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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수’ 양수경에게 돌을, ‘엄마’ 양수경에겐? [유진모 칼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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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진=sbs '불타는 청춘' 화면 캡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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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디어파인=유진모의 무비&철학] 지난 21일 방송된 SBS ‘불타는 청춘’이 지난주보다 0.4%포인트 상승한 7.3%(전국, 닐슨코리아)의 시청률을 기록하며 동시간대 부동의 1위를 고수했고, 그 일등공신으로 이날 처음 합류한 양수경의 힘이 컸다고 다수의 매체가 전했다. 방송당시 양수경은 포털사이트 검색어 1위를 내달렸고 다음날에도 여전히 이름을 올렸다.
양수경은 1988년 만 23살에 데뷔해 각종 차트와 상을 휩쓸어 같은 기획사(당시 예당기획)의 간판스타였던 최성수와 함께 발라드 계열의 남녀 톱가수 대열에 나란히 올랐을 뿐만 아니라 국외의 유력 가요제에서 수상하며 널리 이름을 떨쳤다. 그리고 소속사 대표(고 변두섭 회장)와 1998년 결혼하며 가요계를 떠나 전업주부로 살다 지난해 신곡 ‘사랑 바보’를 발표하며 연예계로 되돌아왔다.
필자는 데뷔 때부터 지속해서 꽤 가깝게 지냈기에 그녀에 대해 좀 많이 안다고 할 수 있는 친지 이외의 몇 안 되는 사람 중 하나다. 2015년 말 그녀는 필자에게 복귀결심을 털어놓고, 소속사 선정까지 여러 가지 고민을 나눴다. 그녀의 가장 큰 걱정거리는 상장 폐지된 예당컴퍼니 주식과 관련해 쏟아질 비난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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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진=여성동아 제공 |
일단 ‘가수’ 양수경으로서 그녀는 뭇매를 달게 맞아야 마땅하다. 속사정이 어떻건, 그동안 그녀가 얼마나 괴로웠고, 현재 얼마나 힘들건, 선의의 피해자들의 아픔에 대한 도의적 책임을 나눠 짊어지는 게 당연하다.
그녀가 그걸 몰라서 ‘주식’을 언급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입에 올려봐야 쏟아질 건 비난뿐이고, 메아리로 되돌아올 건 가시 돋친 부메랑뿐일 테니 그렇다. 보도나 소문과 달리 지금 빈털터리라 경제적으로 엄청나게 어렵다며, 하소연하고 눈물을 흘려봐야 다 ‘코스프레’로 비치고, 오히려 욕과 매질의 강도는 더 심해질 것이 뻔하다는 걸 알기 때문이다. 그리고 진실은 언젠간 밝혀진다는 믿음이며, 더불어 스스로 목숨을 끊은, 자신이 낳은 유일한 자식 준호(17) 군의 아버지인 고 변 회장에 대한 마지막 예의이기도 하다. 물론 아쉬운 소리를 하는 게 싫은 특유의 자존심도 작용한다.
양수경의 ‘괴로움’은 비단 개인적인 비극에 국한된 게 아니다. 자의건 타의건 예당컴퍼니 때문에 양산된 피해자가 수두룩하지만 조금이라도 보탬이 될 능력이 거의 전무하다는 것이다. 억울함을 호소하는 건 사치라고 이미 포기한 그녀다. 그래서 언제부턴가 입을 닫게 됐다.
1980~90년대의 가요산업 시스템은 지금과 확연히 달랐다. 기획사는 법인사업체가 아니라 거의 개인사업체였다. 대표가 로드매니저 일까지 도맡아하는 기획사가 다수였다. 홍보의 매개체라 할 방송 프로그램 및 매체라 봐야 그리 많지 않았다. 따라서 뭣보다 대표매니저의 기획력과 홍보력이 큰 힘을 발휘할 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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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변 회장은 그런 기획력과 홍보력의 귀재로 통했다. 자본금 20만 원으로 시작한 예당기획을 코스닥 상장사로 키웠을 정도다. 그는 군소기획사를 전전하던 양수경의 가능성을 알아보고 과감하게 스카우트해 비싼 가사와 곡을 사서 데뷔시켰고, 예상은 적중했다.
‘불타는 청춘’에서 밝혔듯 그녀의 서구적인 미모와 실제 성격은 많이 달라 좀 촌스럽기까지 하다. 대인관계가 서투르고, 자존심은 강해 연예계의 체질에 쉽게 적응하지 못했다. 그래서 변 회장은 로드매니저를 구하는 대신 그녀의 친동생 미경 씨(2011년 사망)를 개인매니저로 붙였다.
그녀는 가장 가까운 아버지, 미경 씨, 남편을 떠나보냈다. 그 중엔 자살도 있다. 준호 씨 외에도 고 미경 씨가 낳은 아들 하늘(21) 씨와 딸 채영(19) 양까지 입양해 친자식으로 키우고 있다.
어릴 때부터 말수가 적었고, 사람들과 적극적으로 어울리지 못하는 성격이었던 그녀는 남편이 떠난 후 대인기피증이 더욱 심해졌고 공황장애까지 생겼다. 1990년 2월 약물과다복용으로 세상을 떠난 장덕은 평소 그런 정신적 불안감으로 불면증 우울증 등이 심해 수면제 등의 약을 상복한 바 있다.
하와이에서 세 자식과 살아온 양수경은 그동안 그야말로 칩거생활을 했다. 장덕이 한때 몇 달간 집안에만 틀어박혀 은거한 것과 비슷했다. 양수경은 어려서부터 혼자 있는 데 익숙했다. 이젠 나이가 나이니만치 술이 있으니 더욱 심심할 일이 없었다. 필자는 1994년 양수경이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열린 ‘94 백야축제’에 참가해 그랑프리를 수상했을 때 동행취재하며 그녀와 미경 씨 등과 함께 야외에서 ‘하얀 밤’을 새워가며 스미르노프(보드카)를 마신 적이 있다.
전남 순천에서 태어난 양수경이 청소년기를 보낸 곳은 서울 상계동이다. 지금은 아파트가 빼곡 들어차있는 상계동 일대는 1970~80년대 초만 하더라도 ‘달동네’였다. 그녀의 집안의 경제력이 그다지 넉넉하지 못했다는 의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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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는 대학을 졸업하고 별로 사회생활을 해볼 겨를도 없이 가요계에 뛰어들었기에 세상물정에 그리 밝지 못하다. 그리고 데뷔하자마자 ‘신데렐라’가 됐으니 나중에도 욕 안 먹고 사는 요령을 제대로 배울 겨를조차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요리 실력이 그리 나쁘지 않았고, 또 스타라고 해서 요리하는 걸 터부시하지도 않았다. 필자는 타 매체 기자 몇 명과 함께 1989년 일본 도쿄에서 열린 ‘도쿄가요제’에 출전하는 양수경과 동행한 바 있다. 양수경과 스태프는 물론 기자들도 돈을 아끼기 위해 라면과 쌀을 사서 숙소 안에서 취사를 했는데 매번 양수경이 손수 밥과 반찬을 만들어줬던 기억이 생생하다. 물론 러시아도 그걸 믿고 갔었고, 믿음은 틀리지 않았다.
처녀 때 이미 살림솜씨가 심상치 않았고, 후에 17년간 세 아이의 밥을 책임진 엄마가 ‘불타는 청춘’을 통해 무냉국으로 친구들을 사로잡은 건 지극히 당연한 일이다.
‘가수’ 양수경으로서 그녀는 입이 1000개, 혀가 1만개라 해도 할 말이 없을 것이다. 분명히 그녀는 고 변 회장의 아내이자 회사의 신용도 형성에 일조한 왕년의 인기가수였기 때문이다. 그녀가 의도했건, 그렇지 않은 ‘작전’이었건 언론을 통해 그녀는 주식으로 ‘떼돈’을 벌었다고 보도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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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진=sbs '불타는 청춘' 화면 캡처 |
많은 사람들은 결과를 중요하게 여기지만 그렇다고 과정이 무시돼선 정의와 질서가 무너진다. 현재 그녀가 어렵다고 수없이 되뇌어도 과정에서의 그녀의 도덕적 책임은 묵과될 수 없는 이유다. 그녀가 ‘가수’ 양수경이자 예당컴퍼니 오너의 아내란 원죄다. 언젠가 그녀는 하고 싶었던 말을 다 쏟아낼 날을 만날 것이다. 물론 심판은 대중이 내리고, 그녀는 공손히 받아들이면 된다.
그녀는 가수로서도 그동안 직무유기를 했다. 일각에서 ‘원조 디바’란 호들갑을 떨 듯 한때 그녀는 절정의 인기가수였다. 수많은 히트곡을 낳았고, 지금도 그 노래들은 많은 사람들의 추억과 향수를 자극하는 현재진행형이기도 하다. 그런데 혼자만 잘 먹고 잘살겠다고 팬들을 저버리고 머나먼 타국으로 떠났다.
‘가수’ 양수경이 대중에게 매를 맞을 이유는 충분하다. 그러나 ‘엄마’ 양수경은 다른 엄마들과 다를 바 없었다. 아니, 젊은 나이에 석연치 않게 세상을 떠난 친동생의 자식 둘까지 책임져 슬하에 둔 ‘양수경 엄마’는 좀 달랐다.
신혼 때 본 이래 10여년 만에 처음으로 고 변 회장의 빈소(2013)에서 만난 데 이어 지난해 두 번째 만난 양수경은 많이 변해있었다. 내면은 보이지 않았지만 알 수 있었다. 지칠 대로 지쳤고, 많이 쇠약해졌으며, 뭔가 굉장히 두려워하는 눈치였다. 물론 그게 대중의 의혹과 비난에 대한 면죄부는 될 수 없다. 오직 진실만이 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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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진=sbs '불타는 청춘' 화면 캡처 |
겉으로 변한 건 흡연이었다. 50살 넘은 여자가 담배 피우는 게 뭐 그리 큰 흠일까 싶었지만 그녀는 흡연 땐 매우 조심스럽게 주변에 사람이 있나 눈치를 살폈다. 한때 ‘사모님’ 소리를 들으며 외제차를 탔지만 지금은 승용차가 없다. 소속사도 그리 넉넉하지 못한 눈치다. 방송복귀 전엔 거리낌 없이 대중교통을 이용했고, 복귀 후엔 택시 탈 수 있음에 감사한다고 했다.
처음엔 술을 ‘좀’ 마셨다. 그러나 방송을 시작하자 거의 입에 대지 않았다. 대신 밥을 많이 먹었다. 복귀하느라 나름대로 몸매를 만든다고 굶었더니 체력이 떨어진다고 했다. 겨울에 만난 그녀는 삼겹살 2인분에 이어 밥 한 공기를 된장찌개에 말아 뚝딱 해치웠다.
그리곤 휴대전화를 받았다. “준호구나. 엄마가 밥 안 차려줘도 잘들 먹고 있지? 뭐? 집세? 조금만 기다리면 밀린 거 한꺼번에 다 엄마가 해결해줄게. 걱정하지 마, 아들!”
며칠 뒤 ‘배운 지 얼마 안 됐다'던 카톡으로 새해인사 문자메시지가 왔다. 하와이고, 이사하는 중이라고. 지난 연말연시였다. 그녀의 휴대전화 앞자리는 아직도 011이다.
[출처 : 미디어파인 http://www.mediafine.co.kr/news/articleView.html?idxno=45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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