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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후 2: 17 순전함으로 ( 상 )
고후 2: 17 순전함으로 - 우리는 수 많은 사람들처럼 하나님의 말씀을 혼잡하게 하지 아니하고, 곧 순전함으로 하나님께 받은 것 같이, 하나님 앞에서와 그리스도 안에서 말하노라. ( 우리는 수다한 사람과 같이 하나님의 말씀을 혼잡하게 하지 아니하고 곧 순전함으로 하나님께 받은 것 같이 하나님 앞에서와 그리스도 안에서 말하노라. )
혼잡하게 한다는 원어(카펠루오)는 ‘장사한다, 품질을 떨어뜨린다, 부패시킨다’는 뜻이다.
예나 지금이나 똑같지만, 많은 거짓 교사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부패시키고 변질시키고 있다.
그러나 바울은 하나님에게서 온 자같이 또는 하나님께 받은 것같이 순전함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하나님 앞에서와 그리스도 안에서 증거로 제시하였다.
1] 우리는 수 많은 사람들처럼 하나님의 말씀을 혼잡하게 하지 아니하고,
'혼잡하게'에 해당하는 헬라어 '카펠류온테스'(*)는 행상인이 과일의 좋은 것을 맨 위에 놓아 전체가 좋은 것인 양 판매하는 '부도덕한 상행위'를 가리키거나 포도주에 물을 타 양을 많게 하여 질 낮은 포도주를 판매함으로써 '과도한 이익을 얻는 행위'를 가리킨다.
본 절에서는 후자의 의미로 사용되었다고 본다.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거짓 전도자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전파하여 개인의 이익을 도모하는 것과 하나님의 말씀의 질을 떨어뜨리는 것을 나타낸다(Barrett).
이것은 플라톤이 소피스트들을 가리켜 자신들의 지적 상품을 돈으로 파는 자들이라고 비판했던 것과 유사한 것으로, 거짓 사도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상품으로 팔아 자신들의 이익을 추구하며 그리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형편없는 것으로 만드는 행위를 시사하고 있다.
* 고후 11: 4, 13 – 4 만일 누가 가서 우리가 전파하지 아니한 다른 예수를 전파하거나 혹은 너희가 받지 아니한 다른 영을 받게 하거나 혹은 너희가 받지 아니한 다른 복음을 받게 할 때에는 너희가 잘 용납하는구나. 13 그런 사람들은 거짓 사도요 속이는 일꾼이니 자기를 그리스도의 사도로 가장하는 자들이니라.
2] 곧 순전함으로 하나님께 받은 것 같이,
거짓 전도자들의 모습과 극명하게 대조되는 바울의 복음 전파의 자세를 말하고 있다.
바울은 하나님의 말씀을 자의적으로 해석하지도 않고 사람에게 인기를 얻으려 하지도 않았다.
바울은 자기가 행하는 능력의 근원이 자기 자신이라고 생각하지 않았으며 오직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능력과 말씀만을 전하였다.
하나님께 받은 것같이라는 원어(호스 에크 데우)는 ‘하나님께로부터 온 자같이’라는 뜻인 것 같다.
3] 하나님 앞에서와 그리스도 안에서 말하노라.
바울의 모든 선교 행위는 하나님 앞에서와 그리스도 안에서 한 것이므로 조금도 개인의 이익이나 사심이 개입되지 않았다.
이것이 그가 육체가 아닌 하나님의 은혜로 행하는 것의 증거이며 그의 진실성(眞實性)의 증거이다.
* 고후 1: 12 - 우리가 세상에서 특별히 너희에 대하여 하나님의 거룩함과 진실함으로 행하되 육체의 지혜로 하지 아니하고 하나님의 은혜로 행함은 우리 양심이 증언하는 바니 이것이 우리의 자랑이라.
그는 말씀의 바른 일꾼이었고 모든 시대에 설교자의 좋은 본이 되었다.
말씀의 일꾼들은 어떤 환경에서도 변질하거나 타협하지 말고 또 하나님의 말씀을 부패시키지 말고 순수하게, 순전하게 전해야 한다.
4] 우리는 그리스도의 향기 (고후 2: 1-17) : 박조준 목사
고린도에 있는 교회에 문제가 있었고 상태가 더욱 악화되어 가고 있었습니다. 교회는 여러 갈래로 나뉘어져 심지어 바울의 사도적 권위까지 부인하는 사람이 생기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사태를 개선하기 위해서 바울은 고린도를 잠시 방문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사태가 개선되기는커녕 오히려 더 악화되어 바울의 마음은 크게 상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매우 엄한 책망의 편지를 눈물을 흘리며 아픈 마음으로 써 보내게 된 것입니다.
바울이 고린도를 재차 방문하겠다던 약속을 이행하지 않은 까닭도 바로 여기에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이처럼 악화된 상태에서 바울이 고린도를 방문한다면 바울 자신도 그렇고 고린도에 있는 교인들에게 상처를 줄 것을 알았기 때문이었습니다.
본문을 통해서 우리가 느끼게 되는 것은 사랑하는 이들을 엄히 책망해야 하는 바울의 심정이 어떠했을까 하는 것입니다. 바울의 엄한 태도나 책망은 만부득이(萬不得已)한 일이었음을 발견하게 됩니다. 바울에게는 다른 방법이 없었습니다. 그렇게 할 수밖에 없는 어쩔 수 없는 상황에 처해 있었습니다. 어떤 사람은 언제나 남의 허물을 찾는 데 급급합니다. 그런 사람은 남을 비판하기에 바쁘고 그 말에는 독기가 서려 있고, 칼날이 서 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그런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바울은 지혜로운 사람이었습니다. 만일에 우리가 언제나 비판적이며 남의 허물만 찾고, 화를 내는 것이 거의 습관적이고, 쌀쌀하게 대하고 칭찬을 하지 않고 책망만 한다면 모처럼의 엄격함이 아무 효과가 없을 것입니다. ‘저 분은 늘 그런 걸’하고 받아들일 것입니다. 자주 하지 않다가 꼭 필요할 때 한 번 하는 책망이 효과적입니다. 사실 우리 그리스도인은 칭찬할 것을 찾아야지 비판할 것은 찾지 않아야 합니다. 바울은 고린도 교인들을 사랑으로 책망했습니다. 그는 일생을 통해서 단 한번이라도 다른 사람에게 상처를 주기 위해서 말한 적이 없었습니다. 가혹한 말을 듣고 마음이 아파하는 사람을 보고 쌔디스트적인 쾌락을 느끼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그러한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바울은 다른 사람에게 고통을 주기 위해서 책망하는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언제나 기쁨을 되찾아 주기 위해서 책망했습니다.
존 녹스는 세상을 떠나게 될 때 “내가 매우 엄한 말로 다른 사람에게 한 것도 그 사람에게 대해서도 언제나 그들의 인격에 대해서는 증오하지 않았다는 것을 하나님이 아신다”라고 말했다고 합니다. 우리가 죄는 미워하되 죄인은 사랑할 수 있습니다. 가장 효과적인 책망은 그 사람을 팔로 감싸고 하는 책망입니다. 노여움의 불꽃이 일고 있는 책망은 사람에게 상처를 주며 무서워하게 만듭니다. 그러나 사랑의 책망만이 상처받고 슬퍼하는 사람의 마음을 열어 놓을 수가 있습니다.
더구나 바울은 지배욕을 가지고 책망한 것은 아닙니다. 우리가 자칫 잘못하면 사람을 설득하고 억지로라도 우리의 생각과 같은 생각을 가지도록 하려고 할 수 있습니다. 또 그들의 주장이나 견해가 우리와 다를 때는 무조건 그들이 잘못이라고 주장하는 잘못을 할 수도 있습니다. 참교사의 책임은 사람들에게 어떤 신념을 집어넣어 주는 것이 아니라, 그들로 하여금 자신의 신념에 대해서 스스로 생각해 볼 수 있도록 그들에게 용기를 불어넣어 주는 것입니다. 개개인의 인격을 소멸시키는 것이 아니라 발전시켜 주는 것입니다. 교사의 희미한 복사판을 만들어 내는 것이 아니라 독립된 인간을 만들어 내는 것입니다.
바울은 다른 사람의 장점만을 보려 했고 그 마음속에 사랑을 품고 책망이 필요할 때는 책망했습니다. 이것이 참사랑입니다. 잠언 3장 11절에 보아도 “내 아들아 여호와의 징계를 경히 여기지 말라 그 꾸지람을 싫어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시편 94편 12절에는 “여호와여, 주의 징벌을 당하며 주의 법으로 교훈 하심을 받는 자가 복이 있나니” 했습니다. 요한계시록 3장 19절에도 “무릇 내가 사랑하는 자를 책망하며 징계한다”고 했습니다.
사실 우리는 하나님의 징계를 싫어하지 말아야 합니다. 경히 여기지도 말아야 합니다. 히브리서에서는 그에게 꾸지람을 받을 때 낙심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왜요? 하나님이 그 사랑하시는 자를 징계하시기를 마치 아비가 그 기뻐하는 아들을 징계함같이 하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얼마나 얼마나 우리를 사랑하시는지 믿으십니까? 로버트 브라우닝은 “주여, 나를 개조하시고 완성시키소서. 당신이 하시고자 하는 바를 내가 믿습니다”고 말했습니다. 이 진리는 수천년 동안 환난을 당해 온 모든 성도들에게 많은 위안을 주었습니다.
욥기 5장 17절에 “볼지어다 하나님께 징계 받는 자에게는 복이 있나니 그런즉 너는 전능자의 경책을 업신여기지 말지니라” 했습니다. 내가 환난을 당한다고 해서 하나님이 나를 미워하시는 것이라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성도가 당하는 모든 고난은 전능하신 하나님이 필요하다고 보시는 징계들의 일부분이며 또한 그것은 나를 깨끗케 하시는 방법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에가드(Egard)라는 사람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하나님의 진노는 마귀의 애무보다 오히려 낫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살리려고 징계하시고, 마귀는 우리를 죽이려고 애무합니다.” 옳은 말씀입니다.
바울의 위대함이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우리가 흔히 자식에게 책망할 때도 기분에 의해서 감정을 폭발시키는 경우가 더러 있는데 바울은 고린도 교인들을 대할 때 개인적인 문제로 다루지 않았습니다. 바울이 행한 징계의 동기는 복수가 아니라 교정이었습니다. 그의 목적은 그 사람을 쓰러뜨리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일으켜 주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형벌이 결코 절망으로 몰아 넣는 것이거나 낙심시키는 것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 바울의 주장이었습니다. 바울은 책망을 하면서도 그 사람은 여전히 믿었습니다.
그러면서 14~16절에 보면 모든 것을 마지막에는 잘 해결해 주신 하나님께 승리의 함성을 외치고 있습니다. “항상 우리를 그리스도 안에서 이기게 하시고 우리로 말미암아 각처에서 그리스도를 아는 냄새를 나타내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노라 우리는 구원 얻는 자들에게나 망하는 자들에게나 하나님 앞에서 그리스도의 향기니 이 사람에게는 사망으로 좇아 사망에 이르는 냄새요 저 사람에게는 생명으로 좇아 생명에 이르는 냄새라 누가 이것을 감당하리요” 했습니다. 우리를 “하나님 앞에서 그리스도의 향기”라고 했습니다. 그리스도의 복음이 곧 향기이므로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도 곧 그리스도의 향기라는 말씀입니다.
옛날 솔로몬이 성전을 지을 때 멀리 레바논에 가서 백향목을 찍어다가 성전을 지었습니다. 그것은 백향목이란 나무가 나무만 좋은 것이 아니라 좋은 향기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전에 모세가 성막을 지은 다음에도 그랬고, 솔로몬이 성전을 지은 다음에도 그랬는데, 지은 다음에는 향단을 아름답게 금으로 쌌습니다. 그리고 제사장들이 그 위에 분향을 해서 향기로운 향연으로 성전을 가득하게 한 것입니다. 전설에 의하면 옛날 콘스탄틴 황제가 콘스탄티노풀에 성 소피아라는 유명한 예배당을 지을 때 밖은 물론 돌로 지었지만 안은 회를 바를 때 회산물에 향을 섞어 발라서 그 예배당 안에 들어가면 늘 향기가 가득했었다고 합니다.
동방의 박사들이 멀리서 아기 예수님을 찾아와 예수님께 경배할 때 귀한 예물 세 가지를 드렸습니다. 황금과 유향 그리고 몰약이었습니다. 이 세 가지 가운데 유향과 몰약은 향기를 내게 하는 향품입니다. 베다니에서 마리아와 나사로가 예수님에게 잔치를 베풀고 대접할 때에 마리아가 좋은 옥합을 깨뜨려서 그 향기로운 기름을 예수님의 발에 붓고 머리털로 그 발을 씻으니 향기가 온 방에 가득 찼다고 기록했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신 후 이레 중 첫날인 이른 아침에 막달라 마리아와 살로메 그리고 다른 여자들이 일찍이 예수님의 무덤에 찾아갔을 때에 예수님의 시체에 바르기 위해서 향품을 준비해 가지고 찾아갔다고 그랬습니다. 물론 그 향품을 쓰지는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무덤을 찾아갈 때에 향품을 준비해 가지고 갔습니다. 옛날이나 오늘날이나 향기는 거룩한 것, 깨끗한 것, 사랑의 충성․정성․믿음의 상징으로 생각해 왔습니다.
그리스도의 복음을 향기로 생각하는 것은 너무 당연한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향기는 인간의 정신을 새롭게 하고 상쾌하게 합니다. 마찬가지로 그리스도의 복음은 우리의 마음을 거룩하게 하고, 깨끗하게 하고, 선명하게 하고, 화평하게 하고 즐겁게 합니다. 그리스도의 복음이 들어간 심령은 성결한 심령이 됩니다. 그리스도의 복음이 들어간 사람의 입술이 성결합니다. 입술뿐만 아니고 그의 전생활이 정화되고, 미화되고 사랑으로 화합니다. 그리스도의 복음이 들어갈 때 그 가정이 깨끗해집니다. 그리스도의 복음이 사회에 들어갈 때 그 사회가 깨끗해집니다. 그 나라가 깨끗해집니다.
그리고 향기는 잡아당기는 힘이 있습니다. 인력이 있습니다. 봄철에 아름다운 꽃이 핍니다. 그래서 벌과 나비들이 꽃을 찾아 날아듭니다. 단순히 아름다운 꽃을 보기 위해서 벌과 나비가 날아드는 것이 아닙니다. 아름다운 꽃속에는 향기가 있어서 찾아옵니다. 마찬가지로 옛날이나 오늘날이나 그리스도의 복음에는 인력이 있습니다. 사람을 끄는 힘이 있습니다. 베드로도 그 인력에 끌려 들어왔습니다. 야고보도 그랬고, 요한도 그랬고, 모든 제자들이 다 그랬고, 오순절에 회개한 3천명도 그랬습니다.
교회의 역사를 보면 이 인력으로 말미암아 교회에 들어온 사람에는 남녀의 구별이 없고, 노소의 차가 없고, 빈부나 귀천이 없습니다. 교육을 받았거나 못 받았거나, 문명의 분간도 없이, 지위의 차별도 없이 각계 각층에서 그리스도의 복음의 인력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앞에 나와 그리스도에게 무릎을 꿇고 그리스도의 향기에 도취되어 주시는 은혜에 감사하며 그의 주시는 영생의 축복을 받은 것입니다. 황제도 그러했고, 정치가․철학자․과학자도 그러했고, 옛날도 오늘날도 그러합니다. 향기는 끄는 힘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친히 “내가 땅에서 들리면 모든 사람이 내게로 끌리겠노라”고 말씀했습니다. 그리스도의 복음, 십자가를 중심으로 하는 향기는 모든 사람을 그리스도에게 이끕니다.
그런데 향기는 이렇게 이끌기도 하지만 물리치기도 합니다. 향기는 벌과 나비 같은 아름다운 것을 좋아하는 봉접(蜂蝶)은 이끌지만 어떤 더러운 것을 좋아하는 것은 물리칩니다. 향을 피우면 모기가 들어오지 못합니다. 향기가 모기를 물리칩니다. 예수님 당시를 보더라도 그리스도의 복음의 향기가 나타날 때에 많은 사람이 향기로 말미암아 이끌려 왔지만 동시에 어떤 사람을 물리치는 그런 힘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오히려 복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미워하고 죄를 더 짓고 마지막에는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은 무리도 있었습니다. 여기 16절에 “어떤 사람에게는 사망으로 좇아 사망에 이르게 되는 냄새가 되고 어떤 사람에게는 생명으로 좇아 생명에 이르게 되는 냄새가 된다”는 말은 그 말입니다.
복음의 향기가 세상에 올 때 빛을 사랑하는 사람, 거룩하고 깨끗한 것을 사랑하는 사람, 영원한 생명을 원하는 사람은 복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에게 나아옵니다. 그러나 어두운 것을 좋아하고, 추한 것을 좋아하고, 불결한 것을 좋아하는 이와 같은 사람은 오히려 복음으로 말미암아서 더 죄를 짓고, 더 교회를 미워하고, 그리스도를 핍박합니다. 이런 사람은 옛날에도 있었고 오늘에도 있는 것을 우리가 압니다.
이렇게 향기는 끄는 힘이 있는 동시에 사람을 분별하고 심판하는 힘이 있습니다. 복음은 사람을 두 가지로 나누는 힘이 있습니다. 거룩하고 깨끗한 것을 동경해서 나오는 사람과 더러운 것을 찾아 그리로 나가고 오히려 진리를 배반하는 사람, 이 두 가지 종류로 나눕니다. 이렇게 그리스도의 복음은 성화의 힘, 끄는 인력 또는 선과 악을 분별해서 심판하는 힘이 있습니다.
그런데 15절에 보면 한 걸음 더 나아가서 “너희가 하나님 앞에서 그리스도의 향기라”고 했습니다. 이것은 무슨 뜻입니까? 조금 생각하면 깨달을 수가 있습니다. 복음은 향기입니다. 우리가 복음 속에 들어와서 향기에 온전히 흡수된바가 되면 우리 자체가 향품이 되어서 향기를 발할 수가 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 마음에 들어오셔서 우리의 전 생각과 생활을 온전히 지배하시게 되면 우리의 삶 자체가 향기가 되어서 향기를 발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비록 죄 가운데서 나고 죄 가운데서 자라서 더러워지고 흠이 많은 죄인이지만 그리스도 앞에 나와서 십자가의 보혈로 깨끗이 씻음받고 그리스도의 향기로서, 아니 작은 그리스도로서 몸과 마음이 화하게 된다면 이 부족하고, 더럽고, 연약한 몸이 변화해서 그리스도의 향기가 되어서 다른 사람에게 능히 그리스도의 향기를 발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어른도 아이도 남학생도 여학생도 누구나 하나님 앞에서 그리스도의 향기가 된다고 했습니다.
우리의 예배도 그렇습니다. 우리가 부르는 찬송, 우리가 드리는 기도, 예물,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 이 모든 것이 향기와 같이 하나님의 보좌에 상달되고 하나님이 흠향하시는 제물이 되어야 합니다. 이렇게 생각할 때 우리 예배 시간이 얼마나 거룩해야 하고, 우리의 마음이 얼마나 깨끗해야 하고, 우리 예배가 얼마나 신성해야 하는지 말로 다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사실은 예배 시간만은 아닙니다. 성경에 보면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라” 했습니다. 우리의 마음과 몸 전체를 그리스도화 해서 모든 죄를 회개하고 용서함을 받고 그리스도의 향기가 되었다는 말입니다. 이것을 생각할 때 이것이 얼마나 큰 특권이요, 얼마나 감사한 일인지 말로 다할 수가 없습니다. 따라서 우리의 마음을 얼마나 깨끗이 해야겠다는 것을 새삼 생각하면서 바로 살아야겠습니다. 우리의 삶 전체가 하나님의 흠향할 수 있는 향기가 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 앞에서 향기가 된 사람은 사람 앞에서도 향기가 됩니다. 향기는 보이지는 않지만 사방에 퍼집니다. 과연 그리스도의 복음으로 참된 믿음을 가지게 될 때 그 사람이 있는 주위에서 그리스도의 향기를 맡을 수 있게 될 것입니다. 무언중에 감화가 있습니다. 그런 사람이 가정에 들어갈 때 가정이 깨끗해집니다. 그런 사람이 관청에 들어가면 무언중에 다른 직원이 감화됩니다. 이런 사람이 군대에 있을 때 군인이 감화가 됩니다.
장미는 그 모습이 아름다울뿐더러 향기 또한 그윽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장미를 더 사랑합니다. 백합 역시 그렇습니다. 모습이 아름다울뿐더러 향기가 많습니다. 구약 아가서를 보면 우리 믿는 사람을 상징적으로 ‘샤론의 장미’라고 말했습니다. ‘산곡의 백합화’라고 말한 곳도 있습니다. 어떤 때는 ‘가시덤불 가운데 백합’이라고도 합니다. 아름다운 꽃에는 향기가 있어야 합니다. 겉으로는 아름다워 보이지만 향기가 없으면 그것은 참꽃이 아니고 사람이 만든 조화일 수 있습니다. 산 꽃에는 향기가 있습니다. 참꽃에는 반드시 향기가 있습니다. 겉으로 보기에는 믿는 사람 같지만 왜 향기가 없습니까? 겉으로는 믿는 것 같지만 향기가 없다면 그 믿음은 거짓된 믿음이거나 죽은 믿음일 것입니다.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옛날 시바 여왕이 솔로몬 왕의 지혜를 사모하여 그를 방문했습니다. 시바 여왕은 솔로몬의 지혜를 시험해 보기 위해서 아름다운 꽃 두 화분을 가져 왔습니다. 그런데 이 꽃들은 똑같이 생겼습니다. 여왕은 화분 둘을 멀리 갔다 놓고 솔로몬 왕에게 어느 화분이 참꽃이냐고 물었습니다. 그때 솔로몬 왕은 조금 생각하더니 그 옆에 있는 신하에게 말하기를 “저 창문을 열어 놓아라” 했습니다. 그랬더니 벌과 나비들이 화분이 있는 데로 날아왔습니다. 그런데 한 꽃에 가서 앉고 다른 데는 갈 생각도 하지 않았습니다. 솔로몬 왕은 웃으면서 “저 벌과 나비가 앉은 화분이 산 꽃이요”라고 말했습니다. 왜 벌과 나비들이 산 꽃에 앉았습니까? 산 꽃에만 향기가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에게 산 믿음의 향기가 있습니까? 사랑의 향기가 있습니까? 순종의 향기가 있습니까? 헌신의 향기가 있습니까? 기도의 향기가 있습니까? 우리는 이 향기를 세상에 퍼뜨려야 합니다. 방안에 장미꽃 한 송이만 있으면 온 방 안을 향기로 가득 채우는 것처럼 우리 가정을, 우리 직장을, 우리 학교를 그리스도의 향기로 가득 채워야 합니다.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의 향기로 가득 채워야 합니다.
이 세상에는 아직 그리스도를 알지 못하므로 고등 교육을 받았더라도 여러 가지 미신에 빠지고 여러 우상을 섬기는 경우가 얼마나 많습니까? 몸에는 양장을 하고 자동차를 타고 다니면서도 그 심령은 아직까지 옛날 석기 시대의 사람처럼 우상을 섬깁니다. 왜요? 아직까지 예수를 몰라서 그럽니다. 주님께서 친히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무엇보다도 먼저 그리스도를 아는 진리의 향기를 사방에 퍼뜨려야 합니다.
그리고 성결의 향기를 퍼뜨려야 합니다. 이 세상에 더러운 냄새가 너무 많습니다. 성결의 향기는 더러운 냄새를 몰아냅니다. 공의와 진실의 향기를 퍼뜨려야 합니다. 불의와 거짓이 많은 세상에서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의와 진실의 향기를 전해야겠습니다.
사랑과 봉사의 향기가 있어야 합니다. 주님은 섬김을 받으러 오신 것이 아니라 섬기러 오셨습니다. 그 목숨을 바쳐 만민을 구원하는 대속물로 삼으셨습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제자라면 이 사랑과 봉사의 향기를 전해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겸손의 향기가 있어야 합니다. 주님이 겸손하셨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산 꽃입니까? 죽은 꽃입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