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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에 한국군 장갑차 발전사로 일베갔었는데 그때 어느 포병 출신 일게이가 포병 관련 똥글도 싸달라고 부탁하여서 오늘도 친구라곤 일베밖에 없는 왕따일게이답게 글 싸지른다.
건군시기의 한국군 포병
건국과 건군 이후 모든 분야가 그렇치만 역시 천조국의 하늘 같은 은혜로 이 저주받았던 땅에 화포라는 물건이 들어오게 되었어. 처음 들어온 재대로된 화포는 박격포나 바주카포 같은 것은 재외하면 사실상 M3 105MM 견인곡사포와 M1 57MM 대전차포 정도였어.
한국전 발발전에 훈련중인 포병들과 M3 견인포
M3 견인곡사포는 미국에서 2400여문 정도 생산이 되었던 포였는데 공수부대나 산악부대, 해병대등 가벼운 화포가 필요한 부대들을 위해 만들어진 화포다 보니 가볍기는 하지만 사거리가 겨우 6.5KM 정도로 당시 박격포보다 조금 더 날라가는 수준이었고 설상가상으로 91문 밖에 인수하지 못한대다가 이중에 3문은 이미 고장난 상태에서 넘겨진 것이었지.
M3 견인포. ㅎㅌㅊ포였다.
당시 미국이 한국에 막대한 군수지원을 시작한 것은 한국전쟁 발발 이후로 그 이전에는 미국내 악성재고를 넘기는 수준이었어.
M1 57MM 대전차포는 영국군이 사용하던 6파운드 대전차포를 미국이 복제생산을 한 것으로 2차 대전당시 많이 쓰인 것이지만 이미 2차대전 당시에도 위력부족으로 도태가 시작되던 화기였고 제고로 처박혀 있던 것을 한국군에 인계한 것이지. 수량도 100여문 정도였어.
M1 57MM 대전차포와 대전차포병들
이 것으로는 당연히 T-34 전차를 격파할 수는 없었지만 한국군 대전차포병들은 죽음을 각오하고 응전하여서 의외로 궤도를 파괴하거나 전차의 관측창을 격파하는 등의 사격으로 북괴군에게 많은 피해를 주었다.
북괴군 T-34전차를 향해 57MM 대전차포탄을 장전하는 포병들..거의 자살공격이나 다른 바 없었다.
야전부대에서는 57MM 대전차포가 크게 고전을 하자 급히 미군으로부터 당시 최신형이었던 M20 3.5인치 바주카포를 인수하여 일선부대에 보급하였고 금방 전과를 올리기 시작한다.
M20 3.5인치 슈퍼바주카포와 한국군 사수들. 앞에 서있는 사수는 M3 기관단총을 휴대하고 있다. M20은 80년대까지 한국육군에서 현역으로 사용되었다
한국군이 3.5인치 대전차 로켓으로 최초의 전과를 거둔 것은 1950년 8월 대구 북방 가산 전투에서였는데, 8월 초 한국 육군1사단은 미군으로부터 3.5인치 대전차 로켓 3문을 최초로 인수했다. 1사단 12연대에서 사수·부사수·탄약수 2명 등 4명으로 구성된 대전차특공조 세 개를 편성, 일주일 동안 특별 훈련을 거쳐 8월9일 최초로 실전에 투입했다.
12명의 대전차특공조 대원은 특공대장 김성룡 대위의 지휘 아래 대구 북방 석적부락 부근에서 단숨에 적 전차 4대를 파괴하고 1대를 노획하는 전과를 처음 올렸지.
낙동강전투와 인천 상륙작전을 거치면서 대부분의 북괴군전차가 전멸해 버려서 57MM 대전차포도 점차 전장에서 사라지고 미군의 전폭적인 지원 아래 신형 화포가 속속 한국군에 지원되기 시작한다.
한국군 포병의 아버지 신응균 중장
여기서 잠깐 한국군 포병의 아버지라고 불린 신응균 예비역 중장에 대해서 알아보자.
일본육사 53기이므로 박정희 대통령보다 4기수 선배다. 그리고 일본군내에서도 인정을 받은 엘리트 장교로써 일본육군과학교를 이수하고 포병장교로써 근무하였고 대본영에서도 잠시 근무하였다. 당시 일본육군내에서도 총명한 신응균을 무척 아껴서 조선인으로는 드물게 참모장교로 주로 근무할 수 있었다.
1945년 당시 미군의 오키나와 공격에 맞서 수비군의 중포부대 소속으로 전투에 참가하였으나 그의 부대는 압도적인 미군의 화력에 초토화되고 살아남은 부하들과 산으로 올라가 게릴라전을 하다가 심한 부상을 입은 상태에서 일본인 여성에게 구조되어 1946년까지 은거생활을 하기도 하였다.
신응균은 세계적인 디자이너 노라노의 전남편이기도 하였다.
30대 시절 노라노
1945년 그가 오키나와에서 전사한 것으로 생각한 시댁의 압박으로 노라노는 강제 이혼을 당해야만 했다. 노라노의 증언에 따르면 유족보상금과 연금을 막 시집온 며느리에게 나누어 줄수 없어서 그랬다고 하는데 당사자만 알 일이다.
아래는 노라노가 2006년 중앙일보에 연재한 "[남기고 싶은 이야기들] 나의 선택 나의 패션"의 일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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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6년 5월 어느 날 늦은 저녁, 누군가 대문을 두드렸다. 문 열리는 소리가 나더니 갑자기 온 집안이 떠들썩해졌다.
"작은 형부가 돌아왔어요!" 그가 돌아온 것이다. 부모님과 동생들, 식구 모두가 현관으로 달려가는데 웬일인지 내 발걸음은 선뜻 떨어지지 않았다. 그저 목욕탕 거울 앞에 서서 거울 속에 비친 내 모습을 멍하니 보고 있었다.
할머니가 나를 보고 "얘! 행여 눈치 보이지 말거라"라고 한마디 하시더니 현관으로 뛰어가셨다.
현관 앞에 서 있는 그는 깡마르고 초췌해 보였다. 명랑하던 표정도 사라졌다. 애수에 젖은 듯한 어색한 미소를 짓고 있는 그를 보니, 내가 그리도 살려 달라고 빌고 빌던 내 사람이 맞는가 싶었다. 이상하게도 그는 전혀 다른 사람 같았다. 마치 나와는 아무 인연도 없었던 것처럼.
아버지와 술을 몇 잔 나눈 뒤 늦은 밤 우리는 이층 내 방으로 올라갔다.
"당신이 살아 돌아와서 너무나 기뻐요."
"고맙소."
나의 깍듯한 인사에 그 역시 짤막하게 고마움을 표시했으나 우리 사이를 서먹서먹하게 만드는 싸늘한 기류가 흐르고 있는 것 같았다. 오랜 침묵 끝에 마침내 그가 그동안의 이야기를 꺼냈다.
"오키나와에 미군이 상륙했을 때 나는 두 번이나 죽을 고비를 넘겼소. 그러나 가까스로 살아나 산속에 숨어 지내며 게릴라 전을 계속했소. 그러다 부상을 당해 어느 일본 여인에게 구조되었소. 그리고는… 그 여인의 집에 은신하며 모든 것을 체념하고 살았었소. 그런데 오키나와에 주둔한 미군들이 조선인은 고향으로 돌려보내 준다지 않겠소. 그 소문을 듣고 나는 용기를 냈소.
같이 살던 일본 여인은 "이제 당신을 아키코상(나의 일본식 이름)에게 돌려주어야 한다"며 나를 보내주었소…."
그 후 그는 미군의 군사재판에서 무죄를 선고받고 밀린 월급을 받아 서울로 돌아올 수 있었다고 한다.
나는 그 곡절많은 남편의 사연을 들으면서도 별다른 감정이 느껴지지 않았다. 나도 왜 그런지 알 수 없었다. 눈물조차 흐르지 않았다.
오로지 시부모님과 나 사이에 있었던 이혼에 관한 이야기를 어떻게 꺼내야 할지가 머릿 속에서 맴돌 뿐이었다. 잠시 망설이다가 해주 시댁에서 온 열 일곱 장짜리 문제의 그 편지를 건네주었다. 그는 무표정한 얼굴로 한 장 한 장 넘기며 천천히 읽어나갔다. 다 읽고 나서 크게 한숨을 쉬곤 가만히 편지를 접어 봉투에 넣고는 나를 쳐다보았다.
"나만 고생한 줄 알았더니 그동안 당신도 많은 고생을 한 것 같군." 그는 조용히 담배를 꺼내어 불을 붙였다.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내 이부자리를 구석으로 끌고 가 그대로 누웠다.
다음날 아침이 밝았고, 또다시 밤이 왔지만 우리 부부는 침묵 속에 이틀을 보냈다. 사흘째 되던 날 그는 "부모님께 가봐야겠소"라고 말하더니 옷을 차려 입고 집을 나섰다.
노라·노 (디자이너) -----------------------------------------------------------------------------------------------------
신응균은 이후 진명여고에서 수학교사를 하면서 생활하였다. 그러나 한반도에 전운이 감돌자 돌연 집을 나와 육군에 이등병으로 입대를 하였다. 주변의 지인들이 한사코 장교임관을 독려하였지만 일본군출신임을 속죄하여야 한다면서 계속 사병으로 근무하다가 전쟁이 임박해지고 확군이 시작되자 결국 포병장교로 임관하였다. 그는 군내 신망을 받았고 바로 포병사령관으로써 한국전쟁에 참전하였고 박정희 소령도 한때 신응균의 제자이자 부하장교로 근무하였다.
지도를 보는 박정희 소령. 사진 맨왼쪽이다.
그 시기의 한국군 포병의 체계를 잡고 미군과는 약간 다른 한국군 포병의 기초와 뿌리를 다질 수 있었던 것이다. 신응균은 51년 미국군사유학을 다녀왔고 59년 중장으로 예편하였으나 5.16혁명이후 박정희 대통령은 신응균을 기억하고 그를 중요하게 쓰셨다. 그의 이야기는 아래 또 나올거야.
한국전 발발 이후 미군 포병장비의 도입
한국전쟁이 발발하면서 저런 ㅎㅌㅊ 포병화기만 가지고 있던 한국군은 122MM 곡사포로 무장한 북괴군에게 크게 밀릴 수 밖에 없었고 상황이 심각해지자 미군에서 긴급히 50년 7월부터 M2 105MM 견인곡사포 13문을 시작으로 한국군 포병화력을 공급하기 시작하였다.
이중에 가장 많은 공급은 단연 105MM M2 견인포였어. 이미 2차 세계대전 당시 엄청난 수량이 생산된 모델이고 미군내에 치장물자도 충분하였다. 성능도 당시 동급 화포중에 가장 성능이 좋았다.
무게가 2톤 정도로 가벼운 편이었고 사거리도 11KM로 나쁘지않은 수준이었다. RAP탄을 사용하면 14.6KM까지 날라간다. 추진장약과 탄두가 일체형이다보니 장전속도도 빨라서 분당 3발에서 빨리 속사를 하면 10발까지 사격을 할 수 있는데 이런 속사 능력 때문이 이 구식화포를 21세기인 현재까지도 도태시키지 않고 운영을 하고있지. 50년 9월부터 이미 구식인 M3 곡사포를 대체하여 한국군의 주력화포가 되었다.
휴전후 1950년대 중반 1사단의 105MM 견인포
이 때 받은 105MM 견인포는 월남전에서도 큰 활약을 하였다.
물론 지금도 잘만 쓰고 있다. M2 견인포는 중복명칭이 많아 후에 M101로 명칭이 변경되었는데 M2 / M101 / KM101 모두 같은 포다.
천조국은 한국이라는 작은 나라를 살리기위해 한국 전쟁 기간에 육군장비만 M2 105㎜ 곡사포 1,127문을 비롯하여 M114 155㎜ 곡사포 303문, M1 소총 47만여 정, M1/M2카빈 21만9000여 정, M1919A4 경기관총 7700여 정 등 필수 장비의 대부분을 지원했다. 여기에 3억4300만 발의 M1 소총탄 등 막대한 양의 탄약까지 지원했어. 이승만의 외교력과 미국의 한국 수호의지는 지금의 국제사회의 기준으로는 정말 경이로운 수준이었지
1950년 당시 한국군 포병대의 숙원사원은 미군의 M114 155MM 견인포를 도입하는 것이었다.
2군단장 시절 백선엽 중장. 당시 만 33세였다.
당시 백선엽이나 신응균과 같은 전선의 야전장교들은 미군의 155MM포의 위력에 큰 감동을 받은 상태였고 미군에게 155MM 견인포 원조를 강력히 요청하였지만 미군입장에서도 워낙 중화기라서 쉽게 인도를 못하고 있는 상황이었어.
한국전 당시 한국군의 M114 155MM 곡사견인포
이 때 밴플리트장군과 같은 친한파 장교들의 많은 도움으로 155MM 견인포가 한국군에도 303문이 종전시까지 인계되었다.
한국육군의 아버지라 불린 밴플리트 대장
밴플리트 미8군 사령관
밴플리트는 그외에도 한국군과 한국의 발전을 위해 엄청난 일을 하였었다. 미군 1일 포격량을 5배가 늘리는 밴플리트포격을 구사하여 미의회로부터 출석요구를 받기까지 하였고 1951년에 경남 진해에 육군사관학교를 재신축하여서 한국군 사관생도를 양성시켰다. 이때 배출된 신임소위들이 바로 전두환과 노태우, 김복동 같은 육사11기 장교들이었다.
밴플리트는 한국군의 기장 큰 문제가 장교들의 경력이 너무 짧다는데 있다고 보고 전시중임에도 불구하고 영관급 장교들은 미국유학을 갈 수 있도록 주선해주고 전선의 위관급 장교들도 OBC / OAC (초군반/고군반) 교육을 다시 받도록 배려하였다. 이때 신응균과 박정희도 미국에서 군사유학을 할 수 있었다.
이승만 대통령과 밴플리트 장군이 한국군 장교단 앞에서 화동을 보고 있다.
1950년대 미국군사유학을 다녀온 많은 영관급 장교들은 훗날 한국군의 엘리트 장교단으로 성장하였고 5.16혁명의 주도세력이 되었다.
한국전 당시 용맹을 떨친 박태준 중령. 당시 만 24세였다.
포병장교들은 양성이 아주 어려운 편이고 수학적 소양과 지식은 물론 냉철한 판단력과 공간감각이 필요한 일이어서 한국군 수뇌부들은 일찍이 포병병과의 양성이 노력을 하였고 많은 우수한 보병장교들이 포병으로 전과를 하였는데 그중에 하나가 당시 박정희 대령이었다.
한국전 당시 박정희 중령. 맨 오른쪽이다.
포병장교시절 원조각하.
밴플리트는 퇴역후에도 57년에 코리아소사이어트를 설립하여 자신의 사회적 지위와 영향력으로 한국을 지원하였고 특히 박정희 대통령이 취임한 후에 한국의 재철소와 발전소등 중공업발전에 엄청난 기여를 하였다. 당시 박정희대통령은 김종필을 보내서 밴플리트를 방문시켰는데 이때 많은 미국산업계 인사들과의 인맥을 주선해주었다고 한다.
장군은 퇴임후에서 한국을 자주 방문하였다. 청와대를 방문한 밴플리트 장군과 가족들.. 첫째 영애의 손을 잠고있는 소년은 한국전에서 전사한 장군의 외아들 제임스중위의 아들 밴플리트3세다. 고령인 그의 근황을 알아보니 와병중이라고 한다.
육영수여사로부터 선물을 받는 밴플리트3세
밴플리트가 이토록 한국군과 한국의 발전에 경이로운 지원을 한 것은 개인적인 사연도 있었기 때문이야.
밴플리트의 외아들 제임스 공군중위가 52년 4월 3일 B-26을 조종하고 북한의 순천지역의 군용열차를 야간폭격하는 임무를 수행중 북괴군의 대공포에 맞아 격추되었고 실종처리 되었다.
B-26 폭격기
재임스중위의 네 번째 출격이면서 최초의 단독 폭격임무였다. 그의 B-26폭격기는 03:00쯤 김포공항 레이더에 잡혔고, 03:30분에는 주표적이 구름에 가려져 새로운 예비 표적을 받고 날아갔으나 그 후 레이더에서 사라졌다.
밴플리트 장군의 60세 생신파티에서 제임스 중위가 웃고 있다. 제임스중위는 이 사진을 찍은 뒤 보름뒤 북한 상공에서 전사했다.
밴 플리트는 10:30분 미5공군사령관 에베레스트 중장에게 이 소식을 듣고도, 다음날 4월 5일 내색없이 국군2군단 창설식에 참석했다. 그는 아들이 실종된 것을 이미 알고 있었지. 밴플리트 장군은 결국 더큰 피해를 막기위해 아들의 수색작전의 중단을 직접 명령하였다. 이 것은 당시 회의에 참석하였된 채명신 장군의 회고에서도 확인이 되고 있어.
사진 오른쪽에서 2번째가 채명신 소령이다. 왼편 두번째에 박정희 중령도 보인다.
백선엽 장군의 회고 따르면 여러 작전 회의중에서 밴플리트 장군이 아들이 실종된 지역의 지도를 멍하니 응시하는 일이 많았다고 한다.
장군 스스로는 내색은 하지 않았으나 그의 부인은 견지지 못했어. 아래는 중앙일보에 연재된 백선엽장군의 회고중 일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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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군은 당시 전쟁이 벌어지던 한국 땅에 가족을 데려올 수 없었다. 규정이 그랬다. 어느 때라도 위험이 몰아닥칠 수 있는 한국 땅보다는 안전한 일본에 가족을 머물도록 했다. 이 규정은 나름대로 철저하게 지켜지고 있었다.
그런 규정에도 불구하고 밴플리트의 부인은 한국 땅을 자주 밟았다. 남편을 만나기 위해서라기보다 잃어버린 아들의 유해를 찾거나, 아들이 머물렀던 땅에서 자식의 체취라도 더 느껴 보기 위해서였을 것이다.
-중략-
내가 서울에 오면 머물던 곳이 지금의 필동 코리아하우스 자리였다. 그곳에 미군부대가 있었는데, 서울에 출장 오는 대한민국 육군참모총장을 위해 그곳에 미군이 숙소를 마련해 줬던 것이다. 내가 이곳에서 자주 만났던 사람이 밴플리트 사령관의 부인이었다. 부인은 가끔 대구의 육군본부에도 찾아왔고, 내가 서울에 오면 이곳으로 자주 찾아왔다.
자주 만났던 터라 격의 없이 대화할 수 있는 사이였다. 따라서 부인과는 미국의 여러 가지 화제를 두고 다양한 이야기를 나눴다. 미군 고위 장교들의 자국 내 생활, 승진을 두고 벌이는 미 장교들의 경쟁의식 등은 부인이 친절하게 내게 설명해 준 내용들이었다. 그 부인 덕분에 나는 미군들의 다양한 면모를 이해할 수 있었다.
한참 그런 여러 가지 이야기를 나누다가 부인이 잠시 말을 멈추는 때가 있다. 그러면 나는 긴장을 했다. 손수건을 잡아 쥔 그녀의 손이 다시 오므려지고, 눈가에 다시 손수건이 올라가는 경우는 그녀가 울기 시작한다는 신호였다. 그녀는 늘 말없이 울었다. 조용히 눈물을 닦으면서 “백 장군, 제 아들…시신이라도 어떻게 찾을 방법은 없는가요…”
북한 지역에서 행방불명된 그의 아들은 사망한 게 분명했다. 사고가 벌어진 지 6개월 이상이 흘렀지만 아들의 유해라도 품에 안고 싶어하는 모정(母情)은 억누를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렇지만 나도 방법이 없었다. 그녀는 매번 그렇게 슬픔에 짓눌린 어깨를 보이면서 돌아갔다.-----------------------------------------------------------------------------------------------------------------------------------------------------------------------------
벤플리트의 한국군 지원정책과 한국전의 적극적인 전투행위는 워싱턴의 비판을 자주 받았다. 당시 워싱턴은 유럽의 NATO육성과 소련군의 유럽전선에 대응하는 데 주력하는 입장이었고 밴플리트의 한국군지원은 자신들의 역량을 소모하는 것이라 믿었고 한국전에 빠른 휴전에만 골몰하고 있었다.
1953년 8군 사령관직의 퇴임을 앞두고 전쟁고아원을 방문한 밴플리트 대장.
하지만 밴플리트는 이런 비판에도 불구하고 53년 3월 퇴임할 때까지 엄청난 지원을 한국군에 쏫아부었고 훗날 한국육군의 아버지로 불리게 된다.
태능 육군사관학교에서 할아버지의 동상옆에 선 밴플리트 장군의 고손자.
미국 군사원조 화포시대
이런 미국의 군사원조품중에는 105MM 견인포 이외에도 중요한 장비들이 많았다.
M2A1 4.2" 박격포는 군사원조로 한국군에 도입이 되었는데 처음에는 포병에서 운영을 하였다. 군필게이들은 잘 알겠지만 박격포는 보병이 운영하는 화포다. 하지만 당시 한국군의 차량보급률이 너무 낮았고 보병부대는 대부분 도보나 우마차 정도로 이동하는 수준이어서 도저히 4.2" 박격포를 보병부대에서 운영할 수가 없어서 포병에서 함께 운영을 하였다. 1964년이 되어서야 겨우 보병연대 전투지원중대에서 운영이 가능해졌다.
파월 해병2여단의 4.2" 박격포
4.2 인치는 구경이 105MM 견인포보다 커서 사거리는 짧지만 고폭탄의 위력이 훨씬 강해서 중요한 화력지원수단으로 고지전에서 크게 활약을 하였다.
M114 155MM 곡사견인포는 1951년 5월에 처음 한국군에 도입이 되기 시작하였는데 강력한 위력으로 한국군에게는 금쪽같이 귀중한 重포였다.
최대 3분에 4발을 발사할 수 있어서 발사속도가 느린 것이 흠이지만 고폭탄의 위력이 워낙 강하여서 중요한 공격수단으로 이용되었다.
파월 포병과 M114 155MM 견인포
한국전 이후에는 미군이 철수하거나 장비를 교체할 때마다 물려받아서 거의 1000문을 보유하게 되었고 지금도 사용중이다.
소량이기는 하지만 8인치 M115 곡사포도 휴전이 가까워지는 1953년에 50여문이 한국군에 인도되었다.
한국전 당시 8인치 곡사견인포
사거리가 16KM정도에 운영인원이 16명이나 필요한데다가 무게만 14.5t이 나가는 포는 분당 발사속도는 최대 3분에 2발에 불과함에도 2000년대까지 현역으로 사용되었는데 고폭탄의 위력이 155mm견인포에 비해 거의 1.7배 정도에 반경79m를 초토화할 수 있는 위력이어서 군단포병대에서 아주 아끼며 사용되었다.
8인치..정말 방열하는 거 보면 저게 레알 포병이란 생각이 든다.
일단 고폭탄의 위력면에서는 지금 기준으로도 ㅆㅆㅆㅅㅌㅊ다.
군단포병 8인치 견인포의 야간사격짤. 조명탄이 필요없을 정도다.
3포병여단의 8" 견인포. 발사후 지면의 진동의 흙보라가 올라오고 있다.
포구를 떠나는 거대한 포탄이 보인다.
지금 기준으로 보아도 정말 거대하고 강력한 포임을 알 수 있다.
잘 알려져 있지는 않치만 M59 155MM견인포도 한국군에게 53년에 50여문이 인계되었다.
사거리가 23KM에 분당 2발을 발사할 수 있었는데 군단급 포병화기로 요긴하게 사용되었고 한국군이 국산화한 KM114가 대량 생산이 되면서 80년에 퇴역하였다. 일부는 전시물로 사용중이고 극히 일부만 치장중인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한국군에 인계된 포병장비중에 좀 특이한 놈이 있는데 바로 M36 대전차 자주포이다.
한국군의 M36 대전차 자주포
이 놈은 전차처럼 생기기는 하였지만 어디까지나 포병장비인 대전차 자주포다.
2차대전 당시 독일의 5호전차 판터, 6호 전차 타이거같은 야수전차들에게 미군기갑부대들은 막대한 피해를 입고 있었고 응급처치로 만들어진 자주포로 대공포로 쓰이던 90포를 대전차포로 개조한 것을 부착하여 포병이 운영하였던 장비였다.
나치 독일의 야수 타이거탱크. 이놈 잡을려고 만든 것이 M36이다.
당시 미군에서는 M36을 이미 퇴역시키던 상태여서 제고가 충분하였고 한국전 기간중 264대가 인계되었다.
당시 한국군 포병이나 기갑이나 보병 모두 아직 병과 구분이 명확하지않은 시절이었고 그 정도로 체계도 잡혀있지도 않던 시절이었다. 기갑병과는 있었지만 겨우 경장갑차 정도 밖에 없던 시절이어서 이 자주포를 기갑병과에서 운영을 하였다. M36이 도입될 시기에 이미 북괴군의 전차들이 대부분 미군의 전폭기나 전차에 격파된 시기여서 M36은 자주포로써 운영이 되었다. 특히 강력한 직사화력으로 중공군의 인해전술을 분쇄하거나 고지전에서 북괴군 진지를 민주화시키는 전법으로 아주 요긴하게 쓰였다.
한국전 당시 한국군의 M36
치열한 한국전이 휴전된 이후에 219대의 M36이 살아남았고 미군으로부터 M47을 인계받을 때까지 기갑부대의 중요한 장비로 사용되었고 1959년에 퇴역을 하였다.
1957년 중부전선의 M36 자주포진지.
1950년 후반의 한국군 M36자주포와 승무원들
M36은 엄청난 구식장비임에도 불구하고 1990년대까지 예비치장되었다. M36의 주포가 지금도 현역으로 사용되는 90MM대전차포이다보니 현재도 엄청나게 재고로 가지고 있는 포탄을 그대로 사용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M36 자주포와 동일한 90MM 대전차포를 사용하는 M348A3K 전차. 아직도 현역이다.
한국군 곡사자주포 시대의 시작
60년대 초는 한국도 격변기였지만 다른 곳에도 많은 일이 있었다. 냉전이 극으로 치달아서 쿠바에서 핵미사일건으로 미해군과 소련해군이 맞짱 뜰뻔하고 , 중동에서는 유태인들과 샌드니거들의 대규모 전쟁이 계속되었다.
1967년 6일전쟁 당시 아랍동맹군을 향해 닥돌하는 이스라엘군의 M50 개조셔먼.
베트남에서는 미국이 빨갱이들을 조지려고 준비중이었다. 북한은 이미 후루시초프로부터 막대한 지원을 받고 있었고 북괴군의 전력은 한국전 당시보다 더욱 한국군을 압도하는 상황이었다. 쉽게 알려주면 한국군이 M1소총으로 땅야땅야 할 때 AK-47소총을 들여와서 드르르륵 갈기는 수준이었던 것이다.
이때 원조각하와 J.F케네디는 한국군의 파병을 협상하셨다. 주한미군의 월남차출을 막고 미국을 삥뜯고 한국군의 실전경험을 위한 각하의 도박이었다.
파월 해병 2여단 장병들
월남에서 전사한 5,000여명의 희생덕에 결국 대한민국을 풍전등화의 위기에서 미친 빨갱이들로 지키고 후손에게 번영을 남긴 것은 두말할 필요가 없겠지.
미국은 당시 국제 왕따였다. 심지어는 영국도 미국의 파병요청을 쌩까던 시기였다. 호주와 뉴질랜드, 태국군이 파병은 하였지만 숫자상 미미하였다. 한국군은 연인원 32만명이 참전하였고 5만의 병력을 상시주둔하였다.
즉 한국군의 8%가 항상 월남에서 정글을 해치고 북배트남군과 배트콩들을 조지고 있었던 것이다.
나는 베트남에 주재원 근무를 한 적이 있는데 교민사회의 원로되시는 분들에 따르면 이미 69년에 월남의 미군특수는 한물가고 있었다고 한다.
파월 해병 포병들
69년부터 미군이 썰물처럼 철수를 시작하였고 70년부터는 사실상 한국군이 자유연합군의 최대군대였고 가장 치열하게 전투를 하였어. 72년에 수도기계화보병사단이 승리한 안케패스는 당시 자유연합군이 승리한 거의 유일한 전투로 기록되고 있다. 이미 다른 동맹군대들도 철수를 하였고 월남군은 존나게 발리고 있었기 때문이지.
미군도 상당한 성의표시를 하고 있었다. 66년에 처음으로 M110 자주포가 넘겨지기 시작하였고 총 99대가 한국군에 인계되었다.
M110을 주한미군에게서 넘겨받고 끌고나오는 한국군 자주포병
당시 미군에게도 비교적 신형장비였고 전술핵포탄을 쏠 수 있어서 미군도 금쪽같이 아끼던 장비였다. 13명의 운영이 필요한 중포였고 강력한 위력의 8인치 (203MM)곡사포가 부착된 놈으로 포탄의 위력만큼은 지금 기준에도 엄청난 놈이었다. 16.8KM/ RAP탄 30KM의 사거리를 가졌고 분당2발 발사가 최대였다. 포탄이 워낙 커서 이 이상의 속도로 발사는 불가능하였다. 한국군은 금쪽같이 아끼며 사용하였고 군단 직할 포병이 2000년대 중반까지 현역으로 사용하였다. 나도 현역으로 근무할 때 보았는데 포신 굵기가 거의 엄청나게 굵었다.
지금은 퇴역을 하여서 일부는 외부전시물로 사용중이고 일부는 치장되고 있다, 미군으로부터 인계받은 포탄제고가 노무노무 많아서 한동안은 계속 치장을 할 것으로 보인다. 지금 기준으로 본다면 워낙 구형이고 아무런 방호장갑이 없는 덕분에 자주포병들이 이동할 때 포상위에 방울방울 매달려서 눈,비 다맞고 이동하는 것을 보면 좀 불쌍해 보이기도 하였다.
자주포치고는 방열도 시간이 많이 걸리고 노가다도 좀 많았다고 한다.
M110과 M548 탄약운반차가 항상 세트로 다녔다. 지금은 둘다 예비 치장장비다.
1971년에는 M107 175MM 자주포도 인계되었는데 미군에서도 괴물자주포로 통하는 물건이었어.
사거리도 30KM/ RAP탄 40KM에 달하는 괴력을 가졌고 강력한 전술핵포탄을 사격하는 놈이었어. 90년대까지 주한미군 포병들과 함께 실제로 핵포탄 사격훈련도 하였었다고 전해지고 있어.
1군단 포병여단의 M107.
물론 사격속도가 최대 분당 2발이라서 지금 기준으로는 ㅎㅌㅊ지만 67KG에 달하는 고폭탄을 날리는 굉장한 놈이었지. 군단급 포병의 핵심자주포로 수량은 50량 정도를 운영하였다고해
M110/M107 모두 미군에서는 90년대 초에 퇴역을 하였는데 이 때 100여대의 예비차채와 60만톤의 포탄을 한국군에 넘겨주어서 엄청나게 쟁겨놓고 있는 상황이야. 지금은 M107도 K9이 실전배치되면서 퇴역을 하였지만 한반도 통일결전에 순간에는 치장시설에서 나와서 엄청난 포격을 할 것이 틀림없어.
M110과 M107은 항상 국군의 날 주인공이었다.
번개사업 그리고 국산화포시대
60년대 후반으로 가면서 소련의 지원에 취한 김일성은 자기 환갑잔치는 서울에서 하겠다고 공공연히 떠들고 다녔다. 사실 이말이 헛소리는 아닌 것이 미군이 이미 월남전에서 자신감을 골로 보내고 고립주의 시대로 들어서고 있었고 주한미군도 호시탐탐 철수하려고 하였기 때문이지. 월남전도 점점 소강상태로 들어가고 있었고 천조국의 지원도 눈에 띄게 줄어들기 시작하였어. 그동안 꽁짜로 원조하던 장비들을 돈주고 사가라고 하기 시작한 거야.
원조각하는 깊은 시름에 빠졌다. 미국이 한국군의 월남참전의 대가로 한국군의 현대화와 장비확충, 차관지원, 한국업자의 월남사업지원등의 양해각서인 브라운 각서의 이행도 저조해지는 심각한 상황이었어. 실제로 워싱턴에서는 한미상호조약이고 나발이고 주한미군을 철수시키라고 성화였고 71년 미 7사단이 철수하는 일이 벌어지기까지해... 이제 미2사단만 겨우 명맥을 유지하는 상황이 오면서 국방을 더 이상 미군에 의지할 수 없는 절대절명의 위기의 순간이 오고말아..
각하는 이 상황에 절망하지 않고 자주국방의 계획을 세우는데 이 때 설립된 것인 ADD 국방과학연구소야.. 각하는 자신의 포병 스승이자 일본육사 선배인 신응균을 부르셨다.
신응균 소장. 무척 미남이어서 청년 장교시절부터 여성들에게 인기가 아주 많았다고 전해진다. 오키나와전투에서 부상을 입고 죽어가는 중에 일본여자에게 구조되어 살아남은 것도 이해가 간다.
신응균은 1959년 중장으로 예편후 한동안 직업외교관의 길을 가고 있었어. 신응균은 의외로 한국현대사의 많은 페이지에 등장을 하는데 주서독대사시절 재독한국인들과 함께 서독의 광부/간호사 파견에도 많은 역활을 하기도 하였어.
원조각하로부터 임명장을 받는 신응균 ADD소장
신응균이 소장으로 취임하면서 먼저 연구진을 찾아다녀야 했어.. 당시 의뢰를 받았던 대학교수란 자들은 전부 미개한 반도에서는 화포를 만들수 없다는 패배주의적 발언한 하는 수준이었지. 거지나라에 인재가 있을리가 없었고 민간 / 군 모두 쓸만한 인간들이 없어 한참 고생을 하다가 하는 수 없이 육사/해사/공사의 현역장교 이공계교관들을 차출(개끌고와서)해서 특무부대 건물 한칸을 빌린 사무실에 처넣은 것이 ADD의 시초였다. 당시 끌려온 장교들의 증언에 따르면 레알 책상하고 의자만 있었다고 한다.
박정희 대통령의 지시는 간단했다. 예비군 20개사단을 무장할 장비를 당장 만들라는 것이었다. M16은 오원철 수석이 중앙정보부를 시켜서 만든 베트남의 위장고철회사에 밀반입한 것을 역설계해서 시제품을 만든 후에 설계도를 미국콜트사에 받아내었지만, 60만정만 만들 수 있었고 1985년까지만 면허생산을 할 수 있어서 예비군용으로 M1, 카빈, M1919, 박격포, 3.5인치 로켓포를 미군몰래 역설계해서 양산해서 공급하는 계획이었다.
번개사업으로 만든 시제 국산총기 (미제복제)를 시찰하시는 원조각하.
공돌이들을 갈아넣어서 소병기들은 겨우 성공하였지만 각하는 예비군도 포병을 편성해야한다고 지시하셔서 처음으로 105MM 곡사 견인포 복제에 들어가게 된다.
원조각하는 당시 알보병이었던 예비군에게도 105MM 견인포를 배치하실 계획이었다.
총기하고 포는 차원을 달리 하는 물건이고 하는 수 없이 하는 수 없이 ADD의 해군사관학교출신 구상회 연구원이 미대사관을 통해 천조국에 도움을 요청했어.
ADD의 구상회 해군소령. 훗날 대한민국 육군화포와 탄도미사일사업을 주도하게 된다. ADD 부소장을 역임하였다.
원래 ADD 설립당시에 대놓고 반대를 반대를 한 터라 국무성은 '꺼져'라고 간단히 답신을 주었다고 해.. 각하는 성화고 미국은 안알려주고 미치기 일보직전인 상황에 하는 수 없이 대사관 무관장교를 통해 도움을 다시 요청을 해. 일단 미군측에 니네가 브라운 각서를 성실히 이행을 해야하고 김치국에서 달라는 것이 니네가 고철처리하고 있는 구형무기들이니 수리해서 쓸 수 있도록 기술을 내놓으라는 것이었어. 당연히 간단히 또 까이고 시간이 지나니까, 할 수 없이 구상회연구원은 포병대에서 105MM 견인포를 하나 가져와서 완전분해를 한 후에 역설계를 하였어.
1973년시제품 시험사격짤
포신깍을 가공장비가 없어서 일본에서 기계를 수입하고 또 ADD 직원들이 청계천상가에서 미군기술교범 같은 것을 수거해서 천신만고 끝에 1973년 허름한 구로동 대한중기 공장에서 처음 시제 M101 105MM 곡사견인포를 완성한 것이 한국군 화포의 시초가 되었어. 대한중기는 훗날 기아그룹에 인수되어 기아중공업으로 사명이 변경되었고 현재는 현대그룹에 인수되면서 지금은 '현대위아'로 불리우고 있다.
당시 브라운각서의 이행차원에서 한국군에 있는 미군장비의 정비와 부품조달의 기술지원하기위해 Clyde D. Hardin을 단장으로하는 기술지원팀 5명이 ADD에 파견되어 있었어.
Clyde D. Hardin 단장.
하딘은 2차대전에 미해군으로 참전한 철저한 반공주의자였고 단원이었던 Urich는 미육군 대령출신으로 총포전문 병기장교출신이었지. 처음에 하딘은 ADD가 105MM 견인포를 개발하는 것에 대해 상당히 심드렁한 반응이었어, 미개한 반도놈들이 지랄하고 있네~정도의 반응이었다해. 하지만 105MM 견인포 시제품이 나오고 젊은 연구원들이 아무런 안전장비없이 목숨을 걸고 시험사격을 직접하는 것을 보고 마음을 바꾸고 적극적으로 미군의 도면이나 기술자료를 넘기기 시작했어.
다락대 사격장에서 국산 105MM 견인포를 시험사격중인 ADD 직원들
같은 엔지니어끼리 통하는 것이 있었고 이들은 곳 친한파로 변신하여서 막대한 자료를 넘기고 도면해석기술과 자신의 노하우를 넘겼어. 당시 하딘팀의 이런 지원을 미군당국에서 아주 못마땅하게 생각을 하고 있었고 감시를 강화하기 시작하였다. 하딘팀은 미국의 방산기밀자료까지 자신들의 권한으로 최대한 수집하여서 넘기기 시작하였고 결국 Urich가 넘긴 극비자료가 결국 미군당국에 감시에 발각이 되면서 하딘팀 5명은 미국으로 강제송환되고 말아.. 이후에 이들 대신 현역장교들로 구성된 JUSMAK-K팀이 들어오는데 이들은 기술지원보다는 오히려 ADD의 감시와 본국보고에 주력하였었어. 미국은 한국이 자신의 통제권을 벗어나는 것을 막으려 한 것이지.
ADD를 방문한 스틸웰 주한미군 사령관.
국뽕을 맞은 상태에서 본국으로 돌아간 하딘은 방산연구자로써 계속 일을 하였고 자신의 연구논문과 기술자료집을 한국ADD에 기증하기도 하였을 뿐만 아니라 한국에도 종종 방문하여 ADD에서 강연을 하시는 등 한국에 대한 많은 도움을 돌아가실 때까지 계속 하였다고 해.
이 과정에서 신응균 ADD소장이 과로로 건강을 망쳐 결국 쓰러지고 마는 등 많은 사람들의 희생과 노력, 여러 사람의 도움이 합해서 1977년에 대한중기에서 KM101 105MM 곡사견인포가 양산되었고 지금까지 대한민국을 지키고 있어.
105MM 견인포는 포탄과 추진장약이 한덩어리여서 재장전이 존나 빠르다. 물론 견인포병들의 강한 체력은 기본 옵션이다.
105MM 곡사 견인포는 군사원조로 받은 것까지 합하면 거의 3000문을 가지고 있고, 너무 수량이 많아서 1000문은 전시예비치장을 하고 2000문은 동원사단이나 향토사단에서 사용중이야.
보병사단 포병연대에서 지금도 잘만 쓰고 있다. 사격DATA가 많이 축적되어서 존나 잘맞는다고 한다.
중량이 가벼워서 UH-60으로도 충분히 수송이 가능하다.
미군이 105MM급 화포를 전부 퇴역시키면서 미국으로부터 어마어마한 양의 포탄을 넘겨받아서 앞으로 수십년은 더 현역으로 사용될 것으로 보인다. ADD는 자신감에 충만해서 KM114 155MM 곡사견인포도 바로 국산화에 성공하고 1977년에 국산 155MM 견인포로 장비한 포병대대를 창설하는데 이르렀다.
KM114는 지금도 동원사단의 주력견인포로 운용중이다.
자체개발 견인포 KH-178, KH-179의 성공.
자신감이 하늘을 찌르던 ADD는 이에 만족하지 않고 세계최고의 견인포를 만들기로 독하게 마음을 먹고 시작한 것이 KH-178이었어.
M101의 포신을 연장하고 각종 구성품의 성능을 계량하고 강화하는 형태로 ADD와 기아중공업이 중심이 되어 개발이 된 KH-178은 당대 최고의 105MM 곡사견인포였어. 사거리가 14.7KM/RAP탄 18KM에 발사속도도 최대 분당 15발 사격이 가능한 엄청난 속도를 가진 최고의 105MM 견인포였어. 1983년에 개발성공한 화포는 한국군보다는 인도네시아와 칠레등 수출용으로 더많이 만들어졌어.
이미 한국군포병은 105MM 포로는 성이 안차는 상황이었고 북괴포병을 대포병사격으로 분쇄하기위해 보다 강려크한 포를 준비하고 있었는데 그게 KH-179 155MM 곡사견인포야.
KM114를 기본으로 포신을 연장하고 구성품을 강화한 것으로 M114보다 1톤만 중량이 증가한 것에 반에 거의 2배길이의 거대한 포신을 장착하고 있고 나토표준 155MM 포탄을 모두 사용할 수 있고 사거리는 23KM/RAP 30KM로 북괴의 대부분의 화포들과 대포병사격을 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추었어. 발사속도도 분당 최대 4발이어서 중화포치고는 아주 빠른 편이야. 몰론 포병들의 고릴라 같은 팔힘과 강한 체력이 기본적으로 필요한 것임에는 두말할 필요가 없지.
포반장님 액션 죽인다.~
한국군 포병대에서는 KH-179의 성능에 크게 만족해서 수출용으로 주로 생산된 KH-178와는 달리 1000여문 가까이 생산되어 대부분 사단포병연대에 배치되었고 당연히 지금도 일선에서 사용되고 있어.
지금도 사단급 포병화기로 잘만 쓰고 있다.
포를 심고있는 KH-179 견인포병
철주를 박아줘야 한다.
방열을 하면서 점점 견인포병들은 흙과 하나가 된다.
화포와 점점 한몸이 된다. 노짱이 눈앞에 아른 거릴 쯤 방열이 완료된다.
포탄은 당연히 수동장전이다
포반장의 사격명령을 기다린다.
발사!
다시 장전부터 무현반복이다.
지금은 K9이 대량배치되면서 K55 자주포가 사단급까지 내려오면서 지금은 점차 후방으로 내려가고 있는 중이야. 내가 현역일 때도 자주 봤었는데 엄청난 포를 5톤포차에 끌고 다니는 것이 인상적이었어.
정말 방열할 때 보면 '저것이 진짜 포병이구나'라는 생각이 누구나 들거야.
수출도 재법 잘되어서 동남아국가와 중동국가에 상당히 많이 팔아먹었고 지금도 구매문의가 자주 들어오고 있다고해
인도네시아는 한국방산수출의 중요한 고객님이다.
대통령의 특별지시속에 만들어진 K-136 구룡다연장 로켓포
박정희 대통령께서 갑자기 북괴군이 보유한 것과 동일한 다연장 로켓을 개발할 것을 ADD에 지시하셨다. 당시 ADD는 맨붕에 빠지게 되는데 각하의 명령에 따라 지금까지 목숨을 걸고 무기를 개발하고 만들어온 ADD연구진이지만 다연장은 정말 미지의 영역이었다. 지금이야 저 정도야 껌이지~라고 할 수 있지만 사연이 있었다.
당시 미국을 비롯한 대부분의 서방국가에서는 서독이외에 다련장이라는 장르를 취급하는 나라가 없었다. 그것이 다 이유가 있는데 다련장 로켓포라는 것이 단시간에 엄청난 고폭탄을 갈기는 맛이 있지만 바람의 영향을 많이 받아서 명중률이 좃망하고 자원의 낭비가 상당히 심한 무기인 것이 사실이고 항공기의 발달도 그닥 필요가 없어졌기 때문이야.
미국도 2차대전때 약간 만들어 쓰다가 버렸기 때문에 물어볼 곳도 없었다. 우리의 ADD는 다시 맥가이버 빙의하여 자료를 찾기위해 서독을 가서 자료달라고도 해보고 첩보사진으로 소련군이 많이 사용하는 BM-21 방사포 사진을 연구하기도 하고 생쑈를 하였다.
ADD가 많이 참조한 소련제 BM-21 방사포.
일게이들도 원조각하가 포병장교출신인 것은 잘 알거야. 한반도 전장은 인류역사상 아주 좁은 횡심에 막대한 병력과 장비가 집결한 전장이고 예비군까지 집결하면 정말 미어터질 지경이 된다. 인류최대의 전장이라는 2차대전 독소전장도 이 정도의 병력집결도는 나오지 않을 것이야. 군간부출신 게이들은 북괴군 전술 배우면서 군포군 / 연포군 / 사포군이라는 용어를 공부한 적이 있을거야. 군단이나 사단의 예하포병을 집결하여서 화력투사를 한다는 개념인데 워낙 포장비가 많고 제대가 많다보니 어느정도 집결하여서 운영할 수 밖에 없어서 이런 개념이 나오는 거야.
즉 좁은 한반도의 전장에서 다련장로켓은 상당한 위력이 있다는 것이 각하의 판단이었고 ADD를 갈구신 이유였지. 잘 알려지지 않은 비사인데 당시 한국군은 비밀리에 소련제 BM-21 1대와 포탄을 입수하는데 성공하여서 비밀리에 개발에 성공을 거두었다. 국군의 구룡은 상당히 BM-21가 비슷하게 생겨먹게 된 것이지.
구룡은 일단 단기간에 158문이 생산/배치가 되어 군단급 직할 포병의 핵심화력이 되었어. 130MM 36연장 로켓을 18초만에 퍼불 수 있는 강력한 놈이었는데 사거리만 초기형이 22KM, 후기형은 36KG에 달하는 대다가 64KG의 고폭탄을 날리는 강력한 놈이지. 제인연감에 올라갈 정도로 서방세계에서는 독보적인 놈이었어 각하의 선견지명은 ㅆㅆㅅㅌㅊ..
물론 지금 나오는 최신형 천무에 비하면 구식이다보니 아쉬운 부분도 많은 것이 사실이야. 일단 장전을 포병들이 일일이 한발씩 포신 후장에 넣어야 하는 데 상당한 노가다이고 시간도 오래 걸려..
다련장포병의 얼굴에서 빡심이 느껴진다.
그리고 고폭탄 역시 인마살상용만 생산이 되어서 전차와 같은 중장갑장비를 완전격파가 약간 어려운 편이야. 아직까지는 워낙 제고포탄들이 많아서 전혀 퇴역할 기미가 없는 무기체계이고 한동안 갓한민국을 지킬예정이야.
K55 자주포의 도입
80년대 초중반까지 한국군의 신형 KH-179의 성능에 크게 만족을 하고 있었고 신나게 야전포병부대에 보급을 하고 있었어. BUT 한국군의 첩보망에 북괴가 자주포를 엄청나게 대량 배치하고 있다는 정보를 입수하고 분석에 들어가게 된다. 그때까지 확인된 바에 따르면 성능이야 조잡하지만 북괴포병의 절반은 자행포로써 배치를 마무리한 상태라는 충격적은 내용이었어.
북괴군의 170MM 자주포. 사거리 54KM에 자동장전장치가 달린 자주포다. 소련군이 쓰다버린 해안포를 받아서 T55전차위에 올린 형태로 사거리는 길지만 명중률이 병신이고 발사속도고 좃망하다.
당시 ADD에도 자주포 개발을 위한 선행연구를 하고 있었지만 당장 짧은 기간내에 개발을 해서 배치하는 것은 무리인 상황이었어. 한국군에는 M107 / M110 자주포가 있기는 하였지만 수량이 너무 적고 구식이라 당장 장만을 하여야 하였어. 일단 물색을 해보았는데 서방군대들은 전부 천조국의 M109를 사서쓰고 있는 상황이었지. 당장 사고는 싶었는데 돈은 없고 면허생산권을 삥뜯기로 결심을 하고 성님들을 졸라서 결국 조건부 면허생산권을 토해내게 한다.
단 조건은 주포와 포탑부 일부는 미국에서 사서쓰는 조건이었어. 당시 주포를 생산하는 미국공장이 워싱턴주에 있었는데 그곳 하원의원이 동네경제 씹창난다고 주의회에 양해각서고 나발이고 그 동네공장에 있는 포를 해외에서 생산을 못하게 법안을 내놓았는데 이게 통과가 된 것이지... 결국 주포는 기아중공업에서 KH-179 155MM 포신을 잘 만들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미국에서 사서달아야 했어. 당시 생산입찰은 삼성항공이 따먹어서 정말 4~5년의 단기간에 1,180대나 뽑아댔는데 미국도 놀랄 정도의 생산속도였다고 해. K55는 세계에서 유일하게 한국만 면허생산을 하였고 지금은 세계최대의 운영국이다.
해병대의 K55. K55 기본형은 사진처럼 스패이트를 단단히 박아야 사격이 가능하다
K55는 원래 18KM/RAP 24KM 사거리에 최대 분당 4발을 쏘는 준수한 놈이었지. 방열이나 사격재원 넣는 것은 반자동식으로 K9에 비교할 수 없지만 당시 기준으로는 ㅆㅅㅌㅊ였어. 기존 자주포와는 달리 밀폐형 포탑이 있고 알루미늄 합금장갑으로 포병들의 방호력도 좋아졌지. 삼성항공에서 면허생산을 위해 많은 기술자료를 미국으로부터 삥뜯은 상태여서 기술력도 엄청나게 축적할 수 있었어.
세월이 지나 지금 다른 M109도입국들은 창정비를 못해 전전긍긍하고 가동률이 떨어지고 있지만 한국군 생산라인과 정비시설이 시퍼렇게 살아있어서 지금도 가동률이 좋은 상황이야. 독일/이스라엘/다른 유럽국가들이 부러워 죽는다고함.
한국에서 잘 만들어쓰다보니 이름도 M109를 버리고 K-55라는 독자이름으로 사용중이다. 단 주한미군은 곧 죽어도 절대 K-55라고 안부르고 M109A2K라고 부르고 있다.
세월이 강산을 2번은 바꾸면서 K-55도 연식이 되었고 K-9에 점차 주력의 지위를 넘기고 있지만 절대 이 정도만 쓰고 버릴 포방부가 아니었다. K-9을 개발하면서 축적된 기술을 K-55에 드리부어서 개량하는 개획을 수립하고 실행에 올리는 데 K55A1개량사업이야. 혹은 PIP개조사업이라고도 부르고 있어. 목표는 K55를 K9의 70%정도로 성능을 높히는 개조작업이야.
주요내용은 이래와 같다.
1. 포의 차제/현수장치/주퇴복좌기를 강화하여 최대사거리 32KM연장하고
2. 방열속도를 K9급으로 강화하고 (약 45초) 아예 스페이드도 때버림.
3. GPS를 달아서 측지속도를 단축시키고
4. 사격통제장치를 K9급으로 교체하기
거의 미군의 주력인 M109A6 팔라딘보다 우수한 성능의 자주포로 대개조를 한다는 것인데 전량을 지금도 개조중이라고 한다.
MLRS M270의 직도입과 국산 신형 다련장 천무
걸프전에서 한국군 포병장교들은 다른 건 몰라도 MLRS의 무시무시한 위력에 깜놀한 상황이었어. 사실 MLRS를 보고 그냥 구룡보다 좀더 쌔겠지 정도였는데 그게 아니었어. 로켓탄의 위력이 한국군이 쓰는 155MM 곡사포8발을 동시에 쏘는 것보다 강려크하였던 것이야.
한발을 쏘면 그것이 공중에서 자탄으로 분해되면서 포탄낙하지점을 완전히 민주화하는 물건이었지. 정말 왠만하면 자체개발을 하던가, 아님 최소한 면허생산이라도 하는 갓한민국이지만 MLRS만큼은 정말 급하게 사서 총 58대를 도입하였어.
일단 주한미군과 완벽하게 동일한 무기체계여서 탄약보급이나 정비까지 큰 문제는 없는 상황이야. 한때 한국군은 MLRS에 너무 놀라서 1개 대대 위력이 155MM 곡사포 36개 대대 위력이 난다고 난리도 아니었지.
사거리 45KM의 다련장탄은 물론 사거리 160/300KM짜리 에이테킴스 로켓탄도 장만한 상태야. 총12연장의 로켓포탄을 발사가 가능하고 구룡과 달리 로켓발사관을 통채로 넣었다 뻬는 방식이라 재장전에 신형은 3분이면 가능하다고해.
그리고 궤도차량베이스라서 진동이 적어 명중률도 ㅅㅌㅊ였어. 구룡의 경우 인마살상용 고폭탄만 있었지만 MLRS의 경우 이중목적고폭탄이어서 전차나 장갑차를 민주화시키는 게 가능한 강력한 로켓탄이야.
포방부에서는 더 사들이고 싶었지만 포탄/ 차량 모두 가격이 노무노무 비싸서 결국 포기하여 M270를 굴린 노하우를 바탕으로 한국형 다련장 발사체인 천무를 개발하게 된다.
신형 국산 다련장 로켓포 천무.. 워낙 신형이어서 존나 강한 놈이란 것 외에는 알려진 것이 없다.
끝판왕 K-9의 개발
국산 자주포의 개발은 사실 아주 오래전부터 진행되고 있었어, 당연히 그 중심에는 ADD가 있었지. 70년대부터 선행연구를 계속하고 있었는데 KH-179가 대성공을 거두고 M109까지 국산화에 성공을 거두자 ADD의 연구진들은 야전포병장교들과 구체적인 요구성능을 체크해 나가기 시작하였어. 당시 이미 미국은 꿈의 자주포인 크루세이더 계획이 있었고 갓독일은 PZH2000사업을, 영국은 AS90사업을 진행을 하던 시기였는데 한국은 약간 후발주자의 위치였지.
ADD와 포병, 삼성항공은 이제는 꿀릴게 없다는 입장이었고 의욕적으로 작업을 시작하였어. 당시 ADD의 목표성능발표에 육군 포병장교들은 큰 감동을 받았고 적극적으로 국방부를 설득하였고 예산확보에 성공하여서 사업을 시작하게 되었어.
그와중에 천조국은 럼스펠트 국방장관이 가볍고 기동력있는 장비로 개편하는 중이어서 크루세이더계획을 백지화한 상황이었지.
성능대비 가격이 엠창하여 미군에게 까인 크루세이더 자주포
크루세이더는 일단 가격이 너무 창렬하였어. PZH2000을 4~5대를 살 수 있을 정도로 비싸서 결국 취소시킨 것인데 이 것으로 미군수뇌부와 국방부가 정면대결을 하는 최악의 상황이 연출되었고 결국 럼스팰트가 사임하는 결과가 발생하였지. 결국 이 일로 주한미군에 한국군 포병에게 개무시를 당하는 일이 발생하게 되지.
순탄치 않은 재임시절은 보낸 럼스팰트 국방장관
물론 이게 전부 럼스팰트의 잘못은 아닌 것이 미국방산업체들이 정치권에 후장을 빨아주면서 엄청나게 폭리를 취하는게 사실이고 이미 미군도 학을 띄는 상황이야. 심지어 많은 친미국가들도 미국제무기를 외면하면 지경이지. 지금 미공군 훈련기사업도 미국업체들이 엄청난 개발기간과 천문학적인 가격을 부르면서 미공군을 질리게 하였고 결국 한국이 T50을 앞세워 강력한 후보로 입찰에 들어갈 수 있었던 거야.
92년 당시 미국의 방산업체들도 한국의 움직임을 눈치까고 공동개발제의를 하는등 분주하게 접촉을 시작하였지만 ADD와 삼성항공 모두 추후 수출진행에 발목이 잡힐까봐 모두 거절하였다고해. 야심차게 개발을 90년대초부터 본격적으로 시작하였고 다른 국가에 비해 압도적으로 빠르게 진행이 되고 있었어. 육군과 국방부에 약속한 전력일정인 98년에 맞추어 박차를 가하였지. 다른 한국산 무기개발 스케줄과 마찬가지로 K-9도 급박하게 사업이 진행이 되다보니 불의사고와 안타까운 희생자가 있었어. 국방일보의 연재 '철모에서 미사일까지' 기사중 일부를 발취하여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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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7년 12월5일 오후 2시 안흥종합시험장 신자포 전용사격시험장. 날씨는 비교적 따뜻한 편이었다. 모두가 미소 띤 얼굴로 인사를 나누며 시험에 임했지만 이날이 신자포 개발 전 기간을 통해 가장 가슴 아프고 안타까운 날로 기억될 줄은 누구도 생각하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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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후 2시30분. 안전통제실로부터 사격을 준비하라는 연락이 왔다. 최대발사속도 시험을 하기 위해 18발의 비활성 포탄과 단위장약 3호를 자주포 내부에 실었다. 그리고 선행시제 개발 및 시험평가 때부터 팀워크를 다져온 포반장 국과연 강신천 선임연구원, 사수 삼성테크윈 정동수 대리, 부사수 국과연 조기호 기술원, 탄약수 삼성테크윈 안병철 대리가 차례로 탑승했다. 이들은 그동안 사격 때마다 장비의 이상 유무 판단과 점검을 완벽에 가깝게 수행해왔다.
오후 2시47분. 안흥종합시험장 사격통제원인 김태인 기술원의 통제에 따라 첫 발이 발사되고 9초 후 2번탄이 발사됐다. 3번탄이 덜컹하고 장전되고 이어 단위장약이 장전됐다.
그런데 발사 시간이 지나도 사격이 되지 않았다. 느낌이란 순간적으로 와 닿는 것인지 방호벽 뒤에 대기 중이던 연구개발진에 문득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곧바로 신자포를 향해 고개를 내미는 순간 신자포 후문에 약간의 불빛이 비쳤다. 삼성테크윈 박승근 과장이 소화기를 들고 뛰어갈 때 작은 불꽃은 점점 거세져 신자포 뒷문으로 불길이 뻗쳐올랐다.
내부 뒷문에 가까이 있던 안병철 대리가 제일 먼저 탈출해 망연히 신자포를 바라보고 있었다. 부사수 조기술원은 등에 불이 붙은 채 탈출, 땅에 몸을 굴렸다. 세 번째로 나온 강신천 선임연구원은 손등에 심한 화상을 입었다.
“불은 자주포 내에서 계속 타고 있었고, 사수석에 앉았던 정동수 대리가 잠시 후 화염을 뚫고 나왔는데, 심한 화상을 입은 상태였어요. 사람의 정신력이란 게 대단한 것이 그 상황에서도 내 목소리를 알아듣고 `다른 사람들은 다친 데 없느냐'고 묻고는 고통으로 신음하기 시작했습니다. 이것이 그와 제가 나눈 마지막 대화였습니다.”(삼성테크윈 박승근 과장)
환자는 비상 연락을 받고 출동한 삼성테크윈 운항사업부 헬기 편으로 삼성서울병원으로 급히 후송됐다. 강신천 선임연구원은 2도 화상, 조기호 기술원은 3도 화상을 입고 3개월 간 치료를 받았다.
그러나 연구개발진 모두의 염원에도 불구하고 정동수 대리는 약 한 달 후 34세의 나이에 부인과 어린 아들을 남겨 놓고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장례식 날 정대리 무덤 앞에서 모두 서로 껴안고 울었습니다. 산을 내려오면서 서로 말은 안했지만 정대리가 함께했던 신자포 개발은 꼭 우리 손으로 성공시켜 먼저 간 정대리의 몫을 다해야 한다고 각자 다짐했을 겁니다. 그리고 마침내 우리는 이렇게 해냈습니다.”(삼성테크윈 한삼수 전 공장장)-----------------------------------------------------------------------------------------------------------------
이 사고로 삼성태크원의 정동수대리가 세상을 떠나고 K-9시제자주포가 전소되고 말아. 사업이 큰 위기를 맞이하고 책임론이 돌면서 좌초의 위기까지 왔지만 부상을 치료하고 복귀한 강신천 연구원이 다시 포반장 역활을 하겠다고 지원하고 다시 의기투합하여 사업은 결국 시간을 맞추게 된다.
이런 애국자들의 희생덕에 갓한민국이 숨이 꺽이지않고 살아있다고 생각해. 98년 야전부대에 모습을 드러낸 K-9은 야전부대평가에서도 일부 보완사항이 있었지만 뛰어난 성능을 보인다. 일단 K-55와는 차원을 달리하는 성능이었어.
1. 모든 것이 자동화되었어. 즉 자주포병이 차량 밖으로 나갈 필요가 없이 차내에서 모든 전투를 할 수 있어서 방열속도와 생존성이 엄청났어. 45초면 바로 초탄발사가 가능하였다.
2. 발사속도가 엄청나서 15초에 3발씩 급속발사가 가능하다. 현수장치, 자채, 화포가 모두 견고해서 가능한 것인데 사격명령을 받으면 엄청난 포격을 측지와 사격재원입력이 엄청나게 빨라서 짧은 시간내에서 엄청난 포격이 가능하므로 K55의 3~4배의 화력을 가진 것으로 평가받고 있어.
3. 엔진출력이 1000마력으로 자주포 주재에 한국군의 주력전차인 K1A1보다 오히려 더 빠른 시속 67KM로 달릴수 있다. PZH2000보다 기동력이 우수함.
4. K55가 가볍고 약한 알루미늄합금 장갑인것에 반해 K9은 강철장갑이야. 엄청난 엔진출력 덕분에 강력한 장갑을 가질 수 있게 되어서 적의 대포병사격을 몸빵으로 막을 수 있는 수준이다. 실재로 연평도포격전 때 북괴군의 122MM 방사포포격에도 끄떡없었고 해병자주포병들도 전부 무사할 수 있었어.
K10 탄약수송장갑차를 통하여 자동 송탄이 가능하다
K9은 외화별이에도 재미를 봐서 터키에 기술수출을 하였는데 그동안 독일제 무기체계를 가지고 있던 터키군은 K2흑표전차와 함께 한국군의 무기체계로 가져오게 되어서 독일을 따돌리고 방산거래의 활성화가 가능해진 소득을 얻었지.
포신 길이에서 이미 넘사벽이다.
현재 노르웨이군 입찰에 참여 중인데 스위스의 M109G, 갓독일의 PZ2000, 유럽짱개의 케사르자주포와 경쟁중이야. 스위스와 유럽짱개는 성능이 ㅎㅌㅊ고 갓독일의 PZH2000은 발사속도과 포탄적재능력이 K9보다 아주 약간 앞서지만 기동력이 딸리고 가격이 2배가 넘으므로 K9이 유리한 상황이야.
독일연방군의 PZH2000
현재 지구상에 존재하는 자주포중에 유일하게 가격이 2배 비싼 독일의 PZH2000만이 K9과 대등한 수준이어서 많은 외화벌이가 가능할 전망이야.
영국 육군의 AS-90. K-9 보다 ㅎㅌㅍ다
폴란드의 경우 포탑은 영국에서 AS-90을 도입하고 차재는 국산을 쓰기로 하였는데 폴란드 방선업체가 성능과 납기준수에 실패를 하면서 어부지리로 폴란드군으로부터 차제를 120대 주문받아서 팔아먹고 있어. 그리고 인도군에서도 약 100여대의 발주협상을 하고 있는 중이야.
K9은 K55와 비슷한 수량을 배치할 예정이고 이미 운영을 한지가 10년이 넘어서 개조작업이 예정되어 있어. 우리가 나이를 더 처묵하면 K9은 더욱 강력해져 있을 거야~
105MM 똥포 아직 안죽었다. 105MM 자주포 개조사업
한국군에서 약 3,000문의105MM 견인포가 있고 이중에 1000문은 치장중이야. 즉 아직도 2,000문이 시퍼렇게 굴러다니고 있는 것인데 천조국으로부터 받은 것, 국내생산한 것까지 모두 350만발의 포탄재고가 한국에 있다고해. 지구상 가장 많이 가지고 있는 거다. 즉 퇴역을 시킬래야 시킬 수가 없는 상황인거야. 그래서 포방부에서 약 500문을 5톤 포차에 결합하는 개조작업을 하기로 하였고 보병연대에 4.2" 박격포를 퇴역시키면서 이 빈자리에 105MM 자주포 포병대대를 편성하는 것으로 계획중이야.
이 자주포는 기존 견인포에 비해 운영포병을 11명에서 5명으로 줄이고 K9과 같은 신형사격통제장치를 달아서 대포병전에서도 전투가 가능한 수준으로 개조하는 작업이지. 장전을 재외하고는 모두 K9급의 자동방열, 재원입력이어서 약 56초만에 초탄 발사가 가능한 수준이야.
장갑판도 부착해서 포병의 생존성도 높힐 계획이야. 이것이 예정대로 진행이 되면 보병연대의 화력이 강해지면서 더 이상 사단사령부의 노예가 아닌 연대전투단으로써 탈바꿈하는 거지.
한화태크윈에서 사업을 받아서 하고 있는데 외화벌이를 위해 수출판촉도 열시미 하고 있는 중이야. 주로 동남아나 남미같은 개도국에서 많이 문의가 오고 있다고해.
휴~ 글싸기 힘들다. 한국군 포병은 워낙 방대해서 한참 걸렸다.
3줄 요약
- 한국군포병은 천조국의 악성재고 화포을 받아서 출발하였다.
-ADD를 중심으로 방산업체와 기술자들의 희생으로 눈부시게 발전하였다.
-지금은 세계3위의포병강국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