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만성보살
원만성 보살은 아들 둘 딸 셋을 낳아 기르며 시어머니 모시고 그다지 가정적이지 못한 남편을 보살피며 ㅏ진해의 육대 앞 중심가에 살고 있었다.
육십 여 년 전에 해당하는 1960년 대의 그집 생계는 화물차 운영에 의존하고 있었다. 화물차 운영은 당시로서는 상당한 사업성이 있는 업종이었다 마산 창원 등 인근의 도시를 오가며 화물을 실어나르며 그 운임을 받는 일이었다.
정해진 요금이 확실하게 있는게 아니어서 그때그때 요금을 결정해 받아야하기에 요금이 들숙날숙했다. 때문에 돈 관리를 위해 그 시어머니가 화물차를 타고 매번 같이 다녔었다.
시어머니가 대광사에 열심히 다니고 있어서 자연스레 그이도 절에 자주 나오고 절의 대소사에도 적극 참여하고 다른 신도들을 이끌었다.
한때 대광사가 다른 종단 사람들과 법당을 같이 쓰고 모든 행사를 함께 하는 날들이 있었는데, 그렇게 하게 된 연유는 가산이라는 희대의 난승 때문이었고 그의 꽴에 넘어가 그리하도록 동의한 당시의 주지 봉암당 노사 때문이었다.
다른 종단 사람들과의 동행은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 예불 방식이 다르고 지향점이 서로 다른 사람들과의 합동은 매번 불난이 일어났고 늘 불화가 발생했다.
결국은 서로 갈라서지 않으면 안되게 되었다. 이때 앞장 서서 크게 싸움 일어나지 않는 범위에서 서로의 이견을 조절하여 갈라서게 되었는데 이때 그역활을 잘 해낸 분이 바로 원만성 보살이었다.
88년 경 대광사가 지금의 장복산 아래 태백동 산 84-14(진해대로 303)으로 옮겨지면서 여러 신도들과 힘을 모아 터를 마련하고 법당, 요사, 유치원을 짓게 되는데 이때 화주역할을 확실하게 하여 큰 힘을 발휘했던 분이기도 하다.
원만성이라는 법명에 걸맞게 신중하고 부드러운 말로 사람들을 리드하고 제접했다. 생각해서 말하고, 생각해서 행동하는 신뢰성있는 태도가 타협과 화합을 늘 만들었다.
그 분도 결국 나이는 어쩔 수 없고 쇄하는 몸은 이길 수 없어 몸이 많이 불편해지자 아들이 있는 천안 어딘가로 가셔서 한동안을 지내시다가.지난 봄에 돌아가셨다.
대광사에서 49재를 지내고 대웅전 뒤에 산골을 해 드렸다. 대광사와의 좋은 인연이 부처님 가피로 이어져 국락에 왕생하시고 상품하시길 빌었다.
그렇게 오래 인연 맺으며 함께 큰 빛을 가꾸던 벗들 하나 둘 떠나서 이젠 남은 이가 몇 없다. 나도 머지않아 그들 뒤를 따르리니 정토에서 무생으로 만나 적멸의 낙 함께 누리길 기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