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한지(楚漢誌) (82) 유방의 선정(善政) 열국지-초한지-한고조열전 |
한신은 <번쾌가 보낸 일백 여 명의 군사들이 적에게 거짓 귀순하는 데 성공했다>는
보고를 받고 나자, 곧 한왕을 뵙고 아뢴다.
"항우를 정벌할 만반의 준비가 갖추어져 있으므로, 내일은 출동을 개시하겠습니다."
백관들은 그 말을 듣고 모두들 깜짝 놀랐다.
(잔도를 보수하려면 아직도 멀었을 텐데, 대원수는 수많은 군사들을 어디로 이끌고
가려고 그러나?)
한왕도 그 점이 매우 걱정스러워, 그날 밤 승상 소하를 불러서 물었다.
"함양으로 통하는 길을 보수하려면 아직도 멀었는데, 한신 장군은 내일 출동을 하겠다고
하니, 군사들을 어느 길로 이끌고 가려는지, 경이 직접 알아보도록 하시오."
소하는 어명을 받고 원수부로 달려가, 한신에게 물었다.
"대왕께서는 내일 출동한다는 말씀을 들으시고, 어느 길로 진격하려는지, 매우 걱정하고
계시오. 장군은 어떤 길로 가려고 하시오?"
한신이 대답한다.
"장량 선생께서 지난날 잔도를 모두 불태워 버리실 때, 함양으로 통하는 또 하나의
감춰진 길이 있다는 것을, 승상께서도 알고 계시는 일이 아니옵니까?"
소하가 말한다.
"또 하나의 길이 있다는 말을 나도 듣기는 들었소. 그러나 그 길이 구체적으로 어디에
있는지는 모르오. 그런 길이 따로 있다면, 무엇 때문에 번쾌 장군에게 잔도를 급히 보수
하라는 명령을 내리셨소?"
한신은 빙그레 미소를 지으며 대답한다.
"그것은 적을 현혹시키려는 위장 전술이었습니다."
"위장 전술?"
"그렇습니다. 잔도를 보수하려면 적어도 1년은 걸려야 하니까, 적은 그 만큼 방심을
할 것이 아니옵니까. 이처럼 적을 방심하게 해 놓고, 기습 공격을 통하여 삼진왕을
단숨에 쳐부술 계획입니다."
"참으로 놀라운 작전 계획이오. 그러면 어떤 길로 진격할 생각이오?"
"여기서 진창(陳倉)으로 통하는 지름길로 산을 넘어가면 닷새 이내에 대산관(大散關)에
도착할 수 있사옵니다. 그러면 적은 우리가 하늘에서 쏟아져 내려온 줄 알고 크게 당황하
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그 기회에 벼락 같은 총공격을 퍼부어 대산관을 함락시키는
것은, 손바닥을 뒤집는 것보다도 쉬운 일이 되옵니다. 승상께서는 대왕 전하에게 소장의
작전 계획을 소상히 품고하시어, 조금도 걱정을 아니 하시도록 해주시옵소서."
소하는 한신의 말을 듣고 뛸 듯이 기뻤다.
그리하여 부랴부랴 대궐로 달려 오니, 밤은 이미 삼경이 지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한왕은 소하를 기다리고 있다가,
"승상 ! 어서 오시오. 그래, 한신 장군은 만나 보셨소?"
하고 묻는다.
소하가 한신의 작전 계획을 소상히 알려 올리니, 한왕은 무릎을 치며 감탄한다.
"한신 장군의 원모심계(遠謀深計 : 가슴 깊이 숨긴 뜻)를 이제야 알겠소이다. 일찍이 장량
선생께서 잔도를 불태워 버리셨을 때, 반드시 무슨 대책이 있으리라고는 짐작했지만,
한신 장군은 장량 선생의 대비책을 이미 알고 있었던 모양이구려. 그렇다면 우리가 승리
할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소이다. 이제 알고 보니, 한신 장군은 정말로 천하의 명장이오.
이런 명장을 천거해 주신 승상에게 새삼 감사하오."
"과분하신 칭찬의 말씀,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한편, 한신은 마침내 출동 준비가 완료되자, 대장 손흥 (孫興)을 <잔도 보수 부대장>으로
새로 임명하고, 번쾌를 본영으로 급히 불러들여 다음과 같은 군령을 내렸다.
"번쾌 장군을 선봉장으로 임명하오. 장군은 여덟 명의 맹장과 5만 명의 군사를 거느리고
산을 넘고 넘어, 닷새 후에는 대산관으로 쳐들어가도록 하오. 여기서 대산관까지는 옛날
길로 돌아가면 천 리가 넘지만, 산을 넘어 지름길로 막바로 넘어가면 백 리도 채 못 되오.
그대신 산길이 몹시 험준하니까, 바위는 깎아내리고 골짜기는 통나무로 다리를 놓아
건너면, 닷새 후에는 대산관에 충분히 도달할 수 있을 것이오."
명령을 받은 번쾌는 곧 군사들을 이끌고 진격의 길에 올랐다.
한신은 이번에는 하후영 에게 군령을 내린다.
"하후영 장군은 제 2부대장으로 임명하오. 장군은 맹장 10명과 5만의 병력을 이끌고
후속 부대로 따라가다가, 선봉 부대가 승리를 할 경우에는 죽은 듯이 숨어 있고, 아군이
불리할 경우에는 뒤로 돌아가 협공을 하도록 하오."
그리고 난 후, 한신 자신은 맹장 40여 명을 거느리고 군사를 네 부대로 나누어, 전후
좌우에 배치하고 전진하기로 하였다.
마지막으로 한왕은 부관, 주창등 두 감군 대장의 호위하에, 문무 백관들을 거느리고 후미
(後尾)에서 따라오게 하였다.
작전 배치가 끝나자, 한신은 한왕 앞에 나와 출동 보고를 한다.
"신 파초 대원수 한신은 지금부터 초나라를 치고자 출동하겠습니다. 대왕께서는 지금부
터 이틀 후에 친위 부대의 호위를 받으시며 천천히 따라와 주시옵소서. 신은 먼저 대산관
을 점령하고 난 뒤, 대왕 전하를 대산관 관문 앞에서 영접할 것이옵니다."
한왕은 그 말을 듣고 너무나 기뻤다. 그리하여 한신을 전송하려고 동문 밖까지 따라나와
언덕위에서 굽어 살펴보니, 산과 들을 뒤덮고 있는 군사들의 위용(威容)이 장엄하고도
막강하기 이를 데 없었다.
"오오, 내가 이제야 숙적 항우를 쳐부수고 봉강 통일(封彊統一)의 대업을 이루게 되는가
보구나 ! "
하며 가슴 벅찬 감격에 잠겨 있다가 문득 눈을 돌려 보니, 저 멀리 뒷쪽으로 부터
난데없는 군중들이 아우성을 치며 이리로 몰려오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한왕은 아우성을 치며 달려오는 군중을 보고 깜짝 놀랐다.
"아니 ! 웬 사람들이 저렇게도 많이 몰려오고 있느냐?"
마침 그때 군사 하나가 헐레벌떡 달려오더니, 한왕에게 급히 아뢴다.
"대왕 전하 ! 백성들이 대왕께서 이곳을 떠나시는 줄로 알고, 모두들 대왕을 못 떠나시게
하려고 아우성을 치며 쫒아오고 있는 중이옵니다."
"으응? .. 백성들이 왜 나를 못 떠나게 한다는 말이냐?"
그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백성들이 구름 떼처럼 한왕 앞으로 몰려들더니, 일제히 땅에
엎드리며 큰소리로 호소한다.
"대왕 전하께서는 저희들을 버리고 어디로 가시려고 하시옵니까, 저희들은 대왕의 은총
으로 이제야 살아가는 즐거움을 알게 되었사온데, 대왕께서 저희들을 버리고 떠나시면,
저희들은 누구를 믿고 살아가라는 말씀입니까?"
한왕은 백성들이 떼를 지어 몰려온 이유를 그제서야 알고, 가슴이 뭉클해 왔다. 백성들이 자기를 못떠나게 하는 정성이 눈물겹도록 고마웠던 것이다.
"오오 ! 그대들이 나를 이렇게나 따르고 위할 줄을 미처 몰랐구려 ! "
한왕이 군중들을 자애롭게 달래 주며 바라보니, 늙은 노인부터 10세도 안 되 보이는 어린
아이까지 섞여 있는 것이었다. 한왕은 엎드려 있는 80객 노인의 손을 친히 잡아 일으키며
말한다.
"왕이란 백성들을 위해 필요한 존재라는 것을 나는 잘 알고 있소. 그러나 나는 오늘 당장
이곳을 떠나는 것은 아니오. 수삼 일 후에는 부득이 이곳을 떠나게 되겠지만, 아무리
그렇기로 노인장들을 어찌 모른다고 하리오. 내일중으로 모든 노인들을 한자리에
모셔 놓고, 여러분들과 선후책을 충분히 강구하도록 하겠소."
노인은 한왕의 손을 부등켜잡고 울면서 호소한다.
"대왕 전하, 저희들은 오랫동안 못된 임금님에게 시달려 오며, 개,돼지 같은 생활을
해왔었습니다.
그러다가 대왕께서 극진한 자애를 베풀어 주시는 덕택에 이제야 사람답게 살아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대왕께서 홀연 저희들을 버리고 함양으로 떠나가신다고 하오니, 그것은 저희들
을 생매장해 버리시는 것과 다름이 없사옵니다. 대왕께서는 저희들을 불쌍히 여기시사,
바라옵건대 부디 이곳에 오래오래 머물러 계셔주시옵소서."
한왕은 노인의 두 손을 잡아 흔들며 달랜다.
"나는 목숨이 다하는 날까지 여러분들을 버리지 않을 것이니, 그 점은 조금도 염려하지
마오. 아무튼 여기서 많은 사람들이 이러고 있을 수는 없으니, 내일 아침에 여러 어른들
을 한자리에 모시고 다시 의논하기로 하겠소."
한왕은 몰려든 군중들을 가까스로 달래어 해산을 시키고 대궐로 돌아오자, 곧 승상을
불렀다.
한왕은 백성들과 만났던 이야기를 자세하게 말해 주고 나서, 승상에게 다음과 같은
명령을 내렸다.
"내가 이곳을 떠나기 전에 부로(父老)들께 미리 양해를 구해 두어야 할 일이 있으니,
각 군현(郡縣)에 60세 이상인 노인들을 내일 아침에 대궐 앞마당으로 모두
모셔오도록 하오."
그러자 소하가 머리를 조아리며 아뢴다.
"분부대로 거행하겠사옵니다. 그러쟎아도 백성들이 대왕께서 이곳을 떠나신다는 소문을
듣고 모두들 야단법석들 이옵니다."
소하가 고을마다 사람을 보내 왕명을 전달하니, 각 고을의 노인들은 다음날 새벽부터
대궐 앞마당으로 구름처럼 모여들었다.
한왕은 노인들을 일일이 반갑게 맞아 주었다.
노인들은 너무도 감격스러워, 저마다 큰절을 올리며 아뢴다.
"대왕께서 성덕을 베풀어 주시는 덕택에, 저희 민초(民草)들은 생업에 안주(安住)하며
전에 없던 태평성대를 누리고 있사옵니다.그런데 천만 뜻밖에도 대왕께서 이곳을 떠나
동정의 길에 오르신다고 하니, 이제 가시면 언제나 돌아오게 되실 것이옵니까. 대왕의
은총을 못 받게 된 저희들은 오직 눈앞이 캄캄해 올 뿐이옵니다."
대표자 한 사람이 울먹이며 이렇게 말하고 있는 동안에 다른 노인들은 한결같이 소리
없이 흐느끼고 있었다.
한왕도 눈물을 닦으며 말한다.
"지금 초나라 백성들은 항우의 폭정에 몹시 시달리고 있기 때문에, 나는 그들도 여러분과
똑같이 구해 주고자. 부득이 군사들을 이끌고 떠나게 되었소. 그러나 내가 이곳을 떠나도,
여러분의 생활만은 종전과 다름없이 보호해 드릴 것이니, 그 점은 조금도 걱정하지
마시기 바라오."
"대왕께서 이곳을 따나 가시면 누가 저희들의 생활을 보호해 줄 수 있겠습니까?"
한왕은 잠시 뜸을 두었다가, 문득 고개를 힘있게 들며 이렇게 말했다.
"나는 천하의 대세를 바로잡기 위해 부득이 이곳을 떠나야만 하오. 그러나 그 대신에
승상을 이곳에 머물러 있게 하여. 승상으로 하여금 여러분의 생활을 철저하게 보호해
드리도록 하겠소."
노인들은 그 말을 듣고서야 비로소 안도의 빛을 보였다.
이렇게 민심을 수습하고 나자, 한왕은 즉석에서 승상 소하를 불러 노인들이 보는 앞에서
다음과 같은 <특별 행정 지시>를 내렸다.
"승상은 이제부터 백성들을 정성스럽게 다스려 나가되, 10리(里)를 1정(亭)으로 하여,
정마다 정장(亭長)을 두고, 10정을 1향(鄕)으로 하여, 향마다 세 사람의 향로(鄕老)를
두어, 향로들로 하여금 행정을 운영해 나가도록 하오. 세 명의 향로 중에 한 사람은
행정을 담당하게 하고, 한 사람은 농사(農事)를 담당하게 하고, 나머지 한 사람은
송사(訟事)를 담당하게 하면, 백성들은 안심하고 안락하게 살아갈 수 있을 것이오."
실로 한왕이 아니고서는 착안할 수 없는 민주적 정치 철학의 생활 접목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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