먼저 천진의 역사부터 보시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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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 여인 조회수 : 7305.06.30 15:10 http://cafe.daum.net/chinanala/FeNh/107
춘추전국 시대에는 발해만(보하이만 : 渤海灣) 연변에 위치하였으며, 그 후 육지가 침강하여 한때 바닷물에 잠겼으나 다시 육지화하여 당·송(唐宋)시대부터 개발이 시작되었다.
옛 명칭은 직고이며, 지리적으로 해하, 위하, 자아하의 교착점에 위치하여 또한 삼차구라고도 한다. 발해만에 위치한 항구도시이며 수(隋)와 한(漢)이 여기에 운하를 건설하여 예로부터 교통이 편리했다. 송(宋)과 요(遼)가 천진을 경계로 국경을 접하였고, 금(金)와 원(元)은 직고(直沽)라고 불렀다. 원대에는 북경이 수도로 되어, 직고성이 강남에서 오는 곡물을 운반하는 중심이 되어, 이것 때문에 직고해운미창이 설치되었다. 1316년(연우3년)에는 '해빈진도'의 칭호를 얻어 해진진(海津鎭)이 설치되었다
명나라 연황주체(주원장의 넷째아들)가 조카 혜제와 황위 쟁탈을 하기 위하여 북평의 군사들을 몰아 천진에서 강을 건너 남하하였다. 후에 남경에서 황제자리에 올라 수도를 북경으로 옮기고 '해진'을 "천진" 이라 고쳤다.즉 "천자가 나루를 건넌곳" 이라는 뜻이다.
1404년(명조 영락2년) 남경에서 북경으로 천도한 명조는 식량을 강남에서 북경으로 옮기는 수로의 중계기지로서 천진에 위병책성을 건설하여 지키게 하고 천진위를 설치하였다. 도시는 해하의 서안 남운하의 남안에 위치하고 있고 대략적으로 지금 남개구의 동, 서, 남, 북 네 곳의 길 안에 위치하고 있고, 그 안의 길은 경위 방향으로 정방모양으로 되어있다. 1421년(영락19년)에 북경으로 천도한 이후에도 천진은 이미 북방 경제중심이 되어 있었다.
청 1725년(옹정3년)에 천진위를 직례주(直례州)로 개명하고, 후에 또 천진부(天津府)로 바꾸었다.
1840년 아편전쟁후 천진은 수 차례 수난을 겪었는데 애로우호 사건을 계기로 전쟁을 일으킨 영,불 연합군은 1858년 천진을 침공하여 천진조약을 맺었다. 1860년 영,불연 합군은 북경에 진입 청나라를 억압하여 천진조약을 비준토록 하고 북경조약을 체결하여 천진을 비롯한 10개의 항구를 강제적으로 개방하게 하였으며 천진이 상공업도시로 변모하기 시작한 것은 바로 이때부터였다.
1901년 체결된 북경의정서(중국에서는 신축조약이라고 함)의 결과로 천진에는 8개국의 조계가 설치됐다. 그 결과 영국,불란서,오스트리아,미국,일본,러시아,이태리등 9개나라가 천진에 조게를 설정하여 20년에서 80년간 중국진출과 교역의 발판으로 이용하였다.이러한 배경으로 천진에는 아직도 옛 유럽식의 건축물들이 남아 있는 것이다. 노성구 남부의 해하 양안이 조계가 되었다. 후에 청왕조가 다시 노성구 동북부를 신 시가지로 개척하였고, 거리도 자연적으로 만들어졌다. 그후 각 국의 공사관, 상사, 은행 등이 설치돼 천진은 점차 대도시의 모습을 갖추게 되어, 1928년에는 천진특별시로 변모하면서, 직례행정원이 되었다.
중화인민공화국 건립이후 천진은 중화학공업의 건설이 급속히 추진되었다. 수도 북경의 관문으로, 그리고 화북지역 최대 무역항으로 부상하게 됐다. 발해만 연안에서 가까우며 하이허강(海河) 수계의 5대 지류(永定河·大淸河·子牙河·南運河·北運河)가 합류하는 지점에 해당하기 때문에 내륙수운이 발달하였을 뿐만 아니라 중국 북부지방의 최대 무역항이 되었고 톈진신강(天津新港)이 건설된 뒤부터는 대형선박의 접안이 가능하게 되었다. 또한 징산(京山)·진푸(津浦) 철도의 분기점으로서 육상교통의 요지이다. 1967년 화베이(華北) 평원 북동부, 허베이성의 성도(省都)에서 직할시로 승격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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텐진조약(天津條約)
텐진조약(天津條約)은 중국 톈진에서 청나라가 여러 외국 간에 맺은 조약의 총칭으로 국사시간에도 배운적이 있다. 수도 베이징과 가장 가까운 항구라는 이유로, 청이 강대국과 불평등한 조약을 맺는 장소로 텐진이 선택되어진 것이다. 그중 아무래도 당시 조선을 가지고 세 싸움을 벌리던 청과 일본이 맺은 조약이 더욱 기억에 남을 수 밖에 없다.
1885년(고종 22). 갑신정변 후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와 이홍장(李鴻章)이 조인했으며 주요 내용으로는, 청.일 두 나라 군대가 조선에서 철수하고, 장래 출병할 때는 서로 통고한다는 협정이다. 이 조약의 체결로 일본은 조선에 대한 영향력을 계속 확보해나갔다.
최초의 톈진조약은 애로호사건에 관련하여 1858년 6월, 러시아.미국.영국.프랑스 등 각 4개국과 청이 맺은 4개의 조약이다. 이 4개조약은 모두가 편무적 최혜국조관(片務的最惠國條款)이 삽입되어 있는 불평등한 조약이었다.
대(對)영국조약의 내용은 대략 다음과 같다.
외교사절의 베이징 상주 내지(內地)여행과 양쯔강 통상의 승인 새로운 무역규칙과 관세율 협정(아편무역 합법화) 개항장(開港場)의 증가 그리스도교의 공인 등 이 이외에도 영국과 프랑스 양국에 대하여 합계 600만 냥(兩)의 배상금과 그 지불이 완료될 때까지 광둥성성(廣東省城)의 보장점령, 베트남이 프랑스의 보호국임을 인정하는 등. 몰락해 가는 청 나라의 모습을 텐진조약을 통해 엿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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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한말의... 경성으로 부터의 인천의 위치와 역할이 판박입니다.
그럼, 인천의 역사를 보시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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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천의 유래
1897년 3월 22일 쇠뿔고개(현 도원역)에서 거행된 경인철도 기공식
고구려의 왕자 비류는 불굴의 개척정신으로 문학산 부군에 도읍을 정하고 미추홀을 세웠다. 삼국시대에는 각국의 격전지로서 '매소홀','소성' 등으로 불리다가 고려시대에 접어들면서 인천은 우리나라역사의 중심지에 서게 된다. 고려때는 왕의 어머니와 왕비를 배출한 명문지역으로 '7대어향(七代御鄕)'이란 칭송을 듣는다. 이런 이유로 '경원', '인주' 등으로 승격되며 관할역도 확장된다. 조선 태종 13년(1413)의 지방제도 개편 때 비로소 '인천'이란 이름의 역사에 등장한다.
여기에서 미추홀의 "미"나 매소홀의 "매"는 물(水)의 뜻이며 "홀"을 성(城)이나 골로 해석되며 "추" 나 "소"는 모두 사잇소리 "ㅅ"으로 풀이 하고 있다. 고구려 시대에 매소홀이라 불리던 인천의 후기 신라의 경덕왕 16년 (757)에 이르러 소성현(邵城懸) 으로 바뀌었다. 경덕왕이 신라의 제도나 관직을 중국식으로 고치는 한편, 토박이 말로 되어 있는 땅이름을 모두 그 뜻에 해당하는 한자어로 바꾸었기 때문이다. 고려 숙종(1095~1105)에 이르러 소성현은 경원군(慶源郡)으로 개칭, 승격되었는데 이는 인천이 숙종의 어머니 인예(仁譽) 순덕태후의 고향이었기 때문이다. 그 뒤 인종(1122~1146)때에는 인종의 어머니 순덕왕후 (仁川李氏)의 고향이 됨으로 "인주"(仁州)로 개칭되었다. 고려말 공양왕 2년(1390)에 이르러 인천은 경원부로 개칭, 승격되었는데, 이는 인천이 7대 어향(御鄕)이었기 때문이다. 7대어향이란 문종에서 인종에 이르는 7대동안 인천이 왕의 외향이거나 왕비의 고향에 해당되기 때문에 붙여진 명칭이다. 조선초기 태조원년(1392)에 인주로 환원되고 태종 13년(1413)에 이르러 모든 군이나 현에 '州'가 들어 있는 고을을 모두 '山'자나 '川'자로 바꾸는 바람에 인주가 물에 가깝다 하여 '인천'으로 바뀌게 된 것이다. 따라서 인천의 명칭은 한자풀이식의 '어진내(仁川)'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고 인주이씨에서 유래되었음을 알 수 있다.
고 대
신석기시대의 중간기인 금속병용기에 사람이 산것으로 추정됨 (인천 각지방의 고인돌과 문학산, 계양산에서 각종 석기들을 발견)
삼국시대 백제를 세운 비류가 문학산에 도읍을 정하고 미추홀이라 부른 것 이 처음. (옹진: 고구려의 용천, 부진이 강화:참성단, 삼랑성, 고구려혈구군 설치)
미추홀이 치정구역으로 등장한 것이 고구려 장수왕(413-491)때 고구려(475)가 백제를 침공하여 한강 유역 미추홀지역에 매소홀현을 두었다.
통일신라시대 경덕왕 16년(757) 매소홀현을 소성현으로 개칭 율진군(현과천)에 소함. (부평: 장제군, 옹진:폭지군, 강화: 해구군으로 개칭, 원성왕 6년 혈구진 설치)
고 려
고려 현종 9년(1018) 소성현이 (수주:현 부평)에 소속됨. 숙종조에 이르러<경원군>으로 승격
인조때 다시 인주로 승격 (부평:수주로 개칭(940), 의종 4년(1150)안남도호부 설치, 고종 2년(1215) 계양도호부로 개칭, 충렬 왕 34년(1308) 길주목으로 승격. 옹진:태조 23년(940) 옹천을 옹진으로 개칭, 백령진 설치, 강화: 태조23년 강화로 개칭, 현을 둠(995), 고종 19년(1232)강화천도군으로 승격, 우왕 3년(1377)강화부로 승격
공양왕 2년(1390)에 7대 어향이라 하여 경원부로 승격.(옹진:백령진 혁파, 강화: 유수부로 승격)
조 선
조선왕조 태조1년(1392)에 인주로 변경(옹진:태조 6년 옹현진에 진 설치)
태조 13년(1413)에 군이나 현에 주자가 들어있는 곳은 산이나 천으로 고치게 되어 인천군으로 재편하므로서 인천이라는 말이 등장. (부평:부평도호부설치. 옹진:병마사 현령 겸임, 세종 5년(1423) 첨절제사로 변경. 강화 :가오하호부로 개칭)
세조 6년(1460) 인천도호부로 승격 (강화:인조5년(1627) 강화유수부로 승격)
숙종14년(1688) 현으로 변경
숙종 24년(1698) 도호부로 복구 (옹진: 숙종45년(1719).황해수영 설치, 옹진현 - 도호부로 승격)
근 대
고종 12년(1875)운양호 사건
(강화 : 고종 3년(1866)병인양요 강화성 함락. 고종 8년(1871) 신미양요, 고종 11년(1812) 강화포대 설치, 고종 13년(1876)강화도조약 체결)
고종 19년(1882) 화도진에서 한미수호조약 체결
고종 20년(1883) 1월에 개항하므로서 통상사무를 권장하기 위한 감리서 설치
1885년 감리서 폐지되면서 인천부로 개편 (부평:인천부에 속함, 옹진: 해주부 옹진군 강령군으로 개편 호아해도로 이속)
1896년 지방제도를 개편함에 따라 경기도 인천부 (부평: 경기도 부평군으로 개편, 강화: 건양1년 강화부로 변경)
1899년 국내 최초의경인철도 개통
1906년 인천이사청 설치로 인천부윤이 감리사로 직무수행 (부평:부천군에 편입(1914), 옹진:강령군이 옹진군에 편입(1909), 백령도 장연군에 편입(1914). 강화:강화군으로 변경(1906), 교동군 편입(1914)
1936년 2차로 문학, 남동,부내, 서곶등 4개면이 편입되어 부평군 대부분이 인천으로 편입
1949년 인천시로 개편(옹진:벽석군 일부외 벽령도 편입(1945) 1949년 경기도로 이속(1949)편입
1950년 9월 15일 인천상륙작전 실시
1963년 부천군 작약도 편입 (옹진:백령면 대청 출장소 설치(1962), 부천군 도서 6개면 편입(1973), 대청면 신설(1974), 강화:강화읍으로 승격) 1981년인천직할시로 승격
(옹진:자월면 신설(1983), 강화:양오리 송해면 편입(1983))
1989년 김포군 계양면과 옹진군 영종면, 용유면 편입
1995년 강화군, 용진군, 김포군 검단면 편입으로광역시로 개칭
면적이 954.10제곱킬로미터로 3.56배 늘어서 현재 서울보다 면적이 1.5배된다.
◆◆ 미추홀왕국(彌鄒忽王國)의 개국(開國)정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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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구적 개척정신의 뿌리는 비류(沸流)의 개국정신에서 그 근원을 찾을 수 있다. 백제의 건국설화중 비류설화(沸流說話)를 보면 비류는 새로운 신천지를 개척하기위해 수천리 생소한 땅을 찾아오다 이곳 인천 문학산에 도읍했다. 미지의 세계를 향해 야심만만한 개국의 꿈을 키우고 이를 달성하기 위해 그를 따르는 모든 사람을 설득할 수 있었던 힘은 바로 선구자적인 예지에서 우러난 확신이며 그 꿈을 실현하기 위해 온갖 시련을 극복할 수 있었던 의지와 용기 그리고 실천적인 행동은 바로 새로운 세계를 개척해내고자 하는 개척정신이었다. 이 정신은 오늘날 인천이 세계속의 국제도시로 발전할 수 있었던 힘의 원천적인 정신으로 이어지고 있는 것이다.
◆◆ 인천 최초의 항구 능허대(凌虛臺) 개척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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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련동 해안 조갯골에 위치했던 능허대는 서기 372년 우리 고장 최초의 국제적인 항구가 개척된 곳이다. 고구려와 백제가 대립하여 서로 밀고 밀치는 적대관계로 발전하게 되자 백제는 대륙과의 육로 교통이 단절되는 고립속에서 고심하던중, 중국 대륙과 가장 교통이 편리하고 가까운 항로를 개척하게 된 것이다. 이는 당시 이 고장 선조들이 어려웠던 시련과 도전을 슬기롭게 극복해낸 창조적인 정신의 발현이 었으며 새로운 해상교통을 선구적으로 개척한 슬기였다.
◆◆ 운하(運河)개척의 선구지 김포굴포(金捕堀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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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포굴포계획은 서해바다 인천과 한강을 연결하는 선구적인 대운하(大運河) 건설 계획 이었다. 이 계획은 고려시대에 최이가 처음 창안했으나 여러가지 기술부족으로 착수치 못했고 조선 중종시대 다시 이 계획을 다시 추진했으나 완성시키지 못했다. 그러나 웅대한 계획을 추진하던 흔적은 오늘날까지 뚜렷하게 남아있다. 이 계획은 8. 15이후 1970년대까지 경인운하계획(京仁運河計劃)으로 발전되어 왔으며 이제 이의 실현을 목전에 두고 있다. 이처럼 이 고장 인천은 운하개척의 선구지로서 무엇인가 새롭게 발전하려는 선구정신이 이어져 내려왔던 곳이기도 하다.
◆◆ 녹청자 도요지(綠靑磁 陶窯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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녹청자 도요지는 인천이 자랑할 수 있는 문화재(文化財)중 가장 값진 유적 (遺蹟)이다. 녹청자란 토기에서 청자로 발전하는 중간과정의 것으로 매우 소중한 문화재이다. 이러한 도요지는 세계적으로 유일하게 일본에만 두 곳이 남아 있어 일인들이 이를 세계적으로 자랑해 왔던 것이다. 그러나 1966년 우리 고장에서 녹청자 도요지가 발견됨으로서 일본의 원형이 한국에서 전파되었음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이처럼 이 고장은 천여년 전부터 녹청자 개척의 선구지로서 창조적인 슬기가 이어져 내려온 곳이라 할 수 있다.
◆◆ 선구적으로 개척된 역사/문화 도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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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은 개항과 함께 실질적인 국제항구로 등장하면서 근대 서구 문물이 제일 먼저 밀고 들어온 관문이었다. 그러므로 선구적 개척지 구실을 하였을 뿐 아니라, 선구적인 인물 또한 많이 배출된 곳이기에 이를 아래에 열거하면 다음과 같다.
- 인천은 우리나라 최초로 개설된 역사적인 사실들이 많다. - 서울과 인천간 우리나라 최초의 전신업무가 개시됨.(1885. 9. 28) - 우리나라 최초의 서구식 공원인 만국공원이 생김(현 자유공원)(1888년) - 우리나라 최초의 해외이민이 인천항을 통해 이루어 졌음(1902년, 하와이) - 우리나라 최초의 경인간 민간전화 개통(1902. 9. 20)
◆◆근대 선구적인 근대문물(近代文物)의 수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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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계설치
- 1883년 9월 30일 "인천일본지계조약" 성립됨. 중앙, 관동 7,000평. - 1884년 4월 2일 "청국지계조약". 선린동 5,000평. - 1884년 10월 "각국지계". 송학, 송월, 북성동 140,000평 - 30년간 존속하다 1913년에 철폐됨.
◐ 구미각국상사(歐美各國商社) 진출
- 개항당년 영국 상선회사인 "이화양행" 출장소 설치. - 1884년 독일 "세창양행" - 1885년 미국 "타운센드양행" - 1896년 영국 "홈링거상회" - 1906년 "광창양행"
◐ 인천 ~ 상해간(上海間) 정기운항선 1883년에 개설, 매월 1~2회 운항.
◐ 근대적인 우편제도(郵便制度)
- 1884년 한성우정총국 설치 - 11월 17일 인천분국 개설 - 분국장 이상재(李商在)
◐ 경인철도(京仁鐵道) 개통
- 1897년 3월 22일 우각현 기공 - 1899년 인천 ~ 노량진간 210리 개통 - 1900년 7월 8일 한강철교 준공 후 260리 개통 - 1965년 9월 18일 경인선 복선 - 1974년 8월 15일 전철화(電鐵化)
◐ 경인간 전화(電話) 개통
- 1898년 1월 28일 인천 ~ 서울간 전화선 가설 - 1900년 7월 경인간 시외전화 개통 - 1902년 3월 시내전화 개설
◐ 경인간 전신업무(電信業務)
- 1885년 7월 "한청전선조약" 체결 - 1885년 10월 3일 전신 업무 개시 - 1885년 11월 19일 한청(韓淸)간 국제 전신 개통
◐ 영미연초공장(英美煙草工場) 담배 생산
- 1889년 12월 인천 청국지계 내에서 생산
◐ 첫 기독교 포교지(基督敎 布敎地)
- 1885년 감리교 내리(內里)교회 설립
◐ 각국 공원(各國公圓) 설치
- 1888년 11월 9일 현 자유공원 설치
◐ 인천해관(仁川海關) 설치
- 1883년 6월 16일
◐ 인천 기상관측소 설치
- 1896년 인천해관 내 - 1904년 4월 응봉산(應峯山)에 설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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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대와 지명만을 살짝 틀어 놨지...
인천주변부인 강화도에서 일어난 서부열강들과의 여러 사건들이...거이 일치합니다.
뭔가 강력한 냄새는 나는데...구체적인 증거들이 부족합니다... 한반도내의 친일조선인들과 일제와 중원공산당들이...이 지역과 북경의 역사&지명을 집중적으로 조작하지 않았나... 강력히 의심됩니다....구한말의 역사 ,영토조작의 키 포인트가 이 쪽일까 합니다.
최소한 구한말엔... 한양(무한)은 대한제국의 황도일 뿐이요...조선이란 국명을 유지한 경성은...몽골(만주) 북조선 유민들의 집결지인 천진... 그 수도인 북경이 아닐까 합니다.
그걸..현 한반도의 서울로 둘 다 몰아 넣으려니...서울이 한성이다,한양이다...경성였다...날리 부르스가 나는 거라 봅니다.
천진(天津)일대여...
제 생각엔...상고대부터 쭉...천부(天府)아닐까 합니다.
샤만(단군)이 하늘에 제사지내는 곳이요... 모든 중원제국의 황제들도...이 곳의 승인을 형식적으로라도 얻어야 진정한 종교적 천자가 되기에 여기서 인(印)을 받았지 않았나도 의심되고여...
이 발해만 일대가 고대부터 쭉...각 중원제국들의 경합지요 국경선이 되는 이유도 소금,해산물,쌀,축산물등...그 물산의 엄청남도 이유겠으나...
소도개념의 성지...각 황조들의 본향이기에...황조들의 종묘개념의 성지였기에...황조의 명분유지에 중요한 지역이라 그랬잖나 싶고여... 여기서 천제도 지내고...즉귀제도 거행하고 이랬지 않았나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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