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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 감꽃은 먹을 수 있는 꽃
청년단원이나 경찰을 앞세운 토벌대원들이 입산자들의 집을 일시에 덮친 것은 아직 어둠이머뭇거리고 있는 새벽녘이었다. 그들은 담을 타 넘거나 사립문을 조심스럽게 밀치거나 해서전혀 인기척을 내지 않고 집 안으로 스며들었다. 그들은 기민한 동작으로 헛간이며 변소,집뒤란이나 짚더미 같은 데부터 조사했다. 그런 다음 느닷없이 소리를 지르며 마루로 뛰어올라 방문을 열어젖혔고, 안으로 걸려 있는 방문을 사정없이 걷어찼다. 여자의 놀란 비명과아이들의 겁에 질린 울음소리가 뒤섞였다. 토벌대장 임만수의 명령에 따른 이 기습작전은읍내 모든 마을을 공포분위기로 뒤덮기에 충분했다.
세 명이 한 조를 이룬 그들은 무서운 기세로 집 안을 샅샅이 뒤졌다. 끝내 남자를 찾아내지 못하게 되면 그들은 총을 집 안 사람들에게 겨누었다. 겁에 질려 한사코 방구석으로만몰려 바들바들 떨고 있던 사람들은 빤히 뚫린 총구멍 앞에서 하얗게 굳어졌다. "빨갱이XXX 놈 언제 떠났어!" "니년 남편 어젯밤에 왔었지!" 총구멍만큼 살벌한 외침이 새벽공기를 흔들었다. "아닌디요, 안 왔는디요." "온 일 없어라, 난 몰라라." 이런 대답을 미처 끝내지도 못하고 사람들은 비명을 질렀다.
그리고, 토방으로 곤두박히거나 마당으로 끌려나왔다.
외서댁도 예외일 수가 없었다. 아이를 안은 채 머리채를 잡혀 마당으로 질질 끌려나오면서, "안 왔당께 왜 이러시요. 안 왔당께요." 연신 다급하게 소리쳤다. 그러나 속으로는 정반대의 안도감을 느끼고 있었다. 경찰이 이렇게 들이닥친 것은 남편이 잡히지 않고 무사하게돌아갔다는 뜻이었다.
"언제, 어느 때고 경찰에서 따지고 들먼 백분 천분 몰른다고만 혀. 고것이 상수 중에 상순께로. 알아묵겄어?" 어젯밤에 떠나면서 했던 남편으 ㅣ다짐이 그녀의 중심을 잡아주고 있었다.
외서댁은 마당 가운데 내동댕이쳐졌다. 나둥그러지며 그녀는 머리 껍질이 쭉 늘어나는 것같으면서 정신이 아뜩해지는 아픔에 떨었다. 그러나 아이를 놓쳐서는 안된다는 생각만은확실하게 하고 있었다.
"바른대로 말해! 니년 남편이 어젯밤에 왔었지?"
토벌대원이 소리쳤다.
"아니어라, 안 왔어라."
아이를 품에 안고 땅바닥에 엎드린 외서댁의 떨리는 목소리는 가늘었다.
"쌍년이 더 족쳐야 바른 말을 할래나..."
토벌대원이 혀를 차며 왼손에 들고 있던 총을 어깨에 멨다. 그러고 두 손바닥을 맞비벼털었다.
오른쪽 손가락 사이사이에 기였던 머리카락이 헝클어진 덩이를 이루어 냉랭한 새벽공기 속을 느릿느릿 날아내렸다.
"명령대로 일단 연행합시다."
경찰관이 토벌대원에게 말했다.
" 그럽시다. 여기서 족칠 수도 없는 일이니까." 토벌대원은 잇새로 침을 찍 뱉고는, "야,빨리 일어나. 걷어차기 전에 빨리 일어나!" 곧 걷어차기라도 할 것 같은 기세로 소리쳤다.
재빨리 위를 한번 올려다 본 외서댁은 부리나케 일어났다.
"가자!"
토벌대원이 외서댁의 어깨를 움켜잡아 돌렸다.
"원, 워디로 가라?"
"워디긴 워디여, 경찰서지."
토벌대원이 사투리를 흉내내며 눈을 치떴다.
"가긴 가는디, 애기업고 가게 포대기 잠 갖고 나올라요. 날이 요리 추운디 애기 얼어죽겄소." "알았소. 얼렁 가지고 나오시오."
토벌대원의 제지를 의식해서인지 경찰관이 재빨리 허락했다.
방으로 내달은 외서댁은 안고 있던 딸아이를 옆으로 돌려 등에 업고, 포대기가 아이의 어깨까지 덮여지도록 높게 치올려 광목끈을 질끈 동여 맸다. 그리고, 고리짝에서 아이옷을 잡히는 대로 들고 방을 나왔다. 또, 무신 험헌 꼴을 당할라는고, 외서댁은 찬바람 한 줄기가가슴을 훑고 지나가는 무섬증을 느꼈다. 아이를 추슬러올리며 깍지낀 두손에 힘을 주었다.
외서댁은 그들을 앞장서 사립문을 나섰다. 기왕 잡혀갈 걸음 괜히 미적거리다가 사나운욕을 먹거나 거친 손찌검을 당하고 싶지 않았다. 고샅의 새벽바람은 찼다. 보는 눈이 없는때 끌려가는 것이 그래도 낫다 싶었다. 그녀는 땅만 내려다보고 걸었다. 갈피를 잡을 수 없는 생각들이 무섭고 서러운 마음에 뒤범벅이 되어 있었다.
"외서댁 아니라고?"
귀에 익은 소리에 외서댁은 얼른 고개를 들었다. 왕주댁이 물동이를 이고 서 있었다. 눈물이 왈칵 솟구치며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빨리 가!"
큰 손이 어깻죽지를 사정없이 쳤다. 외서댁의 몸이 비틀했고, 눈에서 눈물방울이 뚝 떨어졌다. 그녀는 걸음을 옮겨놓기 시작했다.
"참말로, 젊디나젊은 것이 아그할라 델고 저 무신 못헐 고상이다냐. 문딩이 콧구녕 겉은빌어묵 을 시상이다."
왕주댁의 거침없는 목소리가 뒤에서 들려왔다. 외서댁은 가슴 찡 울리는 고마움을 느꼈다.
왕주댁이 아니고서는 감히 경찰 앞에서 할 수 있는 말이 아니었다. 왕주댁을 보자 잇따라샘골댁 얼굴이 떠올랐다. 그리고, 왜 왕주댁을 거기서 만나게 되었을까 하는 생각이 잇따랐다. 어쩌면 왕주댁은 물을 길러 나온 것이 아니라 동정을 살피러 나왔을지도 모른다 싶었다.
물동이가 빈 것이 분명했고, 왕주댁의 집은 이쪽 고샅과는 반대편이었다. 샘골댁도 또 이런꼴을 당하는 것이 아닐까 생각하니 남편이 새롭게 원망스러워졌다. 공산당을 하려면 혼자서나 할 일이지 샘골댁 남편은 왜 끌어들였는지 모를 일이었다. 샘골댁이라고 무사할 리가 없을 것 같았고, 앞으로 더 심해질 샘골댁의 눈총을 받을 일을 생각하면 겁부터 났다. 샘골댁의 남편 유 서방을 어젯밤에 함께 데려오지 않은 남편이 야속했다. 잠시나마 부부를 만나게해주고 나서 이런 일을 당하게 하면 그래도 낯이 설 것 같았다. 그러나 외서댁은 자시느이이런 얼빠진 생각에 소스라치게 놀랐다. 그건 절대로 안될 일이었다. 만약 유 서방이 왔었더라면... 생각만으로도 외서댁의 가슴은 쿵쿵 울리고 있었다. 남편을 속인 사실이 그대로밝혀지게 될 것이었다. 샘골댁은 분하고 서러워서라도 몰매질당한 일을 남편한테 털어놓을것이고, 그 말이 시작되면 필경 자신만이 몰매질을 면했다는 말도 나올것이 뻔했다. 그 사실이 유 서방의 입을 거쳐 남편에게 전해지기는 너무 쉬운 일이었다. 그렇게 되면 자신의 거짓말이 드러나고, 끝내는 몸을 더럽힌 사실까지 들춰지고 말 것이었다. 그것도 어디 한 번뿐인가. 그 독사눈 염가놈은 그것이 무슨 홍시감 맛이라고 쩝쩝 입맛을 다시며 벌써 서너 차례 찾아들지 않았던가. 외서댁은 아이를 추슬러올리며 몸을 떨었다. 처음 인기척을 느꼈을때는 또 염가놈이 왔겠거니 생각하고 신경도 쓰지 않았다. 그런데 두 번째 인기척이 나는데불현 듯 이상한 생각이 들었다. 방문이 벌컥 열린 것은 그때였다.
"누, 누구요!"
외서댁은 아이부터 품으며 더듬거렸다.
"나시, 나. 놀래지 말소."
지게문을 가득 채우다시피 하고 들어선 남자가 남편인 것을 알아본 순간 외서댁은 반가움보다는 가슴이 쿵 내려앉는 소리를 들었다. 그리고 불두덩 아래로 찌릿찌릿 결리는 아픔이퍼지면서 거기가 자꾸만 오무라드는 것 같았다.
"워쩐 일이다요?"
그녀는 남편이 자신의 부정한 사실을 다 알고 온 것 같은 불안감에 쫓겨 목소리가 떨렸다.
"자네 몸 상헌디 웂는가?"
남편이 총을 든 채로 아이 옆에 쪼그리고 앉으며 물었다. 그녀의 가슴은 또 쿵 소리를 내며 내려앉았다. 그러나 그녀는 태연할 수 있었다. 방안은 어두워서 우선 표정을 감출 수있었고, 남편의 말이 무슨 뜻인지 확실하지 않은데 지레 겁부터 먹어선 안된다고 마음을 다잡은 것이다.
"그냥 그만허구만요."
그녀는 애매한 대답을 어물거렸다.
"몰매 맞어 크게 상헌 디 웂어?"
그녀는 그때서야 남편의 말뜻을 확실하게 잡았다. 남편은 자신이 몰매를 맞은 것으로 알고 있는 것이 아닌가. 그렇게 되면 염가놈과의 그짓은 말끔하게 덮여진 셈이었다.
"몰매를 맞은 지가 언젠디 이적지 아파라."
그녀는 한숨까지 섞어가며 말했다.
"허기사 그려. 같은 매럴 맞아도 자네야 젊은 삭신잉께..." 남편이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녀는 그 한숨소리가 예사롭게 들리지 않았다.
"워쩐 한숨이다요? 무신 근심 있소?"
"금메 말이시, 자네가 요리 성헌 줄 알았음사 나가 머 헐라고 왔을 것인가. 하늘 겉은 대장님 명 령 어김스로 말이시."
"허먼, 딴 볼일은 웂고 순전히 나 하나 보자고 오셨단 말이요?" "허, 요 미친 눔이 지눔 각씨 맞어죽어뿐 줄 알고 안 왔능가." 남편은 허하게 웃었다. 그 허한 웃음이 전신을 뜨겁게감싸오는 것을 그녀는 느꼈다. 그녀는 몰매도 맞지 않았다고, 그 대신 청년단 염가놈에게몸을 내줬다고 말해버리고 싶은 죄의식에 떨었다.
"자네 고상이 말이 아니시."
남편이 손을 듬어 잡으며 말했다. 그녀는 전신이 뻣뻣하게 굳어지는 것을 느꼈다. 남편은손을 잡는 것만으로도 자신의 몸이 더럽혀진 것을 금세 알아차릴 것만 같았다. 남편이 제발딴 생각을 먹지 말기를 빌었다. 염가놈이 다녀갈 때마다 똥 묻은 옷을 빨 듯 몸을 씻었지만차마 남편을 받아들일 수는 없었다. 아무리 흔적을 지웠다고는 하나 남편이 모를 리가 없을 것 같았다. 아무리 어두운 곳에서도 제 신발이 아니면 금방 알아차리는 법인데, 눈치빠르고 영리한 남편이 그것을 모를 리가 없을 것이었다.
"밤마동 자네 꿈을 꾸고 사네."
남편이 몸을 끌어당기는가 싶더니 젖가슴을 덥석 잡았다. 우악스러운 힘이었고, 숨결이 뜨거웠다.
그녀는 눈을 질끈 감으며 울음 같은 신음 소리를 가늘게 흘렸다. 결국 남편은 그냥 돌아갈심산이 아닌 것이었다.
"워째 이리 떤가. 저짝 담 밑에서 둘이 망보고 있응께 암시랑토 않네." 남편의 손이 마침내치마를 헤집고 들었다. 엄니, 이 일을 워째야 쓸께라. 나 잠 살려주씨요. 그녀는 부르짖었다. 남편한테 부정을 들키는 것만이 문제가 아니었다. 이러고 있을 때 만약 염가놈이 나타나면 어찌 될 것인가. 그녀는 이중으로 애가 탔다. 염가놈은 언제나 권총을 옷 속에다 놓아두고는 했다. 그것이 남편때문이라는 것을 그녀는 너무나 잘 알았다. 그 사람 죽이는 쇳덩이를 곁눈질해가면서, 염가놈이 있는 동안만은 제발 남편이 오지 말기를 얼마나 애타게 빌었던가. 부정의 현장을 들키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자칫 잘못하다가는 남편의 목숨이 위태롭게 되는 것이었다.
남편의 거칠고 뜨거운 손이 불두덩을 쓸어내려 거웃 부분을 만지고 있었다.
"강동무, 강동무!"
바로 방문 가까이서 들린 다급한 소리였다.
"워째 그려!"
남편이 후다닥 일어났다.
"총소리가 막 나는디요."
"워디서?"
남편은 어느새 방문을 밀치며 묻고 있었다.
"읍내 쪽인디요. 무신 일일께라?"
남편은 한동안 말이 없었다. 그녀의 귀에도 멀리서 울리는 총소리가 들렸다. 꼭 남편을 쫓아오고 있는 총소리만 같아 그녀는 부르르 몸서리를 쳤다.
"싸게 떠야겄다. 준비혀." 남편은 어둠 속에 대고 말하고는 이쪽으로 얼굴을 돌려, "나 가야겄네.
밤마동 문단속허고 자야 써" 하고 방문을 닫았다. 그리고 부산한 발소리가 멀어져갔다.
신작로까지 넘쳐오른 안개를 밟으며 외서댁은 걷기에만 열중했다. 신작로에 박힌 돌에나길가의 마른 풀잎에는 서릿발이 하얗게 돋아 있었다. 겨울이 닥쳐오고 있었다. 안개는 신작로와 방죽에 갇힌 듯이 중도 들판에 가득 차 있었다. 아슴하게 넓은 안개밭 속에서 금을그어놓은 듯 철로가 드러나보였다. 하루에 두차례씩 바닷물을 실었다가 부리곤 하는 포구를 끼고 있어서인지 중도들판의 늦가을 안개는 유난히 짙은 젖빛이었다. 포구에 끼는 안개는 햇솜밭처럼 뭉클거리며 풀풀 날리는 기분인데, 들판에 끼는 안개는 떡고물처럼 바실거리면서도 겹겹이 쌓이는 묵직한 기분이었다.
읍사무소 뒷마당에는 시간이 갈수록 사람들이 꾸역꾸역 밀려들었다. 대부분 여자들이었는데 하나같이 주눅이 들거나 겁먹은 얼굴들이었다. 그 속에는 하대치의 아내 들몰댁,염상진의 아내 죽산댁, 그리고 안차민의 어머니도 섞여 있었다.
읍사무소의 왼쪽 사무실, 경찰서 안에서는 높은 언성이 오가고 있었다.
"아무 대책도 없이 이렇게 잡아들이기만 하면 어쩌자는 거요?" 경찰서장 남인태였다.
"이거 왜 이리 말이 많으쇼. 여기가 좁으면 당장 학교 하나 비우면 될 거 아뇨." 토벌대장임만수가 푹 꺼진 콧잔 등에 잔뜩 주름을 잡으며 맞섰다.
"두 학교 다 공부를 시작했소."
"그래서, 못 비운다 그런 말이쇼? 이거 보쇼, 서장나리, 계엄령하에서 빨갱이 소탕작전이중요하 오, 아니면, 까짓 코흘리개들 공부가 중요하오?"
난 잘 모르겠소, 하는 말이 혀끝까지 밀려나왔지만 남인태는 애써 참아낸다. 계엄령이나빨갱이를 들고 나오는 판에 스스로에게 돌을 던지는 말을 한 마디라도 해서는 안되었다.
"그러니까 내 말은, 빨갱이들은 은신시키지 않았으면 됐지, 도주의 우려가 없는 사람들을저렇게 한꺼번에 잡아들여 소란을 피울 필요가 없다 이거요." 입산 빨갱이들은 그림자도보이지 않았다는 보고를 이미 받은 남인태는 느긋한 마음으로 토벌대장을 공략하는 셈이었다.
"이거 왜 이러쇼. 앞으로 작전은 내 권한하에 있으니 당신은 이렇다 저렇다 말을 말고, 내가 요 구하는 대로 작전협조만 하시오. 그게 현지 경찰로서 수행할 임무요. 자아, 빨리아무 학교나 비 우도록 하시오."
토벌대장 임만수의 기세도 만만찮았다. 남인태는 창자가 비비꼬이는 것을 느꼈지만 더 이상 어쩌는 도리가 없었다. 그렇다고 서장의 체면에 부하들 앞에서 기를 꺾일 수는 없었다.
"학교를 비우고 안 비우고는 읍장과 상의할 문제요."
남인태는 슬쩍 피해 섰다.
"이런 제길헐, 이봐 염 단장, 읍장님한테 당장 전화 거시오." 토벌대장은 성질을 돋우며 염상구에게 손짓했다.
"안직 지무실지 모른디 요리 일찍 전화혀서 쓸란지 몰르겄소?" 염상구는 서장과 토벌대장의 눈치를 슬슬 살피며 어물쩍거렸다. 서장은 천장을 바라본 채 담배만 빨아대고 있었고, 토벌대장은 두팔을 허리춤에 올려 버티고 선채 눈을 부라리고 있었다.
"됐어, 아직 사람들이 그리 많지 않으니 조금 더 있다가 걸도록 합시다." 토벌대장이 손목의 시계를 들여다보며 말했다. 염상구는 상체를 건들거리며 창가로 걸어갔다. 그지없이 경박해보이는 몸짓이었다. 그러나 그의 속에서는 열심히 주판알이 튕겨지고 있었다. 경찰서장과토벌대장을 놓고 시작한 정울질이었고 계산이었다. 누가 더 근수가 나갈 것이며, 어느 쪽으로 붙어야 더 잇속이 있을 것인지를 따지는, 염상구로서는 그야말로 중대한 시점에 처해있는 것이었다. 그런데, 그 저울 눈금이 두 마리 돼지를 달 때나, 두 가마니 쌀을 달 때처럼속시원하게 딱 정해지지 않는 것이 문제였다. 경찰서장이 무거운 듯해서 그쪽으로 쏠리면다음 순간 토벌대장이 무거운 것 같고, 저울눈금이 이리 기우뚱 저리 기우뚱, 도무지 종잡을 수가 없었다. 당장 판세 돌아가는 것이로 보아서는 토벌대장이 근수가 더 나가는 것이분명하고, 그러나 서장이 당장은 식은 보리밥 신세지만 벌교바닥에 오래 남아 있기로 치자면 서장의 근수가 더 나가는 것은 분명했다.
"염 단장, 서장 정도는 내 보고 한마디면 끝장이오. 앞으로 모든 작전권은 내 손에 달렸으니 염 단장도 나와 손잡고 앗싸리하게 일해봅시다."
어젯밤에 청년단으로 걸려온 토벌대장의 전화였다. 토벌대장의 언행에 대해 빠짐 없이 보고하겠다고 서장과 이미 약속을 했으면서도 전화내용을 서장에게 '앗싸리하게' 보고할 수는없었다. 자기 보고 한마디면 서장도 끝장내게 할 수 있다는 대목은, 바람 묵은 깨구락지맹키로 헛방구 뀌고 자빠졌네, 하며 전혀 믿지 않았다. 그러나 저울질을 시작하고보니 그 대목도 영 허풍 같지만은 않았다. 사람 하나 잘되게 하기는 어렵지만 못되게 하기는 쉬운 것이세상판세였다. 토벌대를 파견해야 할만큼 서장은 이미 상부로부터 허깨비 취급을 받고 있는 판에 토벌대장이 보고라고 하는 소리마다 나쁜 소리만 지껄여대면 그 모가지도 온전할것 같지 않았다. 그러나, 토벌대장이 설쳐대는 꼬락서니도 달가울 것은 없었다. 굴러온 돌이박힌 돌 뽑는다고, 아무리 계엄령이 무섭고, 토벌대장이라는 것이 바로 계엄령을 '빽'으로삼는 직책이라고는 하지만 안하무인으로 설쳐대는 꼴을 보고 있자니 슬그머니 배알이 뒤틀려올랐다. 저것이 벌교바닥이 어디라고 주먹자랑헐라고 저러까? 염상구의 그런 느낌은 남인태 서장과는 또 다른 것이었다. 그건 토박이로서의 오기였고, 주먹패 왕초로서의 자존심이었다. 토벌대장이 빨갱이 토벌에만 권력을 행사해야지 만약 그 권력을 이용해서 딴 데까지손을 뻗치려 든다면, 그때는 벌교바닥의 본떼를 보여주고 말리라는 것이 염상구의 굳은생각이었다.
"아침밥은 우리 본부에서 나하고 함께 합시다. 염단장라고 긴히 논할 일이 있으니까." 토벌대장이 은밀히 한 말이었다. 그는 서장과는 달리 꼭 '염 단장'이라고 불렀다. 들을수록 기분 나쁘지 않은 호칭이었다. 토벌대장하고 아침을 먹어야 하나 말아야 하나. 염상구는 창밖을 내다본 채 고개를 갸웃거렸다. 갈 수도 없고, 안 갈 수도 없고... 저울 눈금이 확실하게 정해질 때까지는 양다리를 걸치는 수밖에 없다는 생각이었다.
염상구는 창가에서 돌아섰다. 토벌대장이 보이지 않았다. 아침밥을 먹으려고 앞서 간 눈치였다.
"토벌대장인가 원생인(원숭이)가는 워디 갔다요?"
염상구는 서장앞으로 다가가며 능청스럽게 물었다.
"원생이는 또 뭐요?"
서장이 미간을 찡그리며 염상구를 올려다봤다.
"아, 그 쌍판때기가 원생이 낯짝 아닙디여? 첨에 딱 봉께로, 워따메 고놈에 낯짝 징상시럽게 못 났다 싶고, 그런디 고 못생겨묵은 쌍판얼 워디서 꼭 본 듯 본 듯 헌디 영 생각이나야 말이제라.
생각허고 또 생각허다 못혀서 그 부하를 잡고 물었제라. 느그 대장얼 워디서 꼭 본 얼굴인디 생 각이 안 나서 그런다, 워디서 멀 허던 사람이냐. 그렁께 그 부하 허는 말이, 보기는 워디서 봐라, 싸카쓰단에서 봤겄지요, 허드랑께요. 나는 그 말을 얼렁 못 알아묵고, 어느 싸카쓰단 출신이냐고 물응께 그눔이 점잖게 웃음시로, 싸카쓰단 원생이 못봤냐고 허드랑께요. 그러고 본게 나가 워디 서 그 사람을 따로 본 것이 아니드랑께요."
"그렇구만, 원생이, 그렇구만."
서장은 연상 키들키들 웃었다.
"부하눔덜이 안 듣는 디서는 원생이, 원생이 허드랑께요." "재수없는 놈, 아주 잘 붙인 별명이오."
서장은 어느새 웃음이 걷힌 얼굴로 냉정하게 말하고는, "염 단장!" 나직하게 염상구를 불렀다.
"예에, 서장님."
염상구도 분위기가 바뀐 것을 재빨리 눈치채고 목소리를 가다듬어 대답했다.
"이쪽으로 잠시 앉으시오."
염상구는 서장이 가리키는 의자에 앉았다. 서장이 담배를 권했다. 염상구는 담배를 사양하지 않 았다. 그것은 단순히 담배가 아니라 은밀한 이야기를 꺼내고자 하는 마음의 표시였으므로 사양 같은 것은 예의가 아니라 오히려 오해를 살 염려가 있었다. 염상구는 재빨리성냥을 그러 서장 앞으로 디밀었다. 서장은 담배를 깊이 빨았다가 푸우 소리를 내며 연기를뿜고는 입을 열었다.
"토벌대장 말인데, 그 사람이 무슨 말 한 것 없소?"
짐작하고 있었던 말이었다. 염상구는 침착하게 그러나 서장이 호감을 느끼게 대꾸했다.
"별말 웂었는디요."
"나 염 단장한테 긴 말 하지 않겠소. 그 사람이 앞으로는 이런저런 요구를 해올 것이오. 그런 것 이 사사로운 게 아니고 공적인 사항이면 그때그때 나한테 알려주길 바라겠소. 나나염 단장은 쓰 나 다나 벌교 물을 함께 먹고 산 처지고, 그 사람은 어디까지나 외지 사람일 뿐이오. 나하고 염 단장은 그 동안 아무 탈 없이 협조가 잘되지 않았소? 어찌, 내가 염단장을 믿어도 되겠소?" 서장의 말은 간곡했다. 사실 서장의 말은 틀린 말이 아니었다. 유식한 말로 하자면 협조가 잘된 것이었고, 막말로 하자면 똥창을 서로 맞춘 것이었다. 그러나그건 누가 누구를 특별히 봐준 것이 아니라 서로의 필요에 의해서 이루어진 일이었다. 염상구는 자칫 서장에게로 쏠려가려는 마음을 냉정하게 다잡았다.
"하먼이라, 그래야제라."
염상구는 고개까지 힘주어 끄덕거리며 흔쾌하게 대답했다.
"고맙소, 염 단장만 믿겠소."
서장은 염상구의 손을 잡았다. 염상구도 서장의 손을 맞잡았다.
그러나 서장 남인태는 그렇게 단순하지가 않았다. 코흘리개 적부터 경찰서 공기를 마시고살아온 그는 생리적으로 단순할 수가 없었다. 염상구에게 먼저 식사를 하고 오라고 내보내고는 잇따라 미행을 붙였던 것이다. 염상구를 믿는다고 한 것은 정말 믿어서가 아니었다.
청년단에 박아놓고 있는 끄나풀의 제보에 의하면 염상구는 이미 어젯밤에 토벌대장과 내통을 하고서도 시침을 떼고 있었다. 염상구를 믿는다고 한 것은 전혀 믿지 않기 때문에 한말이었다. 첫째는 이쪽을 겅계하지 않고 마음놓고 행동하게 하기 위함이었고, 둘째는 이중스파이로 이용하기 위해서였다. 권력의 변화 앞엣 세상인심처럼 조석변인 것 없지만 주먹패의 생리는 유독 심했다. 염상구의 마음이 어떻게 움직이고 있는지는 유리창을 통해 맑은 하늘 쳐다보기처럼 환했다.
남인태는 서장실로 들어가 문을 걸어잠갔다. 아침을 먹기 전에 김범우에 대한 조서를 손수 정리할 참이었다. 유리할 것 하나도 없는 상황에서 김범우의 건이나 빨리 마무리지어야했다. 그가 유일하게 기대를 걸 것은 그것박에 없었다. 김사용 영감을 국회의원 최익숭 앞에까지 가게만 하면 되는 것이다. 그런데 유치장에 가두는 것으로는 실패했다. 그럼 더 강력한 방법, 김사용 영감이 최익승을 찾아가지 않을 수 없게 더 강력한 방법을 쓰는 수 밖에없었다. 그건 순천경찰서로 이첩하는 것이었다. 일단 순천으로 넘어가면 재판을 받아야 하기때문에 사건은 심각하게 돌변하게 마련이었다. 그런데도 김사용 영감이 최익승을 만나러 가지 않겟다고 버티지는 못할 터였다. 김사용이 최익숭을 찾아가고, 둘사이에 모종의 타협이이루어지고, 김범우는 풀려나오고, 그 공로로 자신은...
남인태는 조서를 정리해나가기 시작했다. 오전주으로 김범우를 넘겨 버릴 작정이었다.
염상구는 토벌대장과 겸상을 하고 마주앉아 있었다.
"대장님이 허신 말씸 따악 알아묵어뿌렀고, 고런 일 맘묵고 허자먼 보리밥 찬물에 몰아묵긴디, 딱 한가지 맘에 걸리는 것이 있구만이라."
"맘에 걸리다니?"
습관인 듯 토벌대장이 푹 꺼진 콧 등에 주름을 잡으며 눈을 가늘게 떴다.
"고것이 무엇인고 허니... 니기럴, 요 말을 혀야 쓸랑가?" 염상구는 고개를 갸웃하고는 새삼스럽게 숟가락을 들어 김칫국물을 떠 홀짝 마셨다.
"아, 사람 답답하게 만들지 말고 빨랑빨랑 말하라니까." 허, 니눔 속타라고 역부러(일부러)비비트는 것인디 나가 미쳤다고 싸게싸게 주딩이 놀리겄냐? 염상구는 또 느린 동작으로담배를 빼서 불을 붙였다.
"고것이 무엇인고 허니, 바로 남 서장이구만이라."
"까짓 남 서장이 어쨌단 말이오?"
토벌대장이 금방 불쾌한 표정을 지었다. 그건 염상구가 바라는 바였다.
"대장님헌테야 남 서장이고 고까짓 것인지 몰라도 나 겉은 눔헌테야 워디 그렇간디요?" "
그 병신 같은 작자는 무시해도 돼."
토벌대장은 짜증스럽게 말을 뱉았다.
"대장님이 씨다는 것이야 시상이 다 아는 일이제만, 남 서장이 자꼬 나보고 자기 편이 돼도라고 해싼께로 내 입장이 곤란허다 그런 말이제라."
토벌대장은 사투리가 듣기 싫어 환장할 지경이었다. 염상구가 고분고분 말을 들을 줄 알았는데 의외로 삐딱하게 나가자 울화가 치밀기 시작해서 엉뚱하게 사투리까지 듣기 싫은쪽으로 번져갔다. 사실 전라도땅을 처음 밟은 임만수로서는 사투리를 알아듣기가 여간 곤혹스럽지가 않았다. 억양은 전라도 것 그대로였지만 그래도 서울말을 흉내내고 있는 서장이나읍장의 말은 듣기에 부담이 없었는데 토박이 사투리를 그대로 써대는 염상구의 말에는 몇배 신경을 써야 했다.
"염 단장, 당신은 서울말은 한마디도 모르오?"
"아니, 워째 그러시오? 그 무신 자다가 봉창 뚜딜기는 소리다요?" 염상구의 얼굴은 금방험하게 변하고 말았다.
"다른 뜻이 아니라, 염 단장 사투리가 너무 심해 알아듣기가 어려워서 하는 말이오." 염상구의 돌변하는 표정을 보자 괜한 소리를 지껄였구나 싶어 임만수는 재빨리 다정한 어조를꾸며내며 짐짓 우호적인 웃음까지 지어보였다.
"지길, 나는 또 무신 소린가 혔소. 촌눔이라고 시퍼보는(무시하는) 줄 알고 속이 불끈혔지라. 쪼 깐 들어 봇씨요. 나도 일본놈 뱃때지에 칼질허고 내빼갖고 뜬구름맹키로 사방천지떠돔시로 서울 물도 쪼깐 묵어봤구만이라. 헌디, 서울말 고것이 워디 붕알 단 남자덜이 헐말입디여? 밑구녕 째 진 것덜이나 헐 말이제. 밥 먹었니이? 잘 잤니이? 고 간사시럽고 방정맞고 촐싹거리는 말이 워디 가 좋다고 배우것습디여. 서울말에 비허먼 전라도말이 을매나 좋소, 묵직허고 듬직허고 심지고.
대장님도 전라도에 온 짐에 전라도 말 싸게 배우씨요. 남자가 헐 만헌 말잉께요." "이거, 이거 야단났군."
혹 떼려다 혹 하나 더 붙인 격이 되자 임만수는 과장되게 두 팔을 내저었다.
"말 나온 짐에 한마디 더 혀야 쓰겄는디, 대장님이 몰라서 허는 소리제, 전라도말맹키로유식허 고 찰지고 맛나고 한시럽고 헌 말이 팔도에 워디 있습디여. 맞어, 어지께밤에 술자리서 소리 들 었제라? 그 소리 고런 것들이 다 들었는디, 워쩝디여? 알아묵겄습디여?"
"소리라니?"
임만수는 무슨 소리를 지껄여대는지 알아들을 수 없는 채로 떫은 입맛을 다시며 물었다.
"어허, 이 양반이 '소리'럴 듣고도 소리가 먼지도 몰르는갑네?" 대장님이란 말은 어느새 '
이 양반' 으로 바뀌어 있었고, 염상구는 어이없고 한심하다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분명 창가는 아니고, 무슨 소린지 알아들을 수 없었지만 소리는 소리였지." 임만수는 또떫은 입맛을 다셨다.
"긍께 고것이 먼고 허니..."
"아, 아, 그만하면 됐소. 그 얘기는 다음에 또 듣기로 하고 우리 얘기나 끝냅시다." 임만수는 염상구의 태도로 보아 그대로 두었다가는 이야기가 엉뚱한 방향으로 흘러갈 것 같았던것이다. 전라도, 참 이상스럽고 묘한 땅이었다. 딱히 꼬집어낼 수는 없는데, 사투리고 사람들이고 많이 색달랐다. 순천에 이삼 일 머물면서 그런 느낌을 어렴풋이 받았는데 염상구한테서 그 느낌은 좀더 확실해졌다. 무식한 주먹패의 '오야붕'으로만 취급했던 염상구 입에서무언가 아는 것 같은 소리가 그렇게 줄줄이 흘로나올 줄은 몰랐다. 어딘가 질기고 끈끈한냄새를 풍기는 사람들... 경찰에서 뼈가 굵은 임만수의 감각은 앞으로의 행동방향을 잡기 위해 나름대로 예민하게 우직이고 있었다.
"긍께, 대장님이 헌 말얼 놓고 가타부타 딱 뿌러지게 말을 허라 그것인디, 좋구만이라, 대장님이 시키는 대로 허긴 허겄소. 근디, 한 가지 조건이 있구만이라." 염상구는 표정과 자세를 고치며 다부지게 말했다. 임만수는 염상구의 눈만 똑바로 쳐다보고 있었다.
"딴 것이 아니라, 우리 청년단 권리에 속허는 일에는 토벌대가 무신 일이 있어도 손대지않겄다 고 먼첨 약조를 허시오."
말을 듣고 있는 임만수의 입 언저리에는 엷은 웃음이 번졌다.
"월권을 하지 말라 그 말인데, 좋소, 약속을 지키겠소." 청년단이라는 것이 하는 짓을 환히알고 있는 임만수로서는 애당초 관심 밖의 일이었고, 그들의 힘을 이용하려면 오히려 이쪽에서 그들의 행위를 비호해야 할 판이었다.
"부하들헌테도 명령을 내려줏씨요."
"물론이오."
"고맙구만이라."
"앞으로 잘해봅시다."
두 사람은 밥상을 사이에 두고 악수를 나누었다.
"이 해당분다!"
염상진은 차렷자세를 취하고 있는 강동식을 후려쳤다. 강동식은 비척비척하다가 곧 똑바로섰다.
그런데, 코에서 피가 주르르 흘러내렸다. 윗입술의 둔덕을 넘은 피는 꽉 다물린 두 입술사이로 번지느라고 잠시 그 흐름을 낮추었다가 이내 아래로 흘러내려서 뚝뚝 방울짓기 시작했다. 햇빛을 받아서 그런지 피는 눈이 부시도록 진하게 붉었다.
"하 동무, 이자를 끌어다가 저 나무에 묶으시오!"
염상진은 숨을 몰아쉬었다. 피를 보자 더 손이 올라가지 않았다. 그렇다고 피를 닦아주라고 할 수도 없었다. 하대치가 강동식을 대열의 뒤로 끌고가며 수건으로 코를 막아주고 있었다. 염상진은 하늘을 응시하고 서 있었다. 감정을 자제하려고 노력했다. 손찌검은 하지 말아야된다고 스스로에게 몇 번이나 말했다. 그건 나이의 고하간에 낮춤말을 해서는안되는 것과 함게 엄연한 당의 규율이었다. 그래서 강동식을 숯막으로 불러들이지 않은 것이다. 모두를 집합시켜놓은 앞에서 냉정하게 처벌을 하려고 했었다. 그런데 강동식을 보는 순간 걷잡을 수 없이 감정이 폭발하고 만 것이다. 그 감정은 명령불복종 때문에 일어난 것이 아니었다. 그건 생사가 어떻게 되었을지 모를 안창민에 대한 초조와 염려가 뒤바뀌어 표출된 것이었다.
피를 보자 염상진의 감정은 일순간에 싸늘하게 식어들었다. 동지의 피는 한 방울이라도소중한 것이었다. 그건 혁명의 원동력이었다. 피 한 방울, 한 방울은 굶주리며 핍박받으며생성시킨 생명의 원천이었다. 피를 흘리고 있는 동지에게 또 손찌검을 해서 더 많은 피를흘리게 할 권리는 자신에게 없었다. 이미 피를 흘리게 한 것도 반혁명적 행위였다.
산중의 정적은 기펑ㅆ다. 하늘빛만큼 맑고 투명한 새소리가 가끔 울렸다. 그러나 그 소리는정적을 깨는 것이 아니라 정적의 순도를 알리려는 것 같았다. 잎을 다 떨군 나목들은 하나같이 정물로 서서 정적의 무게를 더하고 있었다. 그들의 대열도 나무들처럼 정물이었다.
다만 하대치 혼자서 움직이고 있었다. 그는 참나무에다 강동식을 세우고 새끼줄로 묶고 있는 참이었다.
염상진은 안창민만을 생각하고 있었다. 그의 나약한 체구가 자꾸만 눈앞에 어른거렸다. 그를 노출시켰던 것이 또 후회로 씹혀졌다. 그거싱 부질없는 생각인 줄 알지만, 그 후회는 단순한 후회가 아니라 이번에 일으킨 혁명사업에 대한 미심쩍음과 연관된 문제였다. 아무리당중앙이 지하로 잠적해야 하는 상황이라 하더라도 이번 사업의 허망한 실패에 대해서는의문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제일 납득이 안되는 것이 당조직의 분열현상이었다. 각 도마다 지방당조직이 엄연한데 어찌하여 일제봉기가 이루어지지 않았는지 모를 일이었다. 당조직에 이상이 없다면, 그럼 이번 사업은 당중앙의 계획거사가 아니고 지엽적인 것이라는 결론밖에 나오지 않았다. 치밀하고 구체적인 사전계획없이 충동적이고 순간적으로 일으킨 사업이라면 그것은 얼마나 어리석고 반혁명적인 행위인가. 공산주의를 적으로 삼는 남한 단독정부가 수립된 마당에 부분적이고 산발ㅈ거으로 일으키는 사업은 힘의 소모만 자초하고상대적으로 적의 힘만 강화시키는 결과를 낳게 될 뿐이었다. 그런데, 사업확대지령은 엄연히 당으로부터 하달되지 않았던가. 다시 혼란의 미궁으로 빠져들지 않을 수 없었다. 가정은금물이었지만, 사태 전반을 놓고 가정을 한다면, 당의 그 지령은 여수, 순천 지구에서 사업을 일으킨 다음 뒤늦게 내려진 것으로 볼 수밖에 없었다. 이런 지극히 반당적인 회의적 추리를 하지 않으려고 했지만 실패를 의식할 때마다 머리를 드는 생각을 어찌 할 수가 없었다.
작업을 다 마친 하대치가 침통한 얼굴로 대열의 앞에 와 섰다. 다른 때 같았으면 우렁찬목소리로 보고를 하며 힘찬 거수경례를 붙였을 것이다.
"동무들, 다 같이 들으시오. 강동식 동무는 우리의 규율을 어기고 반혁명적 반당적 행위르저질 렀소. 그래서 강 동무는처벌을 받게 되었소. 강 동무는 앞으로 만 이틀 동안 저렇게묶여 있어야 하오. 물론 밥도 굶어야 하고 밤에도 풀어주지 않소. 끼니때마다 물만 한 사발씩 주겠소. 만약 그 누구든지 밥을 갖다주거나, 저 사내끼를 풀어주면 구 사람도 강 동무와 똑같은 처벌을 받게 된다 는 것을 명심하시오. 그리고, 강동식 동무는!" 염상진의어조가 갑자기 높아졌다. 강동식이 떨구 고 있던 고개를 번쩍 치켜들었다. "이틀 동안에걸쳐 자신의 반혁명적이며 반당적인 행위에 대해 서 냉정하고 철저하게 자아비판하도록하시오. 알겠소!" "알겄습니다, 대장님."
강동식은 있는 힘을 다해서 대답했다. 그는 대장의 처벌에 대해서 추호도 섭섭함이 없었다.
오히려 그 정도인 것을 감사하게 생각하고 있었다. 읍내가 뒤집힌 것이 자기 때문인지도모른다는 불안감에 쫓기며 오금재를 넘었고, 하대치에게 사건전말을 듣고 나서는 죽기를각오했던 것이다.
"그만 해산시키고, 하 동무는 내 방으로 오시오."
염상진은 대열을 등지고 돌아섰다. 쩌엉- 산 우는 소리가 둔중하게 울리며 긴 여운을 남겼다. 염상진은 그 소리를 따라 무심코 고개를 좌우로 돌렸다. 산, 산, 겹겹이 이어져나가고있는 산의 행렬, 그 끝이 아슴푸레하게 먼 하늘에 닿아있었다. 이상한 우수가 뭉클 가슴에괴어왔다. 나무에 묶인 강동식 탓이고 총상을 입고 혼자 버려진 안창민 때문이었다. 그러나,그것만으로 가슴에 괸 우수가 설명되지 않았다. 아내의 안부가 염려스러워 조직의 명령도어기고, 위험도 불사하고 행동한 강동식이 과연 나쁘기만 한 것인가 하는 자문이 무슨 앙금처럼 우수의 밑바닥을 이루고 있었다.
부모에 대해서, 자식에 대해서, 배우자에 대해서 마음이 쏠려가는 것은 가장 자연스러운현상인 것이다. 그러나 그런 감정만으로 인간의 삶이 살아지는 것이 아니다. 그건 인간의삶을 형성하는 기본조건이 될 수는 있어도 인간의 삶을 인간답게 건설할 수 있는 조건은 아니었다. 인간의 삶을 가장 비인간적으로 만든 악조건들을 척결해야 하는 마당에 그 기본조건에 대한 충족은 당분간 유보시켜야 한다. 그런 인내의 고통 없이 혁명의 성취는 얻을 수없고, 혁명의 성취없이는 그 기본조건마저 파괴되는 것이다. 가난과 굶주림에서 벗어날 수없는 노예적 삶속에서 부모나, 자식이나, 배우자나 모두 하나같이 노예일 뿐인 것이다.
염상진도 어머니를, 두 아이를, 아내를 생각하지 않는 것이 아니었다. 특히 두 아이는 그의 마음을 혼란스럽게 만드는 어찌할 수 없는 존재였다. 여덟 살 먹은 딸 덕순이의 깜찍함이나 여섯 살 먹은 아들 광조의 능청스러움은 언제나 그리움이었다. 그러나 당장의 그리움을 좇아 혁명을 지연시킬 수는 없는 일이었다. 그 아이들 한테서 노예적인 삶의 굴레를 하루라도 빨리 벗기기 위해서라도 혁명의 수행은 우선순위에 놓여야만 했다. 이 당위성을실천으로 옮기는 데 갈등이 따르게 되었다.
"하 동무 생각은 어떻소?"
염상진이 신중하게 물었고, 하대치는 말뜻을 잘 알아듣지 못하는 눈치였다.
"안 동무 말이오."
"야아, 무사허니 병원꺼지 당도혔기만 빌제..."
염상진은 눈을 내리감았다가 한참 만에 떴다. 자신은 우문을 한 것이고, 하대치는 현답을한 셈이었다.
"하 동무, 내가 읍내를 다녀오는 동안 여기를 잘 지키시오." "대장님 혼자서라?"
하대치가 금방 고개를 저었다.
"염려 마시오. 병원까지만 가는 것이니 혼자 가는 게 제일 안전할 것이오." "그려도 지가항꾼에 갔으면 싶은디요."
염상진은 벌떡 일어섰다. 하대치를 데리고 가고 싶은 마음을 떼치기 위함이었다. 그런 염상진의 서슬에 하대치는 더 입을 열지 못했다.
"내가 읍내에 간 것은 일체 비밀로 해두시오."
"알겄구만이라."
"먼저 나가시오. 난 준비를 해서 슬쩍 빠져나갈 테니까." "조심혀서 댕겨오시씨요."
하대치가 시무록한 표정으로 돌아서 나갔다. 염상진은 권총의 탄창을 빼서 총알을 확인했다. 그리고 배낭에서 단검을 꺼냈다.
김사용이 아들 범우가 순천경찰서로 넘겨진 사실을 알게 된 것은 점심을 가지고 가서였다.
"영감님 말씀대로 법대로 처리한 것이지요."
남인태는 김사용을 쳐다보지도 않고 말해버렸다. 깊은 주름이 팬 김사용의 볼이 푸들푸들 떨렸다. 꼿꼿하게 서서 남인태를 직시하고 있던 김사용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돌아섰다.
조금도 흐트러짐이 없는 조용한 몸놀림이었다.
"기분 나쁜 영감탱이 같으니라고..."
유리문을 옆으로 밀고 나가는 김사용의 뒷모습을 쏘아보며 남인태는 거칠게 내뱉았다. 무언가 불길한 느낌이 스쳐가며 기분이 확 상했다. 예상했던 순서가 완전히 빗나가버렸던 것이다. 계산착오였단 말인가? 자력으로 빼낼 자신이 있단 말인가? 만약 그렇게 되면 이 일을 어쩌지? 최 의원한테 연락을 취해야 하나? 남인태의 머리는 빙글빙글 돌기 시작했다.
당돌한 녀석, 그나마 경찰질도 못해먹을라고 누굴 상대로 장난질이야, 장난질이. 최익승만이 일을 해결할 수 있다고? 그래서 그 자를 찾아가라고? 그 동안 참을 만큼 참아냈다만 이제 더는 안되겠다. 어디보자. 김사용은 바쁜 걸음을 옮겨놓으며 마음을 다지고 있었다. 사태는 좌시할 수 없는 국면으로 치닫고 있었다. 재판을 받고 안 받고는 차후의 문제고 당장큰일은 아들이 순천경찰서에 갇힌 것이었다. 지방법원이 있는 순천경찰서는 사람 거칠게다루기로 소문이 나 있었다. 그런데 반란사건이 일어나 그 도는 더욱 심해졌을 것이고, 아들은 빨갱이로 지목되었을 것이니 사태는 시간을 다투도록 급박하게 되어 있었다. 시간을지체했다가는 억울한 매질을 면할 수 없게 될 것이었다.
김사용은 밥보자기를 들고 경찰서로 가면서, 오늘이나 내일쯤이면 풀려나겠지, 생각했던것이다.
아들 범우가 했다는 용공적 발언이 어떤 내용인지 알 수는 없으나, 시국이 시끌시끌한데옳은 소리라고 주장을 세우니까 겁을 주려고 며칠 가둬두는 것이려니 생각했었다. 처음에서장이 최익승 운운했을 때도 기분은 과히 좋지 않았지만, 그 말이 어떤 계산속에서 나온것이라고 악의로 해석하지 않았었다. 그런데 사태의 돌변을 당하고보니 모든 것이 계략적이었던 것이다.
"천 서방, 어디 있는가, 천 서방."
김사용은 대문을 들어서면서부터 목청을 돋우었다.
"아니, 머가 그리 다급허시오."
부인이 먼저 방문을 열고 나왔다.
"천 서방은 워디 있는가?"
"여, 여그 있구만요, 어르신."
천 서방이 고무신을 끌며 뒤란에서 황급하게 뛰어왔다.
"문중회의를 열 것이니 싸게싸게 연락해라. 바로바로 모이라고들혀." "야, 야, 핑 돌아오겄구만요."
천 서방이 부리나케 대문 밖으로 뛰어나갔다. 남편한테서 밥보자기를 받아든 순간 이씨부인은 아들의 신변에 이상이 생겼음을 직감했다. 밥보자기의 무게와 문중회의를 소집하는것과, 더 묻지 않아도 큰 일이 벌어진 것이 분명했다.
"범우를 순천으로 넘게뿌렀네."
김사용은 마당을 가로질러 가며 흘리듯 말했다. 워메, 으짤끄나, 하는 소리가 금방 터져나오려는 것을 이씨는 간신히 참아냈다. 가슴이 두근두근하기 시작했다. 그것이 예사 자식이아니었다. 막둥이로 세상에 나오긴 했지만 어쩌면 장자 노릇을 맡아야 될지 모를 김씨 집안의 대들보였다. 그런데 어쩌자고 그 험한 순천경찰서로 넘겼단 말인가. 이씨는 남편을 믿으면서도 가슴의 두근거림은 진정되지 않았다.
"교환, 여그 봉림이다. 그려, 인사 그만허고, 아조 급허고 급헌 일인께 딴 일 허지 말고 순천재판 소 바꿔라. 그려, 지급으로 혀."
남편의 목소리가 어느 때 없이 크고 급했다. 재판소로 직접 통하는 사람이 있다는 것에안심이 되는 것이 아니라, 남편의 크고 급한 목소리 때문에 이씨의 가슴은 더욱 심하게 두근거렸다.
"어무님, 그것 이리 주시씨요."
연제 옆에 왔는지 며느리가 밥보자기를 받으려 하고 있었다.
"아니다, 아녀. 요것은 나가 치울 것잉께 니넌, 니넌..." 이씨는 밥보자기를 감추듯 하며 뒷말을 잇지 못하다가 문득 문중회의를 한다는 것을 떠올리고는, "그려, 곧 문중회의럴 열 것잉께 니넌 단출허니 술상이나 봐라" 하고 얼버무려 넘겼다.
"갑작스럽게 무신 문중회의럴..."
며느리는 의아스런 표정을 지었다.
"그럴 일이 있능갑다. 천 서방이 한참 발바닥에 불나게 돌고 있을 것잉께 싸게싸게 채비혀라." 며느리는 더 이상 이상하게 여기지 않고 돌아섰다. 이씨는 후우 한숨을 내쉬었다. 어차피 알게 될 일이었지만 지금 당장 며느리에게 알려서는 안될 것 같았던 것이다. 태중의며느리에게 좋을 리 없는 일이었다.
이씨는 밥보자기를 든채 마당 가운데 화단 옆을 서성이고 있었다. 키작은 가을 꽃 몇 송이가 춥게 피어 있었다. 이씨는 언제부터인지 관세음보살, 관세음보살을 연달아 염송하고 있었다. 그 소리는 입술 밖으로는 새나오지 않았다.
"아, 여보시오, 그려, 순천 나왔어?"
이씨는 반사적으로 방 쪽으로 돌아섰다. 남편은 야속하게도 이런 중대한 일이 생겼을 때옆에 있는 것을 딱 싫어했다. 별나고 묘한 성미였다. 그래서 무슨 큰일이 생기면 이씨는 가슴이 더 두근거리는지 몰랐다.
"여보시오, 순천재판소요? 정재남 판자 좀 바꿔주시오. 여기, 벌교 김사용이라는 사람이요.
예에, 기둘리지요."
이씨는 탄식처럼 "나무관세음보살" 하고 뇌었다. 찾는 사람이 없을까봐서 조마조마하던참이었다.
"아, 정 판사신가? 그저 그만허게 지내네. 공무에 바쁜디 요약해서 말허겄네. 그런께, 우리범우 가 이번 사태에 대해서 어떤 높은 양반헌테 몇 마디 헌 모양인디, 그 말이 용공적이다 해서 여기 유치장에 며칠을 가뒀는디, 그것으로 풀릴 줄 알고 기다리다봉께 오늘 오전에 순천으로 이첩을 해부렀단 말이시. 보나마나 조서에는 빨개이라고 썼을 것인디, 우리 범우가 어디 빨갱이질헐 놈 인가. 우선 그놈이 몸상허지 않게 조처해주시고, 나가 내일순천으로 넘어갈라네. 아녀, 아녀, 가 봐야제. 그 내용을 전화로 다 말헐 수가 없네. 어이,부탁허네." 이씨는 그제서야 다소 안정을 찾을 수 있었다. 저렇게 전화로 될 일인데 문중회의는 왜 하는지 알 수 없었다. 남편이 하는 일은 항상 먼저 알려고 하지 말고 일이 되어가는 것을 기다려야 했다.
"댕겨왔구만이라."
천 서방이 숨을 헐떡이며 들어왔다.
"다들 기시든가?"
"야아, 두 분 어르신네만 못 뵙고 네 분은 뵈었구만요." "애썼네. 가서 술 잠 받아오소."
"야아, 받아와야제라."
천 서방이 벙긋 웃고 돌아섰다. 제 몫이 생기게 마련이므로 신바람이 나는 것이었다. 이씨는 밥보자기를 부엌으로 가지고 갈 수가 없어서 마루로 올라섰다. 조심스럽게 방문을 열었다. 남편은 긴 담뱃대만 빨고 있을 뿐 이쪽은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경철이 어멈헌테는 알리는 것이 덜 좋을 성불러 안직 말얼 안혔구만이라." 밥보자기를 방으로 가지고 들어온 이유 설명인 셈이었다.
"잘했네."
이씨는 남편이 더 말을 하지 않을 것을 아는 탓에 곧 방을 나왔다.
술상 끝손질을 해야 했다.
문중회의를 구성하는 사람들은 하나같이 바쁜 걸음으로 모여들었다. 그런 그들의 태도를먼발치에서 볼 때마다 이씨는 자신이 대접을 받는것처럼 기분이 흐뭇해졌다. 남편이 종손이라서 그렇게 되는 것이 아니라 싶었다. 남편이 지니고 있는 한결같은 엄격함과 위엄이그들을 다스리는 힘인 듯싶었다.
이씨는 술상을 들여놓고 나왔다. 마음 같아서는 마루에 지키고 앉아 회의내용을 엿듣고 싶었지만 그럴 수는 없었다. 문중회의 때는 아무도 얼씬거리지 못하게 되어 있었다. 그리고,마루 끝에 앉아 있는다 해도 엿들을 수도 없었다. 마루가 넓은데다가 문중회의 때 주고받는 말은 그저 조용조용한 목소리들이었다. 어느 때 한 번이라도 문중회의 내용을 엿들으려고 한 적이 없으면서도 오늘따라 불현 듯 그런 마음이 고개를 드는 것은, 오늘 회의가 십중팔구 아들 문제로 열리는 것이기 때문이었다. 이씨는 평생을 길들여져온 대로, 미리 알려고하지 말고 일이 되어가는 것을 보고 알자고 마음을 다독이며 부엌으로 발길을 옮겨놓았다.
토방에 내리는 햇살은 미지근했다. 그러나 토방은 불기 없는 방보다는 더 따스했다. 길남이와 종남이는 옹송그리고 앉아서 해바라기를 하고 있었다. 길남이는 나무 실가지로 토방에다 무언가를 자꾸 그리고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그림도 글씨도 아니었다. 무수하게 엇갈리기도 하고 뒤엉키기도 하는 의미 모를 선들을 그리고 있었다. 그렇다고 무료해서 하는 손장난도 아니었다. 길남이의 가슴에는 슬픔이 가득 괴어 있었다. 그 슬픔이 금방이라도 눈물로 줄줄이 흘러내릴 것만 같았다.
동생앞에서 눈물을 보여서는 안된다고 입술을 물었고, 그래도 자꾸만 목이 메어 언제부턴가 땅바닥에 줄을 그어대기 시작한 것이다.
"서엉, 나 배고픈디..."
종남이가 입술가지 길게 흘러내린 누런 코를 훌쩍 들이마시며 형을 흔들었다. 길남이는 동생에게로 더디게 고개를 돌렸다.
"코 풀어."
종남이의 윗입술 중간쯤에 코가 흘러내리고 있었다.
"나 배고프당께."
종남이의지저분한 얼굴이 울상이 되었다. 마른버짐이 핀 깡마른 얼굴이 몹시도 추워보였다.
"더러운께 코부텀 풀어."
길남이의 목소리가 조금 억세졌다.
"코 풀먼 밥 줄랑가?"
종남이가 한가닥 기대에 찬 눈빛으로 말했다. 밥은 밥이고, 코 푸는 것은 코 푸는 것이여, 하는 말이 곧 튀어나오려는 것을 길남이는 꾹 참았다. 그 말을 하면 동생이 그만 아앙울고 말 것 같아서였다. 동생이 불쌍했고, 불쌍한 동생을 울리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나 코 풀 것잉께 밥 줘야 써."
종남이는 이렇게 다짐을 하고는 토방을 내려서 팅 코를 풀어 던졌다. 누런 콧덩이가 조만치 떨어졌다. 종남이는 소매 끝으로 코를 썩썩 문질러 닦았다. 소매 끝부분은 말라붙은 콧물로 번들번들 윤이 났다.
"나 쿠 풀었응께 얼렁 밥 주소."
길남이는 앞에 선 동생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자기도 속이 쓰리도록 배가 고픈데 동생은 말할 수도 없을 것이었다. 그러나 집에는 먹을 것이 아무것도 없었다. 함지박에 남아있던 고구마 세 개는 아침에 삶아서 똑같이 한 개 반씩 나눠 먹어버렸다.
"종남아, 엄니는 아칙밥도 안 묵었다."
길남이는 힘들게 이 말을 했다. 그러자 동생의 코끝이 벌름거리고 입술이 씰룩이더니 아앙 울음을 터뜨렸다. 동생은 어머니 생각이 나서 우는 것이 아니라 배를 채울 수 없게 되어 우는 것이었다. 길남이는 동생을 달랠 생각을 하지 않았다. 모르는 체 내버려두면 울다가 제물에 지쳐 그칠 것이다. 그리고 찬물이나 한 바가지 마시고 기둥에 기대 졸음졸음 졸것이다. 끼니를 굶을 때는 언제나 그래왔다.
"성, 외갓집에 가자."
어느새 울음을 그친 종남이가 바짝 다가서며 말했다. 눈물 흘러내린 자국이 두 볼에 그어진 동생의 얼굴은 화가 난 것같이 보였다.
"외갓집은 머 헐라고 가."
길남이는 느리게 고개를 저었다. 외갓집도 자주 갈 데가 못되었다. 외할머니말고는 반가워하는 사람이 없었다. 특히 외사촌동생들은, 왜 우리 밥 뺏어먹으러 왔느냐고 대들기도 했다.
"아칙에 엄니가 잽혀감스로 외갓집에 가라고 안 그러등가." 종남이는 빽빽 소리치며 대들듯했다. 길남이는 하마터면 동생의 따귀를 후려칠 뻔했다. 어머니가 '잡혀갔다'는 말을 듣는 순간 주먹이 불끈 쥐어졌던 것이다. 그러나, 동상 잘 델고 있어야 써, 하는 어머니의목소리가 어디선지 들려와 스르르 주먹을 풀고 말았다.
"그려, 엄니가 금세 올란지도 모른께 쪼깐 더 있다가 가자." 길남이는 동생을 달랬다.
"글먼 걸어, 걸어."
종남이는 금방 밝은 얼굴이 되어 새끼 손가락을 길남이의 코 앞에다 디밀었다. 길남이는더디게 손을 올려 새끼손가락으로 동생의 새끼손가락을 걸었다. 동생은 신나게 손을 흔들어댔다. 길남이는 가슴이 먹먹해지는 슬픔과 함께 쏟아질 것 같은 눈물을 꿀떡꿀떡 삼키고있었다. 왜 우리는 가난하고, 왜 아버지는 도망을 다니고, 왜 어머니는 잡혀가고 두들겨맞고해야 하는지, 눈치하는 외갓집에 갈 약속을 하자 그런 슬픈 생각들이 한꺼번에 몰아닥쳤던것이다.
길남이는 눈물을 참아내려고 하늘을 쳐다보았다. 맑은 하늘 귀퉁이로 똘감나무 잔가지들이 박혀 있었다. 가지에는 잎이 하나도 붙어 있지 않았다. 물론 감이 달려 있을 리 없다. 풋감 때 다 따먹어버렸던 것이다. 지금이 봄이었으면 좋았을 것을... 얼른 스쳐간 생각이었다. 길남이는 쓸쓸하게 웃었다. 뚤감나무는 봄부터 여름까지 동생과 자기에게 심심찮은 요깃거리를 대주었다. 아침에 일어나면 똘감나무 아래는 종 모양 같기도 하고 도라지꽃 모양같기도 한 작은 감꽃들이 촘촘히 떨어져 있고는 했다. 그 감꽃들을 하나하나 주워 대바구니에 담았다. 대바구니에 수북히 담긴 감꽃은 언제 보아도 좋았다. 어쩌면 먹을 수 있는 것이어서 그런지도 몰랐다. 초록빛 꼭지를 따내고 감꽃을 입에 넣어 씹으면 처음에는 약간떫은 맛이 나다가 차츰 달착지근한 맛이 입안을 채웠다.
감꽃은 하나하나 먹는 것보다 한꺼번에 입안 가득 넣고 씹어야 제맛이 났다. 부잣집 가시네들은 감꽃을 실에 꿰어 두 번 세 번 감기는 목걸이를 만들고, 사내애들은 그까짓 것을무슨 맛으로 먹느냐고 핀잔이지만 그건 다 부잣집 애들이 하는 수작이고, 가난한 애들은 너나없이 감꽃을 맛있는 꽃으로 여기고 있었다. 감꽃만이 먹는 꽃이 아니었다. 진달래꽃도 먺었고, 아카시아꽃도 먹었다.
"서엉, 나 배고파 죽겄어. 얼렁 외갓집 가자."
종남이가 졸음이 찬 듯한 눈을 반나마 뜨곤 칭얼대듯이 말했다.
"엄니가 올란지 모른께 찬물 한 그럭 떠다 묵고 우리 쪼깐만 더 기둘리자." 길남이는 더대꾸하고 싶지 않았다. 말할 기운도 없었다. 외갓집에는 가고 싶지도 않았지만 어머니 때문에 갈 수도 없었다. 어머니가 곧 돌아오리라고 생각하진 않았지만 그래도 해가 기웃할 때까지는 기다려봐야 될 것 같았다. 어머니는 지금쯤 어쩌고 있는지, 어머니를 생각하면 금방눈물이 쏟아질 것 같고, 공산당을 하는 아버지가 더없이 원망스럽기만 해다. 뒷집 칠성이아버지처럼 가난해도 공산당을 안하면 얼마나 좋으랴 싶었다. 그러면 아버지와 함게 살 수도 있고, 할아버지도 돌아가시지 않았을 것이고, 어머니도 자꾸 잡혀가지 않아도 되고, 자기와 동생이 이렇게 배가 고프지도 않을 것이었다. 칠성이네는 가난하긴 해도 밥때를 굶고넘기지는 않았다. 죽을 먹어도 먹었다. 칠성이네는 아버지가 함게 살아서 그러는 것이었다. 칠성이와 동갑이면서 팔씨름이나 달리기에 지는 것도 다 그 탓이었다.
아침에 학교를 갔다가 교문 앞에서 되돌아왔다. 지난번처럼 경찰들이 쓴다는 것이었다.
행여나 어머니를 만날 수 있을까 해서 오랫동안 담을 따라 배돌았지만 소용이 없었다. 눈물을 삼키고 또 삼키며 집으로 돌아올 수 밖에 없었다. 엄니는 을매나 무섭고 겁날까... 그생각만이 머릿속을 채우고 있었다. 자신은 끌려간 것도 아니고 매를 맞는 것도 아닌데 총구멍만 보고도 얼마나 무서웠던가. 총구멍이 그렇게 무서운 것인 줄은 몰랐었다. 아침에 놀라잠이 깼을 때 총구멍이 바로 눈앞에 있었다. 그 동그란 구멍에서 금방 총알이 튀어나와 자신을 죽일 것만 같았다. 너무 무서워 어머니가 잡혀가는데도 꼼짝을 하지 못하고 그대로앉아 있기만 했었다. 사람들은 다 가버렸는데도 총구멍은 언제까지나 그 자리에 그대로있었다. 눈을 감아도 총구멍은 보였고, 변소를 가도 총구멍은 그만큼의 거리를 두고 따라왔다.
"성, 참말로 배고파 죽겄어. 얼렁 외갓집에 가자."
"그려, 가야제."
길남이는 천천히 일어났다. 다시 주저앉고 싶도록 기운이 없었다. 동생은 더 기운이 없을것이다.
동생이니까. 길남이는 동생이 가엾고 불쌍했다.
"기운채려야 써, 외갓집이 먼께."
길남이는 동생의 손을 잡았다.
둘이의 키보다 두 배쯤 긴 그림자가 그들보다 먼저 사립문을 나서고 있었다.