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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hy me? 이승현 (연세대 러시아어과 석사과정) 난 대중들 앞에 글을 써서 내보이는 데는 익숙치 못하다. 설령 그럴 경우가 있 다 하더라도 되도록 개인적인 일상을 배제하는 것이 원칙이라면 원칙이다. 그럴 것이 아직 난 다른 이들과 내 삶을 나눌만한 무슨 교훈이 될 만한 일이나 경험을 해 본 적이 없고 그만한 나이도 아니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또 섣부른 생각을 대중 앞에 내 놓는다는 것이 얼마나 위험한 일인가 정도는 알고 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도 교훈이나 귀중한 지혜는 커녕 늘 “Why me?(왜 하필 나야)”를 되뇌 이고 살아온 별 볼 일 없는 삶이기 때문이다. 몇 년 전 사기를 당했을 때만 해도 그저 내가 처신을 잘못했거니 라고 생각했 다. 사람들과 문제가 생겼을 때도 무언가 내가 이해할 수 있는 합리적인 원인에 대한 결과라고 생각을 했다. 비록 내 지력이 아직 미숙해서 이해할 수 없을 뿐이 지, 내 삶의 부분에 전생이나 또는 오직 믿음의 영역에서만 의미가 있는 기준들 을 제시하고 싶지 않았다. 작년 크리스마스를 이틀 앞두고 아내와 차를 타고 집으로 오는 길에 연쇄추돌 사고가 일어났다. 가만히 서 있는 차를 누군가가 들이받는 바람에 우리 차까지 모두 세 대가 피해를 입었다. 이것은 내가 법을 어긴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교 통신호 체계가 잘못된 것도 아니었다. 그 일로 며칠을 고생했다. 기독교인은 아 니지만 이미 축제가 되어버린 크리스마스에 지인들을 초대해 파티를 할 계획을 망쳐버린 것은 물론 그 이후로도 일을 하지 못한 채 병원 신세를 져야 했다. 남 들은 삼재라서 그런 일을 당한 것이라고 심하게 다치지 않은 것이 다행이라고 한다. 그리고 잊지 않고 덧붙이는 말이 있다. “조심 좀 하고.” - 아! 그러나 조심 해서 될 일이 아니지 않는가. 그 일이 있고 보름도 지나기 전에 동생의 집에서 불이 났다. 4층에 살던 동생 은 3층에 살던 사람이 실수로 낸 불로 인해, 서울 와서 3년을 고생해서 모았던 재산을 모두 잃었다. 그나마 같이 살던 친구가 깨워 목숨은 건졌으니 다행이라 고 해야 할까. 그러나 이 책임을 지기에 억울한 사고에 대해선 어떻게 생각해야 할까? 어떤 이는 원인 모를 병에 시달리고, 평생을 제 발로 걷지 못하는 이도 있 다. 거기에 비해서 난 행복한가? 어떤 이는 조실부모해서 남들이 상상하지도 못 할 정도로 어렵게 살기도 하고, 어떤 이는 사고로 정신을 잃어 실성한 채 살기도 한다. 전쟁 중에 살고 있는 이들, 또 가난한 국가에 태어나 삶의 기회를 잃은 이 들. 비교적 나는 행복하다고 말할 수 있을까? “Why me?”라는 질문을 던졌을 때, 독실한 개신교인인 나의 지인은 그것은 어 리석은 질문이라고 했다. ‘그 질문이 어리석다’라는 말만이 그 우문에 답할 수 있 는 최선의 현답이라고 말했다. 우리가 알 수 없는 부분은 하느님의 것이다. 겸손 히 받아들이는 일-기도말고는 아무 것도 할 수 있는 일이 없다는 게 그 이의 설 명이다. 그럴 수 있다. 타력을 빌어 신앙하는 것도 나쁘다고 할 수는 없는 일이 다. 불가에서는 이 질문에 어떤 식으로 답을 할까? “Why me?” 아마 업보나 인과로 설명하지 않을까? 그러나, 나는 이 ‘인연과’에 대해 오랫 동안 의심을 품어왔다. 내가 전생의 ‘나’를 기억조차하지 못하는데, 정체성에서 전혀 일치감을 느끼지 못하는데 어째서 그 책임은 떠 안아야 하는가? 전생의 ‘나’는 현생의 타인만큼이나 먼 존재인데, 왜 그 ‘나’라는 단어에 대해서는 그렇 게 친근감을 느끼는 것일까? “Why me?”란 질문은 내게 화두같이 걸리게 되었다. 그 질문은 “왜 하필 내게 이런 일이 생겨?”에서 “왜 하필 ‘나’란 말인가? “로 그리고, 결국 ‘나’란 무엇인가 라는 질문으로 바뀌어 버렸다. 그 해답의 실마리라도 잡게 된 것은 아주 우연한 기회였다. 아내의 손에 이끌려 광륜사에 동선 스님을 만나러 갔을 때였다. 참 맑고 유머 러스한 모습은 전해들은 그대로였다. 점심 공양을 하고 찻집으로 자리를 옮겨 한담을 나누고 있었다. 갑자기 그 질문이 나왔다. “Why me?” - 갑작스럽게라곤 하지만, 질문이란 본 질적으로 오래 품어온 상념이 스스로 튀어나오는 것이다. “그게 말이죠, 실체가 있으면 윤회를 하지 못해요. 물을 보세요, 수증기도 됐 다가 구름도 됐다가, 물도 됐다가, 얼음도 됐다가, 물이 어디 실체가 있습니까.” 스님의 손가락은 다탁에 놓인 유리 잔을 어루고 계셨다. 듣고 보니 참, 평범한 말이었다. 그러나, 이 상식적인 비유를 통해, 전혀 합리 적이지 않은 것이라고 믿어왔던 것을 이해할 수 있었다. 내가 나라고 느끼고(아 픔과 고통과 기쁨과 행복함), 나의 기억이라고 간주하고(나의 추억과 나의 이력 과 나의 능력), 나의 것이라고 소중히 여기고 있던 것(재물과 인간관계)들이 실 체가 없는 것이라면, “Why me?”는 참 어리석은 질문이겠다라는 생각을 했다. 만약 사람이 곤충마냥 탈피를 한다면, 그래서 10년에 한 번씩 전혀 다른 사람 이 되어 버린다면, 즉, 인생의 기회가 여러 번 생기는 대신, 과거를 기억하지 못 하고, 얼굴과 생김이 바뀌어 버린다면, 그리고 그 사실을 누구나 잘 알고 있다 면. 여전히 누군가가 나를 때린다면 난 아플 것이다. 그러나 혼자 아프다고 생각 하진 않겠다. 살면서 불시에 우연한 사고를 당하게도 될 것이다. 그 때 “Why me?”라고 대상 없는 질문을 더 이상 던지지는 않을 것 같다. 이 시각에도 누군가 가 고통스러워 할 것이다. 그러나, 나의 감성을 넘어서는 곳에 그 사람은 결코 혼자 고통을 받진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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