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불교의 원류를 찾아서] 101. 공현석굴
1굴 외벽 大佛 미소 모든 번뇌 소멸시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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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현석굴 大佛의 미소> |
사진설명: 공현석굴 1, 2굴 사이 외벽에 있는 대불(大佛)의 천진한 미소를 보고 있노라면 절로 환희심이 난다. 훼손된 것이 안타까울 따름이다. |
2002년 10월8일. 용문석굴을 보고 난 뒤 백마사에 들렀다. 중국 최초의 사찰 백마사, 백마사에 있는 섭마등스님과 축법란스님의 봉분탑, 그리고 낙양 제일의 건축물인 제운탑 등을 찾아 일일이 참배했다.
낙양 시내에서 점심을 먹고, 정주와 낙양 중간지점에 있는 공현(鞏縣)석굴로 발걸음을 옮겼다. 시내를 벗어나 약간 높은 언덕에 올라가 낙양을 돌아보았다. 화려한 과거의 영광은 보이지 않고, 이제는 하남성 중심 도시도 - 현재 정주가 하남성 성도(省都)다 - 아닌, 자그마한 도시 낙양이 그곳에 있었다.
주변 들판엔 옥수수 대를 베어낸 논, 밭들이 끝없이 펼쳐지고, 들판 여기저기엔 옥수수 대를 태우는 연기가 솟아오르고 있었다. 낙양을 보며 회상에 잠겨있는데, 안내인 방호씨가 손가락으로 ‘영녕사 9층 목탑 터 발굴지’를 가리켰다.
영녕사 9층 목탑 발굴은 몇 년 전에 이미 끝난 상태, 유적을 보호하기 위한 포장이 위에 덮여있었다. 포장을 보는 순간 낙양에 불교중심지를 건설하고자 노력한 불도징스님(佛圖澄. 232~348)스님이 떠올랐다.
중앙아시아 쿠차에서 태어난 스님은 ‘오호십육국시대’(304~439)를 풍미한 스님들 가운데 단연 주목되는 고승이다. 부도징(浮圖澄)으로도 불리는 스님은 북인도 카슈미르 등지에서 수학하고, 310년 낙양에 도착했다. 스님이 도착한 때는 마침 회수 이북 화북지방 전역이 전쟁터로 돌변한 시기, 그럼에도 스님은 여러 가지 신이(神異)를 시현(示現)하며 불교에 대한 관심을 높였고, 기반을 다져나갔다.
특히 화북지방을 일시 통일한 후조(後趙. 319~351) 석륵(石勒. 274~333) 왕의 신임을 얻어 20년 이상 그의 고문으로 활동했다. 스님은 자신의 주술적 능력을 이용, 여러 분야에서 업적을 쌓았다. 비를 내릴 수 있는 능력으로 북방의 농민들에게 커다란 은혜를 베풀었으며, 예언 능력으로 군사적 전략과 전술 수립에 기여, 많은 전쟁을 승리로 이끌기도 했다. 이러한 스님의 활동으로 불교는 화북지방에서 크게 확산됐으며, 스님 또한 신이를 보이는 것이 불교에 유익하다고 생각했다.
석륵왕을 이은 석호왕(石虎王)으로부터도 깊은 존경을 받았던 스님은 ‘폭군’으로 평가되는 왕을 교화, 그때까지 허용되지 않았던 한인(漢人)의 출가가 가능하도록 했다. 석호왕이 언젠가 “불법(佛法)이 무엇인가” 묻자, 스님은 “죽이지 않는 것이 불법”이라고 답변했다. 그러자 석호왕은 “천하의 주인으로 형벌과 살생에 의존하지 않고 나라를 다스릴 수 없으며, 살생하지 마라는 계를 이미 위반했는데, 그래도 부처님을 섬기면 복 받을 수 있는가”하고 재차 물었다.
“죄 있는 사람을 죽이지 않을 수 없으며, 악한 사람은 형벌을 주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군주가 포악하여 자의적으로 죄 없는 사람을 해친다면 그가 비록 불법을 따른다고 해도 피할 수 없는 재앙과 화를 당하게 된다”고 스님은 답변했다. 불도징스님은 이처럼 살생을 금하는 교리를 강조해 폭군을 교화시켰다.
낙양 떠나며 ‘위대한 고승’ 불도징스님 추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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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현석굴 전경. > |
사진설명: 사진 속의 석굴은 1, 2굴. 1, 2굴 사이 외벽에 대불(大佛)이 보인다. |
불도징스님이 한 일은 이것만이 아니었다. 신통력으로 불교가 민중 속에 스며들게 하는데 크게 기여한 스님은 38년 동안 893개의 사찰을 건립했고, 수 백 명의 제자를 육성, 중국불교 발전의 토대를 닦았다.
수많은 문하생 가운데 도안(道安), 축법태(竺法汰), 법화(法和), 법상(法常)스님 등은 남북조시대(439~589)를 대표하는 스님으로 성장, 중국불교 확산에 크게 기여했다. 그렇지만 “지금 낙양에서 불도징스님의 흔적은 거의 없는 것(안내인 방호)” 같았다.
차를 타고 공현석굴로 달려갔다. 비옥한 황토평야를 1시간 30분 정도 달리니 저 멀리 공현석굴이 보였다. 용문석굴에 버금가는 공현석굴은 낙양문화권에 속하는, 북위 이래의 대표적 유적이다. 대력산(大力山) 남쪽 기슭에 자리한 공현석굴은 5개의 굴로 이뤄져있다. 입장료를 내고 안으로 들어가니 단아한 절벽 여기저기에 굴이 뚫려있다. 1굴과 2굴 사이에 위치한, 사진 속에서 많이 보던 마애삼존대불과 천왕상이 천진한 미소로 반겨준다. 대불 앞, 잔디 깔려진 마당에 서서 삼배를 올렸다.
공현석굴은 용문석굴에 비하면 턱없이 작은 규모. 자세히 보면, 328개의 작은 감실에 불상이 빼곡하게 새겨진, 작지만 큰 석굴이 바로 공현석굴이다. 그러면 공현석굴은 언제부터 개착되기 시작했을까. 동국대 문명대 교수에 따르면 “북위가 낙양으로 수도를 옮기고, 용문석굴을 본격적으로 개착하기 시작한 직후인 500년경으로 추정”된다.
개착연대를 알려주는 가장 오래된 기록이 제4굴 외벽 119감 아래쪽에 있는 ‘후위문제고 희현사 비명(后魏文帝故希玄寺碑銘)’인데, 여기에 “북위 효문제(재위 471~499)가 가람을 창건했다”는 기록이 보이기 때문이다. 비문이 비록 효문제 때보다 200년 후인 당나라 용삭연간(龍朔. 661~663)에 새겨진 것이지만, 내용은 크게 틀리지 않을 것으로 문교수는 분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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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설명: 공현석굴에 있는 다양한 표정의 불, 보살상들. |
창건 이후 공현석굴엔 많은 불상이 계속 조성됐다. 그러다 당나라 때 석굴의 명칭이 ‘희현사’에서 ‘공현정토사’로 바뀌게 된다. ‘당고선대덕연공탑명(唐故禪大德演公塔銘. 802)’에 “공현정토사에 이르렀다”는 구절이 보이고, 장흥 3년(932)에 쓰여진 존승경당명문(尊勝經幢銘文)에 ‘유(維) 대당국(大唐國) 낙경(洛京) 하남부 공현정토사’라는 구절이 나온다는 점에서 그렇다.
물론 1096년에 세운 ‘중수(重修) 대력산 석굴 시방정토사(十方淨土寺) 주지 보월대사 비명’엔 ‘대력산석굴 시방정토사’로, 명나라 때인 1494년에 만든 ‘중수 대력산석굴 시방정토선사(十方淨土禪寺) 기(記)’엔 ‘선(禪)’자가 첨가된 긴 이름으로 나온다. 그래서 “최근엔 간략하게 ‘공현석굴’로 부르고 있다”고 안내인 방호씨가 옆에서 열심히 설명했다.
5개의 굴과 천불감(千佛龕) 1개, 소불감(小佛龕) 328개로 구성된 공현석굴은 서구(西區), 중구(中區), 동구(東區)로 구분된다. 서구엔 1, 2굴이 있고, 중구엔 1977년 발견된 40개의 작은 불감이 있으며, 동구엔 3, 4, 5굴이 각각 있다. 서에서 동으로 따라가며 1, 2, 3, 4, 5굴로 번호를 붙여놓았다. 손전등을 들고 계단을 내려갔다.
1굴과 2굴 사이 외벽에 있는 인왕상(서쪽 상 높이 3.4m. 동쪽 상 높이 3.46m)과 삼존불입상이 눈에 들어왔다. 들어오다 삼배 드린 부처님들인데, 가까이서 보니 새롭게 보였다. 삼존불을 중심으로 인왕상이 호위하고 서있는 모습으로, 동쪽 인왕상은 파손되고, 가운데 삼존대불 중 좌, 우 협시불도 훼손이 심한 상태였다.
삼존대불 중 가운데 본존불의 왼손은 파손되고 오른손도 손목부분까지 없는 상태지만, 상호(相好)의 미소는 일품이었다. 가만 보고 있노라면 절로 환희심 나게 만드는 미소였다. 미소에 끌려 한참동안 움직이지 않고 부처님을 쳐다보았다. 정신을 차리고 전체를 바라보았다. 높이 5.3m에 달하는 본존불은 “커다란 육계에 이목구비가 선명, 수려하고, 법의(法衣) 자락이 계단식으로 정연하게 조각된 매우 뛰어난 불상”이었다.
드디어 1굴속으로 들어갔다. 손전등을 들고 이리 저리 비추니, 빛이 가는 곳마다 화려한 조각들로 꽉 채워져 있다. 중앙의 사각 돌기둥(石柱)를 포함, 석굴 전체가 불국토의 장엄함을 보여주듯 화려하기 그지없다.
5개굴로 구성 … 세밀한 조각에 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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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설명: 공현석굴에 있는 다양한 표정의 불, 보살상들. |
가운데 석주의 정면에 있는 사각형 감실엔 1불, 2보살, 2제자로 이뤄진 ‘5존 불상’이 새겨져 있다. 부드럽고 우아한 얼굴을 한 본존, 2보살과 2나한, 광배 주변의 비천들, 대좌의 사자, 역사상과 신중들 모두가 인간의 솜씨가 아닌 것 같아 보였다. 빼어난 조각이었다.
그림도 아닌, 돌로 이렇게 아름다운 ‘불국토’를 만들 수 있다는데 정말 놀랐다. 감탄을 연발하자 안내인 방호씨가 “정신 차리라”는 듯 옆구리를 찔렀다. 그래도 감탄은 계속 나왔다.
서벽 제2감 오른쪽에 있는 비천상은 일품이었다. 돈황에서 본 비천상과도 다르고, 병령사 석굴에서 친견한 비천상과도 틀렸다. 맥적산 석굴, 용문석굴의 비천상과도 판이했다. 공현석굴만이 보여줄 수 있는 비천상이었다. “돌로 어떻게 저렇게 정교하게 새길 수 있을까” 싶을 정도로 세밀했다.
옷자락은 바람에 너울대고, 앞으로 뻗은 두 팔은 좌우로 흔들리는 듯 했다. 휘날리는 옷자락 밑에 있는 두 발 역시 움직이는 듯, 동적(動的)이면서 우아한 자태는 보는 이를 꼼짝 못하게 만들었다. 비천상 주변의 구름도 둥둥 떠가는 듯이 보였다.
특히 1굴 남벽의 예배행렬도를 보는 순간 벌어진 입이 다물어지지 않았다. 입구 문 좌우에 각 3단으로 이뤄진 서쪽, 동쪽 행렬도의 내용이 각기 달랐다. 서쪽의 행렬도는 황제가 수많은 군상(群像)들을 인솔하고 있고, 동쪽은 황후가 많은 사람들을 인솔하는 모습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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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설명: 낙양~대동~북경 위치도 |
북위 황실의 예불풍속을 생생하게 보여주는 일종의 ‘풍속조각(風俗彫刻)’이었다. 유마거사와 문수보살이 ‘불이(不二) 법문’을 주고받는 장면도 1굴 동쪽 벽에 새겨져 있었다. 감탄만 연발하다 2, 3, 4, 5굴을 일별하고 나오니 여전히 얼떨떨했다.
석굴 앞뜰엔 잔디가 심어져 있고, 꽃나무가 알맞게 자라고 있었다. 잔디에 앉아 있으니, 조금 전에 본 1, 2, 3, 4, 5굴 조각들의 영상이 파노라마처럼 지나갔다. 표현하기 힘든 ‘환희심’과 ‘감동’이 가슴 속에 가득했다.
소림사로 가는 차안에서도 공현석굴의 부처님과 보살상만 아른거렸고, 비천이 연주하는 천상악(天上樂)이 들려오는 듯 했다.
중국 = 조병활 기자. 사진 김형주 기자
[출처 : 불교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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