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눅 2:1~20
예수님이 이땅에 오시기 전에 구약선지자들은 그리스도의 오심에 대한 많은 예언을 했다.
그중 대표적인 말씀이 미가와 이사야의 예언이다.
"베들레헴 에브라다야 너는 유다족속중에 작을지라도 이스라엘을 다스릴자가 네게서 내게로 나올것이라 그의 근본은 상고에 태초에니라"(미5:2)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사7:14)
미가와 이사야는 BC700년 전후에 살았던 선지자들로서, 그리스도는 그 예언대로 무려 700년이 지난 후에 베들레헴에서, 또한 처녀의 몸에서 태어나셨다.
그것도 자신의 육적 모친이였던 마리아가 남편 요셉과 함께 살고 있던 나사렛을 떠나 애써 베들레헴으로 찾아가 낳은 것이다.
그들이 예언에 따라 일부러 메시야이신 예수님을 낳으러 간것은 아니지만 모든 여건과 상황이 하나님의 계획과 섭리에 따라 베들레헴에서 태어나도록 되어졌다.
본문에 기록된 말씀으로 마리아가 베들레헴에 가서 출산하게 된 경위와 상황을 살펴보면,
요셉이 임신을 한 마리아와 결혼을 한 후, 그녀가 산달이 되어 갈 무렵에 로마의 황제인 가이사 아구스도는 세금을 정확히 부과하기 위해 온 나라에 인구조사를 명한다.
그래서 사람들은 모두 자기가 태어난 곳에서 호적을 등록해만 했고 다윗의 자손이었던 요셉 또한 가이사의 명을 따라 살던 나사렛을 떠나 다윗의 고향이며 자신이 태어난 베들레헴으로 먼 길을 떠난다.
베들레헴과 나사렛은 145km로 안산에서 대전정도의 거리로 차로 두시간을 쉬지 않고 달려야 할 정도의 먼 거리이다. 그러니 보통사람에게도 힘든 먼 여행길이었으니 더욱이 만삭이 된 임부에겐 이 여정은 결코 쉬운 길이 아니었다.
보통 성화에 보면 마리아가 나귀와 같은 짐승을 타고 요셉이 그 나귀를 이끄는 장면이 많지만, 그 먼거리를 나귀를 끌고 가려면 먹이등, 여러 번거로운 문제가 있어서 부유층이 아닌 한낱 목수였던 요셉은 아무래도 마리아와 함께 도보로 베들레헴을 가지 않았을 까 한다.
그런데 사실 그 당시 로마법에 의하면 굳이 여자는 직접 호적을하러 갈 필요가 없고 세대주가 대신 했어도 됐었다고 한다.
그러나 요셉이 굳이 만삭인 마리아를 끌고 베들레헴으로 끌고 간것은 마리아가 임신한 몸으로 결혼을 했기 때문에 마을에서 지탄의 대상이 되었던 터라 마리아를 보호하기 위해 이 먼 여행길을 같이 떠난 것으로 보인다.
누가복음1장56절에서 마리아는 예수님을 임신한 후, 세례요한을 임신했던 엘리사벳의 집에서 삼개월을 유하고 나사렛으로 갔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렇다면 마리아는 아마 나사렛으로 돌아가자마자 결혼을 하지 않았을 것이므로 요셉과 정식으로 결혼할 때엔 임신 5,6개월 이상의 어느 정도 배가 부른 상태였을 것이다.
그래서 마리아의 성령으로 잉태한 사실을 모르거나 또는 믿지 않는 마을 사람들의 마리아를 향한 정죄와 비난은 심했을 것이며 또한 율법을 따르지 않는 요셉 또한 사람들이 곱게 보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 하필 마리아의 출산일이 가까울때 로마황제는 인구조사를 명한다.
요셉은 갈듬하다가 마리아를 혼자두면 무슨 일이 있을지 몰라 결국 마리아를 데려가기로 결심한다.
율법에 의하면 남편이 아닌 다른 남자와 통간하면 돌로 쳐 죽임을 당해야 했기에 율법에 철두철미한 유대인들이 요셉이 없는 사이, 마리아를 돌로 쳐 해를 입힐수 있기 때문이다.
145km라면 성인 걸음으로 하루 4,50km씩 걷는다면 3,4일쯤 이면 갈수 있는 거리이다.
그래서 요셉은 아마도 마리아의 출산 예정일을 계산해 베들레헴에 다녀 와서 낳아도 충분히 시간이 될것이라 예상했을 것이다.
그러나 임산부의 걸음걸이로 일주일 이상이 족히 걸렸을 것이고, 또한 마리아의 무리한 행보는 분만을 촉진시켜 베들레헴에 도착할 무렵엔 일찍 진통이 시작됐던 것 같다.
그러나 이러한 여러 예기치 않은 이유들과 조건들은 미가서 5장2절의 예언을 이루기 위한 하나님의 계획과 섭리였던 것이다.
여하튼 요셉은 곧 마리아가 출산 할것 같자, 베들레헴의 여관방을 돌아다니며 급히 방을 구하려 하지만 너무 늦게 온 탓인지, 여관들은 이미 호적을 하러 온 사람들과 인구조사를 담당한 로마 정부관리들로 다 차지를 해 빈방이 없는 것이다.
마리아가 아무리 진통으로 괴로워하고 요셉이 쩔쩔매며 부탁을 해도 여관안에 있는 사람들은 그 어느 누구하나 자신이 거하는 방을 양보하지 않는다.
마지막 여관도 마찬가지로 방이 없고 여관주인은 마리아가 곧해산 할 것 같자 어쩔수 없이 여행객들의 나귀나 노새를 매어 둔 마굿간을 내어준다.
그곳에서 마리아는 산파도 없이 예수님을 출산하고 요셉은 아기 예수를 강보에 싼후, 마굿간안의 여물통인 구유에 누인다.
얼마나 쓸쓸하고 초라한 탄생인가.
하지만 밖의 상황은 그렇지 않다. 수많은 천사들이 내려와 신비한 천상의 빛이 어둠을 밝히고 밖의 들에서 양의 문을 지키며 잠을 청하던 목자들이 이에 놀라 깬다.
그들을 감싸고 주위를 두루 비추는 빛은 하나님의 임재를 나타내는 쉐카이나의 영광이었고(출24:16, 왕상8:10, 사6:1~3 행7:25) 그 임재안에서 천사들이 서 있는 것이다.
이러한 영광을 접하는 것은 유대인에겐 흔치 않은 최대의 축복이었지만 목자들은 경험한 바 없는 일이라 놀라 일어나 두려워 떤다. 그러자 천사들은 목자들에게 말한다.
"무서워 말라 보라 내가 온백성에게 미칠 큰기쁨의 좋은 소식을 너희에게 전하노라
오늘날 다윗의 동네에 너희를 위하여 구주가 나셨으니 곧 그리스도 주시라
너희가 강보에 싸여 구유에 누인 아기를 보리니 이것이 너희에게 표적이니라"
그리고 홀연히 수많은 천군들이 천사들 주위로 나타나 하나님을 찬송하며 노래한다.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기뻐하심을 입은 사람중에 평화로다 하더라"
얼마나 신비롭고 아름다운 장관이었을지 상상하기 조차 어렵다.
초라하게 마굿간의 구유에 누우신 예수님의 탄생은 높은 곳, 하나님껜 영광이요. 온 땅의 백성에겐 죄의 속박에서 해방되어 비로서 평화가 임하는 인류 최대의 기쁨이 된 것이다.
천사들이 몇명의 목자들에게 전한 소식은 온인류에게 전한 복음으로 '너희에게'는 '온이스라엘에게' '전 인류에게' 전한 복음이다.
목자들은 천사들이 떠나자, 얼른 그리스도가 나신 마구간을 찾아간다.
베들레헴엔 마구간이 많았으나 구유에 누운 신생아가 있는 마굿간을 찾기는 어렵지 않았을 것이다.
목자들은 구유에 누우신 예수님을 보고는 천사들이 자기들에게 말한것을 요셉과 마리아에게 전하고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다.
이러한 마굿간에서의 예수님의 탄생을 그린 그림은 성탄절 시즌마다 카드등에 그려져 나와 우리에게 너무 익숙한 그림이다.
그때 눈이 내렸다는 기록이 없는데도 마굿간 밖으론 하얀눈이 내려 소복히 쌓여있고 환한 빛과 함께 구유에 누워있는 예수님을 사이에 두고 마리아와 요셉그리고 목자들이 그걸 지켜보는 그림이다.
그러나 사실 많은 이가 알다시피 우리가 예수님 탄생일로 지키는 12월25일은 예수님 탄생일이 아니다.
목자들이 겨울이 되면 양을 안전하고 따뜻한 동굴우리나 집안의 축사에 가두지 밖의 들의 임시 우리에 재우지 않는다. 더욱이 목자들이 한겨울에 들판에서 잠을 자며 양을 지킨다는 것은 이론상 맞지 않는다.
일설엔 예수님탄생일이 4월21, 5월20일, 또는 9월27일이었다는 주장이 있지만 그저 추론들에 불과하고 그 어느 누구도 예수님의 탄생일을 모른다.
그러나 그리스도교가 로마의 국교가 된후, 그래도 명색이 구세주신데 그의 탄생을 기념을 하지 않을 수 없으니, 그 당시 로마인들이 이방신인 태양신을 섬기던 12월25일을 예수님 탄생일로 대체시켜 지키게 된것이다.
그래서 이러한 이유로 기독교내에서도 성탄절을 폐지해야 한다는 말도 있고 여러 이단들의 공격도 있지만, 그래도 지금까지 가짜 성탄일임에도 불구하고 기독교가 수천년간 교회가 예수님의 탄생일로 지켜오면서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께 돌아오는 등, 하나님의 많은 역사들이 일어났다.
또한 영적으로 본다면 이 날은 그리스도가 이방신인 태양신을 이긴 날이 되고, 태양신을 섬기던 사람들이 그리스도를 섬김으로 다시 태어나는 거듭남의 날이기도 한다.
우리가 이방신을 믿다가 그리스도를 믿게 되면 이전것 이방신을 믿던 사람이 아닌 새로운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처럼 이날 또한 마찬가지다.
지금 성탄절이 된 12월 25일에는 이날 태양신을 섬기던 풍속과 사람들은 다 사라져 버리고 없다. 그리고 이날은 온 세상사람들의 축제일이 되었다.
무당이 예수를 믿어 그 안의 부적과 불상을 치우고 십자가를 걸고 가정예배를 드리면 더이상 이전 무당의 집이 아닌 그리스도의 가정이 되는 이치와 같다.
그래서 더이상 이 그리스도의 생일이 원래 태양신의 생일이어서 성탄을 지키면 안된다는 얘기는 지극히 비성경적이고 이단들이 가질만한 사상이다.
원래 예수님의 생일이 아닌 이 성탄절은 우리가 원래 마귀의 종으로 하나님의 자녀가 아니지만 우리가 하나님을 믿어 의에 이르고 하나님의 자녀로 칭함을 받는 '이신칭의'의 교리와 부합되는 영적의미가 담겨 있는 것이다.
그런데 예수님은 자신의 생일을 제자들에게 기록해 놓게 하지 않으신 것은 후대에 이렇게 되실것을 아셔서 그랬을수도 있겠지만, 아마도 자신이 죽기위해 태어난 것이라 사람들로 하여금 자신의 탄생보다 십자가 죽음에 집중케 하기 위해 기록하지 않게 하신 것이라 생각한다.
그러나 비록 날짜는 몰라도 예수님이 세상을 구원키 위해 테어나신 이날은 우리에게 큰 기쁨이 되고, 이 성탄에는 여러가지의 영적인 의미가 담겨 있다.
베들레헴은 히브리어로 '떡집'을 의미한다.
그것은 예수님이 생명의 떡으로 인류를 위해 이땅에 오신 것을 의미한다.
또한 '베들레헴' 떡집은 우리를 상징하기도 한다.
예수님이 짐승같은 우리의 먹이가 되기위해 누추한 마굿간의 구유에 누우신 것은 우리안에 생명의 떡으로 예수님이 들어오심으로 죽어야 할 비천한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로 새로 태어나 영원히 살게 될것을 떡집인 베들레헴에 태어나심으로 표징해 놓으신 것이다.
그리고 마리아가 출산을 하려 할때도 방을 내주지 않아 예수님의 탄생을 보지못한 비정한 투숙객들은 현대에 이르기까지 자신만의 안위와 이익을 위해 함으로 예수님을 만나지 못하는 세상사람들을 의미한다.
이날 예수의 탄생을 처음 목격한 사람들은 편안한 방안의 잠자리에 들지 못하고 밖의 들에서 잠을 자며 양들을 지키던 그시대 가장 비천한 직업인 양치기들이 였다.
학식이 풍부하고 높은 지위에 있는 동방박사들은 보화를 싸들고 예수님의 탄생을 경배하기위해 먼거리를 찾아왔지만 양치기보다 늦게 예수님을 보았고, 또한 경건했던 시므온이나 여선지자 안나도 수십년을 성전에서 지내며 금식과 기도로서 메시아를 대망했지만 그들을 앞질러 처음 만난것은 아무지식도 준비도 없는 천한 목자들이었다.
이처럼 당시의 예수님의 제자들이 된 사람들 또한 오래도록 메시야를 기다린 유대인들이나 또한 지식인이나 세상의 부유층도 아닌 창기나 세리등 비천한 신분의 사람들이었다.
사실 현대에 이르러서도 성경을 연구하는 학자나 어린시절 부터 경건한 생활에 익숙한 모태신앙인보다 세상에서 예수님과 상관없이 살다 하나님의 일방적이고 불가항력적인 은혜로 예수를 만나는 사람들이 많다.
당시의 예수의 제자들 또한 그렇다. 그들 중에 오랜시간 메시야를 기다리며 율법을 연구한 학자나 또는 하나님말씀을 대변한 선지자나 레위 제사장이 하나 없다.
그들은 어찌보면 메시야랑 상관없어 보이는 어부와 세리등, 세상에서 천시받던 사람들이었다.
그것도 스스로 찾아온것이 아니라 처음 예수님의 탄생을 지켜본 목자들처럼 아무런 준비도 기대도 안했는데 예수님이 직접 찾아가시어 부르신 것이다.
기독교는 다른 종교와 달리 사람이 신을 찾아가는 것이 아니라 신이 사람을 찾아오는 종교이다.
여기엔 우리의 공은 전혀 없다. 그러나 부르심에 대한 순종은 있어야 한다.
그래서 목자들도 천사들의 말에 지체없이 얼른 일어나 그리스도가 나신 마굿간을 찾아 구유에 누이신 성탄 예수님을 보게 된 것이다.
하나님은 이처럼 세상에서 멸시받고 외면받는 천한 사람들을 직접 찾아가시어 부르시고 은혜내려주시고 구원해 주신다.
그래서 바울은 그리스도의 부르신 제자들을 보며 이와 같이 말했다.
"형제들아, 너희의 부르심을 보라 육체를 따라 지혜있는자가 많지 아니하며 능한자가 많지 아니하여 문벌좋은 자가 많지 아니하는도다" (고전1:26)
얼마나 위안이 되고 소망이 되는 말씀인가.
세상의 권력자도 어느정도 배경이 있어야 하고 재력과 지위가 있어야 만나고 자잘한 권력의 혜택을 누리지만, 온 우주의 왕되시는 우리 예수님은 세상에서 아무것도 내세울것 없는 사람들을 직접찾아 만나주시고 세상 어느 권력과 비교할수 없는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권세를 주시는 것이다.
우리 모두, 이 믿을 수 없이 기쁜 성탄의 날에 이러한 하나님의 큰 은혜에 감사하며 주안에서 행복과 평강을 누리길 축원한다.
주님의 산ㅡ나현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