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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회자 모임] 한 알의 밀(요12:24) 2019. 12. 20. 이현래 목사
(요한복음 12:20~24)
“20 명절에 예배하러 올라온 사람 중에 헬라인 몇이 있는데 21 그들이 갈릴리 벳새다 사람 빌립에게 가서 청하여 이르되 선생이여 우리가 예수를 뵈옵고자 하나이다 하니 22 빌립이 안드레에게 가서 말하고 안드레와 빌립이 예수께 가서 여쭈니 23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인자가 영광을 얻을 때가 왔도다 24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
한 알의 밀에 대해서 생각해 보자.
유명한 구절이다. 그 배경이 희랍인들을 상대로 하는 배경이다. 뵙자고 왔는데
이 사람들에게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요12:14)고 말하고 있다. 희랍인들이라는 사람들의 속성은 무엇이든지 이론화하고 무엇이든지 객관화한다.
그것이 희랍인들의 속성이다.
이 사람들에게 하는 말이다.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 한 마디로 하면 이론이 아니라는 말이 아닌가? 밀이 죽어서 열매를 맺는 것이지 이것을 이론화하거나 객관화할 수 없다는 말이 된다.
오늘날 우리도 이런 상황에 봉착한다.
다 객관적으로 알려고 생각한다. 예수님이 이야기 하면 그것도 객관화시키려고 하고, 심지어 그 사람들은 하나님도 객관화하는 사람들이다. 로고스라고 하는 비인격적인 어떤 절대적 존재를 가정해 놓고 다른 신은 없는 것이 희랍인들이다. 그런데 그것을 요한이 말씀이 육신이 되었다고 이렇게 끌고 들어온 것이다. 비인격적인 어떤 절대적인 것을 인격적인 세계로 끌고 들어 온 셈이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실 때도 바로 그런 사람들이 왔는데, 그 사람들을 보고 하는 말은 생명에 관한 말이다. 씨를 심어서 나서 열매를 맺는다는 이야기다.
이것은 객관적으로 들어서는 안 될 말이고 붙여서도 안 될 말이다. 전혀 해당이 안 되는 말이다. 기독교가 유대 세계에서 시작해서 희랍세계로 들어온 셈이다. 우리는 지금 그 희랍세계로 들어온 그 기독교 아래서 시작된 사람들이니까 희랍 세계에 들어온 예수라고 해야 될 것이다. 그런 셈이나 마찬가지다. 희랍이 넓은 세계이고 원체 큰 세계니까 자연히 희랍인들을 구원하려면 희랍인들에게 통하는 어떤 것이 있어야 되지 않겠는가? 그래서 로고스를 꺼내 들었다. 그리고 희랍 속에서 희랍을 그리스도화 시키기 위해서, 기독교화 시키기 위해서 사도들은 노력한 것 같다.
그런데 희랍을 바꾼 것이 아니고, 반대로 기독교는 희랍화되어 버리고 말았다. 희랍을 예수 그리스도로 채우려고 했지만 그것은 희랍을 그리스도로 바꾼 것이 아니고, 오히려 그리스도를 희랍으로 바꾸어 버렸다. 이론이라는 것이 그렇게 무섭고, 문화라는 것이 그렇게 무서운 것이다. 우리나라에서 70년대에 그런 운동이 있었다. 굳이 예배당에서 예배를 드릴 필요가 뭐가 있는가? 현장에 나가서 예배를 드리자는 운동이 그때 벌어졌다. 토착화, 세속화, 이런 말들이 그때 한참 나왔다. 요즘 사람들이 다 바닷가로 나가는데 못 나가게 하고 예배당으로 오라고 하면 오겠는가? 그러므로 기타를 들고 바닷가로 가자고 하여 비키니 차림으로 복음을 전하러 갔던 때가 있었다. 등산 가면 산으로 따라가고 했다. 심지어는 술집으로 다방으로, 더 심하게는 창녀촌으로 이렇게 들어간 때가 있었다. 복음은 가서 전해야지 예배당으로 오라고 하면 되는가? 이렇게 해서 그렇게 했던 때가 있었다. 그런데 그것이 다 실패하고 말았다. 하나도 성공한 것이 없다. 이 세계는 어디를 들어가서 그것을 바꿔내는 그런 것이 못 되고, 거기서 무엇을 끄집어내지 않으면 안 되는 그런 것이다. 그런 문제를 가지고 있다. 불교 같은 경우는 어느 문화권에 들어가든지 들어가면 그 문화권에 동화가 되고 또 거기서 뭔가를 배워서 더하고 더한다. 힌두교에서 석가모니가 나와서 불교가 되었다. 그 불교가 다시 중국으로 넘어가서 도교와 만나니까 참선을 하는 선불교가 되었다. 그것이 우리나라에 들어와서 조계종이 된 것이다. 일본에 들어가서는 신도와 합해져서 일본의 독특한 불교가 만들어진다. 기독교는 어디를 가든지 기독교 문화를 그대로 심으려고 애를 썼다. 이것 때문에 많은 핍박도 받고 고난도 받았다. 한국에 들어온 천주교는 100년 동안 엄청난 박해를 받았다. 알고 보면 문화적 싸움이었다. 그런데 그때는 그것을 문화적 싸움이라고 생각하지 못했고, 종교적 싸움이라고 생각했다. 대구에도 그런 유적지가 있다. 팔공산에 가면 그때 당시 사람들이 피란해서 숨어 살던 곳이 있고, 순교지도 있다. 서울에 가면 절두산이라고 한강 변에 지금 기념 성당이 서 있는 곳이 있다. 거기는 기독교인들을 데려다가 목을 자르던 곳이었다. 100년 동안 천주교가 받은 박해는 엄청나게 컸다. 그것은 제사문제 때문에 그랬다. 한국 사람들은 조상밖에 없는데 조상을 무시한다고 하니까 이런 놈들은 잡아 죽여야 된다가 되었던 것이다. 기독교를 가지고 가서 그대로 만들려고 하다가 그런 결과를 가져오게 되었다. 예수 때문이라고 하기는 어렵다. 물론 순교자들은 자기가 예수 때문에 죽는다고 생각하고 죽었으니까 순교가 되었지만 근본적인 문제는 문화적 싸움이었다. 어느 문화에 가든지 기독교는 그 문화와 충돌하느라 반드시 전쟁을 불사하게 된다. 사도들은 희랍 세계에 들어가서 희랍인들을 구원하려고 많은 노력을 했다. 성경에서 읽어 본 대로 역력하게 그런 부분이 나온다. 그런데 사도들 시대를 지나가면서 점점 희랍화되어서 객관화되고 그러다 보니까 교리화되고 제도화된 것이 천주교가 되고 오늘날 개신교가 되었다. 어떻든지 우리가 거기서 나왔기 때문에 무시할 수는 없지만 정신을 차리고 우리의 뿌리를 찾아야 되지 않겠는가? 예수님께 희랍인들이 왔다고 하니까 그들을 상대로 하는 말이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요12:14)고 말씀하셨다. 지금 와서 우리가 생각해 볼 때, 희랍에 들어가서는 희랍 문화와 싸워야 되고, 동양에 와서는 동양 문화와 싸워야 되었다. 그러면서 양적으로는 무지하게 팽창했다. 그러나 이것보다 더 근본적인 문제는 사탄과의 전쟁이다. 예수님의 십자가에서 싸움은 희랍과의 싸움도 아니고, 조상과의 싸움도 아니다. 이것은 사탄과의 전쟁이다. 그리고 구속은 그런 세계에서 우리를 구속한 게 아니고 사탄의 손으로부터 우리를 건져내는 것이다. 예수의 사역은 그것이다. 그리고 서양인을 구원하자는 것도 아니고, 유태인을 구원하는 것도 아니다. 사탄에게 매여 있는 인류를 구원하는 이것이 예수의 사명이다. 예수라는 이름 자체가 ‘저희 백성을 죄에서 구원할 자’다. 죄에서 구속한다는 말은 구속부터 시작해야 하는 것이다. 우리가 지금 말하고 있는 십자가에서 예수님이 죽었다. 내려오라고 조롱해도 내려오지 못하고 죽었다. 이 말을 하고 있는 이유는 이것이 희랍인을 상대로 하는 것도 아니고, 동양인을 상대로 하는 것도 아니다. 이것은 사탄과의 전쟁이다. 왜냐하면 사탄이 사람을 속일 때 희랍인으로 온 것도 아니고, 동양인으로서 온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네가 이것을 먹으면 하나님 같이 될 것이라는 이 말은 신이 될 것이라는 말이다. 신이 된다는 말은 여러 가지가 포함되지만 아주 강한 자가 될 것이라는 뜻이다. 너는 지금 무지하게 제한받고 있는 연약한 존재이지만 이것을 먹으면 너는 강한 자가 될 것이라는 말이다. 왜냐하면 그 뒤에 아담의 역사를 보면 그것을 알 수 있다. 아담이 낳은 아들이 둘이다. 하나는 가인이고 하나는 아벨인데, 가인이 아벨을 쳐 죽였다. 하나님을 만나러 와서 일어난 싸움이었다. 강자는 이겼다. 그리고 약자는 울부짖고 있다. 요한계시록에 가보면 아벨이 제단 아래서 신원하고 있다고 했다. 자기는 억울하다는 것이다. 약하기 때문에 죽었다. 이것을 호소하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 왜 나를 약하게 만들었습니까? 그 가인은 4장으로 넘어가면 다시 셋으로 이어지는 족보가 오는데, 거기에 나오는 사람들은 모두 장수족들이다. 인간의 소망은 장수하는 것이다. 800년 700년, 심지어는 900년을 산 사람들이 쭉 10대에 걸쳐서 나오게 된다. 10대를 걸쳤다는 말은 완전하다는 뜻이다. 그 시대를 거쳐서 뭐가 되었는가? 그 다음에 네피림이 된다. 장부요, 용사요, 유명한 자가 되었더라. 선악과를 먹은 결과가 그렇게 나온 것이다. 점점 커지고 강해진다. 인류의 역사를 보면 바로 그것이다. 커지고 강해졌다. 지금 그 경쟁이다. 미국이 홀로 독주하다가 중국이 따라 붙었다. 그래서 미국의 골칫거리가 되었다. 다른 나라는 그냥 한 주먹 감이어서 무엇이든지 테이블 위에 올려놓으면 안 되는 것이 없다. 하라고 하면 그대로 하는 것이다. 우리는 무슨 힘이 있는가? 중국은 힘이 있으니까 그렇지만 거대한 중국도 지금 쩔쩔매고 있는데, 우리가 거기서 빗나갔다가는 정말 볼 장 다 본다. 그렇게 미국이 완전히 독주하는 세계다. 그런데 중국이 붙어서 싸움이 되고 있다. 세상은 어떻게 하면 강해지느냐다. 누가 더 강해지느냐다. G7에서 일본이 두 번째였다. 중국 때문에 세 번째로 밀려났다. 15억 인구를 어떻게 당해내는가? 아무리 일본이 돈이 많아도 불가능하다. 앞으로는 인도가 또 13억 인구를 가지고 뒤쫓아 온다. 그러면 일본은 4번으로 물러난다. 우리는 10위권에 올라갈까 말까하다가 계속 후진해야 된다. 강국이 나오니까 그렇다. 이것이 세상이다. 성경에 있는 말은 옛날의 신화도 아니고, 지금 현재에 있는 이야기다. 가인에서 장수 족에서 네피림 족으로 이어지고 있다. 그래서 하나님이 사람 지으신 것을 후회했다고 한다. 홍수로 밀어버렸는데 그 후로 인간이 어디서 나왔는지 모르겠지만 나와서 어디로 가는가? 시날 평지에 모여서 단체적으로 나온다. 흩어짐을 면하자. 왜 흩어짐을 면하자고 하는가? 강해지려고 ‘흩어짐을 면하자.’고 하는 것이다. 혼자 떨어지면 약하니까 ‘강하자.’ 그 다음에 ‘성을 쌓자.’ 이것 역시 방어를 하기 위해서 적도 없는 데 자기들이 성을 쌓는 것이다. 그리고 ‘망대를 높이 세워서 하늘에 이르게 하자. 그리고 우리 이름을 세상에 빛내자.’ 이것이 딱 세상이다. 이것을 보고 세상이라고 한다. 세상이라는 것이 다른 것이 아니고, 먹고 담배피고 이게 세상이 아니고 바벨로 가는 것이 바로 세상이다. 선악과를 먹은 결과는 선해졌느냐 악해졌느냐의 문제가 아니고 강하냐 약하냐? 이렇게 되고 말았다. 거기서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불러내신 것이다. 이런 강약의 세계에서 한 사람을 불러내서 하나님께서는 다른 길을 만들어 놓았다. 다른 길을 열어 놓았다. 그 길이 예수께로 오는 길이다. 우리 조상,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길을 보면 사람으로부터 온 길이 아니고, 전적으로 하나님으로부터 온 길이다. 다른 길이다. 사람이 만들어 낸 길은 다 바벨로 가는 길이다. 아브라함도 그냥 두었으면 바벨로 갈 사람이다. 이삭도 그렇고 야곱도 그렇다. 아브라함은 자기 힘을 써서 모든 것을 했지만 결국은 이스마엘 밖에 낳지 못했다. 100살까지 기다려서 자기는 끝이 났다. 더 이상 자식을 낳을 수가 없게 되었다. 그런데 그때 이삭을 주었다. 이삭을 아브라함의 힘으로 낳았다고 누가 보겠는가? 자기 스스로도 아니라고 생각했다. 아브라함이 스스로 생각해도 ‘이게 내 아들인가?’ 하지 않았겠는가? 재미있는 것이 있다. 자기가 낳은 이스마엘을 내보내라고 할 때는 고민을 많이 한 흔적이 성경에 기록되어 있다. 밤새 고민했다. 하룻밤만 고민했겠는가? 굉장히 고민했을 것이다. 그런데 이삭을 데리고 모리야 산으로 오라고 할 때는 아무 고민을 하지 않았다. 새벽에 일찍 일어났다고 했다. 고민을 했으면 멈칫거리다가 일어나지 새벽에 일어나겠는가? 생각해 보라. 사형장에 가는 사람에게는 한 발짝 떼는 것이 천근만근을 떼는 것보다 무겁다고 한다. 교도관들이 붙들고 가는데 어떻게 하면 한 발자국이라도 덜 뗄 가를 생각한다고 한다. 그런데 아브라함은 새벽에 일찍 일어나서 사환에게 나무를 지우고 칼을 들고 이삭을 데리고 모리아 산으로 가고 있다. 다 가서 이삭이 물었다. ‘나무도 있고 칼도 있고 다 있는데 제물은 어디에 있습니까?’ 하니까 아브라함이 하는 말이 ‘여호와께서 준비하실 것이다.’라고 말하고 갔다. 눈물 한 방울도 안 흘리고 말이다. 왜 그랬는가? 자기가 생각할 때 자기 아들이 아니라는 말이다. 이것은 특이한 길이다. 다른 길이다. 더군다나 거기서 다시 이삭을 받아왔다. 낳기만 해도 그럴 것인데 거기 가서 죽을 것인데 다시 받아왔다. 이삭은 아브라함의 아들이라고 하기보다 하늘이 준 다른 아들이다. 그런 길이다. 이스라엘의 참 조상은 이삭이다. 이삭으로부터 난 자라야 네 후사가 될 것이다. 아브라함부터라고 하겠지만 진짜 조상은 이삭이다. 아랍 사람을 만나서 물어 보았다. 이삭을 아느냐고 물어 보니까 모른다고 했다. 아브라함을 아느냐고 물으니까 아브라함은 안다고 했다. 그 사람들은 아브라함-이스마엘인 것이다. 우리는 아브라함-이삭이다. 아브라함은 진짜 이스라엘의 조상이 아니다. 이스라엘의 조상을 낳은 사람이다. 그렇게 모를지 몰랐다. 이삭도 모르고 야곱도 모르고 아무도 모른다. 자기들 역사에 없는 사람이다. 우리가 이스마엘 이후를 모르는 것처럼 똑 같다. 참 신기했다. 이란 사람이 교회에 와 있었다. 지금은 부산에 있는데, 그렇게 대답했다. 우리 교회를 좀 다녔는데 자기는 알라와 여호와가 같다고 한다. 아무래도 상관이 없다고 했다. 교회 오는 것이 문제가 되지 않느냐고 하니까 문제가 되지 않는다고 했다. 알라나 여호와나 매 한가지라는 것이다. 우리는 그 사람들이 완전히 다른 사람으로 보이는데, 그렇게 되어 있다. 우리는 지금 이삭으로 갈 것인가? 이스마엘로 갈 것이냐? 그것도 아니다. 천주교로 갈 것이냐? 개신교로 갈 것이냐? 그것도 아니다. 우리는 다시 동산으로 돌아가야 된다. 영원한 나라도 다시 돌아가야 된다. 우리가 나온 대로 돌아가야 되는 데 어디서 떨어졌는지 모르기 때문에 갈 데가 없다. 원죄에 대해서 알아보니까 아무도 어디서 떨어졌다는 것이 없다. 천주교에서 검색을 해보니까 거룩함과 의로움을 상실했다고 한다. 그것이 원죄라고 한다. 그러면 왜 거룩함과 의로움을 상실했겠는가? 무슨 이유가 있어서 그랬을 것인데 거기에 대한 답이 없다. 개신교에서는 먹지 말라 한 것을 먹었기 때문에 죄라고 한다. 그러면 먹지마라고 하지 않았으면 죄가 없었을 것이다. 그렇게 해놓고 자꾸 죄를 이야기 한다. 그러면 결국 율법에 걸리는 것 밖에는 방법이 없다. 바울이 말한 대로 율법이 있기 전에는 죄가 있어도 죄로 여기지 않았다고 한다. 율법 때문에 죄가 죄로 여겨졌다는 것이다. 그래서 유태인들은 죄란 말을 들으면 당연히 율법을 생각하게 된다. 오늘날 기독교인들도 마찬가지다. 죄, 죄 하지만 그 죄라는 말을 들으면 딱 생각나는 것이 시어머니를 잘 못 모신 것, 며느리에게 잘 못한 것, 이런 것이 죄로 떠오른다. 물론 도적질 한 것이나 사람을 죽인 것은 당연히 죄로 생각할 것이다. 그것도 부흥사들이 막 졸라대면 젖 먹을 때 자기 어머니 젖꼭지 깨 물은 것 까지 회개하라는데 참 어려웠다. 참석해 보니까 정말 어렵다. 아무리 생각해도 모르겠는데 죄를 끄집어내라는데 어떻게 끄집어내겠는가? 근원을 모르니까 이런 문제가 생기는 것이다. 인간은 근원을 모르면 속는다. 근본을 모르기 때문에 속은 것이다. 희랍 문화에 속은 것도 아니고, 아랍 문화에 속은 것도 아니고 근본을 떠났다. 그래서 우리는 속은 줄도 모르고 속고 있는 것이다. 인간의 문제가 위치를 이탈한 것이라는 말씀을 드렸다. 위치를 이탈한 것이다. 무슨 악한 일을 해서가 아니고 위치를 이탈한 것이다. 그런데 그 위치를 이탈한 그 한 가지가 모든 것을 파괴시키게 된다. 군인이 탈영을 하면 무슨 일이 생기는가? 총을 가지고 탈영을 하게 되면 총기난사해서 사람을 죽이는 일 말고 무슨 일이 있는가? 사람은 위치에 있어야 정상적이 되지 위치를 떠나면 비정상이 된다. 위치를 떠나니까 가인이 생기고, 네피림이 생기고, 바벨이 생기고, 그렇게 되었다. 결국에는 하나님이 기대하는 새 예루살렘이 안 되고, 바벨로 가 버리고 말았다. 아브라함을 부른 것은 바벨로 가는 인류 가운데서 예루살렘으로 가는 새로운 인류를 위해서 불렀기 때문에 길이 다른 길이다. 아예 길 자체가 다른 길이다. 경부선과 호남선이 다르듯이 길이 다른 것이다. 열심이냐? 열심이 아니냐? 이런 문제가 전혀 아니다. 길이 다른데 열심이면 무슨 소용이 있고, 열심이 아니면 무슨 소용이 있는가? 호남선 열차를 타고 부산으로 가겠는가? 경부선 열차를 타고 목포로 가겠는가? 부지런한 사람이나 느림보나 똑 같다. 차를 잘 못타면 자기가 가고 싶은 곳으로 못 간다. 아브라함을 불러서 지금 우리까지 부른 것은 길이 다른 길이다. 우리는 그것을 아주 분명히 알고 있어야 한다. 이것이 이삭의 길이구나. 이삭은 아들 에서를 축복하려고 하다가 못하고 야곱을 축복해 버렸다. 자기 마음대로 못했다. 그리고 야곱은 자기 마음대로 하고 싶어서 오만 방법을 다 썼다. 그런데 마지막에는 아무 것도 없어졌다. ‘내 집은 언제 세웁니까?' 했던 그 야곱은 자기 집이 다 무너지고 말았다. 아무 것도 없이 되고 난 후에야 애굽에 내려가서 바로를 축복하는 사람이 되었다. 이스라엘의 조상이 되었다. 길이 전혀 다른 길이다. 우리는 이 길이 너무 신기하고 자기 마음에 들어야 된다. 그래야 하지 이 길이 마음에 안 들면 다 소용이 없다. 내가 감사한 것은 그것이다. 아브라함이 100세에 가서야 아들을 낳았다는데, 어떻게 내 마음에 들었는지 모르겠다. 약속을 해놓고 몇 년인가? 75세엔가 부름을 받았는데 100살이 될 때까지 아들을 안 주었다면 어지간한 사람 같았으면 붙어 있겠는가? 그리고 기왕 주시려면 젊어서 주시지 꼭 그렇게 할 필요가 뭐가 있는가? 그런데 그 말을 들으니까 무슨 희망이 생겼다. 다 끊어져서 자식을 못 낳게 되었는데 이삭을 주었다는 그것이 희망이 되었다. 그것은 내 경험이다. 내가 그랬다. 모든 것이 다 끊어졌는데 갑자기 하늘로부터 부름이 왔다. 그것이 있어야 내가 살겠더란 말이다. 내가 젊어서 정상적으로 아기를 낳을 수 있었으면 아브라함을 보고 미련하다고 했을 것이다. 그런 하나님을 왜 믿느냐고 했을 것이다. 그런데 나는 아무 것도 할 수가 없게 되었다. 하늘로부터 오지 않으면 아무 것도 안 되게 되었다. 그러므로 이삭이 하늘로부터 온 사람이라는 그 말에 딱 내가 꽂혔다. 그래서 나는 그 길을 따르게 되었다. 자기 마음대로 축복을 하지 못한 이삭을 보고서도 그것이 희망이 되는 것이다. 왜냐하면 내 마음대로 한 것은 아무 것도 안 되었기 때문이다. 지금도 내 마음대로 하면 안 된다. 이제는 나이도 들고 어지간히 했으니까 내 생각대로 해도 안 되겠는가 싶은데, 내 생각대로 하면 지금도 역시 안 된다. 몇 번 그런 경험을 했다. 안 된다. 이것은 내 팔자라고 생각하는데, 팔자 보다 하나님께서 막으시는 것 같다. 내가 하고 싶은 대로 하지 못하게 막으시는 것 같다. 그런데 그것이 감사가 된단 말이다. 내가 하고 싶은 대로 됐던 것이 감사한 것이 아니고, 내가 하고 싶은 대로 안 됐던 그것이 감사가 된다. 신기한 일이지 않은가? 지금 내가 하나님께 감사함은 내 마음대로 안 되었던 것을 감사하게 되니까 이것은 다른 길이다. 길이 다른 길이다. 사람들이 자서전을 쓰는 이유는 자기가 이러저러한 일을 해서 성공했다는 이야기다. 그것을 사서 보는 사람들도 이 사람은 성공한 사람이니까 보고 나도 도움을 받자고 해서 사 읽는 것이다. 그런데 나는 자서전이라고 500페이지를 써 놓았는데 1만원씩 주고 가져가라고 했는데도 안 가지고 간 사람이 있다. 이것은 가져갈 필요가 없는 책이다. 내가 어떻게 해서 되었다고 해야 다른 사람도 본 받아서 할 수가 있다. 그렇지 않고 나는 아무 것도 못했는데, 하나님이 이러이렇게 했다고 하니까 읽어 봐야 자기에게 아무 소용이 없단 말이다. 그런데 어떤 사람은 그 책을 읽으면 행복해지는 것이다. 이것은 이상한 길이다. 다른 길이 아닌가? 우리는 지금 전혀 다른 길에 와 있다. 희랍인들은 어떻게 하면 지식을 얻는가? 어떻게 하면 지혜를 얻는가? 이것 때문에 예수를 찾아 왔다. 니고데모가 밤에 예수를 찾아오듯이 찾아 왔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엉뚱하게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요12:14)고 했다. 이 이야기를 누가 모르는가? 다 아는 이야기다. 그런데 그 이야기를 하고 있다. 선문답 비슷한 것이다. 우리의 구속 문제는 본토로 돌아가는 것이다. 아주 근원적인 본토로 돌아가는 것이다. 그래서 유명한 사람들이 공부를 그렇게 많이 했는데도 왜 이렇게 결론이 없는가 하고 보았더니 본적지가 없다. 공통적인 것은 본적지가 없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결론이 나올 수가 없다. 나온 곳을 알아야 찾아갈 수가 있다. 나온 곳이 없으면 어디로 찾아가는가? 우리 교회에 나오다가 방황하고 있는 사람들이 더러 있다. 술을 먹고 앉아서 하는 이야기가 나는 그래도 돌아갈 데가 있다고 한다고 한다. 그 사람은 우리 교회로 돌아올 데가 있는 것이다. 그래서 10년 만에 20년 만에 돌아온다. 이번에도 한 자매가 20년 넘게 나갔다가 돌아 왔다. 몇 살에 갔다가 돌아왔는가? 70살이 다 되어 간다고 했다. 50살에 갔다가 지금 온 것이다. 자기 친정에 오듯이 왔다. 나도 봐도 밉지 않다. 20년 있다가 왔다니까 잘 왔다 싶다. 와서 고맙다고 했다. 나온 데가 있으면 돌아갈 데가 있다. 그런데 나온 데가 없으면 돌아갈 데가 없다. 갈 곳이 없으니까 사람마다 다른 소리를 하는 것이다. 우리가 한 곳으로만 가야 한다면 다 같은 말을 하게 될 것이다. 근본으로 돌아가자. 하나님이 창조했던 목적 그대로 돌아가자. 그러면 아주 복잡한 문제가 없어진다. 기독교에서 가장 복잡하고 어려운 문제는 삼위일체론이다. 아무리 들어도 모르는 이야기이고 아무리 설명해도 안 되는 이야기이다. 어거스틴도 할 수 없이 이것은 하나님의 비밀이다, 우리가 믿음으로 받아들여야 한다고 말했다고 한다. 완결된 교리라고 할 수 없다. 그런데 거기에 목매고 있는 사람들이 있다. 이것도 걱정되고 문제될 것이 하나도 없다. 우리가 근본으로 돌아가면 삼위일체를 할 필요도 말할 필요도 없다. 우리가 지은 대로 돌아가는 것이다. 나를 그분의 형상에 되게 하기 위해 지었다. 그러면 된 것이다.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형상이라고 하니까 다 해결된다. 내가 하나님의 형상이라고 하면 다 해결된다. 나는 흙이다. 나는 흙으로 지었으니 나는 흙이라고 하면 다 된 것이다. 신이냐? 아니냐? 할 필요가 없어져 버린다. 그래서 이런 재미있는 말이 있다. 불교에서 어느 스님이 하는 말이 불교를 부처님께로 돌려 드려야 된다고 한다. 이 말을 우리말로 바꿔보자. 기독교를 통째로 예수님에게 돌려드리자. 그러면 뭐가 나오겠는가? 뭐가 좀 수선해서 나오겠는가? 아니면 새것이 나오겠는가? 헌 배 수리해서 나오겠는가? 새 배가 나오겠는가? 예수께로 들어갔다 나오면 새것이 안 되겠는가? 우리도 기독교를 붙들고 있을 것이 아니고 기독교를 예수께로 돌려 들여야 한다. 돌려 드려서 그분이 알아서 하라고 해야 한다. 세월호도 새 배면 저런 일이 없었을 것이다. 사올 때 18년이 된 배인데, 그 위에 한 층을 더 올려서 배의 무게중심이 바뀌어서 배가 거꾸로 넘어간 것이다. 그래서 한 사람도 못 살았다. 우리는 기독교를 예수께로 돌려드리고, 우리는 한 알의 밀로 던져져야 된다. 버리면 안 되니까 기독교는 돌려주고 예수님에게 돌려주고. 인격으로 회복되는 길은 그것이다. 우리가 그분의 형상으로 돌려지는 것, 돌아가는 것이다. 그것이 인격이다.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형상이라고 했다. 그것이 얼마나 완전한 말인가.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형상이니라.”(고후4:4)라는 말이 있다.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형상이다. 더 이상 생각할 필요가 없다. 하나님이 사람을 지을 때 형상으로 지었으니까 형상이 되면 되는 것이지 뭐가 또 부족한가? 흙으로 지었으면 우리는 씨를 받아서 열매를 내면 되는 것이 아니겠는가? 그것을 지식으로 교리화 시키고 제도화 시키고 문화와 접촉할 필요가 없다. 그 문화와 어떻게 할 그럴 문제가 아니다. 우리는 전혀 다른 길이다. 문화와의 충돌이 문제가 되는 것이 문화는 지금 엄청나게 앞으로 달려가고 있고 기독교는 그것을 못 따라 간다. 우리나라 같은 경우에는 예전에 기독교가 문화를 선도한다고 한 적도 있었다. 초창기에는 기독교 문화가 우리나라 문화를 선도했다. 교회가면 모든 것이 새로웠다. 생전 보지 못한 미제 노트, 미제 연필, 미제 피아노, 다 다르고 새로운 것이 있었다. 지금은 아니다. 주일학교 학생들에게 선물 주면 콧방귀도 안 뀐다. 서울 강남의 큰 교회에서는 여름성경학교를 하면 선물이 한 보따리라고 한다. 부자집 아이들은 반갑지도 않고 귀찮기만 하다. 그런 시대가 돌아왔다. 문화에 끌려 돌아다닐 것도 아니고, 문화와 어떻게 해보려고 할 것도 아니다. 우리는 우리대로의 길이 따로 있다. 한 알의 밀은 죽어서 많은 열매를 맺는다. 재생산된다. 죽지 않고는 재생산 될 방법이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많은 열매를 맺는 것이다. 희랍인들에게는 전혀 자기들은 듣고 싶은 말이 아닌 말을 했다. 희랍인들에게 왔으면 좀 철학적인 이야기를 했어야 했다. 일부러 찾아왔다는데 한 알의 밀 이야기나 하고 있으니까 참 싱겁고 재미없는 사람이다. 우리는 그의 형상이고 그분을 재생산할 흙이다. 그것만 있으면 된다. 세상이 받아줄 것이냐? 이것을 생각할 필요가 없다. 왜냐하면 세상에 전파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가 없는 세상은 껍데기다. 껍데기도 아니다. 바벨로 가는 것이다. 그런데 기독교가 사도시대를 지나면서 왜 그렇게 되었을까? 이런 생각을 많이 해봤다. 생육하고 번성하기보다 행위를 본받는 세계로 들어온 것 같다. 예수님의 생활을 본받자, 우리도 예수님처럼 하자, 이렇게 된 것 같다. 자꾸 그렇게 해서 예수님 같은 생활을 해보자, 이렇게 된 것 같다. 아무도 예수님 같은 생활을 할 사람이 없다. 예수님은 예수님으로서 자기 생활을 한 것이지 우리가 흉내 내거나 모방할 수가 없다. 그런데 그것을 따라 하려다보니 예수님은 그 생명에서 그것이 나온 것인데 사람들은 그것을 따라하려니까 생명은 아닌데 따라 하려니까 나오겠는가? 개 아닌 송아지가 개가 짖는 것을 보고 짖으려고 연습한다고 송아지 짖는 것이 개 짖는 것과 같겠는가? 소는 도둑이 와도 모른다. 눈만 멀뚱멀뚱 뜨고 있다. 그래서 옛날에는 소도둑이 있었다. 집에 와서 그냥 고삐 풀고 가져가는 사람이 있다. 소는 짖지를 못하니까 개 같으면 끌고 가겠는가? 나도 개처럼 짖어야겠다고 생각하고 소가 연습한다면 정말 웃기는 일이 된다. 사람들이 예수님의 생명은 없이 예수처럼 살려고 하니까 뭐가 되겠는가? 갈수록 더 이상한 것이 된다. 사람 같지 않은 다른 행동을 하게 되었다. 그래서 사람들에게 기독교인들이 위선자라는 말을 많이 듣는다. 물론 다 그런 것은 아니지만 예수를 행위로 본받을 것이 아니다. 생명으로 받아야지 행위로 본받아서는 절대로 될 일이 아니다. 예수님이 이렇게 했다고 나도 그렇게 하면 되는가? 그렇게 되지 않는다. 생명을 받아야 한다. 흙이 왜 필요한가? 콩을 받으면 콩만 딱 낸다. 그래서 흙이 필요하다. 콩을 받았는데 녹두를 내놓는 흙은 없다. 그래서 흙이 필요하다. 흙도 자기 생각이 있다면 콩보다는 금년에는 녹두가 훨씬 비싸다면 녹두를 생산하고 싶을 것이다. 그런데 흙은 절대로 그것이 불가능하다. 콩을 심으면 콩이 나오지 녹두가 아무리 좋다고 해도 낼 수가 없다. 그것이 사람들이 내가 하고 싶은 대로 안 되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 하나님의 생각은 콩인데 내 생각은 녹두다. 그러면 하나님이 하는 일마다 나를 방해한다. 왜 하나님은 나를 이렇게 방해할까 하는데 이것은 주인의 뜻과 종의 뜻이 다르다는 것이다. 처음에 나도 하나님 뜻대로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나? 그렇게 생각했다. 항상 반대니까 생각과 반대로 하면 되겠다고 생각했다. 내 생각은 너희 생각과 다르다고 했으니까 예를 들어 내가 동으로 가고 싶다면 동으로 가면 안 되고, 서쪽으로 가면 되겠다고 생각한 때가 있었다. 하도 안 되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것은 생명의 문제이지 내 행위의 문제가 아니다. 내가 그렇게 한다고 해서 맞게 되겠는가? 내 생각과 반대로 한다고 해서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 되겠는가? 그것도 잘 안 된다. 어쩌다 될지 모르지만 잘 안될 것이다. 우리가 예수를 행위로 본받으려고 생각하면 절대로 안 될 일이다. 가짜가 나와 버린다. 사이비가 나온다. 잘하면 사이비 된다. 생명을 받아서 그 생명이 생명대로 나오는 것, 사람은 생명을 받아서 그대로 나오는 것, 내 맘대로 안 되는 것, 이것이 사람이다. 그래야 그 흙이 가치가 있다. 그렇지 않고 흙이 제 맘대로 해버리면 농부에게는 가치가 없다. 여자가 시집을 갔는데 여자에게 절대적인 제한이 한 가지 있다. 놀라운 능력을 가지고 있는 대신에 절대적인 제한이 있다. 딱 한 사람의 씨만 받도록 제한되어 있다. 하룻밤에 열 사람의 남자를 상대했어도 한 사람의 씨밖에 받지 않는다고 한다. 그리고 그 한 사람이 희면 희게 낳아야 되고, 검으면 검게 낳아야 한다. 자기 맘대로 못 낳는다. 그 사람 참 멋있더라고 해서 그 사람 같은 사람을 낳을 수는 없는 것이다. 이것이 절대적인 제한이다. 이것이 인간에게 준 절대적인 제한이다. 그런데 그것이 하나님에게 필요하다. 콩 이외에는 절대로 생산할 수 없는 것, 이런 불편한 제한이 하나님께 필요하다. 그것이 우리의 가치이다. 하나님이 나에게 제한을 두었다면 그것은 정말로 필요한 것이다. 어떤 면을 나에게 제한을 두었다면 그것은 정말로 하나님이 귀히 쓰실 수 있는 부분이다. 나도 내 생애에서 아주 분명하게 하나님이 두 번 길을 막은 일이 있다. 그것이 나에게 그렇게 필요할 줄 몰랐다. 그것을 늘 안타깝게 생각을 했는데, 지금 생각하니까 그것이 참 필요한 것임을 알게 되었다. 내게 있는 제한이 있다면 그것은 하나님께 가장 필요한 것이다. 여자에게는 가장 큰 제한이 남자에게 필요한 것이다. 흙에게 있는 가장 큰 제한이 농부에게 필요하듯이 우리는 생명을 받아서 생명을 내놓아야 할 그런 존재이다. 이론과 행위는 하나님과 관계가 없다. 그것은 그리스도는 없고 교회만 있는 것이 되게 되고 기독교만 있는 것이 된다. 이론과 행위 대신에 그리스도가 필요하다.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요12:14) 여러분도 그런 경험이 있을 것이다. 70년대에 와서 워치만니의 서적이 히트를 쳤다. 그중에 ‘자아가 죽을 때(자아의 파쇄)’라는 제목으로 나온 책이 있다. 그것을 읽어본 사람들은 다 정말로 감탄을 했다. 내 자아가 죽어야 되겠구나. 내가 죽어야 되겠구나. 그것을 처음으로 알게 되었다. 물론 많은 사람들이 그것을 조금씩 느꼈겠지만 그분의 책을 보면서 확실하게 와서 박혔다. 자아가 죽을 때, 자아가 죽을 때...라고 했다. 내가 C.C.C.에 들어가니까 간사들이 다 그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나는 그때까지 들어본 적이 없었다. 그런데 그 후로도 이 영향력은 굉장히 컸다. 지금도 역시 마찬가지이다. 좀 경건한 사람들은 내가 죽어야 할 텐데, 나를 죽여야 할 텐데, 내 자아를 처리해야 할 텐데, 이 고민을 평생 가지고 살게 된다. 왜냐하면 자아라는 문제가 항상 걸림이 되기 때문이다. 내 뜻대로 안하고 싶은데도 내 자아가 있기 때문에 내 자아대로 움직여야 된다. 그러고 나면 하나님 뜻과 반대가 되니까 후회가 된다. 죽으면 된다. 죽기만 하면 된다는 것을 알지만 쉽지 않다. 나만 죽으면 된다고 하면 말은 간단하다. 집안에서도 그렇다. 남편과 아내 사이에도 문제가 생기면 내가 죽어야 된다고 하는 것은 한 단계 높은 단계이다. 나는 옳고 너는 틀렸다는 것은 동물수준이고, 거기서 한 단계 올라가면 내가 죽어야 할 텐데, 이렇게 된다. 그런데 그것이 말을 들어보면 간단한데 나만 죽으면 되니까 간단한데 쉽지를 않다. 여러분 해봤을 것이다. 나만 죽으면 된다는 최고로 간단하고 답은 다 가지고 있다. 그런데 안 된다. 답은 가지고 있는데 안 된다. 시험 출제를 하면 답을 못 쓴다. 그런데 가장 쉬운 방법이 있다. 워치만니도 그 책을 쓰게 된 동기가 자기에게 하나 걸림이 있었다. 일찍 알고 사귀었던 여자가 있었는데, 내 뜻인지 하나님 뜻인지를 몰라서 10년을 결혼을 유예했다고 한다. 10년 동안 자기와의 싸움이었다. 내 뜻대로 하지 않아야 되는데, 혹시 내가 이 여자와 결혼하는 것이 내 뜻이 아닌가하는 것 때문에 고민했다고 생각한다. 10년을 결혼을 못했다고 한다. 지금 생각하니까 그것이다. 그 속에서도 책이 나왔다. 그리고 여러분이 그 책을 읽어보면 알겠지만 워치만니는 평생 자아와의 싸움을 하고 있다. 우리가 보기에는 참 훌륭한 분으로 보이지만 자기 속에서는 고통이 많이 있었던 것이다. 자아 문제 때문이다. 그런데 그렇게 되기도 어렵기 때문에 참 훌륭한 분이다. 나는 그렇게 되지 못해서 이런 말을 하기 뭣하지만 함께 죽고 함께 살면 아주 쉽지 않은가? 나 혼자 죽으려면 어려운데 함께 죽고 함께 살면 쉽다. 여러분은 경험을 해봤을 것인데 나만 죽으면 되는데 안 죽는다. 이것을 처리하느라 고심한다. 목회하면 더군다나 그렇다. 자아의 처리, 자아 문제가 교회를 시끄럽게 한다. 내 자아도 문제이지만 다른 사람의 자아도 문제이다. 이 자아만 없으면 한다. 불교에서는 스님들이 자아를 찾는다고 참 자아를 찾으려고 그렇게 애를 쓰는 것이다. 참 자아가 무엇인가? 남과 싸우지 않는 자아를 찾으려고 하는데, 이것이 쉬운 일이 아니다. 로마서를 읽으면 함께 죽고 함께 산다는 말이 나온다. 바울이 언제 함께 죽었는가? 바울이 예수와 함께 죽은 일이 없다. 본 일도 없다. 오히려 예수 믿는 사람들을 핍박하려고 간 사람이다. 그런데 함께 죽고 함께 산다는 말을 했다. 그러면 그분은 분명히 함께 죽은 경험을 갖고 있다. 오늘 우리도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은 주님과 함께 죽는다. 그것도 좀 어렵다. 거기서 못 내려오신 주님과 함께 죽고 함께 산다고 하면 쉽다. 나는 그래서 그것을 채택한 것이다. 나도 나 혼자는 못 죽으니까 동반해서 죽은 것이다. 자살도 둘이 하면 쉽다고 한다. 예수 죽을 때 나도 함께 죽었는데, 언제 내가 죽었는지가 애매하다. 늘 함께 죽었다고 하는데도 내가 언제 예수와 함께 죽었는가? 그것이 애매해고 말을 해도 시원치 않고 늘 그랬다. 그런데 하나님 아들이면 내려와 봐라. 그러면 우리가 믿겠다. 그래도 못 내려오는 그분을 보니까 내가 쉽다. 나도 그 사람이다. 예수님도 대단한 사람이 아니고, 그 자리에 가보니까 나와 같은 사람이 되는 것이다. 그래서 함께 죽는구나. 저분이 저렇게 치욕을 당핼 때, 부끄러움을 당할 때, 나도 당하고 마찬가지 아닌가? 사람이 저것이지 뭐 다른 것이 있는가?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히12:2)라고 했다. 일부러 죽었다. 죽고 싶어 죽었다고 하면 부끄러움이라는 말이 나오겠는가?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마27:46)하는 말이 나오겠는가? 부끄러움이라는 말은 내려와 보라는 것이다. 그 말만 안했어도 부끄럽지 않을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내려와 보라는 것이다. 그런데 못 내려오고 있는 것이 하나님 아들로서는 부끄러운 것이다. 하나님 아들이라고 사람들이 한쪽에서는 칭송을 했는데, 내려오라고 하니까 못 내려오니까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히12:2)는 그 말이 아니겠는가? 그런데 그 자리에서 한편으로 예수님이 굉장히 쉬워진다. 그 어려웠던 분이 너무 쉬워진다. 함께 죽는다는 것이 이것이구나. 저분이 죽는데 내가 거기 있구나. 나도 거기 있구나. 나는 그보다 천분의 일도 못한데, 그 안에 낄 수 있다는 것이 너무 감사한 일이다. 그분이 그렇게 된다고 했다는 것이 나한테는 너무나 큰 해방이다. 나만 죽으면 돼, 나만 죽으면 돼, 이것이 쉽지 않았다. 그런데 함께 죽고 함께 살면 되는구나. 나는 이렇게 정리가 되었다. 함께 죽었구나. 나는 바로 그 사람 속에 있는 사람이구나. 그 사람이 가는 데로 나는 가게 되어 있구나. 왜 성소의 휘장이 찢어졌겠는가? 들어오라고 찢어진 것이다. 성소의 휘장이 찢어졌다는 말은 동산의 화염검이 젖혀졌다는 말이다. 동산의 화염검이 걷혔으면 들어갈 수 있다는 것이다. 내가 혼자 뛰어 들어 갈 수 있겠는가? 예수 안에서 함께 가는 것이다. 그 사람에게 열려진 것이니까, 예수한테 들어오라고 열려진 것이니까, 나도 그 안에 있다면 들어갈 수 있는 것이다. 간격이 없어지고 쉬워진다. 교리에 맞든 맞든지 맞지 않든지 나는 이것이 쉽다. 함께 죽었다는 것이 쉽다. 나 혼자 죽으려면 불가능하다. 워치만니의 책을 읽으면서 이분은 참 대단하다. 어떻게 자아를 처리하기 위해서 이렇게 평생을 이렇게 하는가? 이런 생각을 그때 책을 읽을 때도 했다. 그것은 참 훌륭한 일이고 놀라운 일이기 때문에 내가 감탄했는데, 지금 생각하니까 나 같은 사람은 어렵겠다는 생각이 든다. 내가 정말 마음에 드는 여자인데, 내 뜻인지 아닌지를 몰라서 결혼을 못하고 있다면 요즘은 그런 아이들은 없을 것이다. 우리 시대는 그랬다. 정말 내 마음에 맞고 결혼하고 싶은데 하나님 뜻인지 아닌지 몰라서 10년을 유보했다고 한다. 양쪽이 서로 기도를 하면서 10년 후에 만났다고 한다. 그런 사람도 드물다. 나는 그때도 참 어려운데 그렇게 한다는 생각을 했다. 나는 막상 그렇게 해보지 않았으니까 그렇게 생각했는데, 막상 내 문제로 생각하니까 쉬운 문제가 아니다. 나는 그렇게 죽자 살자 사랑해본 사람이 없었고, 나를 또 그렇게 사랑할 사람도 없어서 이런 문제가 없었다. 만일 내가 정말로 좋아하는 것이 있었다면 이런 고민이 생길 것인데 10년을 참고 있었다는 것이 보통 사람이 아니다. 나는 그럴 자신이 없다. 그런데 함께 죽고 함께 살았다니까 해방이 된다. 함께 죽고 함께 살았다. 그 자리에서 내가 해방이 된다. 우리가 예수를 받을 때도 그렇고, 전할 때도 그렇고, 한 알의 밀로 받아서 우리 안에서 함께 죽고 함께 삶을 통해서 재생산된다. 그분을 내가 내 생명으로 받아들인다면 나는 내 안에서 죽음을 통해서 재생산된다. 초대교회도 그렇게만 되었다면 계속 재생산을 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런데 그것이 안 되고 끊어져서 모두 행위를 본받는 것으로 되었다. 성경을 보면 행위를 본받을 만도 하다. 그런 이야기를 많이 했다. 유대인만 행위를 보는 것이 아니고, 기독교인들도 행위에 치중하기 쉽다. 왜냐하면 좋은 행위인데 당연히 본받을 일이다. 그러면 그분 자신은 없는데 그분의 행동만 내가 본받아야 된다. 그러면 그것도 아주 어려운 일이 된다. 개가 짖는 것은 너무 쉬운 일이지만 소가 짖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우리가 예수님의 행위를 본받아 가려면 내가 그 사람이 되면 너무 쉬운 일이다. 내가 그 생명이라면 쉬운 일이지만 그 생명이 아니라면 너무 어려운 일이고 쉬운 일이 아니다. ‘예수되기 원합니다. 예수 닮기 원합니다.’라는 노래도 있고 많이 불렀다. 부른다고 되겠는가? 함께 죽고 함께 산다. 조상들은 이미 자기들을 처리하는 길을 받았다. 아브라함도 그렇고, 이삭도 그렇고, 야곱도 그렇다. 그런 역사적 과정을 통해서 길이 만들어졌다. 그 길을 통해서 예수님이 오셨으니까 예수님이 우리에게 오셔도 마찬가지로 그 길로 오시고, 또 우리를 통해서 재생산되어도 또 역시 그길로 재생산되게 될 것이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