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방[5196] 夕霽登臺 (저녁에 비 개자 대(臺)에 오르다)
夕霽登臺[석제등대]
이황(李滉, 1501~1570)
天末歸雲千萬峯 (천말귀운천만봉)
: 하늘 끝에 가는 구름 천만 개의 봉우리요
碧波靑嶂夕陽紅 (벽파청장석양홍)
: 파란 물결 푸른 산에 석양빛이 붉구나
攜筇急向高臺上 (휴공급향고대상)
: 서둘러 막대 짚고 높은 대에 올라가서
一笑開襟萬里風 (일소개금날리풍)
: 한 번 웃고 옷깃 헤쳐 만리 바람 쏘이네
* 碧 : 푸르다 벽
波 : 물결 파
嶂 : 산봉우리 장
攜 : 이끌다, 나르다 휴
筇 : 대나무, 대지팡이 공
向 : 향할 향
襟 : 옷깃 금
[이종문의 한시 산책] 유학자 이황, 대자연의 감흥에 취해 터뜨린 웃음
가슴으로 부는 바람
이황
천만 개 구름 봉우리 하늘 끝에 돌아가고
푸른 물결 푸른 산에 석양이 붉게 타네
후닥닥 지팡이 짚고 높은 곳에 뛰어올라
한바탕 크게 웃을 때 가슴으로 부는 바람!
천말귀운천만봉(天末歸雲千萬峯)
벽파청장석양홍(碧波靑嶂夕陽紅)
휴공급향고대상(携笻急向高臺上)
일소개금만리풍(一笑開襟萬里風)
*원제: 석제등대(夕霽登臺: 저녁에 날이 개어 대에 오르다).
*대(臺): 누대(樓臺) 또는 전망이 좋은 높은 곳.
퇴계(退溪) 이황(李滉1501~1570)은 세계 유학사에 빛나는 참으로 고매한 학자였지만,
그렇다고 하여 딱딱한 이념의 옷을 입은 무미건조한 분은 아니었다.
무엇보다도 퇴계는 무려 2천200수가 넘는 엄청난 분량의 시를 남겼던,
흥취가 도도한 시인이었다. 이 시가 바로 퇴계의 그와 같은 면모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대표적 사례가 아닐까 싶다.
제목으로 보아 하루 종일 비가 내리다가 저녁 무렵에야 비로소 날이 개었던 모양이다.
문득 고개를 들어보니, 종일토록 내린 비로 티끌 하나 없는 저녁 하늘에,
수천수만의 구름 봉우리들이 저 무한 허공으로 돌아가고 있다. 어디 그뿐인가.
푸른 물결과 푸른 산봉우리들, 그 온통 푸른 것을 배경으로 하여 석양이
붉게 타오르고 있다. 이제 곧 온 동네의 된장과 고추장을 모두 뒤범벅해 처발라 놓은 듯
황홀한 저녁놀이 서천(西天)을 활활 싸지르게 되리라.
이런 상황에서 그냥 앉아 있을 목석 같은 시인이 어디 있으랴.
퇴계는 용수철이 튀어 오르듯 후닥닥 일어나서 지팡이를 짚고
전망이 좋은 높은 곳을 향하여 아주 다급하게 뛰어 올라간다.
이 대목에서 시적 긴장이 모여 있는 가장 핵심적인 시어(詩語)는
‘급(急)’! 이 ‘급할 급’ 자는 그 의미도 물론 다급하지만
그 소리의 뉘앙스도 아주 다급하다. 바로 이 한 글자 속에 잠시 후면
우주 공간에서 영원히 사라져버릴 이 벅찬 풍경을 절대 놓칠 수가 없다는
다급한 마음이 어려 있음은 말할 것도 없다.
그리하여 마침내 퇴계는 푸른 물, 푸른 산과 붉은 저녁노을, 그
온통 푸르고 붉은 것들이 마구 뒤범벅이 된 실로 장엄한 우주 쇼를 보면서
한바탕 큰 웃음을 터뜨린다. 대자연 속에 내재되어 있는 우주의 질서를
논리적으로 이해하고 정감적으로 체득한 사람, 대자연이 주는
그 도저한 감흥에 도취될 줄 아는 사람만이 터뜨릴 수 있는 이른바
‘우주적(宇宙的) 유열(愉悅)’의 웃음이다. 시인이 열락의 통쾌한 웃음을
터뜨리며 천지간을 향해 가슴을 활짝 열어젖힐 때,
저 만 리 밖 천공(天空)에서 거침없이 불어오는 맛좋은 바람!
온몸이 간지러워 몸살이 날 것 같은 이 엄청 맛있는 바람의 맛을
시인을 제외하고 또 누가 알까. 겨드랑이 털이 알려나 몰라.
이종문 시인 한문교육과 교수
퇴계선생문집 제3권 / 시(詩)
退溪先生文集卷之三 / 詩
夕霽登臺
天末歸雲千萬峯。碧波靑嶂夕陽紅。
攜筇急向高臺上。一笑開襟萬里風。
저녁에 비 개자 대(臺)에 오르다
하늘 끝에 가는 구름 천만 개의 봉우리요 / 天末歸雲千萬峯
파란 물결 푸른 산에 석양빛이 붉구나 / 碧波靑嶂夕陽紅
서둘러 막대 짚고 높은 대에 올라가서 / 攜筇急向高臺上
한 번 웃고 옷깃 헤쳐 만리 바람 쏘이누나 / 一笑開襟萬里風
ⓒ 한국고전번역원 | 권오돈 김달진 김용국 김익현 남만성 성낙훈 안병주 양대연 이식 이지형 임창순 하성재 (공역) | 1968
夕霽登臺 (저녁에 비 개자 대(臺)에 오르다)
하늘 끝에 가는 구름 천만 개의 봉우리요 / 天末歸雲千萬峯
파란 물결 푸른 산에 석양빛이 붉구나 / 碧波靑嶂夕陽紅
서둘러 막대 짚고 높은 대에 올라가서 / 攜筇急向高臺上
한 번 웃고 옷깃 헤쳐 만리 바람 쏘이누나 / 一笑開襟萬里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