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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대교의 종파들: 엣세네파, 쿰란공동체, 바리새파. 사두개파, 열심당(셀롯), 헤롯당
1. 사해 사본의 발견 사해사본이란 1947년부터 1956년까지 이스라엘 사해 북서쪽에 있는 11개의 동굴에서 발견된 고대문서를 지칭한다. 이 사본들은 기원전 2-3세기부터 기원후 1세기 사이에 필사된 것으로 대부분 히브리어로 쓰였고, 아람어나 헬라어로 된 것도 있다.
참고로 사해 사본은 1945년 이집트 나그함마디에서 발견된 초기 기독교 문서들과는 구분되는 것으로, 사해 사본들은 유대인들의 쿰란 공동체와 관련되며 기독교 전승과는 전혀 무관하다. 책의 1장에서는 사해 사본 발견의 역사를 간략히 소개한다. 1948년에 사해 사본의 발견이 세상에 처음 알려지면서 사해 근처 동굴들에 대한 본격적인 탐사가 이루어졌으며, 이후 10개의 다른 동굴들이 더 발견되었다. 그 중 가장 많은 사본들이 발견된 곳은 4동굴이다.
2. 사해 사본의 구성 사해 사본은 모두 800여개로 구성되어 있다. 여기에는 202개의 구약성서 사본들을 비롯하여 외경, 위경, 외부문서, 내부문서 그리고 성서 해석문서 등이 포함되어 있다. 구약성서 39권 중에서 에스더서와 느헤미야서는 발견되지 않았다. 구약성서 본문의 경우 쿰란 공동체에서도 토라의 권위가 존중받았다.
흥미로운 것은 신약 저자들과 마찬가지로 쿰란 공동체가 신명기, 이사야, 시편을 중요하게 여기면서 자주 사용했다는 점이다. 탈굼은 구약 본문을 아람어로 번역한 것으로 쿰란 동굴의 발굴을 통해 이전에는 구전 양식으로 전승되었으리라 추정되던 탈굼이 제2성전 시대에도 문서로 기록되고 필사되고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또한 쿰란에서 발견된 에녹1서 사본 중 천문학서 부분의 사본은 기록 연대가 기원전 200년경으로 추정되며, 이는 기존에 유대묵시 문학의 기원으로 여겨지던 다니엘서(기원전 164)보다 더욱 선행하는 것이다.
창세기의 첫머리부터 모세의 시내산 언약의 이야기까지를 다시 쓴 희년서는 히브리어로 작성된 묵시문학이다. 희년서의 사본은 쿰란의 여러 동굴에서 발굴되었는데, 아마도 이 책이 쿰란 공동체에서 권위가 있었으며 매우 중요하게 여겨졌기 때문일 것이다. 외부에서 쿰란으로 유입되었으라 생각되는 문서로는 11QTemple, 1QapGen, 4QShirShabb, 1QM 등이 있고, 내부(secterian)문서로는 4QMMT, 감사찬양집, 공동체규율, 회중규율, 축복규율, 다마스커스 문서 등이 있다.
사해 사본에 포함된 성서해석문서들은 페샤림이다.
3. 사해 사본과 쿰란 및 에세네파의 관계 키르벳 쿰란에 대한 고고학 발굴 결과와 플리니우스, 요세푸스, 필로 등의 기록을 사해 사본의 내용과 비교해 보면 사해 사본의 원래 주인은 아마도 에세네파의 일원이었던 쿰란 공동체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아마도 기원전 150년경부터 기원후 68년경까지 키르벳 쿰란에서 사람들이 거주했을 것으로 생각되며, 이 곳의 건축물들은 일반 주거 목적이 아니라 공동체 생활을 위한 것이다. 책에서는 요세푸스와 필로의 관련된 1차 자료가 번역되어 상세히 소개되었으며 이 자료들은 쿰란과 에세네파의 밀접한 관련성을 증거한다.
4. 쿰란 공동체의 역사적 배경 쿰란 공동체는 (예루살렘에서 추방당했거나 스스로 물러난) 사독 계열의 '의의 교사'라는 제사장에 의해 세워졌다. 의의 교사가 등장한 배경을 설명하기 위해 책에서는 알렉산더 이후의 시리아 전쟁과 마카비 혁명 등의 중간기 역사가 간략히 소개된다. 의의 교사는 아마도 대제사장 알키모스 사후에 하스모니아 가문의 요나단과 대척점에 섰던 인물이라 추정된다.
5. 쿰란 공동체의 종교 사상 쿰란 공동체는 당시의 다른 유대인들처럼 율법을 철저히 준수하고 유대 전통을 고수하고자 했던 집단이었다. 그들은 자신을 새로운 계약의 공동체로 인식했고, 절대적 예정론과 유일신 신앙을 함께 유지하기 위한 윤리적 이원론을 가지고 있었다. 심판과 부활, 메시아론에 입각한 종말론이 그들의 생활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쳤고, 당대 유대교와 구분되는 독특한 예배에 대한 이해를 가지고 있었다. 그들은 예루살렘에서의 예배가 왜곡되었다고 생각했으며, 성전의 예배를 공동체의 거룩한 삶으로 대체하고자 했다.
그들은 기도를 희생제물로, 그리고 공동체의 거룩한 삶 자체를 희생 제사로 여겼으며, 예루살렘 성전에서 사용되는 음력을 거부하고 양력을 사용했으며 성서에 기록되지 않은 자신들만의 절기를 지키기도 했다.
6. 쿰란 공동체의 성서 해석쿰란 공동체는 임박한 종말의 시대를 살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들은 성서를 종말론적으로 읽으면서 공동체의 정체성을 확립하고 자신들이 처한 현실을 이해하고자 했다. 사해 사본에 포함된 성서 해석 문서들은 희년서나 창세기외경과 같은 다시 쓴 성서(Rewritten Bible)과 페샤림으로 나눌 수 있다.
이 중 쿰란의 종파적 특성을 강하게 나타내는 것은 내부에서 작성된 페샤림이다. 성서 해석에 있어서 그들은 성서 본문을 과거에 대한 기록이 아니라 미래에 대한 종말론적인 예언을 내포한 책으로 이해하였기에, 기록된 성서의 감추어진 신비를 풀어내어 현재화하고자 했으며, 성서 본문을 풀이해야 하는 약자나 암호로 여기기도 했다. 해석 과정에서 성서의 역사적 정황이나 문학적 내용은 무시되었다.
7. 사해 사본과 구약성서사해사본에 대한 연구는 구약성서의 본문을 이해하는데 혁명적인 변화를 가져왔다. (이 부분은 관심분야라, 글이 조금 길어지더라도 조금 자세히 정리해두고자 한다.) 사해사본이 발견되기 전까지 구약성서로 전해져 내려오는 고대 본문은 크게 3종류이다. 1)마소라 본문은 히브리어로 되어 있기 때문에 기독교와 유대교에서 구약성서를 번역할 때 기본으로 사용했다. 마소라 본문 중 가장 오래된 사본은 895년의 카이로 필사본인데, 예언서만 포함한 것이다. 2)칠십인역은 초대교회가 사용한 성서로 기원전 3세기 이집트 알렉산드리아에서 히브리어 본문을 헬라어로 번역한 것이며 마소라 본문과 차이가 있다.
이전에는 이 차이가 칠십인역 번역자의 생략과 수정 등으로 설명되었으나, 사해사본의 발견은 칠십인역이 마소라 본문과는 다른 히브리어 본문을 대본으로 삼아 충실히 번역했다는 것을 증거했다. 칠십인역 번역 당시에는 대본으로 사용할 다양한(!) 히브리어 구약성서 본문들이 존재했으며 오늘과 같은 정경의 개념은 성립되지 않은 상태였다.
3)사마리아 오경은 히브리어로 작성되었고, 가장 오래된 사본은 13세기 경의 것으로 여겨진다. 그러나 사마리아 공동체의 형성의 역사를 고려하면 이 본문의 내용은 적어도 기원전 2세기 이전의 것을 반영하고 있다고 생각된다. 쿰란의 사본들은 마소라 텍스트와 차이가 나는 사마리아 오경의 상당한 부분이 사마리아 공동체 형성 이전에 이미 존재한 비종파적 본문임을 증거한다. 이러한 증거들은 성서의 본문이 수세기에 걸쳐 전달되고 발전되며 수정, 편집되었다는 것을 증거한다.
사해 사본을 통해 다양한 형태의 본문이 존재함을 확증할 수 있었고, 이는 곧 구약본문에서 마소라 본문이 더 이상 중심적인 위치에 있지 않다는 것을 뜻한다. 본문 비평을 하는 일반적인 목적은 소위 최초의 원문을 회복하려는 시도다. 그러나 사해 사본의 발견은 하나의 원문의 존재 가능성 자체에 큰 의문을 던지며, 이러한 기존의 본문비평의 목적에 대한 새로운 인식이 필요함을 말해준다.
8. 쿰란 공동체와 초기 기독교신약성서의 기록과 쿰란에서 발견된 사본 및 다양한 역사적 증거에 의해 세례자 요한은 에세네파와 모종의 깊은 연관성을 가졌음을 충분히 추측해 볼 수 있다. 이 외에도 사해 사본의 발견은 초기 기독교가 유대교의 배경에 깊이 뿌리를 두고 태동했다는 것을 확인해 주었다.
그리하여 그리스-로마 문화에 의해 짙게 채색된 예수의 모습과 복음의 의미를 당시의 역사적, 사회적 상황에서 재고할 수 있게 해 주었다. 이 부분에서 다루어지는 내용은 가장 관심이 가는 부분임에도 불구하고 생각보다 분량이 작은데, 이미 앞부분에서 언급된 내용을 주제별로 다시 정리하는 수준에 그치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고 아직까지 본격적인 세밀한 연구가 이루어지지 않아서일지도 모르겠다.
쿰란의 문서들이 작성된 시대적 배경이 교회의 형성 시기와 크게 다르지 않기에, 두 공동체의 구약성서 접근과 해석을 창조적으로 비교해 볼 수 있을 것 같다. 쿰란 공동체가 파괴된 이후 작성되기 시작한 신약성서 또한 구약성서에 대한 미드라쉬 혹은 페세르라고 볼 수 있기 때문에 쿰란에 대한 연구는 더욱 중요하다고 생각된다.
분명히 쿰란이 가진 해석학적 기반을 깊이 공유하는 가운데 히브리 텍스트에 기반 한 신약의 기독론이 형성되었으리라 본다. 우리는 기독교의 성서 또한 철저히 인간의 문화와 역사 속에서 기록된 인류 자신의 유산임을 잊어서는 안 된다. 누구도 스스로의 얼굴을 혼자 살펴볼 수는 없는 노릇이다. 독존하는 진리는 아무런 의미를 전달할 수 없다. 무려 2천년의 시간을 견뎌내고 우리에게 전해진 사해 사본은 그렇게 우리가 보다 객관적으로 역사 속에서 우리의 성서를 성찰할 수 있게 도와주는 신의 '거울'일지도 모르겠다.
쿰란 공동체의 기원에 대하여는 율법을 세심한 배려로서 준수할 것을 촉구하였던 예루살렘의 사제그룹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사제들은 공동체 제도에 있어서 첫 번째 지위를 차지하는 사람들로서 메시아적 기다림을 왕적 메시아의 편에 서게 될 사제적 기름부음을 받은 자의 도래위에 세우는 자들이다.
성서 문헌에 대한 주석서들 속에서 쿰란 공동체를 세운 의(義)의 선생에 대한 언급이 되풀이 되고 있다. 그는 하나님이 그에게 성서에 대한 올바른 인식과 해석의 은사를 주셨다고 여기는 사제였다.
그를 중심으로 하여 순수함을 유지하고 타당하다고 여겨지는 축제력을 지키기 위하여 노력하던 율법에 신실한 사제들과 레위인들 그리고 평신도들이 모여 들었다. 예루살렘에서는 달의 순환에 따른 월력(月曆)을 사용한 반면, 이들은 30일을 한 달로 하는 열두 달과 거기에 매 4년마다 하루를 부가하여 계산하는 태양년을 도입하고자 하였다.
그럼으로써 한 해는 항상 똑 같은 평일, 즉 수요일에서 시작되어 모든 축제일은 언제나 같은 평일 날이 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들은 안식일을 엄격하게 성화하고자 하였던 이러한 견해를 끝까지 관철할 수 없었다.
오히려 그들은 율법의 규정을 지키지 않는다고 자기들이 비난하였던 세력 있는 대제사장들과 날카로운 대립에 이르게 되었다. 대제사장과의 이러한 충돌은 의의 선생이 그를 따르는 공동체와 더불어 예루살렘에서 쫓겨나 사해변의 고적한 광야로 물러나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러나 이 의의 선생의 이름이 누구인지는 전혀 알 수가 없다. 왜냐하면 그의 이름에 대한 암시가 어디에도 없기 때문이다. 그는 공동체를 이끄고 광야로 나왔으며 이사야 40장 3절에 기록된바 “사막에 주의 길을 예비하라. 광야에서 우리 하나님의 길을 평탄케 하라.”는 예언자적 요청을 통해 이 길을 본 것이다. 그러므로 공동체는 그들이 율법을 따라 생활하기 위하여 율법을 연구하면서 주의 길을 예비하도록 부르심을 받았다고 믿었다.
쿰란 공동체원들은 구원의 사례를 위하여 합법적인 예배의 회복을 갈망하였고 공동체는 종말에 수행되어야 할 싸움을 승리로 이끌고 올바른 예배를 회복하기 위하여 항상 사제들의 지도하에 싸울 각오가 되어 있었다. 그런 까닭에 온 공동체원들은 사제적 정결을 유지하였으며 모든 불결을 피하려고 노력하였다.
이 공동체는 또 어둠의 아들들에게 대항하는 싸움을 수행하기 위하여 엄격한 계급질서 가운데서 살았다. 즉 사제들이 제일 높은 계급이었고 그 밑에는 레위인이 있었으며 다시 그 밑에는 이 공동체에 협약으로 들어오려고 노력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마지막으로는 새로 이 공동체에 들어오려고 노력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이 마지막 서열의 사람들은 먼저 시험을 거쳐야 했다. 이 기간 동안에는 공동 식사에 참여할 수 없었다. 2년의 시련 기간이 지나면 총회의 시험에 의해 공동체에 들어올 수 있게 되고 공동체에게 마음과 심령으로 의무에 대해 맹세하게 된다.
이 사제적 공동체는 식사와 예배와 성서 연구를 위하여 함께 모였다. 누구나 이 공동체의 질서를 어긴다면 혹독한 징계를 받아야만 했다. 지극히 경미한 범죄라도 엄한 처벌을 받았다. 어리석은 말 하는 사람 3개월, 이웃사람의 말에 참견하는 사람은 10일, 총회를 하는 동안 눕거나 조는 사람은 30일 간의 처벌을 받았지만 가장 혹독한 형벌은 공동체로부터의 추방이었다.
공동체가 수행하고 있는 것으로 여겼던 전쟁 상태는 빛과 어둠사이의 대립으로 서술된다. 밖에는 어두움의 아들들, 그리고 구약 성서가 자주 말하고 있는 이방 민족의 무리들 즉 에돔, 모압, 암몬, 깃딤 등이 있었다.
그러나 빛의 아들들은 천사에 의해 보호 받는다는 것이다. 그러나 전 역사를 통하여 서로 투쟁 가운데 놓이게 된다는 두 영의 대립 개념은 구약성서 안에서와 거기에 부과된 유대 전통 안에서는 그 선례를 찾아 볼 수 없다. 그러나 이란의 종교에서는 이와 비슷한 개념들을 찾아 볼 수 있다.
이 싸움은 태초에 정해진 것으로서 마지막 때에 이르러 선한 하나님이 악한 하나님에 대하여 승리를 거둘 때까지 계속된다고 믿었다. 이와 같은 이원론적 교리는 하나님의 전능을 증거하고 동시에 공동체가 최후의 심판 때까지 싸워야만 하는 투쟁을 설명하는데 공헌하게 된 것이다.
신양성서에는 “초기 기독교인” “바리새인과 사두개인”에 대한 만남이 기록되어 있는 반면 다른 한편으로는 쿰란 공동체나 엣세네파 사람들과의 대립에 대해서는 아무런 언급이 없다.
비록 이들이 사해 해변에서 격리된 생활을 하였지만 쿰란 공동체에서 발견된 많은 사상은 그 공동체를 초월하여 당시의 유대교 안으로 넓게 유포되었고 수용되었다. 쿰란 공동체의 신앙과 교리가 초기 기독교인들의 선포와 생활과 현저한 유사성을 보여 주고 있는 많은 특징들을 담고 있다. 사실 이는 별로 놀라운 일이 아니다.
초기 기독교인들이 쿰란 공동체의 사상을 수용하기도 하고 거부하기도 하면서 사용했다는 사실을 우리는 신약성서의 여러 곳에서 알 수 있다. 쿰란 공동체가 예언자와 메시아적 왕과 메시아적 대제사장을 고대하였다면 기독교인들에게는 하나님의 기름부음을 받으신 단 한분만이 메시아적 왕이라는 주장에서 상반성을 볼 수 있고 또한 팔레스틴 교회는 교회의 질서를 유지하기 위해 쿰란 공동체의 선례, 재산의 공동소유, 징계 방법 등을 사용하기도 했다.
쿰란 텍스트는 경건하고 율법에 신실하던 유대인들이 예수와 사도들의 시대에 생각하고, 믿고, 희망하였던 사상과 견해들을 밝혀준다. 예수와 초기 기독교인들은 복음의 선포가 구원의 시대를 고대하고 있던 당시의 경건한 사람들 사이에 제기되었던 것과 같은 문제에 대하여 타당한 답변을 준다는 사실을 증명해 보이기 위하여 쿰란 텍스트는 초기 기독교의 설교가 분명하게 나타나는 배경을 밝혀주고 있다.
열심당(熱心黨), 젤롯당(Zealot黨), 시카리당[1], 혁명당은 로마제국의 통치에 폭력항쟁으로 맞설 것을 주장한 유대의 종교적 민족주의 정치 운동이다.
로마 제국이 하나님을 믿는 유대에 죽은 황제를 신으로 숭배하는 황제 숭배를 강요하자 이에 반발한 유대인들이 항쟁을 일으켰다가 진압된 바 있었는데, 열심당원들은 이스라엘은 다윗 왕의 자손으로 기름부음 받은 유대인[2] 만이 다스릴 수 있다고 주장하며 로마 제국에 계속해서 대항하였다. 그들은 66년에서 70년에 걸친 대대적인 유대인 반란인 제1차 유대-로마 전쟁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하였다. 이들은 66년 예루살렘을 장악하여 4년간 버텼으나 70년에 로마 군이 예루살렘을 함락시키고 성전을 파괴하는 것으로 전쟁이 끝났다.
열심당원들은 40년말에 가뭄과 굶주림으로 고통받던 갈릴리와 유대의 민중들의 비폭력 투쟁이 대제사장들의 관심을 끌지 못하고, 비폭력투쟁에 가담한 민중을 로마의 평화를 위협하는 비적(匪賊)으로 본 로마제국의 폭력으로 진압당한 모습[3] 을 보면서, 대항폭력 곧 테러리즘으로 투쟁함으로써 지배계급의 이목을 집중시키고자 하였다. 식민지에서의 테러리즘은 지배계급보다는 지배계급에 협조하는 특권계급을 공격하는 것이 특징인데, 열심당원들도 로마제국에 협조하던 대제사장을 공격하였다.
시골에서 (로마제국에 비폭력투쟁으로 저항하던 비적들이 로마제국의 폭력으로)사라진 반면에, 예루살렘에서는 소위 시카리파라고 불리는 새로운 형태의 비적들이 등장했는데, 이들은 축제기간에 단검을 옷 속에 숨겼다가 적들을 살해했다. 그들이 쓰러지면 다른 사람들과 같이 분개하는 행동을 해서 자신을 숨겼다. 그들이 처음 암살한 사람은 대제사장이었다. 그 뒤에 매일 수많은 사람들이 살해되었다.[4]
요약해서 말한다면 열심당원들의 테러리즘은 로마의 평화 유지를 위한 로마제국의 착취, 제국에 기생하는 대제사장, 가뭄으로 인한 굶주림과 로마의 평화를 위협하는 민중운동을 레기온과 십자가형으로 탄압하는 폭력에 대한 갈릴리와 유대 민중들의 시위이다.
이 전쟁에 유대인 편에서 참전했다 로마 군의 포로가 된 뒤 당시 상황에 대해 기록을 남긴 유대인 역사가 요세푸스(요세프 벤 마티탸후)는 1세기 당시 유대인들이 4개의 중요한 집단, 즉 바리새인, 사두개파, 에세네파, 그리고 혁명론자들로 나누어졌다고 했는데 열심당은 혁명론자들에 속한다.
에세네파는 공동체 생활을 통해 비정치적으로 은둔에 가깝게 신앙을 지켜갔고 바리새인들과 사두개파는 체제를 위협하지 않는 한 종교 문제에 대해 간섭하지 않는 로마 제국에 어느 정도 타협하며 유대교 신앙과 율법에 관한 논쟁을 벌였지만(사도행전 23:6-9,사도행전 25:13-19) 열심당원들을 비롯한 혁명론자들은 로마에 대한 정치적 투쟁을 우선으로 여겨 과격한 방법도 서슴지 않았다. 따라서 종교가 지배하는 사회였던 이스라엘 사회에서 지배계급들이던 바리새인과 서기관들과 대립하였으나 로마 제국의 수탈과 폭력에 고통받던 민중들에게는 많은 지지를 받았다.
열심당은 유대인 정착촌을 습격하여 로마의 지배에 협력하는 이들을 죽이거나, 유대인들이 로마에 대항하여 필요하면 동족과도 싸우도록 선동하는 등의 활동을 하였다. 그래서 요세푸스는 제1차 유대-로마 전쟁이 성전의 파괴로 이어지기까지 열심당이 죽임을 일삼는 ‘공포의 지배’를 펼쳤다고 부정적으로 그리고 있으며, 당시 사료들도 열심당원들을 '유대민족의 적'으로 판단되는 이들을 공개적으로 죽일 정도로 과격한 민족주의 전사로 묘사한다.
[5] 로마제국은 이들을 십자가형으로 공개처형 했는데, 예수의 양옆 십자가에서 처형된 '강도 두 사람'[7]도 실제로는 강도가 아니라, 열심당원이었거나 적어도 로마제국에 반대하여 십자가형에 처해진 자들이었을 것이다. 왜냐하면, 마가복음서 15장 27절에 나오는 강도 두 사람은 헬라어 레스타이(lestai)를 번역한 말인데,이 단어는 열심당원이라는 뜻도 있기 때문이다.[8] 예수의 12제자 중 가나인 시몬(Simon the Zealot)은 열심당원이었다.[9]
==========인터넷 상에서 옮긴 자료임=============
첫댓글 어떤 학자들은 엣세네파와 쿰란 공동체를 동일하게 보기도 하지만 그 당시에는 메시아 대망사상과 경건주의자들이
여러 분파로 나뉘어 나름대로의 이론으로 이스라엘 사람들을 자기파당으로 끌어들이려고 노력하던 역사의 과도기
였으며 영적으로 매우 혼잡하던 시기였습니다.
세계정세는 헬라시대가 끝나고 로마시대가 시작되는 시기요 이스라엘이 헬라제국으로부터 독립한
시기였으므로 정치, 종교, 사회전반에 매우 혼란하고 어수선한 시기였습니다.
자료를 참고로 한번씩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그 당시의 사회적인 배경을 알아야만 예수님의 사역시기에 대하여 기록한 성경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