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년말까진 가봤지만 서점에 가본지도 참 오래되었습니다.
제가 마지막 책을 발간한지도 벌써 여러 해가 지났는 등 차츰 서점 문턱 넘나드는 횟수가 줄어드는군요.
마음 같아선 이책저책 (남들 생각 안 하고 제 마음에만 들 내용으로) 마구 불량(?)서적들을 출판해볼까도 싶지만 이젠 그런 염치도 없고 열정도 식어버렸음을 (아울러 아무도 읽지 않을 책을 마구 찍다간 쪽박 차기 십상이라는 현실적인 경제성도 의식, 실은 마눌님 눈치를 인식하지 않을뿐만 아니라 체감하지 않을 수 없음을) 인정합니다.
골방에 쌓아둔 수많은 책 박스는 언제 다 처리할 테냐는 바가지 긁는 소리가 들려오는 듯...
여하튼 시내에 다른 볼일이나 기차역에 누굴 마중이라도 나갈 때 짜투리 시간이라도 있으면 서점에서 책들 구경하는 재미가 솔솔한데, 요즘은 그럴 일도 없군요.
여하튼 서점에 들르더라도 근래에는(아마 사오년 전부터 부쩍) 책에 비닐포장을 해둔 경우가 많아 표지만 구경하고 아쉽게 책을 놓아두곤 합니다.
독자들 입장에서야 내용을 봐야 책을 구입할 터인데 말이죠.
물론 대형서점에서는 견본으로 한두 권 비닐포장을 뜯어둔 경우도 있지만 아닌 경우가 많더군요.
저야 뭐 (아직 서점에 납품은 하고 있지만 몇 년 동안 신간을 발간 못한 과거의) 출판업자이기도 하고 신간에 관심이 많은 독자이기도 해서 어느 쪽을 딱 두둔하고 싶지야 않습니다.
제가 만든 책들도 일부는 비닐포장을 했습니다.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제가 사는 지방에선 자동비닐포장기가 없어 수도권으로 다 만든 책을 보내야 했는데, 천 권 단위의 기본부수에 적어도 당시 권당 몇 백원 하는 비닐포장비에 수도권까지 왕복으로 실어나르는 운송비까지 감안하면 책 한 권당 출판비에서 비닐포장비만으로도 상당한 부담이 되어 엄두도 못낸 채 그냥 수십 권씩 제가 서점 납품용인 경우는 손으로 직접 비닐포장을 했습니다.
서문시장 비닐 점포에서 가장 책 크기에 맞는 투명 사각 비닐을 구입해 최대한 책에 밀착되게 스카치 테이프로 붙여 납품을 했죠.
사실 서점에 납품한 책들 중 반품율이 절반 정도라 비닐포장을 하지 않은 것들은 표지 등 손상이 된 것들이 많아 비닐포장을 잘했다 싶더군요.
물론 요즘은 그만큼 주문도 적고 재고가 많아 (서점배치용 외에 온라인 주문인 경우는) 비닐포장을 안 하고 있습니다.
간혹 바쁘다는 핑계로 비치용으로도 포장하지 않고 보내는 이상한 배짱도 부려봅니다.
여하튼 요즘 서울의 대형서점엔 가보지 않았는데, 혹 저의 책에 비닐이 씌여져 있어 “뭐, 이래! 책 구경도 못하게!”라는 불만이 들더라도 이해를 바랍니다.
이렇게 책 비닐 생각이 난 건 다름이 아니라 라인홀드 메스너의 <하늘에서 추락하다> 때문이었죠.
마터호른에 대한 등반역사야 익히 알고 있고 관련된 책들도 적어도 서너 권은 읽은 터라 뭐 특별할 게 있겠냐 싶어 책꽂이 한 켠에 밀춰뒀던 건데, 이번 코로나 사태 덕에 다시 책읽기 습관이 그나마 붙어 몇몇 책들을 읽다 보니 다음엔 무얼 읽을까 책꽂이를 유심히 살피곤 하죠.
물론 마눌님이 읽은 책도 좀 읽긴 하지만 취향이 달라 특히 따분한 “?분석” 같은 류의 책은 질색이라 거들떠 보지도 않다 보니, 더구나 일전에도 밝혔듯 이미 읽은 책일지언정 남들이 넘기지 않은 (포장을 뜯지 않은) 새 책이면 희한하게 페이지 넘기는 즐거움이 있어 아직도 말끔하게 포장이 되어 있는 메스너의 이 책이 눈에 확 들어왔던 겁니다.
사실 책꽂이에 꽂힌 산악서적들 중 몇몇 원서를 제외하곤 이것만 읽지 않은 거라 이젠 이거라도 읽어야 되겠다 싶긴 했습니다.
하여 내용이야 뭐 표지를 보니 지난번 윔퍼의 전기 <마터호른의 그림자>나 그가 쓴 <알프스 등반기>에 있는 내용과 겹치지 않을까 싶은 뻔함을 인지했지만 비닐포장을 뜯을 때의 묘한 기대감이 있더군요.
가위로 비닐을 뜯고 새 책을 탁 손바닥으로 대할 때의 느낌은 책 내용에 들어서기 전의 멋진 조우라 할 수 있습니다.
여하튼 저에게만은 멋진 통과의례 중 하나이기에 뭔가 단절되어 있던 비닐포장을 뜯고 난 다음 까칠한 종이의 질감으로 책과 첫 만남을 하게 되면 사람과도 첫인상이 중요하듯 책과도 그렇게 되는 경우가 많더군요.
혹자는 이런 느낌 때문에라도 한동안은 종이책이 사라지지 않을 거라곤 하지만 그거야 출판업자의 입장을 대변한다는 느낌이 다분한지라 앞으로 전자책이랄까 오디오북이 얼마나 우리들에게 가까워질지 궁금하긴 합니다.
한편 유튜브 등에서 새로운 상품에 대한 동경과 설레임으로 ‘언박싱’ 동영상이 인기가 있다는데, 책의 비닐포장 뜯기에도 (저에게만은) 그런 게 조금은 있는 것 같지만 장난감이나 유명 헨드백, 심지어 최신형 자동차까지 다룬다는데, 단가도 적고 아무래도 그런 제품들에 비해 경제성이 적은 서적들도 언박싱의 소재가 될지 의문이긴 합니다.
그렇게 비닐포장을 뜯은 메스너의 책 <하늘에서 추락하다>, 막상 내용을 보니 왠 걸 내용이야 초등 당시의 이야기는 분명한데, 소설입니다.
물론 역사적 사실을 바탕으로 쓴 팩트 소설인 셈이죠.
초등 당시의 주인공인 에드워드 윔퍼와 그의 경쟁자이자 파트너인 장 안투안 카렐을 위주로 (맞는지 모르겠는데) 3인칭 전지적 시점으로 이야기를 풀어놓았더군요.
초중반까지 이런 형식으로 이야기가 흐르다가 용두사미로 후반에 접어들자 그저 역사적 사실과 자신의 견해 피력으로 이어져 작품의 완성도는 떨어지더군요.
여하튼 지은이 자신 이탈리아 산골 출신이라 더 생동감 있게 당시 알프스 산골의 풍경과 생활상을 잘 풀어놓았는데, 마터호른 남측의 산간마을 이야기가 실감이 납니다.
이제껏 서너 번 가본 그 마을(브로일) 풍경이야 이젠 (반대편인 국경 너머의 체르마트 못지 않게) 현대화 되었지만 그 마을 위로 우뚝 솟아 있는 마터호른의 위용이야 예나 마찬가지겠기에 쉽게 옛 풍경 속으로 들어갈 수 있어 좋았습니다.
두 인물 위주의 전지적 시점으로 초등 당시의 이야기를 풀어놓긴 하지만 역시 이태리 산골 출신의 지은이 메스너의 시각에선 윔퍼 자신이 쓴 <알프스 등반기>나 역시 영국인이 쓴 윔퍼의 전기 <마터호른의 그림자>에서 느낄 수 없는, 다분히 윔퍼에 대해 비판적인 내용이 눈길을 끕니다.
특히 초등의 영광에 이어 하산시 4명이 추락사한 비극적인 사건에 대해 메스너는 윔퍼에게 호의적이지 않습니다.
윔퍼 자신은 전혀 책임이 없고 남들(함께 등반한 스위스 가이드 타우그발더와 추락의 원인 제공자 헤도우)에게 모든 책임을 전가한다고.... 그리고 이 책에선 그 사고 50년 후에 타우그발더의 아들(당시 함께 등반했던 페터 타우그발더)이 기존의 다른 책들에는 없던 사실을 밝힌 점이 이채롭다.
메스너의 견해로 윔퍼가 타우그발더 부자에 행한 멸시로 그들이 겪었던 고난들도 서술되어 있는데, 제 3자인 메스너의 견해이긴 하지만 윔퍼의 몰염치한 인간성을 언급한 내용을 접하자 이제껏 몇몇 책들을 통해본 윔퍼의 신사적인 이미지와는 달라 혼란스럽기까지 하더군요.
당시의 여러 사료들을 취합해 지은이 나름의 판단을 피력하는 노력이 느껴지는데, 사실 라인홀드 메스너라면 현존하는 세계 최고의 산악인으로 우뚝 솟아 있는 인물로서 이태리에서 그가 차지 하는 대중적인 인지도 또한 대단한데 아마 우리네의 국민 스포츠 영웅 그 이상은 아닐까 싶습니다.
요즘 볼자노 외곽의 (임덕용 선배님 집 뒤편 언덕에 위치한) 고성에 자신의 박물관을 개설해 거주하는 유명인 메스너인지라 보통의 언론 인터뷰도 쉽게 할 수 없을 정도로 바쁜 생활을 하고 있다고 하는데, 얼핏 다작의 집필생활을 하고 있는 그로서는 이런 류의 책을 쓰기 위해서라도 쉽게 시간을 낼 수 없을 것만은 사실일 것 같습니다.
그래도 몸을 움직인 현실의 활동가였던지라 직업적인 작가들의 작품에서 느껴지는 문학적인 감흥이랄까, 완성도와 함께 재미가 덜한 아쉬움이야 남더군요.
하기사 산악역사야 사실과 진실을 다뤄야기에 부가적인 독서의 즐거움까지 바랄 거야 없겠지만 오히려 곰곰이 그 역사 속으로 들어가 보면 그러기에 더 현실감 있고 박진감 있게 읽힐 수 있는 셈이죠. 독자 개개인의 몫이기도 하리라 봅니다.
히말라야 만년설산에서의 철인으로서 앞으로 메스너가 얼마나 더 훌륭한 작품들을 남길지 그게 궁금하면서 책을 덮게 되더군요.
(위대한 메스너 작품에 대한 평가에 제가 너무 박한 게 아닌가 싶은데, 평범한 산악인인 저의 책들에 대한 몇몇 독자분들의 소중한 칭찬과 비판들에 일희일비해 제가 우쭐했다거나 의기소침한 적은 없었나 싶은 반성을 하게 됩니다.)
첫댓글 메스너의 예전 책들은 하나 같이 치밀하고 내용도 알찼는데...
현역에서 은퇴한 후에 쓴 책은 아무래도 당사자가 아닌 관찰자 시점이라서 신뢰도가 떨어지리라 봅니다.
쎄로토레에 대한 메스너의 책을 읽고는... 저도 위에서 허선생님이 느꼈던 것과 비슷한 감정을 가졌던 기억이...
허선생님의 진솔한 독후감 잘 읽었습니다.^^
ㅎㅎ 예, 말씀처럼 관찰자 시점이라 그럴 수 있겠군요.
산악서적의 매력은 뭐니 해도 경험자의 현장감 있는 생생함이 제일일듯 합니다.
책 소개보다 저의 넋두리가 많아 괜히 말많은 이가 되어버렸습니다. 잘 읽어주신 것만으로도 고맙습니다.^^
산악 서적을 읽으면 내자신이 산속에 있는 모습이죠 ㅎ
아.... 이런 책이 있었군요. 프랭크 스마이드의 다른 책(산의 환상, 산과 인생)들은 읽었지만 이건 아직 읽어보지 못했습니다. 예, 책 속에 산이 있고 그 속에 독자가 있어 그래서 산서 독서가 좋은가 봅니다. 즐독하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