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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부 지성의 능력 또는 인간의 자유에 관하여
서론
마침내 나는 자유에 도달하는 방법 내지 도정(道程)에 관한 [에티카]의 다른 부분으로 넘어간다. 나는 이 제5부에서 이성의 능력에 관해 논할 것이다. 다시 말해 이성 자체가 감정에 대해 무엇을 행할지를 제시하고, 나아가 정신의 자유 내지 지복(至福)이란 무엇인가를 보여 줄 것이다. 그것으로부터 우리는 현자가 무지한 사람보다 얼마만큼 유능한지를 알 것이다.
그러나 지성이 어떠한 방법과 어떠한 도정으로 완성되어야 하는가, 나아가서 신체가 그 기능을 올바로 수행하기 위해서는 어떠한 기술로 양호(養護)되어야 하는가에 대해서는 여기에서는 취급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전자는 논리학에 속하며, 후자는 의학에 속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여기에서는 내가 말한 바와 같이, 정신 내지 이성의 능력만을 논할 것이다. 특히 그것이 감정을 억제하고 통솔할 때, 감정에 대해서 가지고 있는 권의의 범위와 본성을 보여줄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가 감정에 대해서 절대적 권위를 갖지 못한 것은 이미 증명하였기 때문이다. (249쪽)
[주] 스피노자의 논리학은 지성이 어떻게 완성되어야 하는지에 관한 논구로서 [지성개선론]에서 설명하고 있다. 따라서 스피노자의 [지성개선론]은 스피노자에 의한 [논리학]이다. (278쪽)
* 스피노자의 지향인 '인간의 자유'는 붓다가 설하신 '해탈'과 상통하며, 제5부 제목의 '지성의 능력'은 이성의 능력에 의해 완성되는 지성이기에 그렇게 표현된 것임(정리40의 계, 정리42의 증명 참조). (박희택)
정신의 능력은 내가 앞에서 설명한 것처럼 오로지 타당한 인식작용에 의해서만 결정되기 때문에, 감정에 대한 요법 ― 내가 믿는 바로는 그러한 요법은 누구나 경험하여 알고 있으나 다만 그것들을 정확하게 관찰하거나 명확하게 식별을 하지 않을 뿐이다 ―을 우리는 정신의 인식에 의해 결정하고 이 인식으로부터 정신의 지복에 관한 모든 이끌어 낸다. (252쪽)
공리
1. 만일 동일한 주체 속에 두 가지 상반되는 활동이 일어난다면, 그것들은 대립이 그칠 때까지 양자 또는 어느 한쪽에 반드시 변화가 일어난다.
2. 결과의 본질이 그 원인의 본질에 의해서 설명되거나 규정되는 한, 결과의 힘은 그 원인의 힘에 의하여 규정된다. (252쪽)
정리
정리1. 사유와 사물의 관념이 정신 속에서 질서있게 배열되고 연결됨에 따라서 신체의 변화 또는 사물의 표상도 신체 속에서 질서있게 배열되고 연결된다. (252쪽)
정리2. 만일 우리가 정신의 움직임 또는 감정을 외부 원인의 사유로부터 떼어놓고 다른 사유와 결합시킨다면, 외부 원인에 대한 사랑이나 미움, 그리고 그러한 감정에서 생기는 정신의 동요는 사라질 것이다. (253쪽)
정리3. 수동적인 감정은 우리가 그 감정에 대해서 명료하고 판연한 관념을 형성하자마자 곧 수동적이지 않게 된다.
계 : 그리하여 우리가 감정을 보다 더 잘 인식함에 따라서 그만큼 감정은 우리의 지배 아래 있으며, 또 정신은 그만큼 감정으로부터 영향을 덜 받는다. (253쪽)
정리4. 우리가 어떤 명료하고 판연한 개념을 형성할 수 없는 신체적 변화는 아무것도 없다. (253쪽)
주해 : 어떤 결과를 낳지 않는 것은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으며(제1부 정리36에 의해서) 또 우리는 우리 속에 있는 타당한 관념에서 생기는 모든 것을 명료하고 판연하게 인식하기 때문에(제2부 정리40에 의해서) 다음과 같은 결론이 나온다. (...) 우리들이 특히 노력해야 할 것은 각 감정을 가능한 한 명료하고 판연하게 인식하고 정신이 감정으로부터 떠나서 명료하고 판연하게 지각하고, 그리고 자신이 전적으로 만족하는 사유로 옮아가도록 한다. 즉, 감정 자체를 외부 원인의 사상으로부터 분리하여 참된 사상과 결합시키는 것이다. 이것에 의해 사랑과 미움 등이 사라질 뿐만 아니라(제5부 정리2에 의해서) 또한 그러한 감정이 일으키는 충동이나 욕망도 과도해질 수 없다(제4부 정리61에 의해서). 왜냐하면 인간이 그것에 의하여 작용한다(능동)고 말하고 또 거꾸로 작용을 받는다(수동)고 말하는 것도, 동일한 충동에 의한 것이라는 것을 특히 주의해야 하기 때문이다. (...) 감정을 진정으로 인식하는 이상으로 뛰어난 요법은 우리의 능력 속에 없다. 왜냐하면 사실 정신의 능력이라고 해도 위에서 설명한 것처럼 정신은 사색하고, 타당한 관념을 형성하는 것 이외의 능력을 가지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제3부 정리3에 의해서). (254-255쪽)
정리5. 우리가 단순히 상상(표상)할 뿐이고, 필연적이나 가능적 또는 우연적이라고 상상할 수 없는 대상에 대한 감정은 기타의 사정이 같다면 모든 감정 가운데서 가장 크다. (255쪽)
정리6. 정신은 모든 것을 필연적인 것으로 인식하는 한, 감정에 대해서 좀더 큰 능력을 가지며, 또는 감정으로부터 영향을 받는 일이 적다.
증명 : 정신은 모든 것이 필연적이라는 것(제1부 정리29에 의해서), 그리고 원인의 무한한 연결에 의하여 존재와 작용이 결정된다는 것을 인식한다(제1부 정리28에 의해서). 따라서 (제5부 정리5에 의해서) 정신은 이러한 대상으로부터 생기는 감정에 의해서 영향을 받는 일이 좀더 적도록 또 (제3부 정리48에 의해서) 그러한 것에 대해 자극을 느끼는 일이 좀더 적도록 할 수 있다. (255쪽)
정리7. 이성(理性) 간에 생기는 감정이나 이성에 의해서 환기되는 감정은, 만일 시간이라는 점에서 본다면, 존재하지 않는 것으로 관조되는 개체에 관한 감정보다 더 강력하다. (256쪽)
정리8. 어떤 감정을 환기하기 위해서 동시에 작용하는 원인의 수가 크면 클수록 그만큼 그 감정은 클 것이다. (256쪽)
정리9. 정신이 동시에 관조하는 많은 다른 원인에 관계되는 감정은 단 하나의 원인 또는 소수의 원인에 관계하는 동등한 크기의 다른 감정의 경우에 비해 해가 적을 것이며, 영향도 덜 받을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 각 원인에 대해서 자극을 받는 일이 보다 적다. (257쪽)
정리10. 우리는 자기의 본성과 대립되는 감정에 동요되지 않는 동안은 지성과 일치한 질서에 따라서 신체의 변화에 질서를 부여하고 연결하는 능력을 가진다. (257쪽)
주해 : 주의해야 할 일은 우리가 사고와 표상상에 질서를 세움에 있어서 언제나 기쁨의 감정에서 행위가 결정되도록, 개개의 사물 가운데서 선한 점에 주목해야 한다는 것이다(제4부 정리63의 계와 제3부 정리59에 의해서). (...) 가능한 한 덕과 덕의 원인을 인식하여, 덕의 진정한 인식에서 생기는 기쁨을 가지고 마음을 채우도록 노력할 것이다. (259-260쪽)
정리11. 표상상(表象像)은 보다 많은 대상에 관계하면 할수록 그만큼 빈번히 나타난다. 다시 말해 그 자체만으로 빈번히 나타나며 그만큼 정신을 더 많이 점유한다. (260쪽)
정리12. 사물의 표상상은 다른 표상상에 연결되는 것보다 명료하고 판연하게 인식하는 사물에 관한 표상상과 더 쉽게 연결된다. (260쪽)
정리13. 표상상은 보다 많은 다른 표상상과 결합함에 따라서 그만큼 자주 나타난다. (260쪽)
정리14. 정신은 신체의 모든 변화 또는 사물의 표상상을 신의 관념에 연관시킬 수 있다. (261쪽)
정리15. 자기와 자신의 감정을 명료하고 판연하게 인식하는 사람은 신을 사랑한다. 그리고 그는 자신과 자신의 감정을 더 많이 인식할수록 그만큼 더 신을 사랑한다. (261쪽)
[주] 신에 대한 사랑은 스피노자 철학의 하나의 핵심을 이루고 있다. 이 점에서 그의 철학은 무신론이라고 불리면서도 신에 대한 사랑을 교의로 삼는 유대교, 그리스도교의 전통 위에 서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스피노자의 경우에 그 사랑은 신을 그 자체로 직접적으로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인식, 즉 개개 사물의 인식에 의한 신에 대한 사랑이다. 인식이 사랑에 선행한다는 점에서 그는 토마스 아퀴나스의 주지주의적인(의지보다 지성을 존중하는) 사랑과 같은 기반 위에 서 있다고 할 수 있다. (...) 감정 역시 그에 의하면 신의 본질을 일정한 방식으로 표현하는 신의 양태, 개개 사물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감정의 인식에는 신의 관념이 따른다. (278-279쪽)
정리16. 신에 대한 이 사랑은 다른 무엇보다도 정신을 많이 점유해야 한다. (261쪽)
정리17. 신은 어떠한 수동에도 관여하지 않으며, 또 어떠한 기쁨이나 슬픔의 감정에도 동요되지 않는다. (261쪽)
계 : 신은 아무도 사랑하지 않으며 또 미워하지도 않는다. 왜냐하면 신은 (제5부 정리17에 의해서) 어떠한 기쁨이나 슬픔의 어떠한 감정에도 동요하지 않으며, 따라서 (감정의 정의6과 7에 의해서) 신은 아무도 사랑하거나 미워하지 않는다. (262쪽)
[주] 신은 기쁨이나 슬픔과 같은 인간적인 감정을 갖지 않는다. 이것은 제1부에서 설명한 신이 의지나 지성을 갖지 않는 것처럼, 스피노자의 신의 비인격성을 나타내고 있다. (279쪽)
* [도덕경]의 '天地不仁, 聖人不仁(제5장)'이나 '天道無親(제79장)'과 상통함. (박희택)
정리18. 아무도 신을 미워할 수 없다.
증명 : 우리 내부에 있는 신의 관념은 타당하고 완전하다(제2부 정리46과 47에 의해서). 그러므로 우리는 신을 관조하는 한에 있어 활동한다(제3부 정리3에 의해서). 따라서 (제3부 정리59에 의해서) 신의 관념을 동반한 어떠한 슬픔도 존재할 수 엇다. 말하자면 (감정의 정의7에 의해서) 아무도 신을 미워할 수 없다. (262쪽)
정리19. 신을 사랑하는 사람은 신이 자신에게 사랑으로 보답하도록 노력할 수는 없다.
증명 : 만일 인간이 이것 때문에 노력한다면 그는 (제5부 정리17의 계에 의해서) 자기가 사랑하는 신은 신이 아니기를 바랄 것이다. (262쪽)
정리20. 신에 대한 이 사랑은 시샘이나 질투의 감정으로 더럽혀질 수 없다. 오히려 보다 많은 사람이 같은 사랑의 유대에 의해서 신과 결합한다고 우리가 표상한다면 이 사랑은 그만큼 많이 함양된다.
증명 : 신에 대한 이 사랑은 우리가 이성의 명령에 따라서 추구할 수 있는 최고의 선이다(제4부 정리28에 의해서). 그리고 이 최고선은 모든 사람들에게 공통되며(제4부 정리28에 의해서) 우리들 모두가 그것을 즐기고 싶어한다(제4부 정리37에 의해서). 그러므로 이 사랑은 (감정의 정의23에 의해서) 시샘의 감정에 더럽혀질 수 없으며, 또 (제5부 정리18과 제3부 정리35의 주해에 있는 질투의 정의에 의해서) 질투의 감정에 의해서도 더럽혀질 수 없다. 반대로 (제3부 정리31에 의해서) 이 사랑은 더 많은 사람들이 그것을 즐긴다고 우리가 표상하면 할수록 더 강해진다. (263쪽)
주해 : 이상으로써 나는 감정에 대한 모든 요법을, 또는 그 자체에서만 보인 정신이 감정에 대해서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총괄하였다. 이것으로부터 감정에 대한 정신의 능력은 다음과 같은 점에 있다는 것이 명백하다. (1) 감정의 인식 자체 안에(제5부 정리4의 주해를 볼 것), (2) 우리가 혼란하여 상상하는 외부 원인의 사상으로부터 감정을 분리하는 데에(제5부 정리2와 정리4의 주해를 볼 것), (3) 우리가 인식하는 대상에 관계하는 감정은 우리들이 혼란 또는 훼손하여 파악하는 대상에 관한 감정보다 지속에 있어 우월하다는 점에(제5부 정리7에 의해서), (4) 사물의 공통적 특질 내지 신에 관한 감정을 함양하는 원인은 다수라는 것에(제5부 정리9와 11에 의해서), (5) 정신이 자신의 감정을 조정하고 그것들을 서로 연결할 수 있는 그 질서 속에(제5부의 정리10의 주해 및 정리12, 13 그리고 14를 볼 것). (263-264쪽)
정리21. 정신은 신체가 지속하는 동안 외에는 아무것도 표상할 수 없으며, 또한 과거의 어떤 것도 상기할 수 없다. (265쪽)
* 스피노자의 '몸철학'에 관한 언명임. (박희택)
정리22. 그러나 신 안에는 이 또는 저 인간 신체의 본질을 영원한 상(相) 아래 표현하는 관념이 필연적으로 존재한다. (265쪽)
정리23. 인간 정신은 신체와 함께 완전히 파괴될 수 없으며, 그 중 어떤 것은 영원한 것으로서 남는다. (266쪽)
[주] 이것은 신체는 없어지더라도 정신은 남는다는 이른바 영혼불멸성과는 다르다. 스피노자가 말하는 정신의 영원성이란 두 가지 원리에 의존하고 있다. 그 하나는 사물이 존재하는 방식에 있는데, 즉 일정한 시공 속에 존재하는 현실적 존재와 신 속에 포함되어 있고 신의 필연성에 의해서 나타나나는 존재, 본질의 존재이다. 다른 하나의 원리는 심신평행설로서 만일 신체가 없어진다면 정신 역시 없어진다는 것이다. 그러나 본질의 존재는 시간의 제약을 받지 않기 때문에 영원한 존재이다. 그러므로 만일 정신 신체 본질의 존재로 표현한다면 그 정신은 영원하다. 이 때문에 그가 말하는 정신의 영원성을 자칫하면 영혼불멸설로 오해하기 쉽다. (279쪽)
정리24. 우리는 개체(사물)의 대상을 더 많이 인식하면 할수록 그만큼 더 많이 신을 인식한다. (267쪽)
정리25. 정신의 최고의 노력과 덕은 제3종의 인식에 의해서 사물을 인식하는 것이다. (267쪽)
정리26. 정신은 사물을 제3종의 인식에서 인식하는 일에 더 많이 적합할수록 그만큼 더 많이 이러한 종류의 인식에 의해서 사물을 인식하려고 한다. (267쪽)
정리27. 이 제3종의 인식으로부터 존재 가능한 최고의 정신의 만족이 생겨난다. (267쪽)
증명 : 정신의 최고의 덕은 신을 인식하는 것이다(제4부 정리28에 의해서). 즉 제3종의 인식에서 사물을 인식하는 것이다(제5부 정리25에 의해서). 이 덕은 정신이 이런 종류의 인식에 의해서 보다 많이 인식할수록 그만큼 더 크다(제5부 정리24에 의해서). 그러므로 사물을 이런 종류의 인식에서 인식하는 사람은 인간의 최고의 완전성에 도달하며 따라서 (감정의 정의2에 의해서) 최고의 기쁨에 자극을 받는다. 그리고 이 기쁨은 (제2부 정리43에 의해서) 자기 자신과 자기의 덕을 동반한다. 그러므로 (감정의 정의25에 의해서) 이 종류의 인식으로부터 존재 가능한 최고의 만족이 일어난다. (267-268쪽)
* 정신으로 신과 사물을 인식하는 것이 범신론임. (박희택)
정리28. 제3종의 인식에서 사물을 인식하려는 노력이나 욕망은, 제1종의 인식에서는 일어날 수 없으나 제2종 인식에서는 일어날 수 있다. (268쪽)
정리29. 정신은 영원한 상 아래 인식하는 모든 것을 신체의 현재의 현실적 존재를 생각함으로써 인식하는 것이 아니라, 신체의 본질을 영원한 상 아래 생각함으로써 인식한다. (268쪽)
정리30. 우리의 정신은 그 자신과 신체를 영원한 상 아래 인식하는 한 필연적으로 신의 인식을 가지며, 또 자신이 신 속에 있으며 신에 의해서 생각하고 있다는 것을 안다. (269쪽)
정리31. 제3종의 인식은 정신 자체가 영원한 한에서 형상적 원인으로서 정신에 의존한다. (269쪽)
정리32. 우리는 제3종의 인식에서 인식하는 모든 것을 즐기며, 그리고 우리의 즐거움은 그 원인으로서 신의 관념을 동반한다.
증명 : 이 종류의 인식으로부터 존재 가능한 최고의 평온이 나타난다. 바꾸어 말하면 (감정의 정리25에 의해서) 정신 자체의 관념을 동반하는 최고의 기쁨이 나타난다(제5부 정리27에 의해서). 그리고 (제5부 정리30에 의해서) 그 원인으로서의 신의 관념을 동반한 기쁨이다.
계 : 제3종의 인식으로부터 필연적으로 신에 대한 지적 사랑이 생긴다. 왜냐하면 이 종류의 인식으로부터는 (제5부 정리31에 의해서) 원인으로서의 신의 관념을 동반한 기쁨, 다시 말해 (감정의 정의6에 의해서) 신에 대한 사랑이 생겨난다. 게다가 신을 현존하는 것으로 표상하는 한의 신에 대한 사랑이 아니라 (제5부 정리29에 의해서), 영원하다고 인식하는 한에 있어서의 신에 대한 사랑이다. 이것이 내가 신에 대한 '지적 사랑'이라고 하는 것이다. (270쪽)
[주] '신에 대한 지적 사랑(Amor Dei intellectualis)'이란 말은 스피노자 철학의 핵심을 표현하는 말이다. 스피노자는 제5부 정리15에서 '신에 대한 사랑'은 감정의 깊고 명료하고 판연한 인식에서 나타난다고 주장하였는데, 여기서는 개개 사물의 본질을 인식함으로써 '신에 대한 지적 사랑'이 나타난다고 주장하고 있다. 후자의 '지적 사랑'과 마찬가지로 신의 관념을 동반하는 기쁨이라고 규정하는 이상, 양자의 사랑에 본질적인 차이는 없다. 도리어 양자는 동일하다. 왜냐하면 그에 의하면 감정 역시 개체라고 보기 때문에, 그것을 명료하고 판연하게 인식하는 일은 결국 개체의 본질을 인식하는 것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279쪽)
정리33. 제3종의 인식에서 생겨나는 신에 대한 지적 사랑은 영원하다.
증명 : 제3종의 인식은 (제5부 정리31과 제1부 공리3에 의해서) 영원하다. 그러므로 (제1부의 같은 공리에 의해서) 그것으로부터 생겨나는 사랑은 필연적으로 영원하다. (270쪽)
주해 : 신에 대한 이 사랑은 시초가 없지만(제5부 정리33에 의해서), 그것은 제5부 정리32의 계에서 우리가 가정한 것처럼, 마치 처음으로 비롯하는 것처럼 사랑의 모든 완전성을 지니고 있다. 오직 한 가지 다른 점은 지금 우리가 처음으로 획득한다고 생각하였던 완전성을 정신이 영원이 소유하고 있으며, 그리고 영원한 원인으로서의 신의 관념을 동반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만일 기쁨이 보다 큰 완전성에로 넘어가는 데 존재한다고 한다면, 복지는 참으로 정신이 완전성 자체를 소유하는 데 있다고 해야 한다. (370-271쪽)
* '복지'는 '지복'을 칭함. (박희택)
정리34. 정신이 수동에 속하는 감정에 지배되는 것은 오직 신체가 지속하는 동안뿐이다.
증명 : 표상이란 정신이 그것에 의해서 대상을 현존하는 것으로 관조하는 어떤 관념이다(제2부 정리17의 주해에 있는 상상=표상의 정의를 보라). 그러나 이 관념은 외부 대상의 본성보다도 인간 신체의 현재 상태를 더 많이 표시한다(제2부 정리16과 계2에 의해서). 그러므로 감정은(감정의 일반적 정의에 의해서) 신체의 현재 상태를 표시하는 한에 있어서의 표상이다. 따라서 (제5부 정리21에 의해서) 정신은 신체가 지속하는 동안이 아니면 수동에 속하는 감정에 종속되지 않는다. (271쪽)
정리35. 신은 무한한 지적 사랑을 가지고 자기 자신을 사랑한다.
증명 : 신은 절대적으로 무한하다(제1부 정의6에 의해서). 바꾸어 말하면 (제2부 정의6에 의해서) 신의 본성은 무한한 완전성을 즐기고 있으며, 게다가 그것은 자기 자신의 관념을 동반하고 있다. 즉 (제1부 정의1과 정리11에 의해서) 자기원인의 관념을 동반하고 있다. 그리고 이것이 제5부의 정리32의 계에서 지적 사랑이라고 우리가 설명한 것이다. (271쪽)
정리36. 신에 대한 정신의 지적 사랑은, 신이 자기 자신을 사랑하는 바로 신의 사랑 자체이다. 신은 무한한 한에서의 신이 아니라, 영원한 상 아래 고찰한 인간 정신의 본질을 통해서 설명되는 한에서의 신이다. 말하자면 신에 대한 정신의 지적 사랑은 신이 자기 자신을 사랑하는 무한한 사랑의 일부분이다.
계 : 신은 자기 자신을 사랑하는 한에서 인간을 사랑하며 따라서 인간에 대한 신의 사랑과 신에 대한 정신의 지적 사랑은 동일하다는 결론이 나온다.
주해 : 우리의 행복이나 지복 또는 자유가 어디에 있는지를 우리는 명료하게 이해한다. 즉 그것은 신에 대한 변함없는 영원한 사랑 또는 인간에 대한 신의 사랑에 있다. 이 사랑 혹은 지복은 성서에서는 '영광'이라고 하는데 그것은 타당하다. 왜냐하면 이 사랑은 신에 관한 것이든 인간에 관한 것이든 '정신의 만족'이라고 하는 것이며, 정신의 만족은(감정의 정의25와 30에 의해서) 실제로 영광과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272쪽)
[주] 스피노자의 범신론(汎神論, Pantheism)의 체계에서는 이른바 신과 피조물의 엄밀한 구별 내지 대립은 볼 수 없다. 즉 신과 인간은 너와 나와의 대립관계로 생각하지 않는다. 따라서 '신은 아무도 사랑하지 않으며 또 미워하지도 않는다(제5부 정리17의 계).' 인간은 신의 양태로서 신 안에 있다. 이 때문에 신이 자신을 사랑하는 것은, 자기 자신과 자신의 양태를 사랑하는 것이다. 즉 신은 자기를 사랑하는 것만으로도 이미 인간을 사랑하는 셈이 된다. (279쪽)
정리37. 자연 속에는 이 지적 사랑에 반대되는 것 또는 그것을 소멸시킬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증명 : 이 지적 사랑은 신의 본성을 통해서 영원한 진리라고 생각되는 한에 있어서 정신의 본성에서 필연적으로 생긴다(제5부 정리33과 29에 의해서). (273쪽)
정리38. 정신이 제2종과 제3종의 인식에 의해서 대상을 더 많이 인식하면 할수록 그만큼 나쁜 감정으로부터 영향을 덜 받으며, 또한 죽음에 대한 두려움도 덜하다.
증명 : 정신의 본질은 인식에 있다(제2부 정리11에 의해서). 그러므로 정신이 제2종과 제3종의 인식에 의해서 사물을 인식하는 일이 많을수록 그만큼 정신의 큰 부분이 남게 된다(제5부 정리23과 29에 의해서). (273쪽)
주해 : 정신의 명료하고 판연한 인식이 크면 클수록, 따라서 정신이 신을 더 많이 사랑하면 할수록 그만큼 죽음이 해롭지 않게 된다는 것이다. (274쪽)
정리39. 많은 일에 대해서 적합한 신체를 가진 사람은 대부분 영원한 정신을 소유한다. (274쪽)
정리40. 저마다의 사물은 더 많은 완전성을 가짐에 따라서, 그만큼 많이 활동하며 영향을 받는 일이 그만큼 적다. 거꾸로 각 사물은 더 많이 활동할수록 그만큼 완전하다.
계 : 정신의 영원한 부분은 (제5부 정리23과 29에 의해서) 지성이며, 지성에 의해서만 우리는 활동한다(제3부 정리3에 의해서). (275쪽)
정리41. 비록 우리가 우리의 정신이 영원하다는 것을 모른다 하더라도, 우리는 도의심과 종교심 그리고 일반적으로 우리가 제4부에서 용기와 관용에 속하는 것으로 이미 살핀 바 있는 모든 것을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할 것이다. (276쪽)
정리42. 지복(至福)은 덕의 보수가 아니라 덕 자체이다. 그리고 우리는 쾌락을 억제하기 때문에 지복을 누리는 것이 아니라, 반대로 지복을 누리기 때문에 쾌락을 억제할 수 있다.
증명 : 지복은 신에 대한 사랑에 있다(제5부 정리36과 그 주해에 의해서). (...) 정신은 이 신적인 사랑 혹은 지복을 누리기 때문에 쾌락을 억제하는 힘을 가지는 것이다. 그리고 감정을 억제하는 인간의 힘은 지성에만 있기 때문에, 어느 누구나 감정을 억제하기 때문에 지복을 누리는 것이 아니라, 반대로 쾌락을 억제하는 힘은 지복 자체로부터 생겨난다. (277쪽)
주해 : 무지한 사람은 외적 원인에 의해서 여러 가지 방식으로 선동되어 결코 정신의 진정한 만족을 누리지 못할 뿐만 아니라, 신과 사물에 대해서 거의 무지한 채로 생활하며 그리고 영향받는 일이 끝나자마자 동시에 존재하는 것도 그친다. 반대로 현자는 그가 현자로 여겨지는 한 마음 속에 동요가 거의 없다. 그러나 자기 자신과 신과 사물의 어떤 영원한 필연성에 의해서 의식하며 결코 존재를 멈추지 않고 언제나 마음의 진정한 만족을 누린다.
이미 내가 설명한 것처럼 여기까지 도달하는 길은 매우 험준해 보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발견될 수 있다. 실제로 이처럼 드물게 발견되는 것이기 때문에 어려운 것은 분명하다. 왜냐하면 만일 행복이 손 가까이 있어 대단한 노력 없이도 발견될 수 있다면 어떻게 거의 모든 사람들에 의해서 등한시될 수가 있었을까? 분명 모든 고귀한 것은 드물고도 어렵다. (278쪽)
* 정리42는 기본소득정책의 논거가 될 수 있겠음. (박희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