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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V. 정치(Politique),
§.16. 통제와 생성(Contrôle et devenir 1990)
Gilles Deleuze, Pourparlers 1972-1990, Minuit, 1990, pp.229-239 (P.250)
- 전미래(Futur antérieur), n° 1, printemps, 1990. 대담자: 네그리(Toni Negri)
통제와 생성이라는 제목은 의미의 논리이래로 상층과 심층의 대비와 같다. 위계(조폭)과 같은 기구에서 상층은 하부를 통제하고 명령하며 지배한다. 이에 비해 형이상학적으로 휠레는 고대철학의 휠레와 달리 능동성이며 생성이다. 이 휠레, 즉 물질, 또는 플라노메네 아이티아를 닮은 흐름은 노마드로서 연대하며, 자기의 권리를 양도하지 않는 계약을 하려한다. 통제는 국가에서 생성은 인민에서 이루어진다. 인민은 혁명성이며 창조성을 지니고 있다. (54TKC)
고대철학에서 형이상학은 순수 사변에서 지성(누스)이 선천적으로 먼저 있다고 생각했다. 그 지성은 감각적 사물의 형식들을 지배 또는 통제할 수 있다고 보았다. 이런 이유는 지성이 파악하는 지성의 대상물(추상물이지만)인 지성성도 있으며, 그 지성성은 존재하며 완전하고 불변하며 영원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여기서 지성(Nous)과 존재(Etre)는 일치 또는 상응하며 이를 원리로 삼았다. 그 원리에 대한 탐구를 존재론이라 하고 나중에는 형이상학이라 한다. 그러나 현대에 와서는 원리는 선가정으로서 가설에 지나지 않고, 벩송에게서는 상징 또는 기호에 지나지 않는다고 한다.
이런 원리의 불변이라는 생각은 근대에 와서도 마찬가지로 이어져 왔다. 말하자면 형이상학적 가설이 근대인의 사고(오성)에 그대로 복사되었다. 그럼에도 근대인들은 대상의 변화들에 상대적 지위를 부여하였다. 변화들의 점들의 종합은 그럼에도 불변이라 생각한다. 즉 선천적 인식(의식)으로 완전하고 불변이며 보편적인 것이 있다. 의식의 대상인 현상들에서도, 현상들 사이에 불변하는 관계들이 있다고 생각하였다. 이 관계의 불변성을 법칙이라 한다.
그런데 근대인들은 사물의 현상의 법칙에서와 마찬가지로, 인간에게서 영혼과 신체의 분리를 생각하면서도 의식(지성)과 신체(지성성의 대상물) 사이에 일치 또는 상응한다고 생각하였다. 의식과 사물 사이에는 일치(상응성) 또는 평행론과 같은 것으로 보았다. 이러한 사고에는 심리적 사실과 물질적 사물 사이에 등가적인 가치가 있다는 생각이 깔려 있다. 이러한 심리학에서 고대의 형이상학적 가설을 벗기면, 의식과 사물, 영혼과 신체 사이에 원리도 법칙도 주어져 있지 않다는 것을 나중에서야 알려지게 될 것이다.
생물의 발달로 생명체는 생성하며 생장하는 생명으로서 사물과 다르다는 알게 된다. 이런 생성과 생장이, 영혼과 신체 관계에서도 거울처럼 서로 대응하듯이 맞물려 있지 않는다는 것을 19세기 후반 생물학에서 제기되었다. 생물학과 의학의 반성에서 고대와 근대 초기의 상응 관계가 아리스토텔레스의 심리학(영혼론)에 근거하던 것이고, 데카르트의 심신의 이원론(두개의 원리)에 이어졌다는 것을 깨닫는다. 심리학의 발달과 특히 병리학에서 심신의 대응관계 또는 평행관계가 없다는 것을 기억이론으로 증명할 것이다. 이로서 아리스토텔레스 학문의 전승은 붕괴되었다. 그럼에도 원리와 법칙에 따는 지성(누스)의 완전성을 버리지 못하고, 지성이 물질성(지성성)을 만들고 조정할 수 있다는 생각은 여전한다. 이런 생각에서 상층은 심층을 통제하거나 지배할 수 있다고 여긴다. 그러나 심층은 자율적으로 생성하고 성장한다. 이런 대비를 상층과 심층, 누스와 대상성, 영혼과 신체 등등 사이에 대칭성이 없고 비대칭이라 한다.
이 대담의 주제로서, 통제는 상층의 보편성을 인정하는 사고에서 나오고, 생성은 휠레이든 생명이든 생성과 성장 또는 생산과 창조의 길을 간다는 사유에서 온다. 그럼에도 위에서 말한 철학적 사고의 오랜 습관에서 상식(5관)에 기준하여 일반성을 만들고, 그 일반성을 넘어서는 보편성이 먼저 있다는 사고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생성이라는 관점을 받아들이기 어려운 이유는, 인격이든 사물이든 자기 동일성이 있고, 이를 파악하는 지성이 있다는 것을 달리 부정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지성자체가 만들어지는 과정이지, 완전한 누스 같은 지성이 먼저 있다는 가설을 버리지 못하기 때문이다. 자기 동일성이 있어야 철학을 한다는 생각에서 동일성을 유지하지 못하는 휠레를 지성성(대상성)에서 버려버렸기 때문이다. 이에 반하여 19세기말, 특히 벩송은 자연에는 두 가지 동일성이 있다. 대상성으로 다루는 자기동일성과 성장 또는 생성하는 자기자발성의 자연이 있다. 전자의 상층주의자는 자연의 자발성을 인정하지 않기 때문에 수동성으로서만 간주하였는데, 플라톤은 그래도 수동성과 다른 필연성이 있다고 보았고, 벩송은 자발성으로 보았다. 인간의 본성(자연)은 수동성이 아니라 자발성이며, 온자연(la Nature)과 같은 방향으로 가고 있다.
고대에서 근대까지 동일성을 근거로 하는 것도 추상적이고 논리적이다. 여기서는 질적인 것을 제거한다는 의미에서 논리적이다. 19세기말 이래로 또 다른 동일성이 있는데, 형태적인 것을 제거하는 의미에서 순수 움직임, 순수 흐름이 있다. 순수 질적인 동일성, 흐름, 운동이 있다. 물론 이를 많은 철학자들은 이질성이라 부른다. 불변과 부동을 동일성으로 하여 사곳하는 것과 달리, 변화(흐름)와 운동으로부터 사유가 있다는 것도 실재한다는 것이다. 자연의 실재성에서는 보편과 불멸의 선전제가 없고, 움직이고 흐르는 실쟁성의 생성과 변화가 있다. 이를 철학이 다루는 시대가 왔다. 인간사에서도 선전제에 의한 통제와 지배가 아니라, 흐름과 생성에서 구체적 현실과 현존을 파악할 때이다.
근대 이래로 정치가 통제라고 할 때, 고대와 근대의 선천적인 보편성에 대한 믿음이 있었고 강하게 남아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생성과 창안의 활동이 주목을 받는 시대가 왔다. 생성은 우선 예술분야에서 그리고 과학의 발명에서 이어져 왔다. 산업사회의 발전은 생성과 창조의 덕분이다. 요즘 스포츠분야에서는 자기 활동성의 근거로서 받아들여지고 있다. 그런데 과학과 철학에서 전환 또는 전복이 이유는 공통감각의 통합(혼성)의 방식이 사회의 관습에 균열을 내기에 어렵기 때문이다. 정치는 여전히 상층에 머물며, 그러한 정치적 관습은 지배 균열을 내기보다 구시대의 관습을 이용한 지배를 더 선호하고 있다. 그래서 사회와 정치에서는 상식을 넘어서 양식으로 사유한다는 것도 어렵다. 게다가 고대와 근대를 넘어서는 또는 전복하는 고등양식으로 살아가자고 하는 것은 더욱 어렵다.
스토아학자들이 물에 포도주 방울의 혼성을 설명했는데, 벩송은 설탕이 물에 녹기를 기다려야 한다고 한다. 인간 세상이 고대의 상식에서 데카르트의 양식이 나왔고, 다시 벩송의 고등양식으로 사유위상의 확장은 아제 인간을 기다려야 할 것 같다. (54TK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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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IV. 정치(Politique): §16. 통제와 생성(Contrôle et devenir) 229-239
- 전미래(Futur antérieur), n° 1, printemps, 1990. 대담자: 네그리(Toni Negri)
T.N. - 당신의 지적 삶에서 정치적 문제는 항상 현재적이었다. 한편으로 운동들(감옥 운동, 호모섹스 운동, 이탈리아의 자치운동, 팔레스타인들의 운동)에 참여하였고, 다른 한편 제도들에 대한 계속적인 문제제기 작업은 당신 작품 속에, 즉 흄에 관한 저서에서부터 푸꼬에 관한 저술에 이르기까지, 이어지고 뒤섞여 있다. 어디에서부터 정치적 문제에 연속적인 이런 접근이 생겨나는가? 어떻게 그 접근은 당신 작품의 선을 따라서, 거기에서, 항상 유지되기에 성공하는가? 왜 운동-제도들의 연관은 항상 문제적인가?
G.D. - 나에게 흥미로웠던 것, 그것은 표상[재현]들이라기보다 집단적 창조 작업들이었다. “제도들” 속에는, 법률들과 계약들을 동시에 구별하는 운동들이 있다. 흄(Hume, 1711-1776)에서 발견했던 것, 그것은 제도와 권리의 매우 창조적 개념작업이었다. 초기에 나는 정치학에 보다 권리(le droit, [법학])에 더 관심이 있었다. 마조흐와 사드에서 나를 기쁘게 했던 것, 그것은 성관심(la sexualité)에 연관된 마조흐에 따른 계약과 사드에 따를 제도에 대해 아주 뒤틀린 양자의 개념작업이었다. (229) [사드와 마조흐를 반대적으로 보는 것은 뒤틀린 생각이라 한다. 사디즘의 반대가 마조히즘이 아니며, 다른 흐름 또는 차이이다. 마조히즘은 계약에 관한 것이며, 그리스적이다.]
정치로 일종의 이행을 68년 5월과 더불어 나의 생각에서 이루어졌는데, 내가 정확한 문제들과 접촉하는 정도에서 이루어지는데, 가타리, 푸꼬, 상바르(Elie Sambar, 1947-)덕분이다. 안티외디푸스는 전적으로 정치 철학의 책이었다. (230)
T.N. - 당신은, 마치 시의부적절(l’Intempestif)의 승리인 것, 즉 반-효과화의 실현으로서, 68년 사건들을 강하게 느꼈다. 이미 68년 앞서서 여러 해 동안에, 니체(Nietzsche, 1844-1900)의 관한 작업에서, 마찬가지로 좀 시간이 지난 뒤에는 자허 마조흐(Sacher-Masoch, 1836-1895)의 작업에서, 당신에게서 정치는 마치 가능성, 사건, 특이성처럼 탈환되었다. 미래를 향하여 현재를 여는 누전들/합선들(courts-circuits)이며, 그리고 그 합선은 따라서 제도들 자체들을 변모하게 한다. 그러나 68년 이후 당산의 평가작업은 빛깔[색깔]을 띠는 것 같다: 시대 속에서 노마드 사유는 순간적인 반대 효과화의 형식 하에서 항상 소개되고 있고, 공간 속에서 “소수의 생성이 보편적이다.” 것이 소개되고 있다. 그러나 이런 ‘시의부적절함’의 보편성은 무엇인가?
G.D. - 나는 점점 더 생성과 역사 사이에 가능한 구별에 민감하게 되었다. 중요한 것은 무엇이나 “비역사적 떼구룸(une nuée non historique, 무리들)” 없이는 이루어지지 않는다고 말했던 이는 니체이다. 영원과 역사 사이에도, 관조와 행동 사이에도 대립은 없다. 니체는 이루어지고 있는 것에 대해 사건 자체에 대해 또는 생성에 대해 말한다. (230)
사람들은 혁명들은 나쁜(mauvais, 서툰) 미래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사람들은 끊임없이 두 가지를 섞고 있다. [하나는] 역사 속에서 혁명들의 미래, [다른 하나는] 평민들(les gens)의 혁명적 생성. 심지어 두 경우에서 동일한 평민들이 아니다. 인간들의 유일한 기회는 혁명적 생성 속에 있으며, 이 혁명적 생성은 부끄러움을 몰아내고 또는 비관용에 응답한다. (231) [생성은 과정이며 불가분의 운동이다. 혁명적 생성은 가차없다. - 나찌의 만행을 부끄러움이라고 한다. (54NKJ)]
T.N. - 내가 보기에, 또한 철학적인 중요한 작품으로 생각되는 천개의 고원은 특히 정치철학의 영역에서 해결되지 않았던 문제들의 목록 같다. 충돌되는 짝들, 과정-기획, 특이성-주체, 혼성작업-조직화, 분출선(탈주선)들-장치들과 전술들, 미시-거시 등등, 이런 모든 것은 항상 열려져 있을 뿐만 아니라 또한 듣도 못한 이론적 폭력과 또한 비정통적 어조(le ton)를 상기하게 하는 폭력과 더불어 끊임없이 다시 열린다. 나는 그러한 전복(une telle subversion)에 결코 반대하지 않으며, 반대로 좋아하‥…. 그러나 가끔 나로서는 비극적 음조를 듣는 것 같으며, 거기에서 사람들은 “전쟁기계”가 어디로 이끄는지를 알지 못한다. (232)
[나도 네그리와 같이 자본와 탐욕이 거센 환경에서, 혁명의 전복을 말하지만, 균열의 틈을 내기가 쉽지 않고, 전쟁기계라는 특이자, 소수자의 미시적 활동을 알아보기가 어렵다. 예술을 다루거나 생태를 말하는 이들은 소수자로서 조각들로 흩어져 있지 않는가? 노동과 시민단체 학술단체가 눈에 보이지만 실현화의 활동보다, 자본 제국 속에 안주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삶은 우공이산과 같을 것 같다. 학문에서는 박홍규가 돈, 재주, 부지런 중에 하나라도 가져야 한다고 하셨다. 888이다.]
G.D. - 나는 내가 말한 것에 대해 감동받는다(être touché). 나와 가타리, 우리가 아마도 두 가지 다른 방식으로, 그러나 둘 다 맑스주의자로 남았다고 나는 믿는다. 자본주의와 그것의 발전들에 대한 분석을 집중하지 않는 정치 철학을 우리는 믿지 않는다는 것이다. 우리가 맑스에게서 가장 흥미로운 것, 그것은 마치 내재적 체계로서 자본주의의 분석이다. 그 분석은 자본주의의 고유한 한계들을 끊임없이 되밀고 나가고, 항상 커져가는 규모에서 한계들을 재발견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한계, 그것은 자본 자체이다. 천개의 고원은 많은 방향들을 지적하는데 그 중에서 세 가지이다. (232)
우선사회는 우리에게 사회의 모순들에 정의되기보다 용출선[탈주선]들에 의해 정의되는 것 같다. 사회는 도처에서 용출[탈주]한다. 그러저러한 순간에 그려지는 용출선들을 따라가기를 시도하는 것은 매우 흥미롭다. ... [2] 천개의 고원에는 다른 방향이 있다. 이 방향은 모순들보다 오히려 용출선들을 고려할 뿐만 아니라, 오히려 계급들보다 소수성들을 고려한다. 결국 셋째 방향이 있다. 그 방향은 전쟁기계의 지위를 찾는데 있다. 전쟁기계는 전쟁에 의해 전혀 정의되지 않고, 오히려 시-공간을 차지하고 채우는 어떤 방식에 의해, 또는 새로운 시-공간을 발명하는 방식에 의해 정의된다. 혁명 운동들과 예술 운동들은 그러한 전쟁기계로부터 이다. (233) [2016년 촛불시위는 인민의 성장과 생자이며, 혁명운동의 한 절편일 것이다. 이 경험들은 중요하다.]
당신은 그런 모든 것이 비극적 어조 또는 우울한 어조 없이 있지 않다고 말한다. .. 자본주의에서 보편적인 어떤 것이 있다. 그것은 시장이다. 보편적 국가는 없는데, 왜냐하면 보편적 시장이 있기 때문이고, 국가들은 보편 시장의 핵심들이며, 증권이다. 그런데 그 시장은 보편화하지도 않고 동질화하지도 않는다. 그것은 부(de richesse)와 비참(de misère)의 환상적인 제작 작업이다. 인간의 권리들이 우리에게 자유 자본주의의 “즐거움들”을 축복하게 해 줄 것 같지 않다. (233-234)
부끄러움, 그것은 우리가 생성들을 보존할 수 있는, 하물며 우리 자신을 포함하여 생성들을 고양할 할 수 있는, 어떠한 확실한 수단을 갖지 못한 것이다. 어떻게 한 집단을 되돌릴 것인가, 어떻게 역사 속에 다시 빠지게 할 것인가, 그것이 영속적인 “근심”을 부여하는 것이다. 우리는 의식하는 것으로 충분하다고 여기는 프롤레타리아의 이미지를 더 이상 다루지 않는다. (234) [물이선소이부위, 물이악소이위지하는 인민에게 있다. 자연과 인민 사이에 연대 또는 연관이 있고, 생성들을 만들어 갈 것이다. (54TKA)]
T.N. - 소수자의 생성이 어떻게 힘이 있을 수 있는가? 저항(la résistance)이 어떻게 봉기(une insurrection)가 될 수 있는가? 당신의 글을 읽으면서, 나는 그러한 질문들에 주어지는 대답들에 관해서 항상 회의 속에 있다. 당신의 작품 속에서, 그러한 질문들에 대해 이론적으로 또 실천적으로 다시 정식화하도록 강요하는 충력을 내가 항상 발견한다고 할지라도 말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스피노자에서 상상작용 또는 공통용어들에 관한 당신의 쪽(페이지)들을 읽을 때, 또는 내가 제3세계의 나라에서 혁명적 영화의 혼성[구성]에 관한 당신의 서술을 영화2: 시간-이미지(1985) 속에서 따라갈 때, 그리고 내가 이미지로부터 우화작업으로 또 정치적 실천으로 이행을 당신과 더불어 파악할 때, 나는 하나의 대답을 발견했다는 인상을 거의 갖는다‥… 또는 내가 속고 있는가? 억압받는 자들의 저항이 효과적이 될 수 있기 위하여, 무관용성이 결정적으로 지워질 수 있기 위해서, 하나의 양태[사조, 양식]이 있는가? [게다가] 우리들 모두인 특이성들과 원자들의 덩어리[덩이]가 구성하는 권력처럼 소개될 수 있기 위하여 하나의 양태가 있는가? 또는 반대로, 그 파라독스에 따르면 구성하는 권력은 구성된 권력에 의해서만 정의될 수 있는데, 우리는 그 법률적 파라독스를 받아들여야만 하는가? (234)
G.D. - 소수성들과 다수성들은 수에 의해 구별되는 것이 아니다. 소수성은 다수성보다 숫적으로 더 많을 수 있다. 다수성을 정의하는 것, 그것은 모델[원본]이고, 그 모델에 부합해야만 한다. .. 반면에 소수성은 원본이 없고, 그것은 생성이며 과정이다. .. 인민은 항상 창조적 소수성이다. (235)
[발전에 앞서 가는 모델이 있어야 하거나, 성장과 발전에 멘토가 있어야 한다는 것은 상식처럼 받아들이다. 이를 상층의 다수성이라 할 수 있다. 이에 비해 창조와 확장의 과정은 노력에 의해 생성되는 것이다. - 이를 심층의 소수성이라고 할 수 있다. 숫적으로는 후자가 훨씬 많은 것이, 어느 사회에서나 또는 자본주의 사회의 현실이다. 소수가 다수의 잉여를 차지할 수 있기 때문이다.]
가장 위대한 예술가들(대중적인 작가들이 전혀 아니고) 인민에게 호소한다. 그리고 “인민이 갈망한다는 것을 확신한다. 말라르메(Mallarmé 1842–1898), 랭보(Rimbaud, 1854–1891), 클레(Klee 1879-1940),베르크(Berg, 1877-1942). 영화에서는 스트로 부부(les Straub, 1933-, 1936-2006)이다. 예술가는 인민에게 호소할 수 있을 뿐이다. (235)
[노마드의 현자는 상층으로부터 지지와 성원을 받지도 있고 명령과 통제도 받지 않는다. 그 현자는 인민이 갈망하는 대로 인민과 더불어 나가면서, 목마른 자 먼저 우물 파러 가듯이, 장애물을 뚫는데 서두르지 않고 한삽한삽 떠서 태산을 옮길 수 있으리라. (54TKA)]
이상사회(l’utopie)는 좋은 개념이 아니다. 인민에게 또 예술에게 공통하는 오히려 “우화작업(fabulation)”이 있다. 벩송에게 정치적 의미를 부여하기 위하여 우화작업의 벩송적인 용어를 다시 다루어야 한다. (235) [벩송은 MR 2장에서 정태적 종교의 우화적 기능에 대해 설명한다. / 우화적 설화는 가정에서 어린애에게 전승의 일부를 가르치기 위한 방편이다. 이것을 넘어서 사회에서 양식을 갖추고 계약과 연대를 할 수 있어야 하고, 총체적 단위 또는 지구적 관점에서는 어제-이제-아제를 관통하는 고등양식과 직관을 필요로 한다. (54TKA)]
T.N. - 푸꼬에 관한 당신의 책 속에서, 그리고 또한 시청각 국립 연구소(I.N.A.)와의 텔레비전 인터뷰에서, 당신은 권력의 세 가지 실행들[실천들]을 깊이 연구할 것을 제안한다; 세 가지란, 주권(le Souverain, 통치), 훈육(le Diciplinaire), 그리고 특히 오늘날 주도권[헤게모니]이 되는 중인 “(의사)소통”에 관한 통제(le Contrôle)의 권력이다. 한편으로 이 마지막 시나리오는 지배의 가장 높은 완전함으로 귀착하는데, 이 지배란 또한 말투(la parole, 입말)와 상상작용에 닿아있다. 그러나 다른 한편 단연코 오늘날까지도 모든 인간들, 모든 소수자들, 모든 특이자들은 잠정적으로 말투(la parole)를 다시 할 수 있고, 그리고 그 말투와 더불어 더 높은 정도의 자유를 취할 수 있다. 정치경제학 비판요강(1858)의 맑스주의 이상향(유토피아)에서 공산주의는, 조직화의 조건들을 보장하는 기술의 토대 위에, 마치 자유로운 개인들을 관통하는 조직화처럼 정당하게 모습이 이루어진다. 공산주의가 아직도 생각할 수 있는가? 의사소통의 사회에서 공산주의는 아마도 어제[과거]보다 덜 이상향적인가? (236)
G.D. - 분명한 것은 우리가 “통제”의 사회들 속에 들어간다는 것이다. 통제사회는 정확히는 훈육사회가 더 이상 아니다. 푸꼬는 마치 훈육사회들에 대한 사상가인 것처럼, 즉 감금(l’enfermement, 유배)(병원과 감옥 뿐만이 아니라, 학교, 공장, 병영 또한 마찬가지이다)이라는 사회의 중요한 기술에 대한 사상가처럼 자주 간주되었다. 그러나 사실상, 그는, 훈육사회란 우리가 그 사회로부터 떠나는 중에 있는 것이고, 우리가 거기에 이미 더 이상 있지 않다는 것이다, 라고 말한 초기사람들 중의 한 사람이다. 우리는, 감금에 의해서가 아니라 연속적인 통제와 순간적인 소통에 의해 기능하는, 통제 사회들 속에 들어간다. 버로스(Burroughs, 1914-1997)는 이것의 분석을 시작했다. 물론 사람들은 감옥, 학교, 병원에 대해 말하기를 그치지 않는다. 제도들은 위기에 처해있다. 그러나 만일 제도들이 위기에 처해있다면, 위기는 정확히 후위(l’arrière-garde)의 전투들(des combats) 속에 있다. 암중모색 중에 제자리로 놓은 것, 그것은 교육과 배려라는 비준들(sanctions, 상벌들)의 새로운 두 전형들이다. 개방된 병원들, 가정에서 돌봄 팀들 등은 이미 오래전에 나타났다. 사람들은 다른 닫힌 터전처럼 전문적 터전으로 구별되고 있는 교육이 점점 더 닫힌 터전일 것이라고 예견할 수 있고, 그러나 둘 모두가, 영속인 두려운 교육형성을 이용하여, 고등학생-노동자 또는 대학생-간부를 향해 행사하는 계속적인 통제를 이용하여, 사라질 것이다. 그것이 대청소일 때, 사람들은 우리로 하여금 학교 개혁을 믿도록 시도한다. 통제의 체제에서 사람들은 어느 것하고도 결코 끝장내지 못한다. (236-237) [통제사회에서 후방에서 투쟁과 전투가 이룰 수 있는 것은 거의 없다는 의미일 것이다. 전위로...첨점으로 .. ]
“의사 소통의 보편자들”에 대한 탐구들은 우리를 흔들리게 하는 무엇을 갖는다. 사실상 통제사회들이 실재적으로 조직화되기에 앞서서, 위반(la délinquance, 비행) 또는 저항(분명한 두 경우)으로 나타난다. 예를 들어 헤킹들(les piratages, 해적행위) 또는 컴퓨터 바이러스들은 파업을 대체할 것이고, 그것은 21세기의 태업(le sabotage, 방해)(기계 속에서 나막신, sabot). 당신은, 통제 또는 의사소통의 사회들이 공산주의에게 – 자유로운 개인들의 관통하는 조직화로서 생각되는 공산주의에게 - 기회들을 다시 줄 수 있을 저항의 형식들을 부추기지 못할 것인가를 묻는다. 아마도 나는 알지 못한다. (237)
아마도 말투, 의사소통은 부패되었다. 이것들은 전적으로 돈(l’argent)[자본]에 침투되었다. 그것은 우발적이 아니라, 본성에 의해서이다. 말투의 우회(un détournement)가 필요하다. ‘창조하다’는 ‘소통하다’와 항상 다른 것이었다. 중요한 것은 통제를 피하기 위하여, 아마도 비-의사소통의 빈칸(des vacuoles, 공空)을, 차단기들(des interrupteurs)를 창조하는 것이리라. (238) [흐름으로 균열을 낼 뿐만이 아니라 구멍을 내고, 미세한 흐름으로 가로지르기를 해야 할 것이다.]
T.N. - 푸꼬(1986)와 주름(1988)에서 주체화(subjectivation)의 과정은 다른 작품들의 어떤 것들보다 더욱 주의 깊게 관찰되었던 것 같다. 그 주체는 ‘그 안(un dedans)’과 ‘그 밖(un dehors)’ 사이에 연속적 운동의 한계이다. 어떤 정치적 귀결들을 주체의 개념작업이 갖는가? 만일 주체가 시민권의 외재성에서 해결될 수 없다면, 주체는 권능(la puissance)과 삶(la vief, 생명) 안에서 시민권을 세울 수 있는가? 주체는 새로운 전투적 실천 운동과 동시에 매우 급진적인 세계와 건설을 위한 애국심(pietàs, 우애)을 가능하게 할 수 있는가? 역사 속에서 사건과 주체성의 찬란함을 이어가기 위하여 어떤 정치가 [필요한가]? 토대 없이 그러나 권능의 토대로, 전체성 없이 그러나 마치 스피노자처럼 절대적 전체성으로 어떻게 공동체를 사유하는가? (238)
[‘그 안(un dedans)’과 ‘그 밖(un dehors)’의 관계는 상층의 상징(관념)을 기준으로 삼을 때, 현상에서 안과 밖과 같은데, 논리적으로 진리과 거짓처럼 다룬다. 이에 비해, 스피노자든 벩송이든 감화작용에서 실재성은 논리적 관계가 아니라 생성과 생장에서 계열들 사이의 연관이다. 사회와 주체화는 생성에서 덩어리를 형성하는 것이지, 진위를 구별하여 진리를 시민권을 삼는 것이 아니다. 생성과 과정에서 완전하지 않지만 계약과 실행의 노력에서 시민권이 형성되고 또한 발현되는 것으로 형성중인 것이 그 ‘안’이며, 형성된 체계나 배치의 배열들은 그 ‘밖’이다. 스피노자의 방식으로 생산하는 양태와 생산된 양태가 구별되는 것이다. 생산하는 과정에서는 즐거움이, 생산된 양태에서 다른 양태들과 관계에서 완성의 즐거움이거 미완의 불편함과 모자람에서 슬픔이 있다. 싯달다는 타인의 미완에서 연민을 정이 있을 것이고, 함께 태워가야할 큰 수레를 사유했으리라.]
G.D. - 왜냐하면, 사람들이 개인들 또는 집단들을 마치 주체처럼 구성하는 다양한 방식들로 생각할 때, 사람들은 주체화 과정에 대해 말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한 과정들은 과정들이 이루어질 때, 과정들이 구성된 지식들과 지배적인 권력들을 동시에 피하는 정도에서만 가치있을 뿐이다. .. 주체화의 과정들이라기보다 사람들은 또한 사건들의 새로운 전형들에 대해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사건들은, 이 사건들을 자극한 또는 사건들이 함몰한 사물들의 상태들에 의해, 설명되지 않는다. 사건들은 한 순간 스스로 일어나며, 그리고 중요한 것은 그것의 계기[순간]이며, 알아야 할 것은 운(la chance, 기회)이다. 또는(ou bien, [그렇지 않으면]) 사람들은 단순하게 두뇌에 대해 말할 수 있으리라. 안과 밖 사이에 역행할 수 있는 연속적 운동의 한계인 것이 정확하게 두뇌(le cerveau)이다. (238-239) [의식에서 안과 밖은 기억과 외적 지각의 문제인데, 두뇌는 감각작용의 수용과 발산의 운동기구이다. 이런 운동작용의 내부에서 흐르며 침잠해 있던 무의식(기억, 경험의 총체)이 운동기제에 동반한다. 안의 기억과 두뇌(신경계)로 설정된 운동기제의 활동인 밖 사이에서 주체화가 성립할 것이다. 주체화는 주체로서 항상 불변으로 있는 것이라기보다, 외부에서 온 자료와 내부의 기억의 가로지르는 연관에서 주체화의 양태가 성립할 것이다. 이 양태는 능동적이다. 주체는 능동성과 함께, 외부에 적응하고 대응하는 수동성을 함께 지닌다. 이로서 주체의 양태에는 항상 가지치기가 있는데 비해, 주체화 과정은 기억의 총체에 의한 능동성이과 역동성이며, 이는 스피노자의 표현으로 자연의 무한 한 권능 중에서 이중적인 권능(속성)이라 할 수 있다. (54TKB)]
사건으로건 또는 두뇌로건, 주체화는 나에게 약간은 동일한 것(사물)이다. 세계를 믿는다(Croire au monde), 그것은 우리에게 가장 갈망하는 것이다. 우리는 세계를 완전히 잃어버렸고, 사람들은 우리에게 세계를 박탈했다. 세계를 믿는다, 그것은 또한 통제를 피하는 작은 사건들 자체를 선동하는 것이고, 또는 새로운 시간들-공간들을, 심지어는 축소된 표면 또는 축소된 체적을 태어나게 하는 것이다. 그것은 당신이 애국심(pietàs, 우애)이라 부른 것이다. 저항의 능력이 또는 반대로 통제에 복종이 판단[심판]되는 것은 각각의 시도[노력]의 수준에서 이다. 창조 그리고(et) 인민이 동시에 필요하다. (239) [주체화의 근원은 자연(la Nature) 또는 생명(la Vie) 즉 세계이며, 역동성은 자연의 권능 즉 인민이다. 인민의 활동력으로서 창조, 창안, 창발, 발명, 발견, 생장, 성장, 확장을 노력 하는 장에서 이루어진다. 그 장이 흐름이며, 노마드가 제국으로부터 벗어나는 탈영토화, 그것의 분출선에서 드러난다. 인민과 창조는 연관이 있다. (법칙화하는) 관계가 아니다. (54TK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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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명 ***
1599 크롬웰(Oliver Cromwell, 1599–1658) 영국 시민혁명가, 국가 수반.
1632 스피노자(Baruch Spinoza, lat. Benedictus de Spinoza, 1632-1677)는 네덜란드 암스테르담에서 태어난 포르투갈 계 유대인 혈통의 철학자이다.
1711 흄(David Hume, 1711-1776) 스코틀랜드 출신의 철학자, 경제학자, 역사가.
1740 사드 후작(Donatien Alphonse François, marquis de Sade, 1740-1814) 프랑스 문인, 소설가, 철학자, 정치인. 쥘리에뜨 이야기(Histoire de Juliette ou Les prospérités du vice, 1797)[등장인물: 쉬지(Chigi)]
1818 맑스(Karl Marx, 1818-1883) 독일의 철학자, 경제학자, 역사학자, 사회학자, 정치경제학 비판 요강 Grundrisse der Kritik der politischen Ökonomie, 1858)(자본론의 초고에 해당하는 책)
1836 자허-마조흐(Leopold von Sacher-Masoch, 1836-1895) 역사학자, 소설가. 언론인. 갈리이사(Galica) 왕국의 렘베르크(deu. Lemberg 우크라이나어 리비우(L'viv, en français Lvov, Lviv)에서 태어났다.
1842 말라르메(Stéphane Mallarmé, Étienne Mallarmé 1842–1898), 프랑스 시인, 비평가. 상징주의 시인, Hérodiade, 1864-1867
1844 니체(Friedrich Wilhelm Nietzsche, 1844-1900), 독일의 문헌학자, 철학자. 서구의 오랜 전통을 깨고 새로운 가치를 세우고자 했기 때문에 '망치를 든 철학자'라는 별명이 있다.
[니체-르네상스(Nietzsche-Renaissance) 이탈리아에서 .... ]
1854 랭보(Jean Nicolas Arthur Rimbaud, 1854–1891)[서른일곱] 프랑스 시인.
[1875 버러우즈(Edgar Rice Burroughs, 1875-1950)(à 74 ans), 미국 소설가, 타잔(Tarzan) 창조(타잔은 1920년대 무성 영화 시절부터 1999년 월트 디즈니가 만화 영화로 각색해 공개할 정도로 영화가에서 꾸준히 사랑받고 있는 소재이다.) 공상과학 소설과 추리소설도 많다.]
1877 베르크(Else Berg, 1877-1942) 유대계 폴란드 태생 네델란드 여성화가, 나찌 점령시에 별을 달기 거부했다고 아우슈비츠에 도착하여 암살당했다고 한다.
1878 스탈린(Joseph Staline1, 1878-1953) 조지아 출신, 러시아 볼세비l키 혁명가. 소비에트 서기장.
1879 파울 클레(Paul Klee 1879-1940) 스위스 화가이자 음악가. 현대 예술론(Théorie de l'art moderne(1924 Über moderne Kunst ('On Modern Art'))
1914 버러우즈/버로스(William Seward Burroughs, 1914-1997)[여든다섯], 작가, 시인, 소설가, 화가, 시나리오작가, 공상과학 작가, 산문가, 사진가. 비트 세대. 동명의 아버지(아들보다 오래 살았다). 정키: 회복되지 못한 마약 중독자의 고백(Junky, 원제: Junkie: Confessions of an Unredeemed Drug Addict, 1953). // 1947 아들 버러우즈/버로스(William S. Burroughs Jr., 1947-1981)[서른넷] 미국 소설가, 작가. 동명의 버러우즈의 아들. 자전적 소설 속도(Speed, 1970).
1919 레비(Primo Levi, 1919-1987) 이탈리아 작가 화학자. 1944년 아우슈비츠(Auschwitz- Monowitz) 유형장에 대해 이야기했다.
1926 미셸 푸코(Michel Foucault, 1926-1984), 프랑스 철학자. 레이몽 루셀(Raymond Roussel, 1963), 지식의 고고학(L'Archéologie du savoir, 1969), 감시와 처벌: 감옥의 탄생(Surveiller et punir. Naissance de la prison, 1975, 성의 역사 1: 지식의 의지(Histoire de la sexualité, vol. 1: La volonté de savoir, 1976), 성의 역사 3: 자기 배려(Histoire de la sexualité, 3: Le souci de soi, 1984)
1930 가타리(Félix Guattari 1930-1992) 고등학생 때부터 청년사회주의 단체에서 활약하였다. 그는 초기의 횡단성 개념을 통해 구조주의를 공격해 나가던 것에서 점차 분열분석 방법을 통해 사회에 대한 새로운 실천을 모색하였다. 그는 국가권력의 탄압에 저항하면서도 권력 장악을 위한 대(大)정치가 아니라 다양한 주변자들, 소수자를 중심으로 대중들이 전개하는 '분자혁명'을 강조하였다.
1933 네그리(Antonio Negri dit Toni Negr, 1933-) 이탈리아 파투아 출생, 이탈리아 철학자, 정치가.
1933 스트로(Jean-Marie Straub, 1933-) 그리고 윌레(Danièle Huillet, 1936-2006) 프랑스 영화인 커플
1945 가렐(Philippe Garel, 1945-) 프랑스 예술가, 화가. / 가렐(Philippe Garrel, 1948-) 프랑스 영화감독. - 들뢰즈 인용(234)은 전자 일 것이다.
1946 에발(François Ewald 1946-), 프랑스 지성인, 한 때 마오이스트, 예술직업학교 교수
1947 상바르(Elie Sambar, Elias Sanbar, 1947-) 팔레스타인 태생, 역사가, 시인, 수필가. 평화운동가. 들뢰즈와 우정을 유지했다. 「」 「」「」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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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5 “시청각 국립 연구소”(L'Institut national de l'audiovisuel INA, 1975)는 1974년 법령에 의해 1975년 설립되었다. 프랑스의 산업적이고 상업적인 특성을 띤 공적인 설립이다. 이는 모든 공중들에게 제공할 시청각 생산물의 문헌자료로 만드는 임무와 시청각적이고 멀티미디어 내용을 생산하고 편집하는 임무를 띠고 있다. 주로 시청각 매체를 위한 것이지만 부분적으로 TV, 라디오, 매체들, 전산 등도 다룬다. 1992년부터 위탁소가 되어 도서관처럼 이나테크(Inathèque) 보관소를 갖추었다
1983 영화 버로스(Burroughs, 1983), 영화 작가 버로스(William S. Burroughs, 1914-1997)의 참여로 제작 된 최초이자 유일한 다큐멘터리입니다. 미국 영화감독인 하워드 브룩너(Howard Brookner 1954-1989)는 버로스(Burroughs)의 삶의 이야기를 그의 동시대 사람들과 함께 탐구합니다. 진스버그(Allen Ginsberg, 1926-1997), 기신(Brion Gysin, 1916-1986), 비트세대 아이콘인 허버트 훈케(Herbert Huncke, 1915–1996), 여가수인 패티 스미스(Patricia Lee Smith, Patti Smith, 1946-), 테리 사우선(Terry Southern 1924-1995), 및 미국 여배우 로렌 허튼(Lauren Hutton, 본명 Mary Laurence Hutton, 1943-)이 참여했다. / 부루크너(Brookner)는 버로스(William S Burroughs)로부터 5년 동안 비교할 수없는 액세스와 열정적인 참여를 얻었습니다. 결과적으로 버로스: 기록영화(Burroughs: The Movie, 1983)는 Burroughs의 길고 논란이 많고 생산적인 삶을 매우 자세하게 기록합니다. 이 영화는 미국 중서부에서 북아프리카로 여행하며, 몇 가지 개인적인 비극을 포함하여 그의 격렬한 비전통적인 삶의 순간을 정의하며 궁극적으로 버로스(Burroughs)의 독특한 문학적 스타일의 발전을 도표화합니다. 한.위키(site:ko.wikiqube.net)
- 만약에 내가 무인도에 산다면, 그래서 누구도 내 글을 읽을 수 없다면, 그래도 계속 쓰겠냐고 묻는 사람들이 있어요. 내 답은 확실한 ‘예’입니다. 글을 벗 삼아 쓸 거예요. 왜냐면 내가 창조하는 것은 내가 존재하고 싶은 상태에 대한 상상물(언제나 상상물이기) 때문이죠. - 파리 리뷰와의 인터뷰, 1965년 가을 발행
클레이오/클리오(Clio, Κλειώ: κλέω/kleô, « célébrer, chanter ») 그리스 신화에서 클리오는 제우스와 기억의 여신(Mnémosyne)의 딸이다. 역사의 뮤즈(la Muse de l'Histoire)이다. 샤를 페기의 시에도 등장하는 클리오는 들뢰즈의 작품에서 자주 등장한다.
전미래(Futur antérieur)는 1990년 뱅상(Jean-Marie Vincent), 베르제르(Denis Berger), 네그리(Toni Negri)의 주로 창간되었다. 1990-1998년까지 특별호 10와 분기별 43호를 발간한 학술지였다. 2000년 3월에 정치, 문화, 예술지로서 다중(Multitudes)에 통합되었던 것 같고, 여기 편집장 물리에-부탕(Yann Moulier-Boutang)이다.
팔레스타인 해방 기구(Organisation de libération de la Palestine O.L.P; en Palestine Liberation Organization, PLO): 1964년 독립국 팔레스타인을 수립하기 위해 세워진 기구로, 유엔과 100 개 이상의 국가로 부터 “팔레스타인을 대표하는 유일한 법적 조직”으로 인정되고 있다. 1974년 유엔의 참관국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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