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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날 처음 만난 쉼터 | 몽보네입구에 있는 작은 성당 | 시골길을 걷는 뒷 모습 |
1. 최초의 나팔수
가끔 걷기 운동을 하면서도 등산은 엄두도 못내던 시절이 있었다. 이민자로 살아가면서 주의해야 할 점이 많은 이 나라에서 어디서부터 문제를 풀어야 할지를 몰랐다. 도대체 주차는 어디에 하고 등산코스는 어디에 있는지? 등등이 궁금했지만, 매일 자잘한 일들로 바쁜 틈에 쉽게 누구의 도움을 받을 수도 없었다. 알고 있는 제한적인 사람들 역시 생활의 틈새속에서 빠져 나오기가 어려운 것 같았다.
정기적으로 들르는 서점의 매니저인 이 선생님은 늘 손님을 차분하게 맞아주시면서 좋은 책도 소개해 주시고 원하는 책을 빨리 찾아주셨다. 인상도 욕심 한 자락을 내려 놓으신 듯 편안해 보이시는 분이시다. 어느 날 책을 싸주시면서 언제 등산을 한 번 가자고 제안을 하셨다. 그리고도 몇 개월이 지난 후 그 분을 따라 곰산으로 처음 산행을 갔다. 헉헉거리며 뒤에 따라 올라가자니 힘에 부쳐 정상까지 가지도 못하고 솔숲에서 녹차를 마시면서, ‘이대로는 아니되리’라는 마음을 먹었는데, 그 분도 내게 1주일에 한 번은 시간을 내서 등산을 하라고 권해 주신다. 당신은 위장병이 심해서 물도 소화되기 힘들때 산을 오르게 되었고, 이후에는 명상도 산에서 하신다며 여러 가지 조언을 해 주시었다. 그리고 지도를 보여주시면서 등산용품을 구하는 장소도 알려주셨다. 어린 시절부터 지도를 보면 괜히 좋아서 펴놓고 여기 저기 훑어보기도 했다. 만약 내가 등산용 지도를 가진다면 다른 이의 도움없이도 해 낼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래서 그 주에 등산용품점에 가서 지도와 몇 가지를 구입했다. 또한 함께 걷기운동을 하던 분에게 권하여 목요일마다 등산을 하게 되었다. 그것이 이제 10년을 넘기고 있다. 그 때 처음 시작하면서 어떤 분과 약속하기를 “등산화 5켤레 떨어지면 히말라야 갑시다”라고 하였던 기억이 난다. 아직은 유효 기간이 남아서 언제 히말라야로 트레킹을 떠날지는 알 수가 없다. 나의 꾸준한 걷기운동은 이렇게 일상을 떠나는 여행과 연결되어 늘 낮선 곳에 대한 동경을 키워왔다.
한 번은 서점에 들렀더니 인상좋은 매니저님이 또 말씀하시기를 “이런 사람도 있어요. 나도 언제 이렇게 한 번 해 보면 좋을텐데. 오래 직장을 비우기 어려우니 두 번에 나누어서 하면 될 것도 같고...” 무슨 책인지 하고 보았더니 <걷기 여행>이라는 제목위에 부제로 ‘소심하고 까탈스러운 여자의’가 달려 있었다. 절에 돌아와 그날로 읽어보니 정말 나도 이런 여행을 한 번 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과연 책을 쓴 사람처럼 할 수 있을까하는 염려도 되었다. 여자 혼자서 무거운 배낭을 지고 낯선 땅 유럽에서 800킬로미터를 걸었다는 이야기였다.
800킬로미터 길의 이름은 까미노 산티아고. 이 길의 처음 목적은 스페인 산티아고로 예수님의 제자인 야고보 성인의 무덤을 찾아가는 길이었다고 했다. 기울어져 가는 종교를 살리고 경제적, 사회적, 문화적 등등의 이유로 일생에 한 번 순례길을 다녀오라고 가톨릭 지도자들이 신도들에게 권유를 했다고 한다. 내가 굳이 유럽까지 가서 가톨릭 성지를 걸어야만 될 이유는 없었다. 그러나 근처에서 그런 곳을 찾기 위해 다 뒤져보았지만 역시 음식과 숙소, 길의 안내표지, 저렴한 비용면에서는 다른 곳과 비교할 수 없는 우위를 점하고 있었다. 그 때부터 나는 매니저의 꿈을 빌려와 내 꿈으로 만들었다. “언제 그 곳으로 꼭 가보겠다.” 정확한 이유는 모르지만 이유는 많았다. 단순한 삶의 모델을 실천해 보는 것, 걸으면서 생각해 보고 싶은 것, 모르는 사람속에 섞이는 것, 다른 나라의 예술세계를 엿보는 것 등등으로 설레었다. 그러다가 서울에 볼일이 있어서 가게 되면서 예비훈련으로 제주 올레길을 걸어보기로 했다. 내 딴에는 준비가 철저하다고 생각했는데 일반 등산가방을 메지 않고 스스로 만든 회색 승려용 걸망을 메었더니 어깨가 견딜 수 없이 아팠고, 어느 날 짐이 무겁다고 봉고 버스편에 숙소로 먼저 짐을 보낸 것이 큰 실수가 됨을 경험했다. 이월의 남동쪽 바닷 바람이얼마나 살을 파고 들었는지. 그러면서 하루 이틀 시간이 지나면서 걷기에 적당이 적응을 해 나가자 제주 바다의 아름다움을 느낄 수 있었다. 오일 째, 약천사 앞 바다에서 걷기를 끝낼 때의 아쉬움은 그 바다 보다 넓었다.
다음 해 모든 준비를 마치고 막 비행기표를 구할 때쯤 유럽에서 발생한 조류 독감이 발목을 잡았다. 몇 달 기다렸다 떠나라는 어느 분의 간곡한 부탁으로 그 해를 넘겼다. 기회는 조류처럼 날아가 버렸다. 다음 해는 신도님의 은혼식에 꼭 참석을 해야되는 상황이었다. 예식장을 빌려놓은 주례가 없는 은혼식에 덕담을 할 대표자로 지목되어 자리를 비울 수가 없었다. 그리고 또 한해가 지나갔다. 시간은 자꾸 흘러가고 여행을 포기해야 되나 하는 우려와 함께 마음속에 바람과 구름이 많이도 지나갔다.
지난 해, 표를 구입해놓고 초조하게 떠날 날을 기다리고 있는데 갑작스레 은사스님의 병환때문에 서울로 코스 변경을 하게 되었다. 아쉬운 마음에 서울에서 북한산 둘레길을 신도님 한 분과 함께 걸었다. 두 시간 정도 걷는 서울 길의 아름다움과 새로움에 기쁨으로 합장을 하였다. 부암동 뒷길로 들어가서 백사 계곡을 지나 신영동으로 나오는 길은 정말 이 곳이 서울인가 싶기도 했다. 종로까지 15분이면 나갈 수 있는 곳에 소담스런 계곡과 깊은 숲이 자리하고 있다니......걷는 여행의 좋은 점을 점점 깊이 체험하게 되었다. 그러나 올해도 포기를 하고 봄은 또 지나갔다.
2.갑작스런 코스 변경
내 사전에 있는 걷기 여행 계절은 늘 봄이었다. 여름은 더워서 포기하고 가을엔 소소한 주변 일들이 있어서 시간을 내지 못하기 때문이었다. 겨울은 각종 필요한 도구가 많아지면서 짐의 무게를 감당할 수가 없어서 아예 생각조차 못하는 계절이었다. 그런데 한국에서 걸려온 전화 한 통.“스님, 나 까미노 산티아고 갈거에요. 같이 갈래요?”하고 물어왔다. “아니, 이 여름에요?”그랬더니 가을에는 자신도 일이 많고 올 여름이 한가할 듯해서 표를 사 두었다고 했다. 그러면서 이미 파리의 호텔이며 기차표를 예약해 두었으니, 기차표만 알아보고 그냥 파리에 오면 될 것 같다고 하였다. 우짜꼬? 여름에 걷는다는 생각을 하는 사람은 도대체 어떤 사람일까? 전화를 한 스님의 말인즉은 작년에 내가 한국에서 까미노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 것을 듣고 마음 속에 그 꿈을 키우고 있었다고 했다. 몇 년을 기다린 나는 여름을 늘 제외시켰는데. 아무튼, 좋다. 혼자면 이리저리 재는데, 이미 동행이 있고 그의 결정에 따른다면 오히려 무작정 밀고갈 추진력도 붙을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비행기표를 구입했다. 그렇다. 하고싶은 일은 저질러고 봐야 더 미루지 못할테니까. 그런데 표를 사고 나니 신도님 한 분이 전화를 하셔서 “스님, 올해 우리 영감님 제사가 2주일 뒤입니다”라고 하신다. 이 말씀을 듣고 다리에 힘이 빠지는 것을 느꼈다. 그러나 결연해야 했다. 그래서 보살님께 정말 죄송하다고 양해를 구하고 함께 가야할 사람이 있어서 여행을 연기할 수가 없으니 올해만 다른 방법을 취해 주십사고 사정을 말씀드렸다. 보살님의 승락을 받고 나는 감사함과 죄송함이 교차했다.
표를 샀으니 다음 순서는 배낭에 물건 넣기다. 3층 작업실에 놓아둔 박스를 가지고 내려와 보니 3년 동안 준비한 것이 거의 다 그대로 담겨있어서 달리 준비할 것은 없어 보였다.
맘에 걸리는 것이 배낭의 허리벨트가 약해서 한 달을 견딜까 싶었다. 그래서 가방을 만드시는 거사님께 상의를 드렸더니 현재 것은 1인치넓이의 벨트이고 3인치 벨트로 바꾸어 달면 되겠다고 전문가다운 솜씨로 진단을 내리고 고쳐 주셨다. 나머지는 저울을 갖다놓고 매일 무게를 다는 일이었다. 손톱깍기에서부터 침낭, 옷들의 무게를 재고 노트에 무게를 기록했다. 결국은 모자라는 듯 가기로 결정하고 손톱깎기도 빼고, 긴 팔 속옷도 빼고, 급기야는 노트의 표지까지 찢어내고 대신에 비닐을 붙였다. <금강경>도 한글 번역 부분을 잘라내고 한문 본만으로 가볍게 만들었다. 이번 여행을 통해서 무게에 아주 민감하게 되었다. 옛 말에 먼길을 가려면 눈썹도 뽑고 가라는 충고가 얼마나 지혜로운지 현장에 나서보면 정말 절실하다. 어느 때는 비닐 봉지 하나를 버리고 몇 그램이 줄었네 마네 하면서 까탈스럽게 굴어야만 생존에 조금이라도 이로웠다. 나중에 나스비날에서 아주 가벼운 과도를 하나 사면서 주인에게 무게를 달아라고 요구하면서 또 까탈스럽게도 굴었다. 고리 달린 것은 25그램, 안 달린 것은 20그램. 이런 칼이 있는 것을 발견한 것도 놀라운 일인데 그 5그램을 줄였다고 역사를 한 장 쓴 것처럼 으시당당해 하였다. 소유할수록 매인다는 것을 학습하는 것은 자기 몸에 지니고 다니면서 하는 것이 최고이다.
이런 준비를 하는 중에도 매일 매일 정보를 들여다 보며 내게 문제가 될 만한 내용은 꼼꼼히 읽었다. 까미노 산티아고의 여러 갈래 길 중에서도 까미노 프랑세스에는 사람이 너무 많이 몰린다는 것이었다. 여유를 가지며 자신을 들여다보기 위한 여행에서까지 경쟁을 하면서 걷고 싶지는 않았다. 그래서 자세히 정보를 훑어내리다가 프랑스 남동쪽의 르퓌 길이 아름답고 한가하며 까미노의 백미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바로 여기다’라고 마음을 먹었는데 한국에 있는 스님과 상의할 시간이 부족했다. 떠나기 3일전. 그래서 파리에서 스님을 만나면 설득을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정 뜻이 다르다면 각자 자기 길을 가든가 아니면 나 혼자 용감히 떠날 참이었다. 3일을 앞두고 정한 마음이라 ‘유투브’를 통해서 프랑스어 기초를 배울려니 한 단어도 기억할 수가 없었다. 10문장 정도를 노트에 베껴 적었다. 이 때 큰 실수를 했음을. 아무 소용없는 열 문장의 인사말이나 숫자보다 하우 마치(How Much?)를 알았어야 하는데. 숫자는 아라비아로 적어서 해결할 수도 있는데...갑작스레 코스 변경을 하지 않았으면 한 두 마디 스패니쉬와 영어로 스페인에서 여행을 마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 선택이 훌륭했음은 르퓌길을 다 걷고 스페인에서 3일동안 걸을 때 알게 되었다. 스페인에서는 새벽 5시부터 플래시를 켜고 걸어야만 자신이
원하는 숙소에 닿을 수 있었다. 상대적으로 숙소의 여유는 많지만 만석일 때 고단한 몸으로 여기 저기 기웃거려야하고 때로는 3-5킬로미터를 더 걸어야 하는 사람들을 많이 보았다. 몇 가지 중에서 한 가지를 선택한다면 다른 것은 포기하거나 뒤로 미루는 것이다. 그러나 그 남겨진 것이 어떤지 알지 못할 때 먼저 내린 선택이 탁월했음을 알지 못하는 경우도 허다하다. 한 사람의 인생의 궤적은 실로 많은 선택의 연속으로 이루어진다. 출가를 하고 미국이민을 하고 등등의 큰 일에서부터 무슨 향의 치약을 쓸건지 등의 작은 선택도 그 사람의 일부를 말하는 것이다. 나의 여행지 선택은 미적안목 충족과 자연에 대한 경외감을 선물로 주었다. 이런 신뢰가 쌓이면서 다른 사람들의 선택도 인정하고, 배려하고, 존중하는 마음이 더 넉넉해지는 것을 알게 되었다.
3. 한 마디 말도 못하고
절에는 나름대로 충실해 보이는 50대의 발랄한 여인네를 지킴이로 세워두고 파리로 향해 나는 여행을 떠났다. 케네디 공항에서 에어프랑스 여직원이 날더러 배낭을 저울에 올려보라하여 그리하니 5킬로그램의 무게가 나왔다. 여직원이 웃으면서 ‘너는 참 가볍게 여행을 하는구나’라는 말을 했다. 그 여직원의 말을 들으며 내가 짐을 잘 꾸려 걷는 여행도 가벼울 것이라는 착각을 하고 칭찬으로 해석을 하였다. 막상 현지에 도착하면 이런 저런 짐이 늘어나는데 짐작했던 것과는 영 다르다.
파리 공항에는 내가 2시간 먼저 도착하기로 되어 있었다. 비행기는 예정보다 30분이나 더 먼저 나를 내려 주었다. 커피 한 잔을 마시고, 양치를 한 뒤에 공항내부를 둘러 보았다. 먹을 것을 챙기지 않은 짐은 5킬로그램으로 가벼워서 지고 걷는 운동을 할 겸 서쪽으로 향해 가다보니 내가 타야할 기차, 떼제베 역사가 있었다. 행선지를 바꾸자면 기차표를 교환해야해서 어떻게 할지 미리 예습할 겸 안내소에 물어보니 안쪽의 줄이 긴 사무소 쪽을 가리킨다. 나는 기차표를 한국에 부탁한 처지라 아무 정보도 없었고 할 일도 없었다. 공항에서 사진을 찍다가, 노트에 글 몇 줄 쓰다가 스님과 만났다. 일단 행선지 변경에 대한 설명을 하고 양해를 구했다. 스님은 그 길에 대한 정보가 전혀 없는 상태라 어떻게하는 것이 좋을지 약간 망설이는 듯 하더니 자신은 영어가 서툴러 나한테 의지해야하니 나 좋은대로 하라고 동의를 하였다. 함께 떼제베 사무실에 가서 줄을 섰다. 20여분 기다리는 동안 앞에 선 키 큰 현지인이 영어로 말을 걸어온다. 어디서 왔느냐? 어디로 가느냐? 왜 왔느냐? 무엇을 할 것인가? 등등. 꼭 철학적이고 종교적인 질문 같았다.“나는 정말 왜 여기에 있는 것인지? 한 마디 말도 못하면서 무엇을 위해 이곳에 왔을까?”를 생각해 보았다. 그래도 나의 행선지를 이야기해주고 ‘생장 피에르드 뽀르’로 갈 표를 ‘르퓌 앙 발레’로 바꾸어야하는데 네가 좀 도와줄래하니까 흔쾌히 도와주겠다고 했다. 나의 불어발음 르퓌 앙 발레를 그는 어떻게 알아들었을까? 그럴때는 눈으로 보는 것이 백 번 되뇌이는 것보다 낫다. 노트를 꺼내서 72곳의 행선지를 보여주며 제일 위의 것을 손가락으로 지적해 주었다. 20여분이나 걸리는 환불후 행선지 변경 작업을 간간히 영어로 통역해 주면서 도와주었다. 정말 감사했다. 첫 단추를 꿰는 작업이 원만한 것을 보니 나머지도 차례로 잘 꿰어질 것 같아서 안심이 되었다. 몇 번이나 감사하다고 말하고, 서점에서 구한 한복모양의 책 갈피를 선물로 주었다. 흐뭇한 표정의 얼굴로 나의 이메일 주소를 적어 달라했다. 물론 이런 만남이 이어지지 못함을 경험으로 알지만 그래도 혹시...미남인데... 그래서 이메일 주소를 적어 주었다. 여행을 하고 난 뒤에 그로부터 받은 메일은 없다. 그래도 그의 이름은 남았다. 키 큰 남자의 이름은 쥴리앙이었다.
4. 끙끙거리며 시작하다
함께 간 스님은 체력이 대단하지는 않은데 특이하게도 시차를 느끼지 못한다고 한다. 배고프면 먹고, 캄캄하면 밤인줄 알고 잠이 든다고 한다. 타고난 큰 복 같다. 나는 아무데서나, 아무 시간에나 잠 드는 사람이 참으로 부럽다. 밤에 잠 못들고 끙끙대고, 낮에는 움직여야하니 내 몸은 피곤할대로 피곤했다. 파리에서 하루를 묵고 난 다음날, 언덕위에 형성된 도시, 아름답고도 오래된 르퓌에 도착했다. 오후 5시가 넘어서 도착한 곳에 유월 마지막 날의 뜨거운 햇살이 강하게 내리쬐고 있었고, 길도 모르면서 무거운 배낭을 지고 시내를 걷는데 어깨를 짓누르는 무게는 천근도 더 되는 것 같았다. 그 때는 이미 스님으로부터 받은 말린 김치, 미역, 김, 튜브 고추장등등과 물 두병이 늘어났다. 눈으로 볼 때 언덕위의 성당은 아름다웠지만 오래된 도시의 미로같은 골목으로 찾아가야 하는 성당길은 완전 등산을 방불케했다. 골목은 중세시대의 사람들이 짙은 어둠속에서 걸어나올 것 같은 분위기였다.
정보가 부족하여 파리에서 르퓌의 호텔을 예약해 달라고 했더니 시내에서 1킬로나 떨어진 곳을 다른 숙소보다 3배나 더 비싸게 예약 해 준 것을 도착하고서야 알았다. 게다가 주인장은 손님이 없으니 더 불친절하고 인색하게 굴어서 3층 숙소복도에는 불도 제대로 들어오지 않았다. 취소를 하면 1인당 17유로의 벌금이 있다고 하니 그것을 제하고 난 뒤에 다시 다른 곳의 숙박비를 내면 거의 같은 가격이 되었다. 찜찜하지만 포기를 하고 하루밤을 견디며 그래도 자연 속에서 걸을 수 있으니 참아주리라 하고 잠을 청하였다.
전날 예습해둔 대로의 길 표시를 따라 가다보니 언덕 도시를 빠져 나가는 것이 다시 다른 언덕으로 올라가게 되어 있었다. 도착지에서 지팡이를 구해 쓰려고 아예 가져 가지를 않았는데 오르막을 걸을 때 지팡이 생각이 간절했다. 언덕을 다 올라 약간의 숲이 나오고 겨우 쓸만한 작대기(지팡이가 아니다)를 하나 구해서 아쉬운대로 사용하였다.
첫날은 가볍게 17킬로만 걷기로 했다. 삼일 정도의 여유를 주면 내 몸도 회복이되니 점점늘려 가자고 제안을 하고 동의를 얻었다. 그런데 이틀째 그만 계획이 수포로 돌아갔다. 나는 둘째날도 20킬로 미만을 걷기로 예정하고 숙박할 마을을 정해두었는데 다른 사람들이 모두 앞으로 나아가니 우리도 그렇게 하자고 여러번 주장을 한다. 하루에 걷는 양과 이정표는 Miam Miam Do Do라는 책자를 이용했다. 책에는 경유하는 마을의 이름과 성당, 카페, 숙소유무, 마을간 거리가 잘 정리되어 있다. 불어로 되어 있지만 그림이 자세히 나와 있어서 외국인들도 그 책에 의지하여 걷기를 시작한다. 하루에 몇 킬로미터를 걷게 되는지는 그 책을 보면 쉽게 알 수 있다. 숙소 그림에 냄비가 그려져 있으면 부엌을 사용할 수 있는 곳이고, 영국기가 그려져 있으면 숙소 주인이 영어 구사가 된다는 뜻이다. 마실 물을 받을 수 있는 곳도 잘 표시가 되어 있다.
체력적으로 여유가 있을까 의심하면서 예정된 숙박지를 지나고 더 나아가니 좁은 강을 지나 길은 언덕이 아닌 본격적인 등산로로 이어졌다. 고도표를 받아 두었는데 가방 깊숙히 들었으니 더운 날씨에 빼서 보기도 귀찮은 생각으로 보지 않고 무작정 올라갔다. 고도가 높다는 것을 미리 알았다고 훌쩍 뛰어올라 갈 능력도 없고, 지나가는 차도 없는 길, 신선처럼 구름이나 타면 뽀송뽀송한 몸으로 가볍게 올라가서 미소를 날릴 수 있겠지만. 올라가면서 더위에 견디지 못하니 바지를 무릎까지 걷어부치고 끈적끈적한 몸으로 걷게 되었다.
목이 마를 때쯤 나타난 수도꼭지, 그리고 부근에서 쉬는 사람들. 우리도 더 나아갈 힘이없어 자리를 깔고 앉아서 간식도 먹고, 등산화를 벗고 땀이찬 양말도 잠시 벗어서 말렸다.그리고 일어서서 다시 걸었는데 가도 가도 끝이 없는 평길을 얼마나 걸었을까? 예쁜 아가씨가 말을 걸어와서 한동안 함께 걸었다. 나중에 동행한 스님이 말하기를 내가 힘들어 하면서도 아가씨와 걸을때는 신이나서 걷더라나. 아가씨 키가 커서 보폭이 넓어 이야기를 하다보니 나도 약간 빨리 걸은 것 같았다. 올라간 산을 다시 내려가는 길에 먼저 떠난 사람들을 만나고, 어느듯 숙소에 도착하니 그날 하루에 무려 26킬로를 걸었다. 그러니 육체적으로 힘들었다. 나는 나 자신의 생각대로 되지 않은 것에 찜찜한데 나를 어려워 하는 상대방. 참으로 묘한 느낌이 스쳐 지나갔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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