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방암을 이긴 사람들
“재산은 10분의 1로 줄었지만 행복은 10배로 불어났다.” 유방암을 이겨낸 고경자씨(52)는 암 투병 전후 변화를 이렇게 표현했다. 그는 “암에 걸리기 3년 전쯤 보증을 잘못 서는 바람에 비교적 여유 있던 생활이 하루아침에 물거품이 되었다.
강한 충격과 스트레스를 받아 암에 걸린 것 같다. 얼마나 힘든 시기였는지 ‘내가 죽을 병에 걸릴 것 같다’라는 말을 달고 다닐 정도였다. 힘든 투병의 터널을 빠져나온 지금은 생애 최고의 행복감을 맛보고 있다. 물질은 없으면 조금 불편할 뿐이다”라며 활짝 웃었다.
감기도 걸린 적이 없을 정도로 건강하던 고씨에게 암은 느닷없이 다가왔다. 2005년 초 샤워하다 왼쪽 유방에 멍울이 잡혔다. 그는 “찜찜해서 동네 병원을 찾아 조직검사를 했다. 며칠 만에 전화벨이 울렸을 때 직감했다. 아니나 다를까, 암이라는 말이 수화기를 타고 넘어왔다. 눈앞이 회색으로 변했다”라며 힘겹게 말을 이었다.
고씨는 “큰 병원을 찾아 정밀 검사를 받으라고 했다. 노동영 서울대병원 교수가 TV 방송에서 유방암에 대해 강의하던 장면이 떠올랐다. 그를 찾아 진단을 받았지만, 결과는 달라지지 않았다. 암 선고를 내리는 노교수가 너무 담담했다. 마치 감기 환자를 대하듯 해서 섭섭하기까지 했다. 나중에 깨달았지만 담담함이 환자에게 도움이 된다. 의사가 필요 이상으로 심각하면 환자는 불안해진다”라고 말했다.
고씨는 당시 아들 둘과 남편에게 담담하게 말했다. 암이지만 수술로 치료할 수 있는 병이라고 대수롭지 않은 듯이 표현했다. 사실 그의 암은 5cm로 심각했다. 대부분 유방암은 1~2cm에서 발견된다. 그의 병명은 점액성 유방암으로 유방암 중에서도 드문 암이었다. 다행히 전이는 잘 되지 않는 암이었다.
그해 4월부터 항암치료를 세 차례 받았다. 암 크기를 줄여서 수술을 하는 것이 최선의 치료법이었다. 어느 정도 암 크기가 줄어들자 7월 유방을 제거하는 수술을 받았다. 수술 후 항암과 방사선 치료도 받았다.
고씨는 “암 위치가 심장에 가까워서 치료가 쉽지만은 않았다. 남들은 방사선치료를 28~33번 정도 받는데, 나는 38번이나 받았다. 그래도 5년 동안 잘 살고 있다. 암이 없어졌다”라며 입꼬리를 올렸다. 담당 의사인 노동영 서울대병원 외과 교수는 “암 크기가 컸지만 수술과 항암·방사선 치료가 잘된 경우이다. 고씨는 산속에서 살면서 좋은 공기를 마시면서 살았다. 긍정적인 사고와 희망을 버리지 않았다. 5년이 지난 현재 재발도 없이 건강한 상태이다”라며 고씨의 현재 상태를 진단했다.
지난 5년 동안 고씨의 삶은 1백80˚ 바뀌었다. 소극적이고 깐깐했던 성격이 적극적이고 너그러워졌다. 이런 변화는 산속에서 살면서 서서히 진행되었다.
고씨는 “암 선고를 받고 경기도 의정부 근처에 있는 한 산속 마을로 들어가 살았다. TV 시청이나 휴대전화도 안 되는 곳이다. 산속 생활은 나를 변화시켰다”라며 투병 초기 이야기를 꺼냈다. 처음에는 외부와 단절된 산속에서 절망을 곱씹었다. 항암치료로 머리카락이 뭉텅이로 빠지고 손발톱이 뭉개졌다. 사람 모습이 아니었다고 했다.
그는 “갑자기 가수 춘자와 도올 김용옥 교수가 떠올랐다. 그들은 대머리를 드러내고 당당했다. 그때부터 보기 싫던 거울을 보기 시작했다. 내 모습에 익숙해져야 암을 이길 수 있겠다고 생각했다”라며 암 투병에서 마음가짐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산속 마을에서 서울대병원까지 매일 방사선치료를 받으러 다녔다. 방사선치료를 즐겼다. 고씨는 “매일 소풍 가는 기분으로 병원에 다녔다. 일부러 시장에서 천을 사다가 색상별로 두건을 만들어 썼다. 화장도 하면서 멋을 냈다. 아들이 군대에 갈 때 내가 해준 말이 있다. 피할 수 없으면 즐기라고 했다. 유방암을 되돌릴 수도 없다면 즐기자고 마음을 고쳐먹었다”라고 말했다.
유방을 제거한 후 유방을 새로 만들기도 한다. 여성에게 유방의 상실은 성(性)의 상실을 의미한다. 유방암 환자들이 암보다 우울증으로 시달리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고씨는 유방을 만들지 않았다. 그는 “우울증이 암보다 더 무섭다. 나와 같이 투병하던 한 사람이 끝내 우울증을 이기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다.
그때 나도 한 달 동안 우울증에 빠졌다. 문득 이렇게 해서는 암을 이길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무작정 동사무소를 찾아 아무 일이라도 좋으니 봉사할 기회를 달라고 했다. 독거 노인에게 도시락을 배달하는 일을 하게 해주었다. 힘들게 일하면서 우울증에서 탈출했다”라고 말했다.
기자가 고씨와 인터뷰를 잡는 데는 다소 시간 조율이 필요했다. 고씨의 스케줄에 빈틈이 없어 시간 내기가 쉽지 않았다. 그녀는 유방암 환우회 부회장으로 활동하고 있다. 강의도 다닌다. 하루하루를 알차게 살려고 노력한다.
그녀는 “같은 처지에 있는 환우들에게 유방암에 대해 강의한 지 2년째이다. 나를 필요로 하는 곳이면 달려가서 희망을 전한다. 나는 ‘그럼에도’라는 말을 좋아한다. 유방암이 전화위복이 되었다는 의미이다. 유방암에 걸렸지만 나에게는 감사할 줄 아는 마음이 생겼다. 이런 면에서 신은 공평한 것 같다. 암에 걸리지 않았다면 죽을 때까지 느끼지 못하고 살 뻔했다. 하루를 감사하게 살면 이틀이 되고 한 달이 되고 1년이 된다. 그렇게 5년을 살았다”라고 말했다.
노진섭 기자 <!--[endif]-->
<시사저널_2009.9.21>
암을 이겨낸 비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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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담담했다.
환자를 위해 의사가 담담한 것처럼 식구와 지인을 위해 담담할 필요가 있다. 심각하게 생각하면 끝이 없다.
2. 산속에서 생활했다.
쑥과 질경이 등 산나물을 캐서 먹었다. 맑은 산소를 마시고 뻐꾸기 소리에 잠이 깼다.
3. 거울을 보았다.
자신의 모습에 익숙해져 자신감을 회복해야 한다. 환자가 자신감을 잃으면 남들도 환자로 대한다. 그러면 투병이 힘들 수밖에 없다.
4. 암 치료를 즐겁게 받았다.
병원을 소풍 가듯이 했다. 예쁘게 화장하고 옷매무새도 가다듬었다. 기분이 밝아야 투병이 어렵지 않다.
5. 도전했다.
4박5일 잠도 안 자고 컴퓨터를 배워 다른 사람들과 소통했다. 봉사 활동도 하고 환우회 활동도 한다.
6. 적을 만들지 않았다.
감사하는 마음을 가지면 적이 없다. 다른 사람이 나를 욕해도 나는 그들을 반갑게 대한다. 욕하던 그들도 친구로 변한다. 적개심은 투병의 적(敵)이다.
[출처] 암을 이긴 사람들(6) <시사저널>|작성자 노진섭<!--[endif]-->