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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주강씨 인터넷 전자족보
 
 
 
카페 게시글
지식의 샘터 스크랩 조선시대 兩班의 蓄妾現像과 經濟的부담*
姜明求(통계공-청풍공-忠烈公종회) 추천 0 조회 324 21.03.04 03:29 댓글 2
게시글 본문내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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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 첫댓글 본 논문을 우리 카페에 펌하면서
    서두 머리말속에 첩에 대한 다른 여러가지 통칭중 <후처>도 첩의 일종으로 이야기하고 있어
    <첩>과 <후실 : 후처>는 구분해야 하지 않을까 라는 말로
    감히 논문에도 댓글을 달았네요

    왜냐하면 저도 7대조께서 두신 아들 6명중의 막내가 족보에 이름(諱)도 없는 첩의 후손임을 거짓없이 밝히며,
    이는 역대 발간된 족보들을 비교열람시 처음엔 5형제였다가 6형제로 쉽게 확인되는 것으로

    또한 통계공 선조님의 조선왕조실록을 통하여 확인할 수 있는
    공께서 직접 쓰신 상소문 기록을 보면
    "1407년 의령남씨와 사별후 1413년에 전주최씨를 취하였는데 그 사이 비첩(婢妾 : 여자 종비, 첩 첩)을 두었다"
    라고 첩에 대하여도 솔직하게 구분하여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제가 <조선왕조실록>을 신뢰하고 있다는 이유도 되는 것이죠~!

    우리 진주강씨 족보에서는 의령남씨를 <전실 : 전처>로 그리고 전주최씨를 <후실 : 후처>로 구분하고 있는데,
    전주최씨를 <첩>이라 하지 아니한다는 당당한 <부인>의 의미입니다.

  • 글중 조선 개국공신 조영무의 처 姜씨는 잘못된 오류임
    재령강씨 康씨인데
    혹 제가 잘못 알았나 싶어
    조영무의 묘전 비석까지 직접 확인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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