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댓글큰스님의 법문은 사실, 보현행원 법문이지요. 보현행원을 큰스님께서 아셨으면(?) 틀림없이 그렇게 연관 지으셨을 거에요. 제가 볼 때 큰스님께선, 많은 경론, 어록을 보셨지만, 화엄경은 본격적으로 못 보신 것 같습니다. 큰스님 법문에서 화엄경을 인용하시는 경우는, 적어도 지금까지 제가 본 바로는 별로 없습니다. 물론 원통불교의 요체 법문하실 때, 현수품에 나오는 천고송은 인용하셨어요. 그런 정도이지, 화엄경 곳곳에 설해지는 가르침은 별로 들은 적이 없습니다. 맨날 아미타불이십니다.
제가 잘못 아는 것일지는 모르겠는데, 일상상매란 일종의 실상관입니다. 이 세상이 하나의 상, 하나의 원만한 세계, 하나의 완전한 진여법계, 이것을 깨쳐 보는 게 일상삼매입니다. 이것은 광덕스님의 '내생명 부처님 무량공덕 생명'과 완전히 통하는 말이기도 하고요.
일행삼매는 그 일상삼매의 상태를 일념으로 일으켜 나가는 겁니다. 이 세상에는 부처님밖에 안 계시는 구나! 내 생명이 바로 부처님 생명이구나! 부처님과 똑 같구나! 일체가 부처님이구나!
이것을 염념상속, 일념으로 관해 나가는 것으로, 보현행원으로 보리 이루리, 라는 말과도 통합니다.
오늘 올린 큰스님 법문의 핵심, 염불을 보면, 큰스님의 염불은 정토종의 염불이 아닙니다. 부처님을 떠나지 않는 공부, 그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100% 정확한 지적이십니다.
그런데 큰스님은 이것을 不離佛이라 하지 않으시고, 念佛로 얘기하십니다. 그러면 저희같은 범부나 불교를 모르는 분들에게는 정토종의 염불로 들리기 십상입니다. 정토종의 염불은 무한한 보편의 염불을 정토종이라고 하는 하나의 특수한 종파에 가두는 염불입니다. 염불은 문자 그대로 부처님을 염하는 것인데, 우리가 아는 일반적 염불은 정토종 염불이거든요? 그러니 불필요한 오해를 하게 됩니다.
불리불이 염불인데, 불리불은 일반인들에게 염불보다 좀더 열린 개념을 줍니다. 화엄경, 보현행원이 바로 불리불의 염불입니다. 화엄경이나 보현행원은 한 치도 부처님을 떠나지 않습니다.
염불이란 단어는 불교 냄새가 엄청 풍기는 단어지요. 그런데 화엄, 보현행원은, 불교 냄새가 거기에 비하면 별로 안 나지요?
왜 화엄경에서 특정 부처님 이름을 쓰지 않고, 노사나불, 비로자나불이 있음에도 그냥 부처님이라고 줄곧 했는지, 또 왜 보살행이라는 고유의 불교 언어가 있음에도 굳이 보현행원이라는 새로운 말을 만들어서 사용했는지, 이런 데 대한 연구가 좀 있어야 하겠다는 게 제 생각입니다.
무한 광대한 보편의 세계가, 어느 한 세계에 갇히게 되면 특수한 형태가 됩니다.
물리 법칙의 경우도, 과학이 발달할수록 특수 법칙이 보다 더 보편의 법칙으로 바뀌어 가지요. 예를 들어 뉴턴의 운동법칙은 양자역학의 일부입니다. 양자역학이 거시세계에 적용될 때 뉴턴 법칙의 모습을 띠게 되거든요? 따라서 양자역학이 뉴턴법칙보다 더 보편의 물리 법칙입니다. 세상 법칙이 다 그래요.
보편이 한계, 조건을 가지면 특수가 됩니다. 그러니까 특수는 사실 보편의 일부지요. 그럼에도 우리는 특수를 보편보다 상위 개념으로 착각합니다. 그리고 특수 대접을 받으려고 하지요.
큰스님께서 서두에 말씀하신 바와 같이, 도신과 홍인의 가르침을 東山法門이라 합니다. 도신은 소주 쌍봉산에 들어가 30년 동안 나오지 않았는데, 도신의 제자 홍인은 쌍봉산 동쪽 빙모산에 있었기에 그것을 東山이라 하였고 이 두 스승님의 가르침을 그래서 동산법문이라 한다지요.
동산법문의 핵심은 일행삼매로서, 도신은 문수반야경에 의한 일행삼매를 주체로 삼았다고 합니다.
도신은 그의 좌선 지관을 이른바 五門의 心要로 정리했는데, 이 五門心要의 지표가 된것은 證心論으로, 증심론은 천태의 찬술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오문심요의 귀결은 守一不移로, 홍인은 이를 계승해 守心第一 守本眞心 강조 합니다.
도신 홍인 법문은 한마디로 坐禪觀心으로, 즉 觀心 ㆍ守心입니다.
그런데 동시대의 우두법융(594 ~ 657) 은 無心이기에 絶觀ㆍ忘守라고 주장했어요. 후대 선종은 도신 홍인 등의 동산법문에는 등을 돌리고 우두법융에 가깝습니다.
달마와 혜가의 안심 문답도 사실은 絶觀論에서 그 자료를 얻어 만든 것 이라고 합니다. 즉, 우리가 알다시피 혜가가 팔을 자른 것이 아닌 것이지요, 그 이야기는 지어낸 이야기라는 말입니다.
관심, 수심이 틀린 것은 아닌데, 도신과 홍인의 공부에는 볼 마음, 지킬 마음이 있지요. 우두법융은 그런 게 없어요. 이것은 홍인의 제자 신수가 닦을 보리, 깨끗이 할 보리의 거울이 있는 걸로 말하는 게송을 지은 것과, 육조가 닦을 보리 거울이 어딨느냐?며 한 방 먹인 것을 연상케 합니다.
당연히 후대 선종의 입장에서는 닦을 마음은 없지요. 이대로가 진리 그대로거든요?
그런데 화엄의 실천 부분을 고민했던 의상은, 동산법문에 솔깃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지엄은 그런 선사들에게 관심은 있었으나 많이 경계했다고 하고요(제 기억이 가물가물).
첫댓글 큰스님의 법문은 사실, 보현행원 법문이지요. 보현행원을 큰스님께서 아셨으면(?) 틀림없이 그렇게 연관 지으셨을 거에요.
제가 볼 때 큰스님께선, 많은 경론, 어록을 보셨지만, 화엄경은 본격적으로 못 보신 것 같습니다.
큰스님 법문에서 화엄경을 인용하시는 경우는, 적어도 지금까지 제가 본 바로는 별로 없습니다.
물론 원통불교의 요체 법문하실 때, 현수품에 나오는 천고송은 인용하셨어요.
그런 정도이지, 화엄경 곳곳에 설해지는 가르침은 별로 들은 적이 없습니다.
맨날 아미타불이십니다.
제가 잘못 아는 것일지는 모르겠는데,
일상상매란 일종의 실상관입니다.
이 세상이 하나의 상, 하나의 원만한 세계, 하나의 완전한 진여법계, 이것을 깨쳐 보는 게 일상삼매입니다.
이것은 광덕스님의 '내생명 부처님 무량공덕 생명'과 완전히 통하는 말이기도 하고요.
일행삼매는 그 일상삼매의 상태를 일념으로 일으켜 나가는 겁니다.
이 세상에는 부처님밖에 안 계시는 구나!
내 생명이 바로 부처님 생명이구나!
부처님과 똑 같구나!
일체가 부처님이구나!
이것을 염념상속, 일념으로 관해 나가는 것으로,
보현행원으로 보리 이루리, 라는 말과도 통합니다.
큰스님 법문은 다 좋은데, 제가 참 아쉽게 생각하는 부분은, 왜 부처님을 자꾸 아미타부처님으로만 귀결시키는가 하는 겁니다.
큰스님의 아미타불은 정토종의 아미타불은 아니라(물론 극락정토의 아미타불 개념도 포함함). 그야말로 비로자나불의 아미타불입니다.
즉, 무량광 무량수, 무한 시공간의 무한 부처님을 큰스님은 아미타불이라 말씀하시는 것이지요.
그러다 저희같은 우매한 대중이 듣기에는, 그런 큰 뜻의 아미타불보다는 극락교주 아미타불밖에 못 생각합니다.
큰스님의 저 드넓은 부처님을 알아듣지 못하는 것이지요.
여기서 우리는 화엄경의 부처님을 참고해 봅니다.
화엄경의 부처님은 비로자나불로 알려졌지만, 사실 화엄경에는 비로자나불의 이름이 별로 안 나옵니다.
대신 화엄경의 부처님은 그냥 '부처님'입니다.
그냥, 특정 이름이 없는, 그냥 佛이 화엄경의 부처님입니다.
왜 그럴까요?
오늘 올린 큰스님 법문의 핵심, 염불을 보면,
큰스님의 염불은 정토종의 염불이 아닙니다.
부처님을 떠나지 않는 공부, 그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100% 정확한 지적이십니다.
그런데 큰스님은 이것을 不離佛이라 하지 않으시고, 念佛로 얘기하십니다.
그러면 저희같은 범부나 불교를 모르는 분들에게는 정토종의 염불로 들리기 십상입니다.
정토종의 염불은 무한한 보편의 염불을 정토종이라고 하는 하나의 특수한 종파에 가두는 염불입니다.
염불은 문자 그대로 부처님을 염하는 것인데,
우리가 아는 일반적 염불은 정토종 염불이거든요?
그러니 불필요한 오해를 하게 됩니다.
불리불이 염불인데, 불리불은 일반인들에게 염불보다 좀더 열린 개념을 줍니다.
화엄경, 보현행원이 바로 불리불의 염불입니다.
화엄경이나 보현행원은 한 치도 부처님을 떠나지 않습니다.
무상계는 십지의 이구지에 해당하는 법문으로 볼 수 있습니다.
이구지에 이르면 그 성품이 이미 살생이나 도둑질, 사음 등의 경계를 넘기에,
계를 지키려고 해서 계를 지키는 게 아니라,
지킬 마음이 없어도 저절로 계가 지켜지는 자리입니다.
이런 건 화엄경을 공부하면 바로 딱 연결되거든요?
그런데 큰스님은 그게 없으세요!
이건 제가 큰스님을 비판하거나 하려는 게 아니라,
큰스님의 아쉬운 점을 저희가 보완하려는 차원입니다.
제가 어찌 큰스님 발바닥에나 미치겠습니까.
그러니 제가 큰스님 비판 운운은, 어.불. 성. 설.
염불이란 단어는 불교 냄새가 엄청 풍기는 단어지요.
그런데 화엄, 보현행원은, 불교 냄새가 거기에 비하면 별로 안 나지요?
왜 화엄경에서 특정 부처님 이름을 쓰지 않고,
노사나불, 비로자나불이 있음에도 그냥 부처님이라고 줄곧 했는지,
또 왜 보살행이라는 고유의 불교 언어가 있음에도
굳이 보현행원이라는 새로운 말을 만들어서 사용했는지,
이런 데 대한 연구가 좀 있어야 하겠다는 게 제 생각입니다.
무한 광대한 보편의 세계가,
어느 한 세계에 갇히게 되면 특수한 형태가 됩니다.
물리 법칙의 경우도, 과학이 발달할수록 특수 법칙이 보다 더 보편의 법칙으로 바뀌어 가지요.
예를 들어 뉴턴의 운동법칙은 양자역학의 일부입니다.
양자역학이 거시세계에 적용될 때 뉴턴 법칙의 모습을 띠게 되거든요?
따라서 양자역학이 뉴턴법칙보다 더 보편의 물리 법칙입니다.
세상 법칙이 다 그래요.
보편이 한계, 조건을 가지면 특수가 됩니다.
그러니까 특수는 사실 보편의 일부지요.
그럼에도 우리는 특수를 보편보다 상위 개념으로 착각합니다.
그리고 특수 대접을 받으려고 하지요.
국평 34평에 사는 건 보편이지만,
100평 펜트하우스는 특수입니다.
큰스님께서 서두에 말씀하신 바와 같이, 도신과 홍인의 가르침을 東山法門이라 합니다.
도신은 소주 쌍봉산에 들어가 30년 동안 나오지 않았는데,
도신의 제자 홍인은 쌍봉산 동쪽 빙모산에 있었기에 그것을 東山이라 하였고 이 두 스승님의 가르침을 그래서 동산법문이라 한다지요.
동산법문의 핵심은 일행삼매로서, 도신은 문수반야경에 의한 일행삼매를 주체로 삼았다고 합니다.
도신은 그의 좌선 지관을 이른바 五門의 心要로 정리했는데,
이 五門心要의 지표가 된것은 證心論으로, 증심론은 천태의 찬술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오문심요의 귀결은 守一不移로,
홍인은 이를 계승해 守心第一 守本眞心 강조 합니다.
도신 홍인 법문은 한마디로 坐禪觀心으로,
즉 觀心 ㆍ守心입니다.
그런데 동시대의 우두법융(594 ~ 657) 은 無心이기에 絶觀ㆍ忘守라고 주장했어요.
후대 선종은 도신 홍인 등의 동산법문에는 등을 돌리고 우두법융에 가깝습니다.
달마와 혜가의 안심 문답도 사실은 絶觀論에서 그 자료를 얻어 만든 것 이라고 합니다.
즉, 우리가 알다시피 혜가가 팔을 자른 것이 아닌 것이지요,
그 이야기는 지어낸 이야기라는 말입니다.
관심, 수심이 틀린 것은 아닌데, 도신과 홍인의 공부에는 볼 마음, 지킬 마음이 있지요.
우두법융은 그런 게 없어요.
이것은 홍인의 제자 신수가 닦을 보리, 깨끗이 할 보리의 거울이 있는 걸로 말하는 게송을 지은 것과,
육조가 닦을 보리 거울이 어딨느냐?며 한 방 먹인 것을 연상케 합니다.
당연히 후대 선종의 입장에서는 닦을 마음은 없지요.
이대로가 진리 그대로거든요?
그런데 화엄의 실천 부분을 고민했던 의상은, 동산법문에 솔깃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지엄은 그런 선사들에게 관심은 있었으나 많이 경계했다고 하고요(제 기억이 가물가물).
오늘 큰스님의 법문을 보면, 우리 큰스님과 가풍 차이를 좀 느껴지게 합니다.
두 수승님 모두 내 생명을 부처자리로, 그리고 부처를 떠나지 않는 공부로 지으시지만,
묘한, 그리고 아주 미세한 차이를 느끼게 합니다.
청화큰스님은 평생을 봐도 그러하시지만, 줄곧 '닦으시는 수행자'이셨지요.
반면 우리 큰스님은 돈오의 자리에서 바로 진여의 법계로 행입(行入)하시는 분이셨고요.
그래서 우리 큰스님은 보현행원이 강조되었지만,
청자 화자 큰스님은 보현행원은 안 보이지요.
대신 오직 아미타불을 염하는 '염불'만 있으시지요.
작다라면 별 것 아니고,
크다라면 아주 큰 차이입니다.
청자 화자 큰스님은 靜의 불교.
청아하고 오롯이 수행 위주.
우리 큰스님은 動의 불교.
원효 불교를 닮으셨어요
수행도 중요하지만
내 무량공덕 생명의 실천도 중요하셨던 분
캡쳐는 21분까지 분량이고 나머지는 들으시기 바랍니다. 계율에 관한 것입니다.
큰스님들 법문 들으면 신심이 절로 납니다!
겁약하던 마음이 사라지고, 부처님 위신력에 대한 믿음이 솟구쳐요!
우리 큰스님도 그러시고, 청자 화자 큰스님도 역부여시
고맙습니다. 마하반야바라밀 _()()()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