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상님께, 산신령님께
할아버지는 몸이 불편하여 누워 계셔도, 틈틈이 내가 알 수 없는 긴 주문을 외우셨다. 지금 생각하면 아마도
‘불경’인 것 같다.
‘김연석 본가입납(本家入納)’이라고 한자로 쓴 봉투를 열면 언제나, “부모님 전상서. 그동안 부모님 기체후
일향만강하옵시며, 대소댁 두루 평안하옵신지요”로 시작되는 숙부님의 명필 편지를 읽을 수 있었다.
공무원인 숙부님은 내가 레알(진정) 존경하는 명필이시다.
객지에 나간 자손들이 우환이 있다는 편지를 읽어드리면, 할아버지는 바로, 소반에 물 한 그릇 올려놓고
조상님께 비셨다. 나는 옆에서 쉬지 않고 절했고, 할머니는 절을 안 하셨다.
여자는 절하지 않는 풍습. 차례 때고 제사 때고 음식만 바쉈지 뭐. 어머니가 그걸 많이 섭섭하게 생각하셨다.
5남1녀 손주 낳은 며느리면 이 집 귀신이 되는 건데, 왜 조상님, 특히 애환서린 시아버님 전에 약주도 한 잔
못 올리는가, 법도가 맘에 안 들어 하셨어.
그러다 언제던가 결국 우겨서(?) 잔을 올리셨지. 덕분에 숙모님도 잔을 올리시고. 잘못된 법도를 어머니가 깨신 거야.
할머니는 ‘산(山) 멕이기’를 하셨어. 동네 동북쪽 산 즉, ‘밤고개’ 동쪽 산 꼭대기에는 큰 소나무 몇 그루가 남아 있었어.
그 산에 오르면 바다와 교가 맹방이 다 내다 보여.
산판(山坂)으로 나무를 베어도 산꼭대기 소나무는 냉개놨사(남겨놓았다). 마을에서 공동으로 사용하는 산멕이기
Holy wood(신목 神木)이니까.
날을 받아 징을 든 복자(卜者)를 산에 모셔, 산꼭대기 너른 곳에 음식을 차리고 제를 올리는데, “징징징징” 징을 나지
막하게 때로는 높게 두드리며 가족의 안녕과 복을 빌었지.
의식의 마지막에는 소지 올리기를 했고, 어린 마음에도 얇은 종이가 잘 사롸지면서(타 없어지면서) 하늘하늘 하늘
높이 올라가면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더군.
집에서 하는 그런 기원 덕분에 객지에 나간 부모형제들이 건강하게 살 수 있었던 것 같다.
친구 제균에 따르면, 그의 고향 오리동에서는 근산에 올라가 산멕이기를 했는데, 제사가 끝날 때 떡을 산에다
여기저기 막 던졌대. 산이 먹으라고. 그게 진짜 산멕이기다. 그러면 아이들이 그 떡을 찾아 주워 먹었다고. 애들이
신나게 신(神)이 되는 행사였지.
정월대보름
아침이면 할머니가 건네 주시는 호두로 부럼 깨기를 하고 집을 나서면, 반갑게 내 이름 부르는 이 있어 “응”하고
대답하지. 그러면 기회를 놓칠세라 재빠르게 “내 덕 사라!”고 해.
그게 표준말로는 ‘내 더위 사라!’인 것 같은데, 나는 ’덕’이라 들었어. 남에게 더위 사라 하면 좋은 일이 아니니,
덕을 사라 한 것일까? 발음이 비슷해서 내가 잘못 안 것 같다.
“응”하고 대답하면 정말로 더위인지 덕(德)인지를 산 것일까? 잘 모르겠어.
이 나이 되도록 아직도 모르는 게 이리 많아.
대보름날은 아무튼 좋았어. 우선 밥이 내가 제일 좋아하는 오곡 차조밥. 갖은 나물에, 맛있는 고사리 들어간 무
챗국에, 마른 이까(오징어)와 그 귀한 소고기 몇 점에 무우를 깍두기로 썰어 넣어 푹 때린(달인) ‘탕’에, 명태-가재미-
가오리-상어랑, 짭짜부리하게(약간 짠) 말린 바닷고기 먹는 날이니 기분이 좋아. 나도 장난삼아 다른 친구에게
내 덕 팔면서 웃고 떠들고….
이날 낮에는 동네 농악대가 농악을 놀았어요.
꽹가리-북-징-장구-“버꾸야 올라라!”의 버꾸춤-상구 돌리기 등 복장을 갖춘 동네 아저씨들 농악대가 무릉동
38가구 집집마다 돌면서 한바탕 농악을 놀아주고, 지신을 밟아주셨어.
꽹가리 하나만 가지고도 온 산천이 찢어지는데, 시골 동네가 들썩 들썩했지 뭐.
생각해 봐. 적적한 산골에 그게 얼마나 사람 사는 것처럼 신나게 만들었을지를!
산도 들썩, 나무도 펄럭, 춤추고 싶어지는 신명나는 우리 농악이잖아?
이제는 끊어진 풍습. 그 땐 쉽게 접하면서 즐기던 농악이, 요즘은 사물놀이 구경도 어려워.
지금 시골에서는 농악을 가르쳐 줄 아저씨나 할아버지도, 배울 젊은이도 없으니, 이끌(이을) 수 없는 전통이 되었어.
예전에는 나이 좀 들면, ‘구경’이 아니라 ‘직접 노는 거’ 였는데….
그 정월대보름제는 요즘 삼척시에서는 기줄다리기, 사직제, 천신제, 해신제, 산신제 등 전국에서도 손꼽히는 유명한
전통놀이가 되었다.
첫댓글 처음 들어보는 산메기 놀이이네요
네. 산에다 산신령님께 제사지내는 겁니다.
나도 직접 참여한 적이 있는 행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