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월 28일
지프차를 타고 북으로 가는 동안 놀랄만한 피난민 물결로 우리는 거의 밖으로 밀려나듯 했다. 이런 피난민 대열 속에 수천 명의 한국 군인들이 뒤섞여 있었다.
비록 그들은 패배하여 기진맥진해 있었지만 대부분은 우리가 지나가자 손을 흔들고 많은 사람들이 환성을 질렀다. 우리는 거의 모든 군인들이 무기를 가지고 있었으며 소총이나 카빈총에 작은 한국 국기를 달고 가는 것을 보고 깊은 감명을 받았다. 소총, 카빈, 권총, 그리고 심지어 브라우닝 자동소총까지도 각자 가지고 내려오고 있었다.
그들은 패전한 군대였으나 겁에 질린 부대는 아니었다. 그들은 후퇴하고 있었으나 궤주(潰走)하고 있지는 않았다. 그들이 필요한 것은 누군가가 재집결시켜 명령을 내리고 식사를 마련해 주는 것이었으며 그러면 다시 전투부대가 될 수 있었다.
민간인들 역시 군복을 입은 두 명의 미군 장교를 태우고 가는 우리 지프차를 보고 환성을 지르고 박수를 쳤다. 우리가 북으로 가는 동안 이처럼 끊임없는 박수와 환성이 뒤따랐다. 이 가련한 피난민들은 아직 희망을 가지고 우리 존재가 자기 나라의 궁극적인 승리와 평화로운 귀향을 상징하는 것으로 믿었다.
보병학교에서 4,5천명의 군인들이 질서정연하게 연병장에 정렬해 있거나 앉아있는 것을 보았고 장교와 하사관들이 그들 사이를 돌아다니며 명령과 지시를 내리고 재편성을 하고 있는 것을 보았다. 우리는 정확한 숫자를 셈할 수 없었는데 왜냐하면 수많은 병사들이 학교 정문을 통해 흘러 들어오고 있었으며 헌병과 장교 또는 특별순찰대들이 길거리에서 정처 없이 방황하는 낙오병들을 발견하는 대로 안내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전 육군사관학교 교장 김홍일 소장이 자기 책임 아래 부서진 군대를 재편성하고 있었다. 내가 만난 중 가장 멋있는 사람 가운데 한 사람인 김 장군은 미소로 그어지는 잔주름과 반백의 머리칼로 인해 어디서나 눈에 띠었다.
그는 2차 대전 중 국부군 장군으로 종군한 적이 있으며 다만 그의 계급과 위치로 보아 필요한 군사지식의 기초가 다소 약한 것으로 생각되기도 했다. 전전(戰前)에 보다 유능한 젊은 장교들이 배출되면 그를 자연스럽게 군에서 퇴역시키자는 얘기도 있었다.
그러나 이런 위기 상황에서는 이처럼 충성스럽고 애국적인 군인이 2성 장군으로서 현역에서 봉사할 수 있었다는 것이 대한민국을 위해 다행스런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김 장군은 그때 패전시기에 만난 모든 군인들, 바로 그 불길한 수요일 보병학교 연병장으로 끌려온 군인들을 일일이 만나보고 격려했다.
확고부동한 일단의 젊은 장교들의 도움을 받아 그는 부대를 재편성하고 북으로부터 패주해온 와해된 2사단, 수경사, 3, 5사단의 잔류병들을 할 수 있는 데까지 재무장 시켰다. 1사단은 단절되어 종내 소식을 들을 수 없었고 6사단과 8사단은 동부에서 잘 싸우고 있었다.
그날 아침 아무 목표 없이 패배에 낙심하여 남쪽으로 걸어오던 병사들은 그날 밤이 되기 전에 다시 전투하러 북으로 진군했다.
바로 그 우울한 날 김 장군이 보여준 것 같이 군사적 패주 속에서 즉각 재편성하는 역량과 지도력을 보여준 장군들이 군 역사에 얼마나 많은지 의심하지 않을 수 없다.
<비록 이승만 박사와 미국대사관 Embassy At War> 해롤드 노블 p82-8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