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24년 5월 12일 아산UBF 주일메시지
떡 몇 개나 있는지 가서 보라
말씀 / 마가복음 6:30~56
요절 / 마가복음 6:38 “이르시되 너희에게 떡 몇 개나 있는지 가서 보라 하시니 알아보고 이르되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가 있더이다 하거늘”
오늘 말씀은 우리가 많이 공부한 오병이어의 기적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오병이어의 기적은 모든 복음서에 다 기록되어 있습니다. 영적인 의미가 크기 때문입니다. 오병이어의 기적을 보여주신 예수님의 영적인 비밀을 깊이 공부하고 예수님 원하는 믿음을 잘 배울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30절을 보십시오. 사도들이 전도여행에서 돌아왔습니다. 전도여행을 통하여 주신 은혜와 예수님 말씀대로 순종하여 나갔을 때 이루어진 능력의 역사를 보고 하였습니다. 성령의 능력을 체험한 사도들은 하고 싶은 말, 보고할 것이 많았습니다. 보고회를 마치자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31절을 같이 읽어 보겠습니다. “이르시되 너희는 다 한적한 곳에 가서 잠깐 쉬어라 하시니 이는 오고 가는 사람이 많아 음식 먹을 겨를도 없음이라”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쉬어라” 말씀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안식일을 주신 것도 우리에게 쉼과 휴식이 필요함을 아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쉬어라’고 하셨다고 해서 휴가 중심주의자가 될 수는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휴식에는 몇 가지 특징이 있습니다. 첫째는 따로 쉬는 것입니다. 좋은 휴식을 위하여 일에서 벗어나는 것이 좋습니다. 둘째, 한적한 곳에서 쉬는 것입니다. 쉰다고 하면서 왁자지껄하게 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한적한 곳에서 쉬는 것을 권장합니다. 셋째, 잠깐 쉬는 것입니다. 길게 쉬는 것은 안일로 흐를 수 있습니다. 너무 길게 쉬는 것은 나태함에 도달할 가능성이 있습니다.
32절을 보십시오.. 제자들은 배를 타고 한적한 곳으로 향하였습니다. 모처럼 쉬러 가는 제자들은 마음이 상쾌하고 기분이 아주 좋았을 것입니다. 문제 많은 사람들로부터 벗어나 따로 한적한 곳으로 쉬러 가는 것이 얼마나 좋았겠습니까!
33절을 보십시오. 제자들의 상쾌한 holiday는 시작하지 못하였습니다. 예수님과 제자들이 쉬려고 하는 한적한 곳에 많은 사람들이 미리 도착해 있었습니다. 이 사람들은 배가 도착할 곳에 미리 달려서 와 있었습니다. 이렇게까지 하면 부담스럽습니다. 이 사람들을 예수님께서는 어떻게 대하셨습니까?
34절을 같이 읽어보겠습니다. “예수께서 나오사 큰 무리를 보시고 그 목자 없는 양 같음으로 인하여 불쌍히 여기사 이에 여러 가지로 가르치시더라” 이 사람들은 극성맞아 보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께서는 몰려온 많은 사람들을 목자 없는 양으로 보셨습니다. 그들을 불쌍히 여기셨습니다. 긍휼은 사람을 보는 관점입니다. 자비는 긍휼히 여기는 사람들에게 베풀어 주신 것입니다. 사람을 어떻게 보는가? 관점은 대단히 중요합니다. 사람을 보는 관점을 고치지 못하고는 아무리 말을 부드럽게 하는 기교가 있더라도 관계가 파괴될 수 있습니다. 사람을 보는 관점을 고치지 못하고는 친절과 섬김을 베풀어도 그것이 무의미하게 될 수 있습니다. 친절한 말, 웃는 얼굴을 보여 주지만, 근본적으로 사람을 죄인으로 여기면, 상대방은 ‘나를 수준 낮게 보고 있구나’ 알아차리는 때가 옵니다. 우리는 사람을 보는 관점을 예수님의 관점으로 바꾸어야 합니다. 우리는 양들을 보는 마음을 하나님께서 우리를 어떻게 보셨는지 기억하고 그런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정죄하는 관점, 판단하는 관점, 참소 하는 관점은 마귀의 관점입니다.
목자 없는 양들로 보신 예수님께서 사람들에게 주신 것은 말씀이었습니다. “이에 여러가지로 가르치시더라” 긍휼히 여기는 것이 진리의 말씀 없이 이루어지면 인간적인 친절, 인간적인 섬김으로 흘러 갈 수 있습니다. 긍휼은 진리의 말씀과 연결되어야 좋은 열매를 맺을 수 있습니다.
35, 36절을 보십시오. 날이 저무는 때이고 장소는 갈릴리 지역의 한적한 곳, 사람들이 거주하지 않는 빈 들입니다. ‘이 곳은 빈 들이요 날도 저물어가니 무리를 보내어 두루 촌과 마을로 가서 무엇을 사 먹게 하옵소서’ 제자들이 보고하였습니다. 식사 때가 되었다는 보고 입니다. 식사 때가 되었는데 지금 환경에서는 식사 할 수 가 없는 것입니다. ‘보내어 두루 촌과 마을로 가서 무엇을 사 먹게 하옵소서’ 제자들의 제안은 합리적입니다. 타당성 있습니다. 합리적이고 타당성 있는 제안에 대하여 예수님의 대답은 어떠합니까?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희가 먹을 것을 주라 하시니” 예수님께서는 “너희가 먹을 것을 주라” 하십니다. 그러자 제자들이 대답합니다. ‘우리가 가서 이백데나리온의 떡을 사다 먹이리이까?’ 예수님의 말씀을 실행 하려면 적어도 돈이 200 데나리온은 있어야 합니다. 지금 시세로 하면 한끼 식사비용으로 최소 1600만원이 필요하다는 대답입니다. 제자들에게 그런 돈이 지금 없습니다. 제자들은 “너희가 먹을 것을 주라” 하신 예수님의 말씀이 실행하기 어려운 타당한 이유를 제시한 것입니다. 문제는 합리적인 생각과 타당성 있는 논리의 결과는 ‘200데나리온의 돈이 없어서 아무것도 할 수 없다’ 입니다. 합리성의 열매는 부정적인 결론입니다.
38절을 다 같이 읽어보겠습니다. “이르시되 너희에게 떡 몇 개나 있는지 가서 보라 하시니 알아보고 이르되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가 있더이다 하거늘” ‘너희에게 떡 몇 개나 있는지 가서 보라’ 이 말씀은 합리적인 판단만 하지 말고 손발을 움직여 보라는 말씀입니다. 양들을 앞에 둔 목자는 먹이려는 심정을 잃지 말아야 합니다. 목자는 문제에 도전 하여야 합니다.
일 하기 좋은 여건에서 누구든 일할 수 있습니다. 위기가 있으면 할 수 없는 이유를 제시하고 어려운 점이 있으면 그 어려움을 핑계하는 일은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입니다. 예수님의 제자가 그와 같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을 섬기고 다른 사람을 유익하게 하고자 하는 주의 종은 새로운 길을 제시할 수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의 제자의 비범성은 논리적인 말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상황을 보는 관점,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이 달라야 합니다. “너희에게 떡 몇 개나 있는지 가서 보라” 내가 움직여 일할 때, 예수님께서 그 다음을 책임져 주실 것을 믿으면 움직일 수 있습니다. 몇 개나 있는지 찾을 수 있습니다. 제자들이 예수님 말씀에 순종해서 찾아보니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가 있었습니다. 제자들은 이것을 예수님께 가지고 나갔습니다.
39~41절을 보십시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이 모든 사람들을 백명 또는 오십명 씩 앉히는 일을 하게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이 가져 온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셨습니다. 42, 43절을 보십시오. 모든 사람들이 다 배불리 먹었습니다. 배부르게 먹고 남은 떡 조각과 물고기를 거두었더니 열두 바구니에 가득하였습니다. 이날 떡 먹은 남자의 수가 5천 명이었습니다. 여자와 아이를 제외한 숫자 입니다.
예수님께서 5천 명을 먹이신 것은 광야에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먹이신 것과 같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들을 광야에서 하늘로부터 만나를 내려 먹여주셨습니다. 광야에서 다니는 40년 동안 단 하루도 만나가 내리지 않은 적이 없었고 이스라엘이 배고픈 적이 없었습니다. 이것은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부터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 하였느니라” 이 말씀대로 살아야 함을 가르쳐 주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광야에서 오천명을 먹이신 것 역시 예수님께서 전능하신 하나님이시며 약속하신 메시야로 오신 분임을 나타내는 사건입니다. 메시아 예수님을 영접하고 메시아를 주신 하나님의 사랑을 신뢰할 때, 먹고 사는 문제, 실제 생활의 문제는 메시아 예수님께서 얼마든지 해결해주신다는 것을 믿게 하려 함입니다.
에덴을 상실한 후 인생의 문제 중에서 가장 대표는 먹고 사는 문제가 되었습니다. 구약성경에 나타나는 이스라엘의 타락, 바알 숭배 문제도 바로 떡 문제, 먹고 사는 문제입니다. 가나안 족속들은 앞선 농경기술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그들의 풍요가 모두 땅의 산물을 주는 바알의 선물이라고 하였습니다. 가나안 족속들과 교제하고 바알 숭배에 참여하는 것은 가나안의 앞선 농경기술을 배우는 것을 의미하였습니다. 가나안 땅이 주는 풍요를 얻어 오는 것을 의미하였습니다. 광야 40년간 매일 만나를 먹으며 사람이 떡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입으로부터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산다는 것을 배우고 또 배웠음에도 이스라엘은 현실문제 앞에 역사에서 체험한 믿음을 적용하지 못하고 바울 숭배에 참여하였습니다. 하나님은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이고, 먼 역사속의 하나님이라 자기의 농사와 자기 자녀들에게 먹고 살 길을 안 주실지 모른다. 우리는 우리의 먹고 사는 문제를 우리가 해결해야 한다는 불신에 빠진 것입니다.
오늘날도 국가의 경제발전이 가장 우선 과제입니다. 국가 경제가 발전하려면 무엇보다도 첨단기술과 산업생산성을 가져야 한다고 사람들은 믿습니다. 지금 현재를 살아가는 개인들도 좋은 학벌을 왜 가지려 합니까? 왜 부모들은 자기들의 즐길 것, 자기들의 누릴 것을 줄이고 아껴가며 자식들을 공부시키려 합니까? 현실세계에서 잘 먹고 잘 사는 길이 그것이라고 믿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없는 사람들은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신 말씀을 믿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입으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을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메시아로 오셔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만나를 내려주신 것 같이 전능하신 능력으로 백성들에게 먹을 것을 주심으로 전능하신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의 모든 말씀으로 사는 인생의 본질을 회복하고, 하나님의 백성으로써 믿음 갖기를 원하신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말씀 중심으로 살면 우리의 먹는 문제는 예수님께서 해결해 주신다는 것을 알려 주신 것입니다. 그렇지만, 오병이어로 오천명을 먹이는 기적을 체험한 후 떡을 먹은 사람들은 믿음의 세계로 나아가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을 우리의 왕으로 모시자’ 그들은 정신이 나가고 말았습니다.
지금도 학생들은 믿음으로 취업하면 직장상사와 직장 일에 매이고 맙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취업하게 하였는데, 취업만 하면 예수님께로 다시 돌아오지 않습니다. 죽 쒀서 개주고 말았다는 기분이 듭니다. 이래서는 안 되겠다 대학원에 다니게 하고 대학원 공부와 연구하면서 예수님을 배우게 하여야 하겠다. 그러자 대학원 졸업 후 어떻게 할 것인가? 진로문제를 가지고 끊임없이 염려하고 고민에 빠져듭니다. 지금까지 인도하여 주신 예수님을 생각하지 않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를 위하여 죽으셨으므로 그 지극하신 사랑 안에서 나의 장래는 예수님께서 친히 인도하여 주신다. 믿으려 하지 않습니다. 믿음의 길로 가지 않는 사람들이 더 많습니다.
45, 46절을 보십시오. 예수님께서는 즉시 제자들을 배 타고 건너편 벳세다로 가게 하셨습니다. 예수님의 떡을 먹고 오히려 정신이 나가버린 무리들 앞에 제자들을 둘 수 없기 때문입니다. 제자들을 출발 시킨 후 예수님께서 직접 무리들을 해산하고 보내는 일을 하셨습니다. 그런 다음 기도하러 산으로 가셨습니다. 이 사건 이후 사람들은 예수님을 왕으로 추대하려고 하였습니다. 사람들의 영적 무지는 일견 이해가 가는 면도 있습니다. 당시 경제가 매우 어려웠습니다. 다수 일반 백성들은 생존의 어려움에 많이 노출되었습니다. 먹는 문제로 어려움을 겪던 사람들은 떡 먹은 것만 기억하였습니다. 관심사가 떡으로 고정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사실을 아십니다. 제자들 편에서도 환호하고 열광하는 사람들에게서 떠나는 것이 필요합니다.
47~52절을 보십시오. 제자들은 이전에 바람과 바다를 명하여 잠잠하게 하신 예수님을 경험하였습니다. 제자들은 조금 전 오병이어로 5천명을 먹이신 예수님도 배웠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자들은 역풍을 만나 괴롭게 노 저을 때, 물 위로 걸어오시는 예수님을 보고 놀랐습니다. 예수님께서 배에 오르신 후 거센 바람이 멈추자 놀랐습니다. 성경은 제자들이 이렇게 놀란 이유를 오병이어의 기적을 이루신 예수님을 생각하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한 가지 사건, 한 가지 문제를 통하여 체험한 믿음은 단편적인 경험으로 끝나는 것이 되지 말아야 합니다. 다른 상황, 다른 사건에도 적용할 수 있어야 합니다. 한 번 체험한 믿음은 여러 방면에서 적용되고 확장 되어야 합니다.
저는 학생 때, 실제 생활에서 기적을 체험하면 믿음생활에서 큰 도움이 되지 않을까 생각하였습니다. 놀라운 체험이 주어지고나면 믿음도 더 커지고 확실해 질 것이라 기대하였습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믿음이 먼저이고 그 사람의 내면이 더 중요합니다. 기적과 체험은 그 다음입니다. 기적과 체험을 감당할 만 하여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광야에서 오병이어로 오천명을 먹여 주셨지만, 백성들은 예수님을 왕 삼고자 하였고 제자들은 믿음의 교훈을 쉽게 잊고 다른 상황, 다른 사건에서는 전혀 믿음을 적용시키지 못하였습니다. 모든 시대에는 예수님의 기적이 언제나 있습니다. 문제는 사람들이 마음이 어두운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의 기적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사람의 몸을 입고 우리에게 오신 것이 기적입니다. 죄 없으신 분이 나의 죄를 지고 십자가에 죽으신 것이 사랑의 기적입니다. 십자가에 죽으신 예수님께서 사흘만에 다시 죽음을 이기고 살아나신 것이 가장 큰 기적입니다. 십자가의 사랑과 부활의 능력으로 그 믿는 자들과 함께 하여 주시는데 어느 시대나 사람들은 자기 문제에만 마음이 팔려 있습니다. 함께 하시는 예수님을 체험하고도 직장 문제를 만나면 또 마음이 어둡고 결혼 문제를 만나면 또 마음이 어두워집니다. 어두운 마음이 문제입니다. 예수님의 기적은 언제나 우리 곁에서 일어나고 있습니다.
53~56절을 보십시오. 갈릴리 각 지방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께 병자를 데리고 나왔습니다. 스스로 예수님께 나올 수 없는 사람들은 침상째 들고 나왔습니다. 기적을 본 사람들은 떡에 마음이 팔렸고 제자들은 믿음을 적용하지 못하는 미련함을 가졌지만, 이 백성들은 예수님의 능력을 듣고 믿는 믿음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능력을 여러 가지 다양한 상태의 병자들에게 적용하였습니다. 듣고 믿은 자들, 믿고 나온 사람들, 믿음으로 예수님께 손이라도 대는 사람들은 모두 나음을 입었습니다.
예수님은 그리스도 이십니다. 예수님은 전능하신 하나님이십니다. 예수님을 나의 그리스도로 믿고 예수님을 전능하신 하나님으로 믿는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믿음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합니다. 믿음이 우리를 새로운 예수님의 세계로 나아가게 합니다. 우리의 의식에 그리스도 예수님을 믿는믿음을 채워야 합니다. 우리의 마음에 그리스도 예수님의 살아계심을 믿는 믿음을 심어야 합니다. 우리의 생각 속에 그리스도 예수님께서 지금 나와 함께 하신다는 믿음의 생각이 가득하게 하여야 합니다.
직장 일에 대학원생활에 마음이 미련한 상태가 되지 말아야 합니다. 정신을 차리고 살아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기뻐하시는 믿음을 가지고 믿음을 실제 삶에서 계속 확장해 나가야 합니다. 예수님은 그리스도 이십니다. 예수님은 전능하신 하나님이십니다. 믿는 사람에게 복이 있습니다. 믿는 사람이 예수님을 깊이 뜨겁게 만날 수 있습니다.
결론적으로 예수님께서는 떡 다섯 개 물고기 두 마리로 오천명을 먹이셨습니다. 남자만 오천명이었습니다.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믿는 것은 이론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의 그리스도가 되신 것은 관념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살아 계시고 능하지 못한 것이 없는 하나님이십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고 믿음으로 살 때, 예수님께서 우리를 먹이십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을 채워주십니다. 제자들과 같이 마음이 미련해지는 일이 없도록 하고, 한 번 배운 믿음을 마음에 잘 간직하여 새로운 적용을 할 줄 알고 믿음이 삶의 전반에 살아 역사하도록 해나가기를 기도합니다.
아산 UBF
아산 UBF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