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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 10월 23일-주일1부
(요한복음3:22-30 / 세례요한과 나사렛 예수, 흥함과 쇠함의 교차로)
그 후에 예수께서 제자들과 유대 땅으로 가서 거기 함께 유하시며 세례를 베푸시더라 요한도 살렘 가까운 애논에서 세례를 베푸니 거기 물이 많음이라 그러므로 사람들이 와서 세례를 받더라 요한이 아직 옥에 갇히지 아니하였더라 이에 요한의 제자 중에서 한 유대인과 더불어 정결예식에 대하여 변론이 되었더니 그들이 요한에게 가서 이르되 랍비여 선생님과 함께 요단 강 저편에 있던 이 곧 선생님이 증언하시던 이가 세례를 베풀매 사람이 다 그에게로 가더이다 요한이 대답하여 이르되 만일 하늘에서 주신 바 아니면 사람이 아무 것도 받을 수 없느니라 내가 말한 바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요 그의 앞에 보내심을 받은 자라고 한 것을 증언할 자는 너희니라 신부를 취하는 자는 신랑이나 서서 신랑의 음성을 듣는 친구가 크게 기뻐하나니 나는 이러한 기쁨으로 충만하였노라 그는 흥하여야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 하니라 /
예수님과 세례요한은 요단강에서 처음 만난 관계는 분명히 아니고, 마태복음 3장 15-18절을 보면, 세례요한이 예수님의 요단강 세례를 만류하는 장면을 볼 때 세례요한이 예수님을 깊이 존경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세례요한이 예수님께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당신에게서 세례를 받아야 할 터인데 당신이 내게로 오시나이까’ 이 말은 예수님과 세례요한이 깊은 우정과 신뢰를 주고받는 사이인 걸 알 수 있습니다. 연령대가 같았기 때문에, 다시 말해 라이벌의식이 형성될 수 있는 나이입니다. 예수님과 세례요한은 태생이 너무나 다릅니다. 세례요한은 엘리트 집안 출신이고 예수님은 육체노동자 집안 출신입니다. 세례요한은 아마 집에 성경의 두루마리가 대부분 있었겠지만 예수님은 아마도 이사야 두루마리 정도만 집에 있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학자들은 이사야를 가장 많이 인용하는 것을 볼 때, 예수님 집에 있었던 두루마리가 아마 이사야 두루마리였을 것이다, 이렇게 말합니다. 세례요한은 책을 읽어서 하나님 말씀을 많이 터득했다면 예수님은 들어서 많이 알았습니다. 예수님은 나사렛 회당에서 지방 신학교출신 랍비들의 말을 들으면서 아마도 어린 시절을 보냈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들은 어느 순간에 둘 다 광야에서 둘 다 40일 금식기도를 하면서 또는 빈들에 있으면서, 이스라엘에 나타날 때까지 빈들에 있었던 세례요한과 광야에서 40일 동안 금식 기도하는 장면은 예수님과 세례요한 둘 다 광야와 깊은 관련이 있다는 걸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빈들에서 석청과 메뚜기를 잡아먹으면서 사는 세례요한과 어떤 면에서 친해졌는지 모릅니다. 다만 누가복음은 그것에 대한 답을 합니다. 예수님의 어머니와 엘리사벳은 이종사촌 또는 형제간 또는 친척이었을 것이라고 보는 겁니다. 그러면 엘리사벳과 마리아가 친척이라면 예수님과 세례요한도 친척이 되는 겁니다. 그래서 누가복음의 이 기록은 아마 세례요한과 예수님이 어떻게 해서 알게 됐느냐에 대한 답변이 되겠죠? 친척지간이었다, 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세례요한의 어머니가 마리아에게 왔을 때 벌써 세례요한, 자기 뱃속에 잉태된 아이가 마리아의 뱃속에 잉태된 아이에게 화답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이건 굉장히 시적인 표현인데, 이 둘 사이가 놀라온 화답관계에 있고 동역관계 우정관계가 있을 것을 암시하는 장면입니다. 우리는 엘리사벳과 마리아, 태중의 아이를 밴 이 어머니들의 방문에서 이들이 굉장히 깊은 교우관계를 텄을 것을 예상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볼 때 엘리사벳과 마리아의 친밀한 관계와 세례요한과 예수님이 만류하는 그 장면을 볼 때 둘은 굉장히 깊은 관계가 있었고 존경과 신뢰가 있었으며 그리고 예수님 또한 세례요한에 대해서 보통 많이 아는 게 아닙니다. ‘여자가 낳은 자 중에 요한보다 큰 자가 없도다’ 이런 말을 하면서 세례요한을 지지합니다. 이런 깊은 관계성 속에 있었는데 갈릴리에서 요단강 근처, 애논강 근처 살렘, 예루살렘과 비슷한 곳입니다. 살렘 가까운 근처 애논까지 세례를 받으러 온 겁니다. 100km가 넘는 거리를 왔다고 봐야 합니다. 세례를 받으러 왔는데, 예수님이 한 사람 한 사람씩 물을 튕기는 세례를 받은 것이 아니라 요단강의 허리 쯤 차는 그 물길에 들어갈 수 있는 사람이 50명씩 100명씩 되겠죠? 그 50명 100명이, 엑스 놀로 구 미노이, 자기 죄를 자복하면서 물에 잠기는데 그 일을 예수님이 했다는 겁니다. 예수님이 세례요한 앞에서 물에 침수를 하는데 죄를 자복하면서 침수를 한 겁니다. 모두 다 자기 죄를 자복하면서 침수하는데 주로 예수님이 세리 죄인 창녀 이런 군병들, 다시 말해서 누가 보더라도 인간의 마음이 황폐해져버린 죄인들과 예수님이 죄를 자복했는데, 이렇게 죄를 자복하는 현장에 와서 가장 먼저 죄를 자복하는 첫 대열에 예수님이 속하니까 세례요한이 만류한 겁니다. 차마 이럴 수 없습니다, 당신이 무슨 죄가 있다고 죄를 자복하려고 합니까? 하니까 3장 15절 ‘이제 허락하라 우리가 이와 같이 하여 모든 의를 이루는 것이 합당하니라’ 굉장히 의미심장한 말을 합니다. 그래서 이 관계가 지나갔습니다. 1장 29-35절에 보면, 세례요한이 예수님에 대해서 너무나 기가 막힌 말을 합니다. 굉장히 직관력이 돋보이는 말을 하는데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 이런 말을 합니다. 이건 굉장히 깊은 말입니다. 세상 죄를 지고 가는 어린 양이라는 말은 죄를 고백할 것이 없는 예수님이 세리와 죄인과 창녀와 물에 풍덩 빠져 자기를 침수시키면서 죄를 고백했습니다. 그런데 그 죄 고백을 세례요한은 자기 죄를 고백한다고 보지 않고, 그 시대의 민중들 그 시대의 이스라엘 동포들의 죄를 자기 죄처럼 고백했기 때문에 죄를 지고 간다고 본 겁니다. 아마 예수님은 매우 진지하게 이스라엘 백성들 사이에 퍼져 있는 죄를 자기 죄라고 고백했을 가능성이 굉장히 많습니다. 자기 죄가 아닌데 자기 동포의 중심 구성원들이 짓는 죄를 자기 죄라고 고백하는 것이 예수님입니다. 오늘 날 예수님답다는 말은 무한책임적인 자기추궁정신입니다. 예수님은 누구입니까? 무한책임적인 자기추궁의 화신이 예수님입니다. 오늘 날 우리 대한민국의 저축은행사태 부동산사태 권력남용사태 신재민사태, 이런 많은 사태들이 근본적으로 가진 자의 탐욕, 절제할 수 없는 이 문진장한 탐욕들, 이 탐욕이 내 죄라고 생각하는 것이 예수 그리스도다운 것입니다. 20대 때는 이걸 이해할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20대 때는 이 본문에서 제가 위로를 참 많이 받고 굉장히 이해할 수 있다고 생각했는데 나이가 들수록 시대의 중심구성원들이 짓는 죄를 자기 죄라고 생각하는 것이 얼마나 어렵고 힘든 일인가를 점점 깨달아갑니다. 성령께서 한량없이 예수님 마음에 이런 시대의 중심 구성원들의 죄악을 자기 죄라고 믿고 자기 죄이기 때문에 그걸 자기가 해결해야 한다고 믿게 만드는 확신은 성령의 부단한 감동으로만 가능한 겁니다. 성령 충만한 사람이 죄를 해결하는 겁니다. 그런데 여러분 우리 시대의 이 부단한 멈출 줄 모르는 탐욕, 공동체 전체의 공동체성을 다 파괴해버리는 탐욕, 권력을 쥔 자의 부단한 탐욕들, 이것이 우리 죄라고 고백하는 것이 요단강에서 세례 받는 예수님의 정신입니다. 이것이 세례요한이 예수님에 대해 갖는 견해를 형성하는데 결정적으로 도움이 됐습니다.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 예수님은 죄를 고백했습니다. 이 세상 유대인 동포들의 죄를 자기 죄라고 하는 고백을 한 겁니다. 그걸 지고 간다고 했습니다. 여러분 죄는 짐입니다. 죄는 엄청난 무게가 나가는 짐입니다. 죄는 옮길 수 없단 말이에요. 죄를 옮길 수 없기 때문에 우리 대한민국 중심 구성원들의 가슴속에 와 있는 죄를 옮겨서 누군가가 지고 가려면 그건 굉장히 거룩한 자가 져야 합니다. 그런데 거룩한 자가 질 때는 죄는 질만한데 보통 죄인들은 자기 안에 있는 엄청난 천금같은 무게의 죄를 져다 나를 수가 없는 겁니다. 죄는 절대적순종의 바다에다 갖다 버려야 합니다. 불순종의 죄 덩어리는 언제 어디다 갖다 버려야 해요? 순종이 부글부글 끓고 있는, 태초부터 끓고 있는 순종의 바다에다 불순종을 갖다 버려야 하거든요. 그러니까 순종의 바다에만 불순종의 돌덩어리들 쇳덩어리들이 떨어질 수 있는데, 예수님은 당신 안에 있는 엄청난 독생자의 순종 안에 이스라엘 자손들의 불순종을 짊어져서 불순종이 없어졌습니다. 대신 불순종은 누구에게 치명상을 남겼느냐면 예수님의 몸을 갈가리 찢는, 예수 그리스도를 갈가리 찢고 십자가의 죽음에 이르게 만드는 폭력으로 죄가 나타납니다. 이게 어려운 말입니다. 이스라엘 중심 구성원들의 죄를 예수님이 대신 지려다가, 예수님은 하나님 아버지께 완벽하게 순종을 일삼다가 불순종하는 사람들에게 거역감을 불러일으키고 불순종하는 사람들에게 증오심을 불러일으켜서 죽임을 당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세례요한에게 세례를 받은 사건은 이스라엘 죄를 회개하라고 외치는 것보다 한 단계 더 나아간 겁니다. 여러분, 남의 죄를 회개하라고 외치는 단계가 예언자의 단계라면 그 죄를 자기 몸에 지고 가는 단계를 독생자의 단계라고 말합니다. 예언자들은 좀 있습니다. 그러나 독생성자급 순종의 화신은 너무나 없습니다. 남의 죄를 쉽게 고발하는 것은 쉽게 할 수 있습니다. 한겨레신문이나 경한신문 논설처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죄를 무한책임적인 자기 동일시를 통하여 죄를 지고 가서 순종의 바다에 빠뜨리는 거대한 우주적인 대죄악의 이동역사는 독생성자급 아버지의 품속에 있는 사람들만 할 수 있는 겁니다. 이건 진짜 힘듭니다. 예수님이 세례요한에게 세례를 받고 나서 남의 죄를 지적하고 심판을 통보하는 단계에서 벗어나서 심판을 자기 몸에 스스로 취하면서 죄 문제를 해결하는, 완전히 다른, 너무나 큰 발자국을 띠었습니다. 역사는 세례요한적인 인물의 외침만으로는 안 됩니다. 세례요한적인 외침은 죄를 고발하는 데까지 갑니다만, 세례요한의 외침정도를 독생자급 나사렛 예수님급 죄책전가, 죄책을 자기에게 전가시키는 그 행위로 말미암아 죄는 없어지거든요. 우리가 부산저축은행을 공격할 때, 부산저축은행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는가를 모르죠? 여러분은 돈이 없기 때문에 그 기사자체가 관심이 없을 겁니다. 그래서 여러분이 부산저축은행에 관해서 기도한 걸 한 번도 보지 못했습니다. 주로 포이동에 불난 것 기도하고 현대중공업 크레인 75미터에 올라간 건 기도하지만, 부산저축은행에 누가 저축해서 망했는가를 알아야 하는데, 여러분 돈이 없더라도 돈이 생길 걸 믿고 신문 잘 읽으세요. 보통 우리가 은행에 돈을 맡기면 이자가 7%입니다. 보통 시중은행에 맡기면 3.5-4%주는데, 4% 주면서 굉장히 튕기면서 줍니다. 우리가 빚을 얻을 때는 7.6% 정도 줘야 합니다. 두 배 이상이죠? 부산저축은행이 11%의 이자를 줄 테니까, 그러면 시중은행에 있는 돈이 제2금융권으로 이동하는데 할머니들 돈과 은퇴자금이 거기로 갑니다. 왜? 할머니 은퇴자금이 2억 3억 단위입니다. 이 돈을 모아다가 주는데 11% 이자를 주면 얼마가 나와요? 1억을 맡기면 1천1백만 원이 생깁니다. 할머니가 상자 쌓아서 도저히 1년에 1천 1백만 원, 99만원씩 버는 건데, 이건 불가능하거든요. 부산저축은행이 그걸 약속한 거거든요. 그걸 약속했을 뿐만 아니라 더 했습니다. 후순위채권이라고 하는 은행이 부도났을 때 제일 늦게 채권을 행사하겠다고 하는데 사인을 하면 이자가 16% 정도까지 올라가요. 이 말은 은행이 망했을 때, 통계는 차이가 나요. 제가 설명하려고 해요. 여러분이 여전히 돈에 관심이 없기 때문에 표정을 보니 여러분이 아직도 흥미를 못 가지고 있네요. 남의 이야기다, 이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돈 생기기를 믿고 16% 정도 주겠다고 후순위 채권에 사인하는데 대부분 할머니들이 이걸 또 했습니다. 1억을 맡기면 1천 6백만 원이 생깁니다. 할머니들이 전부 다 사인했습니다. 이 말은 이 은행이 부도가 났을 때 마지막까지 은행에 돈 찾으러 오지 않겠다는 서약입니다. 그게 그래서 다 나갔는데 MB정부하고 노무현 정부하고 전라도 패거리들이 삼자담합을 해서 이 모든 돈을 다 들쳐먹었습니다. 너무나 큰 죄입니다. 너무나 큰 죄인데 할머니들의 피눈물이기 때문에 신문에 나지 않는 겁니다. 저는 우리시대의 죄가 뭐냐? 탐욕과 교만이라고 저는 봅니다. 탐욕과 사탄의 죄입니다. 탐욕과 교만의 죄에 빠진 사람들은 사탄과 철두철미한 공모를 구성한 죄입니다. 이런 죄를 보고도 판단해야 할 재판부가 또 돈을 먹었습니다. 금융감독원이 돈을 먹었고 재정기획부, 모든 국가의 감찰기관이 다 썩어버렸습니다. 그러니까 정의를 호소할 길이 없는 겁니다. 저 또한 정의감은 있지만 교목실장일로 바빠서 내려가지 못합니다. 부산에 가서 다 해서 신문에 글을 쓰고 싶은데 저 또한 생업에 매여서 못 갑니다. 이런 중심죄악이 내 죄라고 생각하는 것은 이런 탐욕과 교만을 내가 하지 않겠다고 다짐하는 겁니다. 내가 유력자 층에 속했고 내가 엘리트가 됐고 내가 출세했지만 이런 탐욕과 교만의 죄랑 영원히 결별했다고 하고, 잘 풀리고 성공한 사람이 탐욕과 교만을 행할 그 자리에 갔을 때, 탐욕과 교만을 행하지 않는 그 자리에 큰 빛이 생기고 그 자리에 엄청난 에너지가 생기고 그 자리에 큰 사랑의 여백이 생깁니다. 다시 말해서 마땅히 기득권을 누릴만한 사람이 누리지 않는 그 여백에 성육신, 자기의 욕망을 억제하고 탐욕과 교만의 죄를 회개하고 무궁한 자기 책임으로 돌리는 곳에 그 자리에 엄청난 봉사 에너지가 나고 진리를 외칠 용기가 나는 거란 말이에요. 예수님이 바로 그렇게 한 거예요. 예수님은 무한한 책임추궁으로 시대의 중심죄악을 자기와 동일시 한 겁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세례를 주기 시작했는데 그런데 요한의 제자들이 수구세력입니다. 보수세력입니다. 하나님의 섭리의 전환을 인정하지 않으려는 요한의 제자들이 이런 말을 합니다. 선생님, 선생님께 세례를 받던 호모 로보스, 초보자가 세례를 더 많이 줍니다, 청출어람입니다, 이런 식으로 말을 합니다. 선생님에게 세례를 받은 사람이 주는 세례운동이 너무 크게 벌어져서 ‘다 그에게로 가더이다’ 중요합니다. 다, 이게 세례요한 제자들의 문제의식입니다. 세례요한의 제자들은 세례요한의 공동체가 위축되는 데 두려움이 있었습니다. 다시 말해서 한 조직과 결사체가 쇠락을 경험하는 겁니다. 이때 보통 조직의 결사체들은 쇠락을 면하기 위하여 비방을 합니다. 예수를 비방할 수 있습니다. 이때 세례요한 제자공동체에서 이런 성명서가 나올 수 있습니다. 예수, 그는 과연 나사렛 목수하면서 찬조금을 받지 않았는가, 그는 과연 목수하면서 세금을 제대로 내었는가, 그는 과연 막달라 마리아 집에 밤에 몇 번 갔는가, 이런 식으로 계속 예수님의 비리를 고발하면서 예수님의 도덕성에 치명상을 입힌 걸 할 수 있습니다. 세례요한이 말합니다. ‘요한이 대답하여 이르되 만일 하늘에서 주신 바 아니면 사람이 아무 것도 받을 수 없느니라’ 이게 요한복음 11장에서 가말리엘이 한 말입니다. 이걸 여러분이 믿으십시오. ‘만일 하늘에서 주신 바 아니면 사람이 아무 것도 받을 수 없느니라’ 처음에는 중립적입니다. 자기가 급격히 위축되고 예수님 팍 뜨니까 처음에는 중립적인 말을 했습니다. 예수님에 대한 칭찬도 없고 자기 신세에 대한 한탄도 없습니다. 예수가 저 많은 열기를 가지고 추종자를 모으는 것은 하나님이 주신 바 아니면 있을 수 없는 것이다, 이 말은 좀 있어봐라, 하나님이 허락하시지 않았다면 열기가 사라질 것이다, 이런 함의가 들어 있는 말인데 이건 보통 유대인 랍비들의 하나님 중심적인 섭리사상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말하는 논평, 객관적이고 중립적인 논평에서 28절에서 한 단계 더 나갑니다. ‘내가 말한 바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요 그의 앞에 보내심을 받은 자라고 한 것을 증언할 자는 너희니라’ 나는 선구자다, 나는 limited, 한계가 있는 역할을 받은 것이다, 그 말을 외쳐할 사람이 바로 너희다, 그래서 요한이라는 사도가 세례요한 제자 출신이거든요. 그래서 요한복음에는 세례요한 이야기가 굉장히 자세하게 나옵니다. ‘그의 앞에 보내심을 받은 자라고 한 것을 증언할 자는 너희니라’ 그래서 세례요한의 제자였던 사도요한은 지금 그걸 증언합니다. 이 말을 했습니다. ‘신부를 취하는 자는 신랑이나 서서 신랑의 음성을 듣는 친구가 크게 기뻐하나니’ 이 말은 신랑 들러리가 신랑이 도착할 때까지 한참 서 있어야 합니다. 유대인 결혼식은 늦은 오후 또는 저녁 때 있습니다. 지금 우리 12시에 하지 않습니다. 결혼식은 항상 조선시대 때 할 때도 오후 5시에 했습니다. 결혼할 때 혼은 은혼, 저녁노을 혼입니다. 한자가 바뀌어서 지금은 이상한 문자가 됐지만, 어쨌든 혼은 어둡다는 뜻입니다. 어두침침할 때 결혼하는 겁니다. 그래서 옛날에 색시 방에서 촛불 키는 장면 보려고 머슴들과 이방들이 막 모여서 난장판 치던 이야기가 밤에만 가능합니다. 밤에 로맨틱한 분위기를 도와주기 위하여 우리 옛날 사람들은 밤에 결혼식을 했습니다. 지금은 손님들 밥 먹는 시간 맞추려고 12시에 하는데 너무 안 좋습니다. 예식장에서 하지 마십시오. 이미 한 사람은 어쩔 수 없고요. 독특하게 하십시오. 아는 사람만 초대해서요. 그게 낫습니다. 장례식도 아는 사람만 이렇게 하세요. 내 죽음에 눈물 나는 사람만 오세요, 이렇게 미리 광고해놓고 죽으세요. 제 장례식에는 한 방울 애도의 눈물이 나는 사람만 오라고 미리 부탁할 겁니다. 아예 명단을 주려고 그래요. 결혼식과 장례식, 눈물이 나지 않는 장례식은 장례예배를 갈 때도 너무 슬퍼요. 눈물이 안 나면 어떻게 해요? 이별의 눈물이 카타르시스틱하게 나오지 않는데 거기서 어떻게 장례식 예배가 돼요? 거기서 어떻게 성스러운 부활신앙이 생기겠느냐고요. 죽음자체가 비참하지 않은데 어떻게 부활이라는 열망이 고조되겠느냐고요. 저는 이 장례식 반대합니다. 관 하나에 397만 원짜리도 반대합니다. 서울대와 연대 세브란스는 순전히 관장사입니다. 너무 악한 인간들입니다. 고대사회에서 신랑과 신부는 이럽니다. 신랑 들러리가 결혼식의 분위기를 고조시키는 겁니다. 원래 들러리는 신랑입장을 극적으로 기대하게 만드는 그야말로 들러리입니다. 그런데 들러리자체도 멋지고 잘생겨야 합니다. 신랑이 가기 전에 들러리가 굉장히 플래시 라이트를 받습니다. 들러리가 신랑처럼 대우받다가, 유대인 결혼식에서 들러리가 굉장히 신랑 비슷해야 합니다. 이 들러리는 자기에게 모였던 모든 하객들의 칭찬과 모든 것들이 신랑이 오는 순간 fade out 무대에 불이 꺼져버려요. 그리고 신랑에게 모든 스포트라이트가 갑니다. 그런 이야기를 지금 합니다. ‘신부를 취하는 자는 신랑이나 서서 신랑의 음성’ 신부라는 것은 이스라엘 백성의 마음, 이스라엘 백성의 휩쓸리는 순결한 마음을 취하는 사람은 예수그리스도이다, 신랑이 왔습니다, ‘신랑의 음성을 듣는 친구’, 세례요한 자신은 크게 기뻐하였다, 요한계시록 19장 20장 어린 양의 혼인잔치를 생각나게 만들어주는 본문이에요. 나는 신랑 들러리의 기쁨으로 가득 찼다, 신랑신부가 결혼할 때 지금처럼 버스 타는 것도 아니고 기차가 있는 것도 아니고 말을 타거나 노새를 탔겠습니다. 신랑이 신부 집을 갈 때 보통 산을 몇 개 넘어갔겠죠? 신랑이 무사히 오는 게 중요했겠죠? 신랑이 무사히 왔어요. 7, 8km를 노새타고 왔습니다. 오니까 기쁨이 충만했겠죠? 나의 기쁨은 들러리의 기쁨이다, 나는 신부되는 이스라엘 백성의 마음을 신랑 되신 독생자 예수에게 연결시켜주고 이어주는 역할에 불과했다, 나는 신랑 즉 결혼식의 본 주인공이 등장할 때 여흥을 돋우고 분위기를 조성하는 그런 들러리였다, 그런 말을 합니다. 그러면서 하는 말이 ‘그는 흥하여야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 이런 말을 했습니다. 이건 성령이 역사하지 않으면 이렇게 착하고 이렇게 순결한 마음을 갖는 것이 힘듭니다. 저는 쇠하여야 하는 게 너무 좋다고 봅니다. 쇠하여주는 것, 이게 정말 선이라고 생각합니다. 얼마 전에 숭실대학교 이상석 교수 고재길 교수라는 은퇴를 했는데, 은퇴식에서 제가 이런 말을 했습니다. 고재길 교수님과 이상석 교수님이 오늘 처음으로 처음으로 이때까지 했던 교수사역보다 더 위대한 사역을 오늘 하는 날입니다, 왜냐하면 후임자가 교수 될 수 있도록 자리를 비워주는 겁니다, 이분들은 눈빛이나 체력이나 모든 면에서 기력이 생생합니다, 그런데 이 분은 은퇴를 순순히 받아들이고 자리를 비워줍니다, 그런데 교수 중에서 은퇴하면서 자리를 안 비워줘서 신임교수가 자리가 없는 사람이 많이 있습니다, 빨리 사무실 비워주라고 한 말입니다. 은퇴하는 이것이야말로 후세대에게 좋은 것입니다. 그런데 인문대의 한 다른 교수는 무슨 짓을 했느냐면 인문대 학장 선거에서 이런 공약을 내세우게 했습니다. 연구 성과가 좋은 교수는 정년을 70세로 연장해 달라고 하는 그런 선거구호를 외쳐서 그 사람이 당선됐습니다. 물론 그 사람은 거짓말을 했기 때문에 분명히 정년연장을 못합니다. 이렇게 악한 사람도 있는 반면에 70세까지 자기가 교수하겠다고 계속 운동하는 사람이 있는 반면, 물론 은퇴하는 사람들 전부 다 속에 다 내가 조금 더 할 수 있는데, 이런 마음이 있을 거예요. 그렇지만 쇠하는 건 나쁜 게 아닙니다. 쇠하는 건 하나님의 섭리에서 다음단계의 주자가 흥하는 걸 도와주기 위해서 내가 빛이 꺼져줘야 하는 겁니다. 모세가 느보산에 올라가서 쇠하였습니다. 모세가 느보산에 올라가 쇠하지 않고 만일 내려와서 여호수아 잘 하고 있나 시비를 걸고 전화하고, 여호수아야 나 지금 배고프다, 춥다, 전화하면 여호수아가 어떻게 되겠습니까? 여호수아가 또 가나안 땅에 들어갔는데, 그런데 모세가 저 가나안 땅 저 바깥에 있고, 이 새로운 지도자가 돼야 하는데 모세가 텔렉스나 메일을 보내서, 여호수아야 느보산에 12시면 춥구나, 내 아들은 잘 있는지 궁금하다, 여호수아야 안 바쁘면 주말에 한 번 들러다오, 진짜 이건 모세답지 못한 거예요. 그런데 하나님은 모세가 느보산에서 기력이 있는 채로 쇠약하는 걸 명령했고 허락했어요. 모세는 죽을 때 기력이 쇠하지 않았습니다. 여러분, 다윗이 얼마나 플레이보이였어요? 다윗이 죽을 때 아비삭, 미스 팔레스타인 출신 미녀 동녀, 옛날에 그렇게 밝혔을 가능성이 있는 그 여인이 다윗의 몸을 덥혀서 생기를 회복시키려고 애를 아무리 썼지만 다윗은 일체 그 여인에게 손을 대지 않았습니다. 왜? 쇠약했기 때문에, 기력이 쇠하는 것, 이게 나쁜 게 아니에요. 부활 안에서 소생의 희망을 가진 사람들은 기력을 감당할 수 있고, 기력의 노쇠를 경험할 수 있는 거거든요. 저는 우리 어머니 장례식을 치루면 바로 다음이 제 장례식 순서입니다. 저는 우리 어머니가 80세가 넘었기 때문에 어디서 장례식을 치룰 것인가가 많은 기도제목입니다. 우리 장모님 장인어른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런데 그다음은 제 순서입니다. 그럼 우리 아이 하은이 소은이가 제 장례식을 치러야 하는데 내가 안 죽고 저 아이들이 70세인데 내가 100세 되어서 저 남한산성에 가서, 하은아 소은아 배고프다, 이렇게 하며 계속 이슈를 제기하면 70세 되어서 손자들 돌보고 입시 때문에 골치아파 죽겠는데 할아버지까지 안 죽고 그러면 어떻게 돼요? 그래서 성경적으로 쇠락함, 노쇠는 나쁜 것이 아니라 섭리사적으로 그다음 구속사의 진전을 위해서 필요한 일이기 때문에 늙는 것도 감수해야 하고 쇠락도 감수해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단풍이 떨어지는 건 그다음 유월에 단풍이 떨어진 그 자리에 실록이 우거져야 하고, 무성한 초목이 우거지기 위해서 단풍이 떨어져야 해요. 그래서 떨어지는 걸 하나님이 위로해주기 위해서 색깔은 좋잖아요. 아예 떨어질 때 찬미를 받으라고 빨간색으로, 그것도 나는 하나님이 색칠한 게 심리학적 통찰이 대단하다고 봐요. 단풍이 질 때 색깔도 안 예쁘면 누가 단풍에 대해서 노래하겠어요? 오늘 주보에 보니 은행나무가 이렇게, 우리 하나님은 쇠락하는 이 가정에도 광채를 주시고 카리스마를 주시고 멋진 단장을 해주십니다. 늙어가는 건 정말 중요합니다. 제가 늙어가야 또 우리 양진일 목사가 히트를 칠 수 있습니다. 제가 죽어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 후배들이 굳게, 그래서 저는 조기은퇴를 할 마음은 있지만 끝까지 너저분하게 그 부근에 있으면서 후배들이 저 때문에 부담을 느끼게끔 해서는 안 된다고 봅니다. 저는 목사님들은 늙으면 다 선교지로 가야 한다고 봅니다. 우리 지금 은퇴한 모든 목사님들은 다 어디로 가야 할까요? 아프리카 방글라데시 느보산에 가셔서 마지막에 열정을 불태우는 게 가장 고상하다고 봅니다. 딴 사람까지는 할 필요 없고요. 세례요한이 쇠하는 걸 이렇게 아름답게 경험하고 세월이 쇠락하는 걸 이렇게 멋지게 표현하는 세례요한 안에 우리 하나님은 무슨 칭찬을 하느냐면, 마태복음 11장 13절 ‘너희가 즐겨 받을진대 오리라 한 엘리야가 곧 이 사람이니라’ ‘여자가 낳은 자 중에 세례 요한보다 큰 이가 일어남이 없도다’ 이런 말을 해주셨습니다. 가장 큰 칭찬을 받았는데, 예수님 앞에서 자기 쇠락을 묵묵히 받아들이는 것, 저는 그런 점에서 우리 늙어가는 사람들이 아름다운 단풍잎을 저 노을의 광채를 드리면서 가듯이 늙어가는 과정, 쇠락해가는 과정, 영향력의 감소, 이 과정도 아름다울 수 있다, 이렇게 보는 겁니다. 여러분 직장에서도 너무 낙심하면 안 됩니다. 그 후배가 오기 전까진 내가 퀸카 킹카였는데, 저 후배가 오자마자 내가 빛을 잃었다면서 증오심을 하고 뭘 만들어서 바늘로 찌르고 그러면 안 됩니다. 그래서 <왕비열전>을 보면 계속 왕비들이 저 여자가 나타나기 전까지만 해도 적어도 3일 동안의 왕의 침실은 내 차지였다고 생각했는데, 왕이 2주 동안 한 번도 안 나타났다, 이건 장희빈 때문이다, 장희빈 얼굴을 딱 해서 헝겊을 찔러댔습니다, 그렇게 하면 안 되고요. 왕비가 안 돼봐서 어떤진 모르겠습니다만, 쇠락함에도 소멸됨에도 무대에서 뒷전에 밀림에도, 각광받지 못함에도 때때로 하나님의 큰 뜻이 있다는 것, 그걸 믿고 우리가 영접할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여러분처럼 한 번도 무대에서 빛을 안 받아본 사람들은 이 본문이 과연 은혜가 될 줄 모르겠네요. 어쨌든 그런 날이 올 줄로 믿고 기도합시다. 아버지 하나님 감사합니다. 세례요한이 하나님 앞에서 민중의 열화 같은 지지를 받다가, 온 이스라엘 민중의 예언자로 지지를 받다가 초신성 같이 예수님이 등장하자 빛을 잃은 블랙홀이 되었습니다. 그래도 그는 흥하지 못하고 쇠하는 것을 기쁨으로 받아들였습니다. 주님 우리가 언젠가 쇠하여야 하고 쇠락해야 하고 우리보다 훨씬 더 구속사적 섭리가 역할이 특별한 사람들 때문에 빛을 잃을 때가옵니다. 주님 우리가 그런 때를 기다려서 요한복음 3장 30절을 늘 기억하게 하여 주소서. 직장에서도 우리 모든 인간관계에서도 세례 요한 같은 적막감이 들 때 외로움이 들 때 아무도 찾아주지 않는 고독함이 밀려올 때, 내가 한 단풍 잎사귀처럼 초라한 나뭇잎사귀처럼 뚝 떨어지는 느낌을 가질 때, 주님 그때도 ‘그는 흥하여야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 라는 고백을 드리는 멋진 신앙인이 되게 도와주소서. 모든 초라하고 쇠락한 형제자매들을 위로해주시고 주님 안에서 부활로 소생으로 약속하여 주소서. 예수님 이름 들어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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