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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소를 초월하다(忘牛存人)
나는 고요하다. 소 또한 편히 누워 있다. 지복(至福)의 잠 속에서 새벽이 왔다. 나는 채찍과 고삐를 내버리고 초가집에서 살아간다.
주해 : 모든 것은 둘이 아니라 하나의 법칙 아래 있는 것이다. 우리는 일시적인 주제로 소를 택했을 뿐이다. 그것은 토끼와 덫 혹은 물고기와 그물의 관계와 같은 것이다. 그것은 금덩어리와 찌꺼기 혹은 구름 속에 가리워졌던 달이 나타나는 것과 같다. 한줄기 환한 달빛이 끝없는 시간을 통해 지나가고 있다. |
8. 소와 나를 초월하다(人牛俱忘)
채찍, 고삐, 사람 그리고 소... 모든 것이 무(無) 속으로 사라진다. 이 하늘은 너무도 광대하여 어떤 메시지도 닿을 수 없다. 어떻게 하여 눈송이가 활활 타는 불 속에 존재할 수 있겠는가? 여기에 스승들의 발자취가 있다.
주해 : 범용한 것은 사라졌다. 마음은 한없이 한없이 열려 있다. 나는 더 이상 깨달음 같은 것은 찾지 않는다. 또한 나에게는 깨닫지 못한 어떤 것도 남아 있지 않다. 나는 어떠한 상태에도 머물지 않아 눈으로는 나를 볼 수 없다. 백 마리의 새가 나의 길에 꽃을 뿌린다 해도 그러한 찬미는 무의미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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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트루드 스타인(Gertrude Stein. 1874~1946. 미국의 여류작가. 1903년 이후 주로 파리에서 살았으며, 그녀는 직면하고 있는 현재를 “A rose is a rose is a rose.” 따위의 말로 표현하여 비평가들로부터 호된 비평을 받았다.)이 죽어가고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그녀가 눈을 뜨고 그녀의 주위에 모여 있던 친구들에게 물었다. “해답은 무엇인가?” 아아, 이것이야말로 밑도 끝도 없는 무한히 아름다운 공안(公案. Koan. 話頭. 쉬운 말로 수수께끼라고 해도 틀릴 것 같지는 않다. 공안은 논리로 꽉 차 있는 머리가 아닌 가슴을 열려는 선사들의 노력이었다. 禪에는 1js 7백 개가 넘는 공안이 있다고 한다.)이었다. 질문 같은 것은 있지도 않았는데, 그녀는 “해답은 무엇인가?”하고 물었던 것이다. 물론 누구 하나 그 말에 대답할 수 없었다. 그들은 입을 꽉 다문채 서로의 얼굴만 쳐다보고 있을 뿐이었다. 그들은 그녀가 도대체 무슨 뜻으로 그런 말을 했는지 어리둥절해 하고 있었다. 禪의 마스터가 필요했던 것이다. 누구인가 무의식적으로 즉시 그의 가슴으로 응답할 수 있는 사람이 필요했던 것이다. 누구인가 커다란 소리로 웃어대든지 아니면 큰소리로 외치든지 아니면 무언가를 행할 수 있는 사람이 필요했던 것이다. 왜냐하면 이러한 질문 - 해답은 무엇인가? - 은 언어로써는 대답할 수 없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스타인의 질문은 어떤 형식을 통하여 표현될 수 없는 그런 것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질문은 던져졌다. 해답은 무엇인가? 그 질문은 입 밖에 내는 것조차 불가능한 그런 것이었다. 그만큼 그것은 심오하고 표면에까지 떠오를 수 없는 그런 것이었다. 그래도 질문은 던져졌다. 해답은 무엇인가? 그런 질문은 질문자와는 분리될 수 없는 그런 것이었다. 그 질문자의 존재 전체가 마치 하나의 물음표인 것처럼 말이다. 해답은 무엇인가? 그들은 서로 얼굴만 쳐다보고 있었다. 그들은 틀림없이 모두 “사람이 죽으려니까 미치는가보다.” 라고 생각하고 있었을 것이다. 아직 질문이 형식을 갖추기도 전에 “해답이 무엇인가?” 라고 묻는 것은 불합리하고 미친 짓이다. 거기에 누구 하나 응답할 수 없었다. 누구 하나 그 질문에 응답할 수 있을 만큼 깨어 있지 못하였다. 왜냐하면 참으로 감응하고 있는 사람은 거기에 아무도 없었기 때문이다. 누구 하나 응답할 수 있을 만큼 현존해 있지 못했다.
“그렇다면 해답은 무엇인가?” 라고 그녀는 또 묻는다. 다시 침묵이 계속된다. 어느 누가 그 질문이 무엇인지 말해 줄 수 있겠는가? 확실히 그녀는 미쳐버렸다. 확실히 그녀는 이제 제정신이 아니다. 그러나 그런 질문은 무엇이라고 말하기가 불가능한 것이다. 그대가 그것을 말하는 순간, 그대는 그것을 왜곡하여 버린다. 그대가 그것을 말로 나타내는 순간, 그것은 이미 그것과 똑같은 뜻이 될 수 없다. 그것은 가슴 속에 있었던 것과 같은 질문이 아니다. 일단 그것을 말해 버리면, 그것은 머리의 것이 되어 버린다. 그것은 아주 하찮게 되어 버린다. 그것은 아주 하찮게 보인다. 그것은 아주 피상적인 것으로 보인다. 그대는 궁극적인 질문을 할 수 없다. 왜냐하면 그대의 질문 속에는 더 이상 궁극의 문답이 들어 있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오직 마스터만이 그녀가 말한 것을 이해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녀는 무한한 이해력을 지닌 아름다운 여자였다. 그리고 삶의 마지막 순간에 그녀는 이 공안 속에서 꽃을 피웠을 것이다. 그대들은 거의 진부한 문구가 되다시피 한 그녀의 유명한 말을 들어본 적이 있을 것이다. “장미는 장미이고, 장미일 따름이다.” 라는 문구를 말이다. 그것은 장미이다 라는 말을 빼놓고는 장미에 대해 무엇 하나 말할 것이 없는 것이다. 장미에 대해 그대가 하는 말은 모두 장미에 대해 늘어놓는 거짓말일 뿐이다. 장미는 그저 장미가 지닌 불가해한 아름다움 속에 있을 뿐이다. 장미는 알 수 없는 향기를 풍기며 사실로서 존재하고 있을 뿐이다. 그대는 장미를 어떤 이론을 가지고도 풀이할 수 없다. 그리고 그대가 장미를 어떤 이론을 가지고 풀이한다 해도 그것은 무엇인가 다른 것이 되어 버릴 것이다. 그것은 결코 장미가 아닐 것이다. 그것은 거울 속에 비친 영상에 지나지 않는다. 그것은 결코 참된 것이 아니다.
장미는 장미이고, 장미일 따름이다. - 더 이상 아무것도 말할 수 없다. 그대가 “장미는 장미이고, 장미일 뿐이다.”라고 말할 때는 아무것도 말하고 있지 않은 것이다. 만약 그대가 논리학자에게 찾아간다면 이 같은 것은 같은 말의 반복이라고 할 것이다. 불필요한 반복이라고 할 것이다. 그대는 아무것도 말하고 있지 않다! 그러나 무엇인가를 말하고 있다. 그 무엇도 말을 통해서는 나타낼 수 없다는 것을 말이다.
“그렇다면 해답은 무엇인가?” 라고 그녀는 자꾸 묻는다. 침묵은 여전히 깨어지지 않고 있다. 응답할 수 있는 사람은 그 누구도 없었다. 필요한 것은 대답이 아니었다. 그녀는 가슴에서 우러나오는 감응을 바라고 있었던 것이다.
그대는 삶과 죽음에 대하여 계속해서 생각할 수 있다. 그대는 많은 이론과 가설을 계속해서 만들어 낼 수도 있다. 그러나 모든 철학은 단지 쓰레기에 불과하다. 삶은 어떠한 해답도 없이 그냥 존재하는 것이다. 죽음 또한 어떤 해답도 없이 그냥 존재하는 것이다.
바로 그 순간 스타인은 삶과 죽음에 대하여 묻고 있었던 것이다. 삶에 대하여, 죽음에 대하여 - 바로 존재의 바닥에 대하여 묻고 있었던 것이다. 그녀는 “나는 누구인가?”를 찾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철학은 아무런 해답도 가지고 있지 않다. 철학은 여러 세기 동안 심사숙고하며 그것에 대답을 하려고 노력해 왔다. 그러나 모든 노력은 헛수고였다. 오마르 카이암(Omar Khayyam, 1040?~1123. 페르시아의 시인. 천문학자, 수학자. 그의 4행시집 <루바이야트>는 우리에게 많이 알려져 있다.)은 말했다. “젊었을 때 나는 학자나 성자들을 열심히 쫓아다니며 삶과 죽음에 대한 위대한 의론들을 들었다. 하지만 언제나 내가 들어가는 문과 나오는 문은 똑같았다.”
삶과 죽음을 둘러싸고…… 비슷비슷한 수많은 의론과 수많은 철학들이 돌고 돌 뿐이다. 결코 정확한 초점을 잡지 못하고 주위에서만 빙빙 돌고 있을 뿐이다. 흥미진진한 수많은 의론들이 계속되고 있지만 거기서 나오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그저 횡설수설 떠들고 있을 뿐이다. 거기에서는 무엇 하나 나올 수 없다. 왜냐하면 삶은 철학적인 명제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 어떤 해답일지라도 철학적인 것은 해답이 될 수 없다. 삶이란 실존적인 것이다. 오로지 실존적인 대답만이 그대를 만족시켜 줄 수 있다. 다른 사람에게서 주워 모은 해답이 아니고, 마음에서 조립되어 꾸며진 해답이 아니며, 경전에서 빌어온 해답이 아닌, 오로지 그대의 존재로부터 솟아오른 해답만이 그대의 전 운명을 꽃피울 수 있고 완전한 깨달음의 상태로 인도할 수 있다. 그것은 깨달음이 될 것이다. 그것은 해답이 아닌 하나의 깨달음, 해답이 아닌 하나의 계시, 해답이 아닌 하나의 실존적인 경험이 될 것이다.
이것이 십우도(十牛圖)가 말하여 주는 모든 것이다. 탐구란 실존적인 것이다. 선(禪)은 가장 곧은 길이다. 그것은 바로 표적을 향하여 똑바로 나아간다. 그것은 결코 이리저리 헤매지 않는다. 그것은 주위를 빙빙도는 것이 아니고 화살같이 똑바로 날아간다.
서양에서 가장 위대한 철학자 중의 한 사람인 루드비히 비트겐슈타인(Rudwig Wittgenstein, 1889~1951. 오스트리아의 철학자. 오직 의미 분석만이 철학의 과제라고 주장하고, 일상 언어의 분석에서 철학의 의의를 발견하려고 했다.)은 선(禪)의 태도에 매우 가까이 접근했던 사람이다. 그는 선의 문을 힘차게 두드려 보았던 사람이다. 그는 말한다. “신비한 것은 이 세상이 어떻다는 것이 아니고 세상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세상이 있다는 것, 이것이야말로 진짜 신비스런 것이다. 그대가 어떻게 여기에 있는가가 아니라, 어떻게 여기에 왔는가가 아니라, 그대가 여기에 있는 목적이 아니라 그대가 그냥 여기에 있고 내가 있다는 사실만이 가장 위대한 신비인 것이다. 그대가 여기에 있고 내가 있다는 그 사실만이 최대의 신비인 것이다. 그리고 대답을 말로 표현할 수 없을 때 질문 역시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것이다.
이런 이야기가 생각난다. 어떤 사람이 붓다를 찾아와 말하였다. “제 질문에 말을 사용하지 말고 대답해 주십시오. 제가 예로부터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를 들은 바에 의하면 진리란 말로 표현될 수 없는 것이라고 하더군요.”
붓다는 웃으면서 말했다. “물론이지…… 그대는 지당한 이야기를 들었소. 그러나 그대가 말을 사용하지 않고 질문하여야 나 또한 그대의 질문에 말을 사용하지 않고 대답해 줄 수 있지 않겠소.”
그러나 “그것은 불가능합니다.” 라고 그 사람이 말했고, 그때 그는 이해하게 되었다. 만약 질문이 명확하게 표현될 수 없는 것이라면, 어떻게 그 해답인들 명확하게 표현될 수 있겠는가? 질문 그 자체가 나타내어질 수 없는 것인데 어떻게 그대가 해답을 요구할 수 있겠는가? 비트겐슈타인은 옳다. 대답이 말로 표현될 수 없을 때는 질문 또한 말로 표현될 수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수수께끼는 존재하지 않는다. 질문도 말로 표현될 수 없고 또한 대답도 말로 표현될 수 없는데 어디에 수수께끼가 있을 수 있겠는가? 어디에 문제가 있을 수 있겠는가? 이것은 아주 예리한 통찰이다. 문제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것은 마음에 의해 만들어진 것에 불과하다. 그것은 마음에 의해 만들어진 것에 불과하다. 만약 질문이 만들어질 수 있다면, 그것에 답하는 것 또한 가능한 일이다.
어떤 사람이 비트겐슈타인에게 물었다. “그렇다면 어째서 당신은 그렇게 훌륭한 책을 계속해서 쓰고 계시는 겁니까?” 그의 책 <논리철학논고>는 인류 역사상 가장 위대한 책 중의 하나로 갈채를 받아 왔다. “질문도 확실하게 표현될 수 없는 것이고 해답 또한 가능한 것이 아니라면 당신은 왜 책을 계속해서 쓰고 계시는 겁니까?”
그는 말했다. “그것은 다음과 같은 것을 밝히기 위해서이다. 누구든지 나를 이해한 사람이라면 결국은 그런 철학들이 모두 무의미하다는 것을 알아차리게 될 것이다.” 다시 한 번 되풀이해 보자. “누구든지 나를 이해한 사람이라면 결국은 그런 철학들이 모두 무의미하다는 것을 알아차리게 될 것이다.” 그는 철학을 넘어서는 단계로서 철학을 사용했던 것이다. 말하자면 그는 그 위에 올라간 다음에는 사닥다리를 내던져 버리지 않으면 안 된다.
그대가 이해하는 순간, 내가 말하고 있는 것 또한 모두 무의미하다는 것을 알아차리게 될 것이다. 그러나 만약 그대가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면 그때는 그것은 의미심장하게 보일 것이다. 모든 의미는 오해에서 오는 것이다. 만약 그대가 이해한다면 그때는 모든 의미들이 사라진다. 오직 삶만이 있게 된다. 의미는 마음에 속하는 것이다. 마음의 투영이다. 마음의 해석에 불과하다. 그렇다면 장미는 장미이고, 장미일 뿐이다 라는 말조차 존재할 수 없는 것이다. 그냥 장미일 뿐이다. 어떤 이름도 어떤 형용사도 어떤 정의도 내릴 수 없는 것이다. 그냥 삶만 있을 뿐이다. 느닷없이 의미가 없어지고 모든 목적마저 사라지는 것, 이것이 바로 깨달음으로 가는 가장 위대한 신비인 것이다.
그러므로 의미라고 하는 것은 진짜 찾는 것이 아닌 것이다. 진정으로 추구해야 하는 것은 삶 그 자체와 만나는 것이다. 있는 그대로 발가벗은 삶과 만나는 것이다.
모든 질문들은 보기에 따라서는 매우 어리석은 것이다. 그리고 모든 대답 또한 마찬가지이다. 왜냐하면 그것들은 모두 마음에 의해서 만들어진 것이기 때문이다. 마음이라는 것은 그대와 진실 사이를 가로막고 있는 장벽일 뿐이다. 마음은 계속해서 질문을 만들어낸다. 그리하여 그대의 탐구를 지연시킨다. 그대가 수많은 질문을 하고 있을 때, 마음은 그대가 위대한 탐구자라는 것을 확신시키려 한다. 그러나 질문들로 인하여 그대는 주위에 구름 병풍을 둘러쳐놓는 격이 된다. 처음엔 그대가 질문을 한다. 그러나 곧 질문이 그대를 둘러싸게 될 것이다. 다음엔 그대는 어떤 해답을 찾기 시작할 것이다. 그러나 곧 해답이 그대를 둘러싸게 될 것이다. 그리하여 그대와 있는 그대로 발가벗은 그대의 삶 사이에는 언제나 하나의 장벽이 남게 될 것이다.
있는 그대로 발가벗은 삶. 그것은 질문도 해답도 아니다. 그것은 하나의 계시이다. 마음이 없다면 바로 그대에게 그 모습을 나타낼 계시인 것이다. 그것은 그것의 모든 영광 안에서 그 모습을 나타내며, 그것의 전체성을 담고 언제나 쓰일 때를 기다리며 단순히 거기에 존재하고 있다.
그러나 사람들은 질문을 계속하고 있다. 그리고 사람들은 무엇인가 위대한 탐구를 하고 있는 것으로 느끼고 있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 수많은 질문들, 수많은 대답들, 이 모두 하나의 게임일 뿐이다. 만약 그대가 게임을 좋아한다면 그렇게 하라. 그러나 그것을 통해서는아무것도 해결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인생 최후의 순간까지 질문을 계속하고 있다.
그러나 스타인은 달랐다. 그녀는 최후의 순간에 선(禪)적인 자질을 나타내 보인 것이다. 그녀는 자기 자신이 깨닫고 있는 여성이라는 것을 확실히 보여 주었다. 물론 거기에 같이 있었던 사람들은 그녀가 무엇을 뜻하는지 전혀 이해할 수 없었다. 서양이 아니라 동양이었다면 그녀는 이해되었을 것이다. 그곳에서는 틀림없이 그녀는 죽는 순간에 마치 미쳐버린 것으로 생각되었을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의 질문들이, 언제나 변함없는 그 바보 같은 질문들이 계속되고 있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죽음이 다가오는 그 마지막 순간까지도 우리는 판에 박은 듯한 똑같은 질문을, 썩은 냄새가 나는 질문을 계속하며 해답을 찾는다.
나는 어떤 은행에서 일어났던 사건의 한 토막을 들은 일이 있다.
권총을 든 강도가 출납계원에게 쪽지를 내밀었다. “얼간아, 돈을 이 자루에 넣어! 그리고 꼼짝 말고 있어!” 출납계원이 재빠르게 메모를 하여 다시 강도에게 쪽지를 건네주었다. “네 넥타이를 똑바로 해, 이 멍청아! 너는 지금 사진 찍히고 있어.”
죽음의 순간까지도 그대는 넥타이를 똑바로 매려고 분분할 것이다. 왜냐하면 사진 찍히고 있으니까 말이다. 사람들은 여전히 거울에만 정신을 빼앗기고 있다.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이 자기를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 어떻게 말하고 있는지에만 관심을 쏟고 있다. 사람들은 그저 자기 자신에 대해 좋은 인상을 남기기에 분분하고 있다. 바로 그것이 그대가 하고 있는 삶에 대한 모든 노력인 것이다. 그러던 어느 날 그대는 사라질 것이다. 그대의 인상은 먼지 속에 파묻힐 것이다. 먼지 위에 먼지가 쌓일 것이고, 그대에게는 아무것도 남지 않을 것이다.
깨어 있으라! 인상에만 너무 관심을 쏟지 말라. 참된 것에 흥미를 가져라. 그 참된 것이란 바로 그대 안에 있다. 그것은 그대의 에너지를 가리킨다. 그것은 다른 누구와도 관계가 없는 것이다. 자신을 아는 데는 어떤 거울도 필요하지 않다. 왜냐하면 거울에 비치는 것으로는 자신을 알 수 없기 때문이다. 자기를 아는 것은 순간 속에서 이루어지는 조우(encounter)이다. 그대 실존과의 만남을 통해서만이 자신을 알 수 있다.
일곱 번째 경문 : 소를 초월하다
소 등에 걸터앉아
나는 집으로 돌아왔다.
나는 고요하다.
소 또한 편히 누워 있다.
지복의 잠 속에서
새벽이 왔다.
나는 채찍과 고삐를 내버리고
초가집에서 살아간다.
소를 초월했다. 그대가 그대 마음의 마스터가 되면 마음이 있다는 생각, 그것마저 사라져 버린다. 마음의 마스터가 되는 순간, 마음은 이미 거기에 있지 않다. 마음은 오로지 그대가 노예일 때에만 함께 따라다니는 것이다. 일단 그대가 소를 붙들고 올라타면 소는 사라진다. 그대가 마스터가 아닐 때에만 소는 그대와 다른 것으로 분리되어 존재한다. 이것을 이해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대는 마스터가 아닐 때에는 그대는 분리되어 있다. 그대는 정신분열증에 걸려 있으며 조각나 있다. 그러나 그대가 일단 소 등에 올라타게 되면, 각성과 수양 - 채찍과 고삐 -이 나타나게 되면 구분은 물거품같이 사라지고 그대는 하나가 된다. 그 합일 속에서는 소를 찾았다는 생각, 그것마저 지워진다. 그때에만 비로소 그대는 그대 자신을 마음과 분리하려 하지 않는다. 그대는 더 이상 그대 자신을 몸과 마음으로 분리시키지 않는다. 그대는 자신을 전체로부터 분리시키지 않는다. 그대는 하나가 된다. 모든 마스터들은 존재와 하나이다. 오직 노예들만이 분리되어 있다.
분리는 일종의 병이다. 건강하다면 그대는 전체로부터 분리되어 있지 않을 것이다. 그대는 전체 속에 합일되어 있을 것이다. 이를 이해하도록 하라. 그대의 머리가 아플 때 그대의 머리는 그대로부터 분리된다. 이를 주시해 본 일이 있는가? 두통이 그대의 머릿속을 두드릴 때 그대의 머리는 그대로부터 분리된다. 그러나 두통이 사라질 때 머리 또한 사라진다. 그때는 그대는 머리를 느낄 수 없다. 머리는 더 이상 그대와 분리되어 있지 않다. 이제 그대의 머리는 그대 존재의 일부가 되었다.
만약 몸이 완벽하게 건강하다면 그때는 그대는 어떤 육체적인 감각도 느낄 수 없을 것이다. 마치 몸이 없는 사람처럼 말이다. 몸이 없는 것 같은 느낌이 <완벽한 건강>의 정의인 것이다. 만약 몸의 어딘가가 아프다면 그대는 곧 느끼게 될 것이다. 그리고 바로 아프다고 느끼는 순간 분리가 있게 될 것이다. 발을 가시에 찔렸다고 하자. 혹은 구두가 꽉 조여서 발가락이 아프다고 하자. 그때에는 구분이 있게 될 것이다. 그러나 구두가 꼭 맞는다면 그 구분은 초월될 것이다.
그대의 마음이 어떻다는 것을 안다는 것은 그대의 삶이 하나의 화음을 이루고 있지 못하다는 것을 가리킨다. 무엇인가 불협화음이, 무엇인가 박자가 맞지 않는 것이 있다는 것이다. 거기에서 그대가 분리되어 있음을 느끼게 되는 것이다. 모든 박자가 딱 맞아 떨어질 때, 그리고 화음을 이루고 있을 때, 모든 구분은 초월될 것이다.
소 등에 걸터앉아……
그는 자기 자신의 에너지를 타고 있는 것이다. 에너지는 어딘가 다른 곳으로 흐르고 있지 않다. 그대 또한 어딘가 다른 곳으로 흐르고 있지 않다. 지금 두 개의 흐름이 한 방향으로 흐르고 있다. 투쟁은 사라졌다. 구분도 사라졌다. 그대는 더 이상 강물과 싸우지 않는다. 그대는 강물의 흐름을 따르고 있다.
강으로 가라. 우선 강과 투쟁하며 강을 거슬러 올라가려 해 보라. 그러면 강물이 그대와 싸우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그대는 강물이 그대를 침몰시키려 한다고 말하게 될 것이다. 결국은 강물이 그대를 침몰시키고 말리라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왜냐하면 지쳐 나무뿌리 하나 잡을 수 없는 순간이 오면 강이 이기고, 그대는 패배하게 될 것임을 알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면 다른 방법을 써 보라. 강을 따라 표류하라. 강물의 흐름 속으로 뛰어들어 보라. 그러면 잠시 후 그대는 강물이 그대와 싸우고 있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사실 상물은 그대와 조금도 싸우고 있지 않았다. 그대가 강물을 거슬러 올라가려 할 때 조차도 강물은 그대와 싸우고 있지 않았던 것이다. 오직 그대 혼자만이 이기적인 생각 속에서 싸우고 있었던 것이다. 무엇인가를 입증해 보이려고 애썼던 것이다. <나는 누구이다>라는 것을 증명하여 보이려고 애쓰고 있었던 것이다. 이렇게 <누구이다>라고 하는 바로 그 생각이 모든 문제거리를 만들어내는 것이다.
이제 그대는 그 누구도 아니다. 강물과 함께 표류하면서 깊은 해방감을 맛보라. 강은 더 이상 그대를 반대하지 않을 것이다. 아니 한 번도 반대한 적이 없었다! 오직 그대의 태도가 변하였을 뿐이다. 그런데도 그대는 강이 완전히 변하여 버린 것으로 느끼고 있는 것이다. 강물은 언제나 같았다. 지금 그대는 강을 타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대가 전체적으로 표류할 수 있다면, 헤엄치려는 그 어떤 노력도 하지 않고 그저 떠 있을 수만 있다면 그대는 그대의 몸과 강의 몸은 하나로 융합될 것이다. 그대의 몸이 어디에서 끝나는지, 강의 몸이 어디에서 시작되는지 모르게 될 것이다. 그때는 그대는 강과 유기적인 조화 속에 있게 될 것이다. 그때는 그대는 하나의 오르가슴을 경험하게 될 것이다. 강과 하나가 될 때, 돌연 모든 한계가 초월된다. 그대는 이미 하찮은 존재가 아니다. 또한 그대는 이미 거대한 존재도 아니다. 아아, 그대는 전체(the Whole)인 것이다.
소 등에 걸터앉아
나는 집으로 돌아왔다.
이렇게 하여 그대는 집으로 돌아온 것이다. 왜냐하면 집은 그대가 비롯된 바로 그 근원이기 때문이다. 집은 다른 어느 곳에 있는 것이 아니다! 집은 그대가 비롯된 곳이고, 그대가 솟아난 바로 그곳이다. 집은 근원이다. 만약 그대가 깊은 해방감 속에 내던져지는 것을 그대 자신에게 허락하기만 한다면 집으로 돌아갈 수 있을 것이다. <집>이란 삶과 실존의 근원으로 찾아가서 만난다는 뜻이다.
소 등에 걸터앉아
집으로 돌아왔다.
나는 고요하다……
그러나 그대는 어떤 방법으로도 고요히 있을 수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고요히 있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존재하지 않는 것, 그 길밖에 없기 때문이다. 고요히 있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깊은 해방감 속에 내던져져서 삶의 에너지와 하나가 되는 것, 그 길밖에 없다.
나는 고요하다.
소 또한 편히 누워 있다.
그대가 휴식을 취할 수 있다면 소 또한 쉴 수 있다. 그대가 휴식을 취할 수 있다면 강 또한 쉴 수 있다. 그러나 투쟁이 계속된다면 그대도 휴식할 수 없을 것이며, 신(神) 또한 쉬지 못할 것이다. 이것을 기억하라. 이것은 항상 기억해야만 할 매우 가치 있는 것이다. 만약 그대가 고요하지 못하다면 신 또한 고요할 수 없을 것이다. 만약 그대가 행복하지 않다면 신 또한 행복할 수 없을 것이다. 만약 그대가 지복(至福)으로 넘쳐흐르고 있지 못하다면 신 또한 지복으로 넘쳐흐를 수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대는 신의 일부이기 때문이다. 그대는 전체(the Whole)의 일부이기 때문이다. 그대가 신에게 영향을 주는 만큼 신 또한 그대에게 영향을 주는 것이다.
삶은 상호관계적인 것이다. 모든 것은 다른 모든 것과 서로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다. 삶이란 모든 것이 깊은 상호관계 속에 있는 하나의 사회 생태학이다. 모든 것이 하나의 사슬을 이루고 있다. 그러므로 그대가 행복하지 않다면 신 또한 행복할 수 없는 것이다. 그대가 그 일부분이기 때문이다. 만약 그대의 다리가 아프다면 어떻게 그대가 편안함을 느낄 수 있겠는가? 그 아픔은 그대에게 영향을 미칠 것이다. 뿐만 아니라 그대는 깊은 번민 속에 빠지게 될 것이다. 삶의 에너지 또한 그대와 함께 깊은 번민 속에 빠지게 될 것이다.
나는 고요하다.
소 또한 편히 누워 있다.
지복의 잠 속에서
새벽이 왔다.
나는 채찍과 고삐를 내버리고
초가집에서 살아간다.
이제 채찍과 고삐는 더 이상 필요하지 않다. 그대 자신이 삶의 강물과 하나가 되었음을 느끼기에 이르게 되면, 각성과 수양은 더 이상 필요하지 않게 된다. 그때는 명상도 더 이상 필요하지 않다! 그대가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삶이 그대를 위해 모든 것을 이루어준다. 그런 까닭에 그대는 전체적인 신뢰 속에서 휴식할 수 있는 것이다. 그때는 각성조차도 필요하지 않게 된다는 것을 기억하라.
처음 여행을 떠날 때는 각성이 필요하다. 처음 여행을 떠날 때에는 수양 또한 필요하다. 그러나 그대의 영성(靈性)이 성장함에 따라 그 사다리는 초월된다. 그대는 그것을 내던져 버릴 수 있다.
나는 채찍과 고삐를 내버리고
초가집에서 살아간다.
기억하라. 성자(聖者)라는 것은 그가 채찍과 고삐를 버릴 때에야 비로소 참다운 성자인 것이다. 바로 그것이 성자의 기준인 것이다. 아직도 그가 기도를 한다거나 명상을 한다거나 또는 이런저런 잡다한 일들을 하고 있다면, 즉 아직도 그 자신을 수양하고 있다면 그는 아직도 깨닫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그는 아직도 무엇인가를 계속하고 있는 것이다. <한다>는 것은 에고를 축적한다는 것이다. 그는 아직 집에도 달하지 못하였다. 여행은 아직도 끝나지 않았다.
중국에는 참으로 아름다운 선화(禪話)가 하나 있다.
어느 부유한 마나님이 어떤 수도승을 30년 동안이나 뒷바라지 해오고 있었다. 그 수도승은 항상 깨어 있었고, 또 수양으로 인해 매우 아름다워 보였다. 그 아름다움은 삶이 깨끗하고 신선하고 질서 잡혀 있을 때 자연히 오는 그런 것이었다. 이제 마나님의 나이가 많아 죽을 때가 가까워 오고 있었다. 그녀는 거리의 창녀를 불러 이렇게 말하였다. “내가 죽기 전에 꼭 한 가지 알고 싶은 것이 있단다. 내가 30년 동안 뒷바라지해 온 수도승이 득도를 하였는지를 말이다.” 마나님이 수도승에게 의심을 품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왜냐하면 수도승은 아직도 채찍과 고삐를 버리지 않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창녀가 물었다. “하오면 제가 어찌하면 되겠습니까?”
마나님은 말하였다. “돈은 네가 원하는 대로 주겠다. 너는 한밤중에 수도승이 도를 닦고 있는 암자로 찾아가거라. 암자의 문은 잠겨 있지 않을 것이다. 그에게는 도둑맞을 것이라곤 아무것도 없으니까 말이다. 너는 그저 문을 열고 들어가 그의 반응을 지켜만 보아라. 그에게 가까이 가서 껴안아 보아라. 그리고 나에게 돌아와 수도승이 어떤 반응을 보였는지만 말해 다오. 죽기 전에 참된 스님에게 봉사를 했는지 아니면 땡추에게 헛수고를 했는지 그것을 알고 싶구나.”
그리하여 창녀는 한밤중에 수도승이 도를 닦고 있는 암자로 찾아가 문을 열었다. 작은 등잔불이 켜져 있었다. 그는 명상 중에 있었으나, 바람에 등잔불이 흔들리자 눈을 크게 뜨고 창녀를 바라보았다. 앞에 서 있는 여자가 창녀라는 것을 알아차린 수도승은 놀란 나머지 부들부들 떨기까지 하였다. 그는 소리쳤다. “왜 이곳에 왔느냐?” 창녀가 그를 껴안으려 하자 그는 도망치려 하였다. 그는 벌벌 떨면서 어찌할 바를 몰랐다.
창녀가 마나님에게 돌아와 자초지종을 모두 고하였다. 마나님은 자기가 수도승에게 지어 주었던 암자를 불살라 버리도록 하인에게 명령하였다. 마나님은 말했다. “그가 도를 깨우쳤다면 좀더 친절하게 대하고 자비를 베풀 수 있었을 것이다.”
이 두려움은 그가 아직 채찍을 버리지 못했다는 것을 나타낸다. 이 분노도 아직 그의 각성이 자연스러워지지 못하고 아직 정진 중에 있음을 나타내는 것이다.
여덟 번째 경문 : 소와 나를 초월하다
처음에는 소를 초월하였다. 마음, 마음의 에너지, 삶, 삶의 에너지를 초월하였다. 그리고 그대가 삶을 초월하게 되었을 때, 그대는 그대 자신마저 초월하게 된다. 찾은 소와 찾은 나를 모두 지워버렸다.
채찍, 고삐, 사람
그리고 소…
모든 것이 무(無) 속으로 사라진다.
이 하늘은
너무도 광대하여
어떤 메시지도 닿을 수 없다.
어떻게 하여
눈송이가 활활 타는 불 속에
존재할 수 있는가?
여기에 스승들의 발자취가 있다.
마음이 사라지는 순간, 그대 또한 사라진다. 왜냐하면 그대는 격렬한 투쟁 속에서 존재하고 있기 때문이다. 에고는 긴장 속에서 존재한다. 에고는 이중성을 필요로 한다. 분열되지 않은 합일 속에서는 에고는 존재하지 못한다. 그러므로 주시하라. 그대가 투쟁을 할 때마다 그대의 에고는 매우 예민해진다. 하루 종일 지켜보라. 에고의 수많은 봉우리와 수많은 골짜기가 보일 것이다. 그리고 에고가 없는 순간도 보일 것이다. 그대가 어떤 투쟁도 하지 않는다면 에고는 거기에 없을 것이다. 에고는 오로지 투쟁 속에서만 존재한다.
여기에서 사람들은 자신들의 에고가 투쟁할 수 있도록 구실을 계속해서 만들어낸다. 왜냐하면 투쟁이 없으면 자신들의 에고는 그냥 사라져 버리고 말기 때문이다. 에고는 마치 자전거의 페달을 밟는 것처럼 끊임없이 투쟁을 창조해 낸다. 그대는 계속해서 자전거의 페달을 밟아야 한다. 오직 그때에만 자전거는 달릴 수 있다. 그대가 페달을 rp속해서 밟지 앙ㄴㅎ는다면 얼마 안 가서 자전거는 쓰러지고 말 것이다. 모든 중력을 물리치고 오직 두 개의 바퀴만으로 그대가 계속 움직일 수 있다는 것은 기적 같은 일이다. 그러나 그대는 계속해서 페달을 밟아야 한다.
에고는 하나의 기적과도 같다. 거의 환상 같으면서도 진짜인 것처럼 뚜렷하게 보인다. 사람들은 에고를 위해서 살고 에고를 위해서 죽는다. 그렇지만 그대는 끊임없이 페달을 밟아야 한다. 그것은 곧 투쟁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그대는 투쟁 없이는 살 수 없게 된다. 그대는 이런저런 식으로 투쟁의 구실을 만들어 낼 것이다. 만약 그대가 다른 사람들로부터 투쟁의 구실을 찾지 못한다면 그때는 그대의 아이들과 싸우기 시작할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그대의 남편이나 아내와 싸우기 시작할 것이다. 어떤 때는 아무런 이유도 없이 싸울 것이다. 사실 이유 같은 것은 별로 문제가 되지 않는다. 이유라는 것은 모두가 합리화의 한 방편일 뿐인 것이다. 그대는 투쟁하지 않고서는 직성이 풀리지 않을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그대는 사라지기 시작할 것이다. 마치 밑도 끝도 없는 심연 속으로 빨려 들어가듯이 말이다.
아침에 그대가 잠에서 깨어나면 몇 초 동안 에고가 없는 상태가 있다. 그대가 아주 순수하고 깨끗한 기분을 느낄 수 있는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 그러나 곧 세상이 시작된다. 밤새 잠 속에서조차 그대는 계속 싸우고 있었다. 그대는 악몽을 계속 만들어내고 있다. 그리하여 에고와 연결되어 있는 실이 완전히 끊어지지 않도록 말이다.
에고는 오로지 투쟁과 투쟁 사이에서만 존재가 가능하다 .비록 그대에게 투쟁할 것이 아무것도 없다 해도 그대는 이런저런 식으로 투쟁할 구실을 만들어내려 할 것이다.
며칠 전에 나는 한 번도 아내와 싸워 본 일이 없는 사람에 관한 이야기를 읽은 적이 있다. 그의 이웃들은 그 사람이 도대체 어떤 사람인지 매우 신기하게 생각하고 있었다. 그는 언제나 공장에서 집으로 행복하게 웃으며 돌아왔다. 그는 조금도 피로해 하거나 긴장하고 있는 것 같지 않았다. 그의 아내조차 가끔 남편을 의심해 볼 정도로 그는 싸우거나 화를 내는 법이 없었다. 어느 날 이웃들이 모두 몰려와 그에게 그 비결을 물었다. 그러자 그는 자초지종을 말했다. “그게 뭐 대단한 일인가요? 사실은 공장에서……” 그는 유리 공장에서 일하는 노동자였다. 그가 하는 일이란 불량 제품이 나올 때마다 그걸 받아서 부수는 일이었다. 그는 하루 종일 유리접시, 컵, 잔 등을 부수며 살고 있었다. 그가 말했다. “나는 아주 행복합니다. 사람들과 싸울 필요도 없어요. 안 그래도 난 너무 많이 싸우고 있거든요. 그것만으로도 충분해요. 나는 세상의 맨 꼭대기에 올라가 있는 기분입니다.”
그대는 잘 알고 잇을 것이다. 아내의 기분이 좋지 않을 때마다 많은 접시와 컵들이 깨지는 것을 말이다. 그것은 당연한 일이다. 에고는 언제나 이런저런 구실을 찾아앤다. 무엇이나 좋다. 실재하지 않는 어떤 가곡의 것일지라도 말이다. 무엇인가 때려 부수지 않으면 좀이 쑤신다. 그리하여 투쟁이 일어난다. 나무꾼들은 매우 조용환 사람들이다. 그들의 심리 상태는 보통 사람들과 다르다. 하루 종일 나무를 패면서 그들은 분노를 방출해 버린다. 그들은 끊임없이 카타르시스(catharsis) 속에서 살고 있다. 그들에게는 다이나믹 명상(Dynamic Meditation. 라즈니쉬에 의하여 고안된 명상법. 이 명상법의 특징은 눈을 가리어 외부에서 반사되는 거울의 영상을 차단하고 춤과 노래를 부르며 카타르시스를 맛보는 것이다. 그리고 에너지의 혼돈 상태에서 정적으로, 정적에서 다시 에너지의 혼돈 상태를 되풀이하면서 잠들어 있는 에너지를 흔들어 깨우는 것이다.)이 필요하지 않다. 그들을 만나 본다면 매우 애정이 깊은 사람들임을 알게 될 것이다. 사냥꾼들도 매우 애정이 깊은 사람들이다. 그들이 하는 일은 모두 폭력을 수반하는 일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매우 애정이 깊다. 그대는 사냥꾼보다 더 애정이 깊은 사람들을 찾아보기 어려울 것이다. 그들은 자신들의 에고를 그대에게 충돌시키려 하지 않을 것이다. 그것은 그들은 동물들을 상대로 분노를 이미 충분히 방출해 버렸기 때문이다.
만약 그대가 감옥으로 가서 죄수들을 만나보게 되면 소위 성자(聖者)라고 불리는 사람들보다 죄인들의 눈이 더 고요한 것을 보고 깜짝 놀라게 될 것이다. 그대가 소위 성자라고 부르는 사람은 화산 위에 올라앉아 끊임없이 무엇인가를 억압하고 있는 사람들이다. 그러나 죄수들은 아무것도 억압하지 않는다. 그들이 죄수인 이유도 바로 이 때문이다. 그들의 화산은 이미 터져 버렸다. 그들은 어느 면에서는 선한 사람들이다. 그들은 사뭇 조용하고 애정이 풍부하고 매우 성실하다. 그대는 그들을 신뢰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성자라고 믿고 있는 사람들은 신뢰할 수 없다. 그들은 위험한 사람들이다. 그들은 많은 독(毒)을 모아들이고 있다. 그들은 또한 실재하지도 않는 가공의 투쟁을 만들어 내야만 한다.
그대는 성자들의 이야기를 들어보았을 것이다. 악마들이 그들을 유혹하러 온다고 말한다. 그러나 악마는 아무 곳에도 없다. 악마 같은 것은 존재하지도 않는다. 그것은 그들 자신의 상상의 산물에 불과한 것이다. 그들은 무엇인가 투쟁을 필요로 하고 있다. 투쟁이 없으면 그들은 매우 심심해진다. 그들은 이제 더 이상 시장 바닥에다 그들의 에고를 내놓지 않는다. 그 살인적인 생존 경쟁에서는 졸업하게 된 것이다. 자, 이제 어디서 에고를 부양할 것인가? 어떻게 에고를 유지시킬 것인가? 정치에 발을 들어놓은 것도 아니다. 그러니 어디서 에고를 부양할 것인가? 그들은 시인이나 화가도 아니다. 그러니 어디서 에고를 부양할 것인가? 그들은 아무것도 하고 있지 않다. 어떤 살벌한 경쟁 속에서 투쟁하고 있는 것도 아니다. 그리하여 그들은 실재하지 않는 어떤 가공의 적을 만들어낸다. 악마가 바로 그것이다. 그리고 그들은 악마들과 투쟁하기 시작한다.
인도에는 푸라나(Purana)라고 하는 옛 성전(聖典)들이 있다. 그 안에는 성자들이 명상을 하고 있으면 그때마다 아름다운 여자들이 천국에서 내려와 그들을 유혹한다는 이야기가 많이 담겨 있다. 그들이 명상하면서 무슨 나쁜 일을 하는 것도 아닐 텐데. 무엇 때문에 그들에게 두려움을 느끼고 유혹하려는 것일까? 도대체 왜 그들을 혼란시키는 데 관심을 갖는 것일까? 그러나 압사라(apsarars) 천국에 이르면 아름다운 여자들이 춤추며 내려와 그들을 유혹한다. 그러면 성자와 천국의 여자들 사이에서 커다란 투쟁이 벌어지게 된다. 그들은 유혹을 극복하려 한다. 그러나 이러한 이야기들은 모두상상 속에서 만들어진 것들이다. 그들은 현실의 적을 떠나보내고 이제 가공의 적을 만들어 낸 것이다. 왜냐하면 에고는 적이 없이는 존재할 수 없기 때문이다.
투쟁은 필요하다. 현실적이든 비현실적이든 투쟁은 있어야만 한다. 투쟁이 있어야 그대는 거기에 있을 수 있다. 그러나 투쟁이 없으면 그대는 사라진다. 여기에서 그대는 내가 그대에게 줄 수 있는 이 최대의 메시지를 기억하라! 모든 투쟁을 떨쳐 버릴 수 있는 그 지점까지 꼭 가 보아야 한다는 것을 말이다. 오직 그때만이 그대 자신을 초월할 수 있다. 오직 그때만이 그대에게 손톱만큼의 에고도 남아 있지 않게 된다. 그대는 전체와 하나가 되는 것이다.
채찍, 고삐, 사람
그리고 소……
모든 것이 무(無) 속으로 사라진다.
모든 것을 잃어버릴 때, 광대한 무(無)가 솟아오른다. 이 텅 비어 있음(空)은 부정적인 것이 아니다. 그것은 모든 실존의 근원이다. 그러나 거기에는 아무런 한계가 없다.
이 하늘은
너무도 광대하여
어떤 메시지도 닿을 수 없다.
어떻게 하여
눈송이가 활활 타는 불 속에
존재할 수 있겠는가?
눈송이가 활활 타는 불 속에서 사라지듯, 이 무한한 전체의 에너지 속에서 모든 것이 사라진다 - 채찍도 고삐도 사람도 그리고 소도 모두 사라진다.
여기에 스승들의 발자취가 있다.
여기에서 처음으로 그대는 붓다들이 지나간 발자취를 보게 된다. 여기에서 처음으로 그대는 깨달은 사람들의 향기를 느끼게 된다. 그대는 붓다의 의미와 그의 깨달음을 알게 된다. 여기에서 그대는 그들의 노래를 듣게 된다. 새로운 차원의 문이 열린다. 우리는 이 차원을 일컬어 니르바나(nirvana), 해탈, 하나님의 왕국이라 부른다. 또 다른 어떤 이름으로 불러도 좋다. 그리고 이 왕국에는 지금까지 그대가 알고 있던 세계와는 완전히 다른 무엇인가가 열려져 있다. <여기에 스승들의 발자취가 있다> - 무(無) 속으로 걸어 들어가 그 안으로 사라져 버린 모든 위대한 붓다들의 발자취가 여기에 있다.
일곱 번째 경문의 산문 주해
모든 것은 둘이 아니라 하나의 법칙 아래 있는 것이다. 우리는 일시적인 주제로 소를 택했을 뿐이다. 그것은 토끼와 덫 혹은 물고기와 그물의 관계와 같은 것이다. 그것은 금덩어리와 찌꺼기 혹은 구름 속에 가리워졌던 달이 나타나는 것과 같다. 한 줄기 환한 달빛이 끝없는 시간을 통해 지나가고 있다.
일원성(oneness)은 존재의 본성(本性) 바로 그것이다. 이원성(twoness)은 우리들 상상의 산물에 불과하다. 그리하여 우리는 전 생애를 통하여 사랑을 동경하고 있는 것이다. 이 사랑을 향한 동경은 일원성이 존재하는 곳에 우리들이 거짓된 이원성을 만들어 놓고 있다는 표시에 지나지 않는다.
세상 어디를 가나 사랑하고 사랑받고 싶어하지 않는 사람은 찾아볼 수 없다. 왜 이렇게 모두 사랑을 바라는 것일까? 무엇인가 깊이 뿌리박혀 있음이 틀림없다. 삶은 하나이다. 그런데도 우리는 우지 자신이 삶과 분리되어 있는 것으로 생각하고 있다. 이제 그 분리는 심화되어 이제는 하나의 무거운 짐이 되어 버렸다. 사랑은 다시 한 번 전체와 하나가 되어 보려는 관념 이외에는 아무것도 아닌 것이다. 이런 까닭에 사랑받기를 갈망하게 되는 것이다. 여기에서 누군가에게 필요해지기를 갈망하게 되는 것이다. 이런 이유에서 누군가가 그대의 사랑을 받아 주었으면 하고 바라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전체와 하나가 되기란 참으로 어려운 일이다. 기껏해야 누군가가 그대를 받아줄 뿐인 것이다. 기껏해야 누군가의 문 앞에 다리를 놓을 수 있을 뿐인 것이다.
그대가 연애를 하고 있지 않을 때, 사랑을 끊임없이 생각하게 되는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 그리하여 사랑은 망령이 되어 그대를 언제나 따라다닌다. 그러나 그대가 사랑 속에 깊이 빠져 있다 해도 아직도 무엇인가 불만스러울 것이다. 무엇인가 모자라는 것 같은 기분이 언제나 그림자처럼 따라다닐 것이다. 연애를 하고 있지 않은 사람들은 사랑을 찾아다닌다. 연애를 하고 있는 사람들은 무엇인가 좀더 필요한 것을 얻어 내려고 한다. 고귀한 연인들일수록 마음 깊숙한 곳에 커다란 욕구 불만을 가지고 있다. 그들은 만남으로 인해 모든 것이 다 사라지는 듯한 지점에까지 이르게 된다. 그러나 거기에서 그들은 다시 한 번 뒤로 곤두박질친다. 그들은 얼핏 밀접한 관계를 보았지만 그것은 합일이 아니었다. 만약 그대가 정말 사랑하고 있다면 그대에게서 기도나 명상에 대한 욕구가 솟아오를 것이다.
기도에 매달리게 되는 까닭은 바로 “나는 사랑이 던져 주는 야릇한 섬광을 맛보았다. 그러나 사랑하기 전보다 더욱 갈증만 심해졌을 뿐이다.” 라는 것 때문이다. 그는 갈증을 느끼고 있었다. 그때 아름다운 강과 샘 그리고 그늘을 얼핏 보게 된다. 그는 샘의 노래를 듣는다. 그러나 노래는 곧 사라져 버린다. 그에게는 이제까지 느껴 보지 못했던 전혀 새로운 갈증이 솟아오른다. 연애를 하고 있지 않은 사람들은 괴로워한다. 그러나 연애를 하고 있는 사람들에 비하면 그 괴로움은 아무것도 아니다. 그들의 괴로움은 뼛속 깊이까지 강렬하게 스며든다. 왜냐하면 그들은 가까이 마주 앉아 있지만, 또한 멀리 떨어져 있기 때문이다. 바로 눈앞에 있는 듯 보이면서도 눈에 띄지 않아서 그들이 가까이 가면 갈수록 왕국은 멀어져만 간다. 그것은 마치 가까이 가면 갈수록 멀어지는 지평선과 같은 것이다.
사랑은 신(神)을 향한 첫걸음이다. 기도와 명상은 신을 향한 마지막 발걸음이다. 사랑은 그대에게 새로운 갈증을 가르쳐 준다. 사랑은 그대에게 새로운 굶주림을 가르쳐 준다. 이 때문에 사랑은 아름다운 것이다. 사람들이 나를 찾아와 사랑에 대하여 묻는다. 그러면 나는 “그 속으로 들어가라.” 하고 말한다. 그것이 위험한 것인 줄 잘 알면서도 나는 그렇게 말한다. 그러나 깊이 사랑을 한다고 해서 만족감에 이를 수 있다고 하는 것은 아니다. 누구든 그렇게 하여서는 만족감에 이를 수 없다. 나는 그들이 정말로 갈증을 느끼도록 하기 위해서 사랑의 열병 속으로 뛰어들라고 하는 것이다. 그리고 오로지 신만이 그 갈증을 풀어줄 수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을 정도로 목말라 하도록 하기 위하여 사랑에 뛰어들라고 하는 것이다.
사랑은 그대에게 심원한 갈증을 준비해 준다 - 신을 찾으려는 갈증을 준비해 준다. 왜냐하면 그대는 다른 사람의 샘으로부터 발하는 섬광을 볼 때, 신을 보는 순간을 경험하게 되기 때문이다. 그대는 다른 사람의 샘에서 깊은 위로를 얻는다. 그러나 그것은 순간적으로 나타났다가 덧없이 사라지는 그런 것이다. 현실이라기보다는 꿈에 더 가까운 그런 것이다.
어느 사람이 위대한 신비가 라마누자(Ramanuja, 1016~1091. 인도의 성자. 크리슈나의 호신 비슈누 숭배자로 알려졌으며 우파니샤드, 베단타, 바가바드 기타에 관한 그의 주석서가 있다.)를 찾아가서 말했다. “저는 신을 사랑하고 싶습니다. 길을 가르쳐 주십시오.” 그러자 라마누자는 말했다. “그보다 먼저 이것 하나만 말해 다오. 그대는 누구와 사랑을 해 본 적이 있는가?”
그 사람이 대답했다. “저는 이 세상이나, 이 세상에서 일어나는 일 같은 것에는 관심이 없습니다. 저는오로지 신만을 원합니다.”
라마누자는 말했다. “부디 다시 한 번 생각해 보라. 지금까지 어떤 여자나 하다 못해 어린 아이라든지, 그 누구를 사랑해 본 적이 없는가?”
그 사람이 말했다. “저는 종교적인 사람이라고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저는 세속적인 사람이 아닙니다. 저는 그 어떤 사람도 사랑하지 않습니다. 어떻게 하면 신에 이를 수 있는지 그 길만 가르쳐 주십시오.”
드디어 라마누자는 울음을 터뜨렸다. 그는 눈물을 줄줄 흘리며 말했다. “그렇다면 그것은 불가능하다. 먼저 그대는 누군가를 사랑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것이 신을 향한 첫걸음이다. 그런데 그대는 아직까지 신을 향한 그 첫걸음조차 떼어 보지 못했다. 돌아가서 누군가를 사랑하라!”
사랑이 그대의 갈증을 해소시키지 못하게 될 때 비로소 신이 필요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신의 필요성이나 사랑의 필요성은 모두 같은 길 위에 있는 것이다. 근본적으로 그것은 실제적으로는 우리는 전체와 분리되어 있는 것이 아닌데 우리가 분리되어 있다고 생각하고 있기 때문인 것이다. 여기에서 어떻게 하면 전체와 하나가 될 수 있을까 하는 욕망이 일어나게 되는 것이다.
그대가 누구와 사랑을 속삭이고 있다면 그대는 이미 첫걸음을 내딛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두 번째 걸음은 저절로 이어지게 된다. 참된 사랑은 필연적으로 기도를 향하여 인도한다. 만약 사랑이 기도를 향해 그대를 이끌지 못한다면 그것은 아직 사랑이라고 부를 수 없는 것이다. 그것은 참된 사랑이 아니다. 왜냐하면 참 사랑은 사랑한다는 것만으로는 채워질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참사랑은 더 이상의 것을 필요로 한다. 참된 사랑은 그대를 사원의 문으로 인도한다. 이것이 바로 참사랑의 기준이다.
모든 것은 둘이 아니라 하나의 법칙 아래 있는 것이다. 우리는 일시적인 주제로 소를 택했을 뿐이다.
경문은 소는 그대와 분리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고 말한다. 소는 일시적인 주제였을 뿐이다. 그대의 오해 속에서는 그런 일시적인 주제를 만들지 않으면 안 되었던 것이다. 그것은 그저 가설에 지나지 않았다. 사용 후에는 쓰레기통에 버리지 않으면 안 된다. 사용 후에는 그것을 초월하여야 한다. 그러므로 계속 투쟁하지 말라! 투쟁은 영원한 것이 되어서는 안 된다. 이것을 기억하라.
나는 전 생애를 통하여 계속 투쟁하는 사람들을 보아왔다! 이 삶에서뿐만 아니라 수많은 윤회전생을 통하여 그들은 싸우고 또 싸워 왔던 것이다. 그들은 전사(戰士)가 되어 버렸다. 이제 그들은 삶의 중요한 목적을 완전히 잊어버렸다. 투쟁 그 자체가 목적이 되어버린 것이다. 지금도 그들은 투쟁하고 있으며, 그 투쟁을 통해 교활한 에고를 계속 축적하고 있다. 그것은 대단히 장한 일일지는 모르나 유독한 것이다. 그들은 교활한 에고만을 계속 긁어모으고 있는 것이다. 고행자나 수도승들을 잘 보라. 그대는 그들로부터 강철과 같이 날카로운 에고를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세상 사람들의 에고는 그렇게 날카롭지 않다. 왜냐하면 세상 사람들은 자신들이 무지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나는 이런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어떤 노인이 고물상에서 주워 모아 조립한 중고 자동차의 시운전에 그의 어린 아들과 조카를 불러놓고, 차가 과연 쓸 만한지 지켜 보도록 하였다. 마침내 커브 길에서 차가 튀어 올랐다가 논두렁으로 처박히게 되자 그는 두 손으로 머리를 감싸쥐고 고개를 내저었다. “아버님 다치쳤어요, 병원으로 모실까요?” 하고 아들이 걱정스럽게 물었다. “아니야.” 하고 아버지는 심각한 듯 말하였다. “이런 고물차는 동물들이나 운전해야 하는 건데 말이야. 나는 수의사에게 데려다 줘.”
세속적인 사람은 자신이 멍청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그의 에고는 그렇게 날카롭지 않다. 그는 자기가 언제나 어리석은 것만을 쫓아다니고 있음을 잘 알고 있다. 또한 자신이 나약하다는 것도 잘 알고 있다. 게다가 덫에 걸린 다람쥐처럼 계속해서 쳇바퀴만 돌고 있음도 잘 알고 있다. 오랫동안 덫에 걸려 있었던 것을 후회하고 빠져 나오려고 수없이 결심도 해보지만 여전히 그는 다람쥐 쳇바퀴 돌 듯하고 있다. 그는 자신의 한계와 무기력함을 잘 알고 있다. 그리하여 그의 에고는 그렇게 날카롭지 못하다.
이런 일이 있었다.
어느 날 물라 나스루딘(Mulla Nasrudin. 이슬람의 현인이라는 뜻이다. 라즈니쉬는 이 이름을 여러 우화에 등장시키고 있다.)이 정신 병원을 찾아갔다. “나는 부자도 아니고 푹신한 병원 침대에 누워 있을 시간도 없습니다. 내가 여기에 온 것은 다만 두 가지 물어 볼 것이 있어서입니다.” 정신과 의사는 보통 때는 상업적으로 사람들을 대해 왔지만 이번만큼은 예외로 하기로 했다. “무슨 질문입니까?”
물라가 말했다. “첫 번째 질문은, 사람은 과연 코끼리와 연애를 할 수 있을 것인가 하는 것입니다.”
정신과 의사는 한참동안 심각하게 생각한 뒤에 말했다. “안 돼요. 코끼리와 연애를 하다니 그건 불가능합니다.” 물라는 실망했다. 저 의사의 말을 믿어도 될까? 의사는 의심할 여지도 없다고 말했다.
물라가 다시 말했다. “그러면, 다음으로 손가락에 맞지 않는 약혼반지를 필요로 하는 사람을 혹시 알고 계십니까?”
세상 사람들은 자신이 어딘지 모르게 바보, 멍청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 사랑을 해도 헛된 것만 사랑한다. 즉 코끼리나 돈, 권력, 명성 같은 것만 사랑한다. 그는 이 같은 사랑은 불가능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그는 자신이 잘못된 길을 걷고 있다는 것도 잘 알고 있다. 그러나 그는 그것에 저항하기에는 자신이 무기력하고 무능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그에게는 강력하고 예리한 에고가 있을 수 없다.
그러나 세상을 멀리 떠나 히말라야에 한번 다녀온 종교적인 수도사들에게서는 무한한 에고를 느낄 수가 있다. 그의 에고는 칼처럼 매우 예리하다. 물론 그것은 누구를 해치지는 않는다. 왜냐하면 그는 세상을 등졌으니까 말이다. 그것은 매우 다행한 일이지만, 그 칼은 결국 그 자신을 찌르게 된다. 그것은 자기 파괴적이다.
세상 사람들의 에고는 다른 사람들에게 상처를 입힌다. 그러나 세상을 등진 사람들의 에고는 오직 그 자신에게 상처를 입힐 뿐이다. 그들은 변태적이 되어 버렸다. 그들은 그들 자신과 투쟁하면서 자기 자신을 파괴하기 시작한다. 사실 그들은 자신이 만들어 낸 불행 속에서, 그리고 그 자신이 강요하고 있는 고통 속에서 교묘하게 전도된 기쁨을 누리고 있는 것이다. 그들은 비뚤어진 길을 바른 길이라고 착각하고 걷고 있는 것이다.
기억하라. 내가 그대들에게 깨어 있으라고 말할 때, 그것은 하나의 방편에 지나지 않는다. 내가 그대들에게 수양을 하라고 말할 때, 그것 또한 하나의 수단에 지나지 않는다. 그것은 그대들에게 유용한 하나의 수단에 지나지 않는다. 그것을 목적으로 삼지 말라. 언제나 기억하라. 그것은 어느 날 초월해 버려야 하는 것이다. 그러니 수단에 너무 집착하지 말라. 그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다. 우선 나는 사람들에게 명상을 하도록 가르쳐야 한다. 그러나 그들을 명상 속으로 밀어넣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어찌 되었건 그들은 명상 속으로 들어가게 된다. 그런 어느 날 나는 그들에게 명상을 털어버리라고 말한다. 그러나 그들은 계속 명상 속에 머물러 있고 싶어한다. 처음에는 그들은 도에 들어가려고도 하지 않았었다. 그러나 이제 그들은 너무 도에 집착하게 되었다. 이제 그들은 도를 팽개친다면 그들의 전 생애가 황폐되어 버릴 것으로 생각하고 있다. 이제 그들은 계단에, 사다리에 달라붙어 있는 것이다. 처음에는 그들은 명상 속에 들어가는 것을 두려워하였었다. 이제는 그들은 그것으로부터 떠나는 것을 두려워하게 되었다.
명상은 좋은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약(藥)과 같은 것이다. 명상(meditation)이라는 말은 약(medicine)이라는 말과 같은 어원에서 온 것이다. 그것은 약과 같은 것이다. 약은 그대가 병에 걸려 있을 때만 필요한 것이다. 건강할 때는 약은 내버려야 한다. 약, 그것은 목적이 아닌 것이다. 그대는 언제나 약병을 가지고 다녀서는 안 된다. 그리고 그대가 가지고 있는 약병을 흔들어 보이면서 자랑할 필요도 없는 것이다.
명상은 초월되어야 한다. 각성도 초월되어야 한다. 수양 역시 초월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리하면 그대에게는 나무를 베고, 우물에서 물을 긷고, 배고플 땐 밥을 먹고, 졸릴 땐 잠을 자면서 자연스럽게 살아가야 할 순간이 나타나게 될 것이다. 이 세상도 아니고 저 세상도 아니며 물질주의도 아니고 종교적도 아닌, 그냥 평범하게 살아가야 할 순간이 그대에게 펼쳐지게 될 것이다. 이러한 경지에 이른 참된 사람은 어떤 범주에도 속하지 않는다. 그는 범주를 넘어섰다. 그는 이미 논리를 넘어선 것이다.
우리는 일시적인 주제로 소를 택했을 뿐이다. 그것은 토끼와 덫 혹은 물고기와 그물의 관계와 같은 것이다. 그것은 금덩어리와 찌꺼기, 혹은 구름 속에 가려졌던 달이 나타나는 것과 같다. 한 줄기 환한 달빛이 끝없는 시간을 통해 지나가고 있다.
구름에 가려졌던 달이 나타날 때, 구름이 거기에 있었던 것은 그저 우연에 지나지 않는다. 그것은 달이 가지고 있는 본성의 일부가 아니다. 달이 구름 뒤에 숨어 있을 때, 그때에도 달은 달 그대로이다. 달이 구름 속에서 나온다 하더라도 마찬가지다. 무엇 하나 달라지지 않았다. 구름은 그저 순간적인 상태에 불과했다. 마음은 구름이다. 사념은 구름과 같은 것이다. 그대는 달이다. 세상은 구름과 같다. 세상은 그대를 조금도 변화시키지 않았다. 그대의 참된 본성은 어떠한 영향도 받지 않았다. 그대는 순수함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 그대는 신성함을 그대로 갖고 있는 것이다.
그대가 바로 신이라고 내가 항상 강조하는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 그것은 뒤로 미룰 필요가 없다. 거기에 구름이 있을지라도 달라질 것은 아무것도 없다. 달이 구름 뒤에 숨어 있을지라도 달라질 것은 아무것도 없는 것이다. 그대의 신성이 구름 뒤에 숨어 있을지라도 그대는 깨달을 수 있다. 달은 언제나 달인 것이다.
한 줄기 환한 달빛이
끝없는 시간을 통해 지나가고 있다.
여덟 번째 경문의 산문 주해
범용한 것은 사라졌다. 마음은 한없이 한없이 열려 있다. 나는 더 이상 깨달음 같은 것은 찾지 않는다. 또한 나에게는 깨닫지 못한 어떤 것도 남아 있지 않다. 나는 어떠한 상태에도 머물지 않아 눈으로는 나를 볼 수 없다. 백 마리의 새가 나의 길에 꽃을 뿌린다 해도 그러한 찬미는 무의미하다.
범용한 것은 사라졌다.
마음은 좋지도 나쁘지도 않은 것이다. 사람들은 누구의 마음은 평범하다고 말한다. 그러나 그것은 틀린 말이다. 왜냐하면 마음이란 어느 것이든 다 범용한 것이기 때문이다. 기억하라. 좋지도 나쁘지도 않은 것이 마음 그 자체의 성질인 것이다.
지성은 마음이 아니다. 지성은 마음 너머에 있다. 거기에 마음이 없을 때에야 지성이 있게 된다. 달이 구름 뒤에 숨어 있지 않을 때에야 그대는 환하게 빛나는 달을 볼 수 있다. 달이 구름 뒤에 숨어 있을 때는 구름이 빛을 방해한다. 그리하여 그대는 환한 빛을 보지 못하게 된다. 모든 지성은 구름 뒤에 숨겨진 환한 달과 같다. 구름은 마음이다. 그대는 무심(無心)이다.
범용한 것은 사라졌다. 마음은 한없이 한없이 열려 있다.
그리고 거기에 아무 한계도 없을 때 무심(無心)이 있게 된다.
나는 더 이상 깨달음 같은 것은 찾지 않는다.
모든 것을 알게 된 이 순간에 있어서 누가 깨달음 같은 것을 찾겠는가? 선(禪)에서는 수백 개도 넘은 아름다운 이야기들이 있다.
어떤 사람이 선의 스승에게 가서 “저는 붓다가 되고 싶습니다.” 라고 말하면서 가르침을 구했다. 그러자 스승은 그를 호되게 후려쳤다. 그리하여 그 사람이 “왜 저를 때리십니까? 제가 무슨 잘못을 저질렀습니까?” 하고 물었다. 그러자 스승은 말했다. “그대가 붓다이다. 그런데도 붓다가 되기를 원하는가? 그것은 불가능하다.”
붓다가 붓다가 되려 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그래서 그대가 다시 집으로 되돌아갈 수 잇도록 호되게 한 대 후려칠 필요가 있었던 것이다. 무디어진 그대의 감각이 다시 되살아날 수 있도록 그대를 호되게 때릴 필요가 있었던 것이다. 그대가 붓다이다.
가끔 그렇게 한 대 얻어맞는 것으로도 깨달음을 얻는 일이 일어났다. 그것은 얻어맞은 때가 적당했기 때문이다. 수많은 삶을 지나오면서 쌓여진 여정의 피로 끝에 바로 그때가 왔던 것이다. 물에 빠져 죽어가는 사람에게는 지푸라기 하나라도 소중하듯이 호되게 한 대 얻어맞은 것이 바로 하나뿐인 지푸라기와 같이 쓰였던 것이다.
이것은 어디까지나 진실이다. 그대가 바로 그대가 찾고 있는 그것인 것이다. 찾는 자가 찾고 있는 것이다! 그대가 찾고 있는 것은 미래의 어딘가에 있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바로 그대의 발밑에 있다. 그대가 서 있는 바로 그곳에 있다! 그대가 그것을 깨닫기까지는 시간이 걸릴지도 모른다. 그대가 그것을 깨달을 때까지는 몇 개의 삶을 보내야 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것에는 어떠한 변화도 있을 수 없다. 그대가 깨닫는 날, 그대는 스스로의 어리석음에 대해 웃음을 터뜨릴 것이다. 그것은 바로 그대의 발밑에 있었으니까 말이다.
범용한 것은 사라졌다. 마음은 한없이 한없이 열려 있다. 나는 더 이상 깨달음 같은 것은 찾지 않는다. 또한 나에게는 깨닫지 못한 어떤 것도 남아 있지 않다.
모든 경지가 초월되었다. 깨달음이나 깨닫지 못한 것이나, 이 세상이나 니르바나(nirvana)나 모든 것이 초월되었다.
여덟 번째의 그림에는 아무것도 그려져 있지 않다. 동그란 원 이외에는 아무것도 없다. 소도 소를 찾는 자도 없다. 채찍, 고삐, 소, 사람 이 모두 사라져 버리고 없다. 순수하게 텅 비어 있을 뿐이다.
도가(道家)에서는 이 여덟 번째 그림으로서 끝난다. 그도 그럴 것이 도교에서는 다른 무엇이 더 있을 수 있다는 것을 몰랐기 때문이다. 그것을 끝나버린 것이다!
모든 것이 사라져 버렸다. 이제 무엇이 더 있을 수 있겠는가? 무(無) 만이 있을 뿐이다. 모든 것이 초월되었다. 이제 무엇이 있을 수 있겠는가? 순수한 초월만이 있을 뿐이다. 그러나 곽암은 두 개의 그림을 더 만들어 내었다. 그야말로 위대한 창조자였다. 그러나 도가에서는 팔우도에서 끝난다.
이것이 도(道)와 선(禪)의 다른 점이다. 이것이 또한 불교와 선의 차이점이다. 붓다 역시 팔우도에서 머물고 싶어하였다. 그의 제자들인 달마 대사, 곽암, 마조(馬祖道一, 709~788. 중국 사천 출생으로 19세 때 출가하여 중국 唐代에 대선사로 불려짐. 그에 의하여 깨달음을 얻은 사람의 수가 무려 백 삼십 명에 이르렀다고 한다. 마조는 平常心是道를 주창하였으며, 일상 생활 속에서 禪을 실천하는 새로운 禪宗이 그 무렵부터 시작되었다고 한다.)는 그들의 스승을 뛰어넘었던 것이다. 선(禪)은 곧 불교가 아니다. 그것은 불교 이상의 것이다. 그것은 궁극의 개화이다. 마치 붓다 또한 더욱 진화되어야 할 여지가 있었던 것처럼 말이다. 몇몇 마스터들의 영향으로 얼굴 전체가 달라졌다. 선은 완전히 새로운 종교를 이 세상에 출현시켰다.
선은 인류 미래의 종교가 될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어떻게 버릴 것인가를 가르치기 때문이다. 또한 그것은 버리는 것마저 어떻게 버릴 것인가를 가르치기 때문이다. 그것은 초월하는 것마저 초월할 수 있도록 가르친다. 그것은 매우 모순된 것처럼 보이지만 그렇지 않다. 왜냐하면 초월하는 것마저 초월하게 되면 그대는 세상으로 다시 돌아오게 되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원은 완성된다.
붓다에 있어서는 그 원은 아직 완성되지 못하고 있다. 니르바나는 니르바나대로, 세상은 세상대로 따로따로 분리되어 있다. 깨달은 사람은 깨달은 사람대로, 깨닫지 못한 사람은 깨닫지 못한 사람대로 따로따로 분리되어 있다. 선은 그 사이에 다리를 놓는다. 궁극의 개화라는 것은 깨달은 것도 깨닫지 않은 것도 아니다. 범주를 넘어서는 것이다. 그는 세상에서 살고 있다. 그러면서도 그는 세상에서 살고 있지 않다. 그는 세상에서 살고 있다. 그러나 그의 안에는 세상이 없는 것이다. 그는 연꽃이 되어 있는 것이다.
연꽃이 되라. 물속에 있으라. 그러나 물속에 빠지지는 말라.
히말라야에 가서 순수하게 있기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다른 무엇이 될 수 있겠는가? 그대는 순수해지는 것조차 피할 수 없을 것이다. 그대의 히말라야를 다시 세상으로 가져오라. 그대의 히말라야를 이 세상, 지금 그리고 여기에 있게 하라. 그대의 히말라야를 시장 바닥, 지금 여기에 있게 하라. 그때에야 비로소 그대를 시험하고 평가할 수 있다. 참된 평가는 이 세상에서만 이루어질 수 있는 것이다. 만약 그대가 참된 열반에 이르렀다면 세상으로 돌아오게 될 것이다. 왜냐하면 그대에게는 어떤 두려움도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제 그대는 아무 곳에나 갈 수 있다. 그곳이 지옥이라 할지라도 그대에게는 천국일 것이다. 어둠도 빛이고 죽음도 삶일 것이다. 이제는 그 무엇도 그대를 혼란시킬 수 없을 것이다. 그대가 이른 곳은 전체이고 완전이며 궁극이다.
연꽃이 되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