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중랑구 망우동 인문학길을 걸으며> 안내문은 지난 1학기 5월 16일에 폭염으로 휴강하였으므로 재 수록하였습니다.
◈ 중랑구 망우동 인문학길을 걸으며
동래 정씨 집성촌
◇ 동래정씨 집성촌 : 망우동 산 24번지 · 신내동 1번지 일대
- 16대에 걸쳐 600년간 거주하고 있는 동래 정씨 집성촌
경의중앙선 양원역 북쪽의 송곡여자고등학교를 지나 언덕을 오르면 양원리(養源里)마을이 있었다. 언덕 마루의 마을 입구에는 중랑구청에서 「동래 정씨 집성촌(集姓村)」이라는 표석을 세워 놓았다. 표석 문안에는 「정구(鄭矩 : 1350~1418)가 고려말 이후 이주한 이래 동래 정씨의 동성(同姓)이 모여서 이루어진 서울에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집성촌」이라고 씌어 있다.
이 마을은 여말 ·선초의 인물인 정구가 1397년경 중구 주자동으로 이주해서 서울 사람이 되었고, 1752년경까지 후손들이 이곳에 거주하다가 망우동으로 이주, 최근까지 18대에 걸쳐 모여 살고 있는 서울시내에 남아있는 가장 오래된 집성촌이었다.
이로 인해 현재 망우리고개 북쪽의 산을 분토산(分土山)이라고 부르게 되었던 것이다. 이 마을에는 2003년까지도 동래정씨 정절공파(靖節公派) 35세대가 살고 있었다. 양원리는 구릉산 남서쪽, 망우동의 자연촌락으로 조선시대 역대왕들이 태조의 건원릉에 행차할 때 지나는 마을이었다.
양원리 마을이름은 조선 태조가 조선 태조 이성계가 동구릉 자리에 자신이 묻힐 능을 정하고 돌아오는 길에 망우리 고개를 넘다가 갈증이 생겨 이곳에 와서 우물물을 마셨다는 것이다. 그런데 물맛이 어찌나 좋은 지 이 물을 양원수(養源水)라고 이름을 붙여준 뒤부터 마을이름도 양원리라 하였다고 전한다. 현재 양원리 우물은 주택이 늘어나면서 수질이 오염되어 식수로는 사용할 수 없게 되었고, 우물의 자취만 남아있다.
정구는 정양생(鄭良生)의 아들로서 고려말 1377년(우왕 3) 문과에 2등으로 급제하여 전교시 부령(典校寺副令)을 지냈다. 1382년 김극공(金克恭)의 옥사에 연루되어 유배되었다가 1392년에 조선왕조가 개창되자 한성부 우윤을 지내고, 1397년 좌간의대부, 이듬해 판교서감사(判校書監事), 승지(承旨) 등을 지냈다.
정구는 정종 때 도승지·대사헌을 지내고, 태종 즉위 후에 예문관 학사, 공조 판서, 호조 판서, 판한성부사, 계림 부윤, 개성부 유후 등을 역임하였다. 태종 17년(1417)에 의정부 참찬으로 성절사에 임명되어 중국을 다녀온 후에 찬성(贊成 : 종1품)에 이르렀다.
그는 예서, 초서, 전서 등의 글씨를 잘 써서 유명하여, 동구릉의 태조 이성계의 건원릉 신도비의 전액(篆額)을 써서 말 한 필을 하사 받기도 하였고, 성품이 청렴하며 예의가 바르다는 평을 받았다. 그의 묘는 의정부시에 있고, 부인의 묘는 이곳에 안장되어 있다.
이 묘역에는 정구의 손자 정수(鄭穗 : 고양군수), 그의 아들 정인준(鄭仁俊 : 사헌부 감찰), 그의 아들 정건(鄭謇), 그의 아들 정숙하(鄭淑夏 : 형조참의), 정건의 큰 조카 정응(鄭譍 : 홍문관 응교), 정숙하의 증손자 정지(鄭智 : 내금위장) 등의 인물이 모셔져 있다.
한편 정구의 후손이 1811년(순조 11)에 작성한 것으로 추정되는 망우동지(忘憂洞誌) 상, 하권을 이 마을의 종손 정일섭씨가 소장하고 있다가 서울역사박물관에 기증하여 서울시 유형문화재 제299호로 지정되었다.
이 책은 서울에서 훈도방 주자동지 이후에 발굴된 서울 지역의 인문지리서로 조선시대에 다른 지역의 부지(府誌)나 읍지(邑誌)를 능가할 만큼 풍부한 내용으로 편찬되었다. 이 책은 동계(洞契), 동규, 향약, 선생안(先生案) 등 이 지역의 특수한 사정을 상세히 기록하여, 조선시대 지방사 연구의 귀중한 자료가 된다.
이에 2003년 10월에 서울역사박물관에서 동래정씨 문중에서 기증한 전적류 및 고문서류 239점을 중심으로 ‘조선시대 서울선비의 생활 - 동래정씨家 기증유물전’의 특별전시회를 개최할 때 망우동지(忘憂洞誌)가 소개되었다.
중랑캠핑숲
◇ 중랑캠핑숲 : 중랑구 망우로 87길 110
학생 소풍 및 가족 단위 피크닉을 위한 체험형 공원
2010년 11월 20일에 개장한 중랑캠핑숲은 개발제한구역 내의 비닐하우스 등으로 훼손된 곳을 복원하여 학생 소풍 및 가족단위 피크닉을 주제로 한 체험형 공원 시설이다. 건강한 숲을 주제로 한 생태학습 공원이며, 또한 소규모 야외무대 설치 등 청소년 중심의 문화중심 공원이다.
캠핑장에는 잔디밭, 바비큐 그릴, 야외 테이블, 전원 공급 시설을 비롯한 스파(목욕)와 샤워실 등도 별도로 설치되어 있다.
특히 텐트를 설치, 1일 최대 200명 이상 이용할 수 있는 가족 캠프 존에는 자동차 주차장까지 완비되어 있다. 중앙선 전철 양원역이 공원입구에 위치하여 대중교통으로도 접근이 용이하다.
중랑망우공간
◇ 중랑망우공간 : 중랑구 망우동 산 69-1번지 일대
방문자센터를 겸한 역사와 문화의 기획 전시와 교육 장소
2022년 중랑구 10대 뉴스 설문조사를 한 결과 망우역사문화공원 내의 중랑망우공간이 득표율 10%로 1위를 차지했다. 중랑구가 2020년에 서울시로부터 망우리공원 관리권을 이관 받은 후 묘역을 대대적으로 정비하고, 공원을 지역 문화유산으로 꾸준히 가꿔온 노력을 구민들이 직접 체감하고 공감했기 때문이다.
특히 2022년 4월에 문을 연 중랑망우공원은 공원의 거점시설로, 방문자센터를 겸한 망우역사문화공원이 지닌 역사와 문화를 기획 전시나 교육으로 널리 알리며, 방문객들에게 의미 있는 볼거리를 제공하고 있다.
사색의 길
◇ 사색의 길 : 중랑구 망우동~면목동 일대(4.7km)
’길 위의 인문학‘이란 말이 와닿는 독립운동가와 유명인사들의 묘가 있는 공원
중랑망우공원은 독립운동가와 유명 인사들이 묻힌 의미 있는 장소다. 공원 안의 순환도로를 따라 4.7km 정도 이어진 ‘사색의 길’은 이들의 묘역을 두루 거친다.
숲길을 천천히 걷는 동안 방정환과 한용운, 조봉암 선생 등 길가에 인접한 묘역도 있어 잠시 들러 묵념할 수 있다. 휴대전화에 응용프로그램(애플리케이션) ‘망우리 뮤지엄’을 이용하면 훨씬 풍부한 여행길이 된다.
중랑구는 산책로의 이름을 공모해 1998년 5월 ‘사색의 길’로 정하고 도시환경과 자연관찰로 종합안내판, 정자, 약수터 등을 설치해 주민들의 휴식 및 자연공원으로 애용되고 있다.
4㎞ 남짓한 산책로에 있는 독립애국지사들의 발자취를 따라 걷다 보면 ‘길 위의 인문학’이란 말이 새삼 다르게 와닿는다. 광복 78년을 맞은 지금, 중랑망우공원에 묻힌 순국선열들의 희생에서 첨예한 대치 국면에 처한 한일 양국 관계를 돌아보게 된다.
하늘에서 본 망우역사문화공원
◇ 망우역사문화공원 : 중랑구 망우동 산 69-1번지 일대(서울미래유산)
독립운동 인사와 유명인사가 안장되어 있는 망우리공원
망우리공원은 2021년에 ‘망우역사문화공원’으로 새롭게 태어났다.
현재의 망우리 고갯길을 개축할 때 고대 유물인 고인돌, 반월형석도, 돌창, 검파두석, 돌화살촉, 빗살무늬토기, 공열토기, 구연토기, 흑도, 유구석부, 점토대토기 등이 발견되었다.
현재 ‘13도 창의군탑(倡義軍塔)’이 망우리공원 입구에 세워져 있다. 이 기념탑은 1991년 7월 31일, 의병들이 서울 진격은 못했으나 항일 정신을 기리기 위해 「동아일보사」에서 건립한 것이다.
1907년 11월 대한제국 기에 48진 1만여명이 의병을 일으켜 13도 창의대군소를 설립하고, 총대장에 이인영(李麟榮), 군사장에 허위(許蔿)를 추대하여 일본군을 몰아내기 위하여 서울로 진격하기로 하였다.
그러나 이인영 대장이 부친상을 당해 귀향하자 군사장 허위는 1908년 1월에 3백명의 선봉 결사대를 이끌고 서울로 진격하다 망우리고개 일대에서 일본군과 현전을 벌였다. 하지만 후속 부대의 도착이 늦어 중과부적으로 퇴진할 수밖에 없었다.
망우리공원은 1933년 2월 2일자 「동아일보」에 ‘미아리 공동묘지가 조만간 가득 찰 것에 대비하여 경기도 망우리의 임야 70여 만 평을 경성부의 공동묘지로 결정하였다.’는 기사가 있음으로 보아 망우산을 1933년부터 서울시의 공동묘지로 사용하기 시작한 것을 알 수 있다.
40년이 지난 1973년 3월 25일에는 약 49만평(1,622,759㎡)의 망우리묘지에 2만 8,500여기의 분묘가 조성되어 한식과 추석 때는 성묘 인파로 뒤덮였다. 서울시는 더 이상의 묘지 쓰는 것을 금지하고, 이장과 납골을 장려함으로써 꾸준히 묘지를 이장해 현재 7,400여 기가 남았다. 이장으로 생긴 빈자리에 나무를 심어, 망우리공원은 울창한 생태 공원으로 변신했다.
망우산을 따라 조성한 ‘사색의 길’ 주변에는 물 맑은 약수터도 많다. 공기가 깨끗하고, 전망이 시원해 산책이나 조깅하는 이들이 줄을 잇는다.
이곳에는 도산 안창호, 고하 송진우, 명창 임방울, 애국지사 조종완, 박찬익, 백대진 등의 묘소가 있었으나 이장하여 국립묘지와 사립공원묘지에 안장되어 있다.
중랑구는 묘소를 찾아오는 시민들이 늘어남에 따라 산책과 조깅을 즐길 수 있도록 정자, 약수터 등의 시설을 해놓아 탐방코스로 가꾸어 놓고 있으며, 15명의 명사의 행적을 알 수 있는 연보비(年譜碑)를 세워 놓았다. 즉 1992년 2월에는 5.2km의 ‘사색의 길’에 방정환, 오세창, 한용운, 조봉암, 지석영, 문명훤, 장덕수 등 7명의 연보비(年譜碑)를 조성했으며, 1998년 2월에는 추가로 박인환, 문일평, 서병호, 서동일, 오재영, 서광조, 유상규, 오긍선 등 8명에 대한 연보비를 추가로 세워 놓았다.
망우역사문화공원은 1977년에 망우리공동묘지에서 망우묘지공원으로, 1998년에 망우리공원으로 명칭을 변경하였다. 1980년대 이후로도 묘지를 찾는 가족과 후손들의 발길이 이어졌다. 1990년대 망우리공원에 묻힌 위인들의 얼을 기리자는 움직임이 이어지면서 1997년부터 독립운동가와 문학인 등15명 위인의 무덤 주변에 추모비가 세워졌다.
민둥산에 울창한 숲이 자라나는 것처럼 망우리공원에 사람들의 발길이 이어졌다. 조상의 묘를 찾던 묘지에서 시민들이 운동과 산책, 여가를 즐기는 힐링의 공간으로 거듭났다.
2013년에 이 공원은 ‘서울시 미래유산’으로 선정되었고, 2016년 망우리 인문학길 사잇길 2개 코스가 조성되었으며, 근현대인문학의 보고(寶庫)가 되었다. 망우리공원은 2021년에 공원화 작업을 마친 뒤에는 ‘망우역사문화공원’으로 다시 태어났다.
이어서 전시·교육·홍보의 중추역할을 할 ‘중랑망우공간’이 2022년 4월 1일에 이 공원 내에 개관하면서 서울의 대표 역사문화공원으로 새롭게 발돋움하였다.
그 동안 망우리 공원에는 3.1독립운동을 주도했던 만해 한용운 등을 비롯한 17인의 유명인사가 안장되어 있는 것으로 알려졌으나, 각 언론사 인명록 및 독립유공자 공훈록(功勳錄)을 중심으로 서울시 시설관리공단 장묘문화센터의 고인 검색을 통해 묘역을 확인하고, 현장 답사를 통해 소설가 계용묵을 비롯한 10인의 유명인사가 추가로 안장되어 있음이 밝혀졌다.
망우역사문화공원
○ 망우리공원 내의 안장된 유명인사
1) 서동일(徐東日) 1893~1966 독립운동가, 건국훈장 애족장
2) 오재영(吳哉泳) 1897~1948 독립운동가, 건국훈장 애족장
3) 김정규(金貞奎) 1883~1960 독립운동가, 건국훈장 애족장
4) 유상규(劉相奎) 1897~1936 독립운동가, 건국훈장 애족장
5) 문명훤(文明煊) 지기(知期) 1892~1958 독립운동가, 건국훈장 애족장
6) 문일평(文一平) 호암(湖巖) 1888~1939 독립운동가, 민족사학자
7) 오세창(吳世昌) 위창(葦滄) 1864~1953 독립운동가, 서예가, 언론인
8) 한용운(韓龍雲) 만해(萬海) 1879~1944 승려, 독립운동가
9) 서병호(徐丙浩) 송암 1885~1972 독립운동가, 건국훈장 애국장
10) 서광조(徐光朝) 1897~1972 독립운동가, 건국훈장 애족장
11) 박인환(朴寅煥) 1926~1956 시인
12) 방정환(方定煥) 소파(小波) 1899~1931 독립운동가, 아동문학가
13) 이중섭(李仲燮) 1916~1956 화가
14) 장덕수(張德秀) 1895~1947 정치가
15) 조봉암(曹奉岩) 죽산(竹山) 1898~1959 독립운동가, 정치가,
16) 오긍선(吳兢善) 해관(海觀) 1878~1963 의학자, 사회사업가
17) 지석영(池錫永) 송촌(松村) 1855~1935 의학자, 국어학자(*)
*[자료] 중랑구청 홈페이지 망우리공원 [忘憂里公園]