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쓰는 이의 본명:
여행 이야기가 가득한 동창 홈피가 건강한 벗들을 증명함 같아 자랑스럽군요.
제 네 번째 이야기도 여행 이야기입니다.
지난 18일부터 21일까지 학생들을 따라 제주도로 수학여행을 다녀왔습니다.
1965년 석가탄신일 전후에 처음 제주도를 갔었지요.
한라산 정상에 올라 산철쭉 불꽃너울에 갇혀서 숨이 멎을 뻔했지요. 손바닥만한 침엽수들(죽은듯이 살아있던)을 밟고, 오랜 가뭄때문에 분화구 저 아래에 겨우 조금 고여있던 백록담 물에 손을 씻으러 내려갔었지요. 길도 없는 비탈길을 엉덩이미끄럼을 타면서요. 도룡뇽알과 새끼들이 바글바글(내 눈엔 올챙이와 똑같아 보이더라구요)대는 물이었지만, 꼭 손을 씻어야 한다는 말을 듣고 용기를 낸 것이었지요. 참으로 위험한 짓이었어요, 지금 생각하면.
내려오는 길은 또 얼마나 환상적이었던지. 새연두잎새들이 하늘을 가린 숲속을 걸어내려오는데, 앞서 가는 친구가 스친 기척만으로도 하얀 꽃잎들이 눈앞이 안 보이도록 쏟아져 내리는 겁니다. 꽃잎눈보라! 그 아름답던 영상을 지금껏 울궈먹고 살지요. 그때 나는 영화 속 주인공처럼 아름답던 청춘이었습니다, 꿈도 많던, 웃음도 많던, 객기도 많던, 무엇이건 될 수 있을 듯하던.
그 후 1997년 여름에 다시 제주를 찾았습니다.
제주도 토박이 여선생의 안내에 따라 여름 제주의 정수만 쏙쏙 뽑아서 다 보고 왔습니다. 차 한 대를 빌려서 젊은 남녀 선생이 번갈아 운전을 하고, 편안히, 최소의 비용으로, 알짜배기를 다 보고 왔지요. 아이구, 그 징한 모기들만 아니었으면 좀 좋았을까요. 그 후 드라마나 영화에서 아름다운 제주 풍광이 나오면 거의 다 우리가 본 곳이더라구요.
그러다가 이번에 가을 제주를 보게 된 것입니다.
학생들을 인솔하고 간 길이라 신경은 좀 쓰였지만, 고생이야 담임들이 많이 했지요.
지금은 한라산 밑둥부터 단풍불이 타 올라오고 있습디다.
또 하나 인상적인 것은 까만 곰보돌로 쌓은 담들이었습니다.
내 집, 내 고추밭, 내 차고, 내 두엄터, 심지어 내 조상의 묘까지도 돌담으로 지경 표시를 했는데, 그 색깔이 가을들어 유난히 선명하더라구요.
밭을 일구며 나온 돌들을 치우다보니 생긴 것이겠지만, 내 눈엔 생물도 무생물도 모두 식구처럼 생각하는 제주 사람들 자연관이 배어나온 것 아닌가 싶었습니다.
그러나 제가 본 가을 제주의 압권은 억새였습니다.
꽃같지 않으나 더 꽃다운 꽃이요, 유채색보다 더 고운 흰 빛 억새꽃!
눈 닿는 곳마다 선녀의 옷자락처럼 일렁이며 햇볕과 희롱하던 억새꽃 흰 바다!
아마도 앞으로 한동안은 그 정경 그려보는 것만으로도 행복할 겁니다.
한림에서 어리목 등산로 입구까지 차로 올라가면서, 산굼부리 분화구에서, 그 황홀하던 억새밭이 지금도 눈에 선합니다.
거기서 졸시하나 건져 왔습니다.
억새꽃
첫 햇살에 낯 씻고
첫 바람에 이슬 털고
속살인채
빛나는 춤추는
천상으로의 인도자
비탈길 따라
너를 따라
오르고
오르면,
내 영혼은
가벼이
가벼이
하늘선을 넘어
날아오르리.
거기 구름 위에서
저 아래 수해(樹海) 한가운데
사랑하고 사랑받은
내 육신
허물처럼 남겨져
그 또한
눈물처럼 아름다우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