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장 가다가 영천댐. 자양면소재지 옆 길가에 오천(영일) 정씨 문중 묘역 하천(일명 하절) 보현산(어미산) 아래 기룡산(자식산)을 합하여 모자산. 기룡산 아래 하천 묘역을 청룡 백호가 세 겹으로 둘러싸는 천하의 명당을 雪學스님이 기묘사화로 피신해 온 효자 정윤량에게 점지해 준 것이다. 아버지 정차근의 혈은 기룡의 좌장혈이다. 정윤량, 노수, 김응생, 정거는 포은 정몽주를 배향하는 한국 2째 사액서원인 임고서원 창건의 주역들이다. 정윤량은 퇴계의 문인이기도.
풍수의 교과서적인 고전이 설심부인데, 스님의 법명을 보면 풍수에 정통하신 분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참선 수행으로 스님들은 범인들보다 마음이 훨씬 깨끗하다. 심식이 맑은 스님들은 범인들이 감지하지 못하는 지기를 예민하게 느꼈을 것이다. 한국의 전통 사찰들, 왕릉들, 양반들의 묘역은 예외없이 명당들이다.
병와 이형상은 입암유산록에서 풍수지리설을 미신 잡술로서 맹렬하게 비판한다. 그의 과학적이고 이성주의적인 학문 자세를 잘 보여준다. 그는 경주부사, 제주목사 시절, 무당집이나 사찰 등 민간신앙의 현장들을 엄청나게 파괴한 바 있다. 그는 서구 근대의 계몽주의자를 닮은 관료로 오늘의 정교유착의 정치인, 지방자치단체장(시장, 군수)들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 그는 민간 신앙이 가지는 심리적인 효과까지도 감안하는 조치를 취했지만, 지나치게 유교와 이성 근본주의자적인 자세를 취하였다. 그에게는 문화인류학적인 지혜가 부족하였다.
포은 정몽주 가문이 임고면 우항리 일대에 집성촌을 이루었고 포은이 나고 자랐다. 포은의 아버지 무덤도 임고서원 가까이에 있다. 요즈음 포항의 일부 향토사가들이 주장하는 것처럼 포은은 오천 문충리에서 태어나지도 않았고, 문충리가 생가도 아니다. 영천 우항리가 포은의 외가도 물론 아니다. 포은의 조부가 어린 아버지와 살던 곳이 오천 청림리이다. 이곳에 임란전부터 포은의 사당(오천서원)이 있었다. 서원이 임란에 불탈 무렵 포은 등의 위패를 운제산 정상의 만장굴에 간직햇다가 전후에 현재의 문충리에 사당을 10년 동안 두었다가 현재의 오천서원으로 이안했다. 그래서 문충리라는 지명이 생겨난 것이다.
영천-임고-자양-화북 길에는 선원(고려 철불)-용화-삼매-공덕-원각-법화-정각-보현산 등의 불교식 마을 이름이 있다. 묘각사, 성혈사, 비상사, 선원사, 법화사, 봉림사, 거동사 등의 옛 절들도 많다.
영천 우항리를 중심으로 하여 영천 일대에 포은의 후예들이 분포한다. 그러면서 영천은 유교의 고장이 되었고, 불교 문명은 유교문명(매산 고택-유홍준의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에 등장)으로 변환하여 갔다. 임고-자양면 일대의 수려한 산수는 불교와 유교 2 문명의 역사를 꽃 피운 것이다.
마침 우리가 갔을 때 대구한의대 학생들을 오천 정씨 교수님이 데리고 임고-자양 일대의 문화유산을 답사 중이었다. 학생들에게 하천종약회가 발행한 자료들을 나누어 주었는데 고맙게도 이렇게 귀한 자료집 나도 한 권 얻었다.
사진가 배병우의 사진으로 유명한 경주 삼릉 못지 않은 솔숲을 지나면 바로 묘역이 나온다. 자양면사무소 옆 도로가에 있다.
기룡산 아래의 이 넓은 명당에는 80여기의 묘역들이 있다. 정말 대단한 명당이다.
앞에 보이는 호수가 영천댐. 이 댐의 물은 포항시민들이 마시고, 포스코의 공업 용수로도 쓴다. 세계문화유산인 양동마을 뒤의 안계댐은 중간 저수지. 묘역의 맨 위에 위치한 이 묘는 임진왜란 당시 전국 최초로 수복한 영천읍성 전투와 경주읍성 전투에 참가한 의병자들 중 한 분인 호수 정세아 선생의 묘. 조부가 필사한 족보(가첩)를 보니 호수공과 우리 선조가 사돈 관계를 형성하고 있었다.
호수 선생 무덤 아래 그 아드님 백암 정의번과 백암의 종인 억수의 무덤. 백암은 경주성 탈활 작전에 참가하여 3번이나 적진을 뚫고 들어가 아버지를 구하였는데, 그 전쟁의 와중에 보이지 않는 아버지가 전사하였다고 생각하고 아들로서 살아 돌아갈 수 없다며 적진으로 들어가 싸우다가 결국 전사하였다. 이 때 종 억수에게는 같이 죽지 말고 살아돌아가라고 하였다. 억수는 신하는 임금을, 아들은 아버지를, 노비는 주인을 따라 충성하고 절의를 지키는 것이 윤리라고 들었다며, 만류에도 불구하고 주인을 따라 싸우다가 전사하였다. 해마다 묘사 때 문중에서는 억수에게도 제사를 지낸다. 살아난 호수 선생은 아들의 주검을 찾지 못하고 결국 경주에서 영천으로 초혼하여 평소 입던 옷과 갓을 두고 빈소를 차리고 장례는 아들 친구들이 보내어 온 애도의 시를 관에 넣고 치렀다. 그래서 백암의 이 무덤은 '시총(詩塚)'이라 불린다.
생명평화탁발순례단을 이끌고 도법스님도 여기를 다녀가셨다.
시총의 사연을 설명하는 하천문중 종손.
백암 정공 "시총"-세계에서 유일한 시무덤일 것이다.
문학하거나 시인들은 반드시 이 무덤에
와야 할 성지가 아닐까. 문화재로 지정되어야 할 것이라고 종손은 힘주어 말했다.
임진왜란 당시 조선 사람들을 수도 없이 잡아가서 포루투갈 노예 상인들에게 노예로 팔아치우고,
수도 없이 많은 조선인들의 코도 베고 귀도 베어 주렁주렁 목걸이를 하다가
비총(코무덤), 이총(귀무덤)을 만든 섬나라 왜놈의 야만성에 비하면,
우리는 이렇게 시총을 만들었다. 얼마나 대단한 문명 민족인가?
일본은 조선의 도공과 금속활자와 수 많은 불교문화재들을 임란 때 약탈하여 갔다.
일본의 도자기가 네덜란드를 통하여 유럽 시장을 제패하였고,
도자기 포장지였던 다색목판화 우키요에는 고호 같은 인상파 화가들의 그림을 낳게 하였다.
우리는 일본에 가서 코무덤, 귀무덤만 관광하지 말고
여기 와서 시총을 먼저 보아야 하지 않을까?
오늘 중국에서 온 유학생도 있었지만,
한자, 유교, 불교, 율령을 공유한 역사를 가진 동아시아의
중국인, 일본인, 베트남 관광객도 이리로 유치하고, 서양인들도 이리로 오게하여
유교 문명의 현장을 보게했으면....
시총 앞에서.
저는 웃는다고 웃었는데 표정이 넘 엄숙하죠? 허파 기능이 발달하고 간이 작고, 간과 연결된 눈이 작고 예리하고 콧대가 매부리코에 하관이 빠지고 성격이 강직하고 열이 많고 화를 잘 내고 기가 위로 잘 받치는 것은 태양인의 특징인데, 제가 바로 그 체질이지요.
벌어진 앞 니 땜시, 이를 드러내지 않고 웃는 표정을 연출하느라 쪼매 수고했니더. 그래도 저의 입술은 립스틱을 바르지 않아도
언제나 석굴암 부처님처럼 발그레스레하디요.
이가 없으면 잇몸으로, 입술로.... ^^
아쉬운 발길을 돌려 내려오는 길
어린날 새봄이 오면 논두렁에 뾰족 고개를 내민 싹을 뽑아먹던 그 삘기가 어느님의 무덤에 솜털 송송한 꽃을 피웠다.
늦가을, 추초가 황량한 묘역이지만, 바람이 없고 날은 포근하여 오지탄금(五指彈琴-다섯 손가락으로 거문고를 탄다) 형국이라고 하는 이 묘역에 오니 사람들은 모두 좋은 땅이 주는 가야금을 흥겹게 타는듯한 명랑하고 여울지는 기운을 받고 심신이 절로 포근하고 흥겨워지고 다사로워졌다. 모두들 여기에서 뒹굴고 놀고 싶은 마음이 생긴다고 하였다.
비로용담꽃. 백두산에 가면 비로용담꽃이 한 여름에 지천으로 피어난다.
봉분에 피어난 생기 활발발한 구절초. 키는 작지만 이렇게도 생기 넘치는 야생화는 또 첨 봤다. 명당이라 다르긴 다른가보다.
첫댓글 어링불님 덕분에 '시월의 멋진 마지막 토요일'이 되었습니다.
'시총'이란 낱말은 상상도 못했던 말이어서 문학적 욕구에
불을 당기는 것도 같습니다. 감사해요! ^^*
시총과 노비 억수의 묘 새로운 발견이었습니다. 선생님 덕분에 많은 공부 되었습니다. 고맙습니다.
어링불님은 우리 카페의 소중한 인적 자원입니다. ^0^
님의 노고 덕분에 새롭게 다가온 입암28경과 그외 유적지 답사, 참 보람있었습니다. 감사 합니다.
우리가 문학기행한다고, 역사기행 한다고 멀리, 멀리 다니는 사람을 많이 보는데, 우리 가까이 이렇게 소중한 자산이 있다는 걸 깨달은 하루였습니다. 답사 준비하시느라 애쓰신 어링불님, 덕분에 머리와 가슴이 가을처럼 조금 풍성해졌습니다. 근데, 어링불님, 자기 제질과 관상, 성격을 어쩜 고롷게 잘 분석하셨는지요? 한참 웃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