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금으로써는 이제 월요일 서울 강의는, 우선은 당분간 휴강 계획이 아직은 없구요. 뭐 어지간하면 안 하면서 갈 예정이지만 혹시나 휴강하게 되거나 이러면 그전 주에도 말씀을 드리겠지만.
전에 같으면 제가 핸드폰 번호를 다해서 문자로 이렇게 있다, 없다, 뭐 이렇게 드렸는데. 그거를 지금 조금 할 상황이 안 데다 보니까. 그 법상 스님의 목탁소리라는 밴드, 밴드에다가 뭐 혹시나 휴강하거나 이런 거 있거나, 공지할 거 있거나 하면 그쪽에 올릴 예정이거든요.
그러니까 필요하신 분이나 아직 가입이 안 돼 있으신 분들은 검색해서 들어올 수 있으니까, 가입하시면 또 좋은 글도 받아보실 수 있고. 뭐 이러실 거 같습니다. 그리고 아울러 유튜브에다가 이렇게 유튜브 ‘법상 스님의 목탁소리’에 이렇게 강의,
그때그때의 강의도 필요한 것들은 좀 이렇게 올려드리고, 자주 요즘은 올려드리고 있어요. 그래서 하루, 이틀 한 건씩 계속 올리고 있습니다. 요새는. 그러니까 공부에 참고하시면 될 거 같습니다.
조금 전에 이제 말씀드린 것처럼 보자마자 듣자마자 접촉하자마자, 세상과 접촉하자마자 내 머릿속에 허상으로 기억으로써 상으로써 만들어놓은 것. 그게 진짜라고 믿으면서 살면 그게 이제 지식이지요. 그게 분별심입니다.
알음알이, 지식이고, 분별심이고. 그것으로 보았을 때 분별해서 아는 것이라 지혜라고 하지 않습니다. 그거를 분별지라고 불러요. 분별해서 아는 지식. 그런데 이 반야 지혜라는 것은 분별해서 아는 지혜가 아니라 무분별지라고 부릅니다.
분별하지 않는 지혜. 즉 분별지는 아까 말한 것처럼, 많이 보고 들은 게 많은 사람일수록 지식이 많은 사람일수록 더 지식이 많겠지요. 분별지가 많을 겁니다. 그런데 무분별지, 반야 지혜는 보고 들어 아는 정보, 내용, 이런 것과는 상관없습니다.
즉, 이 불교 공부는 참 다행히도 학교 다닐 때 공부 잘했던 사람, 못했던 사람, 똑같이 평등합니다. 오히려 공부 잘했던 사람이 조금 더 안 좋을 수도 있어요. 뭐 지구력 있는 사람과 지구력 없는 사람, 이 차이가 똑같습니다.
이 세상에서 얘기하는 능력 있고 능력 없는 수많은 기준들이 있잖아요. 그 어떤 기준에도 이것은 해당되지가 않습니다. 그러니까 여러분들은 10년 동안 법문 들은 사람, 지금 처음 나온 사람, 똑같은 조건입니다. 어쩌면 처음 나온 사람이 더 빠를 수도 있어요.
이건 마음공부기 때문에. 그래서 그 어떤 차별도 없고 그 어떤 것이 없으니까 오히려 제로이기 때문에 편안하게 들으시면 되구요. 이처럼 분별하지 않는대서 오는 지혜. 이게 이제 진짜 반야 지혜입니다.
그런데 반야 지혜는 분별하지 않는대서 오는 지혜는 뭐라고 정말, 그야말로 해석하기가 어렵다 보니까 반야라는, 판야라는 말을 그대로 그냥 이렇게 해서 온 것이지요. 그래서 이 반야 지혜라는 것이 분별지가 아니라,
내 머릿속에 기억과 상으로써 만들어놓은 것이 아니라, 그것이 아닌 그 허상으로써 세상을 파악하는 것이 아니라, 실상을 있는 그대로 보는 것. 이게 이제 반야 지혜입니다. 그래서 이 실상의 자리는, 허상은 머릿속에 있잖아요.
머릿속에 막 상으로 존재하잖아요. 그런데 그걸 우리는 지금까지 주인이라고 생각하고, 그걸 옳다고 생각하면서 살았기 때문에 우리가 중생이라고 하고, 우리를 어리석다,라고 하는 겁니다. 그러면 그것을 하지 않으면 이게 지혜에요.
그래서 이 생각을 믿지 않는 것. 이게 이제 마음공부입니다. 평소, 일상생활에서 하는 모든 마음공부는 이것을 견고히 하는 거예요. 그러면 이렇게 이 머릿속에 있는 이것이 허상이라면, 이것이 허상이라면, 실상은 뭡니까.
이 허상을 허상인 줄 알아서 허상에 휘둘려가지 않으면 저절로 실상이 드러납니다. 그런데 우리는 지금까지 허상만 보고 살아왔지. 실상을 보지 않고, 실상을 보고 있으면서도 매 순간 실상을 경험하고 있고, 실상으로 살고 있고,
실상을 체험하며 살고 있으면서도 실상에는 관심 두지 않고 허상만 보고 살았던 거예요. 마치, 부산에서 서울까지 기차를 타고 올 때 창밖을 바라보는데 창밖에 있는 무수히 많은 풍경들. 도시도 바라보이고, 또 뜰도 보이고, 밭도 보이고,
산도 보이고, 다양한 것들이 보이는 바깥의 풍경만을, 부산에서 서울까지 오면서 계속 풍경만 보잖아요. 그런데 정작 풍경을 보지만 항상 유리, 앞에 있는 유리를 보지 않은 적은 한 번도 없지요. 유리를 걸러서 보지 않으면 바깥에 풍경이 보이지 않으니까.
바깥에 풍경을 봤다,라는 것은 반드시 유리를 봤다는 거지요. 바깥에 풍경이 보이기 이전에 먼저 유리가 있죠. 먼저 여기, 먼저 눈앞에 당처에 먼저 유리가 먼저 있고. 그다음에 유리 바깥에 있는 풍경이 있는 거잖아요. 그러니까 유리가 먼저인데.
우리는 유리에는 관심이 없고 바깥에 있는 지나가는 풍경들. 왔다가 가는 것들. 왜냐면 그게 좀 막 다양한 게 왔다 갔다 하니까. 그런데 이 유리는 이거 아무 맛도 없잖아요. 뭐 있는 거 같지도 않고. 색깔도 없고, 모양도 없고, 크기도 없고.
이게 뭔가, 뭔가 막 박진감 넘치는 무언가가 없고. 밍밍하니까 관심이 없었던 거예요. 바깥에 있는 휙 휙 지나가는 뭔가 화려한 바깥 대상에만 관심을 가졌던 것이지요. 그런데 바깥 대상을, 지나가는 대상을 항상 보지만 언제나 유리창도 언제나 봤었지요.
다만, 유리창에 관심이 없었을 뿐이지. 유리창을 안 본 사람은 없잖아요. 항상 유리창을 보고 살았습니다. 그것과 똑같이 허상을 진짜라고 여기면서 허상에 휘둘리면서 허상에 울고 웃으면서 지금까지 인생을 괴롭게 살아왔지만, 실상이 없었던 게 아닙니다.
실상은 언제나 우리가 가지고 써왔던 것이지요. 그런데 우리는 허상만 챙겼던 것이지요. 주인이, 허상이 주인인 줄 알고 실상 자리를 허상에 내주었던 것입니다. 그 뭐가 실상이냐? 그러니까 여러분들이 어렵게 생각하기 시작하면 이 얘기를 아무리 들어도 못 알아차려요.
제가 하는 말뜻의 낙처를 못 알아차립니다. 너무 쉬워서 못 알아차려요. 너무 쉬워서. 이건 액면 그대로 너무 쉬워서 못 알아차립니다. 액면 그대로. 왜냐하면 지금까지 불교 공부 많이 한 사람들은 ‘깨달음은 어마어마한 거야’
‘견성성불은 어마어마한 거야’ ‘우리는 감히 상상도 못해’ ‘큰 스님들두 가까이 가기 힘든 거야’ ‘큰스님도 제대로 된 깨달음이 없어’ ‘내가 깨닫는다고’ ‘그 법문만 듣다가 깨닫는다고’ ‘내가 앉아서 좌선도 안 했고 말도 안 된다’
깨달음이 일어나면 막 어마어마한 환상이 생기고, 엄청난 체험이 생기고, 뭐 어마어마한 사건이 일어나서 내가 갑자기 초월한 어떤 새로운 존재가 되는 것으로 착각을 하는 겁니다. 이건 뭐예요? 머릿속으로 그려놓은 상이지요.
의식으로 그려놓은 상이지요. 거지요. 둘로 쪼개지는 건, 의식의 특징은요, 둘로 쪼개집니다. 둘로 쪼개지는 것은 전부다 의식이에요. 그래서 분별식이라고 하잖아요. 분별 상이라고도 하구요. 분별, 둘로 나누어져야지만 파악되는 겁니다.
‘깨달음은 이런 거야’라고 머릿속에 그림 그려놓은 게 다 있어요, 여기 계신 분들. ‘깨달음은 이런 거야’ 그러니까 ‘여기를 내가 가야 돼’ 해서 ‘어떤 방법을 통해서 이 자리로 갈 거야’라고 정해놓은 사람은 이 정해놓은 것 자체가, 내가 정해놓은 허상이지요.
내가 정해놓은 허상이잖아요. 내가 정해놓은 허상으로 내가 가려고 하는 것은 나는 여기 있고 저기 깨달음이란 뭔가가 있으니 난 저길 향해 가겠다. 둘로 나누는 이분법입니다. 분별법입니다. 그래서 깨달음을 저쪽 어딘가에 있는 것으로 알고
그것을 찾겠다. 뭐 구하겠다. 추구하겠다,라는 마음을 가지는 그 마음 때문에 깨달음이 드러나지가 않습니다. 너무 단순하다고 얘기하면. 그래서 불교에서도 믿음을 얘기하지요. 거지요. 믿음을 얘기하는 이유는 제가 그러니까 참 뭐랄까?
요즘에는 여러분, 법은 바뀌지 않습니다. 부처님 당시의 법이나, 조사 스님 당시 법이나, 지금의 법이나, 법은 똑같애요. 그런데 법을 설명하는 방법론은 바뀔 수 있을까요? 없을까요? 당연히 바뀌지요.
요즘에 가끔 영어강좌 같은 거를 그냥 가끔 한 번 이렇게 보면 ‘야, 내가 요즘 같은 이런 강의가 있었으면. 아, 내가 옛날에 공부 잘했을 텐데’ 요즘은 보면 그 교수법이 상당히 놀라워요. 제가 그것을 안 게 보면 공부도 안 한다고 그러는.
“난 공부 관심이 없어.” 이러면서 “음악만 좋아요.” 하는 중학생, 고등학생 애들이 예를 들어 무슨 뭐 고등 래퍼 같은 거에 나오고 이런 것들을 보면. 고등 래퍼 나온 애들이 학교 안 다니고 공부 관심이 없다고 하는데. 랩을 할 때 영어로 하는 거 보면 발음이 상당히 좋아요.
‘왜 이래 좋지’ 보면. 요즘에는 교수법 자체가 옛날하곤 완전 다르더라구요. 교수법이 엄청나게 발전이 됐습니다. 그래서 야, 저런 방법이 옛날에도 있었으면. 우리 옛날에 그냥 책 가지고 성문종합영어나 무슨 저 뭐, 뭐 종합영어 있잖아요.
맨투맨이나 뭐 이런 거 가지고 죽도록 그냥 그거 보는 거 외엔 없었습니다. 그러데 지금은 뭐 그걸로 공부한다는 거는 정석으로 무슨 수학을 풀고. 이러지 않고 그냥 강의만 들어도 그냥 될 정도로 너무나도 많은 강의가 많더란 말이지요.
이처럼 방법은 당연히 눈부시게 진화합니다. 진보합니다. 방법론은. 당연하지요. 불교도 마찬가지입니다. 법은 똑같애요. 천 년 전이나 지금이나 똑같습니다. 그런데 법을 가르치는 방법론은 당연히 달라지는 거예요. 변화되는 것이고.
시대 따라 발전할 수도 있는 것이고. 또 옛날 사람들은 그거를 이렇게 알았으니까, 어렵게 알았고 그 방법대로 알았으니까 그렇게 밖에 얘기 못했다면. 지금은 옛날 사람들이 어떻게 깨달았는지. 그 깨달은 것을 어떻게 설법했는지에 대한 정보,
책, 어록, 경전, 무수히 많이 나온 것을 저만해도 지난 뭐 2, 30년간 얼마나 경전, 어록, 얼마나 무수히 봤겠습니까? 그런데다가 저는 한때, 한때 우리나라 불교라고 느끼는 우리나라에서 깨달았다고 느끼는 모든 것을 다 기웃거려 봤는데.
여기서 답을 못 내겠구나,라는 제 나름대로의 성급한 결론을 내고서는 외국으로 눈을 돌렸어요. 여기저기 막 해외에 있는 막 깨달았다,라는 무수히 많은 다양한 어떤 영적인 전통? 다 이것저것 막 쫓아다니고, 구하고, 해봤는데.
그러다 보니까 뭐 지금에 와서 장점은 그들이 이야기하는 다양한, 동서고금에 있는 무수히 많은 사람들의 다양한 방편들? 방편들 가운데 제가 필요한 것들은 이제 다 방편으로 갖다 쓸 수가 있는 것이지요. 제가 아는 어떤 큰스님은 법은 분명하신데.
방편이 아무것도 없다고 할 정도로 너무 당연한 얘기 하나만을 계속하니까 제가 봐도 참 그런데. ‘누가 법을 들으러 가겠나’ 싶은. 법은 분명해도 방편이 또 그렇다 보면 가기 어렵습니다. 그런데 요즘에는 진짜 방편이 아주 놀랍게 이렇게 많이 변화가 돼요.
그래서 방편이 놀랍게 바뀌면요. 그 결과도 당연히 놀랍게 좋아질 수밖에 없지요. 그리고 실제 부처님 당시에 경전을 보면 저는 진짜 다 거짓말인 줄 알았어요. ‘아함경’ ‘니까야’ 보면 제자들이 질문하고 부처님이 법문했어요.
법문 끝에 몇 사람이 아나함과를 얻었다. 몇 사람이 수다원과를 얻었다. 몇 사람이 사다함과를 얻었다. 몇 사람이 아라한과를 얻었다. 심지어는 막 곧장 몇 백 명이 아라한과를 얻기도 해요. 어지간한 법문 듣자마자.
그런데 그 법문을 들어보면 그냥 ‘오온이 공하다’라는 얘기. 색수상행식 어짜구저쩌구 하는 얘기를 합니다. 안이비설신의와 색성향미촉법, 안식, 이식 비식, 설식, 신식, 의식에 대한 얘기를 합니다. 조금 전에 제가 얘기했던 게
부처님이 얘기하신 ‘안이비설신의 색성향미촉법이 공하다’라는 ‘오온 18계’에 대한 설법이에요. ‘그것이 공하다’라는 설법을 하시는 겁니다. 무아다. 실체가 아니다. ‘무아’라는 말을 설명하기 위한 교리가 18계입니다.
제가 방금 전에 18계에 대한 설법을 해드렸지요. 18계를 쥐고 있는 것은 허상이다. 실체가 아니다,라는 얘기를 했던 겁니다. 그런데 그 얘기를 듣고 깨어난단 말이지요. 아라한과 아나함과를 증득합니다.
그런데 그 내용 자체는 제가 지금 얘기했던 게 똑같은 얘긴데. 아함경에는 색성향미촉법이 실체가 아니고 이렇게 심플하게 나오니까 그렇게 옮겼다 보니까 그것만 보고 ‘이게 뭔 얘기지’ 하고, 하는 것일 뿐이지. 같은 얘기를 했던 겁니다.
부처님 당시에도, 무수히 많은 사람이 깨어났어요. 그런데 그게 지금 생각해도 말이 됩니까? 아니, 법문 몇 번 듣고서 3개월, 5개월, 법문 듣고, 일 년 법문 듣고, 아니면 한 번 두 번 법문 듣고, 바로 눈치채는 사람들이 무수히 많았단 말이지요.
이게 진짜일까요? 진짜입니다. 제가 지금 보니까 진짜예요. 왜냐하면, 그래서 이제 부처님이 이 법은 단계로 나눠지는 것이 아니지만. 이게 수다원과, 사다함과, 아나함과, 아라한과, 이런 식으로 이렇게 해놓은 것은 문득, ‘아하! 그렇구나’
하고 눈치채는. 그런 어떤 것이 있다가, 이제 이 방식이 다양해요. 다양한 경전에서 얘기하는 게, 예를 들면 자기 성품을 확인할 때 어떤 분은 이래요. 이 법을 본인이 깨달아 놓고도, 본인이 그런 방식으로 깨닫다 보니까 본인이 깨달은 방식밖에 몰라요,
사실은. 그러니까 본인이 깨달은 그 방식대로 깨달아야만 깨달음이다,라고 인정을 하는 스승도 있어요. 많은 영적인 이런 데 기웃거려 보면. 그래서 이 스승들마다 저마다 자기가 얘기하는, 요구하는 깨달음의 요구 조건 내지는
‘깨달음이 일어날 때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으면 그건 깨달음이 아니야’ 하고 인정 안 하는 분들도 계십니다. 그렇지 않아요. 경전에는, 경전에는 깨달음이 일어날 때 한 40여 가지가 동반된다, 그래요. 사람에 따라.
어떤 사람은 그냥 쑥 내려가는 거 같은 느낌을 경험할 수도 있고. 어떤 사람은 그냥 문득 그냥 ‘아하!’ 하는 정도일 수도 있고. 문득 이렇게 확인되는 경우도 있을 수 있고. 다양한 거기에 따라 부수적으로 동반되는 느낌들은 무수히 많은 사람들마다 다 다르지요.
사실 40여 가지만 있겠습니까? 천 명이면 천 명이 똑같을 순 없어요. 약간씩 다 다른 것이지요. 마치 뭐와 같으냐면, 여러분들은 그냥 일반인이에요. 여러분들은 군대를 안 가신 분들이 많으시지요. 보살님들이니까.
요즘에 여자도 군대를 가니 어쩌니 하던데. 예를 들어 남자가 군대를 가요. 그런데 군 생활을 막 하다가 전역 날이 가까워집니다. 그럼 막 들뜨기 시작해요. 너무 막 꿈을 꾸기 시작하다가 전역을 딱하고, 그날 아침에 전역 딱하고,
집에 딱 갈 때 얼마나 기쁘겠습니까? 어마어마하게 기뻐서 막 정말 죽을 것처럼 기쁜 아이들도 있어요. 그런데 또 어떤 아이들은 되게 담담하다고 하는 아이들도 있어요. 또 어떤 친구들은 ‘뭐 아무렇지도 않다’고 그냥 그런 친구들도 있습니다.
또 전역하기 전에 휴가를 몰아가지고 한 한두 달을 계속 휴가만 갔던 친구도 있어요. 그런 친구들은 이미 전역을 경험한 거예요, 벌써. 체험을 하다 보니까 전역 날 별로 감응이 없어요. 그럴 수도 있습니다. 즉 전역하는 날 저녁의 기쁨,
이게 완창 뭐가 깨지는 것처럼 오는 경우도 있지요. 왜냐하면 선임병한테 너무 억눌려있던 사람. 예를 들어, 너무 여기에 막 꽉 일했던 사람이 전역 딱하면 얼마나 자유를 느끼겠어요. 너무 기쁘겠지요. 옛날에 교도소 있다가 나온 사람이,
어떤 사람은 너무 기뻐하지만. 떼거리가 없어 가지고 교도소 간 사람은 ‘교도소에 있을 땐 그래도 먹을 거라도 주는데 나가면 어쩌나’ 하고 오히려 더 실망할 수도 있잖아요. 이 공부도 그렇습니다. 오히려 확인하고 나서 더 실망할 수도 있지요.
‘고작 이거여서’ 하고. 다 다른 것이지요. 그래서 특정한 뭔가를 고집하고 집착하지 않으면 깨달음이라는, 뭐 깨달음이라는 말이 좀 많이 오염돼 있어서 깨달음이라는 말은 뭐 별로 쓰고 싶지가 않고. 깨달음이라는 말을 붙일 필요가 없습니다. 전혀.
그래서 실제 말은, 사실 이 성품에 대한 공부를 하고 보면요. 주변에 상당히 많은 사람이 자기 성품을 확인한 사람들이 엄청 많습니다. 스님들 중에도 상당히 많아요. 그런데 막 드러내고 이렇게 이러지 않아요. 왠지 아세요? 드러낼 게 없거든요.
드러낼 게 없습니다. 그리고 한 번 자기 성품을 확인해도 그 쑥 내려가는 그 느낌을 깨달음이라고 다들 착각을 하다 보니까, 그 느낌은 왔다가 가거든요. 그러니까 ‘나는 깨달았는데 놓쳤어’ ‘잊어버렸어’ 그렇게 생각하면서 또다시 추구해요.
그러니까 그 깨달은 느낌은 깨달음이 아닙니다. 왔다 가는 경계이지. 경계 체험입니다, 그건. 그 경계를 진짜라고 잘못 착각하니까 계속해서 또 찾고 또 찾는 일이 벌어질 뿐이지요. 그래서 정말 그런 어떤 상. 깨달음에 대한 상을 내세우지 않으면,
부처님 당시도 그랬잖아요. 너무 쉽게 깨달았다고 하잖아요. 그러니까 뭐 깨달았다,라는 말도 필요 없습니다. 그냥 뭐 자기 공부돼서 자기가 자유로워지면 되는 거예요. 괴로움. 괴로움이 ‘야 내가 괴로움에서 어느 정도 많이 자유로워졌다’
괴로움의 문제가 이제, 그렇다고 괴로움이 나를 전혀 집어삼키지 않는다? 그럴 수 없습니다. 5년, 10년, 20년 돼도 괴로움의 문제가 나를 어느 정도는 그래 되지요. 그러나 점점점 가벼워지는 것이지. 그래 이제 굳이 말하면 보임이라고 표현할 수 있는데.
그냥 가벼워지는 것이고. 그 가벼워지는 공부를 계속 평생 하는 겁니다. 그 공부는 평생 하는 거예요. 그런데 그건 할 만하 단 말이지요. 내가 점점 가벼워지는 게 실질적으로 체험을 하니까 기존에 이걸, 이 허상이 진짜라고 생각하면서
막 온갖 시비분별하면서 스트레스받고 살던 것이 사라지지요. 이게 허상이라는 사실을 아니까. 실상에 딱 중심 잡고 서있으니까. 허상에 휘둘리긴 잠깐 휘둘려도 그게 허상이라는 사실을 분명히 알게 되면 그 허상에 휘둘려서 노예가 되지는 않습니다.
그래서 깨달음이라는 상. 그거는 가지지 마세요. 가지지 않으면 의외로 되게 단순하고 너무나도 심플할 수 있습니다. 제가 말씀을 드리는 것처럼 (죽비를 손바닥에 치며) 이거를 분명히 듣고 계세요. 여기 있는 모든 분들이 똑같이 듣고 계세요.
(죽비를 손바닥에 치며) 똑같이 듣고 계시는데. ‘당연히 내가 들었지’ ‘내 귀가 들었지’ 이렇게 생각을 지금까지 해왔어요. 제가 하는 말, “부처님”이라고 얘기하던“‘아버지”라고 얘기하던 “코카콜라”라고 얘기하던 그 말을 하자마자
여러분은 콜라 이미지를 떠올리고, 아빠 이미지를 떠올려요. 떠올리지 말고 ‘아버지’ 떠올리지 마시고. ‘아버지’ 이미지를 따라가지 마시고. 아버지라는 말을 지금 여러분은 다 같이 듣고 계세요. 개념을 따라가지 않으면,
개념은 아버지의 개념이 여러분 머릿속에 다 다르죠. 이백 명이면 이백 명의 아버지는 이미지가 상이 다 다릅니다. 다 다른 거는 허상이지요. 실상일 수가 없지요. 내가 만들어놓은 그림자지요. 아버지라는 말이 만들어낸 그림자에요.
그건 허상입니다. 진짜가 아닙니다. 그런데 여기 이백 명이 전부다 ‘아버지’ 이걸 똑같이 듣고 계세요. 해석하기 이전에 아버지라는 말이 나온 자리, 첫 번째 자리에서 제일의제. 제일의제, 제일 첫 번째, 첫 번째 의미? 첫 번째 진실?
첫 번째 자리. 이게 제일의제예요. 두 번째 자리 떨어지지 않고 해석을 좇아가는 걸 두 번째 자리에 떨어졌다 이럽니다. 두 번째 화살을 맞는다고 하고. 해석하지 않고 (죽비를 손바닥에 치며) 그냥 이걸 듣고 있어요.
이거 듣고 있는 무언가는 분명 있지요. 이거 귀가 듣는다는 거는 내 생각일 뿐이지. ‘내가 듣는다’라는 것도 내 생각일 뿐이잖아요. (죽비를 손바닥에 치며) 이 소리를 듣기 싫어도 듣게 되니까. 듣기 싫은 데 이걸 자꾸 듣게 돼요.
(죽비를 손바닥에 치며) 뭔가가 지금 이걸 듣고 있습니다. 누구라고 해야 될지. 뭐, 뭐라고 해야 될지. 그러고 말을 붙일 순 없지만. 어쨌든 (죽비를 손바닥에 치며) 이 소리를 우린 누구나 다 같이 듣고 있습니다. 이거 지금 다 같이 보고 있어요.
다 같이 보고 있습니다. 보고 나서 뭔지? 뭔지를 해석하기 이전에 보자마자 아는 뭔가가 있어요. 지금 여러분들은 제 얘기에 집중하고 있고 소리에 집중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숨이 저절로 들어갔다 나갔다 하고 있어요.
‘숨을 쉬어야지’ 하고 의도하지 않아도. 그냥 저절로, 저절로. 내가 숨을 쉬는 걸까요? 지가 알아서 그냥, 알아서 하고 있어요, 평생. 아까 점심때 드신 음식이 뭐 저절로 지금 소화가 되고 있는 중입니다. 내가 애쓰지 않았는데. 이렇게 서서히 밤이 오고 있는 중입니다.
내가 밤이 오라고 한 것도 아니고. 누가 막 시킨 것도 아닌데. 저녁이 되고 다시 아침이 되고, 해가 뜨고 해가 지고, 봄여름 가을 겨울이 왔다가 가고 있습니다. 여러분 숨을 들이쉬고 숨을 내쉬는데 그게 지금 일어나고 있어요.
무언가가 지금 이렇게 숨을 들이쉬고 내쉬고 있습니다. 이건 분명해요. 숨을 들이쉬고 내쉬고 있어요. 바람이 들어갔다 나갔다 하고 있습니다. 그것과 그 숨이 들어가고 나가고 있는, 내가 하는 게 아니에요. 그냥 숨이 들어오고 나가고 있어요,
지금. 무언가가 지금 이거 숨을 들이쉬고 내쉬게 만들고 있어요. 내가 아닌. 그런데 그놈과 그 자리와, 바람이 막 부는 날이 있습니다. 바람이 부는 날도 있고 해가 뜨는 날도 있고 비가 오는 날도 있어요. 그 바람이 불게 하는 그것과 다를까요?
봄여름 가을 겨울이 오고 가게 한단 말이에요. 이 지구가 공전을 하고 자전을 하게 만들고 있습니다. 무엇이 지금 이렇게 지구를 공전하게 자전하게 만들고. 무엇이 이 모든 것을 운행시킬까요? 이것을 대기대용이라는 표현을 쓰기도 하지요.
'대기’ 거대한 여기서 ‘대’자는 큰 뭐 이것보다 더 큰 이런 상대적인 개념이 아닙니다. ‘반야심경’에서 말하는 ‘마하’ 마하예요, 마하. 마하라는 말은 크다,라는 뜻인데. 이 마하라는 말은 큰 지혜. 지혜가 진짜 크다. 지혜를 이게 수식해줘서 훌륭한 지혜,
큰 지혜, 대단한 지혜, 이렇게 꾸며주는 말이기도 하지만. 마하 자체가 진리를 드러내는 말이에요. 진리는 실상 자리. 이 진리 자리. 진리라는 것은 실상이라고 법이라고 부르는 이것은 크거나 작다,라고 할 수가 없어요. 전체니까.
이것보다 조금 더 크거나 조금 더 작으면 상대적인 거잖아요. 큰 게 있고 작은 게 있잖아요. 그런데 그것 자체 면 ‘크다’ ‘작다’라고 할 수 없는 진정으로 큰 겁니다. 그걸 보고 ‘마하’라고 불러요. 대기대용이라는 말은 어마어마하게 큰 하나의 기관이 있단 말이에요.
우주적인 기관. 이 우주 전체를 돌리고 있는 운행시키는 한바탕으로 굴리고 있는 기관이 있단 말이에요. 불성이라는 기관이 있는데. 그 대기라는 마하의 거대한 이 우주 전체를 운행시키고 있는 그 기관이, 그 불성이, 그 주인공, 본래면목이,
대용으로써 한통속으로 하나로써 한마음으로써 온 우주법계 전체를 굴리고 있단 말이에요. 바람이 불게 하고 있고. 여러분 숨이 들어오고 나가게 하고 있단 말이에요. 여기 계신 모든 분들의 숨이 들어오고 나가게 하고 있는 그놈은
이 대기대용에 이 주인공이 온 우주 전체를 지금 이렇게 한바탕으로 굴리고 있어요. 마치, 거대한 공장, 수천 평의 거대한 공장을 스위치 하나 딱 올리면 공장 전체가 톱니바퀴로 연결되어 있고 전기로 연결되어 있어서 갑자기 전기가 부〜웅
굉음을 울리면서 모든 기관이 다 같이 움직이기 시작하는 것처럼. 여기서 여러분들이 숨을 쉬고 있는데. 신기하게 지금 아프리카에서도 수많은 사람들이 동시에 숨을 쉬고 있습니다. 여기서 나는 내 인생이 이게 전부인 줄 알고 내가 살던 그곳에서 평생을 사는데.
그러다가 한 50, 60 돼서 해외 딴 나라를 가봤더니 ‘야, 신기하네’ ‘이곳에도 또 이런 수많은 사람들이 이렇게 또 살고 있네’ 이거를 살게 하는, 이걸 이렇게 살아 있게 하는 이놈과 그 온 우주 전체를 살아 있게 하는 그놈이 서로 다른 무언 가면 ‘마하’라는 말을 붙일 수가 없습니다.
크다고 할 수가 없어요. 전체, 전체만을 상대적인 개념이 아닌 불이법만을 진리는 설하고 있거든요. 그러니까 ‘뭐가 부처냐’라고 얘기할 필요가 없는 것이 부처 아닌 것이 없기 때문에. 부처 아닌 것이 아예 없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 부처, 그냥 모든 두두 만물 부처 아닌 것이 없는 것을 내식대로 해석하고 분별하니 허상. 허상만을 쫓느라고 이 있는 그대로 드러난 실상을, 그냥 지금 이게(죽비를 손바닥에 치며) 실상이라니까요.
지금 이렇게 실상이 드러나 있잖아요. 눈앞에, 눈앞에서 여러분 저를 보고 있지요. 여러분, 저를 보고 있는데. 그게 어디서 보고 있을까요? 이 눈동자에서 보고 있을까요? 아니면 제가 여기 이만큼 떨어져 있으니까 저만큼 앞에서 보고 있을까요?
여러분 눈이 보는 걸까요? 아니면 제 몸이 이렇게 있으니까 제 몸이 보는 걸까요? 그 어느 위치에서 보는 걸까요? 그 어느 특정한 위치에서 보는 게 아닙니다. 이 소리 (죽비를 손바닥에 치며)를 어디서 듣고 있어요? 여기서 나는 걸까요?
아니면 여러분 귀에서 나는 걸까요? 특정하게 답을 내릴 수가 있습니까? 여러분 귀에서 나는 거면 딴 사람 귀에선 왜 나요? 인연이 화합하면, 인연이 화합하면 그냥 그 작용이 드러나는 겁니다. 이 법이 확인되는 거예요. 진리가 확인됩니다.
지금 여러분 아무 생각 하지 말고, 지금 이렇게 보고 있잖아요. 이렇게 눈앞에 모든 것이 드러나 있잖아요. 눈앞에, 목전에 그냥 이렇게 드러나 있잖아요. 내가 보고 있잖습니까? 보는 대상은 관심 두지 마시고, 보는 대상은 관심 두지 마시고
보고 있다는 사실은 분명하잖아요. 진리를 찾고 있는데 찾고 있는 진리는 때려 치우고. 찾고 있는 진리는 진리가 아니에요. 찾아지는 건 진리일 수가 없습니다. 왜? 둘이니까. 진리, 찾을 진리가 저기 있고 여긴 진리를 찾는 자가 있으면
그건 불이법이 아니라 이법인데. 분별법인데, 그런 진리가 있겠습니까? 그런 진리는 없어요. 그럼 뭐가 진리일까요? 찾고 있는 그것이 찾는 대상이에요. 찾고 있는 것이 찾아지는 겁니다. 그럼 찾는다,라는 그 사실이 있잖아요. 이렇게.
여러분들은 지금 이 법문을 들으면서 뭔가 법을 진리를 찾으려고 하는데. 그 찾으려 하는 그 마음이 부처인데 자꾸 대상만 ‘부처가 어딨지’ ‘어딨지’ 하고 찾으면 그게 찾아지겠습니까? (죽비를 손바닥에 치며) 이 소리를 이렇게 생생하게 듣고 있는데.
이게 허상, 개념입니까? 허상입니까? 이건 지금 이대로 이렇게 드러나 있는 실상이에요. 매 순간. (죽비를 손바닥에 치며) 그냥 이렇게 항상 듣고 있습니다. 이렇게 법이라는 것은, 예를 들어 깨달음을 얻은 부처는 법을 늘 눈으로 내(內) 법을 보고 살고.
손으로 법을 만지고 살고 뭐, 우리가 못 보고 있는 뭔가를 계속 보고 듣고 하고 있겠지. 그게 아닙니다. 왜? 보이는 게 아니기 때문에. 들리는 게 아니기 때문에. 모양 있는 게 아니기 때문에. 크기가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여러분, 이 소리를 듣는 그것은 누가 줬습니까? 여러분들이 갈고닦아서 열심히 만들어냈나요. 만들어 낸 거 아니지요. 누가 언젠가 준 거 아니지요. 누군가한테 받은 거 아니잖아요. 갈구 닦는다고 더 잘 갈구 닦아지는 것도 아니지요.
공부 잘하는 사람이라고 더 많이 아는 것도 아니지요. 법문을 많이 들은 사람은 이걸(죽비를 손바닥에 치며) 더 빨리 확인하나요? 불교를 전혀 모르는 사람은 이 소리를 못 듣나요? 아프리카에 불교를 전혀 모르는 사람도 이 진실(죽비를 손바닥에 치며)을 확인할 수가 있어요.
언제나 이 진실은 드러나 있는 것이기 때문에. 이거는 누가 준 것이 아니기 때문에 뺏어갈 수 없지요. 뺏어갈 수 없습니다. 이거는 모양이 없지요. 모양이 없기 때문에 모양으로 취할 수가 없습니다, 생겨나지 않았기 때문에, 생겨나지 않았잖아요.
그냥 언제부턴지 모르겠지만 늘 쓰고 있었던 거예요. 늘 쓰고 있었던 거지요. 늘 이렇게 숨 쉬고 있잖아요. 늘 이렇게 뭐 어떻게 여기로 오셨습니까? 이걸 써서 걸어서 온 거예요. 제 얘기를 어떻게 듣고 계세요. 지금 이걸 써서 듣고 있어요.
그런데 여러분들이 이걸 써서 듣고 있다고 첫 번째 자리에서 듣는 이거를 확인하지 않고, 듣고 나서 해석한 찌꺼기. 듣고 나서 ‘아, 저 양반 얘기가 이런 얘기구나’하고 그걸 내 머릿속으로 정리한 이야기. 그거를 법이라고 착각하고 있는 거지요.
머릿속에 개념으로 정리한 거. 그거는 관심 가질 필요가 없어요. 그러니까 제가 필기할 필요도 없고, 받아 적을 필요도 없고, 뭐 교재를 굳이 안 가져와도 된다고 하는 겁니다. 뭐 바깥에 드러난 그건 쫓아갈 필요가 없기 때문에.
그냥 늘 확인되는, 눈을 뜨면 눈에 보이고 있고 귀에는 “보살님.” “보살님.” “보살님.” “보살님.”하면 “예.”하고 대답하잖아요. “예.”하는 대답하는 걸로 확인되고 있는 거예요. “보살님.” 했는데 뭐 계산하고 고민해서 내가 말을 이렇게 잘해야지.
예쁘게 해야지. 아니면 뭐 이거 대답을 해야지 말아야지. 막 계산하고 있으면, 그거는 이제 허상 작용에서 말을 하는 거지요. 그런데 “보살님.”하고 불렀을 때 그냥, 그냥 “예.”하는 그것은 살상이잖아요. 해석 개념이 들어가지 않은 실상이잖아요.
갑자기 문득 배가 고파져요. 그건 그냥 실상입니다. 이놈이 배가 고픈 거예요. 계산하고 해석하지 않고 그냥 배가 고픈 거지요. 졸리면 그냥 이놈이 졸리는 겁니다. 그래서 옛날에 큰스님들이 제자가 오면 계속 데리고 있으면서도 특별히 법을 안 가르쳐줘요.
뭐 스승 입장에서는 배고프면 밥을 먹으니까. 밥을 먹음으로써 늘 법이 드러나 있는 거니까. 굳이 입을 열어 가르쳐주질 않는 것이지요. “그런데 제자가 왜 저한테 법을 안 가르쳐주십니까.” “저는 딴 데 가겠습니다.” 그래가지고
“스님이 나한테 법을 안 가르쳐주셔서 저는 딴 데 가야 되겠습니다.” “여기도 법은 있는데.” 했더니 “뭔 법이 있습니까.” “법은 가르쳐 주지도 않고.” “알았다. 그럼 가라.” 이렇게 가는 걸 뒤에다 되고 “스님!” 하고 부르니까 “예!” “이게 누굽니까?”
그럴 때 확인했다. 이런 얘기가 있는 게, ‘예’하는 그것은 그냥 실상 작용이에요. 실상이 드러나 있단 말이에요. ‘제법실상’ 그래서 ‘제법이 실상이다’고 하는 겁니다. 모든 것이 제법은 삼라만상 일체 두두 만물 모든 것.
모든 것은 그대로 실상이 드러나 있는 거예요. 그런데 우리는 그 실상을 계속해서 보자마자 본다는 그 실상보다는. 보자마자 실상이 아닌, 바로 두 번째 자리에 떨어져서 보고 나서 해석한 내 머릿속에 해석한 걸 그림 그려서 머릿속에 지저분하게 막 쌓아놓은 이 쓰레기 같은.
이 혼란스러운 이 상, 이미지, 그림, 모양, 이것을 가지고 진짜라고 여기고 살았던 것이지요. 그러니까 실상은 관심이 없고 살상 속에서 살면서도 허상만을 관심 가졌을 뿐. 실상이 따로 없었던 것도 아니고.
살상을 여러분이 쓰지 않았던 것도 아닙니다. 언제나 쓰고 있었고. 언제나 실상과 함께 살았어요. 그러니까 큰스님들이 눈을 뜨면 부처와 함께 일어나고, 부처와 함께 길을 걷고, 부처와 함께 밥을 먹고, 부처와 함께 똥을 싸고, 부처 아닌 것이 없다.
늘 부처와 함께 살고 있다. 이렇게 얘기를 했습니다. 그러면 이것이 여러분에게서는 코에서는 숨 쉬는 것으로 드러나고, 귀에서는 말을 듣는 것으로 드러나고, (죽비를 손바닥에 치며) 이 소리를 듣는 것으로 드러나고,
눈에서는 또 보는 것으로 드러난다. 이렇게 내가 늘 쓰고 있다. 이 우주법계가 이렇게 운행되고 있단 말이지요. 대기대용으로써 운행되고 있다. 온 우주가, 이렇게 하나의 부처가 이것을 이렇게 운행시키고 있단 말이지요.
그러면 ‘이것’ 이걸 이제 말로 할 수가 있습니까? 이걸? 말로 할 수가 없어요. 이걸 열반이다. 이러면. 뭔가 열반이란 또 다른 상을 그려요. 해탈이다, 이러면. 해탈에 대한 상을 그립니다. 무엇으로도 얘기할 수가 없기 때문에 그냥 ‘이 뭐고’
이것이 무엇이냐? 이렇게 얘기하는 거예요. ‘이것’ 눈앞에 드러나 있는 ‘이것’ 이렇게 표현할 수밖에 없는 거예요, 더 이상. 말로 할 수가 없습니다. ‘그것’ 이러면 왠지 그쪽에 있는 뭐 같으니까. ‘저것’ 이러면 저쪽에 있는 뭔가 이렇게 하니까.
그런데 ‘이것’ 이러면 뭔지 여기 앞에 뭔가 이걸 이렇게 하는 거 같으니까. 그나마 이렇게 표현을 한단 말이지요. 그러면 이것이 여러분 인생에서 한 얼만큼 중요할까요? 여러분 인생에, 여러분 인생에 중요한 일들이 많잖아요.
돈 버는 거, 자식 좋은 대학 보내는 거, 뭐 좋은 데 취직시키는 거, 명예와 권력을 얻는 것, 아파트를 좋은 거 사는 것, 돈 많이 버는 거, 무수히 중요한 일이 많아요. 건강, 무수히 여러분이 중요하다고 여기는 게 많아요.
그런데 이것은 그것들에 비해서 얼만큼 중요할까요. 얼만큼, 한 몇 퍼센트쯤 중요할까요? 몇 퍼센트. 30% 나왔습니다.(웃음) 또 다른, 좀 더 쓰실 분 안 계시나요? 얼마나 중요하겠어요? 전부 아니에요. 전부. 이게 없으면은,
이게 없으면 듣지도 보지도 소화시키지도 못하고 숨 쉬지도 못하는데. 이게, 이게 삶 자체잖아요. 이게 전부잖아요. 이게 우리의 전부 아니겠어요? 진짜 나는 이게 나 아니에요? 이게 나 아니에요? 몸은 왔다가 가는 거잖아요.
감정, 이거는 인연 따라 만들어지는 찌꺼기잖아요. 실재가 아니잖아요, 감정은. 화나는 마음, 이건 내가 화내는 게 아니에요. 인연이 동하면 화는 나는 거예요, 그냥. 생각? 내가 그냥 잔재로 만들어 놓은 거예요.
보자마자 찌꺼기가 만들어지고 듣자마자 만들어지는 이 찌꺼기를 이제 나로 삼았던 거예요. 생각, 느낌, 감정, 의도, 의지, 의식, 이걸 나라고 생각했잖아요. 그게 오온입니다. 오온. 오온을 나라고 생각하면서 거꾸로 뒤집어졌던 것이지요.
‘그게 진짜 난가’ 그냥 왔다가 가는 건데 어떻게 나일 수가 있겠어요. 인연 따라 잠깐 생겨났다가 인연 따라 사라지는 거니까 나일 수가 없습니다. 당연히 나일 수가 없지요. 그리구 그게 나라면 ‘아, 우리 얼마나 허망한’ 인생이 정말 허무주의 아닙니까?
진짜. 죽을 건데, 내가 아무리 바둥바둥 해봐야 반드시 죽을 건데. 얼마나 공허해요. 살 의미가 없잖아요, 사실. 의미가 없어요. 이 몸이 나면. 몸이 나거나, 생각이나 느낌이나 감정이 나면 얼마나 공허합니까?
그런데 그게 내가 아니고 이것이 나란 말이에요. (죽비를 손바닥에 치며) 이것이 나란 말이에요. 이것이 나지. 이 몸뚱아리, 느낌, 감정, 이게 어떻게 납니까? 이 몸뚱이를 나라고 생각하면 몸이 아플까 봐 노심초사하며 살아야 돼요. 죽을 때까지.
내가 죽을까 봐 두려워하면서 살아야 됩니다. 두려움에 떨며 살아야 돼요. 이 몸이 난 줄 알고 사니까 미래에 대한 막연한 두려움이 나를 지배하면서 완전히 쉬지 못해요. 완전히 안심하지 못해요. 안심 법문이라고 그러잖아요, 이 법문을.
안심 법문을 아무리 들려줘도 이 몸이 나라고 하는 동안은 안심할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몸이 내가 아니고 (죽비를 손바닥에 치며) 이게 난데. 이게 들리지도 않고 보이지도 않고 여러분이 잡을 수가 없어요. 내 걸로 가질 수가 없어요. 이거는.
가질 필요도 없고. 언제나 드러나 있는 것인데 이거 뭐 하러 잡아요. 내가 죽고 나면 이게 사라질까요. 누구나 다 같이 쓰고 있는 것인데 이게 어떻게 사라져요. 이 몸이, 제한된 몸이 내가 아니고. (죽비를 손바닥에 치며) 이것이 납니다.
이렇게 이게 늘 쓰이고 있고. 모두가 같이 이렇게 쓰고 있고. 대기대용으로 온 우주법계를 전체로 돌리고 있어요. 이게 진짜 나지. 어떻게 몸뚱아리가 진짜 나고, 생각이 나고, 그럴 수가 있겠습니까. 생각을 나로 삼았을 때 상을,
허망한 허상을 나로 삼았을 때, 아까 앞 시간에 말씀드린 것처럼 특정한 생각이 나를 괴롭히고, 남들의 말 한마디가 나를 괴롭히고, 이 손가락의 움직임 하나가 나를 괴롭히고, 소리 파장 하나가 나를 괴롭히고, 돈이라는,
아파트값이 뭐 30억 올라갔다가 20억 떨어지면 올라갈 땐 즐거웠다가 떨어질 때 괴로운데. 그 무슨 실체가 있어요. 올라갔다 떨어져서 제자리 면 그냥 거기 언제나 그 자린데. 그 올라갔다고 허상을 자꾸 즐거워했다가 내려간다고 또 허상을 자꾸 괴로워했다가.
그 숫자에 왔다 갔다, 왔다 갔다 행복하고 괴롭다는 착각을 하고 사는 것이지요. 그러니까 이 허상을 진짜라고 착각해서 전도몽상 되면 세상 사는 게 너무나도 힘들고, 지치고, 투쟁 상태. 내가 원하는, 추구하는 바를 이루기 위해서 끊임없이 추구해야 되는 상태.
끊임없이 헐떡거리는 상태. 바깥을 향해서 내가 원하는 걸 얻기 위해서 끊임없이 노력해야 하는 상태. 그러구 막 얻었다고 할지라도 ‘그걸 잃어버리면 어쩌나’ 싶어서 두려워하고 벌벌 떨고 그러는 상태에 놓이게 됩니다.
평생 두렵고 근심 걱정하는 삶을 살 수밖에 없어요. 그런데 그게 내가 아니라는 걸 알면, 몸과 마음이 내가 아니라는 사실을 알면, 이거는 온 게 아니니까 갈 게 없어요. 불생불멸하는 겁니다. 불구부정(不垢不淨)이고 부증불감(不增不減)이에요.
늘어날 수도 줄어들 수도 없어요. 노력한다고 늘어나는 게 아니에요. 왔다 가는 것도 아니고. 때가 묻을 수 있는 게 아닙니다. 갈고닦을 필요가 없습니다. 앉아서 참선 잘 하는 사람에겐 이게 더, 이게 (죽비를 손바닥에 치며) 더 잘 드러나고,
참선 안 하는 사람한테는 이게 안 드러나나요? 참선하고 상관있습니까? 이게 지금. 참선 잘하고 못 하고 와 이게 상관있어요? 상관이 없습니다. 이건 제 얘기가 아니라 선사 스님들의 얘기에요. 염불 잘 하는 사람,
그 사람과 이게 무슨 상관이 있어요. 그냥 언제나 쓰고 있는 건데. 언제나 가지고 있는 건데. 이걸 더 잘 가지고 지니기 위해서 애쓸 필요가 없습니다. 그래서 불법 공부는 무위법입니다. 무위법.
그래서 제가 여러분한테 법문 들을 때도 될 수 있으면 무위법으로 들으라고, 하려고 하니까 다리를 너무 막 이렇게 앉지 말고, 좀 허리도 구부리고, 힘들면 다리도 펴고 하라고 하는 겁니다. 억지로 하는 거는 진짜 공부가 아니에요.
억지로 하면 힘들거든요. 저도 옛날에 안 해봤겠어요? 옛날에 허리 탁 펴고 앉으면 너무 힘드니까. 제가 옛날에 태권도를 했거든요. 태권도를 오래 하니까 한 발을 너무 많이 쓰니까, 허리가 약간 이렇게 비뚤어져 있는 상태였어요.
그러다 보니까 좌선하려고 앉기만 하면 죽을 것처럼 허리가 아팠어요. 그러니까 나는 그때 이것 때문에 아프다는 걸 나중에 알았거든요. 나중에 한의원 갔더니 이게 척추가 비뚤어져있다 이래가지구 나중에 알았는데.
저는 그전까지 어떻게 생각했나 면 ‘나는 신심이 없어서 좌선을 오래 못하는 거다’ 이렇게 굳게 믿고 있었습니다. ‘신심이 없어서 한쪽 골반, 한쪽 다리만 너무 아프다’ 이거 다 신심 탓으로 돌렸습니다. 이제 자유롭지요.
오래 앉아 있지 못한다고 해서 스스로를 구속하고 괴롭힐 필요가 없지요. 내가 특정하게 뭐 못한다고 해서 나를 괴롭힐 필요가 없지요. 여러분 자신을 괴롭힐 필요가 없습니다. 구속시킬 필요가 없습니다. 그냥 지금 이대로 자유롭게 살 수가 있어요.
내 생각만 믿지 않으면. 생각이 ‘야, 그래도 돈 벌어야 돼’ 그 좇아가지만 않으면. 그러데 그런다고 해서 대충 사는 게 아니에요. 정말 에너지 넘치게 살게 됩니다. 박진감 넘치게 살게 되고. 더 큰 에너지, 왜?
집착과 욕심이 없으면 머무는 바 없이 마음을 낼 때 더 큰 힘이 붙습니다. 상상할 수 없는 큰 힘이 붙습니다. 평소에는 노력하니까 유위법으로써 유위행하니까 유위과보밖에 안 나와요. 그게 인과법입니다.
이 중생들이 인과법에 딱 매여 있어서 원인을 제공하면 거기에 따른 과보가 딱 딱 들어맞게 나와요. 그런데 도인은 비인비과(非因非果) 이런 표현을 써요. 원인을 제공했는데 이거보다 더 큰 결과가 나올 수도 있어요. 왜냐하면 나다, 너다 하는,
인과라는 거는 선후가 있는 거지요. 원인을 제공하면 나중에 결과를 받는 이법이에요. 둘로 나누는 거예요. 이 인과법이라는 거는 이 세상사, 세상사가 이렇게 돌아가고 있다,라는 이 현실 세계에 대한 법칙을 얘기하는 것이지.
이 법은 인과가 아닙니다. 법에 무슨 인과가 있어요. 이 자리에 무슨 인과가 있어요. 그냥 작용하면 바로 들리는 건데. 언제나 있는 것인데. 지금, 지금 이 자리에 인과가 필요 없는 것이지요. 그러니까 우리는 부처를 쓰고 있고, 부처로 살고 있고,
늘 부처 아닌 적이 없는 채로 있습니다. 제가 이렇게 말씀을 드리면서 마음속에서는 제가 여러분들의 눈빛을 보면서. 아, 이분들이 과연 지금 알아 들으시는 건지,(웃음) 어느 정도는 좀 이렇게 끄덕이시는 분도 계시는 거 같고.
어느 분들은 그러신 것도 같은데. 그래서 말씀인데. 그냥 미친척하고 뭐 한 4개월 정도 어차피 돈도 냈겠다, 이제,(웃음) 사실 다시 안 주잖아요. 4개월 정도 그냥 뭐 미친척하고 그냥 한번 들어보세요.
그냥 들어보면 나중에 가서 이것이 지금은 ‘야, 그렇겠다’ ‘가만 듣고 보니까 그럴싸한데’ 이런 정도의 얇은 믿음일 수도 있지만. 이걸 들으면 들을수록 ‘야, 진짜 이거밖에 없네’ ‘내가 진짜 믿었던 건, 이건 진짜 허망한 거네’
그러구 삶 속에서 직접 증명이 되기 시작합니다. 삶 속에서 막 스트레스받다가도 가만히 한 생각 돌이켜서 그거 사띠(Sati)라 그래요. 위빠사나라 그래요. 그전에 막 끌려다니다가 모양, 빛깔, 말에 막 끌려다니다가 이제,
끌려다니는 말 한마디에 끌려다니는 걸 내가 보면서 내 스스로 알아차리게 되고. 알아차리면서 ‘아, 내가 또 허상에 끌려갔구나’ 이 사실을 자각하니까 허상이 잠깐 일어났다 사라질 뿐. 나를 크게 막 휘젓진 않게 돼요.
잠깐 휘젓다가 딱 놔버리게 되지요. 그런데 그런다고 해서 잠깐 휘둘리는 것도 안 하는 건 아니에요. 욕하면 잠깐은 화나지요. 잠깐 화날 수 있지요. 그런데 금방 제자리를 찾습니다. 그러면서 이제 공부가 점점 익어가면서 세상사에 휘둘리는 일이 많이 가벼워지기 시작합니다.
이게 공부지. 이게 공부지. 그래서 내가 괴로움이 점점 더 사라지는 게 공부 아니에요? 그런데 ‘뭔가 환상적인 체험을 하는 게 공부야’ 이렇게 생각할 필요 있습니까? 없습니까? 없습니다. 그런 체험은 왔다 가는 거잖아요.
그 체험에 휘둘리면 오히려 그것이 나를, 경계가 되어서 나를 얽어맵니다. 그래서 공부를 잘하고 있는지 못하고 있는지를 보려면 간단해요. 내가 괴로움이 전보다 많이 줄어들고 있느냐.
‘괴로움이 현실에서 부딪쳐질 때 그걸 내가 어쨌든 알아차리고 거기 휘둘려가지 않는 연습이 잘 되고 있느냐’ 그러다가도 한번 큰 괴로움이 오면 한번 크게 휘청거릴 수도 있어요. 그러나 다시 허상이라는 사실을 알고 실상에 딱 돌아오면 실상으로 돌아오기는 쉽지요.
(죽비를 손바닥에 치며) 이 자리로 돌아오긴 쉽잖아요. 이것(죽비를 손바닥에 치며)만이 진짜예요. 여러분 눈앞에 지금 이것(죽비를 손바닥에 치며) 말고 진짜가 있습니까. 눈앞에 지금 이것만 (죽비를 손바닥에 치며) 진짜잖아요.
나머진 다 생각이잖아요. 집에 우린 돈 없어서 걱정이에요. 생각이지요. 지금 여기 앉아있는데 돈 없어서 걱정이 있습니까? 허상입니다, 전부다. 자식이 공부를 못해서 걱정이에요. 이거는 허상을 가지구 공연한 고민하는 거지요.
지금 눈앞에 뭐 자식이 어디 있어요. 아무것도 (죽비를 손바닥에 치며) 이거밖에 없어요, 지금. 지금 눈앞에 이거밖에 없잖아요. 그런데 여기서 왜 자식 걱정을 해요. 허상 쫓아가니까 자식 걱정하는 거예요.
‘미래에 내가 아프면 어쩌지’ 미래가 어디 있겠습니까. 아픔이 어디 있겠습니까. 지금 내가 안 아프면 지금 이대로 완전히 쉬면 되지. 그런데 지금 완전히 쉬고 사는 사람은 몸과 마음이 착 놓이니까 릴랙스가 되니까 앞으로 괴로움이 있을 확률이 확 줄어들어요.
그러니까 이 공부를 하면 저절로. 그러니까 이 공부를 하면 병도 안 생긴다, 이게 아니고. 이 공부를 하면 공부를 안 하는 사람보다 훨씬 스트레스도 덜 받고 훨씬 몸의 병도 없을 확률이 높지요, 당연히. 스스로 스트레스를 덜 받고 사니까.
마음에서 만든 건데, 모든 것은. 이 공덕입니다. 그래서 뭔가 막 환상적인 깨달음 이런 걸 추구하지 말고. ‘내가 어느 위치에 있나’ 막 굳이 이거를 점검받으려고 하지 말고. 왜? 스승에게 가서 “내가 이게 깨달은 게 맞습니까?”
물어봐도 긍정해주지 않습니다. 왜? 긍정해주면 그 사람이 거기에 묶이잖아요. ‘아, 이게 맞구나’ ‘난 깨달았구나’ 상에 빠져요. 긍정해주면 거기 안주하게 됩니다. 그거는 무주법이라 그러잖아요. 머무는 바 없이 마음을 내야 되는데. 머무르게 돼요,
거기에. 그 깨달음에 머물게 되니까, 긍정은 안 합니다. “그냥 꾸준히 법문 듣고, 꾸준히 공부하라.”라는 얘기를 할 뿐이지요. 그러구 큰 상에 자꾸 끄달려가지 않는 공부를 꾸준히 하라고만 얘기할 뿐이지.
그러니까 내가 그렇게 많이 휘둘리는 그것만 공부의 어떤 지점으로 삼고 공부를 하시면 된다. 그래서 항상 백 번, 천 번 왔다 갔다 허상에 끄달려도 언제나 지금 이 자리(죽비를 손바닥에 치며)로 돌아오면 됩니다.
목전의 당처는 언제나 드러나 있기 때문에. 그래서 호흡 관찰하라는 게 뭐겠어요? 아무리 힘든 일이 있어도 호흡을 관찰해라. 이러잖아요. “스승님, 저희 집 부도가 날 거 같습니다.” “호흡을 관찰해라.” 그 뭐예요.
부도가 날 거 같은 거는 생각이지요. 허상입니다. 그런데 호흡은 지금 여기에서 일어나고 있어요. 지금 이 자리에 실상으로 돌아오라는 겁니다. 지금 이 자리에 실상에 뿌리내리고 있으면 나머지는 저절로 저절로 알아서 알아서 되게 돼 있어요,
세상이. 내가 잘 살아야 될, 내가 없으니까 우주법계가 알아서 하는 거지요. 내가 잘 살아야 될 필요가 뭐가 있어요. 그건 내가 있다는 아상이잖아요. 그냥 법계가 저절로 살게, 살려지는 거예요. 여러분이 사는 게 아니고. 내가 사는 게 아니고.
내가 부처로서 그냥 이렇게 살려지고 있는 거예요. 그러니까 내가 애쓸 필요가 없지요. 삶을 구경하면 되지요. 삶을 그냥 즐겁게 재밌게 누리면 되지요. 즐거운 거 있을 때 그냥 재밌게 놀면 됩니다. 유희삼매라 그래요.
즐겁고 재밌게 주어진 삶을 아주 재밌게 가지고 놀면 돼요. 그러다가 괴로운 게 오면 그 괴로워하면 돼요. 괴로움이 오면 괴로움 속으로 딱 뛰어들면 됩니다. 그런데 우리가 괴로운 이유는 ‘괴로움이 오면 괴로움에서 벗어나야 된다’
라는 한 생각에 사로잡혀서 ‘괴로움에서 벗어나야 돼’ ‘지금 이 상황에서 벗어나야 돼’라고 해서 괴로움과 자꾸 싸워서 이기려고 해요. 벗어날 방법을 강구합니다. 그러니까 괴로운 거예요, 사실은. 괴로울 때 단순합니다. 괴로움과 하나 되어서,
태어나서 단 한 번도 안 해본 걸 해보면 됩니다. 괴로움이 되어 보는 거예요. 그냥. ‘나 괴로움 없애야지’라는 의도를 완전 놓아버리고 괴로움이 지금, 지금 나에게 괴로움이 실상으로 찾아왔잖아요. 내가 지금 괴로운 게 실상이잖아요.
그럼 그 살상과 하나 되는 거예요. 괴로우면 괴로워해주는 거지요. 대충 괴로워해주면 안 되구요. 진심으로 괴로워해줘 보세요. 내가 뭔가 나에게 단점이 있어요. ‘나는 이런 치명적인 약점이 있어’ ‘그걸 없애야지’라고만 하고 평생을 살아왔는데.
그냥 그것이 되어서 살아주겠다. 그것이 그냥 되어서 살아주세요. 그럼 그것이 실상이기 때문에 그게 더 이상 내 인생에 큰 문제를 가져오지 않습니다. 그 실상을 딱 허용하는 순간 받아들이고 그 실상과 하나 되어 사는 순간 더 이상 문제가 되지 않아요.
실제 내가 의식으로 문제라고 삼았기 때문에 문제였던 거기 때문에. 외모가 잘 생기지 않았으면 누구나 다 괴롭나요? 자기 외모를 그냥 확 받아들이는 사람은 그 외모 가지고도 행복하게 살아요.
그런데 이 외모로 너무 스트레스받는 사람은 수술 10번, 20번 해도 계속 스트레스를 받는 거지요. 외모의 문제가 아니라 외모를 내가 안 받아들이는 그 마음이 문제였기 때문에. 그래서 괴로움을 있는 그대로 허용해주고.
즐거움을 있는 그대로 허용해서 즐겁고 재밌게 살아주고. 무엇이 오던 ‘오케이!’ 하고 그냥 그것을 살아주는 것. 이렇게 단순한 게 불법이고. 이렇게 간단한 게 마음공부인데. 뭐 어마어마한 뭐 오랫동안 10시간을 좌선하세요?
다음 주까지 매일 하루 10시간씩 좌선해서 오세요. 그래서 점검받습니다. 이렇게 할 필요가 없단 말이지요. 그래서 이 공부를, 이제 꾸준히 발심을 가지고 있으면 그냥 이게 저절로 오는 건 무위법으로 오게 돼요. 여러분 뭐 억지로 왔어요?
그냥 듣고 싶으니까 그냥 찾아오는 겁니다. 그래서 그냥 오고 싶으면 오는 겁니다. 오기 싫으면 뭐 그냥 안 와도 어쩔 수 없고. 그냥 유튜브로 한번 들어도 되고. 단, 모르긴 해도 저 뒤에 저랑 눈을 안 맞히시는 분들이 듣는,
이 내가 와닿는 이 강도와 이 앞에 계시는 분들이 와닿는 강도는 분명히 다릅니다. 그리고 또 유튜브에서 TV 켜놓고 내 딴 일하면서 이렇게 이렇게 듣는, “나도 들어요.” 이러지만. 듣는 것과 여기 와서 듣는 건 분명히 다를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옛날부터 사자상승(師資相承)이라는 표현도 썼고. 그 스승과 제자 간에 법을 전할 때는 무릎과 무릎이 닿는 거리. 이런 표현을 썼어요. 스승과 제자 간에 딱 딱 방에 앉아서 단둘이 했을 때 가장 빠르게 된다는 거거든요.
이게 직접적인 소통이 돼야 되는 공부라서 그렇습니다. 그래서 유튜브로만 계속 들으면 10년을 들어도 자기 생각 속에서 정리하면서 듣기 때문에 자기 생각 속에서 이렇게 정리하던 틀이 있어요. 내 방식대로 듣는 그 틀이 있습니다.
그걸 깨지 못해요. 깨는데 시간이 오래 걸립니다. 그래서 이렇게 이렇게 직접 와서 이렇게 들으시는 것이 좋고. 제가 봤을 때는 다음부터는 방석을 깔 때 여기 최대한 앞으로 좀 가까이 깔으셔도 될 것 같습니다.(웃음)
오늘 뭐 이야기 듣는다고 너무 고생 많으셨습니다. 〜박수
첫댓글 그걸 깨지 못해요. 깨는데 시간이 오래 걸립니다. 그래서 이렇게 이렇게 직접 와서 이렇게 들으시는 것이 좋고. 제가 봤을 때는 다음부터는 방석을 깔 때 여기 최대한 앞으로 좀 가까이 깔으셔도 될 것 같습니다.
_()()()_
감사합니다. 많이 고맙습니다.
_()_
고맙습니다_()()()_
저도 많이 많이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