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주일 후면, 우리 민족에게 잊을 수 없는 악몽(惡夢)인 1950년의 6·25 전쟁이 일어난 날이 된다. 우리에게 통한(痛恨)의 역사적 사건이다. 그것도 동족상쟁(同族相爭)이었다. 그 결과가 70년을 훌쩍 넘긴 지금도 남북분단의 결과에 따른 이산가족 등 숱한 비극을 물고 있지만, 내게도 이맘때만 되면 떠오르는 아픈 기억이 있다.
내가 10살, 그러니까 겨우 철이 들까말까한 국민학교(지금의 초등학교) 4학년으로 올라간지 석 달 뒤의 일이었기에, 전쟁이 뭔지도 모를 때였다.
생전 처음 보는 미국(美國) 사람과 문명과 문화가 너무나 신기하고 신나기만 했던 일들이었다. 코도, 키도 큰 데다 살갗이 하얀 외국 군인들, 더러는 그 가운데 얼굴이 새까만 사람들도 신기했지만….
뒷 꽁무니는 한 손으로도 번쩍 들어 올리던, 그래도 하늘을 날던 경비행기부터 ‘쌕쌕이’라고 불리며 머리 위로 지나가고 한 참 뒤에야 천둥같이 우렁찬 소리가 나던 제트기, 짚차, 지엠시, 쓰리쿼터, 어떻게 쏘고 어떤 위력을 가졌는지는 모르지만 덩치가 큼직한 대포, 이름도 처음 들어본 칼빈, 엠원 소총, 바가지도 아니면서 가볍고 단단했던 헬맷에다 무거운 철모, 폭이 약간 넓은 허리띠에 숭숭 뚫린 구멍에 물통, 권총, 야전삽 등등을 매달았던 혁대. 어느 하나 신통하지 않은 것이 없었다. 특히 그 헬멧은 농가에서 물바가지로, 철모는 똥바가지로 참으로 유용하게 사용했다.
어디서 쏟아져 나왔는지는 몰라도, 수많은 빈 캉통! 소 죽 끓일 때 볏짚 자르던 작은 작두를 이용하여 용케도 깡통을 자르고 이어서 멋진 철제(鐵製) 지붕을 탄생시킨 걸 보면 분명히 우리 어른들의 아이디어가, 솜씨가 좋았던 것만은 분명했다.
무엇보다 잊혀지지 않은 것은 고 놈의 초코렛 맛! 아아! 입안에서 살살 녹았던 그 맛은 ‘전쟁’ 아니었으면 어찌 맛이나 볼 수 있었을까 싶었다. 쓰디쓴 맛에 이런 걸 왜 먹을까 생각했던 끈적끈적한 커피라는 것. 그뿐인가. 미군부대에서 나온 짭빵통(음식 쓰레기통)에서 건져낸 ‘티본스틱’이란 소고기 덩이, ‘치킨’이라 했던 닭고기. 명절이나 집안 제삿날이 아니면 구경도 못했던 것들이었다. 태어나 10여 년 동안 고기 구경을 못 했으니 이걸 먹고 두드러기가 생긴 친구들도 있었다.
또 하나, 스릴 만점이었던 것이 소총 총알(탄환)이었다. 끝이 뾰족하거나 약간은 동그스럼한 탄환을 어떻게 어떻게 해서 빼내고 나면 까만 화약가루가 나왔는데 이걸 불 속에 집어 던지면 갑자기 솟아오른 불꽃에 기겁을 하기도 했고, 뺀 탄알은 화롯불에 꽂아 두면 가운데 납이 녹아 보글보글 끓어 오를 때 가는 철사로 고리를 만들어 끼워 굳히고 줄을 달면 멋진 목걸이가 되었다.
학교 공부는 뒷전이었다. 아니 학교 공부보다 더 재미나고 절실한 것들을, 그것도 선생님을 통해서가 아닌, 요즘 말로 현장실습으로 눈과 손과 몸으로 익힌 것이다.
한두 살 위인 5-6학년 혹은 중학생들이 하는 걸 가슴 조이며 구경하는 것도 그랬지만 차츰 익어지자, 가슴 콩닥거리며 손수 만들어 보던 그 긴장과 성공했을 때의 희열!
하루 세끼를 못 먹던 어려운 시절이었지만 배고픈 줄을 몰랐다. 영문 A자는 몰라도 ‘헬로’ ‘기브미’ ‘굿모닝’ ‘굿바이’는 알았다. 껌 한 개도 던져주지 않고 지나간다고 미군 짚차 뒤에다 데고 뜻도 모르는 팔뚝질을 몇 번씩이나 해대기도 했다.
전쟁 이전에 우리들의 놀이, 구슬치기(빌려온 것)
하루가 다르게 전황(戰況)이 달라졌기에 어른들에게는 자신과 가족의 생사가 걸린 가당찮은 문제로 고심하고 우왕좌왕했을 것이지만, 우리들에겐 아랑곳할 일이 아니었다. 잘도 터진 전쟁이었다.
7~8월 한여름 뙤약볕 아래 바지저고리 차림의 큰형님, 아저씨들이 우리가 뛰노는 학교 운동장 가운데서 지게 작대기를 들었다 내렸다 찔렀다 뺏다 하던, 후에 알았지만 총검술 훈련이 재미있어 수업시작 종소리도 놓치고 따라 흉내를 내곤 했었다. 그렇게 2-3일 하다 떠나신 그분들 가운데는 많은 분들이 전장(戰場)에서 돌아오지 못했다는 사실을 한 것은 한참 뒤의 일이었다.
적군이 낙동강, 영천까지 밀렸을 때 피난 떠날 준비를 했다. 가끔 멀리서 쿵쿵하는 대포 소리가 들리기도 했다. 밀려오는 공산군들의 먹거리로 제공되는 것을 막기 위해 동네 닭과 돼지를 모두 잡아 포식한 적이 있었다고 누나가 얘기했지만 나는 기억에 없다.
다만 옷가지, 미숫가루 등으로 짐을 꾸려 각자의 것이라고 정하고는 어깨에 메어보기까지 했는데, 멋도 모르고 소풍이라도 가는 기분으로 즐거워했던 기억은 있다. 귀중한 것들은 뒤뜰 감나무 아래 구덩이를 파고 묻었다. 결국 피난은 가지 않았다. 재미나기만 한 전쟁이었다.
바로 그해 겨울 방학 중이었다. 지금은 모습이야 많이 달라졌지만, 여전히 그 자리를 지키는, 남천강을 가로지르는 ‘경산교’ 아래의 ‘방천(防川)’은 우리들의 겨울철 단골 ‘얼음타기 놀이터’였다. 다리 위로는 피난민 행렬이 여전히 있었다.
자리는 그 대로지만 엄청 넓어진 경산교
전쟁 덕분에 구하기가 쉬워진 굵은 철사를 모닥불에 달궈 주먹 쇠망치로 돌 위에서 두들겨 펴서 나무토막에 박아 만든 수겟토(스케이트:썰매)와 창으로 한겨울임에도 땀과 콧물을 함께 흘렸다. 두어 살 윗길 또래들이 피운 모닥불에, 한 여름내 할머니와 어머니가 만들어 주신 귀한 무명 바지가랭이가 타는 줄도 모르다가 집에 와서는 할머니에게 꾸중을 바가지로 얻어들은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학교도 미군에게 징발 당하고 없는 처지에 그 다리 밑의 설매장에는 아침 밥숟가락을 놓기 바쁘게 모여드는 것이 중요한 일과였다.
그날도 단짝 일용이(본명은 서창섭)와 창끝에 꽂은 썰매를 둘러매고 등교하듯 했다. 놀이터에 섞이면 곁에 누가 있는지, 시간이 가는지 섰는지, 아무것도 보이지 않고 느껴지지 않는다. 그저 자신만의 세계가 눈앞에 펼쳐지는 것이다. 아침에 먹은 한술 보리밥이 다 내려갔다고 ‘배꼽시계’가 시장끼를 알리면 같이 왔던 짝지를 찾는다. 함께 집에 가야 하기 때문이다.
일용이는 같은 동네지만 내 집과는 약간 떨어져 사는, 같은 반에 재학중인 친구다. 3대 독자인데다 그의 아버지가 전국구(?) 노름꾼이었기에 늘 집을 비웠고, 집에는 조부모와 어머니가 그를 애지중지하던 터였다. 같은 학반인데 다행히 내가 그보다 공부를 조금 잘했던 탓에 그의 모친에게 내가 뽑힌(?) 셈이었다. 요즘 말로 ‘가정교사’인 셈이다. 나와 같이 놀면 조금이라도 공부에 도움이 되지 않을까 하는 그의 어머님의 간절하고도 절실한 바램 때문이었다. 둘이 같이 붙어 다니기로는 동네에서도 익히 알려진 상태였다. 덕분에 당시엔 귀했던 간식, 쌀누룽지도 엿도 눈깔사탕도 그의 어머님과 조부모님에게 심심찮게 얻어먹었다.
일용이가 보이지 않았다. 거의 없었던 일이다. 보이지는 않지만 느낌으로도 늘 주위에 있었던 그였는데…. 찾아도 없었기에 혼자 썰매를 매고 집에 오면서도 그를 생각했다. ‘날 두고 어딜 갔을까?’하고.
집에 도착, 막 썰매를 내려 놓는데, 약간은 펑 하는 소리가 들리는 듯 했지만 염두에 둘 정도는 아니었다. 10여 분이나 지났을까? 동네에서 “폭탄 터졌다”는 소리와 함께 일용이가 죽었다는 소문이 쫙 퍼졌다. 얼른 뛰어나갔다. 100여 미터 떨어진 다리목에는 이미 사람들이 모여 웅성거리고 있었다.
다리 옆 과수원 담장 사이로 난 좁은 길에서 어른들이 애들을 업고, 안고 올라왔다. 일용이 엄마가 손수 짜 입힌 두툼한 세타 위로 가슴팍에 붉은 피가 흥건히 젖어 있음이 뚜렷하게 보였지만 그게 어떻게 된 것인지, 무엇을 뜻하는지는 몰랐다.
옆에 서 있던 한 어른이 나를 보자 “완수 아이가? 니는 우째 안 죽었노?”하고 물었다. 일용이와 그림자처럼 붙어 다녔음을 알고 있었기에 한 소리였다. 새겨보면 참말로 기분 나쁜 소리였지만 아무런 느낌도 없었다.
결국 세 명의 또래 친구가 죽고 하나는 부상을 입었다. 죽은 세 사람은 모두 외동아들이고 부상을 입은 석봉이 아제는 나보다 한 살 위로, 아들 여덟 중 일곱 번째로 내게는 숙향인 사람이었다.
당시 민선(民選) 동장이셨던 아버님께서 저녁에 말씀하셨다. 사무실에서 처음 소식을 듣자 맨 먼저 “아이구! 완수도 죽었겠구나!” 하는 생각이 퍼뜩 떠올랐는데, 내 이름은 나오지 않아 다행이라 여기면서도 한편 궁금하기까지 하셨단다.
당시 홍수라도 지나가면 강바닥 곳곳에 떠내려 온 불발포탄이나 지뢰 등이 여기저기서 발견되었고, 그것을 주워 놀던 아이 아이 · 어른 할 것 없이 그게 무엇인지 궁금해 망치로 두드려 보기도 하다가 폭발하여 죽거나 불구가 되는 사고가 전국적으로 많았다.
이 사건도 일용이 집 길 건너 바로 앞집에 살던 강OO 군이 이 포탄(박격포탄이라고 했다)을 발견, 몰래 과수원 울타리 밑에 숨겨두고는, 오후에 가장 가까운 일용이를 꾀어낸 것인데, 마침 함께 간 일용이의 고종사촌 아우인 백 군이 따라간 것이 변을 당하고 만 것이다. 강 군은 당시 5학년이었는데 나하고는 그리 친밀한 사이는 아니었다. 그러기에 일용이가 평소와는 달리 내게는 간다는 소리도 없이 그를 따라 썰매장에서 일찍 빠져 나갔던 것으로 추정할 뿐이었다.
나에게 그날의 얘기를 들으신 아버지께서 머리를 쓰다듬어 주시면서 “천운(天運)이다”고 하셨다. 그 말의 의미는 한참의 세월이 흐른 뒤에 이해하기는 했지만….
셋이서 과수원 울타리 나무 아래에서 통당통당 두드리는 것을 지나가던 석봉이 아제가 보고는 “너거들 뭐하노?” 하고 다가가는 데 폭발하였기에 그는 가벼운 부상만 입고 만 것이다. 참으로 허무하게도 그렇게 세 사람의 어린이들이 하늘나라로 가고 만 것이다.
결국 외동 아들을 잃은 세 가정은 풍비박산이 되고 말았다. 당시의 외동 아들은 하늘같이 귀한 존재였기에 그들을 잃은 아버지들이 다시 아들 얻겠다고 나선 탓이었다. 세상 일이 참으로 불공평 하다는 생각이었다.
그 6월의 전쟁이 멎은 지 어언 70년도 훌쩍 넘었는데, 아직도 휴전이란 이름으로 끝나지 않고 있다. 내 마음속에 사고 당일 본 일용이의 새하얀 얼굴과 가슴에 젖었던 그 붉은 핏자국이 강렬하게 남아 있듯이….
지금 되돌아보면 세상이란 그런 것이며, 역사 속에 티끌같이 작은, 흔적도 없이 묻히고 말았지만, 내게는 전쟁보다 더 커다란 덩어리로 남았을 뿐 달리 설명할 재주가 없다.
그것이 6·25 전쟁의 얕은 기억하지만, 다시는 이 땅에 전쟁은 없어야 한다는 마지막 염원을 남기는 세대가 되었으면 하는 생각도 든다. 아버님이 말씀하신 ‘천운(天運)’에 깊은 감사를 들릴 따름이다.
당시 코흘리게 들에게 전쟁을 가늠하게 하는 사전(빌려옴)
첫댓글 무남독녀 나에겐 그때 그시절의 처절했던 야그는 처음 듣습니다.
남아들은 참 여러가지 겪네요. 부산스럽다고 해야하남요?ㅋ
훗날 한 가정을 꾸려야 하기에 여러가지 겪어보는 것도 삶에 도움이 될 것도 같네요.
참 딱한 여편네죠?ㅎㅎ
암튼 전쟁은 없어져야하는데 지금도 곳곳의 전쟁소리에 가슴 아픕니다.
친구야 자네 6.25때 10살배기 4학년이 그렇게 기억이 좋은가?
자네 회고록을 읽고 6.25 전후 참혹했던 삶이 생각이나 이 땅에 다시는 전쟁은
없어야 하는데 북한 김정은이 어떤 장난을 할지 걱정이 된다
별고 없지요? 어쩐 일인지는 나도 모르지만 부분적으로는 3~4살 적부터의 것들이 기억이 날 때가 있오.
내 탓이 아니라는 생각이지. 더운데 건강하소. 부산넘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6.25 때 일들이 눈 앞에서 전개되는 것 같습니다. 다시는 전쟁이 일어나지 않아야 하는데 ..
건강과 더 좋은 천운을 기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