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의 고장 강릉(江陵)
(6) 강릉향교(江陵鄕校) 산하(傘下) 서원들
송담서원 / 송담사(松潭祠) / 묘정비각(廟庭碑閣)
강릉향교 산하(傘下) 관리(管理) 기관으로 두 곳의 서원(書院)과 열 곳의 사우(祠宇), 한 곳의 영당(影堂)이 있다. 서원(書院)은 한 명, 혹은 몇 명의 성현(聖賢)을 모시고 제향을 올리는 것은 물론 유생들의 교육도 담당하던 곳이다 보니 향교의 축소판이라 할 수 있고, 사우(祠宇)와 영당(影堂)은 교육은 하지 않고 영정(影幀)을 모시고 제향(祭享)만 올리는 사당(祠堂)이다.
① 송담서원(松潭書院)-강원도 유형문화재 제44호
강릉시 강동면(江東面) 언별리(彦別里)에 있는 송담서원(松潭書院)은 율곡(栗谷 李珥)의 위패(位牌)를 모시고 있는 서원으로, 원래는 조선 인조 2년(1624년) 강릉부사(江陵府使) 윤안성(尹安性) 외 30여명의 유생들이 구정면(邱井面) 학산리(鶴山里) 왕고개 위에 석천서원(石川書院)을 세웠는데 1630년에 당시 강릉부사였던 이명준(李命俊)이 이 석천서원에 율곡을 모셨다고 한다. 그 후 효종 10년(1659년)에 송담서원(松潭書院)이라는 사액(賜額)을 받은 후 현종 9년(1668년)에 현재의 위치인 강동면 언별리로 옮겼다고 한다.
이곳에는 1726년에 세운 묘정비(廟庭碑)가 있는데 당시 영의정(領議政)이었던 정호(鄭澔)가 글을 지었고 우의정(右議政) 민진원(閔鎭遠)이 글을 썼다고 하는 비석이다. 그런데 순조 4년(1804년), 이 부근에 대형 산불이 일어나 건물과 소장되어 있던 신사임당초충도병(申師任堂草蟲圖屛)이라는 8폭의 병풍이 소실(燒失)될 위기에 처했는데 다행히 이웃 주민이 건져내어 강릉시에 기증하였다가 지금은 오죽헌(烏竹軒)에 소장되어 있다.
파주 율곡기념관의 전시작품<사임당의 8폭 초충도병(草蟲圖屛) / 매창(梅窓)의 그림 / 우(瑀)의 그림>
그런데 내가 경기도 파주(坡州)에 있는 율곡기념관(栗谷紀念館)에 갔다가 내 눈에 너무도 익숙한 사임당의 초충도(草蟲圖) 8폭 병풍(屛風)이 세워져 있어서 깜짝 놀랐던 기억이 난다.
사임당이 낳은 셋째아들 율곡은 너무나 유명하고, 큰딸 매창(梅窓)과 막내아들 우(瑀)가 사임당의 재능을 이어받아 그림을 잘 그렸는데 병풍 아래 단매로 그린 그림들이 놓여있는데 매창(梅窓)과 우(瑀)의 그림이었다. 우리나라 최고액권인 5만 원권 지폐의 앞면에는 사임당의 초상화와 포도 그림이 배경으로 들어가 있고 뒷면에 있는 매화도(梅花圖)는 바로 사임당의 큰 딸 매창(梅窓)의 그림이다. 그런데 무엇보다 의문이 가는 것은 사임당의 초충도(草蟲圖) 8폭 병풍(屛風)으로 내가 예전 분명히 강릉 오죽헌에서 보았는데 어찌하여 이곳에 와 있는 것일까?
혹시 모작(模作)이나 사진이 아닐까, 아무리 뜯어보아도 분간이 되지 않는다.
② 오봉서원(五峯書院)-강원도 유형문화재 제45호
강릉시 성산면(城山面) 오봉리(五峯里)에 있는 오봉서원은 조선 명종 11년(1556년), 강릉부사 함헌(咸軒)이 사신으로 중국을 다녀오면서 중국 당대(唐代)의 대 화백(畵伯) 오도현(吳道玄)이 그린 공자(孔子)의 진영(眞影)을 가져와서 명종 16년(1561년), 이곳에 서원(書院)을 세우고 모셨다고 한다.
오봉서원(五峯書院) / 오봉강당(五峯講堂) / 기적비각(紀跡碑閣)
그 후, 정조 6년(1782년)에는 주자(朱子)의 영정(影幀), 정조 13년(1813년)에는 우암(尤庵 宋時烈) 영정(影幀)을 모셨는데 고종 5년(1868년) 흥선대원군(興宣大院君)의 서원철폐령(書院撤廢令)으로 폐쇄되어 공자(孔子)의 영정은 강릉 향교로, 주자(朱子)와 송시열(宋時烈)의 영정은 연천 임장(臨漳) 서원으로 옮긴다.
기적비(紀蹟碑)는 순조 6년(1806년)에 건립한 것으로 판서(判書) 이만수(李晩秀)가 찬(撰)하고 제학(提學) 조윤대(曺允大)가 썼으며, 묘정비(廟庭碑)는 철종 7년(1856년)에 건립했고 영의정(領議政) 조두순(趙斗淳)이 찬(撰)하고 판서(判書) 이종우(李鍾愚)가 썼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