新․人間革命 28卷 第4章 勝利島 (4~9)
<승리섬 4>
야마모토 신이치는 각지를 방문했을 때, 가족 중에서 혼자만 신심하는 부인 등과 간담할 기회가 종종 있었다. 개중에는 남편은 “지금은 활동하지 않지만, 예전에는 열심히 했습니다.” 하고 말하는 사람도 있었다. 왜 활동에서 멀어졌냐고 묻자, 인간관계 때문이라며 이렇게 대답했다. “남자부 시절에 선배가 거만하게 굴어 활동에 싫증이 났다고 합니다.” 그 선배는 간부가 되자 마치 자신이 대단한 사람이 된 줄 착각하고 후배를 부하처럼 여겼는지도 모른다.
프랑스 철학자 볼테르는 “거만이나 억압으로는 인심을 따르게 하지 못한다” 하고 갈파했다. 학회 간부는 불자(佛子)인 회원 여러분을 섬겨 모두 행복을 향해 일생성불을 향해 나아가도록 응원하고 도와야 한다. 학회 역직은 현재는 물론 미래에도 이런 것임을 알아야 한다. 고생하며 광선유포를 책임져야 하기에 간부로서 신심에 면려하는 공덕도 복운도 크다.
또 학회 활동을 하지 않게 된 딸 문제로 고민하는 어머니는 이렇게 말했다. “본인 말로는 절복을 왜 하는지 등 하나하나 활동의 의미를 잘 모르는데 자꾸 하라는 말을 듣는 게 싫어서 그만 두었다고 합니다.”
학회 활동을 하는 의미를 이해하지 못하는데, 단지 하라고만 하면 괴롭기도 할 것이다. 이럴 때는 알아듣도록 대화하는 일이 중요하다. 왜 절복을 해야 하는지, 그 실천을 통해 어떤 체험을 느꼈는지 등을 말해야 한다. 그리고 상대방이 이해했다면 함께 활동하고 하나하나 친절하게 가르친다는 마음으로 공덕의 체험을 쌓을 수 있도록 응원해야 한다. 신심에 힘써 공력(功力)을 실감하면 진지하게 활동에 도전하자는 마음이 솟구치는 법이다.
<승리섬 5>
광선유포를 추진하는 리더에게 자신이 담당하는 조직의 모든 멤버가 반드시 행복해지도록 하자는 강한 일념이 있느냐 없느냐는 중요한 문제다. 그리고 ‘인간 대 인간’으로서 성실히 교류를 도모하고 깊은 신뢰관계를 맺어야 한다. 이것이 바탕이 되어야 격려도, 지도도 가슴을 강하게 울리고 공명의 가락을 연주할 수 있다. 이것은 학회원만이 아니라 모든 인간관계도 마찬가지다. 평소에 교류가 있어야 신뢰도 싹트고 흉금을 터놓고 대화할 수 있다. 리더가 아름다운 인간관계를 만드는 일에 최대로 노력한다면 광선유포는 착실히 그리고 더욱더 크게 넓혀질 것이 분명하다.
또 ‘한 사람’이 일어서 신심에 진지하게 힘쓰게 된 배후에는 반드시 진심을 다해 격려하고 돌봐준 학회 선배나 동지가 있다. ‘저 사람이 열심히 격려해주었기에 오늘의 내가 있다’ ‘저 사람의 성품에 공감해 신심해보자고 결심했다’는 사람은 어느 조직에나 일일이 셀 수 없을 정도로 많다.
본디 창가학회의 ‘인간의 유대’ 만큼 아름다운 것은 없다. 병으로 괴로워하거나, 하는 일이 잘 되지 않아 힘들어 하는 멤버가 있으면 격려하고 상담도 해주어, 이겨낼 수 있도록 열심히 기원한다. 거기에는 서로의 행복을 바라는 마음이 있고, 동고(同苦)하는 마음이 있다. 더구나 학회원이 베푸는 진심은 회원뿐 아니라 이웃 사람들과 우인 등 자신을 불러 싼 많은 사람에게 향한다. 그야말로 창가(創價)의 벗이 맺은 인간의 연대는 둘도 없이 소중한 사회의 보배가 되고 있다고 해도 좋다.
그런 만큼 신이치는 간부와의 인간관계로 활동에서 멀어졌다는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가슴이 무척 아팠다. 그래서 신이치는 ‘올바른 리더의 모습’을 여러 각도에서 지속적으로 지도했다.
<승리섬 6>
태양이 구름 사이로 빛났다. 도쿄 시나노마치의 학회본부에 사람들이 신나게 모여들었다. 검게 그을린 늠름한 모습에 씩씩하고 날카롭게 보이는 남성도 많았다. 대부분 학회본부에 처음 와본 사람들이었다. 문 앞에서 햇살을 받아 반짝이는 창가문화회관 대리석 벽을 올려다보며 웃음 지었다. 한껏 드러난 하얀 이가 눈부셨다. 1978년 10월 7일 오후 6시부터 학회본부인 창가문화회관 내에 있는 광선회관에서 제1회 낙도본부(훗날 낙도부)총회를 연다. 북쪽으로는 홋카이도에서 남쪽으로는 오키나와까지 약 120개 섬 대표가 모이는 학수고대하던 낙도본부총회다.
세토내해의 나오시마섬 멤버 22명이 가장 먼저 도착했다. 전날 밤에 출발해 여객선과 침대특급열차를 타고 아침 도쿄에 도착한 멤버들은 본부주변을 견학하며 개회를 기다렸다. 홋카이도의 레분섬에서 참석한 두 사람은 6일 점심 전에 섬을 출발해 배로 2시간 반 걸려 왓카나이로 나왔다. 첫눈이 내리고 있었다. 거기서 리시리섬에서 온 멤버 3명과 합류해 오후 9시 급행을 타고 7일 오전 6시에 삿포로에 도착했다. 그리고 비행기로 도쿄로 이동해 정오에 시나노마치에 도착했다.
일본 최서단 섬인 오키나와현 요나구니섬에서도 부인이 한 사람 참석했다. 섬에서 타이완까지는 111킬로인데 오키나와 나하까지는 514킬로다. 맑은 날에는 타이완의 산들이 보인다. 10월도 늘 최고기온이 25도 이상인 여름날씨다. 요나구니섬에서 도쿄에 가려면 먼저 배로 6시간 걸려 이시가키섬으로 나간다. 배편은 나흘에 한 번이다. 파도가 높으면 그것마저 결항이다. 그리고 이시가키섬에서 비행기로 1시간 15분 정도 걸려 나하로 간다. 거기서 다시 비행기로 도쿄에 가는 방법이 가장 빠르다.
각 섬의 동지들은 구도심을 불태워, 머나먼 바다를 건너 기세 당당히 학회본부에 모여들었다. 대성인은 “길이 먼 것에 뜻이 나타나는 것일까”(어서 1223쪽) 하고 말씀하셨다.
<승리섬 7>
10월 7일, 낙도본부총회에 앞서 제1회 ‘오키나와지부장회’를 학회본부의 사제회관에서 열게 되었다. 오키나와 동지는 회장인 신이치가 오키나와를 방문하기를 강하게 바랐다. 신이치는 1974년 2월 오키나와 지도 때 이시가키섬과 미야코섬도 격려차 방문했다. 그 뒤로 4년 넘게 오키나와를 방문하지 않았다.
오키나와의 수뇌간부들이 현장인 다카미 후쿠야스를 중심으로 의논했다. 한 간부가 이렇게 말했다. “야마모토 선생님은 회장에 취임한 뒤로 1974년까지 일곱 번 오키나와에 오셨습니다. 당초에는 해마다 오셨고 평균으로 보면 2년에 한 번 꼴로 방문하셨습니다. 최근 4년 동안에 새로운 회원도 탄생했으니 아무쪼록 빠른 시일 내에 선생님께 여덟 번째 방문을 요청해야 하지 않을까요.” 다카미는 팔짱을 끼고 고개를 끄덕이더니 중얼거리듯 이렇게 말했다. “물론 와주시면 좋지요. 꼭 와주시기를 바라지만…….” 그리고 입을 다물었다.
긴 침묵이 흘렀다. 이윽고 다카미가 조용한 말투로 말하기 시작했다. “저는 ‘선생님이 와주시기를 바란다 하면서, 그저 기다리기만 하는 자세로 과연 괜찮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그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선생님이 일곱 번이나 오신 건, 어느 곳보다 오키나와를 소중히 여기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어느덧 그것을 당연하다고 생각하고 선생님께 어리광을 피우고 있는 건 아닐까요. 세계에는 선생님이 한 번도 방문하지 않은 나라가 많습니다. 어느 나라 멤버나 선생님이 와주시길 바라는 마음은 간절하겠지만, 그것을 입에 올리기 전에 선생님을 구도하고 불법(佛法)을 구도해 자신이 직접 일본에 찾아옵니다. 아프리카나 중남미 동지들은 몇년 동안이나 생활비를 아끼고 아껴 돈을 모아서 10일, 20일 휴가를 내고 옵니다. 구도하는 그 마음이 바로 신심이 아닐까요! 제자의 길이 아닐까요!”
<승리섬 8>
다카미는 말할수록 힘이 들어갔다. “저는 지금 제 자세를 되돌아보고 깊이 반성하고 있습니다. 구도심을 잃고 선생님께 응석을 부리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죄송한 마음뿐입니다.” 그 자리에 모인 오키나와 수뇌간부들은 다카미를 바라보며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오키나와 부인부장인 우에마 다마코가 입을 열었다. “정말 그렇습니다. 우리가 뵈러 가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최소한 대표만이라도 학회본부에 모일 수 있도록 부탁해보면 어떨까요. 물론 바쁘신 야마모토 선생님을 생각하면 본부에 간다고 만나주신다는 보장은 없습니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것은 스승을 끝까지 구도하려는 마음이 아니겠습니까. 그 일념이 있어야 선생님의 마음도 알 수 있고, 모든 것을 흡수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다카미는 “그렇지요. 그렇지요” 하고 반복해서 말하며 마음속으로 이렇게 다짐했다. ‘어서는 <법화경의 법문을 들음에 따라 더욱더 신심을 면려함을 참된 도심자(道心者)라고 하느니라> (어서 1505쪽) 하고 씌어 있다. 야마모토 선생님은 몇번이나 오키나와에 오셔서 살을 깎고 뼈를 가는 심정으로 지도하셨다. 그러나 우리는 더욱더 신심에 힘쓰고 구도심을 불태우는 것이 아니라, 오로지 선생님이 오시기만을 기다리는 신심이 되고 말았다. 이런 타성적인 자세를 깨부숴야 한다!’
다카미는 더욱 큰 소리로 이렇게 말했다. “본부에 모입시다! 그리고 새롭게 출발합시다!” 모두 눈동자가 빛났다. 다카미는 학회본부와 연락해서 10월 7일 낙도본부총회 전에 광포 제2장의 지부장과 지부부인부장 그리고 남녀청년부 대표가 모여 제1회 ‘오키나와지부장회’를 열기로 했다. 신이치에게서 “무리하지 않도록 여러분과 만날 날을 진심으로 고대하고 있습니다.” 하는 전언이 도착했다.
<승리섬 9>
낙도본부총회에 참석하는 오키나와 동지는 나하에 모여 ‘오키나와지부장회’ 참석자와 합류해 아침 비행기로 도쿄로 갔다. 멤버 중에는 배로 이시가키섬이나 미야코섬으로 가서 그곳에서 비행기로 나하로 나와 일박한 사람도 있었다. 오키나와 동지는 하네다공항에서 버스 다섯 대에 나눠 타고 정오가 넘어 학회본부에 도착했다. 멤버들이 손에 여행용 가방을 들고 학회본부로 들어서자, 부회장인 아오타 스스무와 야마미치 히사야를 비롯한 많은 간부가 양쪽에 줄지어 서서 큰 박수로 일행을 환영했다. “안녕하십니까! 오시느라 고생하셨습니다!” 이 격려에 피로가 싹 가셨다. 학회본부의 사제회관에서 오키나와지부장회를 열었다. 모두 ‘대법홍통 자절광선유포 대원성취’의 창가학회 상주어본존 앞에서 오키나와 광포를 굳게 다짐하고 엄숙히 기원했다. 부인부장인 후지야 유미에, 부회장인 세키 히사오와 아키즈키 에이스케가 차례로 단상에 올라 학회본부까지 먼 길을 오느라 고생한 멤버를 위로하고 오키나와의 새로운 출발을 축하했다.
그 무렵 신이치는 6월에 시나노마치에 개관한 창가부인회관(훗날 시나노문화회관)에 있었다. 지부장회가 끝나면 오키나와 동지를 이곳으로 불러, 함께 기념촬영을 하려고 먼저 와 기다리고 있었다. 멤버들은 지부장회를 마치자 담당 간부에게서 창가부인회관으로 이동해달라는 말을 들었다. 본부에서 걸어서 2, 3분 거리에 있는 갈색 타일 벽에 녹색 기와지붕으로 산뜻한 2층 건물이었다. 회관에 들어가자 신이치가 활짝 웃으며 나왔다. “먼 길 잘 오셨습니다!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여러분은 평화로운 오키나와를 이룩하고자 광선유포를 위해 일어서서 죽을 고생을 하며 싸우셨습니다. 큰 사명이 있는 지용보살이자 광포의 위대한 공로자입니다. 저는 부처를 공경하는 심정으로 여러분을 맞고자 합니다. 그것이 인간으로서, 불법자(佛法者)로서 당연한 길입니다.” 승리섬(4~9).hwp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