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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2차 답사자료 (03.28)
마산박물관 문화유산 답사회
경북포항 답사자료
* 일 시 : 2017.03.28 (넷째 화요일) 07:30~18:30
* 일 정 : 현지 사정에 의하여 일부 변경 될 수 있습니다.
- 마산박물관(07:30) - 포항 장기읍성/향교/북문/척화비/우암, 다산 사적비 -
- 구룡포 일본인가옥거리/구룡포 근대문화역사관 -
- - - 점심 (참뼈해장국 054-272-3446) - - -
- 호미곶/새천년기념관/수석박물관/상생의 손 -
-연오랑 세오녀 상/등대박물관/호미곶등대/이육사청포도시비 -
- 영일민속박물관 – 냉수리신라비 – 냉수리고분군 — 마산박물관(18:30) -
* 해 설 : 회 장 : 고 명 천 010-3889-1288
* 인 솔 : 이 사 : 김 인 국 010-3863-7570
마 산 문 화 답 사 회
2017-2차 답사자료 (03. 28)
** 포항시 현황
• 신라시대 : 퇴화현, 지답현, 근오지현, 해아현
• 고려시대 : 흥해군, 장기현, 연일현, 청하현 개칭
• 1949.08.15 : 포항읍이 시로 승격 (1시, 1읍, 13면, 1출장소)
• 면적 1,128.76㎢
• 행정조직 2구, 4읍, 10면, 15동
• 인구 521,693명 (2017.01.31.)
** 장기읍성
사적 제386호
읍성이란 군이나 현의 주민을 보호하고, 군사적 행정적인 기능을 함께 하는 성을 말한다. 고려때 처음 이 성을 쌓았는데 동쪽으로 왜적을 막고 북쪽으로는 여진족을 방어하기 위한 것이었다. <고려사>, <신증동국여지승람> 등의 기록에 의하면 고려 현종2년(1011) 당시에는 흙으로 성을 쌓았으나, 조선시대에 와서 돌로 성을 다시 쌓았다고 한다.
성의 형태는 타원형으로 둘레가 1440m이며 3개의 성문과 문을 보호하기 위해 쌓은 작은 성인 옹성, 성벽 바깥에 사각형 모양으로 덧붙여서 만든 치성을 갖추고 있다. 또한 4개의 우물과 2개의 연못인 음마지(飮馬池)가 있다. 성 안쪽에는 교육기관이었던 장기향교와 관청이었던 동헌 터가 남아 있는데 동헌은 현재 면사무소 안으로 옮겨 보호하고 있다.
산꼭대기에 있으면서 읍을 다스리는 기능도 갖추고 있는 장기읍성은 읍성 연구에 중요한 자료가 되는 유적이다.
한편 이곳은 벽지로 인정되어 귀양지로도 되었으니 유교의 대가인 우암 송시열과 실학파의 태두인 다산 정약용이 귀양살이 한 곳이기도 하다. 특히 송시열을 기리는 죽림서원이 세워져 이 고장은 글을 읽는 마을이 되었으며, 이 고장은 정치, 경제, 사회적인 특성이 있는 곳이 아니고 오로지 국방의 일익을 담당한 군사기지로 그 역할을 다 하였던 고장이라 할 수 있다.
* 장기향교
문화재자료 제327호
향교는 공자와 여러 성현께 제사를 지내고, 지방민의 교육과 교화를 위해 나라에서 세운 교육기관이다.
장기향교는 조선 태종5년(1405)에 처음 지었으나, 임진외란때 불타 없어지/자선조 33년(1600)에 다시 지었다. 정조 9년(1785)에 마현동으로 옮겨지었고, 1931년 군수 김영수가 읍성 내에 있던 구객관을 수리하고 위패를 모셔 지금의 향교로 전해오고 있다.
임진왜란이 일어났을때 서문경. 서극인. 이대임. 이눌 등이 향교에 모시고 있던 위패를 용암석굴에 옮겨 놓아 위패만은 무사할 수 있었다고 전한다. 향교를 옮겨 지을때 덕계 임재화가 대대로 살던 자기 집터를 내놓아 향교 재건에 크게 이바지 하였다.
지금 남아 있는 건물은 제사지내는 공간인 대성전, 교육 기능을 수행하는 강당인 명륜당, 내삼문, 외삼문 등이다. 대성전에는 공자를 중심으로 그의 제자들과 중국, 우리나라의 성현들을 모시고 있다.
조선시대에는 나라에서 토지와 노비, 책등을 지원받아 학생들을 가르쳤으나, 지금은 교육 기능은 없어지고 제사 기능만 남아 있다.
* 북문
** 장기척화비
문화재자료 제224호
척화비란 병인양요와 신미양요를 승리로 이끈 흥선대원군이 서양 사람들을 배척하고 그들의 침략을 더욱 강력히 국민에게 경고하기 위해 서울 및 전국의 중요 도로변에 세우도록 한 비로, 이 비도 그 중의 하나이다.
비는 반듯한 사각받침돌 위로 비몸을 세운 모습이며, 비몸의 네 모서리와 윗변의 양끝을 단정해 다듬어 놓았다. 앞면에는 비문을 새겨 두었는데 내용에는 "서양오랑캐가 침입하는데 싸우지 않으면 화해할 수밖에 없고 화해를 주장하면 나라를 파는 것이 된다"는 강한 어투의 경고를 적고 있다.
고종 8년(1871) 신미양요 이후 같은 해에 일제히 세운 것으로, 고종 19년(1882) 임오군란이 일어나고 대원군이 러시아 공사관으로 납치되면서 대부분의 척화비들은 철거되고, 이처럼 몇 기의 비들만이 곳곳에 남아 옛 역사의 한 부분을 고스란히 전해주고 있다.
이 대원군척화비(大院君斥和碑)의 원래 위치는 장기읍성 내에 있었던 것을 1990. 12. 1 장기면사무소 정원에 이설(移設)하여 보호책을 설치하였다.
** 우암 송시열
우암 송시열 선생은 조선조 숙종 원년(1675) 윤 5월 장기현으로 와 4년 동안 유배생활을 하다가 숙종 5년(1679) 4월10일에 자신이 머물던 사관안에 홀연히 자생한 느티나무를 베어 지팡이를 만들어 짚고 죽교에 올라 거제도로 떠났다. 우암이 머물던 곳의 집 주인이었던 오도전은 우암에게 수학하여 향교의 훈장이 되었고 서유원 역시 끝까지 선생의 문하에 출입하여 훈도를 받았으며 장기초등학교 교정에 있는 은행나무 또한 우암이 심었다고 알려져 있다. 우암이 장기를 떠난 후 29년 되는 해 장기에 살고 있던 오도종, 이석증, 황보헌, 이동철, 한시유 등이 죽림서원을 창건하여 배향했다. 장기인들은 우암을 통하여 유학의 진수와 중앙정계의 동향에 대해서도 소상하게 접할 기회를 가졌고, 아울러 궁벽한 해곡(海曲)이 예절을 숭상하는 유향(儒鄕)이 되었다는 평을 듣기도 했다. 우암은 장기에서 <주자대전차이>와 <이정서분류> 등의 명저를 저술했고 많은 량의 시문(詩文)도 창작했다.
** 다산 정약용
다산은 1801년 신유년의 천주교도 박해사건으로 그해 3월 9일에 이곳 장기 고을 마현으로 유배왔다가 사위인 황사영이 작성한 백서사건이 발생하면서 관련의혹으로 그해 10월 20일에 서울로 다시 압송되었으니, 7개월간 이곳에 머물렀던 셈이다.
다산은 이곳에 머물면서 장기고을 백성들의 삶의 모습과 고을 관리들의 목민형태를 글로써 남기게 되었으니. 부옹정가(芙蓉亭歌), 기성잡시 27수, 장기농가십장, 아가사, 해랑행, 오적어행, 타맥행 등 130여수가 그것이다. 전하는 시작들은 토속적이고도 사실적이며 비판적이면서도 은유적이다. 그밖에도 <이이술>, <기해방례변>등의 서책도 장기에서 저술하였으나 의금부로의 압송과정에 유실되어 없어졌으니 안타깝기가 그지 없다.
시대적 어려움을 떨쳐낼 사상가로서, 바름을 실천하는 표상적 지식인으로서 현실참여와 서정을 적절히 표현해내는 문학가로서 정성을 다해 살다간 다산의 혼백이 장기에 남아 있다.
** 구룡포일본인가옥거리
일본인의 구룡포 이주는 100여 년 전인 1906년 가가와현 어업단 ‘소전조(小田組)’80여 척이 고등어등 어류떼를 따라 구룡포에 오기시작하면서부터이다.
이후 고등어 어업의 대근거지가 되면서 일본인들이 대거 구룡포로 이주를 시작해 1932년에는 287가구 1,161명이 거주했다.
그때 당시 이 거리에는 선박경영과 통조림 가공공장 등을 운영하여 부유해진 일본인들이 하나 둘 가옥을 지었고 업종도 다영해져 거리는 날로 번창해졌다.
이 거리는 당시 음식점,제과점,어구류 판매점, 술집, 백화점 등이 들어선 구횽포지역 최대의 상업지구로 성장했으며, 지금도 이 거리에는 당시의 가옥들이 잘 남아 있어서 구룡포 일본인가옥거리라고 명명하여 포항시가 복원사업을 통해 보존하고 있다.
+ 대등여관 – 1938년 건축 2층 목조건물, 안이 깊고 각층 방이 많다
+ 일심정 – 90여년전 건축된 2층 목조로 요리점. 복원하여 후루시토 일본식 찻집
+ 후지산 창문집 – 2층 발코니 부분 창문틀에 후지산 문양 조각.‘여명의 눈동자’촬영장소
** 구룡포근대문화역사관(하시모토 젠기치 가옥)
이 건물은 1920년대 가가와현에서 온 하시모토 젠기치(橋本善吉)가 살림집으로 지은 2층 일본식 목조가옥이다.
그는 구룡포에서 매제와 함께 4척의 선박을 운영하면서 선어운반업으로 크게 성공하여 부를 쌓은 사람이다. 건물을 짓기 위해 당시 일본에서 직접 건축자재를 운반하여 건립하였다고 한다.
하시모토 일가가 일본으로 돌아간 후 오랫동안 한국인이 거주하였으나 2010년 포항시에서 매입하여 현재 복원 공사를 마무리하여 ‘구룡포 근대역사관’으로 개관하였다.
건물 내부의 부츠단, 고다츠, 란마, 후스마, 도코바시라 등이 100여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잘 남아 있으며 일본식 건물의 구조적ㆍ의장적 특징을 잘 갖추고 있다.
이 건물은 한국과 일본 건축 전문가들이 많은 관심을 가지고 연구대상으로 삼는 건축물로 그 가치가 있을 뿐 아니라 앞으로 한국과 일본의 문화교류에 크게 기여할 것으로 기대된다.
** 호미곶 소 재 지 경북 포항시 남구 대보면 대보리 일대
삼면이 바다로 둘러싸인 호미곶은 호랑이의 꼬리라 하여,한반도의 정기가 서려있는 곳으로 일찍이 16세기 조선 명종때 풍수지리학자인 남사고는 산수비경(山水秘境)』에서 한반도는 백두산 호랑이가 앞발로 연해주를 할퀴는 형상으로, 백두산은 호랑이 코,호미곶(虎尾串)은 호랑이 꼬리에 해당한다고 기술하면서 천하의 명당이라 하였다.영일만의 끝부분(포항에서 38㎞)인 호미곶 앞바다는 한류와 난류가 교차하는 해역으로 각종 물고기의 회유지이다. 따라서 정치망 어업이 활발하고, 오징어, 꽁치, 고등어, 김, 미역, 전복, 성게 등 각종 수산자원이 풍부하다. 1903년에 만든 국내 최대규모의 등대와 1985년 준공한 국내 최초의 등대박물관이 위치한 이 곳은 전국에서 일출을 가장 빨리볼 수 있는 곳이다. 관광명소이자 청정해역을 보유하고 있어 호미곶(대보면) 자체가 자연공원이라 할 만큼 산세가 수려하고 주변의 웅장하다.
포항은 신라의 천년 수도 경주와 인접하여 그 당시의 흔적들이 많이 남아 있다. 또 왜구가 일찍부터 출몰한 곳이라서 많은 성곽들이 축조되었다. 그 가운데 일부는 아직도 옛 모습을 간직하고 있다. 한반도를 호랑이의 형상으로 봤을 때 호랑이의 꼬리처럼 동해로 불쑥 솟아나간 곳에 호미곶(장기곶)이 있다.
호미곶의 해맞이 광장은 새천년 한민족해맞이 축전 개최 장소로 만여평의 부지에 기념조형물, 성화대, 불씨함, 연오랑세오녀상, 공연장 등이 건립되어 있다. 광장진입로에 조성된 유채꽃 단지에는 매년 4월~5월 경에 유채꽃이 만개한다. 이곳 광장의 기념조형물인 상생의 손은 청동소재로 바다와 육지에 각각 설치하여 마주보는 형상으로 상생과 화합을 상징하고 있으며, 변산반도에서 가져온 20세기의 마지막 햇빛, 날짜변경선에 위치한 피지섬과 이 곳 호미곶 새천년 첫 햇빛 등이 합화, 안치된 성화대의 불씨는 각종 국제대회의 씨불로 사용될 계획이다.
+ 새천년기념관
새천년 국가 지정 일출행사개최를 기념하고 민족화합을 통한 통일조국의 번영과 안녕을 기원하는 새천년기념관은 2009년12월28일 개관하여 많은 관광객이 찾는 호미곶의 새로운 명소입니다
• 전시실 : 포항의 지리적 특성, 역사와 문화, 산업, 미래비전 등을 영상과 패널, 디오라라마를 통해 자세히 접할 수 있음
• 바다화석박물관(사설) : 월요일 휴관 (대인 3,000원, 청소년/군인 2,000원, 초등학생 이하 1,000원, 단체 20인 이상은 각 500원 할인(초등생 이하 300원), 4인가족 할인권 7,000원, 장애우 및 국가유공자, 경로우대자는 각 1,000원 할인)
• 한국수석포항박물관 : 월요일 휴관, 무료
• 옥상전망대 : 호미곶 일대 해안선을 한눈에 내려다 볼 수 있는 곳
+ 해맞이 광장
+ 성화대
+ 상생의 손
+ 연오랑 세오녀상
+ 등대박물관
+ 호미곶등대
종 목 경상북도 기념물 제39호 (1982.08.04.)소 재 지 경북 포항시 남구 대보면 대보리 221 시 대 조선시대우리나라 지도상 호랑이 꼬리부분에 해당하는 곳에 자리하고 있는 등대이다. 이곳을 ‘호미곶’ 혹은 ‘동외곶’이라고 하는데, 서쪽으로는 영일만, 동쪽으로는 동해와 만나고 있어 일명 ‘대보등대’라고도 한다.
높이 26.4m, 둘레는 밑부분이 24m, 윗부분이 17m로 전국 최대 규모이다. 겉모습은 8각형의 탑 형식으로 근대식 건축 양식을 사용하여 지었는데, 철근을 사용하지 않고 벽돌로만 쌓아올려, 오늘날의 건축관계자들도 감탄을 금치 못한다고 한다. 내부는 6층으로 되어 있으며, 각층의 천장마다 조선 왕실의 상징무늬인 배꽃모양의 문장(紋章)이 조각되어 있다.
조선 고종 7년(1903)에 건립된 국내에서 가장 오래된 등대로, 건축사적·문화재적으로 커다란 가치를 지니고 있다.
+ 이육사 청포도시비
포항시 남구 호미곶면 대보리 234-17
내고장 7월은 청포도가 익어가는….' 시 '청포도'로 유명한 육사(陸史) 이원록(李源祿.1904~1944)의 시비(詩碑)가 포항시 남구 대보면 대보리 호미곶에 우뚝 서 있다.
경북 안동이 고향인 이육사는 호미곶과 가까운 포항시 남구 동해면 일월동 옛 포도원에서 시상(詩想)을 떠올려 청포도를 지었다고 한다.
시비는 가로 3m, 세로 1.2m, 높이 2.5m 크기로 육사를 기리는 비문과 청포도 시가 새겨져 있고, 시비 조형물 디자인은 영남대 홍성문 교수, 비문은 아동문학가 손춘익씨, 글씨는 서예가 정현식씨가 각각 맡았다.
이육사는 이 시를 통해 풍요하고 평화로운 삶에의 소망을 노래했다. 청포도라는 소재의 신선한 감각과 선명한 색채 영상들이 잘 어울려서 작품 전체에 아름다움과 넉넉함을 준다. 특히 식민지 치하의 억압된 현실은 시인이 꿈꾸는 현실과 대립하면서, 이를 이겨내고자 하는 극복 의지가 담겨 있다.
청포도,하늘,푸른바다,청포 등 청색 이미지와 흰 돛단배,은쟁반,하이얀 모시수건 등 흰색 이미지는 이상적인 세계를 구현하는 상징적인 소재이다. 풍요로운 고향에 대한 정겨운 정서가 듬뿍 담긴 '청포도'는 전설이 풍성하게 연결된 매체로 지금은 없지만 언젠가 고달픈 몸으로 돌아올 손님에 대한 기다림의 정서를 담고 있다.
또 '그가 찾아올 그 날'이란 대목은 억눌린 소망이 밝은 빛 아래 펼쳐지는 때를 의미하며, '청포입은 손님'은 어두운 역사 가운데 괴로움을 겪고 있는 이를 암시하고 있다. '은쟁반'은 화해로운 미래 삶을 향한 순결한 소망을 암시하고 있다.
** 영일민속박물관
향토풍습 및 민속유물을 영구보존하고자 지역 주민등의 뜻을 모아 구 영일군과 영일문화원이 공동으로 헌종 원년(1835년)에 건립된 당시 흥해군의 동헌 건물이었던 제남헌을 수리하여 1983년 10월29일 개관이후 1985년 5월 제2전시실을 신축하여 민속박물관으로서는 국내최초로 1987년 6월 30일 문화부로 부터 박물관으로 지정됨.
+ 제남헌
흥해군(興海郡)의 동헌(東軒)건물이었던 제남헌은 1925년 원래의 자리에서 동남쪽 70m 떨어진 구 흥해읍사무소로 이건하여 흥해읍 회의실로 사용하다가 1976년에 다시 원래 자리인 현 위치에 이건하여 현재 「영일민속박물관」전시실로 사용하고 있다. 제남헌은 여지도서(輿地圖書)와 경상도읍지(慶尙道邑誌)에 나타난 바와 같이 흥해읍성(興海邑城)의 중심에 자리잡고 있다.흥해읍성은 일제시대 초기에 모두 헐리고, 성(城)에서 나온 돌은 포항축항흥해공사에 사용되었으며, 관아건물도 이때 모두 헐리고, 제남헌만 남았다.제남헌의 기록은 이건시에 나왔다고 하는 도광(道光) 15년(1835년)이란 상량문 외에는 남아 있는 것이 없는데 건립 당시의 상량문인지 중건 상량문인지는 분명치 않다.제남헌은 정면 7칸, 측면 3칸 규모의 일자형(一字形) 건물로 자연석 기단위에 다듬돌 주초를 놓고 원주(圓柱)를 세웠으며, 주두상부(柱頭上部)에는 출목(出目)없이 삼익공(三翼工)으로 장식하였다. 평면은 전통칸(傳統間)을 우물마루로 꾸몄다. 문비(門扉)는 전면의 어칸(御間) 3칸에는 3분합문(分合門)을 달고, 양측의 2칸에는 쌍여닫이 세 살문을 달았으며, 양측면의 전면에는 외여닫이 살문을 설치하였다. 가구(架構)는 5량가(樑架)인데 대량(大樑)위에 초각(草刻)한 판재(板材)를 두어 종량(宗樑)을 받고 종량 위에는 파련대공을 세워 마룻대와 장혀를 받았다. 양측면의 가운데 두 기둥 상부에는 형량(衡樑)을 걸어 대량(大樑)위에 걸치게 하였다.제남헌은 목재와가(木材瓦家)로 팔작지붕 홑처마이며, 조선 헌종(憲宗) 원년(1835년)에 중건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 회화나무
조선시대 지상학자(地相學者 : 풍수) 이성지(李聖智)가 영남지방의 산세를 조사하고자 경상도에 이르러 흥해를 지날 때 동해 명산인 비학산 정상에 올라 흥해분지를 바라보고, 과연 천년 옛 고을의 승지(勝地)라 하였다고 한다. 당대의 이름난 풍수요, 어전(御殿) 관상감인 이성지라 흥해군수도 그를 소홀히 대접할 수 없어 성대히 잔치를 베풀어 환대를 하였는데, 그 연석에서 이성지가 흥해군수 이하 여러 참석자들에게 말하기를 "흥해는 반드시 다풍질(多風疾)이며, 어떤 사람을 막론하고 5대 이상 그 유손이 세거할 곳이 못된다."고 전제하고 그 이유로 "흥해의 지세와 지리를 고찰해 보니 먼 옛날 선사시대에는 큰 호수였을 것이다. 수 만년 동안 호수였던 곳을 동편 낮은 곳의 산맥을 절단하여 그 곳으로 호수의 물을 흘러가게 하여 평야를 이루게 하였으므로 가뭄에는 물 걱정이 없으나 그 반면에 습기가 많을 것이므로 풍다(風多), 습다(濕多)의 피해가 반드시 있어 필시 괴질병이 많을 것이다."라고 하였다. 이어서 그는 " 이 풍습기를 방지하는 방법으로서는 집집마다 회나무를 많이 심어야 할 것이다. 회나무는 다른 나무에 비하여 습기를 섭취하는 양이 4~5배이므로 지하의 습기를 제거하는데는 최선의 방법이 될 것이다."라고 하였다. 그 후 흥해군수는 명령을 내려 이유를 막론하고 집집마다 회나무 심기를 권장하여 물좋고 농사 잘 되고, 또한 사람살기에 적당한 이름난 곳으로 만들었다고 한다. 지금도 영일민속박물관 내의 회화나무와 중성1리, 망천리에 서 있는 회화나무는 이러한 전설을 간직한 채 말없이 오가는 사람들을 맞이하고 있다.
+ 냉수리신라비, 중성리신라비 복제물
국보 제264호 ‘포항냉수리 신라비’와 국보 제318호 ‘포항 중성리 신라비’의 복제품을 제작하여 시청사와 영일민속박물관에 설치해 전시하고 있다.또한 신광면 냉수리와 흥해읍 중성리의 비석이 발견된 장소에는 안내판과 표지판을 설치해 그 장소에 역사적 의미를 부여하고 비문 내용과 역사적 의미를 같이 소개함으로써 현장성을 살리고 역사교육의 장으로 만들었다.냉수리 신라비는 1989년 4월 6일 북구 신광면 냉수리에서 이상운 씨가 밭갈이를 하던 중 발견하여 신고한 것이다.이 비는 신라의 실성왕과 내물왕 두 왕이 진이마촌의 절거리에게 내린 재산 취득 및 절거리 사후 재산 상속에 관한 내용을 담고 있다. ‘계미’란 간지와 지증왕 등의 칭호로 볼 때 지증왕 4년(503)에 건립된 것으로 보인다.이 비문에는 중국 문서에서 발견되는 신라의 옛 국명인 사라(斯羅)가 최초로 나오고 또 임금(지증왕)의 본명이 ‘지도로’라는 이름으로 나타나는 등 신라 상대(上代) 연구의 귀중한 자료로 평가되고 있다. 비석에는 앞면과 뒷면 윗면에 231자가 새겨져 있다.중성리 신라비는 2009년 5월 11일 북구 흥해읍 중성리 일원 도로개설사업구간 공사현장 주변에서 동네 주민 김헌도씨가 평편한 돌이 있어 화분 받침대로 사용하려고 집으로 가져가 씻던 중 글자가 드러나 신고한 것이다.비의 앞면에 203자가 새겨져 있고 뒷면에는 글이 새겨져 있지 않다. 비문은 신라 관등제의 성립과정, 신라 6부의 내부구조, 신라의 지방통치와 분쟁 해결절차, 사건 판결 후 재발방지 조치 등 신라의 정치적ㆍ경제적ㆍ문화적 상황을 알려주고 있어 역사적ㆍ학술적으로 매우 중요한 가치가 있다.제작시기는 지증왕 4년(503)의 냉수리 신라비보다 2년, ‘울진 봉평리 신라비’ 보다는 23년이 앞서는 신라 최고(最古)의 비이다. 특히 중성리비는 중국의 서체와 서풍에 큰 영향을 받지 않은 신라의 자생적이며 토속적인 서체라고 평가되고 있다.
** 영일 냉수리 신라비
종 목 국보 제264호 (지 정 일 1991.03.15.)소 재 지 경북 포항시 북구 신광면 신광면사무소 시 대 신라지금까지 남아있는 신라비 가운데 가장 오래된 것으로, 1989년 마을주민이 밭갈이를 하던 중 발견하였으며, 재산분배를 확인하는 증명서의 성격을 지니고 있다.
형태는 네모난 자연석으로 밑부분이 넓고 위가 줄어드는 모습이며, 앞면과 뒷면, 그리고 윗면의 3면에 글자를 새겼다. 비문은 거의 닳지 않아 눈으로 읽을 수 있을 정도로 보존상태가 좋다. 글자는 총 231자이고 서체는 해서체로 보이나, 예서체의 기풍이 많이 남아 있어 비문의 형태와 글씨체면에서 중원고구려비(국보 제205호), 울진봉평신라비(국보 제242호)와 매우 비슷하다.
비문은 절거리라는 인물의 재산소유와 유산상속문제를 결정한 사실을 기록해 놓은 것으로, 공문서의 성격을 띠고 있다. 각 부의 여러 귀족들이 참여하여 재산권 분쟁을 처리하고 있는데, 이는 왕권을 강화하기 이전에 미약했던 신라왕권의 한계를 알려주고 있다. 또한 소를 잡아 하늘의 뜻을 묻고 제천의식을 행하던 당시 풍속제도의 실상이 잘 담겨져 있다.
내용중 ‘계미’라는 간지와 ‘지증왕’등의 칭호가 나오고 있어 신라 지증왕 4년(503)에 건립된 것으로 보인다. 국가에서 세운 비로서 신라의 왕명을 다룬 초기 율령체제의 형태를 보여주어 당시 사회를 이해하는데 귀중한 자료가 된다. 그리고 신라역사 연구와 금석학 연구에도 중요한 유물이다.
** 포항 중성리 신라비
• 지정분류국가지정문화재 >국보
• 소재지경북 포항시 북구 흥해읍 중성리
• 지정번호제318호 (2012.2.22.)
• 시대신라시대
포항 중성리 신라비는 이제까지의 연구결과를 비추어 볼 때 신라사 연구에 귀중한 자료이다. 이 비의 발견장소 또한 냉수리 신라비 발견장소에서 약 8km 정도 떨어진 가까운 거리이며, 비문의 내용도 유사한 점이 많다. 비문의 내용은 지방민이 관여된 재산과 관련하여 분쟁이 있었다는 점, 이들 분쟁에 대해 신라의 지배층들이 합동으로 판결을 내리고 있었다는 점, 판결 이후 이들 문제에 대해 재발방지를 명시하고 있었다는 점 등의 유사점이 있다. 이 비문을 통해 당시 신라의 정치적, 경제적 문화내용을 연구할 수 있는 중요한 자료가 될 수 있다는 점에서 그 역사적, 학술적 가치가 매우 크다.
** 영일 냉수리 고분군
종 목 경상북도 기념물 제95호 (1994.04.16.)소 재 지 경북 포항시 북구 신광면 냉수리 산78-3외 5필 시 대 삼국시대한강 이남에서 발굴조사된 6세기 전반의 신라 때 만든 굴식돌방무덤(횡혈식석실분)이다.
구조는 매우 큰 편이고 특이한 내부 형식을 갖추고 있다. 돌방무덤에는 옆방(측실)이 설치되어 추가장 되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널길(연도)의 옆면에 부실이 딸리고 현실 안에는 2개의 벽감이 설치되어 있다. 도굴된 상태였으나 관장식, 달개(영락), 금반지 등 많은 유물이 출토된 것으로 보아 이 지역 수장층의 무덤으로 추정된다.
냉수리 무덤들 주변에는 이 무덤외에도 86기 이상이 분포하고 있어 중요한 연구자료가 되고 있다. <인터넷 자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