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태완의 '서장'통한 선공부] <29> 서장 (書狀)
여랑중(呂郞中)에 대한 답서
의심하면 생과 사 번갈아 찾아오지만…
"어떤 스님이 운문 스님에게 묻되 [무엇이 부처입니까?]하니 운문 스님이 말하길, [마른 똥막대기다.]라 하였습니다. 오로지 이 화두를 들고 있으면 홀연 재주가 다할 때에 문득 깨닫게 될 것입니다. 단, 문자를 찾아서 증명하거나 어지럽게 이리저리 헤아려서 주석하고 해설하는 일은 절대로 하지 마십시오. 비록 그렇게 주해(註解)한 것이 분명하며 설명에 귀결점이 갖추어져 있다고 하더라도 모두가 귀신 소굴의 살림살이일 뿐입니다.
의심(疑心)을 부수어 버리지 못하면 삶과 죽음이 번갈아 찾아오지만, 의심을 부수어 버리면 삶을 좋아하고 죽음을 싫어하는 마음이 끊어집니다. 삶을 좋아하고 죽음을 싫어하는 마음이 끊어지면 부처라는 견해와 진리라는 견해가 없어집니다. 부처라는 견해와 진리라는 견해도 오히려 없는데 하물며 다시 중생이라는 견해와 번뇌라는 견해를 일으키겠습니까?
다만 어리석고 어두운 마음을 마른 똥막대기 위로 가져와 한 번 맞닥뜨려서 딱 들어맞게 되면, 생사를 두려워하는 마음과 어리석고 어두운 마음과 사량분별하는 마음과 총명한 마음이 저절로 일어나지 않습니다. 이러한 마음이 일어나지 않음을 느낄 때에 공(空)에 떨어질까봐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문득 들어맞은 곳에서 소식을 끊어버리면 일평생 유쾌하기가 말할 수 없을 것입니다."
의심이 있다는 것은 스스로에게 확신도 없고 믿음도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무엇에 대한 확신과 믿음인가? 자신의 본래면목에 대한 확신과 믿음이다. 스스로의 본래면목을 확인하지 못했으므로, 스스로에 대한 믿음이 없고, 스스로에 대한 믿음이 없으니 결국 밖으로 끄달려 쫓아다닐 수밖에 없다. 그리하여 두려움과 편안함이 교차하고, 좋아하고 싫어함이 왔다 갔다 하며, 늘 이리 저리 사량하고 분별하여 모양[相]을 찾아 빌붙어 다닌다.
화두란 이런 불안한 의심의 상태가 끝나는 자리이다. 그러므로 화두를 들고 공부할 때에는, 다만 화두만을 들고서 살펴고 또 살펴서 사량분별이 끝나는 곳까지 나아가, 허공(虛空)으로 한 발 내딛어 어디에도 의지함이 없어야만, 비로소 허공이 본래 허무(虛無)가 아니라 가장 견고한 바탕임을 알고, 크게 안도하며 쉬게 되는 것이다. 티끌만한 것에라도 의지하게 되면, 아무리 견해가 훌륭하고 분별이 분명하더라도, 처음부터 공부하지 않은 사람과 조금도 다를 바가 없다.
결국 화두 참구의 성패 여부는 어디에도 의지할 것 없는 허공으로 발을 내딛느냐 그렇지 못하냐에 달려 있다. 어디가 허공이며 어떻게 허공으로 발을 내딛는가? 허공은 바로 지금 보고·듣고·말하고·움직이는 가운데 스스로를 드러내고 있다. 그러므로 보고·듣고·말하고·움직이는 모양에 막히지만 않을 수 있으면, 그 모든 것이 곧 허공이다. 매 순간 순간의 행동거지(行動擧止) 속에서 허공을 알지 못하는 까닭은, 그 행동거지의 모양에 막히기 때문이다.
허공으로 발을 내딛는다는 말을 하지만 이것은 방편의 말일 뿐이고, 사실은 따로 허공이 있어서 발을 내딛는 것이 아니다. 바로 지금 보고·듣고·말하고·움직이는 이것이 모두 허공일 뿐인데, 단지 스스로가 모양에 막혀서 허공을 모르는 것이다. 다만 스스로가 잡고 있는 모양을 놓아버릴 수만 있으면, 보는 것이 허공이고 듣는 것이 허공이며 말하는 것이 허공이고 움직이는 것이 허공이다. 이렇게 되면 보고·듣고·말하고·움직임에 막힘 없이 자재하게 된다.
그러므로 화두를 참구하는 사람은 모름지기 [마른 똥막대기] 위로 모든 것을 던져 버리고 오직 [마른 똥막대기]에만 의지하되, [마른 똥막대기]가 [마른 똥막대기]가 아니라 다만 의지할 곳 없는 허공이고 허공이 바로 [마른 똥막대기]로서, 모든 것은 이 허공에서 말미암는다는 것이 저절로 밝아 질 때를 기다려야 한다. 만약 성급히 허공을 헤아려 본다든지, 혹은 허공에 떨어질 것을 두려워하여 다시 생각에 매달리면, 평생 끝날 날이 없을 것이다.
김태완/ 부산대 강사.철학
[출처 : 부다피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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