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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을 찾아서> 3장. 바른 사유
작성자:담마삐야
제3장 바른 사유
6. 베다 경전을 버림
다섯 빅쿠는 빠라미를 이미 다 채운 분들이었다. 지계와 사마디를 충분히 갖추었고 청정했다.
하지만 아직 믿음과 견해까지 청정하지는 못했다.
그들은 의식 안으로 들어오는 모든 대상들을 자신들의 통념 안에서만 인지할 수 있었다. 그때까지 그들은 닛짜nicca(항상함), 수카(행복), 수바subha(아름다움), 앗따(유아견)로만 대상들을 알 수 있었다.
💢수바(아름다움)의 관점에 앗따(유아견)가 들어가면, 나무 침대도 황금으로 된 궁궐처럼 묘사될 수 있다(💥자신의 견해대로 대상을 왜곡해서 안다). 그들은 💥대상을 물질과 정신으로 구분하여 알지 못했다. 또한 💥대상의 원인과 결과를 숙고할 줄도 몰랐다. 사정이 이러한데, 어찌 무상·고·무아를 알 수 있었겠는가?
이에 붓다께서는 다섯 빅쿠의 믿음과 견해가 청정해지도록 우선 물질과 정신에 대해 설하셨다. ☸️대상을 물질과 정신으로 구분해서 알기 시작해야 비로소 믿음과 견해가 청정해질 수 있기 때문이다.
그다음 붓다께서는 이들에게
☸️💎👑🪷물질과 정신이 원인과 결과로 연결된다는 것을 이해하도록 설하셨다.
원인과 결과가 연결된 순리로 작용하여 물질과 정신이이에 붓다께서는 다섯 빅쿠의 믿음과 견해가 청정해지도록 우선 물질과 정신에 대해 설하셨다. ☸️대상을 물질과 정신으로 구분해서 알기 시작해야 비로소 믿음과 견해가 청정해질 수 있기 때문이다.
그다음 붓다께서는 이들에게
☸️💎👑🪷물질과 정신이 원인과 결과로 연결된다는 것을 이해하도록 설하셨다.
원인과 결과가 연결된 순리로 작용하여 물질과 정신이 생겨난다는 것을 깨닫게 될 때, 이 세상에 어떤 존재나 중생들이 실재하는 것이 아니라 단지 물질과 정신만이 실재임을 이해할 수 있기 때문이다.
또한 관념일 뿐인 세간에서의 약속(삼무띠삿짜)에 의해, 물질과 정신의 집합을 존재나 중생 또는 물건이라고 부른다는 것을, 물질과 정신의 집합 외에 별도로 실재하는 ‘자아’란 없다는 것을 깨닫고 이해할 수 있기 때문이다.
붓다의 가르침을 듣고 나서 마침내, 이들은
💥 유아견과
💥법에 대한 의심(위찌낏차vicikicchā)이 잘못된 것임을 어렴풋이 알게 되는 ‘쭐라소따빤나cūla-sotāpanna’(작은 수다원)에 이르렀다.
이제 붓다께서는 다섯 빅쿠가 무상·고·무아의 특성을 바르게 알게 하고자 위빳사나를 설하신다. 이때 칸다(5온)와 우빠다낙칸다(5취온)를 구분하여 설하신다.
이 세상 모든 것들은 – 물질이든 정신이든 – 원인과 결과라는 순리에 따라 각각의 성품 그대로 생겨나고 머무르다가 소멸한다. 이것은 특별히 위빳사나로 관찰할 필요도 없다. 이러한 이치는 우리들 자신과 전혀 상관없이 이루어지는 일이기도 하다. 아무튼, 이런 원리로 5온이 생겨나는 것이다. 관념이나 덩어리가 아닌 실재하는 5온 말이다.
그런데 물질과 정신으로서 실재인 5온이 인간들의 눈·귀·코·혀·피부라는 5문(五門)으로 들어와 의식의 흐름과 부딪칠 때, 실재였던 5온은 더 이상 실재가 아니게 된다. 관념과 섞이고 덩어리가 생겨나 존재와 중생이 되어버리는 것이다.
이것을 위빨라사 니밋따vipallāsa-nimitta(왜곡된 이미지)라고 한다.
맑은 거울에 어떤 물건이 비친다. 물건이 사라짐과 동시에 거울에 비친 그 물건의 그림자도 함께 사라진다. 물건의 그림자가 거울 안으로 스며들어 남지 않고, 거울도 물건의 그림자를 잡고 있지 않다. 보이면 볼 뿐이고 들리면 들을 뿐이다.
그런데 위빨라사 대상들이 이미지 정도의 수준에 이르게 되면, 왜곡된 이미지들이 범부의 의식 안에 스며들어와 퍼지게 된다. 의식 안에 숨어 있는 번뇌들도 그 물건들의 이미지들을 움켜쥔다. 이렇게 퍼져 스며드는 특성을 ‘아사와(번뇌)’라고 부른다. ☸️💢‘아사와’는 세상으로서는 무색계까지, 법으로는 고뜨라부gotrabhū(출세간 도와 과 직전의 의식 상태. 이때부터는 열반을 대상으로 한다) 전까지 범부의 의식 속에 스며들어 있다.
힘주어 움켜쥐고 놓지 않는 성질을 ‘우빠다나’라고 부른다. ‘우빠다나’는 사진기의 인화지에 남겨지는 그림자와 같다. 관련된 물건은 이미 사라졌지만, 그 대상의 그림자가 마음 안에 사라지지 않고 계속 떠오르며 남아있는 것이다.
이것을 ‘우빠다낙칸다’(5취온)라고 한다.
‘우빠다낙칸다’는 ‘덩어리진 5온’이다. 5온에서 덩어리가 사라지도록, 관념과 실재로 나누어지도록, 다시 말해 무상·고·무아가 드러나도록 관찰해야 한다.
그래서 우리는 대상들이 의식 안에 아사와로 스며들지 못하도록, 자신의 인드리야indriya(5문)를 잘 다스리고 관리해야 한다. 이것을 ‘인드리야상와라실라indriya-saṁvara-sīla’(5문으로 들어오는 대상에 집착하지 않도록 5문에서 일어나는 번뇌를 잘 사띠하는 빅쿠들의 계율)라고 부른다.
수행자는 자신의 인드리야(5문)를 잘 지키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그래야만 진정한 행복을 향해 전진할 수 있다.
진정한 행복은 물질에 있지 않다. 물질은 ‘라박가마핫다나lābhagga-mahaddhana’에 해당하는 것으로서 아사와가 머무르는 자리이다. 그래서 다섯 빅쿠는 재물을 버린 것이다. ‘라박가마핫다나’(재물이 많음)는 직위, 명성, 재물이 풍족함을 뜻한다.
진정한 행복은 세간을 향하는 지혜, 기술, 견문에 있지 않다. 세간의 지혜는 ‘바후삿짜마핫다나bahūsacca-mahaddhana’(배움이 많음)로서 아사와가 머무르는 자리다. 다섯 빅쿠는 이를 알았기에 베다 경전을 더 이상 연구하지 않고 미련 없이 버렸다. 그럼, 진정한 행복은 어디에 있는가?
☸️💎진정한 행복이란 아리야삿짜ariya-sacca (4성제)에 있다. 그들은 이 이치를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다섯 빅쿠는 여전히 범부였다. 그들도 여느 범부처럼 번뇌의 뿌리가 뽑히지 않아, 소리 내어 우는 ‘통곡’과 마음이 탈진한 ‘기진’ 사이를 오가며 유사(類似) 행복만을 누리는 사람들이었다. 그러나 이제 그들은 붓다의 말씀을 듣고 고요함으로 방향을 틀었다. 삽반뉴딴냐나(모든 알아야 할 것을 스스로 깨달은 지혜)의 주인인 붓다를 만났고 최초의 제자가 되었다. 다섯 빅쿠는 빠라미가 완성된 분들이었다. 이번 생에서 아라한 과(아라핫따 팔라arahatta-phala)를 얻어 열반을 보고 진정한 행복을 얻을 분들이었다.
하지만 붓다께서 그들에게 <담마짝깝빠왓따나숫따>(초전법륜경)을 설하실 때, 그들의 견해는 아직 (4성제를 알 수 있을 만큼) 거울처럼 맑지는 못했다. 그때까지 그들은 마음에 떠오르는 대상들이 생겨남을 생겨남이라고, 있는 것을 있는 그대로 아는 ‘야타부따냐나yathābhūta-ñāṇa’로 볼 수 없었다.
<담마짝깝빠왓따나숫따>(초전법륜경)에서 설하는 ‘야타부따냐나’는, 물질과 정신을 구분지어 아는 ‘나마루빠빠릿체다냐나nāmarūpa-pariccheda-ñāṇa’부터 욕계·색계·무색계 3계 어디에서나 독사를 보듯 두려움을 느끼는 지혜 ‘아디나와냐나ādīnava-ñāṇa’까지이다. 여기까지가 ‘따루나 위빳사나 taruṇa-vipassanā’(연약한 위빳사나)이다.10)
붓다께서는 계속해서 그 뒤에 있는 ‘닙비다냐나nibbidā-ñāṇa’(지겨워하는 지혜)부터 시작 해서 도의 지혜, 과의 지혜까지 얻을 수 있도록 설하셨다.
‘닙비다냐나’부터 도의 지혜와 과의 지혜에 이르기 전까지의 위빳사나 지혜를 ‘발라와 위빳사나 balava-vipassanā’(힘센 위빳사나)라고 부른다. 후대에는 빠라미가 성숙하지 못한 이를 위해서 위빳사나 지혜 단계를 10단계 혹은 12단계로 나누어 보여주기도 한다.
‘삼마딧티’(바른 견해)는 거울처럼 맑아서 자신에게 떠오르는 대상을 생겨나면 생겨나는 대로, 있는 것을 있는 그대로 아는 것인데, 붓다께서는 이 지혜를 위해 두 번째 도의 요소인 ‘삼마상깝빠sammā-saṅkappa’(바른 사유)를 설하신다. ‘삼마상깝빠’는 삼마딧티와 마찬가지로 그 역할이 혜학(慧學)에 속한다.
5문으로 들어오는 대상들은 원래는 빠라맛타(실재)인데 다섯 빅쿠의 마음에 들어오는 순간, 스며드는 아사와(번뇌)의 작용으로 관념과 뒤섞임으로써 더 이상 빠라맛타(실재)가 아니게 된다. 그러면 범부들은 자신의 성향에 따라 같은 대상에 대하여 ‘좋다’고 느끼기도 하고 ‘나쁘다’고 느끼기도 한다.
다시 말하면, 각자의 성향에 따라 하나의 대상을 보면서 어떤 이는 좋다고 어떤 이는 나쁘다고 하는 것이다. 성향이 다르면 기호가 달라진다. 기호가 다르면 인지가 달라진다. 인지가 다르면 판단도 달라진다. 그래서야 어찌 ‘야타부따yathābhūta’(있는 것을 있는 그대로 아는)라는 지혜의 눈이 생겨나겠는가?
●좋은 것이라고 인지함과 동시에 집착이 올라온다. 이것을 ‘아빗자abhijjhā’라고 한다. 아빗자는 감각적 욕망일 뿐이다.
●좋지 않은 것이라고 인지함과 동시에 언짢음이 올라온다. 이것을 ‘도마낫사domanassa’라고 부른다. 도마낫사는 ‘뱌빠다위딱까byāpāda-vitakka’(파괴하려는 사유)와 ‘위힝사위딱까vihiṁsā-vitakka’(괴롭히려는 사유)이다. 다행히 불쾌함만 있으면 ‘위힝사위딱까’만 생기지만, 파괴하려고 계획하고 용을 쓰면 ‘뱌빠다위딱까’가 되어 버린다. 이와 같은 3종류의 위딱까(아빗자위딱까, 위힝사위딱까, 뱌빠다위딱까)가 ‘밋차상깝빠micchā-saṅkappa’(잘못된 사유)이다. 이 밋차상깝빠(잘못된 사유) 3가지를 산산이 부숴 제거해야만 ‘삼마상깝빠’가 생길 수 있다. 삼마상깝빠가 생겨나야 도성제의 요소인 삼마딧티(바른 견해)가 굳건해진다.
그렇다면 ‘삼마상깝빠’(바른 사유)란 무엇인가?
‘삼마상깝빠’란 도성제의 한 요소이다. 도성제의 요소라면 도의 지혜와 관련된다. 도의 지혜와 연관된다면 당연히 빠라미를 기반으로 해야 한다. 빠라미를 기반으로 해야만 ‘야타부따냐나’를 얻을 수 있다. ‘야타부따냐나’를 연약한 위빳사나라고 한다. ☸️💎👑이 ‘야타부따냐나’를 얻어야만
●물질과 정신을 구분해서 아는 지혜,
●원인과 결과를 아는 지혜,
●무상을 아는 지혜,● 고통을 아는 지혜, ●무아를 아는 지혜가 생겨난다.
☸️💎따라서 다섯 빅쿠는 관념이 섞이지 않은 실재(빠라맛타)로서의 물질과 정신, 즉 5온만이 분명히 드러나도록 해야 했다.
☸️💎그래야만 그다음 단계로
힘센 위빳사나(발라와위빳사나)라고 하는
‘닙비다 냐나’(지겨워하는 지혜)부터
‘상카루뻭카 냐나 saṅkhārupekkhā-ñāṇa’(상카라를 평정으로 보는 지혜)까지 점점 더 높은 위빳사나 지혜가 생겨날 것이다. 그리고 마지막 단계로 ‘아눌로마냐나anuloma-ñāṇa’(수순의 지혜, 열반을 보기 직전의 위빳사나 지혜)와 ‘막가냐나magga-ñāṇa’(도의 지혜), ‘팔라냐나phala-ñāṇa’(과의 지혜)가 생겨난다.
7. 빠라미가 되는 것과 빠라미가 되지 않는 것
다섯 빅쿠는 아직 범부였던지라 붓다께서 그들에게 맞게 <초전법륜경>을 설하셨을 때도, 그들의 의식 안에 떠오르는 대상들의 실재가 드러나지 않았다. 여전히 관념과 뒤엉켜 있었다.
그들 각자의 성향에 따라 사랑스러운 대상들도 있었고 사랑스럽지 않은 대상들도 있었다. 만일 사랑스러운 대상이라면 그 대상을 사랑하지 않도록 관찰해야 하고, 점점 더 빈틈없이 관찰할 수 있도록 사띠의 힘을 증장시켜야 한다. 이렇게 다스리고 통제할 수 있어야 빠라미라고 할 수 있다. 이 빠라미에 이름을 붙이자면 ‘넥캄마빠라미nekkhamma-pāramī’(출리 빠라미)라고 불러야 할 것이다. 8정도의 단어로는 ‘넥캄마상깝빠nekkhamma-saṅkappa’(출리에 대한 사유)라고 부른다.
오늘날 사람들은 현생의 성공을 위해 여러 종류의 즐거운 것들을 찾아 헤맨다. 인간 세계에서 보자면 주로 직위나 명성, 재물, 모임에서 칭송과 인기를 얻는 것, 학위와 스펙을 쌓는 것 등이다.
또한 다음 생의 번영을 위해, 인간의 부귀뿐 아니라 천신들의 영화나 범천의 행복과 같은 신기하고 즐거운 것들을 찾아 헤매인다.
하지만 레디 사야도의《웃따마뿌리사디빠니uttamapurisa-dīpanī(가장 뛰어난 사람에 대한 해설)》에는 다음과 같이 쓰여 있다. ‘현생과 내생의 즐거움을 찾기 위해 아무리 바른 노력으로 선업을 지었다고 한들, 그것은 이윤이 남지 않고 빠라미도 될 수 없다’라고. 하물며 바르지 못한 방법으로 즐거움을 찾는다면, 빠라미가 되기는커녕 크나큰 손실이 되어 버린다.
우리들은 인간이므로 생을 유지하기 위해 어쩔 수 없이 각자 자신이 맡은 일을 해야 한다. 이때 맡은 일에서 해야 하는 의무와 그 일의 결과, 이 두 부분을 구분해볼 수 있다. 그런데 이 두 부분을 명확히 가르는 선이 있다. 그 선이 빠라미가 되는 성품과 되지 않는 성품을 나누는 선이다.
☸️💎빠라미는 고귀한 자들의 마음 씀씀이, 고귀한 자들의 일임이 분명하다. 저열한 이들과는 확실히 관련이 없다. ☸️💎빠라미는 항상 출세간 방향으로 향해있다. 세간 쪽으로 돌아보지 않는다.
☸️💎빠라미는 누구든 채워나갈 수 있다. 심지어 짐승조차도 빠라미를 채워나갈 수 있다.
☸️💎빠라미를 채운다는 것은 어떤 결과도 바라지 않고 자신의 의무를 완성하는 것이다. 결과는 결과이고 의무는 의무로, 이 둘을 구분할 필요가 있다. 넥캄마빠라미(출리바라밀 ㅡ좋고싫음을 떠남)가 이 둘을 구분 짓는 선이다.
아비디지미히리티구루 사야도께서는《빠라미 빛을 보여주는 경》에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신다.
《웃따마뿌리사디빠니(가장 뛰어난 사람에 대한 해설)》를 보면, 빠라미 10가지를 채울 때 넥캄마빠라미의 보호가 있어야만 자신이 짓는 선업들이 빠라미가 될 수 있다고.
넥캄마는 자신의 이익에 집착하여 결과를 기대하지 않고, 오직 세상의 번영을 위해 자신의 의무를 다하는 것이다. 이 마음으로 의무를 실행할 때 세상의 이익을 첫 번째로, 주변의 이익을 두 번째로, 자신의 이익을 세 번째로 두게 된다. 이런 성품은 출세간 쪽을 향해 있다. 만일 세간 쪽을 향해 있다면 자신의 이익이 우선이고, 주변의 이익이 두 번째, 세상의 이익이 세 번째가 될 것이다.
넥캄마의 성품은 여러 측면에서 집착하는 로바lobha(탐욕)의 반대인 알로바alobha(탐욕 없음)이기 때문에, 세상을 위해 헌신하고 많은 것을 버릴 수 있다. 재물, 직위, 명성, 목숨까지도 버릴 수 있다.
또한 이렇게 버리는 것은 자신이 돋보이고자 하는 자만심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다. 무언가를 기대해서, 대가를 바래서, 보은을 받고 싶어서 버리는 것이 아니다. 오로지 세상의 이로움을 바라는 고귀한 자애 의도로 버리는 것이다.
넥캄마(출리) 마음을 지닌 고귀한 이들은 집착할 만한 어떤 것에도 집착하지 않고, 두려워할 만한 그 어떤 것으로 겁박해도 두려워하지 않는다. 이 모든 것을 넥캄마 빠라미로서 헌신하여 세상을 위해 기꺼이 버린다. 두려워할 만한 상황에서, 칸띠빠라미khanti-pāramī(인욕바라밀)로서 세상을 위해 견뎌낸다. 넥캄마빠라미는 8정도의 요소인 바른 사유에 속하는 넥캄마상깝빠(출리에 대한 사유)를 살펴보면 더욱 분명해진다. 또한 넥캄마상깝빠에 힘을 실어주는 다른 상깝빠(사유)들도 함께 살펴보자.
그 상깝빠(사유)들은 바로
●아뱌빠다 상깝빠abyāpāda-saṅkappa(성내지 않는 사유)와
●아위힝사 상깝빠avihiṁsā-saṅkappa(괴롭히지 않으려는 사유)이다.
●출리에 대한 사유는 아비담마abhidhamma에서 ‘알로바’(탐욕 없음)에 해당한다.
알로바(무탐심)의 성품은 집착할 만한 대상에 대하여 집착하지 않고 버리는 것이다. 하지만 무조건 버리는 것이 아니라, 반드시 이익이 되도록 버려야 함을 단단히 명심하여야 한다. 헛되이 버리는 것은 의미가 없고 핵심을 상실한다. 헛되이 버리지 않도록 아뱌빠다상깝빠(성내지 않음에 대한 사유)가 뒷받침한다.
아뱌빠다는 아비담마에서 아도사adosa(성냄 없음)이다. 도사dosa는 꼬깃꼬깃 원한을 품고 마지못해 어쩔 수 없어 하는 성품이고, 아도사는 이러한 도사의 성품이 없는 것이다. 거기에는 진정한 자애만 있을 뿐이다.
아뱌빠다상깝빠의 도움으로, 넥캄마상깝빠는 자신의 마음 안에 들어오는 대상을 그 무엇에도 얽매이지 않고 오직 세상을 위한 순수한 의도로 버릴 수 있다.
또 다른 상깝빠는 아위힝사상깝빠(괴롭히려는 마음 없는 사유)이다. 아위힝사상깝빠는 아비담마에서는 까루나karuṇā(자비심)이다. 까루나의 성품은 모든 존재를 가엾게 여기는 마음이다.
모든 존재는 ‘상사라saṁsāra’라고 불리는 대하에 잠겨 떠내려가는 동안 내내 – 황제가 되었든 축생이 되었든 – 뜨거운 행복에 타들어가며 괴로워 하면서도 좋은 것인 줄 아는 한낱 불쌍한 중생일 뿐이다. 무명의 어둠에 덮인 채, 헛된 꿈에 취해 즐거워하는 중생일 뿐이다.
이처럼 꿈에 취해 있는 내내,
범천은 범천의 선업에 어울리는 행복에 취해 있다. 욕계의 천신들은 천신들의 선업에 어울리는 행복에 취해 있다.
인간은 인간의 선업에 어울리는 행복에 취해 있다. 짐승들은 짐승들에게 어울리는 행복으로 즐긴다. 하이에나는 찢겨나간 시체에 침 흘린다.
무명이라는 긴 어둠의 꿈에서 깨어나기 전까지, 모든 존재는 시종일관 헛된 즐거움에 취해 허우적대는 가여운 중생일 뿐이다. 이렇듯 불쌍하기 그지없는 중생들을 위해 순수한 측은지심으로 자신의 이익을 가벼이 버리는 것, 그것이 넥캄마빠라미이다.
넥캄마상깝빠는 아뱌빠다상깝빠와 아위힝사상깝빠, 이 2가지의 도움을 받아 삼마상깝빠(바른 사유)라는 이름을 얻는다. 삼마상깝빠는 넥캄마빠라미를 기반으로 좋은 것을 보아도 좋아하지 않고, 칸띠빠라미를 기초로 두려운 대상을 만나도 두려워하지 않는다. 이때 넥캄마(출리)빠라미의 보호를 받아, 칸띠(인욕)빠라미와 우뻭카(평정)빠라미upekkhā-pāramī가 분명히 드러난다.
다섯 빅쿠는 원래 계율이 청정하였고 사마디도 탄탄하게 완성되어 있었다. 그래서 붓다께서 다섯 빅쿠에게 빤냑칸다paññākkhandha(혜학)에 속하는 삼마딧티(바른 견해)와 삼마상깝빠(바른 사유)를 설하셨을 때, 이들 가운데 꼰단냐가 수다원 과(소따빳띠팔라sotāpatti-phala)를 얻음과 동시에 열반을 보았다. 그 뒤에 그는 ‘에히 빅쿠ehi-bhikkhu’로 빅쿠가 된다.11) BC 589년 음력 6월 보름 토요일 저녁 서늘한 시간이었다.
이렇게 <초전법륜경> 전체를 다섯 빅쿠에게 빠짐없이 설하셨지만 꼰단냐 혼자만 수다원이 되었다. 꼰단냐만이 ‘에까라사eka-rasa’(유일한 맛), ‘위뭇띠라사vimutti-rasa’(위없는 자유의 맛)라는 8정도를 맛볼 수 있었고, 수다원 과의 지혜로 열반을 볼 수 있었으며, 4성제를 꿰뚫어 알았다. 남은 네 명의 빅쿠는 여전히 범부의 상태였다. 이들 네 명의 빅쿠는 8정도 즉 3학이 ‘하나의 맛’(자유의 맛)이라는 것을 아직 꿰뚫어 알지 못하고 있었다. 이들이 깨닫기까지는 좀 더 시간이 필요했다.
예를 들자면 요리할 때 ‘생선, 마늘, 후추’ 등등 식재료를 솥에 넣은 후 불로 가열하여 요리하면 갖가지 재료 맛이 동시에 한 그릇 안에 다 우러나듯이, 꼰단냐는 하나의 맛으로 우러나도록 요리할 수 있었다. ‘동시’를 ‘에까카나eka-khaṇa’라고 부르고, 하나로 우러난 맛을 ‘에까라사’라고 한다.
그러나 네 명의 빅쿠는 아직 꼰단냐처럼 어우러져 녹은 맛을 내지 못했다. 생선 맛이 따로, 마늘 맛이 따로, 후추 맛이 각각 따로였다. 서로 섞이지 못했다. 한 그릇 안에 녹아들지 못했다. 꼰단냐를 제외한 이들 나머지 네 명은 8정도 또는 3학을 에까라사가 될 만큼 충분히 닦지 못했기 때문이다.
음력 6월 16일, 붓다께서는 왑빠(최초의 다섯 빅쿠 중 한 분)에게 8정도 안에서 세 번째 요소인 바른 말에 대하여 상세하게 설하신다. 더불어 수행방법도 보여주신다.
삼마딧티(바른 견해)로 보면, 의식 안에 들어오는 대상들이 삼마상깝빠(바른 겨냥. 바른 사유)로 찧어지고 부서져 가루가 됨으로써 무상·고·무아가 드러나게 된다. 그러나 왑빠의 의식 안에서는 아직 그 대상들이 부서지지 않았다. 부서지지 않았다는 것은 덩어리져 남아 있다는 뜻이다.
●덩어리로 남아있는 한은 닛짜(항상함 常) ·수카(행복樂)·수바(아름다움淨)·앗따(자아我)가 사라지지 않는다.
●항상함(닛짜)이 사라지지 않는 한, 대상의 위빨라사(왜곡된) 이미지를 버릴 수 없다. ●수카(즐거움)가 사라지지 않으면, 즐기기 좋은 수바(아름다움) 이미지를 버릴 수 없다. ●앗따(자아)가 사라지지 않는 한, 덩어리가 없다는 순냐따suññata(텅빔)의 특성에 이르지 못한다.
그래서 붓다께서는 우빠다낙칸다(5취온)가 되는 물질과 정신을 관념으로부터 뜯어내어 오롯이 물질과 정신만 남았을 때, 덩어리지지 않는 실재의 특성인 무상·고·무아를 깨닫게 하려고 ●넥캄마(출리)빠라미, ●칸띠(인욕)빠라미, ●우뻭카(평정)빠라미를 토대로 하는
● 바른 사유(삼마상깝빠)를 설하신 것이다.
또한, 이들 빠라미를 바탕으로 정립된 계학(戒學)의 하나로 바른 말(삼마와짜)을 덧붙여 설하신다.
일반적으로 삼마와짜sammā-vācā란, 생계활동과 무관한 영역에서 말로 지을 수 있는 4가지 나쁜 업12)을 피하는 것이다. 이때 ‘와짜vācā’, 즉 ‘말’이란 인간들이 내는 소리이다. 그 소리는 거칠고(툴라thūla), 섬세하고(수쿠마sukhuma), 보다 섬세하고(수쿠마따라sukhumatara), 가장 섬세한(수쿠마따마sukhumatama) 네 단계가 있다.
이 네 단계 중에서,
(1) ‘가장 섬세한’ 말은 단지 소리일 뿐이다.
(2) ‘보다 섬세한’ 말은 마음과 섞여 있다.
(3) ‘섬세한’ 말은 아는 것과 섞인다.
(4) ‘거친’ 말은 성조와 섞인다.13)
붓다의 말씀에서 ‘삼마와짜’는 위 4가지 중 두 번째 단계부터 네 번째 단계까지만 관련이 있다.14)
모든 소리는 – 소리를 밖으로 내건 내지 않건 – 부르는 이름과 알아야 할 대상을 포함한다. 그래서 앎이 청정하려면, 부르는 이름과 알아야 할 대상 둘 다가 선명해야 한다. 이 2가지 모두를 포함하여 와짜(말)라고 부른다. 2가지 모두 분명하고 깨끗해야 바른 말이라고 한다.
위빳사나 수행에 있어서도 물질과 정신 대상이 무상·고·무아로 바수어진 자리이든, 순냐suñña(텅빔. 열반)에까지 이르렀든, 삼마상깝빠(바른 사유)를 위해 분명한 이름과 알아야 할 대상이 필요하다.15) ‘바른 말’이라는 계학은 ‘바른 사유’라는 혜학에 힘을 실어준다.
그런데 바른 말이란 단지 말로서만 머무르지 않는다. 즉 말로 끝나지 않는다. 바른 행위, 바른 생계와 한 덩어리가 되어 어떤 역할을 수행하기 마련이다.
예를 들어, 우리 눈앞에 기진해 쓰러져 있는 사람이 있다 하자. 그 사람 앞에서 ‘건강하기를, 행복하기를!’ 등으로 자애관을 독송하기보다 즉시 그를 부축하여 일으켜 세워주는 것, 그것이 그를 위해서도 우리 자신을 위해서도 이익이다. <보배경>을 보면, 불교에서 참사람의 성향 혹은 지혜란 어떤 의무나 역할을 할 때 몸으로 짓는 자애, 말로 하는 자애, 마음을 쓰는 자애를 한 줄로 세우는 데 있어서 자신을 위한 이익을 가장 뒤에 두는 것이다.
불법에는 ●빠라미막가pāramī-magga(바라밀을 위한 길)와 ●만뚜막가mantu-magga(자신을 위한 길)라고 하는 2가지 길이 있다. 자기 자신을 위해 삼장에 나오는(또는 나오지 않는) 게송들을 읽고 암송하는 이들이 있다. 이들은 마치 세간에서 자기 의무를 제대로 행하지는 않고 윗사람에게 아부하여, 의무를 충실히 행하는 성실한 사람들보다 먼저 승진하려는 사람들과 비슷하다.
BC 589년 음력 6월 보름, 이날 붓다께서 다섯 빅쿠를 위해 법을 설하시자 그 자리에서 꼰단냐가 수다원이 되었다. 그러나 나머지 네 분은 아직 범부였다. 그때 붓다께서 설하신 법문이 바로 ‘담마짝깝빠왓따나’라고 불리는 <초전법륜경>이다.
그다음 날인 음력 6월 16일, 붓다께서는 탁발을 나가지 않으시고 다섯 빅쿠 중 한 분인 왑빠 테라vappa thera를 위한 법문을 이어서 하셨다. 그 사이 다른 네 분이 탁발을 다녀와서 여섯 분 모두가 나누어 드시기에 충분하였다.
이날 왑빠가 수다원 과를 얻게 되리라는 것을 붓다께서는 미리 아셨다. 하지만 붓다께서 아는 것이 아니라 왑빠가 직접 알아야 한다.
☸️💎👑윤회로부터의 탈출인 열반은 누구나 자신의 눈으로 직접 보아야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붓다께서는 들어서 아는 것으로 충분치 않고, 자신의 눈으로 직접 보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씀하셨다.
8. 아는 마음 - 모르는 마음
아리야ariya(성인)가 되지 못한 범부들의 의식 안에는 2종류의 아는 마음이 있다. 그중 하나는 아는 마음이라고 하지만 실은 아는 마음이 아니다.
그 마음에는 생겨남도 없고 머무름도 없고 소멸도 없다. 왜냐면 범부의 의식 안에 항상 스며 있기 때문이다. 이것을 빨리어로 ‘아누사야anusaya’라고 한다.
아누사야의 ‘아누anu’는 성향 혹은 기질이라고 부를 수 있다. 이와 같이 생겨남이 없고 머무름이 없고 소멸이 없는 아는 마음은 그 스스로는 알 수 있는 능력이 없지만, 실제로 일어나고 머무르고 소멸이 있는 아는 마음을 매우 강력하게 지배하고 있다.
그렇기에 일어남이 없고 머무름이 없고 소멸이 없는 아누사야의 특성과 성향으로 멋대로 권력을 휘두르는 이러한 아는 마음은, 사실 정확히 말하면 ‘모르는 마음’이라고 불러야 할 것이다.
‘생기고 머무르고 사라짐’이라는 과정이 자연스럽게 차례로 일어나는 마음이 진짜 아는 마음이다. 따라서 우리는 이 마음을 ‘아는 마음’이라고 불러야 한다.
일반적으로 ‘아는 마음’은 항상 대상을 가진다. 저절로 대상을 갖게 된다.
하지만 모르는 마음은 그렇지 않다. 대상을 직접 가지지 않는다. 그 대신 대상을 저절로 갖는 ‘아는 마음’을 쥐고 포박한 후 자기 뜻대로 조종하고 압력을 가한다.
● 이때 대상을 갖는 아는 마음은 포박당한 줄 모른 채, 모르는 마음이 조종하는 대로 시키는 대로 춤춰야 한다.
●모르는 마음이 시키는 대로 대상을 알게 되기에 결국 바르게 알지 못한다. 예컨대 화낼 일이 아닌데도 화내고, 미워할 일이 아닌데도 미워한다. ●아는 마음이 스스로의 본성 그대로 대상을 투명하게 아는 것이 아니라, 모르는 마음이 조종하여 시키는 대로 잘못 알기 때문이다.
붓다의 말씀에 따르면 아는 마음은 매우 순수하다. ☸️💎반짝반짝 투명하게 빛난다. 하지만 모르는 마음의 힘에 지배당해 모르는 마음이 시키는 대로만 알게 됨으로써, 대상을 왜곡하여 잘못 알게 되는 것이다.
‘뿌툿자노 움맛따꼬puthujjano ummattako’(범부는 미쳤다)라는 말씀대로, 범부들의 앎이라는 것은 정신질환이 있는 사람들의 인지와 거의 흡사하다. 정신질환자들은 흙덩이를 금덩이라고 안다. 원두막을 궁전으로 안다. 정신질환자들의 인식과 범부들의 인식은 수준에서 차이는 있지만 그 본질적인 특성에는 전혀 차이가 없다.
범부들의 의식에서 모르는 마음은 생겨남도 없고 머무름도 없고 소멸도 없지만 그 능력만큼은 매우 막강하다. 이러한 모르는 마음은 어떻게 하여 잠재의식, 기질, 성향을 드러내며 활개치는 것일까?
붓다께서는 ‘윤회는 그 시작을 알 수 없다’고 하셨다. 그렇다면 범부의 의식에 있는 이 ‘모르는 마음’도 시작을 알 수 없는 윤회의 먼 저편에서부터 시작되었다는 뜻이다.
☸️사실 모르는 마음이란 바로 ‘번뇌’이다. ‘업’으로 말하자면, 불선업 중 ‘로바’(탐욕)에서 발단한 것이다. 이러한 탐욕을 ‘바와니깐띠까bhava-nikantika’(생에 접착제처럼 들러붙는) 탐욕이라고도 한다. 본디 범부는 탐욕으로부터 발아하여 자라난 존재이다.
●그러므로 범부란 근본적으로 ‘탐욕을 기반으로 다져지고,● 무명으로 보호막을 치고, ●‘바와(생)를 꽉 움켜쥔 자’라서 ●언제나 ‘나’를 우선에 놓을 수밖에 없는 존재이다.
시작을 알 수 없는 윤회라는 장구한 시간 내내, 번뇌는 범부의 의식 속에 모르는 마음으로 차곡차곡 쌓이며 숨어 있다가 드디어 현생에서 탐욕으로 발현된다. 그 범부의 주변 환경 역시도 5가지 매혹적인 대상들로 겹겹이 둘러싸여 있다. 바로 이 대상들이 눈·귀·코·혀·피부라는 5문으로 들어와 그의 마음에 ‘아사와’(오랜 세월 익은 술처럼 깊숙이 배인 번뇌)로 끈끈하게 자리하고 있던 번뇌와 함께 뒤섞여 버린다.
이때 모르는 마음의 힘은 두께와 크기와 깊이까지 겸비하여 한층 더 강력해지고 탁월해진다.
☸️💢💔드디어 모르는 마음은 ‘생겨남이 있고 머무름이 있고 소멸이 있는’ 아는 마음을 자기 마음대로 조종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추게 된다.
●아는 마음은 모르는 마음에 지배당하여 무상함(아닛짜)을 항상함(닛짜)으로 안다. ●고통(둑카)을 행복(수카)으로 안다. ●무아(아낫따)를 유아(앗따)로 안다. ●부정한(아수바asubha) 것을 깨끗하고 아름다운(수바) 것으로 안다.
●실재(빠라맛타)를 관념(빤냣띠paññatti)으로 안다.
이러한 알음알이들 중에서, ‘관념으로 아는 것’과 ‘아름답다고 아는 것’이 가장 두드러진 착각이다. ‘자아’를 기반으로 ‘모르는 마음’이 시켜서 알게 된 것이라서 자기 자신과 연관되면 ‘아름답지 않음’을 ‘아름답다’고, ‘법이 아닌 것’을 ‘법’으로 착각한다. 이것은 번뇌의 흐름에 따르는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범부들의 시각이자 앎이다.
다섯 빅쿠는 번뇌의 흐름에 따르는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이들이 아니다. 역류하듯, 흐름에 거슬러 오르는 눈으로 바라보는 이들이다. 그래서 BC 589년 음력 6월 보름 토요일, 꼰단냐는 수다원 성인이 되어 열반을 실제로 보게 된 것이리라.
왑빠도 빠라미를 채운 사람이었다. 처음을 알 수 없는 윤회에서 시작된 번뇌들이 엷어지도록 오랫동안 마음을 닦아왔다. 현생의 감각적인 쾌락도 ‘아사와’(오래 묵은 번뇌)의 특성인 ‘우빠다나’(취착)로 집착하지 않도록 ‘상와라’(번뇌가 들어오지 않게 5문을 다스림)로 통제할 줄 알았다.
그는 인간의 행복, 천신의 행복, 범천의 행복을 수없이 누려본 사람이었다. 하지만 이런 행복은 타오르던 갈애가 식어버린, 진짜 서늘한 행복이 아니다. 갈애로 만든 행복은 뜨거운 행복일 뿐이다. 4성제의 시각에서 보면 진짜 둑카(고통)일 뿐이다.
붓다께서 최초로 법문하실 때 이러한 이치를 왑빠도 알아들었다. 하지만 그는 확실히 보지 못했고 꼰단냐만 열반을 보게 된다. 그러나 왑빠는 ‘빳치마바위까뿍갈라pacchimabhavika-puggala’(이번 생이 마지막 생으로 확실하게 이미 정해진 존재)이다. 빠라미는 이미 채워져 있었다. 이번 생에서 반드시 아라한이 될 존재였다. 시간이 말해줄 것이다. 시간이 지나면 증명될 것이다. 약간의 시간만 필요할 뿐이었다.
이 세상에서 관찰해야 할 대상이란 물질과 정신뿐이다. 존재와 중생이라는 형태를 갖고 있는 물질도 사실은 실재로서 없는 것인데, 생명이나 자아가 어디에 있겠는가?
더구나 그 물질과 정신마저도 아닛짜(무상), 둑카(고), 아낫따(무아)일 뿐이다. 하지만 왑빠는 이러한 이치를 아직 확실하게 보지 못했다. 왑빠의 의식 안에 유아견과 위찌낏차(8정도에 대한 의심)가 잠재된 번뇌(아누사야 낄레사)로서 남아 있는 한, 그리고 그 유아견과 위찌낏차를 뿌리까지 잘라내지 못하는 한, 열반을 보는 수다원 도의 마음은 일어나지 않는다.
수다원 도의 지혜 중에서 바른 견해는 매우 중요하다. 바른 견해야말로 가장 앞서서 이끌어가는 도의 요소이다.
바른 견해가 자신의 의식 안에서 일어나는 물질과 정신이라는 대상을 무상·고·무아로 명확하게 보기 전까지는, 은밀하게 숨어 있는 유아견과 의심을 뿌리까지 자를 수 없다.
이때 8정도의 또 다른 요소인 삼마상깝빠(바른 겨냥. 바른 사유)가 도와줘야 한다. 8정도의 요소 중에서 삼마딧티(바른 견해)는 ‘자띠빤냐jāti-paññā’(타고나는 지혜)라고 하고, 반면에 삼마상깝빠(바른 사유)는 ‘끼리야빤냐kiriya-paññā’(일하는 지혜)라고 부른다.
삼마딧티(바른 견해)라는 도의 요소는 단지 보기만 할 뿐이다. 그래서 삼마딧티가 대상을 볼 수 있도록, 삼마상깝빠(바른 겨냥. 바른 사유)라는 도의 요소가 위빳사나의 대상을 삼마딧티(바른 견해) 앞에 이르도록 보내주어야 한다. 즉 삼마딧티(바른 견해)가 주변의 대상들을 모두 볼 수 있도록 만들어 주어야 한다. 바로 이 일이야말로 삼마상깝빠의 가장 중요한 임무이다.
삼마딧티(바른 견해)는 삼마상깝빠(바른 겨냥. 바른 사유)가 밀어 놓아 준 대로 위빳사나의 대상을 본다. 마주치는 대상들을 위빳사나의 렌즈로 관찰할 때만, ‘관념’이 아닌 실재를 있는 그대로 보게 된다. ‘형태가 없는’ 특성도 보인다. 그때 삼마딧티는 5온을 무상으로 보고 고통으로 보고 무아로 볼 수 있게 된다.
그런데 왑빠는 아직 부족했다. 그는 아직 열반을 보지 못했다. 따라서 계학을 완전히 충전시킬 필요가 있었다. 붓다께서는 이러한 왑빠를 위해 ‘바른 말’(삼마와짜)이라는 도의 요소를 설하신다. ☸️💎바른 말이란 도의 요소는 일반적으로 말하면, ‘와찌둣짜리따vacī-duccarita’(잘못된 언어습관) 4가지16)를 피하는 것이다.
위빳사나의 범주에도 그 특성이 들어간다. ‘와짜’는 말일 뿐이다. ‘말’은 ‘소리’와 ‘뜻’으로 구성되며, ‘부르는 이름’과 ‘불리는 사물’로 이뤄진다고 할 수 있다. 이와 같이, 알아보는 특성을 가진 모든 지혜도 필연적으로 ‘부르는 이름’과 ‘불리는 사물’이 있어야 한다. 이 2가지가 만나지 않으면 ‘아는 지혜’가 생겨나지 않는다.
[주해]
10) 《상윳따니까야 주석서》(PTS본 2권 53쪽)에 따르면, ‘따루나 위빳사나’(연약한 위빳사나)는 ‘나마루빠빠릿체다냐나’(정신과 물질을 구별하는 지혜)부터 ‘우다얍바야냐나udayabbaya-ñāṇa’(일어남과 사라짐의 지혜) 전반부(= 도(道)와 도 아님에 대한 지혜)까지다. 이를 ‘야타부따냐나’(있는 그대로 아는 지혜)라고도 한다.
‘발라와 위빳사나’(힘센 위빳사나)는 ‘바야냐나bhaya-ñāṇa’(두려워하는 지혜)부터 ‘상카루뻭카냐나’(상카라를 펑정으로 보는 지혜)까지다. (각묵 스님 번역, 《상윳따 니까야 2》 S12:23 <기반 경> 각주 173, 174번 참고.)《빠띠삼비다막가》(PTS본 2권 63쪽)에 “두려워하는 지혜(바야냐나), 위험을 보는 지혜(아디나와냐나), 지겨워하는 지혜(닙비다냐나)는 이름만 다르고 뜻은 같다”고 나와 있다.
11) ‘에히 빅쿠’란, 붓다께서 “이리 오너라, 빅쿠여.”라고 부름과 동시에 저절로 머리카락이 깎이고, 빅쿠가 갖추어야 할 물품 8가지가 갖춰지고, 법랍 60이 되어 보이는 빅쿠이다. 이는 전생에 지은 가사 보시 공덕의 최고 결과라고 한다.
12) 말로 짓는 4가지 나쁜 업이란 ‘거짓말, 이간질하는 말, 거친 말, 쓸데없는 말’을 뜻한다.
이 4가지 나쁜 업을 피하면 ‘바른 말’이다. 한편, 생계활동을 하면서 거짓말 등을 하면 ‘바른 생계’를 어기는 것이다.
13) 예를 들어, 비가 오는 것을 보자마자
(1) 문득 “어!”라고 소리낼 수 있다.
(2) 또는 즉각적으로 일어나는 성냄이나 들뜸이 섞인 마음으로 “비가 오잖아”라고 말할 수 있다.
(3) 또는 인식과 견해(선입견)을 갖고 “(어제도 왔는데) 오늘도 또 비가 오잖아”라고 말할 수 있다. (4) 여기에 어조를 덧붙여 “왜 또 비가 오고 난리야!”라고 말할 수 있다.
14) 바른 말은 성냄 등 불선한 마음이 아니라 자애 등 선한 마음이 함께하기 때문에 (2)번과 관계가 있다. 사실(바르게 앎)과 말이 일치해야 하기 때문에 (3)번과도 관계가 있다. 거친 어조가 아니라 부드러운 어조로 말해야 하기 때문에 (4)번과도 관계가 있다. (1)번은 단순한 소리에 해당하기 때문에 바른 말과는 관계가 없다.
15) 모든 말과 이름이란 관념이고 관념의 세상(삼무띠로까sammuti-loka)을 위한 것이다. 그러나 붓다께서는 위빳사나 수행으로 관념이 무상·고·무아로 바수어졌을 때에만 볼 수 있는 실재(빠라맛타 = 정신·물질, 열반)에 대해서도 ‘바른 이름’(관념)을 설해두셨다.
즉 빠라맛타 담마(실재법)의 세상을 온전히 알기 위해서도 ‘바른 말’의 요소가 필요하다. 가령, ‘5온’, ‘무상·고·무아’, ‘열반’, ‘도’, ‘과’ 등이 빠라맛타 담마에 대한 바른 이름이다.
16) 거짓말, 이간질하는 말, 거친 말, 쓸데없는 말을 뜻한다.
- <행복을 찾아서> 中, 우 쉐아웅 지음, 위뿔라냐니 식카와띠님 옮김.
첫댓글 이에 붓다께서는 다섯 빅쿠의 믿음과 견해가 청정해지도록 우선 물질과 정신에 대해 설하셨다. ☸️대상을 물질과 정신으로 구분해서 알기 시작해야 비로소 믿음과 견해가 청정해질 수 있기 때문이다.
그다음 붓다께서는 이들에게
☸️💎👑🪷물질과 정신이 원인과 결과로 연결된다는 것을 이해하도록 설하셨다. 원인과 결과가 연결된 순리로 작용하여 물질과 정신이 생겨난다는 것을 깨닫게 될 때, 비로소 이 세상에 어떤 존재나 중생들이 실재하는 것이 아니라 단지 물질과 정신만이 실재임을 이해할 수 있기 때문이다.
빠라미를 채운다는 것은 어떤 결과도 바라지 않고 자신의 의무를 완성하는 것이다. 결과는 결과이고 의무는 의무로, 이 둘을 구분할 필요가 있다.
☸️💎빠라미는 누구든 채워나갈 수 있다. 심지어 짐승조차도 빠라미를 채워나갈 수 있다.
☸️💎빠라미를 채운다는 것은 어떤 결과도 바라지 않고 자신의 의무를 완성하는 것이다. 결과는 결과이고 의무는 의무로, 이 둘을 구분할 필요가 있다. 넥캄마빠라미(출리바라밀)가 이 둘을 구분 짓는 선이다.
이날 왑빠가 수다원 과를 얻게 되리라는 것을 붓다께서는 미리 아셨다. 하지만 붓다께서 아는 것이 아니라 왑빠가 직접 알아야 한다.
☸️💎👑윤회로부터의 탈출인 열반은 누구나 자신의 눈으로 직접 보아야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붓다께서는 들어서 아는 것으로 충분치 않고, 자신의 눈으로 직접 보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씀하셨다.
☸️사실 모르는 마음이란 바로 ‘번뇌’이다. ‘업’으로 말하자면, 불선업 중 ‘로바’(탐욕)에서 발단한 것이다. 이러한 탐욕을 ‘바와니깐띠까bhava-nikantika’(생에 접착제처럼 들러붙는) 탐욕이라고도 한다. 본디 범부는 탐욕으로부터 발아하여 자라난 존재이다.
●그러므로 범부란 근본적으로 ‘탐욕을 기반으로 다져지고,● 무명으로 보호막을 치고, ●‘바와(생)를 꽉 움켜쥔 자’라서 ●언제나 ‘나’를 우선에 놓을 수밖에 없는 존재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