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 민요 가운데 아리랑은 가장 상징적인 노래다. 우리나라 사람이 사는 곳이면 어디를 가더라도 아리랑이 없는 곳이 없다. 또 누구나 한 곡쯤 부를 수 있는 노래도 아리랑이다. 옛날부터 아리랑은 식견 높은 양반들이 즐겨 부르던 노래가 아니라 이름조차 알 수 없는 사람들이 지어 부르고 어깨 너머로 배워 부르고 했던 백성들의 노래, 즉 민요(民謠)인 것이다. 아리랑은 어느 시대에 생겨났는지 확실하지 않다. 일부에서 수천 년 전부터 불려지기 시작했다고 하나 추측에 불과할 뿐 문헌에 등장하기 시작 한 것은 조선 후기에 들어서면서 부터다. 아리랑이 처음 기록된 문헌을 살펴보면 조선시대 후기 천주교 신자였던 이승훈의 『만천유고(蔓川遺稿)』에 있는 ‘농부사(農夫詞)’의 한 구절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啞魯聾 啞魯聾 於戱也... (아로롱 아로롱 어희야) 물론 이 말이 지금 불리고 있는 민요 아리랑의 모태라고 단언할 수는 없지만, 지금의 아리랑과 비슷한 후렴구가 조선 후기에도 있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아리랑이 불려지기 시작한 보다 구체적인 시기는 1865년 대원군이 경복궁을 중수할 때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경복궁 중수를 위해 밤낮을 가리지 않고 부역을 하던 사람들이 원납전(願納錢)을 강요받고 부녀자까지 부역에 동원시키라고 하자 불만이 커갔다. 이 모든 것이 얼마나 힘들고 괴로웠던지 “차라리 귀가 먹었으면 좋겠다”고 탄식하며 읊조린 ‘아이롱(我耳聾)’이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면서 아리랑으로 변해 전국적인 민요에 붙어 아리랑으로 확산되어 갔다고 한다. 이때부터 아리랑이 전국적인 민요가 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입으로 전해 내려오던 아리랑을 처음으로 서양식 기보법으로 기록한 것은 1896년 당시 선교사 로 활동하던 미국인 헐버트 (Homer B Hulbert : 1863~1949)박사에 의해서였다. 헐버트는 Korea Repository』 라는 잡지에 ‘ Korea Vocal Music'이란 제목으로 아리랑의 영문 가사를 싣고 있다. 이 악보의 끝에 아리랑이 1883년부터 대중적인 애호를 받게 되었으며, 제각각 다른 내용이지만 후렴은 변하지 않고 쓰인다고 해설과 함께 조선사람들에게 “아리랑은 쌀이다”라는 의미 있는 말을 덧붙여 놓았다. 또 황현(黃玹)이 1900년에 펴낸 매천야록(梅泉野錄)』에는 아리랑이 궁궐 안에서까지 불려졌다는 재미있는 기록이 나온다. “고종은 밤만 되면 전등을 켜 놓고 배우들을 불러 새로운 노래를 부르라고 했다. 이번 곡은 ‘아리랑타령(阿里娘打令)’이라고 했다. 이 타령이란 말은 곡조를 길게 빼는 것을 세속에서 일컫는 말이다. 민영주(閔泳柱)는 배우들을 거느리고 오직 아리랑타령만 전담하고 있으면서 그 우열을 논하여… 금·은으로 상을 주었다. 이 놀이는 오토리 게이스케(大鳥圭介)가 대궐을 침범한 후에 중지되었다.” 일본공사 오토리 게이스케가 대궐을 침범한 때는 갑오개혁 바로 전인 1893년이다. 이 사실에 비춰볼 때 아리랑은 헐버트의 기록에 따라 1883년부터 1894년까지 서울에서 가장 인기 있는 민요였음을 알 수 있다. 이 때부터 아리랑은 서서히 성장하기 시작했고, 19세기말에 이르러서는 고종과 명성황후까지도 아악(雅樂)보다는 진솔한 인간의 감정을 표현하는 아리랑 듣고 즐거워하기에 이르렀다. 그 후 일제 강점기인 1926년 나운규(羅雲奎)가 연출하고 주연을 한 무성영화 ‘아리랑’은 우리 민족의 가슴에 아리랑의 불꽃을 활화산처럼 타오르게 했다. 암담한 농촌의 현실과 젊은이들의 상황을 영화에 도입해 나라를 잃은 민족의 한을 풀어내려고 해서였을까. 아니면 3.1운동의 좌절감에 절어온 삶을 훌훌 털어 버리고 흩어진 마음을 아리랑을 통해 모으고 싶어서였을까. 서울에서는 상연 첫 날부터 사람들이 단성사로 몰려들었다. 문전의 옥답은 다 어디 가고 동냥의 쪽박이 웬 말인가”하는 가사가 문제가 되어 전단 1만여 장이 압수되기도 했지만, 수많은 관객을 끌어들이며 무려 5년 동안이나 전국 곳곳을 순회 상연했다. 주인공인 영진이 낫으로 일본 앞잡이를 죽이고 일경에 이끌려 아리랑고개를 넘는 영화의 마지막 대목에서 사람들은 눈물을 흘리며 다함께 주제곡인 아리랑을 부르며 가슴 깊이 새겼다. 당시 부르던 아리랑은 경기 아리랑을 모태로 해서 나운규가 편곡, 이상숙(李上淑)이 불러 크게 히트한 노래로 지금 우리가 흔히 듣는 아리랑이다. 이 무렵부터 아리랑은 양적·질적인 비약이 일어났고 일제하의 삶을 단순히 피동적으로 살지 않고 끊임없이 저항하는 노래가 되기 시작한 것이다. 아리랑이 유명해지자 ‘문자 보급가’나 ‘종두 선전가’를 아리랑 가락에 실어 보급하기도 했고, 잃어 버린 조국을 찾자는 ‘ 광복군 아리랑’도 나타났다. 일제는 아리랑을 부르는 것을 금했으나 아리랑에는 풍자와 해학이 깃든 가사들이 계속해서 생겨났다. 무성영화 아리랑이 성공을 거두고 난 뒤인 1930년대부터는 왜색 음계를 차용한 아리랑 노래, 강남 아리랑 등 아리랑 아류 가요들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알게 모르게 음계까지도 일본 색의 침윤으로 왜색화되었지만, 전통 민요 아리랑은 그 틈새에서 질기디 질긴 생명력을 이어오고 있었다. 우리 민족의 감정을 담기에 가장 적합한 민요 아리랑은 1960년대 들어서면서부터는 단순한 민요가 아니라 시위가요로 성격이 바뀌기도 했다. 가사 내용은 투쟁에 걸맞지는 않지만 남녀노소 누구나 알고 있다보니 아리랑은 운동권 가사처럼 항쟁가와 쟁의가로 몸 동작과 함께 불려졌다. 한편으로는 이 무렵 소리꾼들이나 노인들에 의해 간간이 맥을 잇다가 흔적조차 없이 사라져간 아리랑도 한 둘이 아니었다. 때늦은 감이 있으나 1980년대 들어서면서 우리 것에 대한 관심이 조금씩 커져가면서 아리랑은 체념과 한의 노래에서 벗어나 민족 행진곡으로 거듭나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서울 올림픽 당시 공식 음악으로 선정되어 선수 입장식 때나 시상식 때 연주된 아리랑은 지구촌 곳곳의 안방에까지 울렸고, 폐막식 때도 아리랑 가락에 손에 손을 잡고 석별의 정을 나누었다. 1989년 북경아시안게임 단일 팀 구성을 위한 남북체육회담에서 남북 단일 팀의 단가로 아리랑을 택하면서 아리랑은 분단을 넘어서 남북이 어우러져 부를 수 있는 노래로 인식되기 시작했다. 이어 91년 4월 일본 지바에서 열린 세계탁구선수권대회에서부터 2001년 시드니 올림픽 대회에 이르기까지 크고 작은 국제 경기에서 남북 단일 팀의 단가로 ‘ 아리랑’을 정해 두터운 체제와 이념의 벽을 훌쩍 뛰어 넘은 노래가 되기도 했다. 이뿐아니라 2002년 한일월드컵 개막전야제에 조용필이 부른 ‘꿈의 아리랑’과 개막식에 울려퍼진 역동적 인 ‘상암 아리랑’은 희망의 노래로 온 세상을 수놓기도 했다.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시간적으로 구한말에서 일제치하를 거쳐 오늘에 이르는 아리랑은 공간적 으로는 우리나라 땅을 비롯해 중국 동북삼성 지역, 러시아 연해주와 사할린, 중앙아시아, 일본, 하와이, 미주, 멕시코, 쿠바 등지에 이르기까지 전 세계에 울려 퍼져 어느 새 한민족을 상징하는 가장 대표적인 민요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