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 평 세 홉 아틀리에
김 회 직
빌라촌 맨 끝 도로변에 위치한 아홉 가구의 적벽돌 3층 건물이다. 고급 빌라는 아닐지라도 주변 상권이나 위치가 좋아 여러 가지로 살기에 편리한 중급 정도는 된다고 할 수 있겠다. 특이한 것은 가구마다 지하실 한 칸씩이 딸려있다는 점이다. 비록 네 평 세 홉에 불과한 비좁은 공간이지만 어느 집에서는 잡다한 살림살이를 보관하는 창고로 쓰기도 하고, 또 어떤 집에서는 내부구조가 원룸과 별반 다르지 않다며 월세 임대수익을 올리기도 한다.
이사를 오고 난 며칠 뒤 그 작은 지하공간 출입문에 「會直畵室」이라고 새긴 정방형 나무 간판을 내걸었다. 그리고 아침나절에 두어 차례 점심 먹고 나서 또 두어 차례, 그렇게 하루 몇 번씩을 들락거렸다. 벽걸이 에어컨이 설치되어 있기는 하나 반지하실이어서 선풍기 바람만으로도 극한 무더위를 견뎌낼 수 있었다. 대문 앞 멀리까지 시원스럽게 탁 트인 들녘과 옛 고향집의 새파란 잔디마당이 문득문득 떠오르지만 어쩌겠는가? 자식들에게 의지할 수밖에 없는, 무심한 세월이 안겨준 마지 못할 선택인 것을...
창가에 올려놓은 FM 라디오에서 피아노 소리가 조용조용 들려왔다. 모차르트 피아노 협주곡 21번 제2악장 “새근새근 아가 자장가”란다. 화려함보다는 듣는 즐거움과 자연스러운 아름다움에 초점이 맞춰졌으며, 잔잔하게 흐르는 현악기 반주 위에 단순하면서도 깊은 피아노 선율이 조화를 이루는 명연주의 협주곡이라고 했다. 차분하고 세심한 목소리의 아나운서 해설로 음악을 듣기가 훨씬 수월했고, 35세의 젊은 나이로 요절한 천재 작곡가 모차르트의 음악 세계 또한 조금은 이해할 것 같았다.
작은 공간일수록 집중 감이 더해진다고 했는가? 음악감상이 그러한 것처럼 비좁은 지하공간에서 캔버스를 마주하는 것이 다른 장소일 때보다 더욱 심오해지는 느낌이었다. 길쭉한 철제 보안 창문이 남쪽 벽을 반이나 차지하고, 서쪽은 출입문이 있어 그림을 제대로 걸 수 있는 공간이 동쪽과 북쪽뿐이다. 창문 턱 밑으로 2~4호 그림 다섯 점과 창문 옆에 8호짜리 한 점을 걸었더니 남쪽 벽은 더 이상의 공간이 생기지 않았다. 벽걸이 에어컨 옆으로 20호 한 점을 걸고, 동쪽 벽은 원형 캔버스 하나와 15에서 60호에 이르는 그림 여섯 점을 걸었다. 북쪽은 10~15호짜리를 위아래로 여덟 점을 배치해서 모두 스물두 점이 걸려 있다. 팔레트를 비롯한 각종 그림 도구를 올려놓은 탁자와 이젤, 앉아서 작업할 수 있는 회전의자 그리고 벽을 따라 비스듬히 기대놓은 캔버스까지 그야말로 발 들일 틈이 없다. 아무리 그렇더라도 피곤하면 잠깐잠깐 누워서 휴식을 취할 수 있게 작은 소파 하나는 들여놓았다.
야산이든 심산유곡이든 예나 지금이나 내가 추구하는 것은 오직 산이다. 때로는 만개한 꽃 무더기를 화폭에 올려 몇 날 며칠 수많은 꽃잎과 씨름을 하지만 가파른 산줄기나 구불구불한 산자락을 거칠게 그려나갈 때는 마치 나 스스로가 깊은 산중을 헤매고 있는 기분이다. 꽃 무더기든 산자락이든 비록 짧은 시간이지만, 무아지경으로 빠져들었을 그때가 나는 너무 좋다. 어쩌면 그런 삼매경에 잦아들고 싶어 네 평 세 홉의 작은 아틀리에를 자주 찾게 되는지도 모른다.
오늘따라 하늘이 높다. 멀리 일본 오키나와로 방향을 틀어 북상한다는 태풍 '크로반'의 영향 때문인지 간간이 불어오는 바람결에도 선선함이 묻어있다. 드디어 가을이 오고 있는 모양이다. 무지막지했던 찜통더위가 기력을 다했으니, 무더위로 한동안 밀어두었던 아침 산책을 다시 시작해야겠다. 고향에서처럼 텃밭 가꾸기 같은 쏠쏠한 재미를 누릴 수 없다면 그에 버금가는 소일거리라도 만들어야 할 것이 아닌가?
서리풀공원이 시작되는 길목 입구의 작은 공원, 가로수가 울창한 대로변을 따라 폭은 좁고 길이만 길게 조성된 쉼터다. 세무사 길이라고 이름 붙은 이곳에 하늘 걷기, 물결 타기, 허리 돌리기, 등 지압기, 사이클, 상체 근육 풀기, 오금 펴기 등 일곱 종류의 운동 기구가 설치되어 있다. 게다가 100여 미터는 족히 될법한 맨발 길에서 보드라운 진흙을 밟기도 하고, 돌밭 위를 걸으며 발바닥 지압 운동도 할 수 있다. 운동이 끝난 후 발을 닦아낼 수 있는 세족 시설이 되어 있음은 물론이다.
아주 특별한 삶을 살아가는 노인이 왜 없겠느냐만 대부분의 하루 일정이 다 거기서 거기인 듯싶다. “아침에 걷기운동 겸 산책을 하고, 집에 들어와 TV를 보거나 혹은 밖에서 지인끼리 어울려 몇 마디 나누다 보면 벌써 점심나절이다. 외식으로 대충 점심을 때운 후 어찌어찌하다 보면 또 한나절 훌쩍 지나간다.”라는 것이 도시 노인들의 하루 보내기인 듯하다. 나 역시도 예외는 아니어서 온종일 아무런 재미없이 그럭저럭 보내는 날이 태반이다.
내게 네 평 세 홉의 아틀리에 마저 없다면 이 따분한 도시 생활을 어찌 견딜 수 있을까? 다른 사람들처럼 시도 때도 없이 불러낼 막역한 친구도 없거니와 그렇다고 나를 불러줄 지인도 없으니 말이다. 캔버스 앞에서 라디오를 친구 삼아 하루 중 거의 절반을 보내는 이 작은 공간이 그렇게 소중하고 고마울 수가 없다.
오늘은 날씨도 화창하고 선선해서 아침 산책이 끝나면 지하 작업실 구석구석을 말끔하게 청소라도 좀 해놔야겠다. 혹시 아는가? 생각지 못했던 반가운 손님이 불쑥 찾아올는지.
<네 평 세 홉 지하 아틀리에>
첫댓글 「會直畵室」예술 공간을 감상하는 독자의 마음이 따뜻해집니다.
산과 꽃을 좋아 하시는 문필가 화백님.
창가에 올려놓은 FM 라디오에서 피아노 소리가 조용조용 들려온다는 표현에서
화백님의 잔잔하면서도 따뜻한 정서가 느껴집니다.
윤회장님, 그간 안녕하셨는지요.
고향 떠나 이곳에 온지 한 달이 넘었습니다. 30여년을 시골에 살다가 도시로 오니 모든 게 삭막하기만 합니다.
하는 일이 없어 몸은 편하지만 마음이 불편합니다. 나름대로 노력은 하고 있지만 언제쯤이나 돼야 이곳 생활에 익숙해질는지 모르겠습니다. 좋게 읽어주시고 보아주셔서 감사합니다. 좋은 계절 행복한 나날 되시기를 빕니다. 안녕히 계세요.
그래도 타향살이 무사히 잘 적응하셨군요. 아틀리에도 마련하셨으니 많은 위안이 될듯 합니다. 어디서든 예술로 승화시키는 선생님, 좋은 작품 기대합니다. 늘 건강부터 챙기시구요~^^
박회장님, 그간 안녕하셨는지요.
누구나 살다 보면 거기에 맞는 삶을 살아가게 되는 모양입니다. 더구나 나이가 나이인지라 당연히 세월을 따라가야겠지요.
아주, 정말 아주 작은 공간이지만 그 공간으로 하여 하루 보내기가 덜 따분한 듯하네요. 보아주시고 염려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추석명절 잘 보내시고, 내내 행복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