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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 3-4
일과 탈진, 그리고 회복 / 김근중 목사
월남전에 참전했던 쿠쉬너 소령(군의관)의 회고록에 이런 내용이 있습니다.
그는 1967년 월맹군의 포로가 되었습니다. 지독한 학대와 영양실조로 체중은 절반으로 줄었다. 그가 포로 수용소에 있는 동안 27명의 미군 중 10명이 죽어갔습니다. 죽은 병사 중 로버트라는 하사관이 있었는데, 그는 해병특공대 출신으로 억세고 이지적인 사람이었습니다 . 소령이 로버트 하사를 처음 보았을 때 빈사 상태의 다른 포로들에 비해 유난히도 생기가 넘쳐흘렀습니다. 체중은 40킬로 이하로 떨어져 수수깡처럼 말라 있었지만 눈은 빛나고 중노동을 잘 견뎌 냈습니다. 그것은 자유에 대한 희망 때문이었습니다. 월맹군측은 포로들을 마음대로 부리기 위하여 말 잘 듣는 미군 포로 몇 명을 석방시켜 주었습니다. 그리고는 다음번 석방자는 로버트가 될 것이라고 했습니다. 석방에 대한 희망이 로버트 하사로 하여금 모든 고통을 극복할 수 있게 하는 원동력이 되었던 것입니다. 이 희망은 육체적, 생물학적 한계마저 극복하게 하였습니다.
그러나 약속한 6개월이 되었지만 월맹군측은 그를 석방시켜 주지 않았습니다. 1개월을 더 기다렸으나 약속은 이행되지 않았습니다. 게다가 월맹군 장교의 태도는 더욱 냉담해졌습니다.
'다 틀렸구나!' 생각한 그는 심한 우울증에 빠지기 시작했습니다. 자신이 아무리 노력해도 소용이 없으며 앞으로도 소용이 없을 것이라고 믿게 되었을 때 그는 마침내 죽고 말았다. 이 이야기가 심리적 탈진의 상태를 잘 설명해 줍니다.
1. 탈진은 삶을 무력화시킵니다.
탈진의 영어 'burnout'은 '다 타서 없어진 상태' 말합니다. 기계나 전자가 모두 불타거나 로켓의 연료가 모두 소진된 상태를 말합니다.
심리학자 크리스티나 마슬락은 약이 다 달아진 건전지와 물이 다 증발한 주전자에 비유했습니다. 곧 탈진은 몸의 기력이 빠지고 마음의 극도로 쇠약해지고 영혼이 극도로 침체된 상태를 말합니다.
탈진의 원인은 육체적 피로와 정신적 스트레스와 영적으로 회의입니다.
탈진은 육체적으로 볼 때는 과로할 때 옵니다. 정신적으로 볼 때는 성취욕을 가지고 무언가 도전적으로 해 보려 하는데 안 되는 경우에 옵니다. 완벽을 향해 끊임없이 노력해 가는데 원하는 만큼 되지 않는 경우에 옵니다. 대인관계에서 자신은 모든 것을 남에게 주었지만 결국 더 이상 내어 줄 수 없게 될 때 옵니다.
심리학자 크리스티나 마슬락은 그런 상태를 물이 다 증발한 주전자와 약이 다 달아진 건전지에 비유했습니다. 영적으로는 신앙적인 열심을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더 이상 영적 기대감을 가질 수 없도록 하는 상황들 때문에 옵니다.
탈진 현상은 자주 피곤함을 느끼며 자신감을 잃어버리며 의욕을 상실하며 분별력을 상실하여 상식을 벗어난 행동을 하기도 합니다. 때론 조바심이 나기도 합니다. 사람들로부터 소외되어 있다는 생각이 들고 아무도 자신을 인정해 주지 않는다는 생각이 들어 외롭습니다. 망상증에 사로잡혀 자살 충동까지 느끼기도 합니다.
우리 나라 40대 남성의 사망률이 선진국에 비해 2~3배 되는 것은 과로와 스트레스와 우울과 탈진으로 인한 사망이 많아서 라는 것은 누구나 인정합니다. 탈진은 성공을 향해 달려가는 인생에 복병입니다. 인생에서 무장해제를 시키는 복병입니다. 인생에서 완전히 전의를 상실하고 무력하게 만드는 복병입니다.
서울 창동에 사는 46세 된 한 가장이 있었습니다. 아내와 11살 된 두 자녀를 두었습니다. 2,000년에 소규모 장난감 제조업을 시작했습니다. 2,003년부터 사업이 급격히 기울면서 빚이 눈덩이처럼 불어났습니다. 사업은 도산 위기에 있었고 송사까지 걸려 있었습니다. 며칠 전 두 아이가 심한 복통과 함께 구토를 했으나 건강보험료가 60만원이나 연체돼 병원에 가지 못하자 좌절은 극에 달했습니다.
지난 5월 31일 낮 12시쯤 가족과 즐거운 시간을 지내곤 했던 한강 둔치를 찾아 살아 보겠다는 의지를 다잡으려 했습니다. 밤이 깊어지자 이씨가 아무 말없이 강물로 걸어 들어갔습니다. 부인도 딸과 아들을 끌어안고 뒤 따랐습니다. 다음 아침에 한강 관리소 청원경찰이 발견했을 때 아버지와 아들은 이미 죽었습니다. 이것이 탈진의 결과입니다.
2. 우리는 탈진 환경에서 살아갑니다.
현재 우리는 탈진 할 수 밖에 없는 상황에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경제구조와 사회관념이 선진국형으로 넘어가는 과정에 있기 때문에 그 상황들 속에서 스트레스가 더 많아지고 탈진 현상이 더 두드러지게 나타날 수 밖에 없는 시대를 살아가고 있습니다. 현재 통계적으로 심리적 원인으로 인한 질병과 사고가 늘어나고 이혼과 자살이 늘어나는 것을 그 사실을 잘 대변해 줍니다.
매일 같이 일을 해야 합니다. 아침에 나가면 밤 늦게 돌아와야 합니다. 외부상으로는 주 5일만 근무한다지만 무언의 압력과 분위기와 경쟁 때문에 쉬는 날 없이 나갈 수 밖에 없는 실정입니다. 그렇게 일해도 진급이나 월급 인상은 커녕 잘리지나 않으면 다행입니다. 그렇게 벌며 살아도 저축되는 것은 없고 빚만 늘어 갑니다. 사업하는 사람들도 너무 같은 직종의 출혈 경쟁이 심해 일은 열심히 하는데 남는 것은 없습니다. 실패에 대한 두려움에 싸입니다. 남성 뿐 아니라 여성도 동일한 압박을 받습니다. 경제가 어려워 지면서 아내도 나가서 일하지 않으면 가장경제가 유지되지 않습니다. 이젠 남편들 눈치 때문에 나가서 일해야 합니다. 그 동안 사회에 나가 보지 않은 여성들이 사회 생활을 하면서 얼마나 갈등을 겪고 분노하는 현상이 일어납니까? 사회에 적응하는 과정에서 얼마나 많은 부작용을 낳고 눈물을 흘립니까? 집에 돌아오면 그래도 여성이 밥해야 되고 빨래해야 하고 청소해야 합니다.
가정 문제도 힘듭니다.
부모 문제와 부부 문제와 자식 문제로 정신적인 압박을 받습니다. 사회 구조가 가시적으로는 핵가족 제도에서 사는데 정서적으로는 대가족 제도 하에서 살아가고 있는 데서 일어나는 갈등. 여성의 권리가 높아지면서 사회 활동이 늘어나고 반면 남성들의 정서는 아직 전통적인 사고를 가지고 살아가는 데서 일어나는 갈등. 자녀들은 다양성을 인정하는 문화에서 살아가는 반면 부모는 침묵성을 유지하는 정신 사고를 가지고 살아가는 데서 일어나는 갈등. 집안 문제로 골머리 아픕니다. 학생들도 공부 때문에 미칩니다. 무한 경쟁구조 속에서 공부 못하면 못하는 대로 잘하면 잘하는 대로 스트레스 받으며 살아갑니다. 어른이든 학생이든 공통적으로 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 아마 이것일 것입니다. "아무리 해도 안 되는 데 나보고 어쩌란 말이여!"
거기에다가 교회 사역은 얼마나 힘듭니까?
주일 되면 모처럼 쉬어야 하는데 아침 일찍 일어나 아이들 데려와 가르쳐야지요. 오전부터 저녁까지 예배 드려야지요. 애찬 준비하고 치워야지요. 모처럼 행사가 있으면 일만 바가지로 해야지요 거기에다가 돈까지 내라고 합니다.
설문조사 결과에 의하면 교회 봉사를 할 때 가장 즐거울 때는 자기가 좋아하는 사람이 함께 봉사할 때이고, 가장 힘들 때는 알아주지 않을 때인데 거기에다가 자기 돈까지 투자해야 할 때라고 합니다. 돈도 돈이지만 사람들에게 궂은 소리 다 들어가면서 하려면 사역에 회의를 느낍니다. 아무리 잘하려 해도 여전히 더 많은 것을 요구하고 행복감이 없으니 당연히 넘어질 수 밖에 없습니다. 큰 교회는 큰 교회대로 작은 교회는 작은 교회대로 힘듭니다.
3. 이제는 휴식을 가져야 합니다.
탈진 현상의 원인이 육체적인 데서 왔든지 정신적인 데서 왔든지 영적인 데서 왔든지 그 영향은 인격의 전 영역에 미칩니다. 비록 육체적인 데서 왔다고 할지라도 그 현상이 정신적인 혼란과 영적인 침체를 함께 가져오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원인이 어디에서 시작되었든지 육체적 정신적 영적 휴식이 필요합니다. 이 휴식은 게으름과 구분해야 합니다. 휴식은 상처를 치료하는 효과를 가져오고 더 나은 노력을 위해 준비하는 효과를 가져옵니다.
육체적으로 자연과 더불어 휴식하는 것 필요합니다.
정신적으로도 사람들과의 이해관계를 떠나 여유를 가지고 휴식을 가져야 합니다. 그래서 내일 남자들이 서해안 해수욕장으로 야유회를 가려고 합니다. 영적으로도 고요한 중에 휴식하며 묵상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엘리야를 보십시오.
엘리야 시대에 이스라엘의 왕 아합과 그의 아내 이세벨이 하나님의 선지자들을 죽이는 핍박이 있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 핍박이 두려워서라도 바알과 아세라 신을 섬겼습니다. 때에 엘리야가 하나님의 감동에 의해 아합왕과 백성들을 갈멜산에 불러놓고 바알과 아세라를 섬기는 선지자 850인과 대결을 했습니다. 바알과 아세라가 참 신(神)인지 여호와 하나님이 참 신인지, 서로 자기 신에게 기도를 하여 불로 제단의 제물을 사르는 신이 참 신이라는 판결을 보는 대결이었습니다. 바알과 아세라신을 섬기는 선지자들이 먼저 큰소리로 자신들의 몸을 상하게 하면서 까지 종일 기도했으나 불이 내려오지 않았습니다. 엘리야가 제단에 물이 넘치도록 붓게 하고 하나님께 기도하니 불이 내려와 제물을 살랐습니다. 엘리야와 그 광경을 본 백성들이 바알과 아세라 선지자들을 잡아 모두 죽였습니다. 그리고 아합왕이 보는 앞에서 하나님께 7번 기도하자 3년 6개월 동안 오지 않던 비가 내리기 시작했습니다. 아합왕이 마차를 타고 이스라엘로 가는데 엘리야는 그 앞에서 이스라엘 성읍까지 달려갔습니다 (18:1-46). 이제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체험하여 돌아오고 아합왕도 여호와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보았으니 되돌아오고 이세벨도 그 소식을 듣고 돌이켰으리라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성에 들어가기도 전에 이세벨이 사환을 보내어 '반드시 엘리야를 하루 안에 잡아 죽이겠다'고 했습니다 (19:1-2). 엘리야는 무서워서 광야로 도망하여 로뎀나무 아래 쓰러져 "여호와여 넉넉하오니 지금 내 생명을 취하옵소서"하고 죽기를 구했습니다.
엘리야는 탈진했습니다.
육체적으로 피곤이 쌓였고 심리적으로 혼자라는 생각이 사로잡았고 영적으로 아무리 하나님에 대한 열심을 내어도 안 된다는 좌절감에 빠져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는 천사의 도움으로 떡과 물을 먹고 40일 동안 광야길을 걸어 호렙산에 이르렀습니다.
그 곳의 한 굴에서 기도하면서 하나님의 세미한 음성을 듣습니다 (19:1-14). 하나님은 "하사엘에게 기름을 부어 아람 왕이 되게 하고 예후에게 기름을 부어 이스라엘 왕이 되게 하고 엘리사에게 기름을 부어 너를 대신하여 선지자가 되게 하라"고 했습니다 (19:15-16).
이방 나라에, 타락한 이스라엘에, 언약 후손인 유다에 대한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고 있다는 암시입니다. 엘리야는 생명을 다해 이스라엘 구원 운동을 하려 했으나 끝이 없고 오히려 대적은 더 강해졌고 협력하는 사람은 없어졌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엘리야를 통한 이스라엘에 대한 하나님의 구원계획은 아직 실패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엘리야는 이 음성을 들으면서 하나님 일이 아직 실패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깨닫고 다시 일어났습니다.
우리가 살아가면서 탈진 위기에 빠질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다시 일어나야 합니다. 하나님 일은 실패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통해 이루시려는 일이 실패한 것 아닙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행복을 주시려는 일이 실패로 돌아간 것 아닙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서 떠난 것도 아닙니다. 산을 오르다가 넘어졌을지라도 산 아래로 떨어진 것이 아니라 중턱에서 넘어졌을 뿐입니다. 넘어진 자리에서 여유를 가지고 하나님을 찾으십시오.
예레미야29:13에 "너희가 전심으로 나를 찾고 찾으면 나를 만나리라"고 했고, 시편50:15에 "환난 날에 나를 부르라 내가 너를 건지리니 네가 나를 영화롭게 하리로다"고 했고, 이사야40:28-31에 "너는 알지 못하였느냐 듣지 못하였느냐 영원하신 하나님 여호와, 땅 끝까지 창조하신 자는 피곤치 아니하시며 곤비치 아니하시며 명철이 한이 없으시며 피곤한 자에게는 능력을 주시며 무능한 자에게는 힘을 더하시나니 소년이라도 피곤하며 곤비하며 장정이라도 넘어지며 자빠지되 오직 여호와를 앙망하는 자는 새 힘을 얻으리니 독수리의 날개 치며 올라감 같을 것이요 달음박질하여도 곤비치 아니하겠고 걸어가도 피곤치 아니하리로다"고 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