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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찬선 신부님-
어제 이스라엘의 12지파를 대표하는 열 두 제자를 뽑으신 주님은 오늘 이스라엘 곳곳으로 제자들을 파견하십니다.
“가라” 그리고 “복음을 선포하라.” 복음을 선포하는 것이 사명이고 가는 것은 선포의 중요한 방법이요 수단입니다. 가만히 앉아서 찾아오는 사람에게 복음을 선포하는 것도 방법이지만 주님은 찾아가라고 하십니다. 왜냐하면 찾아오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찾아오지 않는 사람에게 찾아간다고 해서 복음 선포가 될까?
성사는 사효적(事效的)이라고 합니다. 인효적(人效的)이라는 말의 대당어입니다. 성사는 집전자가 아무리 죄인이어도 성사를 유효하게 하시는 분은 하느님이시기에 유효하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성사가 집전자와 상관없이 아무리 유효하다 해도 성사를 받는 사람이 거부하면 성사가 그 사람에게도 유효할까요? 성체를 쥐에게 먹이면 쥐가 그것을 성체로 영한 것일까요?
오늘 복음에서 주님은 제자들에게 “하늘나라가 가까이 왔다.”고 선포하라 하십니다. 그런데 하느님의 나라는 예수님과 함께 사람들 가까이 왔지만 어떤 사람에게는 그 하늘나라가 너무도 멉니다. 어떤 사람은 하늘나라를 거들떠보지도 안고 어떤 사람은 하늘나라를 거부합니다. 이런 사람에게 찾아가 억지로라도 복음을 전하라는 말씀인가요?
주님께서는 그럴 필요는 없다고 하십니다. 발의 먼지를 털고 미련 없이 다른 곳으로 떠나라고 하십니다. 만일 거부하는데도 계속 머무는 것은 자기 집착인 셈입니다.
그러면 찾아가 복음을 선포하는 것은 어떤 의미입니까? 찾아가지 않으면 복음을 접하지 못할 사람을 찾아가라는 뜻입니다. 그러니 찾아가지 않으면 찾아오지 않는 사람이 아니라 찾아가지 않으면 찾아오지 못하는 사람입니다.
시간이 없어서 찾아오지 못하는 사람, 교회 문턱이 높아서 감히 찾아오지 못하는 사람, 한 마디로 소외되고 가난한 사람들입니다.
십 수 년 전 무전순례를 하였습니다. 마지막 날 서울역에서 복음 선포를 하리라 마음먹고 서울역 한 쪽 구석에 앉아 있었습니다. 저는 용기가 나지 않아 망설이고 있는데 어떤 개신교 전도사가 아주 용감히 복음을 전하는 것입니다. 저는 그 사람이라도 잘 선포하라고 기도하다가 너무 피곤하여 잠이 들었습니다. 한참 잠을 자는데 누가 와서 저의 어깨를 두드리며 자기를 따라오라는 시늉을 하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졸리기도 하고 따라 갈 이유가 없어 그냥 더 잠을 잤습니다. 그런데 얼마 후 그 사람이 다시 또 어깨를 치며 따라오라 합니다. 그래서 따라 갔더니 놀라운 일이 벌어졌습니다. 서울역 지하도의 반을 노숙자 수 백 명이 줄지어 앉아 있는데 그 밤 지하도에서 야간 예배가 이루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제가 노숙자처럼 보여 같이 예배하자고 초대한 것입니다. 제가 노숙자처럼 보인 것도 충격이지만 그 당시 거리 예배가 이루어진 것이 정말 충격이었습니다.
찾아가는 예배. 찾아가는 교회. 예수님께서 했고, 사도들, 특히 바오로가 했던 그 찾아가는 복음 선포를 그 밤 개신교 신자들이 정말 훌륭히 해내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노숙자, 그들은 스스로 교회를 찾아오지 못하는 사람들, 아니 찾아와도 쫓겨나는 사람들이 아닙니까?. 그런 그들을 개신교의 한 교회가 찾아간 것입니다.
제가 정말 부끄러웠습니다. 프란치스칸이 그렇게 해야 하는 것 아닙니까? 순례자와 나그네의 영성, 감의 영성, 동적인 영성을 사는 우리가 그렇게 해야 하는데 보름간 순례는 잘 하면서 찾아가는 복음 선포는 하지 못하는 제가 너무 부끄러웠습니다. 아직도 못하니 이 부끄러움은 현재 진행형입니다.
주님, 저에게 자비를 베푸소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