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17.10.11 기록 추가-한글 원문병기
홍직필의 아버지는 홍이간洪履簡 으로, 1820년 영월부사로 재임할 때이다.
선돌의 암벽에다 『운장벽(雲莊壁) 홍이간, 홍직필, 오희상』이라는 붉은 주색(朱色) 글자를 새겨놓아 지금도 선명하게 글자가 보인다.
만백성이 사모하며 공경하던 영월, 동쪽위에 살던 ‘상동민(上東民)’
- 김원식(영월군문화해설사)
단종임금에 대한 공경은 누구라고 말할 필요도 없이 다 같은 마음이었습니다. 어느 젊은 여인은 애달픈 노래를 금강에서 불렀기에 ‘나라의 임금이 물가에 머물러 계시다’는 왕방연(王邦衍) 한시(漢詩)가 지어졌고, 동쪽 위에 살던 어느 백성(上東民)도 도리를 다하였기에 명월불로(明月不老) 옛 말처럼 온전한 역사는 사그라지지 않는다고, 옛날 옛날에 영월의 어느 백성은 이러했다고, 한자기록을 찾아냈기에 한글화로 전하여 드립니다.
上東民傳庚辰 洪直弼<상동민전>[경진년 1820, 순조 20] 홍직필
上東民不知何許人(상동민불지하허인)。상동민이 어떤 사람인지 알 수 없거니와
亦不詳姓氏(역불상성씨)。성씨조차 분명치 않다.
居寧越府之上東面(거영월부지상동면)。다만 영월부 상동면에 살았으므로
故以上東民名 或稱勸農 云(고이상동민명)。 ‘상동민’이라는 이름을 붙였다하고
或稱勸農 云(혹칭권농 운)。혹은 권농이라고 칭한다.
端廟之巽位于越也(단묘지손위우월야)。단종께서 영월에서 왕위를 사양하셨을 때,
烈焰燔天(렬염번천)。맹렬한 화염이 하늘을 태울 듯 한 기세로 타올랐다.
人皆惴惴(인개췌췌)。사람들은 모두 벌벌 떨면서
若及於禍(약급어화)。마치 자신에게 화가 미칠 것처럼 생각했다.
或爲上王心惻(혹위상왕심측)。혹자는 상왕의 처지를 슬퍼하기도 했지만
而掉袂不敢近(이도몌불감근)。소매를 저으며 감히 접근하지 못했다.
獨有上東民一人(독유상동민일인)。이때 상동민 한 사람만이
迎勞于淸泠浦(영로우청령포)。청령포에서 단종을 영접하고 위로했으니,
常具肴蔬時果進之(상구효소시과진지)。항상 고기와 채소, 제철 과일을 준비하여 진헌하였다.
自浦而移御于賓館(자포이이어우빈관)。청령포에서 객관으로 거처를 옮기시자,
其人輒走謁于梅竹樓下(기인첩주알우매죽루하)。그는 곧장 달려가 매죽루 아래서 단종을 알현하였다.
樓在賓館之東(루재빈관지동)。매죽루는 객관 동쪽에 있었는데
卽今之子規樓也(즉금지자규루야)。바로 지금의 자규루다.
每趁市日至(매진시일지)。그는 저자에 가는 날마다 하루도 빠짐없이
莫之或闕(막지혹궐)。매죽루에 이르렀다.
一日又向邑(일일우향읍)。하루는 여느 때처럼 고을로 향하고 있었는데
到炭釜谷(도탄부곡)。[或云遭上王于錦江上(혹운조상왕우금강상)。탄부곡에 이르렀을 때 혹자의 말에 의하면 금강 가에서 상왕을 만났기 때문에
故名其地曰聖遭浦(고명기지왈성조포)。그곳을 성조포 라 명명했다고 한다.]
端廟乘白馬騰蹋而臨(단묘승백마등답이림)。단종께서 백마를 타고 치달리듯 올라 오셨다.
其人驚怪(기인경괴)。깜짝 놀란 그는 괴이하게 여기며
伏謁道傍(복알도방)。길가에 엎드린 채
問官家將向何處(문관가장향하처)。“전하께서 장차 어디로 행차하시기에
而取路此地乎(이취로차지호)。이쪽 길로 가십니까?” 라 물었다.
上顧謂曰予向太白山而去(상고위왈여향태백산이거)。단종께서는 그를 돌아보며 “나는 태백산으로 가는 길이다.” 라 대답하셨다.
其人解苞而獻山果(기인해포이헌산과)。그가 보따리를 풀어 산과일을 바치자,
上曰今也則不可食(상왈금야칙불가식)。“지금은 먹을 수 없구나.”라 말씀 하셨다.
其人拜辭(기인배사)。단종께 공손히 하직 인사를 올린 뒤
到德浦始聞上昇遐(도덕포시문상승하)。덕포에 이르렀을 때 비로소 단종께서 승하하셨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다.
失聲號痛(실성호통) 如不欲生(여불욕생)。그는 더 이상 살고 싶은 마음이 없는 듯 목이 메도록 애끓게 통곡하였다.
過十數里(과십수리)。10여 리를 걷는 동안
口不絶哭(구불절곡)。곡하는 소리가 끊기지 않았는데
聲氣俱竭而死(성기구갈이사)。목소리와 기운이 모두 소진되자 곧 숨을 거두었다.
卽丁丑十月二十四日也(즉정축십월이십사일야)。이날이 바로 정축년(1457, 세조 3) 10월 24일이다.
嗚呼(오호)。아아! 非斯人之忠(비사인지충)。이 사람의 충정이 아니라면
何能致白日之顯靈乎(하능치백일지현령호)。어찌 백주대낮에 단종의 신령께서 그 모습을 드러냈겠는가!
忠者一其心而靡他(충자일기심이미타)。충정이라는 것은 그 마음을 전일하게 하여 다른 마음을 품지 않는 것이다.
故乃克感通如此(고내극감통여차)。그러므로 이처럼 신령과 감통할 수 있었다.
且不期死事而死(차불기사사이사)。不要殉國而殉(불요순국이순)。게다가 임금과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칠 것을 바라거나 기약하지도 않았는데,
臣主同日幷命(신주동일병명)。임금과 신하가 같은 날 운명을 함께했으니
亦可異焉(역가이언)。참으로 기인한 일이다.
古所云難至而節見者(고소운난지이절견자)。옛 말에 환난을 맞닥뜨려야 그 절의를 볼 수 있다고 했는데,
豈若人之謂乎(기약인지위호)。어찌 이와 같은 사람을 말하는 게 아니겠는가!
天德山人曰君臣之義(천덕산인왈군신지의)。천덕산인은 말 하노라. 군신간의 의리는
天性也(천성야)。타고난 성품으로
不以親疎貴賤而有所加損(불이친소귀천이유소가손)。관계의 친소, 신분의 귀천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
是以野人快炙背美芹子(시이야인쾌자배미근자)。이 때문에 시골 사람이 등에 내리쬐는 햇볕을 상쾌하게 여기고 미나리나물 맛을 아름답게 여기며
而獻之於其君(이헌지어기군)。이것을 임금에게 받쳤던 것이다.
故曰雖在畎畒(고왈수재견묘)。그러므로 밭도랑 사이에 있더라도
猶不忘君(유불망군)。임금을 잊지 않는 것이
惓惓之義也(권권지의야)。간절하고 정성스런 의리라고 말한 것이다.
從古殉節之士(종고순절지사)。옛날부터 절의를 위해 목숨을 바친 선비는
不出於世胄華閥(불출어세주화벌)。경화세족과 벌열가문에서 나오지 않았다.
而必在於草野疏逖不識何狀之人(이필재어초야소적불식하상지인)。대부분 어떤 자인지도 알 수 없는, 후미지고 궁벽한 시골에 사는 사람이었다.
人性之善(인성지선)。사람의 선한 성품이
豈係于世類哉(기계우세류재)。가문이나 출신과 무슨 관계가 있겠는가!
皇朝壬午之役(황조임오지역)。명나라에 임오변란이 일어났을 때
樵夫耘叟葛衣翁補鍋匠之屬(초부운수갈의옹보과장지속)。나무꾼과 농부, 베옷 입은 노인, 솥 땜질 기술자 등의 무리가
或死或生(혹사혹생)。생사를 막론하고 各自靖獻(각자정헌)。저마다 충성을 바침으로써
與方遜志,鐵鉉,景淸諸公(여방손지,철현,경청제공)。방손지, 철현, 경청 등과
同歸一揆(동귀일규)。동일한 도리로 회귀했으니
而又加難矣(이우가난의)。이는 더욱 어려운 일이다.
今上東民者(금상동민자)。상동민이라는 자는
卽絶峽之一蚩氓耳(즉절협지일치맹이)。궁벽한 골짜기에 사는 어리석은 백성일 뿐이다.
天門萬里(천문만리)。대궐이 만리 나 떨어져 있으므로
莫識君面(막식군면)。임금의 얼굴을 한 번도 본 적이 없다
及翠華東廵(급취화동순)。하지만 단종께서 동쪽으로 거동하셨을 때,
始知爲吾君(시지위오군)。바로 그분이 우리 임금이라는 사실을 비로소 알게 되었고,
油然生愛戴之心(유연생애대지심)。상동민의 가슴속에는 우리 임금을 떠받들며 존승해야 한다는 마음이 거세게 일었다.
排日薦獻(배일천헌)。하루도 빠짐없이 음식을 바치며
自殫純誠(자탄순성)。순수한 정성을 다한 것도
斯已奇矣(사이기의)。이미 예사롭지 않은 일이거늘,
而及聞變故(이급문변고)。痛心號絶(통심호절)。승하 소식을 듣자마자 목메어 통곡하며
致命而後已(치명이후이)。목숨이 끊기지 직전까지 울음을 그치지 않았다.
忠烈秋霜(충렬추상)。그 충렬은 가을 서릿발처럼 매섭고
精貫天日(정관천일)。그 정 령은 하늘의 태양까지 꿰뚫을 만하니,
可以激淸風而勵薄俗(가이격청풍이려박속)。 맑은 풍조를 진작시키고 경박한 세속을 독려하기에 충분하다.
於不休哉(어불휴재)。아! 아름답지 않은가!
凡明熊魚之取舍者(범명웅어지취사자)。무릇 목숨을 버리며 의리를 취한 자는
身歿而名著(신몰이명저)。죽은 뒤에 이름이 드러나는 법인데
不朽于千劫(불후우천겁)。그 이름은 천추토록 사라지지 않는다.
以故烈士殉名而不悔(이고렬사순명이불회)。이 때문에 열사는 이름을 위해 생명을 버리면서도 결코 후회하지 않는다.
斯人也(사인야)。幷與名姓而無傳(병여명성이무전)。이 사람의 존재와 행적은 그 성명姓名과 함께 인멸되어,
磨滅而不記 惜哉(마멸이불기 석재)。전하는 기록이 아무것도 없다. 어찌 애석하지 않겠는가!
然其死也(연기사야)。그러나 그의 죽음은
卽天理所自然(즉천리소자연)。천리상 자연스러운 것이지,
非有爲而爲者(비유위이위자)。豈欲舍生立命(기욕사생립명)。특별한 의도나 목적 때문에 죽은 것은 아니다. 어찌 삶을 버려
以施于後世哉(이시우후세재)。천명을 받듦으로써 후세에 명성을 전하려 했겠는가!
吾事自了(오사자료)。何與人之知不知乎(하여인지지불지호)。내가 해야 할 일이 절로 분명하다면 다른 사람들이 알아주건 알아주지 않건 무슨 상관있겠는가!
彼以名湮滅不稱爲悲者(피이명인멸불칭위비자)。詎非淺量哉(거비천량재)。참으로 식견이 천박하구나! 이름이 민멸되어 전하지 않는다고 슬퍼하는 자들이여!
與明朝之樵夫耘叟(여명조지초부운수)。曠世一轍(광세일철)。그의 충정은 명나라의 나무꾼, 농부와 매한가지이고
其同歸於泯然無跡者(기동귀어민연무적자)。 그들과 똑같이 아무런 자취도 남기지 않았다.
彌見其爲眞忠也(미견기위진충야)。이게 그가 품었던 진실한 충정을 더욱 또렷이 볼 수 있다
余遊莊陵(여유장릉)。나는 장릉을 유람할 때
有老宿年踰九耋者(유로숙년유구질자)。아흔 살이 넘은 노승을 만났다.
爲說當日事(위설당일사)。그는 나에게 당시 일을 말해주었는데
欷歔煩酲(희허번정)。如不能自勝(여불능자승)。 스스로 주체할 수 없는 듯이 흐느끼며 번뇌하였다.
而輒稱端廟謂吾主上(이첩칭단묘위오주상)。그리고는 갑자기 단종을 ‘우리 주상[吾主上]’ 이라 칭하였다.
是則未曾納觀風軒一拜者也(시칙미증납관풍헌일배자야)。이 사람은 단 한 번도 관풍헌에 들어가 참배한 적이 없는 자다.
然而猶如此(연이유여차)。그런데도 오히려 이와 같았으니
始知端廟至德之沁入人心者(시지단묘지덕지심입인심자)。단종의 지극한 덕이 사람의 마음속에 아주 깊숙이 스며들었음을 비로소 알 수 있었다.
若斯其深且遠(약사기심차원)。이것이 어찌 특별한 의도를 가지고
是孰爲而爲之哉(시숙위이위지재)。누군가를 위하여 그렇게 한 것이겠는가!
彼賣國賭利(피매국도리)。나라를 팔아먹고 이끗을 쫓으며
陷厥辟於淫禍(함궐벽어음화)。然後爲快者(연후위쾌자)。제 임금을 커다란 재앙에 빠뜨린 연후에야 후련하게 생각하는 저 작자들을
視此兩人何如哉(시차양인하여재)。이 두 사람과 비교해보면 어떠한가!
【홍직필(洪直弼) : 1776(영조 52)∼1852(철종 3). 조선 후기의 학자】
• 본관 남양(南陽). 호는 매산(梅山). •개천의 경현사(景賢祠)에 배향, 시호는 문경(文敬), 저서는 ≪매산집≫ 52권이 있습니다. • 아버지 홍이간(洪履簡)이 1820년에 영월부사로 재임할 때 홍직필은 영월탐방기록을 남겼는데『상동민전(上東民傳)』과『청령포기(淸泠浦記)』를 비롯하여 1817년에 울산 원강서원에 엄흥도의 후손 엄석헌(嚴碩憲)의 청으로 짓게 된『엄호장정려기(嚴戶長旌閭記)』, 낙화암과 민충사에 대한 『창렬암기(彰烈巖記)』, 생육신 원호선생에 대한『관란정기(觀瀾亭記)』등은 오늘날 영월의 역사서가 되고 있습니다. 또한 선돌의 암벽에는 『운장벽(雲莊壁) 홍이간, 홍직필, 오희상』이라는 주색(朱色) 암각자(岩刻字)를 새겨놓아 지금도 선명합니다.
[참고문헌]『매산집(梅山集)』『역주 장릉지속편 장릉지보유』『한국역대인물종합DB』
한국문집총간 > 매산집 > 梅山先生文集卷之五十一 / 傳
-------------------------------------------------------------------------------------
<상동민전>[경진년 1820, 순조 20] 홍직필
상동민이 어떤 사람인지 알 수 없거니와 성씨조차 분명치 않다.
다만 영월부 상동면에 살았으므로 ‘상동민’이라는 이름을 붙였다고 한다.[혹은 권농勸農이라고 칭한다]
단종께서 영월에서 왕위를 사양하셨을 때, 맹렬한 화염이 하늘을 태울 듯 한 기세로 타올랐다.
사람들은 모두 벌벌 떨면서 마치 자신에게 화가 미칠 것처럼 생각했다.
혹자는 상왕의 처지를 슬퍼하기도 했지만 소매를 저으며 감히 접근하지 못했다.
이때 상동민 한 사람만이 청령포에서 단종을 영접하고 위로했으니,
항상 고기와 채소, 제철 과일을 준비하여 진헌하였다.
청령포에서 객관으로 거처를 옮기시자, 그는 곧장 달려가 매죽루 아래서 단종을 알현하였다.
매죽루는 객관 동쪽에 있었는데 바로 지금의 자규루다.
그는 저자에 가는 날마다 하루도 빠짐없이 매죽루에 이르렀다.
하루는 여느 때처럼 고을로 향하고 있었는데 탄부곡炭釜谷[혹자의 말에 의하면 금강錦江 가에서 상왕을 만났기 때문에 그곳을 성조포聖遭浦 라 명명했다고 한다]에 이르렀을 때 단종께서 백마를 타고 치달리듯 올라 오셨다.
깜짝 놀란 그는 괴이하게 여기며 길가에 엎드린 채 “전하께서 장차 어디로 행차하시기에 이쪽 길로 가십니까?” 라 물었다.
단종께서는 그를 돌아보며 “나는 태백산太白山으로 가는 길이다.” 라 대답하셨다.
그가 보따리를 풀어 산과일을 바치자, “지금은 먹을 수 없구나.”라 말씀 하셨다.
단종께 공손히 하직 인사를 올린 뒤 덕포德浦에 이르렀을 때 비로소 단종께서 승하하셨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다.
그는 더 이상 살고 싶은 마음이 없는 듯 목이 메도록 애끓게 통곡하였다.
10여 리를 걷는 동안 입에서 곡하는 소리가 끊기지 않았는데 목소리와 기운이 모두 소진되자 곧 숨을 거두었다.
이날이 바로 정축년(丁丑年 1457, 세조 3) 10월 24일이다.
아아! 이 사람의 충정이 아니라면 어찌 백주대낮에 단종의 신령께서 그 모습을 드러냈겠는가!
충정이라는 것은 그 마음을 전일하게 하여 다른 마음을 품지 않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처럼 신령과 감통할 수 있었다.
게다가 임금과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칠 것을 바라거나 기약하지도 않았는데, 임금과 신하가 같은 날 운명을 함께했으니 참으로 기인한 일이다.
옛 말에 환난을 맞닥뜨려야 그 절의를 볼 수 있다고 했는데, 어찌 이와 같은 사람을 말하는 게 아니겠는가!
천덕산인天德山人은 말 하노라.
군신간의 의리는 타고난 성품으로 관계의 친소, 신분의 귀천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
이 때문에 시골 사람이 등에 내리쬐는 햇볕을 상쾌하게 여기고 미나리나물 맛을 아름답게 여기며 이것을 임금에게 바쳤던 것이다.
그러므로 밭도랑 사이에 있더라도 임금을 잊지 않는 것이 간절하고 정성스런 의리라고 말한 것이다.
옛날부터 절의를 위해 목숨을 바친 선비는 경화세족과 벌열가문에서 나오지 않았다.
대부분 어떤 자인지도 알 수 없는, 후미지고 궁벽한 시골에 사는 사람이었다.
사람의 선한 성품이 가문이나 출신과 무슨 관계가 있겠는가!
명나라에 임오壬午 변란이 일어났을 때 나무꾼과 농부, 베옷 입은 노인, 솥 땜질 기술자 등의 무리가 생사를 막론하고 저마다 충성을 바침으로써 방손지方遜志, 철현鐵鉉, 경청景淸 등과 동일한 도리로 회귀했으니 이는 더욱 어려운 일이다.
상동민이라는 자는 궁벽한 골짜기에 사는 어리석은 백성일 뿐이다.
대궐이 만 리나 떨어져 있으므로 임금의 얼굴을 한번도 본 적이 없다.
하지만 단종께서 동쪽으로 거동하셨을 때, 바로 그분이 우리 임금이라는 사실을 비로소 알게 되었고, 상동민의 가슴속에는 우리 임금을 떠받들며 존승해야 한다는 마음이 거세게 일었다.
하루도 빠짐없이 음식을 바치며 순수한 정성을 다한 것도 이미 예사롭지 않은 일이거늘, 승하 소식을 듣자마자 목메어 통곡하며 목숨이 끊기지 직전까지 울음을 그치지 않았다.
그 충렬은 가을 서릿발처럼 매섭고 그 정 령은 하늘의 태양까지 꿰뚫을 만하니, 맑은 풍조를 진작시키고 경박한 세속을 독려하기에 충분하다.
아! 아름답지 않은가!
무릇 목숨을 버리며 의리를 취한 자는 죽은 뒤에 이름이 드러나는 법인데 그 이름은 천추토록 사라지지 않는다.
이 때문에 열사는 이름을 위해 생명을 버리면서도 결코 후회하지 않는다.
이 사람의 존재와 행적은 그 성명姓名과 함께 인멸되어, 전하는 기록이 아무것도 없다.
어찌 애석하지 않겠는가!
그러나 그의 죽음은 천리상 자연스러운 것이지, 특별한 의도나 목적 때문에 죽은 것은 아니다.
어찌 삶을 버려 천명을 받듦으로써 후세에 명성을 전하려 했겠는가!
내가 해야 할 일이 절로 분명하다면, 다른 사람들이 알아주건 알아주지 않건 무슨 상관있겠는가!
참으로 식견이 천박하구나!
이름이 민멸되어 전하지 않는다고 슬퍼하는 자들이여!
그의 충정은 명나라의 나무꾼, 농부와 매한가지이고 그들과 똑같이 아무런 자취도 남기지 않았다.
이게 그가 품었던 진실한 충정을 더욱 또렷이 볼 수 있다.
나는 장릉을 유람할 때 아흔 살이 넘은 노승을 만났다.
그는 나에게 당시 일을 말해주었는데 스스로 주체할 수 없는 듯이 흐느끼며 번뇌하였다.
그리고는 갑자기 단종을 ‘우리 주상[吾主上]’ 이라 칭하였다.
이 사람은 단 한 번도 관풍헌에 들어가 참배한 적이 없는 자다.
그런데도 오히려 이와 같았으니 단종의 지극한 덕이 사람의 마음속에 아주 깊숙이 스며들었음을 비로소 알 수 있었다.
이것이 어찌 특별한 의도를 가지고 누군가를 위하여 그렇게 한 것이겠는가!
나라를 팔아먹고 이끗을 쫓으며 제 임금을 커다란 재앙에 빠뜨린 연후에야 후련하게 생각하는 저 작자들을 이 두 사람과 비교해보면 어떠한가!
上東民傳庚辰
上東民不知何許人。亦不詳姓氏。상동민불지하허인。역불상성씨。
居寧越府之上東面。거녕월부지상동면。
故以上東民名 或稱勸農 云。고이상동민명 혹칭권농 운。
端廟之巽位于越也。烈焰燔天。단묘지손위우월야。렬염번천。
人皆惴惴。若及於禍。인개췌췌。약급어화。
或爲上王心惻。而掉袂不敢近。혹위상왕심측。이도몌불감근。
獨有上東民一人。迎勞于淸泠浦。독유상동민일인。영로우청령포。
常具肴蔬時果進之。상구효소시과진지。
自浦而移御于賓館。자포이이어우빈관。
其人輒走謁于梅竹樓下。기인첩주알우매죽루하。
樓在賓館之東。卽今之子規樓也。루재빈관지동。즉금지자규루야。
每趁市日至。莫之或闕。매진시일지。막지혹궐。
一日又向邑。일일우향읍。
到炭釜谷。도탄부곡。
或云遭上王于錦江上。혹운조상왕우금강상。
故名其地曰聖遭浦。고명기지왈성조포。
端廟乘白馬騰蹋而臨。단묘승백마등답이림。
其人驚怪。伏謁道傍。기인경괴。복알도방。
問官家將向何處。문관가장향하처。
而取路此地乎。이취로차지호。
上顧謂曰予向太白山而去。상고위왈여향태백산이거。
其人解苞而獻山果。기인해포이헌산과。
上曰今也則不可食。상왈금야칙불가식。
其人拜辭。기인배사。
到德浦始聞上昇遐。도덕포시문상승하。
失聲號痛。如不欲生。실성호통。여불욕생。
過十數里。口不絶哭。과십수리。구불절곡。
聲氣俱竭而死。성기구갈이사。
卽丁丑十月二十四日也。즉정축십월이십사일야。
嗚呼。오호。
非斯人之忠。비사인지충。
何能致白日之顯靈乎。하능치백일지현령호。
忠者一其心而靡他。충자일기심이미타。
故乃克感通如此。고내극감통여차。
且不期死事而死。차불기사사이사。
不要殉國而殉。불요순국이순。
臣主同日幷命。亦可異焉。신주동일병명。역가이언。
古所云難至而節見者。고소운난지이절견자。
豈若人之謂乎。기약인지위호。
天德山人曰君臣之義。천덕산인왈군신지의。
天性也。不以親疎貴賤而有所加損。천성야。불이친소귀천이유소가손。
是以野人快炙背美芹子。而獻之於其君。시이야인쾌자배미근자。이헌지어기군。
故曰雖在畎畒。猶不忘君。惓惓之義也。고왈수재견畒。유불망군。권권지의야。
從古殉節之士。不出於世胄華閥。종고순절지사。불출어세주화벌。
而必在於草野疏逖不識何狀之人。이필재어초야소적불식하상지인。
人性之善。豈係于世類哉。인성지선。기계우세류재。
皇朝壬午之役。황조임오지역。
樵夫耘叟葛衣翁補鍋匠之屬。초부운수갈의옹보과장지속。
或死或生。各自靖獻。혹사혹생。각자정헌。
與方遜志,鐵鉉,景淸諸公。여방손지,철현,경청제공。
同歸一揆。而又加難矣。동귀일규。이우가난의。
今上東民者。卽絶峽之一蚩氓耳。금상동민자。즉절협지일치맹이。
天門萬里。莫識君面。천문만리。막식군면。
及翠華東廵。급취화동廵。
始知爲吾君。시지위오군。
油然生愛戴之心。유연생애대지심。
排日薦獻。自殫純誠。斯已奇矣。배일천헌。자탄순성。사이기의。
而及聞變故。이급문변고。
痛心號絶。致命而後已。통심호절。치명이후이。
忠烈秋霜。精貫天日。충렬추상。정관천일。
可以激淸風而勵薄俗。가이격청풍이려박속。
於不休哉。어불휴재。
凡明熊魚之取舍者。身歿而名著。범명웅어지취사자。신몰이명저。
不朽于千劫。불후우천겁。
以故烈士殉名而不悔。斯人也。이고렬사순명이불회。사인야。
幷與名姓而無傳。磨滅而不記。병여명성이무전。마멸이불기。
惜哉。석재。
然其死也。卽天理所自然。연기사야。즉천리소자연。
非有爲而爲者。비유위이위자。
豈欲舍生立命。以施于後世哉。기욕사생립명。이시우후세재。
吾事自了。오사자료。
何與人之知不知乎。하여인지지불지호。
彼以名湮滅不稱爲悲者。피이명인멸불칭위비자。
詎非淺量哉。거비천량재。
與明朝之樵夫耘叟。여명조지초부운수。
曠世一轍。其同歸於泯然無跡者。광세일철。기동귀어민연무적자。
彌見其爲眞忠也。미견기위진충야。
余遊莊陵。有老宿年踰九耋者。여유장릉。유로숙년유구질자。
爲說當日事。欷歔煩酲。如不能自勝。위설당일사。희허번정。여불능자승。
而輒稱端廟謂吾主上。이첩칭단묘위오주상。
是則未曾納觀風軒一拜者也。시칙미증납관풍헌일배자야。
然而猶如此。始知端廟至德之沁入人心者。연이유여차。시지단묘지덕지심입인심자。
若斯其深且遠。是孰爲而爲之哉。약사기심차원。시숙위이위지재。
彼賣國賭利。피매국도리。
陷厥辟於淫禍。然後爲快者。함궐벽어음화。연후위쾌자。
視此兩人何如哉。시차량인하여재。
上東民傳 (庚辰年 1820, 순조 20) 洪直弼
梅山先生文集卷之五十一
傳
上東民傳庚辰
上東民不知何許人。亦不詳姓氏。居寧越府之上東面。故以上東民名 或稱勸農 云。端廟之巽位于越也。烈焰燔天。人皆惴惴。若及於禍。或爲上王心惻。而掉袂不敢近。獨有上東民一人。迎勞于淸泠浦。常具肴蔬時果進之。自浦而移御于賓館。其人輒走謁于梅竹樓下。樓在賓館之東。卽今之子規樓也。每趁市日至。莫之或闕。一日又向邑。到炭釜谷。或云遭上王于錦江上。故名其地曰聖遭浦。 端廟乘白馬騰蹋而臨。其人驚怪。伏謁道傍。問官家將向何處。而取路此地乎。上顧謂曰予向太白山而去。其人解苞而獻山果。上曰今也則不可食。其人拜辭。到德浦始聞上昇遐。失聲號痛。如不欲生。過十數里。口不絶哭。聲氣俱竭而死。卽丁丑十月二十四日也。嗚呼。非斯人之忠。何能致白日之顯靈乎。忠者一其心而靡他。故乃克感通如此。且不期死事而死。不要殉國而殉。臣主同日幷命。亦可異焉。古所云難至而節見者。豈若人之謂乎。天德山人曰君臣之義。天性也。不以親疎貴賤而有所加損。是以野人快炙背美芹子。而獻之於其君。故曰雖在畎畒。猶不忘君。惓惓之義也。從古殉節之士。不出於世胄華閥。而必在於草野疏逖不識何狀之人。人性之善。豈係于世類哉。皇朝壬午之役。樵夫耘叟葛衣翁補鍋匠之屬。或死或生。各自靖獻。與方遜志,鐵鉉,景淸諸公。同歸一揆。而又加難矣。今上東民者。卽絶峽之一蚩氓耳。天門萬里。莫識君面。及翠華東廵。始知爲吾君。油然生愛戴之心。排日薦獻。自殫純誠。斯已奇矣。而及聞變故。痛心號絶。致命而後已。忠烈秋霜。精貫天日。可以激淸風而勵薄俗。於不休哉。凡明熊魚之取舍者。身歿而名著。不朽于千劫。以故烈士殉名而不悔。斯人也。幷與名姓而無傳。磨滅而不記。惜哉。然其死也。卽天理所自然。非有爲而爲者。豈欲舍生立命。以施于後世哉。吾事自了。何與人之知不知乎。彼以名湮滅不稱爲悲者。詎非淺量哉。與明朝之樵夫耘叟。曠世一轍。其同歸於泯然無跡者。彌見其爲眞忠也。余遊莊陵。有老宿年踰九耋者。爲說當日事。欷歔煩酲。如不能自勝。而輒稱端廟謂吾主上。是則未曾納觀風軒一拜者也。然而猶如此。始知端廟至德之沁入人心者。若斯其深且遠。是孰爲而爲之哉。彼賣國賭利。陷厥辟於淫禍。然後爲快者。視此兩人何如哉。
홍직필洪直弼
• 분야 역사/조선시대사 • 성격 학자 • 출신지 서울 • 성별 남
• 생년 1776년(영조 52) • 몰년 1852년(철종 3) • 본관 남양(南陽) • 저서(작품) 매산집 52권
[정의] 1776(영조 52)∼1852(철종 3). 조선 후기의 학자.
[개설] 본관은 남양(南陽). 초명은 긍필(兢弼). 자는 백응(伯應)·백림(伯臨), 호는 매산(梅山). 서울 출신. 병마절도위 상언(尙彦)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현감 선양(善養)이고, 아버지는 판서 이간(履簡)이다.
[생애] 재능이 뛰어나 7세 때 이미 한자로 문장을 지었다. 그리고 17세에는 이학(理學)에 밝아 성리학자 박윤원(朴胤源)으로부터 오도유탁(吾道有托 : 올바른 도를 맡길 만함.)이라는 찬사를 받았다. 1801년(순조 1) 부모의 권유로 사마시에 응시해 초시에 합격했으나 회시에서 실패하였다. 이로부터 성리학에 전념하였다.
당시의 원로 명사인 송환기(宋煥箕)·이직보(李直輔)·임로(任魯) 등과 연령을 초월해 교유하였다. 특히 오희상(吳熙常)과 가장 오래 교유했는데, 그로부터 유종(儒宗 : 유학자의 으뜸)이라 일컬어졌다. 또한 이봉수(李鳳秀)로부터는 학문이 가장 뛰어나다는 칭찬을 받았다.
1810년 돈녕부참봉에 제수되었으나 나아가지 않다가, 1814년 익위사세마(翊衛司洗馬)로 제배되었다. 이 때 동궁(東宮 : 뒤의 翼宗)이 새로 세자에 올라 당시의 유명인사들을 뽑아 매일 서연(書筵)을 열 때 발탁되었다. 1822년 장흥고봉사에 임명되었으나 물리쳤다.
1838년(헌종 4)에 이조에 재학(才學)으로 천거되어, 이듬해 장악원주부·황해도도사에 임명되고, 1840년에는 군자감정에 제수되었으나, 모두 사양하였다. 다음해 경연관(經筵官)에 천거되고, 이어 지평을 거쳐 집의에 이르렀다.
1844년 특별히 당상관으로 공조참의에 임명되었으나 소를 올려 사양하고, 다시 동부승지에 제배되었으나 부임하지 않았다. 그 뒤 성균관좨주를 비롯해 1851년(철종 2) 대사헌에 전후 두 차례나 특배되고, 이듬해에는 지돈녕부사에 승배되었으나, 끝내 나아가지 않았다.
그 해 7월 형조판서에 제수된 뒤 얼마 되지 않아 졸하였다.
[활동사항] 그의 학문은 궁리(窮理)를 근본으로 하고 육경(六經)은 물론 제자백가에 통달하였다. 그리고 천지음양귀신(天地陰陽鬼神)의 묘와 역대흥망치란(歷代興亡治亂)의 자취와 산천풍토인물족계(山川風土人物族系)에 이르기까지 두루 통하였다.
성리학에서 정자(程子)의 심본설(心本說)을 극력 지지하고, 한원진(韓元震)의 심선악설(心善惡說)을 반대하였다. 그리고 임성주(任聖周)의 “성선(性善)은 곧 기질(氣質)이다.”고 한 주장에도 반대하였다. 따라서 주리파(主理派)의 한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
개천의 경현사(景賢祠)에 배향되었으며, 저서로는 ≪매산집≫ 52권이 있다. 시호는 문경(文敬)이다.
[참고문헌]『헌종실록(憲宗實錄)』 『철종실록(哲宗實錄)』 『숙재집(肅齋集)』 『매산집(梅山集)』
『조선유교연원』(장지연, 회동서관, 1922)『한국유교사』(배종호, 연세대학교출판부, 1974)
-한국역대인물종합DB-