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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회 한국산서회와 함께 하는 인문산행
미수의 발자취와 추사의 글씨가 새겨진 계곡
노고산 삼하리와 독재동의 바위글씨를 찾아서
글/심산(한국산서회)
사진/서영우(한국산서회)
노고산(老姑山)은 우리나라에서 가장 흔한 산명(山名)들 중의 하나다. 전국에 산재해 있는 노고산들은 대개 그다지 높지 않고 산세가 부드러우며, 바위보다는 흙이 주종을 이루는 육산(肉山)이라는 공통점을 가진다. 한마디로 할머니의 젖무덤처럼 나지막하되 포근하고 아늑한 산이다. 그래서 나는 전국의 모든 노고산들은 그 본명이 ‘할미산’이었으리라 추정한다. 노고(老姑)란 우리말 할머니의 한자식 표기에 불과한 것이다.
경기도의 양주시 장흥면과 고양시 효자동의 경계를 이루고 있는 노고산(老姑山, 487m)은 때때로 ‘한미산’이라는 이명(異名)으로도 불린다. 이때의 한미산에는 두 가지의 한자 표기가 병존하는데, 하나는 한미산(漢美山)이고 다른 하나는 한미산(漢尾山)이다. [여주도서]와 [파주읍지] 등에는 한미산(漢美山)이라고 표기되어 있고, [해동지도]와 [광여도] 등에는 한미산(漢尾山)이라고 표기되어 있다.
북한산을 가장 멋지게 조망할 수 있는 산
한미산(漢尾山)이라는 산명을 놓고 흥미로운 해석이 있다. 이 산이 “북한산의 꼬리(漢尾)에 해당하므로” 그렇게 부른다는 것이다. 지도를 펼쳐놓고 산세를 짚어보거나, 실제로 노고산 정상에 올라 탁 트인 조망을 둘러보면, 어느 정도 수긍이 가는 해석이기도 하다. 산사람들에게 이 산은 무엇보다도 “북한산을 가장 멋지게 조망할 수 있는 산”으로 손꼽힌다. 실제의 정상에는 군부대가 주둔하고 있어 그 바로 아래의 헬기장을 정상으로 간주하는데, 이곳에서 바라보는 파노라마야말로 ‘북한산의 진면목’이라 해도 좋을 만큼 최고의 절경인 것이다. 서울 인근에서는 드물게 백패킹이 허용된 곳이어서 주말마다 온통 울긋불긋한 텐트들로 불야성을 이룬다.
하지만 한미(漢尾)를 ‘북한산의 꼬리’라고 해석하는 데에는 무리가 따른다. 현재 이 글을 쓰고 있는 나의 집필실 창문 바로 앞에 보이는 자그마한 야산의 이름도 노고산(106m)이다. 마포구에 속해 있으며 흔히 ‘서강대 뒷산’이라 불리는데, 이 산의 이명 또한 한미산(漢尾山)인 것이다. 역시 견강부회식의 해석이 따라붙는데 “한양의 서쪽 끝에 있어서” 그렇게 부른다고 한다. 나의 견해는 보다 직관적이며 단순하다. 그저 ‘할미산’을 한자로 표기할 때 의역한 것이 ‘노고산’이요 음역한 것이 ‘한미산’이라는 것이다.
오늘 우리가 찾을 노고산은 오랫동안 도외시되었던 산이다. 단지 ‘북한산의 조망처’로 인식되거나 백패커들의 천국으로 활용되었을 뿐, 그 산 자체가 지니고 있는 또 다른 의미에 대해서는 별다른 조명이 이루어지지 않았던 것이다. 오늘 우리는 이 산이 남 몰래 품고 있던 선조들의 문화유산들을 찾아내고 그것들이 갖고 있는 의미에 대하여 깊이 천착해볼 것이다.
낙산에서 사전을 만들고 노고산에 잠들다
2018년 8월 11일(토) 아침, 구파발역 앞의 광장으로 하나둘씩 모여들기 시작한 참가자들은 저마다 머쓱한 웃음을 지었다. 한마디로 이 땡볕 더위를 무릅쓰고 기어이 산에 오르겠다고 여기까지 나온 스스로가 민망했던 것이다. 정말 올여름은 더워도 너무 덥다. 주최측 역시 이 더위에 산에 가자고 하기가 민망하여 산행공지를 알리는 데에도 의식적인 태업을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열다섯명 가까운 인원이 모여 주었다. 주최측으로서는 그저 감사할 따름이다.
구파발역에서 버스를 탄 일행들은 삼하리 비석거리 정류장에서 내린다. 본격적인 산행에 앞서 노고산 자락에 있는 지봉 이수광(1563-1628)의 묘역을 둘러보기 위해서다. 단순히 오늘의 답사코스 주변에 있기 때문에 들른 것은 아니다. 그의 삶 자체가 오늘의 주제와 깊은 관련이 있다. 묘역 옆에 독립된 건물로 비각(碑閣)이 있는데, 지봉 삼대(三代)의 삶을 각각 새겨놓은 비(碑)들이 나란히 서 있다.
묘역은 삼단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맨 아래는 지봉의 아들 이성구, 가운데는 지봉의 아버지 이희검, 그리고 맨 위에 지봉이 모셔진 역장(逆葬)의 형식을 취하고 있다. 지봉의 묘 뒤쪽으로 올라 풍수를 살핀다. 노고산에 등을 기대고 앞으로 흐르는 공릉천 너머 경기도의 나지막한 산들을 편안하게 굽어보는 형상이다. 지봉 삼대의 묘역이 어떤 연유로 이곳 노고산 자락에 자리 잡게 되었는지에 대해서는 관련기록을 찾을 수 없다. 그가 가장 밀접한 관계를 맺었던 산은 한양의 좌청룡이자 서울 종로구와 성북구의 경계를 이루고 있는 낙산(駱山, 125m)이다.
이수광이 자신의 호로 삼은 지봉(芝峯)은 낙산에 실재하고 있는 한 봉우리의 이름이다. 그가 유년시절을 보냈으며 훗날 말년에 이르러 저 유명한 [지봉유설]을 집필한 곳이 바로 낙산의 비우당(庇雨堂)이다. 비우당에서 빤히 올려다 보이는 작은 봉우리가 바로 지봉인데, 지초(芝草)가 많이 자라서 붙여진 이름이다. 지초는 약재로도 쓰이고 염색용 물감으로도 쓰인다. 비우당 바로 뒤에는 자지동천(紫芝洞泉)이라는 바위글씨와 샘이 남아있는데, 바로 정순왕후(단종비)가 궁에서 쫓겨난 뒤 빨래와 염색으로 모진 목숨을 이어가던 현장이기도 하다.
이수광의 [지봉유설]은 조선 최초의 백과사전이라 할만한 역작이다. 그는 시대를 앞서 간 코스모폴리턴이었다. 청나라의 문물을 높이 평가하고, 그들을 통하여 전해진 서양문명 역시 과감하고 개방적으로 받아들였다. 예수회 선교사인 마테오 리치와 천주교의 교리서인 [천주실의]를 최초로 국내에 소개한 것이 바로 이 책이다. 이러한 지적 활동은 무엇을 뜻하는가? 시대의 변화에 눈감은 채 여전히 명나라만을 떠받들고 청나라의 존재조차 무시하려했던 ‘조선성리학적 세계관’에 정면으로 도전했다는 뜻이다. 후대에 이르러 그를 ‘실학의 선구자’로 떠받들게 된 것은 이 때문이다.
삼하리 바위글씨를 초탁하는 즐거움
지봉 이수광의 묘역을 떠나 삼하리의 마을길로 접어든다. 한국 TV역사상 최장수 드라마 프로그램으로 유명한 [전원일기]의 상당 부분을 이 마을에서 촬영했다. 그래서 마을의 애칭이 ‘전원일기마을’이다. 양촌리 김회장(최불암)이니 일용엄니(김수미)니 하는 낯익고 정겨운 캐릭터들의 모습이 마을 담장에 그려져 있다. [전원일기전시관]을 지나치자마자 왼쪽으로 난 샛길로 접어든다. 이정표는커녕 그 어떤 표식도 없어 초행자라면 절대 찾아갈 수 없는 길이다. 공릉천으로 흘러드는 작은 개울 하나가 졸졸 흐르는 보잘 것 없는 계곡이다. 이곳에 숨겨진 바위글씨들이 산재해 있다.
한국산서회 인문산행팀의 조장빈 이사가 이곳의 바위글씨들을 발견한 것은 무려 5년 전의 일이다. 그는 즉시 문화재 지정을 신청했으나 해당 관공서에서는 아직까지도 묵묵부답이다. 덕분에 이곳에는 공식명칭이 없다. 우리는 편의상 이곳을 ‘삼하리 바위글씨(군)’이라 부른다. 계곡의 위쪽에서부터 아래쪽으로 순서대로 나열해보면 다음과 같다. 여사천(如斯川, 흐르는 물과 같이) 임술(壬戌), 승상금강만이봉(勝賞金剛萬二峰, 금강산 만이천봉을 감상하다), 백발산청(白髮山靑, 내 머리는 희어졌는데 산은 여전히 푸르구나), 경사독만천(經史讀滿天, 경전과 사서 읽기를 하늘에 가득 차도록), 고송(高松, 높은 소나무).
이들 글씨들 중 ‘여사천 임술’은 송월재 이시선(1625-1715)이 썼음이 확실하나 나머지 글씨들은 그 유래를 알 수 없다. 송월재는 잠시 후 우리가 답사하게 될 ‘추사필적암각문’과도 관련이 있으니 그에 대한 설명은 뒤로 미룬다. 삼하리 바위글씨들을 바라보는 심정은 착찹하다. 글씨들 자체가 빼어나다고는 할 수 없지만 그 제작년도나 의미로 보아 문화재로 대우받는 것이 마땅해 보이는데, 이렇듯 마구잡이로 방치되어 있는 모습이 안쓰러운 것이다. 작고 보잘 것 없는 계곡이긴 하지만 예전에는 나름 아름다웠을 듯도 한데 누군가 수로공사를 한답시고 막무가내로 돌을 쌓고 시멘트로 발라버린 모습 또한 흉측하기 이를 데 없다.
이곳의 바위글씨들은 아직 탁본조차 되어있지 않다. 우리는 참가자들에게 초탁(初拓)의 즐거움을 선사해드리기로 했다. 탁본에는 습탁(濕拓)과 건탁(乾拓)이 있다. 습탁은 젖은 솜에 먹을 묻혀 하는 것인데 상당한 전문적 기량을 필요로 하고 시간도 많이 걸린다. 건탁이란 이를테면 초등학생들이 우툴두툴한 표면에 종이를 대고 크레용 따위로 문지르는 행위와 비슷한 것으로 일종의 약식탁본이다. 비록 건탁이지만 초탁을 해본 참가자들이 웃옷이 흠뻑 젖도록 땀을 흘리면서도 즐거워하시는 것을 보니 기쁘고 고맙다. 언젠가 따로 시간을 내어 이곳의 바위글씨들을 모두 습탁해 놓을 계획이다.
미수가 다녀가고 추사의 글씨가 새겨진 계곡
삼하리에서 독재동을 향하여 노고산 산허리를 에둘러 돌아간다. 독재동 바위글씨군은 문화재로 지정되어 있는데 그 공식명칭이 ‘노고산독재동추사필적암각문’(경기도 기념물 제97호)이다. 이곳에 남겨져 있는 추사필적이란 몽재(夢齋)를 말하는데, 그 왼쪽 아래에 추사(秋史)라고 병기되어 있다. 이곳 노고산에 새겨진 모든 바위글씨들 중 단연 군계일학의 명필이어서 “과연 추사로구나!”하는 찬탄이 절로 나온다.
그런데 추사가 과연 이곳 노고산 독재동을 방문해서 저 글씨를 써주었는지는 분명치 않다. 그가 자주 방문했던 북한산이 지척이니 이곳도 다녀갔을 개연성은 있으나 해당기록을 찾을 수 없다. 심지어 몽재가 누구인지조차 확인하기 힘들다. 이 문제에 대한 거의 유일한 문헌은 성재 허전(1797-1886)이 자신의 문집에 남긴 [몽재집서]인데, 몽재의 문집에 서문으로 써준 글이다. 이 글 중 몽재를 설명한 대목에 이런 구절이 있다. “서산(西山)의 독재동(篤才洞)에 집을 짓고 미옹(眉翁)의 구지(舊址)를 삼았으니, 선생을 사모한 풍화이다.”
여기서 서산이란 물론 노고산을 가리킨다. 그렇다면 미옹은? 바로 미수 허목(1595-1682)이다. 우리는 미수야말로 노고산에 의미를 부여한 가장 중요한 인물이라고 생각한다. 노고산 독재동에 대한 가장 오래된 유산기는 미수가 자신의 문집인 [기언]에 남긴 [고양산수기]다. 이 기록에 따르면 그는 64세가 되던 무술년(효종 9년, 1658년), 독재동에 집을 짓고 살던 누군가와 더불어 이곳에서 노닐며 “저곳에는 집을 지을 만하고, 저곳에는 밭을 일굴 만하며, 저곳은 탁족을 할 만하고, 저곳은 놀 만하다.”고 하였다.
현재 독산동에는 미수의 발자취가 다수의 바위글씨들로 남아있다. 제일 먼저 미수선생장구지소(眉叟先生杖履之所, 미수선생이 지팡이를 짚고 다녀간 곳). 어떤 이는 이것을 미수의 글씨라고 말하나 당치 않다. 미수는 ‘동양 제일의 전서대가’로 손꼽혔던 대서예가였다. 이 글씨들은 평범하다 못해 졸렬하다. 미수를 흠모하고 따르던 그의 후학들이 새겼을 것이다. 그 이외의 바위글씨들 즉 가탁천(可濯泉), 만의와(萬懿窩), 충서근(忠恕勤), 유마폭(流磨瀑) 등은 모두 위에 언급한 미수의 [고양산수기]에서 그 이름을 따온 것들이다.
그렇다면 이 바위글씨들은 누가 언제 새긴 것일까? ‘미수선생장구지소’ 글씨의 왼쪽에는 ‘독재동’과 ‘임술’이 새겨져 있고, 오른쪽에는 ‘이시선’이라고 새겨져 있다. 독재동의 입구에 마치 문패처럼 새겨진 ‘독재동’ 바위글씨 옆에도 ‘임술’이 새겨져 있다. 독재동에서 제일 커다란 바위(세칭 지붕바위라고 한다)에 새긴 글씨는 상당히 긴 내용인데 그 글의 말미에 새긴 사람의 서명이 들어있다. 역시 이시선이다. 우리가 올라올 때 들렀던 삼하리 바위글씨군 중 ‘여사천’을 비롯하여 이 글씨들은 모두 송월재가 임술년에 새긴 것이 분명하다.
송월재는 누구이고 임술년은 어떤 해인가? 송월재는 두말할 나위도 없이 미수를 흠모하고 따르던 사람이다. 그렇다면 임술년은? 바로 미수가 졸(卒)한 해(1682년)이다. 즉 송월재는 1682년에 미수가 졸했다는 비보를 듣고, 그를 애도하고 기리고 싶은 마음에 이곳에 찾아와 바위글씨를 남겼던 것이다.
이상의 사실들을 간략히 정리해보면 다음과 같다. 노고산에는 삼하리 바위글씨군과 독재동 바위글씨군이 있다. 이 글씨들을 쓴 사람들 중 필자가 분명히 밝혀진 사람은 송월재와 추사다. 송월재는 여사천(삼하리), 독재동, 지붕바위글씨, 미수선생장구지소(독재동) 등을 썼다. 추사는 몽재(독재동)를 썼다. 나머지 글씨들은 누가 썼는지 알 수 없다. 독재동에 있는 나머지 글씨들은 미수의 [고양산수기]에 나온 내용들을 바위에 새긴 것이다. 몽재와 성재를 동일인물로 보는 논문도 있으나 우리는 동의하지 않는다. 몽재는 미수를 사모하여 독재동에 자리를 잡았던 사람이다.
노고산은 근기남인들의 근거지였다
이제 오늘 답사하고 공부한 내용들을 정리할 시간이다. 추사 김정희(1786-1856)를 제외한 모든 등장인물들 즉 지봉 이수광(1563-1628), 미수 허목(1595-1682), 송월재 이시선(1625-1715), 성재 허전(1797-1886) 등을 하나로 꿸 수 있는 키워드가 있을까? 있다. 바로 이들 모두는 근기남인(近畿南人)들이었다. 추사가 글씨를 써준 몽재는 미수의 추종자였다. 지봉은 훗날 남인들에 의하여 ‘실학의 선구자’로 추앙되었다. 미수는 두말할 나위도 없이 ‘남인의 영수’다. 송월재는 주요 활동지가 안동이었으므로 영남남인(嶺南南人)에 속하지만 미수를 흠모하여 이곳 노고산에 바위글씨를 새겼다. 성재는 근기남인을 대표하는 당대 최고의 유림종장이었다.
나는 초야에 묻혀 지내던 66세의 미수가 감히(?) 송시열에 정면으로 반기를 들고 기해예송을 시작하던 바로 그 순간(현종 1년, 1660년)을 한국사 최고의 명장면들 중 하나로 본다. 이한우는 구봉 송익필(1534-1599)을 가리켜 ‘조선의 숨은 왕’이라고 했다. 그렇다면 우암 송시열(1607-1689)은 ‘조선의 진짜 왕’이다. [조선왕조실록]을 통틀어 그 이름이 3,000번 이상 거론된 유일한 인물이 바로 우암이다. 구봉이 기획하고 우암이 지배한 서인 ‘노론천하’에 가장 강력한 타격을 가한 인물이 미수다. 그리고 그가 이끌었던 남인들을 ‘근기남인’이라 부른다.
근기남인들의 세계관은 서인노론들의 세계관과 확연히 달랐다. 서인노론들이 여전히 고리타분한 주자학에 얽매어 있는 동안, 근기남인들은 여타의 최신 학문들을 기꺼이 받아들였다. 그 물꼬를 튼 것이 지봉 이수광이다. 서인노론들이 관념론에 머물렀다면, 근기남인들은 실재론으로 나아갔다. 이들이 조선 후기에 실학을 꽃피운 장본인들이다. 하지만 당쟁 최후의 승자는 여전히 노론이었다. 그것이 우리 근현대사 최악의 비극이다. 그리고 노고산은 한양을 장악한 ‘노론천하’에 맞서 경기지역에 포진했던 ‘근기남인 근거지’들 중의 하나였다. 그것이 우리가 찾은 노고산의 인문학적 의미다. 지봉이 굳이 이 산기슭에 묻히기를 선택한 것도 혹시 이런 맥락 때문은 아니었을까.
미수선생장구지소에서 노고산 정상을 향하여 조금 더 계곡을 거슬러 올라가면 입산석(入山石)이라고 새겨진 바위가 있다. 열댓 명의 인원들이 둘러 앉아 음식을 나누기에는 여기만한 장소가 없다. 태양은 여전히 이글거리고 있지만 나무 그늘 아래로 들어가 앉으니 제법 선선하다. 계곡물 역시 가물었으나 발목을 담글 정도는 된다. 일행들은 입산석 위의 공터에 둘러앉아 마른 목을 축이고 주린 배를 채우며 저마다 덕담들을 건넨다. 이 더운 날씨에 여기까지 찾아와 탁본도 하고 탁족도 하니 선인들의 유산행각이 바로 이와 같았을 것이다. 한국산서회의 인문산행은 그렇게 한여름을 통과한다.
월간 [사람과 산] 2018년 9월호
첫댓글 행사 당일에는 서영우 회원이 병원에 입원해 있는 관계로 참가하지 못했습니다
1번째 5번째 사진은 조장빈 이사가 찍은 것이고
2번째 사진은 경기도 공식 블로그의 자료사진이며
나머지 사진들은 제가 찍은 것들입니다
제가 찍은 사진들 중의 일부는 행사 당일이 아니라 2017년의 어느 비오는 날에 찍은 것입니다
비가 왔던 관계로 바위글씨들이 보다 선명하게 보입니다
[사람과 산]에 나갈 때는 그냥 '사진 서영우'로 내보내기로 하였습니다
머리가 어지럽네요~~ 팀장님의 지식대방출입니다.두고두고 읽어볼 기해예송과 근기남인에 대한 역사네요^^
재을이 유럽여행 잘 다녀왔냐?
너 없으니까 인문산행 진행이 개판이다....ㅎㅎㅎ
ㅠㅠ
심산 이사 수고했습니다. 원고료 톡톡히 받아야 하겠습니다.^^
고증에 충실하고, 연구한 흔적이 역력합니다. 즐겁게 감상합니다,
후기 감사합니다.
역쉬~~~수고하셨어요!!!
정리가 확실하게 되네요~^^
감사합니다~ㅎ
어머낫!
제 사진이 대문짝만하게 실렸네요!
더운날 인문산행
저는 탁본 실제로 해보는 영광에
몸둘바 모르게 기뻤습니다!
바위글씨 어렵지만
듣는 귀 열어 놓고
귀담아 들으며 마음에 새기고 새깁니다
감사합니다!
함께 못해 많이 아쉬웠어요. 출근하는데 버스가 제차를 들이받아 병원 다니고 있었습니다. 이제 많이 좋아졌어요. 담에 뵙겠습니다.
무더위에 고생하셨습니다. 아무리 되짚어 봐도 송월재는 아니신듯...
미수의 고양산수기를 다시 한번 읽어보시길...
3년전 글입니다.
http://cafe.daum.net/wawoonru/Zn7o/13
홍하일님의 견해 잘 읽어보았습니다
무척 흥미로운 가설이로군요
앞으로 글쓸 때 참조하도록 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링크된거 읽을수가 없네요~~개인적인 견해을 많은 회원들이 보게끔 캡처해서 올리시면 더 좋겠네요^^
함께하지 못했지만 자세한 설명 잘 읽고 갑니다.
수고하셨습니다
송월재의 주 활동지역이 안동이라고는 하나 활동 지역만을 놓고 영남남인으로 분류하기에는 다소 어려움이 있을 듯 합니다. 처가가 류성룡의 문인 월간(月澗) 이전(李㙉, 1558~1648)에게 연결되는 점, 그의 생존시기를 기준으로 그의 가계가 안동에 정착한 시기가 100년이 채 되지 않았을 것(아버지 이영기 때 안동에 정착)으로 추정되는 정황 등을 생각하면 그가 17세기 후반 영남 남인의 주류였던 학봉 계통 문인과는 다소 구분되는 계통에 있었던 것으로 추측됩니다.
특히 처조부인 이전은 동생인 창석 이준과 함께 류성룡 문하에서 수학한 인물로 상주 지역 서애문인 집단에 속합니다. 상주지역 서애문인은 정경세와 이준을 중심으로 하는 집단이고 두 사람 사후, 영남남인의 정체성이 이현일을 위시로 하는 학봉 계열로 정립되어가는 과정에서 일부 이탈, 축소되는 경향이 보인다는 점을 생각해 보면 그와 혼맥 관계로 얽혀 있었던 송월재 역시 영남남인의 주류 계통과 좀 구분이 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물론 명확한 사승 관계 자료가 나타나질 않아서 확실하게 이렇다 저렇다는 말할 수 없지만요.)
저도 송월재가 영남남인의 주류와는 얼마 간의 거리를 두었으리라 추정합니다
다만 그것을 입증할만한 자료를 찾을 수가 없군요
좋은 문제제기 혹은 지적에 대하여 감사드립니다
앞으로도 많은 가르침 부탁드립니다
주제 넘은 지적에도 너그러이 받아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