의 전통과 품격을 격조 있게 발전시킨 작가로 평가된다.
   위 <세한도>의 시간적 배경은 휴전이 되던 음력 정월 초순께로 제시되고 있다. 이 시기는 우리 민족의 현대사에서 궁핍하고 척박한 고난의 시기다. 윤리마저 붕괴된 혼란의 시대다. 이 작품이 발표된 2003년은 한 세기가 다하고 새로운 세기가 도래하는 이념적 혼란기다. 이러한 역사적 전환기를 작품의 배경으로 삼은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라 작가의 철저한 주제의식에서 비롯된 것이다. 사소한 일상의 소재가 아니라 민족사적 현장에서 그 보편적 가치를 추구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 작품은 네 개의 세한도를 통하여 주제를 구현하고 있다. ① 추사의 세한도를 바탕에 깔고 ② 아버지의 세한도 ③ 사공의 세한도 ④ 나의 세한도가 그것이다. 아버지로 상징되는 구시대의 전통윤리와 사공으로 상징되는 현실적 이기주의가 충돌하는 과정에서 ‘나’는 경계인으로서 두 사람의 갈등 원인을 변증법적으로 해석한다.
   결국 이 작품의 주제는 결말 부분인 “엄동설한 저문 강변에 세의를 지고 꿋꿋하게 서 계시던 분의 모습이 보인다.”에서 암시된다. 이는 냉엄한 시대현실인 동시에 전통윤리를 올곧게 지키려던 모습이기도 하다. 또한 화자에게는 삶을 이끄는 길잡이이자 추구하고자 하는 보편적 질서가 되는 것이다. 이와 같이 평생을 두고 일관되게 관통하는 주제야말로 미래수필의 담론이다.

 

2) 원형(Archetype)의 탐색과 동화적인 상상력
   문학은 가치 있는 인간 체험의 표현이다. 가치는 희귀성으로 평가되고 희귀성은 특이성으로 나타난다. 이 특이성을 개성이라 할 수 있다. 개성은 문학의 본질이며 생명이다. 객관적인 환경은 인류에 공통한 것이다. 그러한 공통적인 요소들은 문학에서 보편성으로 나타난다. 개성과 보편성은 서로 분리할 수 없는 문학의 성질들이다. 문학은 또한 기록이다. 그것은 문학의 항구성을 의미한다.
   개성을 문학의 생명이라고 한다면, 보편성은 그 육체이며, 생명과 육체가 결합하여 문학으로서의 기능을 발휘하는 항구성은 그 생리라 말할 수 있다. 보편적이며 독자에게 공감을 일으키는 주제를 선택해야 한다.
   문학의 원초적 형태를 신화(mythos)로 보고 문학작품에 내재하는 신화를 추출함으로써 작품의 구조 원리와 그 심층적 의미를 설명하려는 노력은 이미 있어왔다. 이름하여 신화원형비평이다. 여기서 핵심적인 개념은 원형(Archetype)이다. 원형은 원초적인 이미지이며 집단무의식의 일부이기도 하다.
   결국 문학작품의 창작은 원형을 창조해내는 일이라 생각한다. 원형은 시대를 초월하고, 공간을 뛰어넘어 모든 인간이 가지고 있는 보편적인 정서라 할 수 있다. 그리하여 영원한 인류의 고향이요 향수라 할 수 있다. 이것은 또한 동화적인 것과도 연결되어 있다고 보면 된다. 한국의 고전이란 한국인이 공감하는 정서를 반영한 것이고 세계적 고전이란 세계인이 공감하는 정서를 반영한 작품이 되는 것이다.
   적어도 한편의 작품을 창작할 때는 이러한 보편성과 원형에 대해 반드시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이라 생각한다. 그래야만 독자들은 그것이 마치 ‘나의 이야기’인양 감동하게 될 것이다.

 

   마른 고사리풀 뜯어다 길섶에 눕히고, 청태콩눈 몰래 뽑아다 콩서리 해 먹고 그 자리에 찌익 오줌을 깔기고 돌아서면 마냥 재미있던 장난, 그래도 아무도 꾸짖는 이 없던 그곳, 산을 내릴 때 산등성이의 노을 달려와 우리들의 그림자 길게 길게 늘어 잡던 곳……, 나의 기억 속에 펼쳐지는, 구겨진 생각들이다.
   고향은 지워지지 않고, 잊어버릴 뿐. 

-유경환의 수필 <고향을 이루는 생각들> 부분

 

   사람은 누구나 향수에 젖어 산다. 그렇다고 모든 사람들이 구체적인 고향이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럼에도 고향을 꿈꾸는 것은 인간의 원초적인 본향이기 때문이다. 위에서 인용한 유경환의 수필은 유년의 추억을 통한 고향에 대한 간절한 그리움이 묻어난다. 그 시대를 살았던 독자들 또한 같은 추억을 공유하고 있다. 그러기에 함께 아파하고 그리워한다. 이처럼 문학작품이란 고향을 찾아가는 여정 같은 것이 아닐까.

 

3) 리듬이 깔린 수필
   리듬은 운문만의 전유물이 아니다. 좋은 산문은 반드시 리듬이 깔린다. 리듬이란 정연한 흐름을 의미한다. 그 흐름은 감정일 수도 의미일 수도 이미지일 수도 있다. 리듬은 불규칙한 세계에 대한 질서를 부여하고자하는 인간 본연의 욕망이라고 할 수 있다. 어떤 대상에 대한 흥미와 아름다움을 느끼게 해 주는 요소인 동시에 일을 원활하게 진행할 수 있도록 돕는 윤활유 같은 것이다. 조화롭지 못하거나 단조로운 흐름은 우리의 감각을 불편하게 한다. 그리하여 글이나 이야기에 자연스러운 리듬이 있어야 함은 당연한 것이다. 시에서는 외형률인 외부리듬은 낭송의 맛을 더해주고 내재율인 내부리듬은 정감의 깊이를 단단하고 알차게 만든다.
   윤오영은 ≪수필문학입문≫에서 “시적 내재율이 다시 승화되고 변화되어 은밀하게 물소리와 같이 흐르는 산문의 운향韻響”이 있다고 했다. 좋은 문장은 물소리처럼 흐르는 세련된 리듬이 깔린 자연스러운 문장이다. 수필문장이 소설문장과 다른 점도 바로 이런 리듬에서 발견된다. 문장에 적절한 리듬이 있으면 문장의 밀도가 높아지고 독자들은 부드러운 문맥의 흐름에서 미적인 쾌감을 느끼게 된다.
   글에서 리듬이라는 것은 모든 문학 장르에서 간과할 수 없는 것이 주지의 사실이다. 산문에서 더구나 수필에서는 지금까지 그 중요도에 비해 다소 소홀히 생각되었음을 누구도 부인하지 못할 것이다. 어쩌면 수필에서 리듬이 주는 생동감과 미학적 깊이의 확대를 알지 못했거나, 무시한 탓이 아닌가 생각된다. 리듬을 효과적으로 사용하여 독창적이고 특징적인 세계를 펼쳐 보일 때 수필의 경지를 한 차원 끌어올릴 수 있다.
   그렇다면 문장에 리듬의 효과를 내기 위해서는 구체적으로 어떤 방법이 있을까. 음수율과 음보율, 산행수필의 경우 심장박동과 발걸음의 속도 호흡까지 문장 속에 접목, 문장의 길이로 서술속도 조절, 동어반복을 피하고 조사나 접속사 서술어 어미 등에 변화를 주는 방법, 의도적인 단문과 리듬을 위한 쉼표, 불필요한 수사나 지난한 묘사를 과감히 절제한 문장 등 그 방법은 다양하다. 문제는 필자 나름대로 자기만의 독특한 리듬을 개발해 가는 치열함과 실험정신이 중요하다. 주제와 소재에 따라 적합하고 적절한 리듬을 찾아내는 일은 창작의 중요한 일부라는 사실을 명심해야 한다.

 

   울며 소맷귀 부여잡는 낙랑 공주樂浪公主의 섬섬옥수纖纖玉手를 뿌리치고 돌아서 입산入山할 때에, 대장부의 흉리胸裡가 어떠했을까? 흥망興亡이 재천在天이라, 천운天運을 슬퍼한들 무엇하랴만, 사람에게는 스스로 신의信義가 있으니, 태자가 고행으로 창맹蒼氓에게 베푸신 도타운 자혜慈惠가 천 년 후에 따습다.

-정비석의 수필 <산정무한> 부분

 

   <산정무한>은 우리에게 너무나 익숙한 ‘국민수필’이라 할 수 있다. 이 익숙함은 리듬에서 오는 것이다. 3-4음보로 반복되는 이 운율감은 국어교과서에서 만났던 가사와 시조의 전통적인 리듬에서 이어진 것이다. 이러한 친숙한 리듬감에 낭만적인 마의태자의 역사적 일화까지 결합되니 내면 깊숙이 묻어두었던 문학적 감수성이 표출되는 것이 아니겠는가.

 

4) 탄탄하고 개성적인 문장력
   아무리 좋은 소재와 주제를 갖추었더라도 문장력이 뒷받침되지 못한다면 문학작품으로 성립하지 못한다. 문장 그 자체가 문학성과 연결된다. 문학작품에서 교훈적인 경구는 별 의미가 없다. 작가가 아무리 좋은 명구를 작품 속에서 말한다 할지라도 공자 맹자만큼이야 하겠는가. 감동적이고 교훈적인 내용은 도덕책 속에 얼마든지 있다. 문학작품은 작가의 개성적인 문장력을 바탕으로 삶을 구체적으로 보여주는 형상화가 이루어져야 한다.
   이 시대 수필가의 사명감 중 하나는 문학적 향기가 묻어나는 격조 있는 문장을 창출하는 일이다. 수필문장은 산문이면서도 소설과 다르고 함축과 리듬을 중시하면서도 시와는 확연히 구분된다. 수필은 본성적으로 산문인 소설과 운문인 시의 중간적 속성을 취하고 있다. 이러한 수필문장의 특성은 예로부터 전통적으로 계승된 문장론의 유산이란 점을 주목해야 한다. 그것은 고려조와 조선조를 거쳐 근현대에 이르는 동안 무수한 시행착오를 거쳐 이어져온 고귀한 미덕으로 볼 수 있다.
   수필문장은 고도로 세련된 아이러니의 변증법을 통해 독특한 문장미학을 구축한다. 그것은 고도의 장인적 수련과정을 통해서 얻을 수 있는 달관의 문장술이다. 안성수는 ≪수필오디세이≫(수필과비평, 2015)에서 “수필문장은 표면적으로는 산문성, 소박성, 평이성, 담백성, 간결성, 보편성, 사실성 등을 내세우지만 심층에서는 운문성, 격조성, 세련성, 심오성, 함축성, 개성, 진실성 등을 요구한다.”라고 강조한다. 매우 공감이 가는 지적이다. 이 같은 문장미학은 반어적 구조 속에서 변증법적으로 통일시킴으로서 낯설게 하기의 미적 효과는 물론 독특한 문장의 질감과 말맛을 창조해내게 된다.
   이러한 경지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낱말의 선택, 풍부한 어휘의 구사력은 필수다. 문장성분과 호응관계, 구조의 이해에서부터 다양한 문장 작법에 이르기까지 절차탁마가 있어야 한다. 그래야 감칠맛 나게 하고 글의 품위와 격이 상승된다. 문장이 곧 사람이라는 말은 이를 두고 하는 말이다.

 

   돌산도 향일암 앞바다의 동백 숲은 바닷바람에 수런거린다. 동백꽃은 해안선을 가득 메우고도 군집으로서의 현란한 힘을 이루지 않는다. 동백은 한 송이의 개별자로서 제각기 피어나고, 제각기 떨어진다. 동백은 떨어져 죽을 때 주접스런 꼴을 보이지 않는다. 절정에 도달한 그 꽃은, 백제가 무너지듯이, 절정에서 문득 추락해 버린다. ‘눈물처럼 후드득’ 떨어져 버린다.

-김훈의 수필 <자전거 여행> 부분

 

   위에 인용된 김훈의 수필을 자세히 살펴보면 아무리 좋은 단어나 명구가 있을지라도 작품 속에 더 이상 들어갈 틈은 없다. 이미 완벽하게 직조된 원단과 같다. 작가의 손을 떠난 작품은 더 이상 뺄 말도 넣을 어휘도 있어서는 안 된다. 완성된 건축물에 다른 벽돌이 필요 없는 것처럼 말이다. 김훈의 수필문장은 감각적이다. 평이한 것처럼 보이지만 고도의 비유가 숨어 있다. 그것이 독자를 끌어당기는 힘이다. 이처럼 자기만의 문장을 만들어 가야 하는 과정이 필요한 것이다.

 

5) 끊임없는 실험정신
   창작이론에 절대 왕도는 없다. 글쓰기는 이론으로 쓰는 것이 아니다. 창작과 이론의 관계는 상호보완적이다. 창작이론에 따라 글을 쓰기도 하고 문학작품을 통하여 창작이론이 만들어지기도 하는 관계이다. 따라서 작가는 이론에 개의치 않고 다양한 실험정신으로 창작활동을 해보는 것이 중요하다.
   실험수필이라고 해서 문학성을 파괴하는 것이 아니다. 어떤 경우라도 문학의 보편성과 항구성, 개성은 영원하고도 절대적인 것이다. 그러한 문학성을 지키기 위하여 다양한 실험을 시도해 보는 것임을 잊어서는 안 된다. 수필의 실험은 궁극적으로 장르의 발전을 선도하고 독자에게 보다 더 바람직한 미적감동을 제공하는데 두어야 한다.
   실험이라는 것은 형식의 변화라고 본다. 가령 고정적인 13-15매 수필분량을 파괴하는 것도 그 하나일 것이다. 소재의 성격에 따라 3매, 5매, 7매, 30매 수필도 얼마든지 가능하다고 본다. 또한 기존의 구성 방법을 탈피해서 과감하고 새로운 구성도 필요할 것이다. 시적 구성, 소설적 구성, 극적 구성, 그 어떠한 실험적인 방법도 가능하다는 말이다. 김유섭은 <작품 안의 논리와 밖의 논리>(수필미학, 2014)라는 평론에서 작품 밖의 논리에서 미래수필의 창작방법을 찾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무슨 종류의 유희인지 유희는 유희인 모양인데, 이 권태의 왜소矮小 인간들은 또 무슨 기상천외의 유희를 발명했나.
   오 분 후 그들은 비키면서 하나씩 둘씩 일어선다. 제각각 대변을 한 무더기 씩 누어 놓았다. 아- 이것도 역시 그들의 유희였다. (중략)
   나는 이 대소大小 없는 암흑 가운데 누워서 숨 쉴 것도 어루만질 것도 또 욕심나는 것도 아무것도 없다. 다만 어디까지 가야 끝이 날지 모르는 내일 그것이 또 창밖에 등대等待하고 있는 것을 느끼면서 오들오들 떨고 있을 뿐이다.

-이상의 수필 <권태> 부분

 

   이상의 <권태>는 글 안에 논리가 드러나지 않는다. 그것은 글 밖에 있다. 이 수필에서 작가가 드러내고자 하는 주제는 글 밖에 있다. 곳곳에 유머적 상황을 배치해 글에 감칠맛이 나게 하면서도 평화로워 보이는 산촌의 삶이 사실은 아무런 희망이 없는 권태의 삶에 지나지 않는다는 논리를 글 밖에 세워두었다. 말하자면 일제강점기의 산촌 사람들의 삶이라는 것이 흥미도 재미도 희망도 없는 권태 그 자체라는 말이다. 이처럼 무거운 논리를 글 밖에 세워둠으로써 독자의 가슴으로 다가오는 수필의 새로운 영역을 개척한 것이다.
   중요한 것은 어떻게 하면 독자에게 시선을 끌고, 감동을 주고, 그 속에 빠져 들어가게 할 것인가가 문제이다. 좋은 글은 자신의 감정과 생각을 잘 나타낸 글이 아니라 독자의 감정과 생각을 잘 배려한 글이라는 사실을 명심해야 한다.


4. 나오는 말
   이상에서 미래수필에서 요구되는 미적 덕목을 탐색해 보았다. 그것은 ① 시대의 핵심을 관통하는 주제의식 ② 원형탐색과 동화적인 상상력 ③ 리듬이 깔린 수필 ④ 탄탄하고 개성적인 문장력 ⑤ 끊임없는 실험정신으로 요약된다. 이러한 요건들이 유기적으로 결합되고 구조적 견고성을 갖출 때 이상적인 수필로 볼 수 있다는 것이다.
   수필은 문학의 한 갈래로서 당당하게 자리한다. 문학의 큰 갈래인 서정, 서사, 극, 교술 중 교술의 중심에 있다. 어떤 측면에서도 그 영역이 확고하다. 결국 수필이란 “작가가 체험을 통한 철학적 깨달음을 교술성을 바탕으로 한 수필적 구성과 문장으로 형상화한 가장 인간적인 문학” 이라는 것이 필자의 견해다.
   오늘날 등단 수필가는 5천 명을 넘어서고, 수필전문지도 30종이 더 된다. 그럼에도 수필이 푸대접을 받고 있다는 생각을 지울 수는 없다. 중앙일간지의 신춘문예에 수필은 제외된다. 대중적인 큰 문학상을 수필가가 받았다는 얘기를 들어본 적도 없다. 시대의 흐름을 역행하는 일들이지만 수필가에게 그 책임이 없는 것은 아니다.
   이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수필가들이 안주해서는 안 된다는 점이다. 치열한 작가정신이 요구된다. 다양하게 수필의 소재를 찾고 구성에 대해 고민해야 할 것이다. 수필의 미적울림이 감성과 이성의 눈을 뛰어넘어 본질적 깨달음을 통한 영적靈的울림까지 승화될 수 있어야 하며 실험적이고 새로운 수필로 독자들을 감동시켜야 한다. 그래야만 수필문학의 견고한 위치가 나오고 미래문학의 총아로서 우뚝 서게 될 것이다.
   수세기동안 문학사를 지배해온 시, 소설, 희곡이 수필의 문장과 형식을 혼용하는 현실로 접어들었다. 나아가 수필문학은 새로운 세기를 이끌어갈 대표적인 장르로 부각하고 있다. 채굴되지 않은 원석 같은 것임이 분명하다. 수필은 미래문학의 정수리다. 이 모든 것이 사실이라 할지라도 그것을 행동으로 옮기는 일은 분명 수필가의 몫이다. 진정 한국현대 수필문학에 대한 종합적인 진단과 미학적 반성이 필요한 시점이다.
   이 땅의 수필가들은 수필시대를 준비해야 한다.

 

 

 

백남오  ---------------------------------------------------------
   경남대 국어교육과 및 동대학원 국문과 졸업. 2004년 ≪서정시학≫ 수필 등단. ≪고등학교 국어≫ 교과서에 <겨울밤 세석에서> 수록. ≪고등학교 문학≫(지학사) 교과서 저자. 작품집으로 ≪지리산 황금능선의 봄≫, ≪지리산 빗점골의 가을≫, ≪지리산 세석고원의 여름≫. 경남문학 주간. 마산대 ‘수필창작교실’ 지도교수.

 

 

 

당선소감


   대학에서 ‘수필창작론’을 강의한 지 꼭 3년째가 되는 해입니다.
   문학작품의 창작이란 것이 이론과 직접적인 관련이 없다 할지라도 무관할 수도 없습니다. 다양하고 풍부한 시와 소설의 이론에 비해 수필은 객관화된 통설이 미미하고 학자들마다 각기 다른 목소리를 내고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수필은 미래문학의 새로운 대안으로 떠오르고 있다는 사실이 변함없는 저의 신념입니다.
   이러한 현실에서 가장 시급한 문제는 반듯하고 객관적인 수필이론을 정립하는 일이라 생각합니다. 이번 평론도 그런 노력 중의 하나입니다. 의욕만 앞세운 부족한 글임에도 ‘문학평론가’란 명예로운 위상을 주신 심사위원님과 ≪수필과비평≫사에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 변함없는 열정으로 수필문학의 발전을 위해 노력하라는 채찍과 격려로 받아들입니다.
   저는 앞으로도 수필만 쓰고 수필의 격을 높이는 일에 역량을 다하고자 합니다. 이 일은 ‘백남오 수필창작교실’ 문우들과 함께 이루어갈 것입니다.
   초가을 햇살이 눈부시게 빛나는 아름다운 아침입니다. 새로운 세계에 대한 설렘이 온몸 속으로 퍼지는 듯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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