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눅 21:1-4, 참된 믿음의 표본, 26.5.24, 박홍섭 목사
오늘 함께 읽은 본문은 헌금과 헌신에 관한 설교로 많이 활용되는 구절입니다. 그런 의미가 없지는 않지만, 앞선 문맥과 연결해서 보면 훨씬 중요한 내용이 담겨 있습니다. 주님은 자신을 죽이려는 음모가 담긴 종교 지도자들의 질문에 답하신 후, “너희가 다윗의 후손이자 다윗의 주가 되는 메시아를 제대로 알고 있느냐?”라고 되물었습니다. 이들은 자기를 높이는 삶을 갈망하고 외식으로 길게 기도하며 과부의 가산을 삼키면서도 그것이 잘못되었는지조차 모르고 있습니다. 어떻게 그럴 수 있을까요? 성경의 하나님이 아니라 자기가 만든 하나님을 믿고, 성경의 메시아가 아니라 자신이 원하는 메시아를 기다리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 대표적인 그룹이 서기관들입니다. 주님은 제자들과 성전에 모인 모든 사람이 들을 수 있도록 이렇게 경고하십니다. “너희는 서기관들을 삼가라! 이들이 더 엄중한 심판을 받는다”
그리고 오늘 본문이 이어집니다. 주님이 눈을 들어 성전 건물 여인의 뜰에 있는 헌금함에 부자들과 가난한 과부가 돈을 넣고 있는 모습을 주의 깊게 보신 후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3-4입니다. “이르시되 내가 참으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이 가난한 과부가 다른 모든 사람보다 많이 넣었도다. 저들은 그 풍족한 중에서 헌금을 넣었거니와 이 과부는 그 가난한 중에서 자기가 가지고 있는 생활비 전부를 넣었느니라.” 무슨 말씀입니까? “너희들 내가 다 보고 있으니 헌금 제대로 해라!”입니까? “헌금 많이 해라”입니까?
그건 아니겠죠. 부자들은 풍족한 중에 넣었다는 말은 자기 생활을 하면서 남은 여분, 그중에서도 일부만 떼어서 헌금했다는 의미입니다. 그래서 이들은 헌금하고 나서도 자신들의 삶에 전혀 영향을 받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과부는 가난한 중에서 자기가 가지고 있는 생활비 전부인 두 렙돈을 넣었습니다. 당시 렙돈은 가장 작은 가치의 동전입니다. 평행구절인 마가복음 12:42은 두 렙돈을 한 고드란트라고 밝힙니다. 고드란트는 노동자 하루 품삯인 데나리온의 약 1/64에 해당합니다. 어떤 학자는 100/1이라고 합니다. 하루 품삯을 10만원이라고 했을 때 요즘 돈으로 1,000원에서 1,500원 정도의 아주 적은 돈입니다. 이 적은 돈이 그녀에게는 생활비 전부였습니다. 누가는 짧은 본문 안에서 세 번이나 가난을 반복하여 이 여인이 얼마나 가난했는지를 강조합니다(2, 3, 4절). 그런데 이 가난한 여인은 자신의 생활비 전부를 헌금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본문의 의미가 무엇일까요? 이 여인과 서기관이 대조되는 문맥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이 두 사람은 “너희는 왜 사람들이 그리스도를 다윗의 후손으로 부르는지 아느냐? 너희는 왜 다윗이 자기의 후손으로 오는 그리스도를 나의 주라고 불렀는지 아느냐?”라고 질문했던 주님의 물음에 대한 답으로 등장합니다. 무엇이 서기관으로 하여금 높은 자리를 탐하게 했고 과부의 가산을 삼키는 삶을 살게 했습니까?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반대로 가난한 과부가 자신의 생활비 전부를 드릴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일까요? 하나님을 아는 바른 지식과 은혜에 대한 바른 감사의 마음을 갖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본문의 의도가 거기에 있습니다.
그녀를 향한 주님의 칭찬은 헌금의 액수가 아닙니다. 자신의 전부를 드렸기 때문입니다. 헌금은 하나님께 우리를 드리는 행위입니다. 하나님을 향한 나의 신앙고백을 담고 사랑을 담고 마음을 담고 주의 몸 된 교회를 향한 마음을 담아서 드리는 대표적인 종교 행위가 헌금입니다. 우리는 모르지만, 하나님은 우리의 삶과 예배와 헌금을 보고 우리가 하나님을 어떻게 믿고 있으며 어떻게 대하고 있는지를 아십니다.
여기서 잘 생각해야 합니다. 왜 돈이 필요하지 않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헌금을 요구하실까요? 하나님이 받고 싶은 것은 헌금의 액수가 아니라 헌금을 드리는 우리의 마음과 그 마음에 담긴 우리 자신입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으신 우리를 받고 싶어 하십니다.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영원토록 그를 즐거워하는 인생의 본분을 다하는 우리의 삶을 받고 싶어 하십니다. 하나님의 눈에는 다른 어떤 모습보다 헌금하는 우리의 마음에 그런 모습이 보입니다. 우리는 모릅니다. 헌금하는 사람의 생각과 동기와 목적을 모릅니다. 하나님은 다 아십니다. 그래서 서기관들의 탐욕과 외식을 대조하기 위해 가난한 과부를 등장시키고, 부자들의 헌금과 그녀의 헌금을 대조하십니다.
하나님께서 당신의 독생 성자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주셨습니다. 주님은 아버지의 뜻에 순종하여 십자가에서 우리를 위해 피 흘려 죽으셨습니다. 성령님은 성부와 성자에게 보냄을 받아 우리 안에 계시면서 우리를 인도하고 계십니다. 삼위 하나님께서 이런 은혜를 베푸시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죄와 사망 가운데 있는 우리를 구원하여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하나님과 생명의 교제를 나누는 참된 삶을 주시기 위해서입니다. 하나님은 그런 삶을 살면서 자신을 하나님께 사랑의 대상으로 내어드리는 우리를 원하십니다. 하나님은 그렇게 영과 진리로 예배하는 자와 자신의 삶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는 자들을 찾으십니다. 내가 가지고 있는 그 무엇을 드리는 정도가 아니라 자기 자신을 기꺼이 하나님께 드리는 자를 찾으십니다.
주님의 눈에 가난한 과부의 헌금에 그런 삶과 마음이 보였습니다. 남들은 다 좋은 것 가지고 와서 헌금합니다. 그러나 이 여인에게는 다른 사람과 비교하면 너무나 초라한 두 렙돈 밖에 없습니다. 내세우지도 못하고 자랑할 것도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은혜만 바라고 나와서 자신의 전부를 드립니다. 전부를 드리면 무엇을 먹고삽니까? 그녀에게는 하나님께서 채워주신다는 믿음이 있었습니다. 그녀는 하나님을 사랑했습니다. 하나님을 갈망했습니다. 그 사랑과 그 갈망으로 자신을 드렸습니다. 주님은 하나님을 향한 그녀의 마음을 아십니다. 그래서 말씀하십니다. “네가 너의 전부를 드렸구나. 가난하지만 네가 참으로 부요한 자로구나”
주 안에서 사랑하는 여러분, 이제 우리는 이 짧은 본문의 말씀 앞에서 자신을 향해 물어야 합니다. “나는 하나님께 자신을 드리고 있는가? 나는 하나님께 무엇을 드리고 있는가?” “내 삶에 하나님은 어떤 의미인가? 어느 정도의 가치인가? 하나님을 향한 나의 사랑은 어느 정도인가?” 하나님은 우리가 얼마나 부자가 되고 어떤 업적을 남기고 얼마를 바치냐에 관심을 두지 않습니다. 우리 자신에 관심이 있습니다. 엡 1:3-6을 보십시오. “찬송하리로다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을 우리에게 주시되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이는 그가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우리에게 거저 주시는 바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송하게 하려는 것이라” 넘어가서 12절입니다. “이는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전부터 바라던 그의 영광의 찬송이 되게 하려 하심이라” 그리스도 안에서 그의 영광의 찬송이 되는 것, 우리에게 그저 주어진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의 영광을 찬송하는 삶, 하나님은 이렇게 살아가는 우리를 받고 싶어 하십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이런 계획을 알고 그 앞에서 가난한 마음과 상하고 애통하는 심령과 의에 주리고 목마른 마음과 온유함과 청결한 마음과 영과 진리로 하나님을 예배하는 우리를 보고 싶어 하십니다. 부자들의 헌금에는 그런 마음이 담겨 있지 않았습니다. 그런 신앙의 고백이 담겨 있지 않았습니다. 가난한 과부가 드린 두 렙돈에는 그런 마음이 가득 담겨 있었습니다.
여러분이 이 과부라면 하나님을 사랑하시겠습니까? 가진 것이 두 렙돈 밖에 없어도 하나님을 사랑하시겠습니까? 그래도 “내 인생은 왜 이렇습니까?”라고 원망하지 않고 하나님을 향한 사랑과 감사를 담아 여러분 자신을 하나님께 드릴 수 있겠습니까? 이 과부에게 하나님은 있어도 되고 없어도 되지만 있으면 더 좋은 선택사양이 아니었습니다. 그녀에게는 하나님이 전부였습니다. 그녀는 자신에게 두 렙돈밖에 주시지 않는 하나님을 사랑했습니다. 그런 하나님께 자신의 전부를 드렸습니다. 오늘 우리는 어떻습니까? 하나님이 자기 삶의 전부가 아니라 선택사양이 되어 있는 분들은 없습니까? 예수님을 사랑하지 않으면서 믿는다고 하는 사람,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으면서 믿는다고 하는 사람은 없습니까? 서기관들이 그랬습니다. 바리새인들이 그랬습니다. 이들은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으면서 사랑한다고 했습니다. 이들은 하나님이 전부가 아니면서 전부라고 고백했습니다. 이들은 하나님을 모르면서 안다고 했습니다. 이들은 하나님께 드린다고 하면서 하나님을 모독하고 있었습니다.
아주 오래전입니다. 봉고차를 몰고 다니던 때가 있었습니다. 누가 저에게 자신이 타던 승용차를 가지고 가서 타라고 하셨습니다. 차가 오래되어서 새 차로 바꾸려고 하는데 자신이 타던 차를 중고로 처분하지 않고 목사님 드릴 테니 봉고 타고 다니지 말고 이 차를 타라고 했습니다. 그분은 저를 사랑하고 위해서 그렇게 말했는지 모르겠지만 저에게는 그렇게 들리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정중하게 거절했습니다. 하나님이 돈을 주셔서 엑센트를 사서 타고 다녔습니다. 가끔 유튜브로 다른 교회에 다니는 교우가 제 설교를 듣고 있다는 소리를 듣습니다. 만약, 그분이 “목사님 고맙습니다. 늘 목사님 설교를 듣고 있습니다. 감사합니다. 은혜 많이 받고 있습니다. 이것 드시고 힘내십시오”라고 하면서 자기 집 냉장고에 먹다가 남은 과일을 가지고 왔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고마운 사람에게 감사한 사람에게 사랑하는 사람에게는 그렇게 하지 않습니다. 그건 감사가 아니라 모독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하나님을 그렇게 대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드리는 삶이, 우리가 드리는 신앙의 고백이 냉장고에서 먹다 남은 처리하기 곤란한 과일, 오래 타다가 처분이 곤란한 승용차 정도일 수 있습니다. 본문에 나오는 부자들의 헌금이 그랬습니다. 그들은 풍족한 중에서 자신들이 쓰고 남은 것을 드렸습니다. 하나님은 상한 마음과 가난한 심령과 온유한 삶의 태도와 의에 주리고 목마른 마음을 가지고 하나님을 찾는 우리를 원하십니다. 두 렙돈을 드린 과부는 그 마음이 있었습니다. 그 신앙이 있었습니다. 그 사랑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녀를 칭찬하십니다. “네가 잘하였다. 내가 너를 안다.”
한때 한국교회가 정말 많이 불렀던 노래가 있습니다. “나 주님의 기쁨 되기 원하네. 내 마음을 새롭게 하소서 새 부대가 되게 하여 주사 주님의 빛 비추게 하소서. 내가 원하는 한 가지 주님의 기쁨이 되는 것, 내가 원하는 한 가지 주님의 기쁨이 되는 것” 우리가 정말 하나님의 기쁨이 되기를 원합니까? 혹시 찬양은 그렇게 하면서 정작 삶에서는 하나님이 원하지도 않는 것 드리면서 “이거라도 받으세요”라고 하면서 하나님을 모독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가난하고 병들어도, 힘들고 어려워도 주님의 기쁨이 되는 저와 여러분 되기를 바랍니다. 부요하고 건강해도 자기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르는 저와 여러분, 세상을 사랑하고 즐기는 마음을 하나님께 돌려서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주님의 영광을 위해 사는 성도가 되기를 바랍니다.
우리 앞에 두 길이 있습니다. 한 길은 서기관의 길입니다. 자기를 높이는 길. 큰 소리로 헌금하는 길. 사람의 시선과 인정을 갈망하는 길. 약자의 삶을 빼앗는 길. 가면을 쓰고 길게 기도하는 길. 입으로는 그리스도를 고백하지만, 손과 발은 그분과 정반대로 가는 길. 그 길의 끝은 다른 사람보다 더 엄중한 심판입니다. 다른 한 길은 가난한 과부의 길입니다. 자기를 비우는 길. 침묵 가운데 두 렙돈을 드리는 길. 누구의 시선도 의식하지 않고 오직 그분 앞에서 자기 삶 전체를 드리는 길. 자기를 단번에 드리신 영원한 대제사장의 마음을 닮은 길. 이 길의 끝은 영생과 주의 인정입니다.
이 두 길의 차이가 어디서 시작됩니까? 행동에서 시작되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에서 시작됩니다. 자기를 비우신 다윗의 주, 자기를 단번에 드리신 영원한 대제사장이신 그리스도를 아는 자만이 가난한 과부의 길을 갈 수 있습니다. 그분을 자기 욕망으로 각색한 자, 그분을 입으로만 고백하고 마음으로는 무릎 꿇지 않은 자는 서기관의 길을 갈 수밖에 없습니다. 주님의 십자가 앞에서 하나님의 사랑과 그리스도의 은혜를 깊이 경험할 때만 이 길을 갈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부딪쳐 올 때 우리의 헌신이 가능합니다. 자기를 단번에 드리신 주님의 은혜가 나를 사로잡을 때 우리 자신을 드릴 수 있습니다. 그 은혜와 사랑으로 서기관의 길에서 돌이켜 가난한 과부의 길을 갈 수 있는 저와 여러분 되기를 소망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