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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세기 강론 103
창세기 39:1-12
요셉의 형통(1)
창세기 38장은 뜬금없는 유다와 다말의 사건에 대한 기록이 아니다. 유다는 죄 가운데 있는 이스라엘의 모습을 보여 주지만 야곱을 통해 하나님의 언약이 주어진 언약의 아들이다. 다말은 언약의 아들과 하나 되어 하늘의 의를 계시하는 자로 드러난다. 다시 말해서 다말은 언약의 아들의 씨를 받아 의로 완성되는 예수 그리스도와 한몸된 교회를 보여주는 말씀이다. 그렇다면 39장의 요셉에 대한 말씀도 보디발의 아내와의 관계를 단순히 요셉이 불륜을 저지르지 않았다는 사건이 아니라 이스라엘이라는 언약의 아들 중에서 애굽에서 장자의 역할을 하는 요셉을 통해 언약의 씨에 대한 말씀이다.
“요셉이 이끌려 애굽에 내려가매 바로의 신하 친위대장 애굽 사람 보디발이 그를 그리로 데려간 이스마엘 사람의 손에서 요셉을 사니라”(1절). “신하”라는 말의 ‘사리스’는 ‘내시, 환관’이라는 뜻이다. “친위대장”이란 말의 ‘탑바흐’는 ‘경호원, 호위병, 요리사’라는 뜻이며, “보디발”(히, ‘포티바르’)은 ‘태양신이 준 자’라는 뜻이다. 보디발은 겉모습은 남자이지만 씨 없는 존재로 태양신의 보냄을 받은 자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 “내려가매”라는 말의 ‘야라드’는 ‘내려가다, 내려오다, 내리다’라는 뜻인데 사역동사로 사용되었기에 우리 성경에서 “이끌려”라는 표현을 넣었다. 문자적으로는 이스마엘 사람이 요셉을 이끌고 갔지만 언약적으로는 하나님께서 애굽으로 이끌어 가셨다는 의미이다.
당신들이 나를 이 곳에 팔았다고 해서 근심하지 마소서 한탄하지 마소서 하나님이 생명을 구원하시려고 나를 당신들보다 먼저 보내셨나이다(창 45:5)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 하시므로 그가 형통한 자가 되어 그의 주인 애굽 사람의 집에 있으니”(2절).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 하시므로”라는 표현은 하나님께서 자기 언약으로 이끌어 가고 계신다는 의미이다. 다시 말해서 요셉을 겉사람 육은 죽고 속사람 영의 사람으로 살게 하신다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과 함께 하심은 세상에서 행복하고, 총리가 되고, 부자가 되는 일들과는 전혀 상관없이 자기 언약의 완성에 있기 때문이다.
“형통”이란 ‘찰라흐’는 ‘앞으로 나아가다, 발전하다, 형통하다, ~을 건너가다’라는 뜻이다. 사전에서는 “온갖 일이 뜻대로 잘 된다”라고 정의한다. 이는 세상적 의미에서든 성경적 의미에서든 동일하다고 할 수 있다. 요셉이 총리가 되었다는 결론을 알기 때문에 우리 기준에서 형통이라고 생각한다. 요셉이 총리가 되는 것은 그에게 반드시 필요한 일은 아니었다.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형통이라면 아예 요셉이 형들에 의해 모함을 받아서는 안 되고 더욱이 형들에 의해서 애굽에 팔리는 일이 없어야 한다. 이런 점에서 성경이 말씀하는 형통이란 우리가 생각하는 개념(기준)과는 다르다는 것이다. 문제는 이것의 기준이 어디에 있느냐 하는 것이다. 즉 뜻대로 잘 되는 것이 내 기준인가 아니면 하나님 기준인가 하는 것이다. 언약적 관점에서 본다면 ‘하나님의 뜻대로 바르게 쓰임 받는 상태, 하나님의 언약대로 이루어져 가고 있는 상태’가 형통이다. 구원의 차원에서 말하자면 육의 사람에서 영의 사람으로 건너가 다시 사는 상태를 의미한다.
“3 그의 주인이 여호와께서 그와 함께 하심을 보며 또 여호와께서 그의 범사에 형통하게 하심을 보았더라 4 요셉이 그의 주인에게 은혜를 입어 섬기매 그가 요셉을 가정 총무로 삼고 자기의 소유를 다 그의 손에 위탁하니 5 그가 요셉에게 자기의 집과 그의 모든 소유물을 주관하게 한 때부터 여호와께서 요셉을 위하여 그 애굽 사람의 집에 복을 내리시므로 여호와의 복이 그의 집과 밭에 있는 모든 소유에 미친지라”(3-5절). 요셉을 인도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는 보디발로 하여금 그의 성실성을 깨달아 가정 총무로 삼게 한다. “가정”이라는 말의 ‘바이트’는 ‘집, 가족’이라는 뜻이고, “총무”라는 말의 ‘파카드’는 ‘방문하다, 감독하다, 보살피다’라는 뜻이다.
여기서도 우리는 너무 쉽게 요셉의 형통에 대하여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요셉이 그렇게 보디발의 신뢰를 받기까지 몇 년의 세월이 흘렀겠는가? 요셉이 노예였다는 점을 생각한다면 그가 인정받기까지 최소한 10년이라도 모자랐을지 모른다. 그런데 하나님의 은혜가 임하였기 때문에 요셉이 보디발의 신뢰를 받을 수 있었다. 요셉이 17세에 애굽에 팔렸으니까 아마도 10년의 세월이 흘렀다고 생각한다면 이때 요셉의 나이는 약 27세쯤이 되었을 것이다. 사실 보디발이 요셉을 후대한 것은 자기의 이익을 위해서 한 것이다. 요셉을 통해 얻는 복을 느꼈기 때문에 가정 총무의 일을 맡긴 것에 불과하다. 이는 후에 나오겠지만 그가 요셉을 향하여 일단 오해를 품게 되자 가차 없이 요셉을 곤경에 빠뜨리는 것을 보아서 알 수 있다.
사람이란 누구나 상대방이 자신에게 필요하고 도움이 된다고 생각될 때는 자신의 모든 것을 줄 것처럼 하다가도 자신에게 필요가 없고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생각되면 안면몰수하고 언제든지 버릴 수 있는 것이 인간의 죄성이다. 요셉은 하나님의 언약을 이루는 일 때문에 이러한 인간의 죄성에 의해 철저하게 무시당하고 버림당하는 상황을 경험하게 된다.
그런데 여기서 의문이 생기는 것은 하나님께서 요셉을 위해 복을 내리긴 하셨지만 정작 복을 받은 사람은 보디발이었다는 것이다. 요셉은 노예였기 때문에 자신의 개인 재산이 있을 수 없었다. 요셉의 모든 것은 주인의 것으로 귀속되는 것이었다. 결국 요셉을 위해 복이 내려진 것으로 인해 주인 보디발이 복을 받아 누리게 되었다는 것이다. 보디발이 하나님을 믿는 것도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애굽 사람의 집에 복이 내려졌다. 이렇게 볼 때 요셉을 위해서라는 말은 재물과 연관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생각해야 할 것이다.
애굽 사람의 집에 하나님의 복이 주어졌지만 사실 애굽 사람은 하나님의 복을 누릴 수 있는 존재가 되지 못한다. 씨 없는 집, 곧 율법이 집이 언약이 아들 요셉으로 인해 복을 받게 된 것이다. 다시 말해서 율법의 집이 무너지고 하나님의 의가 분명히 드러나는 집이 되어야 한다. 그러나 보디발의 집은 거기까지였다. 하나님이 나타내고자 하신 것은 애굽 사람 집의 중심에는 요셉이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자 하셨다. 자신의 의가 아니라 요셉의 의로움 때문에 복을 받는다는 것이다. 이것이 언약으로 보여주시는 하늘의 복이다.
오늘날 우리는 하나님의 복을 받아 누리고 있다. 하지만 그 모든 복은 우리의 의로움 때문이 아니라 우리의 중심에 계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의로움 때문에 내려진다. 복의 근원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이시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들 심지어 교인들까지도 자신의 노력과 종교적인 열심과 행위로 복을 받는 것으로 착각한다. 그것도 세상적인 복을 말이다.
“주인이 그의 소유를 다 요셉의 손에 위탁하고 자기가 먹는 음식 외에는 간섭하지 아니하였더라 요셉은 용모가 빼어나고 아름다웠더라”(6절). “용모”의 ‘토아르’는 ‘윤곽, 모습, 용모’라는 뜻이고, “빼어나고 아름다웠더라”는 ‘야페 야페’를 두 번 사용하여 강조한 표현으로 ‘아름다운, 준수한, 유쾌한, 깨끗한’이라는 뜻이다. 눈에 보이는 모습이 아니라 그 모양 형상이 아름답다는 것이다. 요셉은 언약의 아들, 장자로서 진리의 말씀이 충만하여 영의 사람으로 하나님의 형상 안에 들어가 있는 아름다움의 상태였다. 이런 점에서 “자기가 먹는 음식 외에는 간섭하지 아니하였더라”라는 것은 씨 없는 보디발이 자기 성전에서 먹는 말씀만큼은 자기가 관리함으로 자기 행위를 의존하는 종교인이라는 뜻이다.
“7 그 후에 그의 주인의 아내가 요셉에게 눈짓하다가 동침하기를 청하니 8 요셉이 거절하며 자기 주인의 아내에게 이르되 내 주인이 집안의 모든 소유를 간섭하지 아니하고 다 내 손에 위탁하였으니 9 이 집에는 나보다 큰 이가 없으며 주인이 아무것도 내게 금하지 아니하였어도 금한 것은 당신뿐이니 당신은 그의 아내임이라 그런즉 내가 어찌 이 큰 악을 행하여 하나님께 죄를 지으리이까”(7-9절). “눈짓하다가”의 “눈”은 ‘아인’이고 “짓하다가”로 번역한 말은 ‘나사’로 ‘들어 올리다, 받아들이다, 전진하다, 열망하다, 강요하다’라는 뜻인데 “눈을 들어”라고 표현하여 진리를 발견하고 알게 된 상태를 의미한다(창 22:13). “동침”이란 표현을 ‘샤카브’(성관계를 위해 눕다)로 쓰고 있다. “청하니”라는 말의 ‘아마르’는 계속법 미완료형으로 지속적으로 말하여 요청하였다는 의미이다.
문자적으로 보면 보디발의 아내가 요셉에게 유혹하여 성관계를 요구한 음녀였고 요셉은 음녀의 유혹을 뿌리치고 믿음을 지켰다고 볼 것이다. 그러나 성경은 윤리 도덕적인 차원에서 교훈을 주는 책이 아니라 언약의 말씀이다. 그렇다면 언약적 입장에서 보자면 보디발의 아내는 요셉이 가진 진리의 말씀에 관심을 가지고 있다는 뜻이다. 그러나 그녀는 씨 없는 자와 하나 된 상태에서 요셉이라는 언약의 아들, 곧 하나님의 말씀을 자기 욕망을 위해 탐하고 있다는 것을 나타낸다. 진리와 하나 되는 ‘야다’가 아니라 복을 주는 요셉에게 관심을 가지고 ‘나사’ 하고자 한 것이다. 진리의 말씀으로 먹지 않고 율법의 말씀 그대로 먹고자 한 것이고, 자기 종교성을 욕망으로 채우는 말씀으로 받고 싶어 하였다. 신약식으로 표현하면 십자가의 예수는 알지만 그 십자가에 죽고 싶어 하지는 않는다는 의미이다.
이런 점에서 요셉은 “그런즉 내가 어찌 이 큰 악을 행하여 하나님께 죄를 지으리이까”(9절)라고 말한 것이다. 요셉은 단순히 보디발의 아내와 동침하는 것이 윤리 도덕적으로 죄가 된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거절하였다는 의미가 아니다. 진리의 말씀이 언약과 관계없는 자에게 조롱당하는 그것이 부끄러운 것이었다. 다시 말해서 진리의 말씀을 알게 된 자가 다시 율법의 행위로 돌아가는 것을 거부한 것이다. 그러므로 성경이 말씀하는 언약의 말씀에 빗나가는 것이 죄악이다. 요셉이 가정 총무가 되었다는 것은 보디발의 집에 진리를 드러냄으로 하나님의 언약의 의가 어떤 것인가를 보여주는 것이지 다시 율법의 행위로 돌아가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1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자유롭게 하려고 자유를 주셨으니 그러므로 굳건하게 서서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 2 보라 나 바울은 너희에게 말하노니 너희가 만일 할례를 받으면 그리스도께서 너희에게 아무 유익이 없으리라 3 내가 할례를 받는 각 사람에게 다시 증언하노니 그는 율법 전체를 행할 의무를 가진 자라 4 율법 안에서 의롭다 함을 얻으려 하는 너희는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지고 은혜에서 떨어진 자로다(갈 5:1-4)
“10 여인이 날마다 요셉에게 청하였으나 요셉이 듣지 아니하여 동침하지 아니할 뿐더러 함께 있지도 아니하니라 11 그러할 때에 요셉이 그의 일을 하러 그 집에 들어갔더니 그 집 사람들은 하나도 거기에 없었더라 12 그 여인이 그의 옷을 잡고 이르되 나와 동침하자 그러나 요셉이 자기의 옷을 그 여인의 손에 버려두고 밖으로 나가매”(10-12절). “여인이 날마다 요셉에게 청하였으나”라는 말씀을 통해 보디발 아내의 열심이 어떤 것인지를 보여준다. 마찬가지로 오늘날도 많은 종교인이 하나님을 향해 섬기고 성경을 공부하여 진리를 터득하고 싶어 한다. 그러나 그런 우리의 종교적 열심이 생명을 가져다 주는 것이 아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함께 죽고 사는 은혜가 주어져야 한다. 그 은혜 안에서 우리가 하나님을 섬기고자 하는 열심은 매일매일 삭제되고 또 삭제되는 것이다.
“요셉이 자기의 옷을 그 여인의 손에 버려두고 밖으로 나가매”라는 표현은 상식적이 아니다. 왜냐하면 보디발의 아내가 옷을 버리고 도망했어야 하기 때문이다. 결국 보디발의 아내, 씨 없는 자와 하나 된 자가 요셉의 옷을 벗기게 된 것이다. 요셉의 옷은 제사장이요 왕을 상징하는 옷이었는데 그 형제들이 벗겨 하나님께서 언약으로 세우실 제사장이요 왕이라는 사실을 거부하는 모습을 보였다. 그와 마찬가지로 보디발의 아내 역시 하나님의 언약을 완전히 거부하는 상태가 되었음을 나타내고 있다.
그러나 실상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땅의 옷, 육신의 옷을 벗어버리니 사람들은 그 옷에만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십자가 밑에는 율법의 행위에 관심을 가진 종교인들이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를 옷으로 입는 것에는 관심도 없을 뿐만 아니라 전혀 알지 못하는 상태였다. 그것이 우리의 죄성이다.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고 정욕을 위하여 육신의 일을 도모하지 말라(롬 13:14)
(20250202 강론/주성교회 김영대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