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 일]
몇 주 전부터 어떻게 하는 것이 좋을까 고민에 빠졌다. 최종 결정은 기다렸다가 나중에 하기로 마음을 먹었다. 여러 가지 사정을 이유로 이번에는 참석하지 않기로 하였는데 사흘을 앞두고 아들과 며느리가 연이어 전화를 한다. 바쁜 일 앞뒤로 정리하고 같이 시간을 보내자고 연락이 왔다.
기차표 예매를 하려고 앱에 접속을 하는데 온통 매진이다. 입석 자리 조차 없다. 이참에 핑계 거리가 생겨 다음 기회에 만날 수 밖에 없을 것 같다는 문자를 남겼는데 몇 십 분만에 예매된 기차표를 보내온다. 변명의 여지도 없이 물러서지 못하고 아들 집을 방문하게 되었다.
일요일이지만 아침 시간은 차들로 붐빈다. 직접 승용차를 몰고 역으로 향했다. 자칫하다가는 기차를 놓치는 불상사가 생길 수 있어 시간 계산을 역으로 해본다. 이십 여분 정도 여유가 있다. 선상 주차장에는 빈 공간이 거의 없다. 간신히 차를 세우고 승강장으로 향하는데, 나보다 2년 먼저 퇴직한 옛 직장 동료를 3년 여만에 만났다. 수도권에 있는 작은 아들을 만나러 가는 길이란다. 자식 키우는 부모 입장은 누구나 비슷한 모양이다. 머리를 기르고 뒤쪽으로 묶어 첫 모습 만으로는 모르고 지나칠뻔 했다. 그 동안의 안부를 묻고 서로의 건강을 기원하며 발길을 옮겼다.
두 시간을 타고 달려 도착한 기차역에는 아들이 마중을 나와 있다. 행사에 쓸 떡을 찾아오느라 시간이 늦어졌단다. 현관 문을 열고 집에 들어서는데 손녀는 잠을 자고 있다. 화장실로 달려가 손을 씻자마자 손녀의 얼굴을 어루만지고 손가락과 발가락을 잡아본다. 얼마나 깊은 잠을 자는지 볼을 건드리고 팔을 잡아도 반응이 없다. 우리 부부가 도착할 무렵 잠이 들었단다. 뒤척이는 몸놀림조차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태세다.
예로부터 백일을 맞이한 아기는 무사히 잘 자란 것을 대견하게 여기고 잔치를 벌여 축하해 주던 것이 우리의 풍습이다. 의술이 발달하지 못했던 시절에 이 기간중 유아의 사망률이 높아 비롯되었다. 오늘날에는 이와 상관없이 전래 풍습으로 이어지고 있다. 아침에 삼신(三神) 상으로 미역국과 흰 밥이 차려지고 아기의 건강과 복을 빈다. 이것이 끝나면 차린 음식은 산모가 먹는다.
백일상에는 과일과 풍선, 아기가 앉을 받침대까지 위치시키고 상차림을 준비한다. 잠을 자고 있는 손주를 깨워 자리에 앉히는데 균형을 잡지 못하고 몸이 한쪽으로 기울어진다. 잠이 부족한지 부모의 바람과 달리 울음으로, 얼굴에는 환한 웃음이 아니라 눈썹에 주름이 돋는다. 아이를 달래가며 백일 기념 사진을 찍는데 자세 잡기가 쉽지 않다. 울음이 시작되었다. 자세를 바르게 앉히겠다고 부모는 애를 쓰지만 아기가 몸을 가누기에는 성장이 못 미친다.
사진 찍는 것을 뒤로 미루고 손주를 살며시 안아준다. 왼쪽 팔로 머리를 받치고 오른손으로 우유병을 잡고 우유부터 먹인다. 태어날 때부터 미숙아요 저체중으로 세상에 나왔다. 오늘, 할아버지 할머니가 동참하여 백일을 맞이한 아기를 신비스런 눈으로 바라본다. 작고 여린 녀석이 어느새 옹아리를 하고 소리 없는 웃음을 짓는다. 하루하루 다르게 보여 주는 모습이 소중하고 아쉽다. 아들과 며느리는 아기가 똥을 누기 위해 힘쓰는 장면까지 영상으로 전해 준다. 품에 안긴 공주를 내려다 본다. 눈 맞춤은 어쩌다 이루어지지만 손짓과 발차기는 멈추지 않는다. 주먹 쥔 손가락을 살며시 펼쳐 본다. 나의 검지 손가락을 손주의 손에 쥐어 준다. 앙증맞은 아가가 붙잡는 손가락에 힘이 느껴진다. 작은 체구에도 무탈하게 병원 드나드는 일 없이 자란 모습에 두 손 모아 경의를 표한다.
지난 날, 출산 예정 일이 한 달이나 남았는데 양수가 흘러나와 산모가 응급실로 실려갔다는 소식을 전해 들었다. 짧은 시간이지만 여러 가지 생각을 하게 만들었다. 그 동안의 일을 뒤로하고 손주가 이만큼 자란 모습에 감사함을 되뇌인다.
손주는 잠이 들었다. 우유병을 작은 입술에서 떼어 낸 후 아기를 어깨에 걸쳐 안고 등을 토닥인다. 금새 어른처럼 크게 트림을 한다. 아기 방에 눕히고 아들 부부와 우리 부부 넷이 며느리가 준비한 미역국을 먹는다. 여유는 멀어지고 ㄷ숟가락을 놓자마자 작은 방으로 발길을 옮긴다. 바른 자세로 누운 손주가 만세를 부르듯 두 팔을 머리쪽으로 올린채 잠을 잔다. 잠자는 모습조차 눈을 뗄 수 없어 아가 옆에 앉아 떠날 줄을 모른다. 손주 자라는 모습을 지켜 보는 재미는 자식 클때와는 비교가 되지 않는다. 우유를 먹다 우는 모습과 몸짓 하나부터 소리까지 모두 관심의 대상이다.
저녁 외출을 앞두고 자는 아기를 살며시 안아 잠이 달아나게 만들었다. 집으로 돌아가기 전까지 조금이라도 눈에 담고 싶어 손주의 평소 생활 리듬에는 생각에 없다. 기차 시간에 맞추어 미리 저녁을 함께 먹기로 했다. 꼬맹이를 유모차에 태우고 식당으로 들어선다. 주문한 음식이 나오고 밥을 다 먹도록 잠을 잔다. 어른들이 여유롭게 식사하도록 조용히 눈을 감고 있다. 가끔 몸을 들썩이는 모습은 오히려 고마워 눈을 집중한다.
며느리가 생일 선물을 챙겨 준다. 아들이 결혼 한 후 두 번째 맞이하는 내 생일이다. 손주의 백일 축하 자리에 만나 ‘떡 본 김에 잔치’라며 색상과 치수를 직접 찾아 권한다. 짙은 색상보다는 연한 니트가 어울린다며 엄지를 치겨 세운다.
아들 내외가 더 없이 귀엽다. 아이가 귀하니 산모의 대접도 다르다. 아이를 둘 이상 낳던 시절과는 비교가 되지 않는다. 며느리가 자랑스럽다. 딸을 키우고 있으니, 오빠 닮은 아들도 낳고 싶단다. 부부 사이에 특별한 문제가 없는 한 ‘자식은 두 셋은 두고 싶어요.’ 부부의 진지한 이야기에 너희가 ‘힘이 들텐데’라는 말로 대신한다. 결혼은 선택일 뿐이고, 결혼을 하더라도 아이를 낳지 않는 현실이다. 아들과 며느리가 여러 사람들 앞에서 어른으로서 다짐을 하고 일 년 조금 지난 시간에 손주를 안겨 주었으니 이 얼마나 기쁜 일인가.
모든 결정은 개인의 의사를 존중한다. 동시에 선택의 결과는 오로지 책임과 의무가 따를 뿐이다. 부부 둘만의 여유와 사랑이라는 행복을 목표로 살아가는 이도 있다. 아이를 키우는 고통 너머에 재롱을 펼치는 무한한 사랑을 기대하게 해 준다. 두 가문이 만나 서로 다른 문화적 차이를 극복하고 가족이 함께 만들어 가는 결혼 생활 속에서 얻은 또 다른 행복을 느낀다.
손주의 백일에 작은 소망을 빌어본다. 건강하고 총명한 앞 날을 기원하면서 몸은 무겁지만 애정이 스며든 하루를 정리하면서 즐거움을 간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