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전산내학살 사건
1) 1950년7월 대전형무소. 각 감방은 여순사건, 제주 4.3사건 관련자 등 정치범들로 포화상태였다. 일반수를 합쳐 정원 1천 2백명 시설에 3배가 많은 3 ~ 4천여명이 들어차 있었다. 사상범들은 약 2천여명으로 4.3항쟁 관련자, 여순사건 관련자, 남로당원, 전쟁반발 직후 예비검속된 보도연명(광복이후 좌익활동을 하다 전향한 사람들로 구성된 단체)원 등이었다.
"50년 7월 5~6일경 헌병대 s중위가 와서는 계엄군에 맡긴 예치수(군에서 관할해 형무소가 신병만 위탁관리한 재소자. 주로 여순사건과 4.3항쟁 관련자를 지칭-편집자 주)들과 정치범들을 다 내놓으라고 했다. 그들은 툭하면 '말을 안 들으면 쏴 죽이겠다'고 협박했다" 당시 형무소 특별경비대 부대장이었던 이준연(77)씨의 증언이다.
다음 날인 6일과 7일. 살기 띤 군 헌병대가 형무소를 에워싼 가운데 교도관들은 명직계(인명부)를 보고 정신없이 재소자들의 성향 분류작업을 벌이기 시작했다. 분류는 석방(일반수)과 총살(사상범)로 나눠 졌다.
이순일(92 -당시 대전형무소장 직무대리)씨는 지난 8일 한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수석간수로서 몇 차례 법원장과 검사장을 찾아갔으나 제수자 처리지침과 분류 기준을 하달 받지 못했다. 분류작업은 백소령이 신분장을 석방가부를 결정했다 "고 말했다.
7월8일 아침, 형무소 직원들이 정치범들을 한 명 한 명 불러냈다. 가석방, 가출옥시킨다며 불러내서는 곧바로 헌병대의 손에 넘겼다.
당시 도 경찰국 사찰주임으로 대전형무소학살사건의 총살집행잭임자 중 한사람이었던 변홍명(가명)씨가 지난 92년 '말' 자와의 인터뷰에서의 증언.
"그들은 형무소에서 나오기만 하면 벌서 넋이 빠져 있었어요. 눈을 가린 채 전깃줄로 굴비엮듯 몇 사람씩 묶어 트럭에다 2중, 3중으로 실었습니다....나중엔 시간이 없어 트럭 적재함에 쭈그러뜨리고 앉히면 위에 또 얹고 차곡차곡 싣고 왔습니다. 꼭 콩나물 시루같이 죄수들을 싣고 총살 집행장으로 끌고 온거지요."
이들은 대전형무소가 텅 빌 때까지 꼬박 3일간 정치범들을 실어냈다. 이들이 도착한 곳은 당시 대덕군 산내면 낭월리 골령골.
"(골령골에)도착해서 내리라고 하면 앞이 안보이니까 못 내렸어요. 개머리판으로 때리고 발로 차면서 끌어내리면 돼지 새끼 구르듯 굴러 떨어졌죠" 병홍명씨의 증언은 이어진다. 변씨에 따르면 총살 집행장에는 경비헌병이 능선을 둘러 서 있었고 미군과 사회유지들도 포진해 있었다.
대전형무소 정치범 학살은 8일 아침부터 10일 저녘까지 3일간 계속됐다. 당시 대전 형무소 특경대부대장 이준영씨는 "아침부터 저녘까지 실어 갔는데 2 ~ 3일간 한 것 같다"고 말했다. 이같은 증언은 50년 당시 대전형무소를 지켰던 직원들로 구성된 7.1동지회원(10여명)들의 한결같은 애기여서 현재까지 신빙성이 가장 높다.
2) 피해 현항
형무소 관계자들이 하나같이 사상범 처형을 3일간 했다고 증언한 반면 현장 총살집행책임자였던 홍씨는 지난92년 말지와의 인터뷰에서"(총살)집행은 10여일 간에 걸쳐 진행됐다"고 밝혔다.
다른 목격자의 애기도 들어보자. 임선기(77 - 산내 낭월동)씨. 토박이인 임씨는 "아침때부터 해거름까지 총소리가 쾅쾅 났는데 약 일주일간 계속됐다. 막판 이틀 동안은 한 밤중에도 총소리가 들렸다"고 당시를 분명하게 기억하고 있다. 송민용(66 - 동구 구도동)씨도 "당시 일주일 넘게 도라꾸(트럭)에 사람을 싣고 골링이(골랑골)로 들어갔다"고 말했다. 이규희(62 - 당시 국민학교 5학년 - 대전거주)씨는 "적어도 열흘쯤 재소자를 옮기는 도라꾸 행렬이 계속됐다" 주장한다.
이처럼 형무소 직원들과 현장 목격자들의 주장이 다른 것은 왜 일까. 병홍명씨는 지난 92년 말지와의 인터뷰에서 이렇게 밝히고 있다.
"대전형무소학살사건이 끝난 뒤 3일 동안 대전보도연맹원과 좌익불순분자라는 죄목(?)으로 연행해온 5백여명을 같은 방법으로 계속 처형했다"
즉 형무소 사상범외에도 군-경이 후퇴를 시작한 7월 14 ~ 16일 막판까지 보도연맹원 등에 대한 골령골에서의 처형이 계속돼었음을 암시하는 대목이다.
희생자 수도 여전히 오리무중이다. 현재 증언자들은 희생자 수에 대해 600여명에서 3000여명까지 다양한 주장들이 나와 있다. 미국립문서보관소의 기록에는 1천800여명으로 돼 있다. 물론 희생자 수에 따리 학살된 기간(일수) 도 달라진다.
600여명이라는 주장은 당시 정치범을 헌병대에서 내어준 대전형무소 특경대부대장 이준영씨 등 근무 교도관들의 증언으로 "당시 정치범을 수용하던 감방 수의 규모로 그 숫자를 산출" 한 것이다. (처형 일수 3일, 7월 8 - 10일)
1천 800여명은 해체된 미 비밀문서의 기록에 따른 것으로 여기에는 "대전에서의 1천 800여명의 정치범 처형은.." 으로 명시돼 있다. (처형 일수 3일 7월 첫째주)
3천여명이라는 주장은 당시 목격자들의 증언과 무덤규모 등에 따른 것인데(처형일수 10일)객관성과 신빙성이 높다는 평가를 받고 있는 상태다.
학살기간은 증언자에 따리 50년 7월 2일부터 군.경이 후퇴하기 시작한 7월중순경까지 다양하게 제기되고 있는데 각기 증언들을 종합해보면 학살이 7월2일부터 중순경까지 계속 이어졌던 것으로 보여진다.
최근당시 대전형무소에 수감돼 있던 증언자 안아무개씨(78,경기도 거주)는 7월 2일동료들이 희생된 것 같다고 했고 대전 대덕구 갈현리 주민은 당시 마을 희생자들이 7월 5일 처형됐다고 밝혀 이를 뒷받침하고 있다. 확인결과 희생자 유가족들이 지내고 있는 제사일도 7월1일, 7월 5일 등 다양한 일자가 나왔다.
희생자가 3천여명에 이른다는 결정적인 증언은 대전형무소에 수감됐던 정치범외에 타지역에 서 출소됐다. 풀려난 정치범들이 또 다시 붙잡혀 함께 처형됐다는 것와 정치범 외에 보도연맹원, 죅익불순분자 등 민간인 학살에 관한 것이다.
이밖에 그동안 알려진 1.2학살지 외에 3학살지(산사태로 유실됐다함)가 있었던 것으로 밝혀져 이 같은 증언에 설득력을 더하고 있다 이에 대한 보다 명확한 사실 확인 작업이 요구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