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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제적 인간 유병언은 그렇게 악질인가?
http://blog.donga.com/milhoon/archives/4059
7월 25일 국립과학수사연구원(국과수)이 유병언씨 사인에 대한 발표를 했다. 서중석 국과수 원장은 이 변사체가 유병언씨임이 확인됐으나 지병이나 질식, 독극물 등에 의해 사망했는지의 여부는 판명되지 않았다고 밝혔다. 사인을 밝힐 수 없다고 함으로써 세상은 또 한번 유병언 논쟁에 빠져 버렸다. 하도 많은 음모론이 떠돌고 있어 다 정리할 수도 없는 상황이다.
세월호 사건의 충격도 만만치 않았는데 유병언씨의 사망도 큰 충격을 몰고 온 것이다. 이와 비슷한 현상이 27년과 23년 전에도 일어났었다. 1987년 일어난 1차 오대양사건이 큰 충격을 일으켰는데, 1991년 2차 오대양 사건이 그보다 더한 더 큰 관심을 불러 일으켰었다.
지금 유병언씨에 대해서는 수많은 이야기가 나오고 있다. 그러나 유병언을 진짜로 만나본 이들이 하는 말은 그리 많지 않은 것 같다. 일부 만나본 이들이 TV에 나와 유씨에 대해 이런 전런 이야기를 했지만, 그들은 유씨와는 정 반대편에 서 있던 이들이 대부분이다. 유씨에 대한 세상의 의견은 한쪽 의견만 횡행하고 있는 것이다. 유씨에 대해 동조하는 세력은 구원파 안에 모여 있지만, 이들은 감히 TV에 나와 유씨를 변호할 생각을 하지 못한다. 언론도 그들이 말하는 유병언을 기사화할 생각이 거의 없는 것 같다.
23년 전 유병언씨를 구속하는 2차 오대양 사건이 났을 때도 언론은 유씨에 대해 거의 접근하지 못했다. 의혹은 많이 제기했지만 진실을 다투는 노력은 별로 하지 않았다. 32명이 변사체로 발견된 오대양 사건은 그후 유병언씨의 발목을 잡는 지독한 족쇄가 되었다.
본 기자는 23년 전 유병언씨를 주인공으로 한 ‘유병언 그는 과연 그렇게 악질인가’란 제목의 기사를 월간조선에 쓴 적이 있다. 이 기사는 본 기자가 오대양-세모 사건에 최대한 접근해보고 쓴 것이다. 오랜 세월이 지난 지금에서는 유병언이 어떤 사람인지를 짐작해 볼 수 있는 거의 유일한 기사가 되고 있다. 유씨에 대해 검증되지 않는 의견을 마구 날리기에 앞서 23년 전에는 어떤 사람으로 비쳐졌는지, 그때는 어떤 혐의를 받았었는지부터 살펴보는 것이 어떨까.
당시 유병언씨를 구속으로 몰고 갔던 오대양-세모 사건의 핵심은 오대양 사람 32명의 변사부분이다. 32명이 자살(자의에 의한 타살 포함)했느냐 타살됐느냐가 다툼의 핵심이었다. 이에 대해서는 수많은 전문가가 붙어 조사했지만 결론은 자살(자의에 의한 타살 포함)로 나왔다. 그러자 (주)오대양 빌린 사채가 어디로 갔느냐로 방향이 바뀌면서 세모사건으로 변질되었다.
심재륜 전 검사와 갈등 빚었던 유병언
유병언씨가 이끈 세모가 오대양을 통해 사채를 가져갔다는 것이었다. 이 주장을 따르는 이들은 세모 측에서 돈을 빌려온 오대양 직원 32명의 입을 막기 위해 죽인 후 오대양 용인공장 천장으로 숨겼다는 의혹을 제기했다. 사실보다는 의혹이 훨씬 폭발성이 강하다. 때문에 세상의 모든 관심이 세모의 유병언 당시 회장에게 쏠렸다.
이 수사를 맡은 곳이 대전지검이었다. 그때 심재륜씨가 부장을 이 사건을 수사하려다 정기 인사로 교체됐는데, 이에 대해 심재륜씨는 당시 법무부 장관이었던 김기춘씨(지금 대통령 비서실장)가 자기를 수사팀에서 빼내게 했다고 최근 주장한 바 있다. 이 문제를 놓고 김기춘 비서실장은 심재륜씨를 명예훼손혐의로 고소했다는 보도가 있었다.
또 구원파는 세월호 사건으로 유병언씨가 검찰 소환을 받게 되었을 때 안성 금수원 앞에 김기춘 비서실장을 향해 ‘우리가 남이가’란 플래카드를 걸어놓기도 했다. 심재륜씨는 몇 년 전 월간조선에 그가 겪었던 오대양 2차 사건에 대해 투고를 했는데, 이에 대해 유병언씨는 발끈해 소송을 제기했었다. 이 소송에서 유병언씨는 이기지 못했지만, 심재륜씨에 대해 강한 반감을 가졌던 것이 분명하다.
유병언은 검찰에 대한 깊은 피해의식을 갖고 있었다
유병언씨는 세모사건을 그를 구속한 검찰, 특히 당시의 대전지검 사람들에게 강한 불만을 갖고 있었다. 본질과 관계없는 다른 일로, 그리고 그것도 자신이 관여하지 않은 것으로 기소를 했다며 원한에 가까운 불만을 토로하곤 했었다. 때문에 세월호 사건이 일어나 검찰이 그를 세월호 실소유주로 지목하자 알레르기성 반응을 보이며 출두를 거부한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알레르기를 갖게 된 것이 제2차 오대양사건 때의 구속과 실형 선고이다. 그때도 세상의 여론은 유병언씨와 구원파에 전혀 우호적이지 않았다. 검찰과 언론은 국민 여론을 의식해서였는지 유씨는 잡아넣어야 한다는 입장이었다. 그때 기자는 아래에 있는 기사를 보도했다. ‘유병언은 과연 그렇게 악질인가’란 제목을 붙여서.
검찰의 수사 방향은 물론이고 여론과는 정반대로 가는 제목의 기사를 썼음에도 본 기자는 살아남았다. 그만큼 사실에 충실하려고 했고 털끗하나도 책 잡히지 않으려고 혼신의 힘을 기울여 진실을 추적하려고 한 기사다. 그리고 지금 또 다시 ‘유병언은 과연 그렇게 악질인가’란 질문을 대한민국에 던져보려고 한다. 유병언은 과연 그렇게 악질인가?
[92.2 월간조선] 유병언은 과연 그렇게 악질인가?
의혹을 위해 의혹을 제기한 많은 기자들,
사상최대 규모의 과장 왜곡 보도, 언론에 끌려 간 검찰,
그리고 박찬종,김현,탁명환씨의 주장을 검증해 볼 차례가 되었다.
국내 최장인 21시간의 재판
지난 1월9일 대전지법 1호법정에서 형사합의 2부(재판장 장용국 부장판사)주재로 열린 유병언 (주)세모 사장(50)과 김기형 전 개발실 차장(41․현 한국마이크로닉 사장)의 상습사기 혐의에 대한 5차공판은 밤을 꼬박 새워가며 21시간 동안 진행돼 국내 재판사상 최장의 시간을 기록했다. 이 재판은 대전지검 특수부(이기배 부장검사, 이호승 ․송해은 검사)측이 신청한 증인 중 출석한 권신찬 목사(69․세칭 구원파의 창시자) 등 18명의 증인과 변호인(전상석․도태구․정덕진)측이 신청한 박남주 목사(49․광주 한국교회)등 12명의 증인 등 도합 30명의 증인에 대한 신문으로 일관되었다.
검찰측이 신청한 증인들은 대부분 송재화 강석을 등에게 돈을 주었다가 피해를 본 사람들이었다. 이들은 송재화나 강석을이 (주)세모나 유병언 사장에게 돈을 건네주는 것으로 알고 돈을 주었다고 진술했다. 그러나 이들은 자신들이 송재화 강석을 등에 준 돈이 유병언 피고인에게 전달되었다는 증거를 제시하지 못하고 대개 “전달되는 것으로 믿고 있었다”고 말했다. 변호인측이 신청한 증인들은 대부분 유병언․김기형 등이 송재화 강석을로부터 돈을 받지 않았다는 식으로 대답했다. 특히 변호인측은 피해를 당했다는 증인들에 대해 많은 조사를 한 양쪽 증인의 주장이 다르자 재판부는 물론 검찰관과 변호인은 증인의 말에 신빙성이 있는가를 알아보는데 주력하는 것 같았다. 특히 변호인측은 피해를 당했다는 증인들에 대해 많은 조사를 한 듯, 하나하나 따져가며 신빙성 여부를 검토해 나갔다.
변호인측 신문 중 인상적인 것은 박남주 목사에 대한 신문이었다.
변호인=증인은 전남대 경영대학원, 미국 미시간대 사회사업과 등을 졸업했다는데 사실인가.
박남주=그렇다.
변호인=학교에 조회한 결과 증인은 졸업한 사실이 없다는 회보가 왔다.
박남주=졸업 증서가 있다. 미국에 갔다온 여권도 있다.
변호인=증인이 해운회사인 한국기선의 대표를 지낸 것은 사실인가.
박남주=그렇다.
변호인=항만 청에 조회하니 그런 일 없다는 회보가 왔다.
박남주=무슨 소리냐. 내 이름으로 목포지법과 항만 청에 등록돼 있었다.
변호인=증인은 67년부터 68년 사이 유병언을 수행할 때 찍었다는 사진을 제출한 적이 있다. 그런데 그 사진에 나오는 건물은 73년에 준공된 것으로 등기부등본에 나와 있다. 또 67년 3월부터 68년 2월까지 증인은 미국에 있었는데 어떻게 한국에서 사진을 찍을 수 있었는가.
박남주=연대와 날짜 등은 잘못된 것 같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유병언과 같이 사진을 찍었다는 것이다.
변호인=증인은 83년 삼우트레이딩(세모의 전신)도료영업부 차장으로 있다가 페인트 판매대금을 횡령한 사실로 서울동부지원에서 징역 10개월, 2심에서 징역 10개월에 집행유예2년을 선고받았다. 사실인가.
박남주=맞다.
변호인=광주에서 송재화에게 돈을 주었다는 피해자들은 증인이 현재 목사로 있는 교회의 신도가 아닌가.
박남주=교인 아닌 사람도 있다.
변호인=증인은 광주사건 피해자들에게 ‘유병언 사장과 권신찬 목사의 설교를 듣고 돈을 내게 되었다’고 진술하라고 시킨 사실이 있나.
박남주=없다
변호인=증인은 증인이 기독교복음침례회에 전 재산을 헌납하자 증인의 어머니가 충격을 받아 사망했다고 했는데 사실인가.
박남주=그렇다.
변호사=언제 모친이 돌아가셨나.
박남주=75~76년경이다.
변호사=(재판부에 박남주의 호적등본을 제출하며)증인의 모친이 돌아가신 것은 83년이다(장내 웃음). 왜 말도 안 되는 거짓말을 하는가.
박남주=83년? 83년, 말이 안 된다.
출고도 안 된 차로 운전(?)
이날 공판에는 이봉행 등이 광주에서 거둔 돈을 서울로 운반해주었다는 봉고차 운전기사 김동현씨도 나왔다. 다음은 김씨에 대한 변호인측 신문일부를 정리한 것이다.
변호인=이봉행은 제 5회 자연보호 바자회 기간중인 82년 10월경 증인이 운전하는 전남5가 7937 15인승 미니버스에 돈이 담긴 마대자루를 싣고 서울의 태양열 주택으로 갔다고 했다. 증인이 운전한 것은 사실인가.
김동현=그렇다.
변호인=광주시 발행 자동차소유등록원 등에 의하면 전남 5가 7937 미니보스는 82년 11월3일 출고된 것으로 확인되었다. 따라서 82년 10월 이 미니버스로 증인이 이봉행과 태양열주택에 간 것은 사실과 다른 것이 아닌가.
김동현=차 출고에 대한 것은 잘 모르겠다. 그러나 그 차 전에도 교회에는 차가 있었다.
변호인=증인은 91년 7월 27일 대전지검 진술에서 “제가 들어갈 당시에 15인승은 출고된 지 얼마 되지 않은 새 차였다”고 진술하지 않았나.
김동현=그렇다.
변호인=그렇다면 증인은 82년 11월 3일 이후에 15인승 봉고차 운전을 했으므로 82년 10월경 이봉행이 돈이 든 마대자루를 싣고 태양열주택에 간 것은 거짓 아닌가.
김동현=그렇지 않다. 이봉행이도 날짜를 기억하는데 착오가 있었을 것이다.
증인들에 대한 변호인측 신문에는 이것 외에도 구체적인 자료를 근거로 사기 피해를 주장하는 증인을 곤욕스럽게 한 것이 여러 부분 더 있었다. 제 5차공판은 구형을 앞둔 마지막 재판 이어서인지 방청석이 꽉 찬 채 진행되었다. 그러나 재판은 증인신문만으로 계속돼 지리한 느낌을 주었다. 재판이 자정을 넘기자 기자를 비롯한 방청객 중에는 꾸벅꾸벅 조는 사람도 많았으나 방청객수는 줄지 않았다. 이 공판에서 검찰측은 송재화 등이 돈을 유병언에게 전달했다는 구체적인 증거를 도출해내지 못한 듯이 보였다. 다소 지리했던 5차공판에 비해 1991년 11월21일 열린 2차공판은 검찰관과 유병언․김기형 피고인 간의 사실 확인을 둘러싼 설전(舌戰)으로 치열한 말싸움이 오고 갔었다.
“송재화에게 돈받지 않았다”
설전의 발단은 변호인측이 김기형씨를 상대로 신문하던 중 김씨가 “수사관에게 연행돼 대전지검에 도착하니 한 검사가 ‘저 새끼 오는 중간에 차문을 열고 밖으로 차 버리지’라고 호통을 쳤다”“검찰측은 의자에서 잠을 자게 했다”“연행된 지 3일 만에 급성위염으로 토하고 혈변(血便)이 나오는 등 건강이 나빠지자 검찰측은 청주의 형님 댁으로 보내 병원에 가게 했다. 그러나 형사가 형님댁과 병원에까지 계속 따라다녔다. 나는 만 9일 동안 영장 없이 구금되었다”“나는 송재화(45)로부터 돈을 받은 적이 없다”고 진술하면서부터였다.
본격적인 1문1답의 설전이 붙은 것은 검사들이 유병언씨를 신문할 때였다.
검사=당신도 비인간적인 대우를 받았나.
유=(잠시 침묵했다가)받았다 하면 원수질 것이고 안 받았다 하면 삐딱하다고 생각 할 테니, 말 안하겠다(장내 웃음).
검사= 82년께 직원들에게 봉급을 주지 못한 일이 있지 않았나.
유=나는 모른다. 그것은 우리 회사 경리부가 답변할 일이다. 봉급을 주지 않은 것을 노동부에서 알았다면 나를 구속했을 것 아닌가.
검사=검찰 수사를 받을 때는 못 준 적이 있다고 하지 않았는가.
유=이복칠이가 나가면서 데리고 나간 사람들이 월급을 못 받았다고 떠들고 다녔다고 말한 것이었다.
검사=회사 주식 중 당신 소유 주식이 82년 한해 동안 19만여주에서 78만여주로 증가했다. 경위를 설명하라.
유=회사에 관한 것이든 내 개인에 관한 것이든, 돈에 대한 것은 일체 모른다.
검사=79년부터 82년 사이 삼우트레이딩(세모의 전신)의 자본금이 10배로 증가했다. 단기간에 그렇게 많은 자금이 어디서 났는가.
유=나는 모른다. 우리 회사 경리부나 회계과에 물어보라. 아마 우리회사 주주들이 증자한 것이 아니겠는가.
검사=개발실은 어떤 곳인가.
유=지하에 넓은 홀이 있어 그곳에서 제품개발을 한다. 진짜 개발실은 지하실이다. 그곳은 아무나 못 들어 간다. 비밀이 보장되는 곳이다. 지상 건물에는 여덟 개의 방이 있다. 각 방은 사무실로도 쓰이고 제품을 진열하는 데도 쓰였다.
검사=그렇게 철저히 비밀이 유지돼야 하는 개발실 소재번지에 송재화의 주민등록이 왜 있었는가.
유=송재화의 주민등록이 있었는지 없었는지에 대해선 난 모른다. 송재화는 개발실에 있던 여직원을 안다면서 들어와 음식을 해주고 하다가 직원들이 비밀이 새나간다고 해 내보낸 것으로 알고 있다.
검사=80년대 당신은 서울 잠실의 장미아파트에서 송재화와 함께 기거하지 않았는가.
유=불미스러운 사이였다고는 하는 말도 들리는데 모두 「남의 말」하기 좋아하는 사람들이 만든 얘기다. 송재화는 나와 같이 산적도 없고, 내가 비서로 데리고 다닌 적도 없다.
검사=송재화는 세모의 주주가 아닌가.
유=이번 사건 나고 주주임을 처음 알았다.
검사=김동현을 아는가.
유=개발실 문 앞에서 본 적은 있다.
유병언과 검찰측 간의 설전
검사=김동현은 돈을 전달하러 개발실에 갔다고 했다.
유=김동현이가 마대 자루에 돈을 담아 60여차례나 갖다 주었다면, 우리 개발실은 돈으로 가득 찼을 것이다(장내 웃음).
검사=지난 83년 기독교복음침례회 광주교회에 내려갔던 이유는 무엇인가.
유=광주에는 자신의 집을 우리 회사에 담보로 제공한 조박사란 분이 있다. 교단에서 나간 이복칠 목사가 조박사를 빼내갈까봐 염려되어서 내려간 것이다.
검사=담보를 제공한 사람은 그 대가를 받는다.
유=나는 모른다. 회사 자금 담당 부서에서 알 것이다.
검사=대가 없이 담보를 제공하는 것은 헌금을 했다는 것이 아닌가.
유=우리 회사의 주주들은 자기 집을 담보로 넣을 만큼 적극적이다. 사채를 제공했든, 담보를 제공했든 그 기록은 모두 회사 장부에 있을 것이다. 그렇게 돈을 낸 사람들은 회사로부터 그 이자를 받았을 것이다.
검사=부동산을 담보로 낸 사람은 알고 현금거래는 모른다고 하는 당신의 말은 모순이 아닌가.
유=왜 항상 우리 회사를 어렵다고만 보는가. 우리 회사는 남의 돈 떼어먹는 엉터리 회사가 아니다. 교회 헌금을 받아서 운영하는 치사한 회사가 아니다.
유병언씨와 검사측 간의 일문일답은 마치 탁구공이 오가듯 빠르게 진행되었다.유씨의 답변 중 일관된 것은 “돈에 대해서는 일체 모른다”는 것이었다. 그는 검찰측 신문이든 변호인측 신문이든 돈에 관한 질문에는 “모른다”라고 대답했다. 신문 받는 도중 유씨는 돈에 대해서 모르는 이유를 이렇게 설명했다.
“사장이 회사 자금에 대해 마음을 두면 그 회사는 망한다고 생각해왔습니다. 돈 문제는 모두 경리 담당자에게 맡기고 제품개발에 몰두해야 한다는 것이 제 소신입니다. 훗날 경리 담당자가 제가 한 일이 좋은 것이었다고 생각해서 우리 가족에게 그 대가를 준다면 저에게는 영광입니다.”
검찰측 신문이 끝나자 자리에서 일어난 것은 전상석 변호사였다. 그는 검찰측에 석명(釋明)을 요구하고 나섰다.
“재판은 추리소설이 아닙니다. 검찰은 삼우트레이딩의 자본금이 늘어난 것은 사채를 끌어 모았기 때문이라고 몰아가고 있습니다. 우리나라에는 엄연히 상법이 있습니다. 검찰은 이런 법에 의거해 삼우의 자본금이 늘어난 것이 등기부에 등재되어 있는지, 또 그에 대한 과세가 있었는지를 살펴보고 성명을 해주십시오. 그렇게 하면 돈에 대해선 모른다는 피고인에게 일일이 물어볼 필요가 없잖습니까”
김변호사의 요구는 재판부에 의해 채택되지 않았다. 그러나 다섯 시간이 넘게 진행된 이 재판에서 검찰측은 유병언씨가 송재화로부터 돈을 받았다는 것을 실토하게 하는 데 실패했다. 여느 재판과 달리 피고인측이 당당하고 논리 정연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시 검토해야 한다
유병언․김기형씨에 대한 이 재판은 1991년 7월 10일, 김도현(38)등 전 오대양 직원 여섯 명이 “오대양 총무과장 노순호등을 집단구타로 사망케 한 후 암매장했다”며 충남도경에 자수해온 이후 숱한 의혹을 불러일으켰던 이른바 ‘오대양-세모사건’의 법적인 종착점이다. 애초 언론의 보도 방향은 유병언과 (주)세모, 기독교복음침레회(세칭․구원파)는 박순자와 오대양의 배후일 것이라는 쪽으로 치달아 갔지만 검찰은 유씨가 송재화 등을 통해 11억 9천 6백 95만원을 상습사기했다고 공소제기하는 선에서 이 사건을 종결지었다.
때문에 1991년 8월 20일 대전지검이 종합수사결과를 발표하자 언론은 ‘의혹 시원히 못 밝힌 채 “종결”’ (조선 8월 21일자) ‘오대양 수사 의혹 남긴 채 일단락’(한국) ‘집단변사의혹 4년째 제자리’(한겨레) ‘의혹의 바다 오대양은 깊었다’(경향)
‘의혹 남긴채 “수사 끝”’(동아) ‘수사발표 모두 “아리송”’(중앙) 등의 제목을 뽑아 일제히 검찰수사의 한계를 지적하고 나섰다.
그러나 언론은 8월 19일 터져나온 소련쿠테타에 대한 속보 때문에 그 이후 이 사건에 대해 관심을 거의 보이지 않았다.‘축소수사’란 비난에도 불구하고 유씨를 법정에 세운 검찰의 공소장을 읽어보면, 송재화 등이 돈을 끌어 모은 것에 대해선 명확한 근거가 나와있는 데 반해 그 돈이 유병언에게 전달되었다는 것을 구체적으로 입증하는 증거는 없는 듯하다. 또 법정에서 “송재화로부터 돈을 받지 않았다”고 주장하는 유씨의 태도는 전혀 위축됨이 없는 것 같다.
축소수사인가 과잉수사인가
여기서 생기는 의문은 검찰이 축소수사를 한 것이 아니라 언론에 떠밀려 오히려 “과잉수사”를 해 유씨를 법정에 세운 것이 아닌가 하는 의혹이다. 이는 그 동안의 언론보도가 거의 세모측 주장을 외면한 채 구체적인 증거도 없이 “세모․구원파=범죄집단”이라는 식으로 세모와 구원파를 몰아친 데 문제가 있지 않았을까 하는 의문을 일으킨다. 이 사건의 진실을 냉정하게 찾아보기 위해서는 그 동안 외면해왔던 세모측 주장을 들어볼 필요가 있다.
또 기자회견 등을 통해 “오대양 박순자와 세모 유병언은 관계가 있다”고 한 박찬종의원, 김현의원, 월간 “현대종교” 발행인이자 국제종교문제 연구소 소장인 탁명환씨, 대전 침례신학대학 정동섭교수의 말이 옳은 것인가를 비판적으로 검토해 보아야 한다.
언론의 집중적인 의혹보도에만 익숙해진 대부분의 일반인들은 박순자(오대양), 송재화, 강석을 등을 세모의 사채 모금책이었다고 보고 있는 듯하다. 1987년의 오대양 집단변사 사건은 박순자의 사채모집이 문제가 되자 세모에서 사람을 보내 32명을 죽였다고 보고 있는 사람도 있다. 어떤 이들은 종적을 감춘 송재화도 역시 세모의 사채모금책으로 세모에서 죽였을 가능성이 높다고 믿는 것 같다. 일반인들이 옳다고 생각하고 있는 이 가설은 완전 허구이다. 기자는 이번 취재의 말미쯤에서 박순자, 송재화 등은 세모의 자금모집책도 아니었고 세모에서 박순자 등을 죽이지 않았다는 것을 확인했다.
참고로 이 기사의 결론일 수 있는 세모 박순자 송재화 의 관계를 먼저 설명하면 다음과 같다. 권신찬 목사가 이끄는 구원파 신자중 일부는 권목사의 사위인 유병언씨가 경영하는 세모에 주주 또는 직원의 형대로 참여했다. 세모는 급속하게 성장했다. 이때 구원파 신자였던 송재화는 “유병언을 돕자”고 하면 돈을 끌어모을 수 있다는 것을 알고 1982년 구원파 신자 중 일부를 모아 통용파를 만들어 공동생활, 공동사업을 했으나 망했다. 그러자 많은 채권자들은 “돈은 송재화에게 꿔준 것이 아니라 유병언에게 준 것” 이라고 주장했다. 채권자들의 이러한 주장은, 탁명환씨 등 구원파와 이단 논쟁을 벌여온 이들에 의해 증폭되었다. 또 정치권에도 흘러 들어가 세모는 5공과 6공의 비호를 받고 있다는 식으로 변형되었다.
박의원의 폭로, 얼마나 사실인가
세모와 박순자 송재화가 서로 연결 돼 있다고 믿는 한 “오대양사건”의 의혹은 절대로 풀리지 않는다. 이 사건에 대해 이 정도의 이해를 갖고 의문을 하나씩 풀어가기로 한다. 1991년 7월 19일 박찬종 의원(52)이 서울 여의도 의원회관에서 가진 기자회견은 일파만파를 몰고 온 충격이었다. 이날 박의원은 “오대양사건 배후에 구원파로 알려진 기독교복음침례회와 (주)세모의 유병언 사장이 관계돼 있다” 며 관련자료를 공개했다.
1991년 10월 28일에 기자가 만난 박찬종 의원은 “송재화가 중요한데 검․경은 찾지 않고 있다. 유병언은 민자당의 재정위원이고 모범당원이다. 국회 안에도 이 사건에 관계된 부정비리가 있다. 김도연등 암매장범이 자수했는데도 경찰의 수사가 방향을 잡지 못한 채 헤매고 있어 내가 문제제기를 하는 기자회견을 가졌던 것”이라며 기자에게 “끝까지 의문을 갖고 추적해 이사건의 의혹을 밝혀 달라”고 부탁하기도 했다.
박의원이 기자회견때 공개한 자료 중 관심을 끌었던 것은 1983년 1월15일 밤 11시부터 새벽 2시께까지 서울 강남구 청담동 태양열주택에서 유병언씨가 신도들과 나눈 대화를 녹음한 테이프였다. 기자회견당시 박의원은 “이 녹음 테이프에 의하면 권목사(권신찬)가 ‘개발비’라는 말을 자주 쓰는데 이 ‘개발비’라는 표현은 오대양 용인공장 변사현장 천장에서 발견된 당시의 메모, ‘반대다. 완전 도전이다. 넘기면 개발비 불게 하는 거다’의 ‘개발비’와 일치한다”고 발표했다. 이에 대해 세모측은 문제의 테이프에서 유사장은 “개발비”가 아닌 개발이란 말을 한번 썼다며 박의원측이 잘못 녹취한 개발비를 근거로 세모와 오대양을 연결시키는 것은 견강부회라고 주장하고 있다.
는 세모측이 녹음테이프를 녹취한 내용 중 박의원 측이 녹취한 것과 다른 부분을 비교한 것이다. 이중 첫 번째로 잘못 녹취했다고 한 ‘고래’라는 표현에 대해 세모의 이영성차장(39)은 이렇게 표현했다.“유사장은 대구 사람입니다. 경상도사투리로 ‘고래’는 ‘그렇게’‘그래’란 뜻입니다. 유사장이 그리스도인도 자살할 수 있다면 요럴 때 내가 죽어버리면 고래(그렇게) 믿는 사람들 희망이 다 꺼질 건데 라고 한 것을, 박의원측 ‘…요럴 때 내가 죽어버리면 고로 믿는 사람도 희망이 죽어버리면 고로 믿는 사람도 희망이 다 떨어질 텐데’ 라고 잘못 녹취했습니다. 유사장이 ‘고래’라고 표현한 전후 말을 들어보면, 유사장은 그를 예수라고 믿는 사람들에게 예수가 아닌 것을 설명하기위해 ‘자살할 수 있다면 고래…’란 말을 한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박의원측은 전후의 말을 떼어내고 ‘내가 죽어버리면 고로 희망이…’라고 녹취해, 오대양 변사사건 때처럼 유사장이 죽으면 다른 신도들도 따라 죽을 수 있다는 느낌이 들도록 했습니다”
두 번째로 문제가 되는 ‘내도록’과 ‘내 돈’의 차이에 대해 이차장은 박찬종 의원측의 녹취는 잘못된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는“유사장이 ‘심지어는 당좌 같은 것 딱 끊어 가지고 내도록 만들고 전부 이렇게 해나가고 있는데 그러고 개인 생활에 있어서도 그래요. 개인들이 돈을 빌려왔다. 빌려왔으면 거 좀 적어달라. 일일이’라 고 했다. 이 말에서 ‘내도록’을 ‘내 돈’으로 하면 ‘거 좀 적어달라. 일일이’라는 말과 의미가 통하지 않게 된다”고 말했다.
그는 또“이 테이프 전체를 들어보면 유병언씨가 신도들 앞에서 ‘돈을 꿔줬으면 기록을 남겨달라’고 부탁하고 있다는 것을 알 것”이라고 말했다.
기자는 세모측과 박의원측 녹취 중 어느 것이 옳은가를 살펴보기 위해 문제의 녹음테이프를 들어보았다. 에서처럼 녹취 시비가 있는 곳은 대부분 말을 빨리 한 곳이었다. 얼핏 듣기엔 박의원측 녹취가 맞는 것 같았으나 반복해서 들은 결과 세모 측이 정확하다고 판단되었다.
녹취록은 정확한가
부분적인 단어의 녹취 시비 못지 않게 중요한 것은 이 테이프에 나타나는 유병언과 송재화의 관계이다. 박찬종 의원은 기자회견 때“녹음테이프에 자주 나오는 송 언니는 유사장의 자금비서로, 박순자와 같은 방법으로 거액의 사채를 끌어 모으다 89년 사기죄로 구속된 송재화일 것이다. 89년 당시 송재화에 대한 경찰 수사기록에 의하면 송재화가 현금을 자루에 담아 (주)세모 개발실의 김기형 과장에게 전달했다고 진술했다”고 말했다.
송 언니가 송재화를 가리킨다는 것엔 세모측도 동의하고 있다.“그러나 전체 녹음을 들어보면 유사장이 송재화와 가깝다는 것을 과시하는 것이 아니라 가깝지 않다는 점을 말하고 있다”는 것이 세모측 주장이다. 기자는 문제의 녹음 전체를 들어보았다.
유씨의 첫마디는“내가 갑자기 온 이유는 딴 게 아니고 뭔가 여러분들하고 저하고 좀 명확하게 한번 선을 긋고 지나가야 될 그런 게 있어서…”이었다. 또 유씨는 이 대화에서 그를 예수라고 믿고 있는 신도들을 향해 자신은 예수가 아니라고 강력히 주장하고 있었다.
(송재화는 “유병언은 예수다. 하나님사업을 하는 유병언을 도와야 한다”며 사채를 끌어 모았다) 전체적인 내용은 유병언씨가 신도(주로 여자)들에게 선을 그으려고 하는 것으로 판단됐다.
기자는 박찬종 의원이 말한 89년 송재화에 대한 경찰 수사기록을 살펴보았다. 1989년 1월 16일 전남도경 수사과 박진응 경위가 작성한 이조서(제3회)에는, 송재화가 서울 강남구 청담동 태양열주택에서 광주에서 올라온 교인들에게“남의 빚이라도 내서 교회에 내라”“삼우트레이딩회사가 부도 직전에 있다. 돈을 내서 회사를 살리자”“월 2부5리, 3부 이자로 갚는다”“유사장의 지시다”라고 말했다고 되어 있다.
또 송재화가“나는 당시 광주교회 신자인 박정현 구성동에게 교인들이 내는 돈을 받아달라고 하여 그들이 장부 정리를 하면서 돈을 주면 그 교회에서 운영한 김도현이 운전한 봉고차로 그 돈을 서울로 운반하였고…”라고 말한 대목도 있다. 이 조서에 나오는 경찰과 송재화 간의 일문일답 중 송재화가 끌어 모은 돈의 행방에 관해 진술한 부분을 추리면 이렇다.
-봉고차로 운반된 그 돈은 누구에게 준 것인가요.
“유병언의 개발실 사무실에 개발과장으로 일한 김기형에게 전달이 되었고 오수형(구원파 교주 권신찬 목사 생질)통장에 입금이 된 것도 김기형에게 준 것입니다”
-김기형에게 그 돈을 전달하였다는데 그때마다 어떤 식으로 전달하며 어떤 장부가 있어 정리가 되었던가요.
“나는 2년간을 그때마다 김기형에게 돈 포대 그대로 전달하여서 김기형이가 장부 정리를 하는지 어쩐지도 모르고 그대로 전달만 하여서 얼마인지 계산도 없어서 그 내용은 모릅니다”
-그 돈은 왜 김기형에게 전달한 것인가요
“누가 지시를 해서 한 것이 아니고 제 자의로 한 것입니다”
송모씨에 대한 경찰조서
-자의로 하였다는 동기를 말하시오.
“나는 신앙심이 깊어서 그 개발실이 자금난으로 허덕이고 어려움을 겪고 있어서 그 돈을 대면 사업이 잘 되어서 모든 사람이 잘 될까 봐서 스스로 돈을 끌어들인 것입니다”
-그러면 “삼우회사가 부도상태에 있다” “회사를 살리자” “유사장의 지시다” 라고 신자들을 현혹시킨 것인가요.
“유사장을 말해야만 돈을 주기 때문에 당시 삼우 트레이딩회사가 어려운 것인지 그 내용은 모르나 거짓말을 한 것은 사실입니다.
-피의자는 피의자 진술대로 신앙심이 깊어서 그런 것이라고 하였는데, 거짓말은 금기인데도 거짓말을 한 것인가요.
“제가 거짓말을 하였습니다”
-신자들은 유사장의 지시니까 동인(동인=유사장)이 빌리는 것으로 알고 준 것인가요.
“제가 쓴다고 하면 돈을 주겠습니까”
-김모씨 유사장 권모씨 등이 시켜서 한 것이 아닌가요.
“그런 일은 없습니다”
-김모씨가 돈을 받았다고 인정할 증거가 있는가요.
“1982년 가을 어느날(중략)… 기모씨, 이모씨 등과 같이 당시 제가 운전하고 다닌 포니승용차에(돈을)싣고 제가 운전하여 논현동에 있는 개발실로 가서 거기 있는 방문을 열쇠로 끄르고 거기 있는 금고 앞에 그 돈 보따리를 던져서 그 내용을 이모씨가 알고 있고(중략) 김모씨가 돈 받은 내용은 부인을 하지 않을 것입니다.”
-(이모씨를 불러 묻는 질문) 송모씨의 진술에 의하면 진술인(이모씨)이 그 내용을 안다고 하는데 사실인가요.
“(전략)송모씨가 운전한 승용차에 기금순과 같이 타고 처음으로 논현동에 있는 개발실로 따라갔더니 어느 방문의 열쇠를 끄르고 들어가요.(중략) 그 방 옆에 작은 방이 있는데 침대가 있고 화장실이 있었는데 거기다가 그 돈 보따리를 던지고는 방문을 잠그고 같이 나와 그 집 응접실에서 유사장을 만났습니다.(후략)”
이 조서에서 송모씨는 “자의로 돈을 끌어 모았다. 그 돈은 김모씨에게 전달했다” 고 진술했다.
그러나 “김모씨의 지시로 한 것이 아니다.” “금고 앞에 돈 보따리를 던지고 왔다” 라고 말했으나 구체적으로 김모씨에게 전달한 것이 사실임을 설명하지도 못했다. 또 송모씨는 김모씨에게 돈을 준 기록이나 영수증 등 물증을 갖고 있지 않다고 했다.
송모씨는 이미 처벌받았다
1989년 당시 송모씨를 수사한 이는 광주지검 김각영 부장검사였다. 김부장검사는 송모씨의 피고소인 유병언 김모씨 등에 대해 기소중지 처분을 내리고 송모씨만 상습사기혐의로 기소했다.
다음은 김부장검사의 말.
“처음 이 사건을 접했을 때 반드시 구속 기소하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여러 정황으로 볼 때 송모씨 등이 개발실에 돈을 갖다 놓은 것이 사실인 것 같았습니다. 그런데 송모씨는 유병언에게 직접 돈을 주었다고 하지 않았고 유병언도 받은 적이 없다고 했습니다. 또 최선을 다했지만 광주에서 돈을 모으는 데 관여했던 기모씨, 박모씨, 구모씨 등 주요 참고인들의 신병을 확보하는 데 실패했습니다. 관련된 사람들을 조사하고 기록을 읽고 하다 보니 구원파와 세모 사람들은 일반인들과 다르다고 느껴졌습니다. 유병언씨가 ‘돈을받지않았다. 돈을 만지지 않고 개발만 했다’ 고 하는 주장이 거짓말은 아닌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또 이상했던 것은 사기를 당한 피해자들이었습니다. 그들은 ‘무고하게 유병언 사장등을 고소했으면 우리가 구속됩니까’ 하는 말을 하기도 했습니다. 송모씨는 검찰 수사를 받을 때 돈 끌어 모은 것을 자백했습니다. 송모씨는 똑똑한 여자였습니다. 사람을 휘어잡을 줄 아는 것 같았어요. 그런데 유병언과 대질시키자 꼼짝 못했습니다. 당시 나는 최선을 다했지만 유병언 등을 기소하기는 어렵다고 판단했습니다. 지금도 내가 했던 수사기록을 보면 할 만큼 했다고 생각될 것입니다.”
송모씨에 대한 선고공판은 1989년 7월 12일 광주지법에서 열렸다. 이날 재판부는 송모씨가 3억6천7백75만원을 사취했다고 인정해 징역 3년, 집행유예 5년을 선고했다. 집행유예를 받은 송모씨는 7월말 풀려나와 종적을 감췄다.
박찬종의원이 한 말의 진위를 따져보기 위해 인용한 1989년의 송모씨 조서 내용은 유병언․김모씨를 상습사기 혐의로 공소제기한 대전지검의 이번 공소장 내용 중 송모씨를 이용하여 상습사기를 했다는 혐의사실과 대부분 중복된다.
이번 유병언․김모씨사건 공소장을 보면 1982년 1월 초순경 송모씨가 기독교복음침례회 광주교회 엄마모임 소속 교인들에게 “나는 유병언사장의 비서로 그의 지시를 받아 일하고 있다”며 회사가 부도 직전에 있다. 회사를 살리는 것이 교회를 살리는 것이고 그래야만 구원을 받을 수 있다”고 속여 11명으로부터 4억2백75만원을 교부받아 유병언 등에 전달했다고 되어 있다.
이 공소장 별참자료인 ‘범죄일람표1’ (송모씨의 광주지역부분)에는 광주에서 1백49차례에 걸쳐 사취한 금액과 피해자의 이름, 시간, 장소가 나와 있다. 이 별첨자료의 피해내용을 1989년 송모씨 사건과 비교하면 11명 피해자 전원의 이름이 똑같다. 그 중 네 명은 피해금액은 몰론 돈을 송모씨에게 준 횟수마저 똑같다. 나머지 사람 중 한 명을 제외한 여섯 명은 백만원 안쪽으로 차이날 뿐이다. 이는 대전지검이 이번에 유병언 사장에게 전달되지 않았다고 판단했었는데 대하여 이번 대전지검은 그 돈이 유사장에게 전달되었다고 해석을 달리했을 뿐, 결정적 새로운 물증도, 새 범죄사실도 찾지 못한 것이다.
세모의 반론
박찬종 의원이 공개한 자료 중에는 1987년 8월 5일 오전 11시와 8월 6일 오전 11시 45분에 대전시 가수원동의 오대양 본사에서 서울시 강남구 역삼동 세모 직원사택(전화 566~2567)으로 두 차례 전화가 있었다는 체신부 자료가 있다.
박의원은 기자회견시 “이는 오대양사건의 진상을 캐는 데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고 말했다. 이러한 자료에 대해 세모의 이모 차장은 이렇게 답변하고 있다.
“1987년 8월 5~6일경이면 가모씨(87년 5월 오대양 탈출), 이모씨(채권자 이상배씨 셋째딸․87년 6월 탈출) 등이 이미 오대양을 탈출해 박순자에게 ‘오대양의 실체를 폭로하겠다’‘차입해준 돈을 돌려달라’고 협박할 때였습니다. 박순자로서는 궁지에 몰린 시기였지요. 만약 오대양이 삼우의 하부조직이었다면 위기에 처한 박순자는 급하게 삼우에 매달렸을 것입니다. 뻔질나게 전화를 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박의원이 공개한 자료에는 오대양과 삼우간의 통화가 한달 동안 단 두 통화뿐입니다. 그 자료는 오히려 삼우는 오대양과 관계없다는 것을 증명합니다. 그 전화는 오대양에 있던 이모씨 (채권자 이상배씨 큰딸․오대양 용인 공장에서 사망)가 삼우에 있는 고등학교 동창 서모씨(당시 특허 담당)에게 안부전화를 한 것입니다. 서씨는 통화한 사실을 분명히 밝히고 있습니다”
박찬종의원이 공개한 또 한 자료는 1981년 10월 서울의 반도유스호스텔에서 열린 삼우트레이딩 간부 합숙훈련 시 찍었다는 단체 사진이었다. 이에 대해 유병언씨는 2차 공판에서 이렇게 밝힌 바 있다.
“그 때 교회(구원파 교회)사람들이 왔었어요. 그들이 사진을 찍자 길래 같이 찍었습니다. 송여인은 누구인지도 잘 모를 때였습니다. 그 사진을 보면 우리 회사 직원만 있는 것이 아니라 교회에서 온 사람이 상당수 있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박찬종의원은 “박순자는 1987년 8월 오대양 용인공장에서 사망하기 전, 서울신탁은행 다동지점을 통해 송모씨 및 (주)세모와 3천5백만원의 현금거래가 있었다. 또 세모직원이 사용한 수표 중에는 송재화가 발행한 것이 있다.”고 설명했다.
이에 대해 세모측은 이렇게 설명했다.
“송모씨는 당시 구원파교회 내에서 말썽을 일으킨 세칭 ‘통용파’를 만들어 여러 사업체를 갖고 있었습니다. 그 사업체 중 주력은 박순자의 동생인 박용준씨가 사장이었던 미양코리아였습니다. 박순자는 미양코리아의 대전지점을 운영했습니다. 수입상품 판매 회사였던 미양코리아는 오퍼상 자격이 없어 삼우트레이딩 무역부에 의뢰해 물품수입을 했습니다. 이때 수입물품이 삼우에서 미양코리아(송재화)를 거쳐 박순자에게로 가면 그 거래대금은 거꾸로 올라왔습니다. 박의원이 밝힌 거래내역은 바로 이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송모씨는 현 세모 감사인 하모씨가 개인적으로 운영하는 농장에서 과일을 사가고 그 대금으로 수표를 주기도 했습니다. 박의원이 말하는 수표는 이것을 말하는 것 같습니다. 또 오대양 직원들은 삼우트레이딩 김포공장에 와서 물건을 사가기도 했습니다. 그때도 금전거래가 있었지요. 이것이 삼우와 송모씨, 박순자간의 거래 전부입니다.”
새로운 것 없는 공소장
유병언․김모씨에 대한 이번의 검찰공소장에는 네 개의 ‘범죄일람표’가 첨부돼 있다. 그 중 ‘범죄일람표 2’에는 송모씨가 82년 1월부터 84년 4월까지 서울 강남구 일원에서 다섯 명으로부터 2억5천9백75만원을 교부받아 유병언에게 전달했다고 되어 있다. 그러나 이 사건도 1986년에 이미 검찰 수사를 받은 것이다. 86년의 송모씨 사기사건은 피해자들이 청와대 등 각 곳에 진정서를 내 치안본부 특수대에서 수사하다 서울지검에 넘긴 것이었다. 이 사건은 송모씨 등이 통용파를 만들어 82년부터 유병언 사장 등을 팔며 사업을 벌이다 84년 사업체가 일제히 부도를 내며 무너지자 터져 나온 것이었다.
때문에 송모씨가 사기를 한 것인지 여러 사람이 공동투자 형태로 사업을 하다가 망한 것인지가 불분명한 사건 이었다. 당시 연쇄부토사태가 나자 채권자들은 너도나도 사업체를 차지하려고 덤볐다 한다. 이 사건으로 인해 고소당한 사람은 송모씨, 유병언 등 여섯 명이었다. 유병언씨가 피고소인이 된 이유는 송모씨가 유사장을 판 것도 있었지만, 송모씨가 삼우트레이딩 도료영업부 경리직원 김모씨로 하여금 삼우의 대표이사직인을 빼오게 해 도용한 것도 한 원인이었다. 직인을 빼돌렸던 김모씨는 그 사실을 영업부장 이모씨에게 들켜 시말서를 썼다. 인장업자에게 모조케 한 후 갖다놓았다. 통용파는 자금을 빌리는 어음을 써줄 때 이 위조직인을 사용했다.
이 사건을 담당했던 검사는 서울지금의 박해정 검사였다. 박검사는 1986년 4월 24일 피고소인 전원에 대해 무혐의 처분을 내렸다. 검찰은 무혐의 처분했던 사안을 다시 수사해 피의자들을 기소할 수는 있다. 그러나 이 사건에서 문제가 되는 것은 박해정 검사의 처분처럼 사기죄가 성립되느냐의 문제와 함께 공소시효(7년)의 문제이다. “84년4월 이전에 일어난 사건으로 유씨 등을 이번에 기소한 것은 모두 공소시효 만료라는 벽에 부딪치고 있다”는 것이 이 사건을 맡은 세모측 변호사 도태구씨의 지적이다.
공시시효 만료의 벽
유병언․김모씨에 대한 이번의 검찰공소장 ‘범죄일람표 3’에는 강모씨(45)가 1982년부터 1987년 2월까지 서울 일원에서 12명의 여자에게 “삼우트레이딩에 돈을 빌려주면 원금과 이자를 언제든지 갚아준다”라고 속여 4억 7천 6백 50만원을 교부받아 유병언 등에 전달했다고 되어있다.그러나 강모씨는 1991년 7월30일 서울시경에 출두해 “삼우트레이딩을 사칭해 사채를 끌어 모았으나 삼우에 전달치 않고 개인목적으로 썼다”며 기자들과 일문일답을 가진 적이 있었다.
다음은 당시의 회견 내용.
-자진출두 동기는
“언론에서 내가 세모 및 오대양과 연관이 있다고 보도해 이를 해명하기 위해서다”
-끌어 모은 사채액수는 얼마인가
“82년부터 87년까지 교회신도가 아닌 친구들 10여명으로부터 7억여원을 모아, 서울 강남구 청담동의 빌라 등을 사는 데 사용했다.”
-사채를 삼우에 전달했는가
“사채는 부동산 투자 등에 썼고 84년초 삼우와의 신용도를 과시하려고 안모씨를 통해 삼우에 4천 3백만원을 빌려주었다가 곧 면제 받았다. 삼우에게는 한 푼도 전달한 적이 없다.”
-왜 삼우 이름을 이용했나.
“엄마모임 등에서 송모씨가 신도들에게 ‘삼우에 필요로 한다’며 사채를 끌어 모으는 것을 보고서였다”
-유병언 사장과 송모씨를 잘 아는가
“82년 자연보호강연회에 연사로 나온 유사장을 먼발치에서 보았다. 송모씨는 82년 구원파교회 엄마모임에서 만났으나 가깝지는 않았다. 82년말 교회를 그만두고는 만난 적이 없다”
이 기자회견에서 강모씨는 “유병언을 사칭해 돈을 모았다. 유병언 및 삼우에 돈을 주지 않았다”고 분명히 밝혔다. 1988년 3월 8일 서울형사지법은 강석을씨가 1억 3천 3백만원을 사기한 것을 인정해 징역1년을 선고했다. 그 후 강씨는 항소했으나 기각돼 실형을 살고 나왔다. 그 때 법원이 인정한 강모씨의 사기금액1억3천3백만원은 모두 이번의 유병언․김모씨 공소장에 들어가 있다. 대전지검은 강모씨가 유병언씨에게 돈을 주지 않았다고 공개적으로 말했는데도 돈을 주었다며 유병언씨등에대해 공소제기를 했다. 그러나 강모씨에 대해서는 공소제기를 하지 않았다. 이는 강모씨가 이미 처벌을 받았다는 일사부재리의 원칙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송모씨가 붙잡혀도 강모씨처럼 처벌받지 않을 가능성이 높다.
사도행전 구절인용
유병언․김씨에 대한 공소장 마지막의 ‘범죄일람표 4’에는 김모씨(오대양 용인공장에서 사망, 집단자수자 한호재의 부인)가 수원지역에서 1983년 1월부터 1984년 8월까지 여섯명으로부터 같은 방법으로 5천 7백 91만원을 교부받아 유병언등에 전달했다고 되어 있다. 그러나 이 사건도 1984년 10월 29일 피해자들의 고소로 수원지검에서 수사했던 사건이다. 당시 피해자들은 김모씨-한모씨 부부, 송모씨, 유병언등 17명을 고소했다. 이 사건을 담당한 검사는 정충수 검사였다. 정검사는 김모씨에 대해서만 공소제기를 하고 나머지 사람에겐 무혐의 처분을 내렸다. 김모씨는 1심에서 징역 1년을 선고받고 항소해 2심에서 징역 1년, 집행유예2년을 받고 풀려나와 오대양에 남편과 함께 들어갔다.
이번 사건의 검찰 공소장을 검토하면 사기를 당한 사람들의 돈이 송모씨와 강모씨, 김모씨에게까지 간 것은 확인되나 그 돈이 유병언에게 전달된 것인가는 명확하지 않다는 판단이다. 1991년 8월20일 대전지검의 오대양관련사건 종합수사결과 발표를 앞두고 “검찰은 공소유지에 어려움을 겪을 것”이라는 소문이 기자들 사이에 떠돌았던 것은 이를 두고 한 말이었다. 세모측의 일관된 주장은 송모씨등이 신망이 높았던 유병언 사장을 예수라고까지 팔며 여자들로부터 돈을 끌어 모았다는 것이다.
박찬종의원이 공개했던 녹음테이프에서처럼 유사장은 “분명한 선을 그어야겠다” “돈을 삼우에 줬으면 그 기록을 받아놔라” “나는 예수가 아니다. 내 손에 못 박힌 게 없잖느냐”란 말을 했다고 설명하고 있다.
유병언․김모씨에 대한 상습하기 재판은 송모씨가 나타나 돈을 유병언 등에 주었다는 구체적인 증거를 제시하지 않는 한 검찰측 패배로 끝날 가능성도 있다. 여기서 궁금한 것은 송모씨의 정체이다. ‘송모씨, 숨었나 죽었나’란 신문제목이 뽑혀 나올 만큼 궁금한 송모씨와 통용파를 간단히 설명하면 이렇다. 송모씨는 사도행전의 ‘필요에 따라 나눠주고…물건을 서로 통용하고…’라는 구절을 이용해 통용파를 만들었다. 네 것 내 것 없이 재산을 한데 모아 나눠 쓴다는 이 통용파는 서울 강남구 청담동 태양열주택에서 주로 모였다. 송모씨를 따르는 여자들은 서점 음식점 등 사업체를 통용파에 헌납해 운영하기도 했다. 통용파는 돈을 끌어모으기 위해 유사장을 팔았다.
그러나 이들은 1984년 주력기업이던 미양코리아(박순자의 동생 박용준이 사장)가 부도로 무너지자 다른 사업체도 일제히 무너지면서 끝나버렸다. 김모씨는 수원에서 미양코리아 제품을 판매하며 그 지역 통용파를 이끌었다. 그도 미양코리아가 서울에서 붕괴되자 빚을 남긴 채 무너졌다. 강모씨는 송모씨의 통용파 모임을 본따서 모임을 만들었다. 그는 “현세는 돈이 필요 없다. 돈을 모두 쓰자”며 모임을 이끌어 ‘누리자파’로 불리기도 했다. 강모씨의 누리자파는 별다른 사업체도 없이 일장의 사기극으로 그 끝을 맺었다.
“세모는 5공의 탄압을 받았다”
이번의 오대양-세모사건에서 회자됐던 의혹 중의 하나는 “전두환 전 대통령이 삼우트레이딩을 방문했다.“5공이 세모를 비호해 주었다”는 것이었다. 전 전 대통령이 삼우를 방문했던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5공은 삼우의 비호세력은 아니었다. 오히려 탄압했다.”는 것이 세모측 주장이다. 세모측이 그 근거로 제시하는 것은 1986년 8월11일부터 10월31일사이에 있었던 국세청의 특별세무조사이다. 이 세무조사는 송모씨의 사기사건이 문제가 돼 박모씨 등이 탄원함으로써 실시된 것이었다.
당시 국세청이 밝혀낸 것은
▲삼우는 1백 6억원의 사채를 끌어들였다
▲빌려온 사채에 대해 이자를 지급할 때 삼우는 이자에 대한 원천징수를 하지 않았다
▲8억 6천만원을 기부받았다
▲물품을 각업소에 공급하면서 세금계산서를 조작해 매출액을 축소시켰다
▲유병언은 회사 돈을 가져갔다 등이었다. 국세청은 이를 근거로 32억원의 세금을 추징했다.
세무조사를 받을 당시 삼우의 매출액은 1백80억6천만원. 매출액의 약 19%를 세금으로 추징당한 것이었다. 세무조사의 여파는 상당히 컸다. 세무조사 이듬해인 87년 삼우는 1차 부도를 냈으나 가까스로 위기를 넘겼다. 이러한 세무조사에 대해 세모측은 “5공이 비호했다면 매출액의 5분의 1정도를 세금으로 추징할 수 있느냐”고 반문한다. 86년 세무조사의 추징금에 대해 세모측은 아직도 반발하고 있다. 세모측의 반발 근거는 이렇다.
▲사채 금액 1백 6억원은 5년간 누적 금액으로 대부분 갚았다. 세무조사 당시 사채 잔액은 얼마되지 않았다
▲이자에 대한 세금을 원천징수하지 않은 것은 세모의 잘못이다. 그러나 사채에 대해 원천징수를 하지 않는 것은 사채시장의 불문율이다. 원천징수를 하면 사채를 빌려주는 채권자는 한 사람도 없을 것이다.
▲기부금 8억65천여만원은 유람선 건조를 위해 빌려온 것으로 법적인 차용증서가 없었을 뿐 장부에는 기재된 사채였다. 국세청은 차용증서가 없다는 이유로 이를 기부금으로 처리해 증여세를 부과했다.
▲매출누락액도 5년동안 합산한 것이다. 세모는 관행대로 세금계산서를 처리했을 뿐 고의로 누락시키지 않았다
▲유사장은 개인으로서 발명특허를 갖고 있고, 세모는 법인으로서 그 특허를 사용했으므로 유사장에게 특허료를 준 것이다. 그러나 직접 돈을 유사장에게 준 것이 아니고 유사장의 주식 지분을 늘려주었다. 국세청은 이러한 전말을 무시하고 유사장이 세모 돈을 가져갔다고 판정했다. 5공 시절의 세무조사에 대해 불복한 세모측은 국세심판소에 이의신청을 했으나 국제심판소는 인정하지 않았다. 현재 이 세무조사 건은 고등법원에 계류중이다.
집단자수자의 배후 시비
세모는 항간에 “6공이 세모를 비호한다”는 소문에 대해서도 강력히 부인하고 있다. 1991년 10월 24일자 일간지들은 구속중인 유병언씨를 1심에서 석방시켜 주겠다고 이모 세모 부사장(51)을 속여 1천9백만원을 받는 등 모두 4천 9백만원을 뜯어낸 최정헌(38), 심경억(68), 윤용진(44)피의자등이 대검 중앙수사부에 구속되었다고 보도했다. 다음은 세모 이모 차장의 말.
“돈으로 유사장을 빼내려 한 것은 잘못이지만 오죽 답답했으면 그렇게 했겠습니까. 세모가 6공 실세와 끈이 닿아 있었다면 이렇게까지는 안 했을 것입니다. 이는 세모가 6공의 비호를 받지 못한다는 것을 역설적으로 보여줍니다”
박찬종의원과 김현의원 등이 기자회견에서 “오대양 집단자수의 배후에는 세모와 유병언 사장이 있다”고 한 주장도 냉정히 살펴봐야 한다. 대전지검이 발표한 ‘오대양관련사건 종합수사결과’에도 집단자수자는 세모 및 유병언과 관련 있다고 나와 있다.
검찰 발표문 중 이 부분만 추리면 이렇다.
▲(주)세모 대표이사 유병언의 추종자인 구원파 신도 이재문은 88년 2월 인척으로 평소 가까이 지내던 김도현으로부터 폭생치사 전모를 고백 받았다.
▲이재문은 집단자수자의 구원파 복귀 문제를 구원파 교육부장 손영수에 의논하고 손영수는 세모상무 고창환과 의논했다
▲유병언은 91년 2월 초 구원파 월간지 ‘새길’의 기자 최숙희를 통해 자수자 문제를 조속히 매듭지으라고 지시했다.
▲91년 3월경 고창환이 박상복 세모 부사장을 통해 김도현등의 집단자수 사실을 유병언에게 보고하자 유병언은 자수를 계속 추진하라고 지시하고 자수자 가족 생계지원을 허락하는 등 자수자 회유공작에 적극적 태도를 보여 왔다.
이러한 검찰 발표에 대해 이모씨, 고모씨, 박모씨, 손모씨등은“사실과 다르다. 유병언 사장에게 보고한 적도 없고 유사장 지시를 받은 적도 없다”고 말했다. 세모 고모 상무는 이렇게 말했다. “집단자수자 배후에 누가 있었는가의 문제로 검찰 수사를 받을 때 이모검사 등이 신문을 보여주며 ‘봐라. 언론이 세모를 배후세력으로 보고 있다. 누군가는 총대를 메고 나와야 하잖느냐’고 했습니다. 그래서 ‘내 선으로 하자’고 동의했는데 그것이 어느 사이 유사장에게까지 연결돼 버렸습니다”또 한 세모 관계자는 “검찰조사를 받으러 가서 내가 집단자수자 문제를 유사장에게 보고한 것으로 되어 있는 것을 처음 알았다”며 “그때 나는 ‘그럼 내가 유사장에게 보고한 것으로 하자’고 동의했다. 그러나 지금 유사장이 구속돼 있는 상태에서 내가 유사장에게 보고했다고 동의해준 진술을 번복하면 유사장 재판이 불리해질수 있지 않겠느냐”며 말끝을 흐렸다.
이재문과 김도현의 인연
오대양 집단자수자 문제에 관여했던 사람은 유병언, 고 모씨도 아니고 구원파 교육부장 손모씨, 월간「새길」지 기자 최모씨도 아니다. 이 문제에 가장 깊이 관여한 사람은 「삼우상사」의 이재문씨이며 그 다음 이 당시 서초경찰서 정보과의 이영문 경사였다. 기자는 이재문․이영문씨 및 정화진 김영자 유연숙 심해윤 문영란 박명자 강수자씨 등 전 오대양 사람들을 만나 김도현 등이 집단 자수를 하게 된 동기를 장시간동안 들을 수 있었다. 그 내용은 언론에 보도된 방향과는 사뭇 달랐다. 집단자수자의 대표자격인 김도현씨 (38)는 이재문씨(42)와 같은 전남 고홍 출신으로 학생시절부터 선후배 사이로 알고 지냈다. 두 사람이 인척관계가 된 것은 이재문씨가 김도현의 외사촌형(광주 거주)의 손아래 동서가 되면서였다. (김도현의 외사촌형- 고 모씨- 이재문씨 순으로 동서관계이다)
함께 성경공부를 하기도 한 이재문씨와 김도현씨는 1983년 김씨가 출가해 대전으로 이사갈 때까지 호형호제하며 지냈다. 김도현씨네가 이사짐을 싸던 날 이씨는 도와주러 갔다. 이삿짐을 싸주러 온 사람은 이씨 하나였다. 이재문씨는 ‘안됐다’고 생각, 내친 김에 대전까지 따라 나섰다. 이삿짐을 실은 차가 도착한 곳은 대전시 계룡아파트였다. 짐을 같이 옮기고 난 이재문씨는 “박엄마”라고 불리는 박순자와 처음으로 인사했다. 박순자는 이씨가 재단 기술을 갖고 있다는 것을 알고 양복감을 맡기며 “재단 좀 해주고 가라”고 부탁했다. 거절 못한 이씨는 1주일 정도 재단을 해주다 “식구들이 걱정한다”는 핑계를 대고 고향으로 돌아갔다. 그 후 이재문씨와 김도현씨 사이에 연락이 끓어졌다.
오대양 집단변사사건이 있기 직전 류진숙씨 부부 등은 오대양 채권자 이상배씨를 폭행한 혐의로 입건되어 김씨 등은 구속되고 류진숙씨는 불구속으로 풀려 나왔다. 류씨가 풀려날 무렵 박순자는 오대양 사람들을 용인공장에 모이게 한 후 자신을 비롯한 32명은 천장 안에 숨었다. 이를 알지 못한 류씨는 오대양 유아원에 있던 두 아들(5살, 7살)을 찾아다니다 뒤늦게 용인공장에 도착했다. 그 날은 8월 28일 오후로 두 아들은 충남도경 형사대에 의해 대전으로 끌려간 뒤였다. 다음날 새벽 류씨는 충남도경으로 가서 두 아들을 찾았다. 8월 29일 오대양집단변사사건이 터져 나온 후 오대양조직이 붕괴되자 갈곳이 없어진 류씨는 서울에서 식당일을 하는 시어머니(박용업씨)를 찾아갔다. 시어머니 박씨는 방 하나를 빌려 어렵게 살고 있었다. 여기에 류씨가 두 아들을 데리고 합세하여 생활은 더욱 어려워졌다. 게다가 박씨를 통해 김도현(오대양)에게 돈을 빌려준 채권자들이 찾아와 돈을 달라고 닦달하자 마음은 더욱 불안했다.
“형님 꼭 할말이 있습니다”
이 무렵 이재문씨는 손윗동서 고모 세모 상무가 서울 방산 시장에 개인적으로 갖고 있는 포장부자재 상점 삼우상사에 있었다. 그는 광주에 있는 동서 (김도현씨 외사촌형)로부터 “도현이 부인이 도현이 어머님 댁에 있다”는 연락을 받고 박용업씨를 찾아갔다. 박씨의 어려운 형편을 본 이재문씨는 류씨와 두 아들을 억지로 자신의 집으로 데리고 왔다. 약 한 달 동안 이들과 함께 살았던 때를 이재문씨는 이렇게 기억했다
“아이들이 장난감을 주면 갖고 노는데 돈을 주면 쓸 줄 모르더군요. ‘아빠’ ‘엄마’를 말할 때 ‘김대리’ ‘원예과 엄마’라고 하고. 박순자를 말할 땐 꼭 ‘사장님’이라고 했습니다. 내가 ‘박순자 년은 나쁜 년이야’하고 말하면 아이들은 놀다가도 딱 굳어지는 것이었어요. 도현이 부인은 말이 없었습니다. 오대양 얘기만 꺼내면 얼굴을 돌렸습니다. 어느 날인가 도현이 부인은 ‘사장님을 따라 먼저 간 사람(용인공장에서 죽은 사람)들을 영광으로 안다’고 말했습니다. 감옥에 있는 남편 걱정을 하지 않고 박순자를 따라서 못 죽은 것을 아쉬워하는 눈치였습니다”
한 달 후 류진숙씨는 시어머니의 도움으로 방을 얻어 나갔다. 1987년 12월23일 김도현은 이씨를 찾아와 가족을 돌봐줘서 고맙다고 인사를 했다. 그 후부터 김도현은 이따금 이재문씨를 찾아왔다. 어느 날 김도현은 “형님, 꼭 할말이 있습니다”고 했다.이씨가 “무슨 말인가”라고 하자 조용한 데로 가자고 했다. 두 사람은 이 씨가 운전하는 트럭의 운전석에 올라갔다. 김도현은 “형님, 오대양에서 살인극이 벌어졌었습니다. 괴로워서 미치겠습니다 이 이야기를 안 하면 죽을 것 같습니다”고 말했다. 깜짝 놀란 이씨는 “말하지 말라. 죽더라도 너 혼자 죽어라”라고 했다. 그러나 김도현은 “꼭 좀 들어주십시오”라고 한 후 “지금 경찰이 오대양변사사건의 열쇠를 쥐고 있다며 지명수배중인 오대양 총무과장 노순호는 죽었습니다. 또 오대양 직원이던 황순자, 조재선, 박형심도 죽었습니다” 라며 자초지종을 이야기한 후 “무서워 죽겠습니다. 밤에 불자동차 사이렌 소리만 들어도 벌떡 일어납니다”고 했다. 그 날 두 사람은 이런 대화를 나눴다 한다.
“자넨 왜 그 말을 내게 하는가”
“형님만은 믿을 수 있어서입니다. 말을 나눌 사람이 형님 외엔 아무도 없습니다”
“내가 신고하면 어쩔라는가”
“기다려 주십시오. 기다려 주십시오. 자수는 꼭 합니다. 살인극에는 여럿이 관련돼 있습니다. 형님이 신고하거나 저만 자수하면 살인극에 관계한 사람들은 오대양변사사건 때처럼 또 떼죽음을 합니다.“
“나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오대양 사람들을 한 사람씩 만나 박순자에게서 깨어날 수 있도록 선도해 주십시오. 그들은 저와 함께 자수해야 합니다. 형님은 제 얘기를 들었기 때문에 선도해줄 책임이 있습니다.”
그 후부터 이재문씨는 김도현씨가 데려가 식사를 대접하며 인간적인 신뢰를 쌓아나갔다. 김도현씨 다음으로 자수의사를 밝힌 사람은 문윤중, 이세윤, 한호재씨. 이재문씨는 이세윤, 문윤중씨가 택시회사 기사로 취직하는 것을 도와주었다. 택시기사가 된 지 얼마 안되어 이세윤씨는 서울 청량리 시조사 앞에서 버스에 받혀 택시가 뒤집혀지는 교통사고를 당해 병원에 입원했다. 이 때 김영자씨(오대양집단변사사건 최초 목격자)가 자주 면회를 갔다. 그것이 인연이 돼 두 사람은 이씨 퇴원 후 동거생활을 시작했다.
김영자가 재건한 오대양 조직
김영자씨는 이세윤씨와 동거하기전 오대양집단변사사건 때 살아남게 된 정화진, 김복순(오대양 용인공장 최후변사자 이경수의 부인)씨 등과 이상배씨 폭행사건으로 구속됐다 풀려난 오민철 이세윤씨 등 30여명을 규합, 서울시 중구 황학동에 집을 얻어 오대양식 집단생활을 재건케 한 사람이었다.
김영자씨는 양장기술이 있었다. 그는 오대양 사람들로 하여금 옷을 만들어 시장에 납품케 하면서 오대양재건조직을 이끌어 나갔다. 거처를 도봉구 수유동으로 옮겨나갔을 때도 김영자씨가 지도자였다. 그러나 김영자씨가 이세윤씨와 살림을 한다고 떨어져 나가자 오민철씨가 지도자로 부상했다. 오대양재건조직에서 일찍 떨어져 나온 김도현, 이세윤씨 등은 오대양조직 와해작전을 펼쳤다.
오대양 사람을 한 사람씩 불러내 이재문씨를 만나게 하고, 이재문씨는 그 사람과 어느 정도 친해지면 집에 데려가 식사대접을 하는 작전이었다. 이재문씨와 가까워진 오대양 사람들은 “교회에 나가고 싶다”고 했다. 이씨는 평소 납품관계로 알고 있던 구원파 교육부장 손영수씨를 떠올렸다. 손씨는 글재주가 있는 사람이었다. 이씨는 손씨에게 “오대양에서 나온 사람들이 있다. 이야기를 들어보면 책 한 권은 쓸 수 있을 것이다.
이들이 교회에 나가고 싶어하니 한번 만나달라”고 부탁했다. 오대양 사람들을 만난 손씨는 오대양 사람들이 말하는 오대양 생활을 상식적으로 이해할 수 없었다. 그래서 “다음에 얘기하자”고 돌려보냈다. 이재문씨를 만난 사람은 하나 둘씩 조직을 빠져나갔다. 사람이 줄어들자 오민철은 거처를 송파구 거여동으로 몰래 옮겨갔다.
이 무렵 되살아난 것이 ‘사랑의 매’였다. 대전 오대양 시절 박순자는 심해연(집단자수자 오민철의 부인)씨 등 처녀 여덟 명으로 구성된 ‘특공대’를 조직, 말을 듣지 않거나 사채 모집을 잘 해오지 않는 직원들을 불러 ‘사랑의 매’라는 이름의 집단구타를 하게 했다. 집단자수자들이 암매장했다고 밝힌 황숙자도 특공대의 집단구타로 숨졌다는 것이 심해연, 정화진씨 등의 이야기였다.
오민철이 부활시킨 사랑의 매
오대양 사람들에 의하면 ‘사랑의 매’는 꼭 벌칙만은 아니었다고 한다. 오대양사람들로 하여금 딴 생각을 못하게 하는 방법이었다. 다음은 박명자(노순호의 부인)씨의 말이다.
“매를 맞으면서 반드시 자기 속에 있는 잘못을 털어놓아야 했습니다. 어떨 때는 잘못한 것이 없는데 불려 가서 맞기도 했습니다. 맞다보면 생각지도 않았던 ‘죄’가 입에서 술술 나옵니다. 매를 맞고 나면 속을 다 털어놓아서인지 마음이 편안했습니다. 어떨 때는 때려 달라고 한 적도 있었습니다”
오민철이 부활시킨 ‘사랑의 매’는 점점 심해져갔다. 정화진씨는 온몸에 멍이 들도록 얻어맞기도 했다. 이재문씨는 오민철의 구타문제를 상의해 보려고 같은 구원파 신자인 서초 경찰서 정보과 이영문 경사(37)에게 전화를 걸었다. 이영문씨는 오대양 사람을 만나보자는 데 동의했다. 이재문씨 집에서 오대양 사람들을 처음 만났을 때를 이영문씨는 이렇게 말했다.
“오대양 사람들은 ‘오대양에서 살인극이 있었다’ ‘자수하고 싶다. 그러나 오민철이 함께 자수하지 않으면 제2의 오대양사건이 일어난다’고 이야기했습니다. 저는 깜짝 놀라 무심결에 ‘이 놈들 모두 잡아넣어야겠어’라고 소리 쳤어요. 그러자 모두들 겁에 질려 소리 쳤어요. 그러자 모두들 겁에 질려 입을 다물더군요. 집에 돌아오니 오대양 이야기를 들은 것이 부담스럽게 느껴졌습니다. 또 한편으로 잘 하면 진급할 수 있다는 욕심이 생겨 고민스럽기까지 했습니다. 그래서 한 동안 이재문씨를 봐도 모른 척 했습니다.“
이재문씨가 오대양 사람들을 자수시키는 것을 돕겠다고 작심한 것은 그들이 죄 값을 치르고 교회에 나오고 싶다고 말하는 것을 듣고 나서였다. 그 후 이재문씨는 ‘새길’지 기자 최숙희씨와 함께 오대양 사람을 만나 이야기를 들었다. 최숙희씨를 동행한 것은 최씨로 하여금 오대양 이야기를 글로 쓰게 하면 좋을 것 같아서였다. 거여동에 있는 오대양 사람 중 오민철을 제외한 모든 사람(전부 여자)은 이재문씨에게 속을 털어놓게 되었다. 이때쯤 이재문씨와 이영문씨는 제2의 오대양 사건을 일어날 수 없다고 판단, 오민철을 한 음식점으로 불러냈다. 음식점에 나온 오민철은 “오대양 생활이 옳다. 박순자가 옳다”며 완강히 자수를 거부했다. 이영문씨는 ‘사랑의 매’라는 이름 하에 구타를 일삼는 오민철을 폭행혐의로 잡아넣으면 오대양재건조직이 붕괴될 것이라고 판단했다. 그때 오대양 사람들은 오민철과 심해연이 관계를 가져 심해연이 임신했다는 것을 이재문씨에게 알려주었다. 이재문씨와 이영문씨는 다시 오민철을 찾아가 “오대양의 규율은 남녀관계에 엄격하지 않느냐. 너는 규율을 어겼으니 구타할 자격이 없다”고 공격했다.
오민철은 규율을 어긴 것을 시인하며 “오대양 생활이 잘못됐다. 노순호 등을 폭행 치사케 한 것에 대해 자수하겠다”고 말했다. 노순호 폭행치사사건에 가담했던 사람 중 김강규는 오대양재건조직에 참여치 않았다. 그는 경기도 부천시에서 결혼을 한 후 그곳에서 액세서리 가게를 하면서 오민철 하고만 가끔 연락을 했다. 이재문씨 오민철씨등을 만난 김강규는 자수문제에 쉽게 동의했다. 오대양사람들의 집단자수 문제가 결정되자 이재문씨는 이들 가족의 생계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평소 가깝게 지내던 구원파 신도 김계숙씨와 박은자씨를 찾아갔다. 김계숙씨와 박은자씨는 봉제공장을 갖고 있는 사람이었다. 두 사람은 오대양 사람들을 취직시켜 달라는 이재문씨의 부탁을 흔쾌히 받아들였다. 오대양 사람들의 자수가 임박해질 무렵 이재문씨는 이들을 위한 변호사 선임을 위해 다시 김계숙씨를 찾아갔다. 이재문씨는 집단자수자의 변호사 선임 비용이라는 구체적인 설명을 하지 않고도 1천5백만 원을 빌릴 수 있었다.
1천 5백만 원을 포기한 김계숙씨
김계숙씨가 내놓은 돈 1천5백만 원에 대해 검찰은 구원파에서 오대양과의 관계를 끊기 위해 내놓은 변호사 선임비라고 발표한 바 있다. 이에 대해 이재문씨는 “1천5백만 원은 구원파가 사전각본에 의해 마련한 돈이 아니다. 김계숙씨가 개인적으로 내게 빌려준 것이다. 김씨는 검찰조사를 받던 도중 오대양 사람들의 형편이 어렵다는 것을 알고‘그 돈을 이재문씨에게 그냥 주겠다. 나중에 돌려 받지 않겠다’고 했다”며 검찰 발표를 부인했다. 이상은 이재문씨 등이 말한 오대양 집단자수자사건의 전모이다.
기자는 이재문씨의 이야기를 듣고 이런 문답을 가졌다.
-오대양집단변사사건 보도를 보았을 텐데 어떻게 류연숙씨와 두 아들을 집에 데려올 생각을 했는가. 그들이 무섭지는 않았나
“무섭다는 것보다는 불쌍하다는 생각이 먼저 들었다. 그 동안 사귄 정이 있는데 어려울 대 외면할 수 없지 않느냐‘
-김도현이 살인극을 이야기했을 때도 겁이 안 났는가
“깜짝 놀랐고 겁도 났었다. 그러나 김도현에게서 전혀 살기를 느낄 수 없었다. 다른 오대양 사람들에게도 마찬가지였다. 그들은 아주 순진했다. 박순자라는 지주가 없어져 세상에 대해 겁을 집어먹고 있었다. 비유해서 말하면 관청에 나온 촌닭 같았다”
-검찰 수사를 받을 때 왜 이영문 경사를 감추어 주었나
“언론이 오대양의 배후에 세모와 구원파가 있다고 몰고 가는데 어떻게 그러지 않을 수 있었겠는가. 더구나 이영문씨는 공직에 있었고 나로 인해 자수문제에 개입한 사람인데…”
-유병언씨에게 집단자수자 문제를 상의한 적이 있나
“유사장을 직접 만난 적은 지금까지 한번도 없었다. 1980년 이전에 교회에서 강연하는 것을 보았을 뿐이다. 그가 뭐하러 날 만나주겠느냐”
김도현 등 집단자수자들은 이재문씨를 만나 오대양의 망령에서 깨어나면서 스스로 자수를 결심한 것이다. 김도현은 1991년 8월 9일 남광검사가 작성한 조서에서 “오대양 시절에 암매장한 사람들에 대한 환영이 떠오르고 언젠가는 발각될 것만 같은 두려움 속에서 괴로워하던 중 1991년 2월경 현장(대전시 동구 하소동의 오대양 농장 터․노순호 등을 암매장한 곳)에 직접 가보기도 했다”며 “그 때 그 지역이 개발되는 기미가 있는 것을 보고 충격을 받아 이재문씨에게 사실을 털어놓았다”고 밝혔다.또 김도현은 “이재문씨가 자수하라고 권유한 적은 없다” “1991년 5월경 문윤중과 이세윤에게 자수하려는데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묻자 그들이 나와 유사한 마음의 고통을 겪고 있다고 했다. 그 후 수차례 그 문제를 거론하는 과정에서 두 사람은 나와 함께 자수하기로 마음을 굳힌 것”이라고 밝혔다.
누가 광신도인가
기자는 이재문씨를 비롯한 오대양 사람들을 만났을 때 기자라는 이유로 한동안 곤욕을 치렀다. 이재문씨는 처음에 이런 말을 했었다.“나는 기자라 하면 사실을 보도하는 줄 알았는데…. . ‘오대양 변사사건은 자의에 의해 집단으로 죽은 것이다. 집단자수자는 자의로 자수한 것이다. 세모는 오대양의 배후가 아니다’고 아무리 사실을 얘기해도 써주지 않았습니다. 우리보고 광신도라고 하는데 그땐 기자들이 광신도 같았어요. 광신도가 아니고선 그렇게 무례하게 쳐들어 와서 말을 하게 하곤, 한 마디 진실도 쓰지 않을 수 있습니까. 기자들이 우리 집에 왔을 때 차를 내놓으니까 혹시 뭐를 탔을까봐 아무도 안 마시더군요”
이재문씨는 인상이 안존한 사람이었다. 말을 격하게 하진 않았지만 나름대로 원칙을 지키며 사는 사람 같았다. 반면 이영문씨는 경찰 출신답게 몸집도 크고 목소리도 컸다. 그는 처음 기자를 만났을 때, 1991년 8월17일에 사표를 냈다며 와랑와랑한 목소리로 이렇게 말했다.“내가 사표를 낸 것은 경찰서장에게 낸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낸 것입니다. 하나님만은 진실을 알 것이니까요. 언론은 구원파가 생활보장을 해주는 대가로 오대양 사람들을 자수 시켰다고 몰아갔습니다. 그런 보도는 볼 때마다 미치겠더군요. 아 이래서 미치고, 이래서 광신자가 되는구나 하고 생각했습니다. 기자들이 우리 집에 쳐들어 올 때 집사람은 영문도 모르고 있다가 졸도하고… . 나는 지금도 텔레비전 뉴스를 안 봅니다. 기자양반, 당신 눈에도 내가 광신자로 보입니까”
이영문씨는 정보과 형사로서 10여년동안 서강대를 담당해왔다. 이 때문에 그는 더욱 악질적인 경찰로 몰리기도 했다. 그는 “경찰을 모두 나쁘다고만 보지 마라. 깨끗한 사람도 있다”며 검찰수사를 받을 때를 이야기했다.“처음에는 직무유기죄를 걸려고 하더군요. 현역 경찰이 범죄자를 알고도 안 잡았다면서요. 그래서 ‘무슨 직무유기냐, 자수시켰는데… . 직무태만이면 몰라도 직무유기는 아니다’고 대들었습니다. 검사들도 기자들만큼 진실을 몰랐어요. 검사들은 아침마다 신문을 펴놓고 자백하라고 했습니다”
‘오대양집단자수자 배후에 현역 경찰관이 사전교육을 했다’는 1991년 8월 9일의 신문보도는 충격적이었다. 이영문씨는 사전교육은 딱 한 가지였다고 했다.“그 때 심해연씨는 생후 2개월된 오민철의 딸을 키우고 있었어요. 심씨는 오대양 시절 황숙자씨를 폭행 치사케 한 경력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심씨에게 ‘아이를 안고 가서 자수하라. 아이 때문에 불구속이 될 것이다’고 말해주었습니다”
무례한 기자들
이영문씨는 목소리는 컸어도 인상은 밝은 사람이었다. 그는 이 말만은 꼭 하고 싶다고 했다.“한국 최고의 수사기관(안기부)은 KAL기 폭파범 김현희를 전향시키는 데 2년이 걸렸습니다. 사상은 다르지만 세뇌 당해 있기론 김현희와 오대양사람들은 똑같습니다. 어쨋든 저와 이영문씨는 한 사람도 죽게 하지 않고 오대양 사람들을 전향시켜 자수시켰습니다. 그것도 1년이 채 안 돼서.. . 내가 진급할 욕심이 있었다면 그들이 집단자수에 동의하기 전에 서둘러 상부에 보고하여 체포하게 했을 겁니다. 그랬으면 나 혼자는 잘 되었겠지만 제2의 오대양 집단자살이 또 일어났을 겁니다. 솔직히 말하면 그 때 저는 상부 사람들을 믿지 못하겠더군요. 그들 중에는 진급욕심이 있는 사람이 반드시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처음엔 하도 언론이 경찰관이 사전교육을 했다고 떠들고 검사들은 사전 교육시킨 것을 자백하라고 해서‘앞으론 간첩을 잡아도 신고하지 않겠다’고까지 생각했습니다. 이젠 저도 차분해졌습니다. 비록 15년 동안 근무했던 경찰을 나왔지만 제 국가관은 변함 없을 것입니다.“
기자에게 불만이 많기는 오대양 사람들도 마찬가지였다. 기자를 만난 박명자씨는 이렇게 말했다.“저는 몇 년 동안 죽은 남편(노순호)이 살아있다고 세상사람을 속여왔습니다. 그래서 광신도였지요. 그러나 박순자에게서 깨어나 ‘오대양은 세모․구원파와 관계없다’고 진실을 얘기했을 때 기자들은 믿어주지 않았어요. 세상은 온통 음모로 가득찬 것 같았습니다. 그 날 기자들은 우리 집 문을 발로 차고 들어와, 어느 기자는 제 주민등록증을, 어느 기자는 앨범을, 또 한 기자는 전화번호부를 찾아서 가져갔습니다. 그 기자를 만나면 주민등록증을 제발 돌려주라고 말 좀 해주십시오“
이영문씨는 집단자수자 사건이 터진 후 주민등록증지를 옮기려다 동회직원으로부터 “당신 같은 사람은 우리 동네에 오지 말라”고 원망했다. 언론에 불만이 많기는 구원파 교회 쪽도 마찬가지였다. 기독교복음침례회(구원파 정식 명칭)의 월간지 ‘새길’ 편집장인 최기준씨는 “언론에서 숱하게 구원파를 공격하면서도 구원파 교회를 취재하러 왔던 것은 한겨레 신문기자 하나였다”고 했다. 최씨는 한겨레신문 기자에게 “당신은 참 용기가 있소. 광신도의 소굴을 찾아 올 만큼 용기가 있소”라고 이야기했다고 한다.1987년 8월 29일 경기도 용인군 남사면 북2리 (주)오대양 용인공장에서 발견된 32구의 떼주검에 대한 자․타살 논쟁만큼 세인의 관심을 끌었던 것도 없을 것이다.
언론의 편파보도
1974년 기성교단으로부터 압력을 받은 권신찬 목사의 한국평신도복음선교회는 극동방송국을 물러나왔다. 그 때 탁씨는 기성교단의 입장에서 ‘세칭 구원파의 정체’란 책을 출간, 한국평신도복음선교회에 ‘구원파’란 이름을 붙여줌과 동시에 이들과 이단 싸움을 시작했다. 구원파와 탁명환씨 간의 이단싸움은 1976년부터 법정으로 비화되어 지금까지 여덟차례나 고소와 맞고소가 오고가게 되었다. 송재화 등 구원파에서 떨어져나온 모임이 유병언씨를 팔며 사기행각을 벌인 사실은 구원파를 이단으로 몰수 있는 좋은 소재였다. 박순자도 한 때 구원파 신자였다. 또 전대미문의 떼죽음인 오대양 집단변사사건은 ‘자의에 의해 죽었다’고 믿기 어려운 것이었다. 탁씨 등은 송재화사건과 오대양변사사건을 구원파-세모와 연결시켰다. 32명은 타살되었다는 주장은 5공말기의 국민감정과도 쉽게 일치할 수 있는 것이었다.
이를 다시 끄집어내 정치적으로 쟁접화한 이는 1988년 국회 5공특위 제2소위원회 위원장이었던 김현 의원이었다. 김의원은 나름대로 오대양집단변사자의 타살을 입증하기 위해 최선을 다한 사람이다. 그는 “단서를 찾으러 용인공장에 수십 번 갔었다. 현장에서 자보기도 했다. 지금까지 들어간 조사비용이 8천만 원은 될 것” 이라고 말했다. 김의원은 또 법의학회와 국립과학수사연구소 등에 부검자료를 보내 감정을 요구하기도 했다.
이런 상태에서 뛰어든 사람이 박찬종 의원. 의원회관에서 처음 만났을 때 박의원은 오대양사건에 대해 구체적인 설명을 하지 못했다. 그는 “나는 수사권이 없는 의원이다. 다만 청문회를 열어 의혹을 따질 수는 있다.” 며 구체적인 답변은 성만현 특별보좌역(48)과 박미출 비서에게 미뤘다. 두 번째 만났을 때 박의원은 “오대양 집단변사사건이 자살일지라도 누군가가 자살할 수 있는 상황을 만들었다면 그것은 타살이다.” 며 한발 후퇴하는 발언을 했다.
탁명환씨, 정동섭 교수, 김현 의원, 박찬종 의원의 발언은 거의 모든 언론에 보도되었다. 언론은 대체로 이들의 주장에 동조하는 취재․편집 방향을 택했다. 김현 의원의 주장을 근거로 ‘ “오대양 집단 변사는 타살” ’ 이라는 제목을 뽑은 것은 1991년 7월 16일자 세계일보였고 탁명환․정동섭씨 증언을 근거로 ‘ “구원파는 파괴파” ’ 과 ‘ “오대양은 구원파 사업체였다.” ’ 는 제목을 뽑은 것은 국민일보 (8월 8일자) 였다. 동아일보 7월 19일자는 ‘ “오대양 배후에 딴 종교집단” ’ 이라는 제목을 뽑아 박찬종 의원의 기자회견을 보도했다.
왜 구원파엔 적이 많은가
최재를 끝내면서 기자는 두 가지 생각을 했다. 하나는 구원파에 한때 몸 담았거나 권신찬․유병언씨와 관계가 있었던 박남주, 이복칠, 송재화, 강석을, 박순자, 정동섭, 탁명환씨 등은 왜 모두 구원파에 악연(惡緣)만을 남긴 채 멀어져 갔는가 하는 생각이었다. 기자는 이에 대한 질문을 5차공판장에 증인으로 나왔던 권신찬 목사에게 물어보았다. 권목사는 기자를 쳐다보며 “그들은 우리 신자가 아니오”라고 말 한 후 뭔가 더 말을 하려다 측근에 싸여 “나중에 이야기하자”며 자리를 떴다.
광적(狂的)인 종교집단이 아닌 이상, 기독교복음침례회는 반드시 이러한 의문을 스스로 풀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것은 유병언 등에 대한 상습사기혐의에 대한 유죄․무죄 차원의 논쟁을 떠나 종교집단의 철학과 진정한 도덕성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구원파에서 떨어져 나온 이들이 왜 구원파에 해코지를 하는가를 기독교복음침례회 사람들은 곰곰이 생각해 봐야 할 것이다.
또 하나는 이 사건에는 너무 피해자가 많다는 생각이다. 한때 살인자로까지 의심을 받았던 유병언씨와 세모․구원파 신자도 피해자 송재화 박순자 등에 사채를 넣었던 채권자들도 피해자이다. 또 오대양 용인공장에서 죽은 이들을 비롯한 모든 오대양 사람들이 피해자였다. 이중 가장 큰 피해자는 누구일까. 현재 삶의 기반조차 닦기 어려운 오대양 생존자와 그 가족들이 가장 큰 피해자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