꼴두바위 유래
상동광업소 우측 골짜기에 있는 화강암으로 된 바위를 ,꼴두바위,라고 부른다. 조선 시대 송강 정철 선생이 강원감사로 재직하고 있을 때 우연히 이곳을 지나다가 꼴두 바위를 보고 넙죽 절을 하면서 “이 큰 바위로 인하여 이 곳 심산유곡에 만인이 살리라”
라고 예언을 하였다. 그 후 송강 정철 선생의 예언대로 1923년 상동중석광이 개광되면서
한 때는 인구 3만여명이 모여 사는 읍지역이 되었다.
옛날 상동읍 구래리에 젊은 부부가 살고 있었다. 이들 부부는 주막을 차리고 나이든 어머니를 모시고 살아가고 있었다. 다행히 주막을 찾는 손님들이 많아, 먹고 살 만큼의 돈도 모을 수 있었다. 그러나 이들 부부에게도 한가지 걱정이 있었다. 바로 대를 이을 아들이 없다는 것이다.
며느리가 온종일 찾아드는 손님들 시중을 들다가 지쳐서 잠깐 쉴 틈이면, 시어머니는 아들을 낳지 못하는 며느리를 구박하곤 하였다. 그러던 어느날 며느리는 인근 마을에 살고 있는 노스님을 찾아가 자신의 처지를 말하고, 아들을 낳을 수 있는 방법을 물어보았다.
며느리의 안타까운 사연을 들은 노스님은 꼴두바위에 올라가, 석달 열흘 동안 치성을 드리면 아들을 얻을 수 있을 것이라고 며느리에게 일러주었다. 그러나 그 대신 주막집에 손님이 끊겨 앞으로 가난을 면치 못할 것이라고 하였다.
노스님의 말을 들은 며느리는 아들없이 사는 것이 가난하게 사는 것보다 더 힘들다고 생각하고, 아들을 얻고자 하는 일념으로 하루도 쉬지 않고, 꼴두바위에 올라가 치성을 드렸다.
한편, 시어머니는 손주를 얻을 수 있으나, 또 다시 가난한 생활을 해야 한다는 이야기를 듣고 며느리의 그러한 소행을 괘씸하게 여겨 며느리에게 밥도 주지 않는 등 온갖 구박과 학대를 하면서 꼴두바위에 치성을 드리는 것을 중단하라고 하였다.
이러한 시어머니의 학대를 받으면서도 며느리는 매일같이 꼴두바위에 치성을 드렸다.
그러나 치성을 드리던 며느리는 백일을 채우지 못하고, 아들에 대한 한을 간직한 채
그만 세상을 뜨고 말았다.
그 후 하늘은 며느리 대신 꼴두바위로 하여금 중석을 잉태하게 하여 며느리의 한을 풀어주었다고 한다. 마을 사람들도 며느리를 불쌍하게 여겨 돌로 며느리 모양의 ‘꼴두각시’를 깍아 놓고 매년 며느리의 한을 달래주기 위해 제사를 지내주었다고 한다.
세월이 흘러 오늘날에는 득남, 취업, 입시, 결혼 등의 소원을 이루기 위해 수많은 사람들이 꼴두바위 성황당에서 소원을 빌고 있으며, 소원을 이루기 위해서는 치성을 드린 후 꼴두바위 정기를 듬뿍 받을 수 있도록 바위 소재지인 상동에서 하룻밤을 묵어야만 한다는 전설이 전해내려 온다.
영월군에서는 우리나라 경제발전의 중추적 역할을 한 동양최대의 중석광산을 탄생시킨 꼴두바위를 관광지로 개발하고자「꼴두바위 전설 형상화」와 함께 대규모 공원을 조성하여 현재 이 곳 주민들의 휴식공간과 광산문화를 계승하는「꼴두바위 축제」의 장으로 활용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