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제도와 아미산 감천문화 마을을 둘러보며/전 성훈
계절의 여왕이자 여행의 계절인 5월의 첫 날, 자석에 철가루가 찰싹 달라붙듯이, 이른 새벽 에 소리 소문도 없이 집을 나섰다. 혼자 갈 수 없는 신체적 어려움으로 아내, 딸, 큰여동생, 그리고 장모님까지 함께한 2박3일간 여인천하 여정에 동행하였다.
새벽에 집을 나서 영등포 큰동생 집으로 향하였다. 연휴임에도 생각 밖으로 길이 한산하게 뻥 뚫린 내부순환도로를 신나게 달렸다. 큰동생을 태우고 고속도로에 들어서자 어느새 고속도로는 수많은 자동차들로 말 그대로 주차장으로 변해버렸다.
어렵게 수원 처가에 도착하여 장모님을 모셨다. 첫 목적지인 거제도에 가려고 경부고속도로를 거쳐서 대전-통영간 고속도로를 이용하였다. 대전까지는 너무나 길이 막혀서 많은 인내력과 자제력이 필요하였다. 다행히 함께한 여장부들이 자녀, 친척, 여성 옷차림, 연예가 소식 등 온갖 세상살이의 이야기꽃을 끊임없이 피워냈다. 덕분에 때때로 수줍은 동백꽃 향기처럼 은은하거나 들깨처럼 고소한 미소를, 또는 해바라기처럼 활짝 핀 웃음소리에 지루한 줄 모르고 거제도에 도착하였다.
딸아이가 찾아낸 간장게장과 간장새우, 양념게장 전문 음식점에서 식사를 했다. 처음 먹어본 간장새우는 매우 환상적이었다. 생새우도 여러 번 먹어 보았지만 간장에 절인 새우(대하)는 독특한 맛이 있었다. 간장 냄새와 약간의 비린내가 잘 조화를 이루며 흐물흐물 씹히는 그 맛, 막걸리 생각이 간절하였다. 그러나 이 집에서는 술을 팔지 않아서 아쉬움을 참아야 했다. 기분 좋은 포만감으로 근처 몽돌해변을 거닐고 나서 매스컴에 소개되었던 거제도 바람의 언덕을 찾았다. 몽돌해변에서 약 7km정도 되는 거리에 있는 그곳까지 자동차로 한 시간 30분이나 걸려서 자동차가 거의 서 있다시피 하였다. 좁은 해안 도로이기에 자동차를 뒤로 되돌리기도 어려운 곳이었다. 다리가 아파서 ‘바람의 언덕’ 정상까지 올라가지 못하니 소태를 씹은 기분이었다. 그림이나 사진으로 멋있는 곳이 실제로 ‘아하’ 하고 감탄사가 저절로 나오는 곳은 그리 많지 않은데 바람의 언덕도 역시 그렇다.
거제도 구경을 마치고 부산에 있는 아내의 외사촌 집으로 향하였다. 말로만 듣던 ‘거가대교’를 건넜다. 해저터널을 지나가는데 해수면하 46m, 35m라는 안내표시가 보였다. 인간의 한계가 어디까지인지 정말 대단한 역사(役事)라는 생각이 들었다. 다리 이름을 거가대교보다는 가거대교라고 했으면 발음하기가 훨씬 편하고 쉬울 것 같았다. 사람들의 지역 이기심에 자연스러운 이름을 붙이지 않은 것에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다. 부산 시내에 접어들어 집을 찾는데 상당히 애를 먹었다. 자동차 네비게이션을 이용하여도 야간에 단독주택이나 연립주택의 정확한 위치를 찾기가 그리 쉽지 않았다. 친척들이 찾아온다고 늦은 시각에 저녁을 준비해 놓은 부부의 정성에 정말로 진한 감동을 받았다. 주말에 귀중한 시간과 경제적인 부담을 지면서 마음을 담아 누군가를 배려하는 그 모습에 저절로 머리가 숙여졌다. 과연 나도 다른 이를 위하여 이렇게 할 수 있을까? 진수성찬에 소주와 맥주를 곁들이며 즐거운 시간을 가졌다. 장시간 운전을 하였고 술을 마신 탓에 피로감이 엄습하여 눈꺼풀이 점점 무거워졌다. 평소에는 집을 떠나면 잠을 잘 이루지 못하는데도 깊은 꿈속에 빠져 곤한 잠에 들었다.
다음 날에는 부산 사상구 감천동 문화마을을 찾았다. 통영의 동피랑 마을과 거의 비슷한 모습인데 동피랑 마을보다는 규모가 크고 체계적으로 개발한 느낌이 들었다. 바다를 옆으로 끼고 아미산 속에 폭 빠져 있는 감천 마을. 마치 암탉 품안에 다소곳이 숨어있는 병아리 형제들처럼 다닥다닥 서로 붙어있는 조그마한 집들. 예전부터 잘 아는 것처럼 친숙한 모습으로 내게 다가왔다. 그 모습은 어렸을 때 한 시절을 살았던 서울 삼양동 산동네와 아주 흡사하여서 아련한 추억이 떠올랐다. 물지게를 지고 뒤뚱뒤뚱 땅만 내려다보고 걸어서 집에 도착하여 물통을 내려놓고 보면 거의 반 정도 흘려버렸던 삼양동 달동네.
아미산 주변에 소위 달동네가 자리를 잡은 바로 6.25전란 직후부터라고 한다. 전란의 와중에 부산까지 피란을 온 이북 피란민들이 아미산을 지붕삼아서 생활 터전을 일구었던 것이다. 부산지역의 여러 달동네 중에서 아직도 옛 모습을 잘 간직하고 있다고 한다. 이곳은 경제적인 관점에서 보면 경제개발의 투자 우선 수위에서 상당히 뒤져있었던 오지였음이 틀림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감천동 문화마을 전경이 바라보이는 곳에서 잠시 서성거리다가 하필이면 이곳에다가 판자촌을 형성하고 살았을까 하는 상념이 떠올랐다.
아미산(蛾眉山)은 본래 중국 도교와 불교의 성지이고 보현보살의 성지로도 알려진 곳이다. 보현보살은 문수보살과 함께 석가모니불을 좌우에서 모시는 보살로 유명하다. 보현보살은 부처께서 중생을 제도하는 일을 돕고 중생들의 목숨을 길게 하는 덕을 가졌다고 한다. 불교가 중국을 통하여 삼국시대 우리나라에 전래되면서 우리나라 여러 곳에 아미산이라는 산 이름이 생긴 것 같다. 곤궁하기 짝이 없었던 전란 통에 불쌍한 중생들이 믿고 의지하면서 하루하루 연명할 수 있도록 부처님의 가피를 얻었을 수 있었던 보금자리가 아미산 감천(甘川)마을이 아니었을까하는 생각이 들었다.
감천동 문화마을에 외국인 관광객을 포함하여 많은 사람들이 다녀가고 있다. 그러나 이곳에 살고 있는 분들은 관광객으로 인한 각종 소음과 불편한 생활환경으로 고생하며 지낸다. 우리나라 어느 곳이나 관광지로 이름이 알려지면 생기는 부작용들이다. 이런 문제점을 슬기롭게 극복하고 잘 조화시켜서 그 곳에서 사시는 분들에게 경제적인 혜택이 돌아가도록 하는 방안, 그들의 마음을 위로해 줄 수 있는 방안을 마련하는 것이 우리들 몫이 아닐까 (2015년 5월 연휴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