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진정한 감사_참사를 참사로 막는 세대의 감사는?
마태복음 11:16-19
16. "이 세대를 무엇에 비길 수 있으랴?
17. 마치 장터에서 아이들이 편 갈라 앉아 서로 소리지르며 '우리가 피리를 불어도 너희는 춤추지 않았고 우리가 곡을 하여도 가슴을 치지 않았다.' 하며 노는 것과 같구나.
18. 요한이 나타나서 먹지도 않고 마시지도 않으니까 '저 사람은 미쳤다.' 하더니
19. 사람의 아들이 와서 먹기도 하고 마시기도 하니까 '보아라, 저 사람은 즐겨 먹고 마시며 세리와 죄인하고만 어울리는구나.' 하고 말한다. 그러나 하느님의 지혜가 옳다는 것은 이미 나타난 결과로 알 수 있다."
오늘은 추수감사절입니다. 오늘 이 시대의 진정한 감사의 의미가 무엇인지를 다시 한번 새기는 시간이 되길 바랍니다.
우리가 읽은 본문은 흔히 장터의 비유라고 알려진 예수님의 말씀입니다. 이 비유를 잘 이해하려면 11장 전체를 자세히 살펴볼 필요가 있죠.
마태복음 11장은 예수님의 정체가 무엇인지 밝히면서(2-6) 시작합니다.
세례요한은 예수님이 한 일을 감옥에서 전해 듣고 제자들을 보내어 "오시기로 되어 있는 분이 바로 선생님이십니까? 그렇지 않으면 우리가 다른 분을 기다려야 하겠습니까?" 하고 묻게 합니다.
예수님은 너희가 듣고 본 대로 요한에게 가서 알리라고 하시죠. 그 내용은 "소경이 보고 절름발이가 제대로 걸으며 나병환자가 깨끗해지고 귀머거리가 들으며 죽은 사람이 살아나고 가난한 사람들에게 복음이 전하여진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면서 ”나에게 의심을 품지 않는 사람은 행복하다"고 말씀하시죠.
‘예수가 오실 메시아’냐는 세례요한의 질문에 마태는 ‘가난한 사람들의 삶을 해방시키며 하늘나라의 복음을 전하는 사람이 예수’라고 증언하고 있는 겁니다.
그 다음에 나오는 것은 세례요한에 대한 예수님의 평가(11:7-15)입니다.
“일찍이 여자의 몸에서 태어난 사람 중에 세례자 요한보다 더 큰 인물은 없었다. 그러나 하늘나라에서 가장 작은이라도 그 사람보다는 크다"라는 것이죠. 그리고 ”"세례자 요한 때부터 지금까지 하늘나라는 폭행을 당해 왔다. 그리고 폭행을 쓰는 사람들이 하늘나라를 빼앗으려고 한다. 그런데 모든 예언서와 율법이 예언하는 일은 요한에게서 끝난다“고 말씀합니다.
이 말씀의 의미는 메시아와 함께 오게 될 하늘나라는 요한이 기대했던 그런 나라와는 전혀 다른 나라임을 가르쳐 줍니다. 즉 이 세상 나라에서 요한은 가장 위대한 사람이지만 하늘나라에서는 가장 작은 자가 될 뿐이라는 것이죠. 이것은 이 세상 나라의 질서와 하늘나라의 삶의 방식이 전혀 다르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또 하나는 ‘모든 예언서와 율법이 예언하는 일은 요한에게서 끝난다’는 것입니다. 구약의 율법과 예언의 시대는 요한에게서 끝나고 예수와 함께 이제 새로운 시대, 하나님 나라가 도래했다는 것을 선포하는 구절입니다. 그런데 요한이 예비하고 예수님과 함께 가난한 자들에게 지금 이 자리에 주어진 하늘나라를 무자비한 자들이 폭력으로 빼앗으려 한다는 겁니다.
이 이야기 후에야 드디어 ‘장터의 비유(16-19)’가 설해집니다. 그리고나서 회개하지 않는 고을들, 곧 고라신과 벳새다, 가버나움에 대한 경고와 심판이 이어집니다.
장터의 비유를 말씀하기에 앞서 예수님은 ‘이 세대를 무엇에 비길 수 있으랴?’는 질문을 청중들에게 던집니다. 즉 지금부터 말하는 장터의 비유는 ‘이 세대‘에 대한 비유라는 것이죠. 장터에서 악을 쓰며 싸우는 아이들과 같은 모습이 ’이 세대‘라는 말입니다.
’세대‘라는 표현은 구약성서의 관용적 표현으로 ’사람들‘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그러니 '이 세대'는 곧 '이 사람들'인데, 성서에서 '이 세대'라는 표현은 대개 부정적 색깔의 부류의 사람들을 말합니다(참조, 시 24:6; 78:8; 95:10; 신 32:5; 렘 7:29). 따라서 '이 세대'는 예수님이 살던 '동시대의 사람들 모두'가 아닌 예수님의 하늘나라 복음에 응답하지 않고 배척한 부류의 사람들을 가리킨다 하겠습니다. 즉 제사장, 사두개인, 바리새인과 율법교사 등이 이에 해당하겠죠.
또한 '이 세대'는 예루살렘과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습니다. 예루살렘에서 '특권적' 지위를 갖고 있던 부류들을 뜻하죠. 그들의 가식적이고 폭력적인 삶을 지칭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다음으로 생각해 볼 것은 ’장터‘라는 공간에서 벌어진 일입니다. 장터는 아고라(agora)입니다. 장터 또는 광장으로도 번역합니다. 예수 시대 아고라는 열린 공간이었습니다. 이곳에서는 논쟁이 벌어지고 재판이 행해졌습니다. 사람들이 모여 물건과 지식을 교환하고 때로는 법정이 세워지기도 하였죠.
그런데 비유에는 장터에서 서로 편을 갈라 싸우는 아이들이 나옵니다. 이들의 싸움은 부산하게 움직이는 아이들의 놀이가 아니라 앉아서 소리를 지르는 싸움입니다. 마치 법정에서 상대를 위협하고 고발하는 행위를 연상케합니다. 그 고발의 내용은 이렇습니다. '우리가 피리를 불어도 너희는 춤추지 않았고 우리가 곡을 하여도 가슴을 치지 않았다'는 거죠.
피리를 불고 춤을 춘다는 것은 혼인 잔치를 상징하는 말입니다. 혼인은 유다인들에게 가장 큰 잔치였죠. 혼인 잔치(마태 22,1-13; 요한 2,1-2)는 일주일에서 열흘까지 신랑, 신부와 하객들이 함께 지내면서 행해졌습니다.
’우리가 곡을 하여도 너희는 가슴을 치지 않았다’는 것은 장례의 이미지입니다. ‘가슴을 치다’는 동사는 슬픔을 표출하는 행동을 나타내는데, 성경 안에서 이 행동은 죽은 이를 애도하는 것에 사용됐고(창 23:2), 참회를 나타내는 것에도 사용되었습니다(마 24:30). 세월호 참사나 이태원 참사가 일어나면 가슴을 치며 곡을 해야 하는데 그렇지 않았다는 겁니다.
학자들은 이 혼인 잔치와 장례식의 이미지가 하늘나라의 복음을 전하는 예수님과 회개를 선포하던 세례요한에 대한 상징으로 생각합니다. 이는 뒤따르는 예수님이 해석이 뒷받침해 주고 있습니다.
”요한이 나타나서 먹지도 않고 마시지도 않으니까 '저 사람은 미쳤다.' 하더니 사람의 아들이 와서 먹기도 하고 마시기도 하니까 '보아라, 저 사람은 즐겨 먹고 마시며 세리와 죄인하고만 어울리는구나'라고 말한다(18-19.“는 것이죠.
장터에서 편을 갈라 싸우는 아이들의 모습을 통해 예수님은 하늘나라 복음 선포에 적대적인 자들에 대한 좌절감을 표출하고 있습니다.
결혼식 축하 자리인데, 풍악이 울리면 응당 하객들은 춤추며 기쁨을 같이해야 하는데 그렇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또 장례식 자리에서 슬프게 곡을 하면 함께 가슴을 치며 슬퍼해 주어야 하는데 조객들이 그러지 않았다는 거죠.
즉 자신이 선포하는 하늘나라 복음에 부정적이고 반대하는 당대의 많은 사람들에 대한 실망과 좌절을 예수님은 장터 아이들의 놀이로 표현하였던 것입니다.
예수님과 세례요한은 각자가 생각하는 하나님 나라를 선포합니다. 세례요한은 종말론적인 하나님 나라를 선포하죠. 그에 반해 예수님은 지금 여기에 이루어지는 자유와 해방의 하나님 나라를 가르칩니다. 미래가 아닌 현재에 이루어지는, 함께 나누고 섬기는 평등과 평화의 나라말입니다.
세례요한은 종말론적 하나님 나라를 맞이하기 위해 먹지도 않고 마시지도 않는 금욕주의적인 생활을 했습니다. 그는 광야에 살면서 메뚜기와 석청을 먹었고 가공하지 않은 엉성한 낙타가죽 옷을 입었죠. 그런 그를 보며 예루살렘의 상류층들은 ‘귀신들렸다, 미쳤다’고 비판합니다.
그에 반해 예수님은 지금 이 자리에 이루어지는 하나님 나라를 함께 즐기기 위해 가난한 사람들과 먹고 마셨습니다. 그런 예수님을 두고 바리새인과 율법학자, 예루살렘의 제사장과 귀족들은 ‘즐겨 먹고 마시며 세리와 죄인하고만 어울린다’고 비판합니다.
이 비판은 신명기 21장 20절에 먹고 마시는 자를 ‘완악하고 패역’한 자요 ‘방탕한 자’라고 표현한 구절에 근거하고 있습니다.
그런 비판에 대해 예수님은 장터에서 노는 아이들의 비유를 들어 그들의 비판을 되받아친 것입니다.
지금 세계는 엄청난 위기를 겪고 있습니다. 코로나 펜데믹,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미·중 패권 경쟁은 글로벌 경제를 파탄으로 몰고 가고 있습니다. 에너지와 식량 등 세계적인 공급망 위기와 인플레이션에 기름을 붓고 있는 형국이죠. 게다가 미국의 급격한 금리 인상은 환율 공포와 경제 침체를 야기하며 개발도상 국가들을 사지로 몰아가고 있습니다.
우리나라도 예외는 아니죠. 우리 정부는 경제위기뿐 아니라 정치와 안보 불안, 이태원 참사 등 재난과 국제 정세 요인까지 함께 대응해야만 하는 상황이기에 더욱 난감한 처지입니다.
오마이뉴스에 연재하는 정책 칼럼 [넥스트브릿지] 50화의 제목은 <대통령 취임 6개월, 한마디로 정리하면 '참사 돌려막기'(2022. 11. 16)>였습니다.
이 칼럼에서 송석현 운영위원장은 우리가 직면해 있는 위기에 대한 윤석열 정부의 대처는 수수방관이며 '참사 돌려막기'라고 진단합니다.
송석현 위원장은 이런 위기 상황인데도 집권세력발 경제참사가 일어나고 있다고 개탄합니다. 요약해 보면 이렇습니다.
<“김진태 강원도지사의 한마디에 '레고랜드 사태'가 터졌다. 레고랜드 사태 이후 한국전력공사, 한국도로공사, 철도공단 등 AAA급 공채마저도 발행예정량 미달 및 유찰이 이어졌다.
레고랜드 사태로 기업들은 채권발행을 할 수 없어 높은 금리의 은행·증권사 대출 의존도를 높이고 있다. 건설사와 부동산 PF에 활발히 참여했던 증권사·투자사들의 부실 위험도 커지고 있다. 레고랜드 사태는 기업하기 나쁜 나라, 일하기 힘든 나라를 만들고 있다. 한마디로 집권세력발 경제참사다.
그러나 정부는 강원도지사의 채무불이행 움직임에 아무 대응도 하지 않았다. 김 지사의 채무불이행 선언(9.29)과 이후 최종 부도처리(10.5)까지 약 일주일 동안 정부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고 한 달이 지나서야 긴급비상경제회의를 열고 '50조+α'의 유동성 공급 프로그램을 발표했다.
금리를 올리면서 유동성을 확대하는 엇박자 상황을 만들어 호미로 막을 것을 가래로 막은 정부는 이후에도 흥국생명 콜옵션 미이행을 방관하며 시장 불안을 애써 키우고 있다.”>
윤석열 대통령 취임 6개월에 대한 평가도 담고 있습니다.
<“대통령실 사적 채용 논란과 검찰 출신 편중 인사, 정호영·박순애 등 연이은 인사 참사는 영국 여왕 조문 취소·48초 한미정상회담·기시다 총리와의 저자세 외교 등 외교 참사로 덮고, 외교 참사는 대통령실 용산 이전 논란으로 덮고, 용산 이전 논란은 10.29 참사가 덮고 있다.
10.29 참사로 온 국가가 참담한 상갓집이 됐고 온 국민이 죄인의 마음으로 애도하고 있는데, 집권 세력은 사과는커녕 국정조사를 가지고 정쟁을 일으키고 있다. 한마디로 '참사 돌려막기'라 할만하다.
대통령과 집권여당의 참사 돌려막기에는 일정한 패턴이 보인다. 참사가 발생하면 일단 책임에 대해 오리발을 내밀고, 정쟁을 조장하여 초점을 흔들고, 진영싸움으로 끌고 가서 국론을 분열시킨다.
10.29 참사에 대한 '정부 책임론'이 거세지자 '야당 배후론'으로 받아치며 정쟁으로 몰아가고 있다. 무책임한 정부에 대한 국민적 분노가 모아진 국정조사 요구에는 ‘정쟁만 일으킬 뿐(주호영 원내대표)’이라며 거부하고, 참사 이후 혼란의 출발이 민주당이 강행한 검수완박(검찰 수사권 완전 박탈) 때문이라며 국정조사 요구를 검수완박 법 개정으로 받아치고 있다.
한발 더 나아가 윤 대통령의 MBC 출입기자 대통령 전용기 탑승 배제 조치를 보면서, 10.29참사를 언론탄압참사로 정국의 이슈를 돌리려는 또 하나의 '참사 돌려막기'를 시도하는 것 아닌가 하는 우려를 누를 수 없다.”>
이제 임기의 10분의 1을 지나고 있는 윤 정부가 명심해야 할 내용이라 생각되어 소개하였습니다.
지난 14일 저녁에는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의 사제, 수녀와 시민 1,000여 명이 '용산 이태원 참사 희생자들을 위한 추모미사'를 드렸습니다.
이날 사제단은 성명서를 내고, 각자도생으로 내몰린 삶을 다시 참회하고, 희생자들을 위한 진정한 조문이 무엇인지 성찰하자고 호소했습니다.
사제단은 “예견된 재난을 대비하지도 않았으며 참극 직전의 상황을 호소했지만 혈세로 호의호식하는 벼슬아치들은 무슨 일인지 모르쇠로 일관했다“고 당국의 대응을 비판했습니다.
또 “최근 윤석열 대통령의 퇴진을 촉구하는 함성이 각계각층으로부터 봇물 터지듯 나오고 있다“며 “국정 전반에서 나라를 위기로, 온 국민을 궁지로 빠뜨리고 있는 잘못 때문이겠지만, 사제들은 한사코 사람의 사람다움을 부정하려 드는 그의 목석같은 무정과 비정을 가장 무거운 죄로 여긴다“고 지적했죠.
사제단은 권력자들의 수수방관과 뻔뻔한 책임 회피의 심리, 그 밑바탕에는 각자도생의 파멸적 이기심이 똬리를 틀고 있으며, 이는 또 다른, 더 끔찍한 참사를 예고하는 무서운 현상이라고 경고하였습니다.
한편 사제단은 이제 우리 국민 모두가 가야할 길을 정해 우리 삶을 지키자고 제안합니다.
전 정권도 현 정권도 우리가 걸어야 할 길은 아니며, 우리는 치워야 할 것을 치우지 못하고 채울 것을 채우지도 못한 상태로 ‘깨어보니 후진국’이라는 비탄을 마주하고 있다면서, “우리가 닦아서 우리가 가야 할 길이 무엇인지, 그것부터 분명하게 정하자. 잘못 뽑은 결과로 우리 삶이 통째로 뽑혀 버리는 어이없는 실책을 다시는 범하지 않기로 하자. 그래야만 충분히 울어주지도 못하고 떠나보낸 세월호 아이들, 영정도 위패도 없는 기괴한 조문으로 모독당하는 젊은이들의 죽음을 조금이나마 위로할 수 있다”고 제안했습니다.
우리는 오늘 ‘피리를 불어도 춤추지 않고, 곡을 하여도 가슴을 치지 않는’ 비정하고 무책임한 시대를 살고 있습니다. 특히 가진자, 권력자, 그리고 그들에 기생하는 기득권자들이 그렇습니다.
이런 시대를 살아가며 ‘감사’의 의미를 새기기란 쉽지가 않습니다. 우리 삶 전반이 휘둘리고 점점 더 나쁜 상황으로 가고 있는데 ‘감사’란 어불성설일지도 모릅니다. ‘장터 아이들의 놀이’가 반복되는 이 시대에 진정한 감사란 무엇일까요?
우선 감사란 의미부터 바꾸어야 할 것 같습니다. 나에게 내 가족에게 좋은 일이 있어 하는 감사에서 내 삶이 하나님 편에, 진리 편에 서 있는 것을 ‘감사’로 여겨야 할 것 같습니다.
물론 주어진 삶 속에서 스스로 족하게 여기고 감사하는 삶도 중요합니다. 하지만 거기에 그치는 것은 예수님이 우리와 함께하는 하늘나라의 삶에는 부족합니다. 예수님과 함께 하늘나라 운동에 참여하며 나눔과 섬김의 삶을 사는 것을 감사해야 하는 거죠.
‘참사를 참사로 덮으려는 모든 불의’에 대항하여 하늘나라의 복음을 설파하며 이 땅의 가난한 자들과 함께 어울리는 일을 감사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혼인 잔치에 함께 기뻐하고 장례와 추도의 자리에 함께 슬퍼하는 것이야말로 이 시대에 필요한 일인 것입니다.
추악한 전쟁에 반대하고, 가난한 이들을 착취하려는 자본과 거기에 기생하는 기득권 카르텔에 정면으로 마주하는 일들이 우리의 감사의 내용이어야 합니다. 기후 위기를 극복하고 생명을 살리는 일에 함께하는 것이 우리의 감사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사제단이 제안한 것처럼 다시는 우리의 삶이 흔들리게 되는 선택을 하지 않는 것, 세월호와 이태원 참사가 일어나지 않는 그런 길을 만들기 위해 모두가 나서는 것이 예수님이 요구하는 진정한 감사가 아닐까요?
이런 감사의 삶이 ‘추악한 세대’를 몰아내고 오늘 우리 시대를 하나님 나라로 이끌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의 하늘나라 운동에 동참하여 부조리한 현실을 바꾸려 애쓰는 모든 이들에게 주님의 은혜와 능력이 함께 하시길 축원합니다.
<2022. 11. 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